金起炫 國民의힘 院內代表(蔚山 南區乙·4線)는 唯獨 野黨과 因緣이 깊다. 그는 노무현 政府 1年次이던 2003年 한나라黨(現 國民의힘) 副代辯人으로 政界에 入門했다. 처음 國會議員이 된 時期도 2004年, 그러니까 保守가 野黨일 때다.
그의 父親도 野黨(民主黨) 所屬으로 1960年 12月 慶南道議員에 當選됐다. 그러면서 이듬해 5·16 軍事政變이 勃發해 道議會가 解散되면서 5個月 만에 職을 잃었다. 金 院內代表는 지난해 7月 記者에게 “아버지는 軍事政權 時節 내내 反獨裁 鬪爭을 했다”며 “野黨의 길을 繼續 걸었으니 그 뒤엔 出馬를 못 하셨다”고 말했다.
父親의 遺傳子 때문인지 그에게도 透寫 氣質이 있다. 이른바 靑瓦臺의 蔚山市長 選擧 介入 疑惑으로 落選한 뒤에는 自然스레 ‘飯(反)政府 透寫’가 됐다. 2019年 9月에는 祖國 法務部 長官 任命에 反撥하는 表示로 削髮 鬪爭을 했다. 지난해 4月 院內代表로 就任하면서 내건 일성은 “목숨 걸고 앞장서서 싸울 것은 싸우고 지킬 것은 지키겠다”였다. 實際 就任 後에는 言論仲裁法과 高位公職者犯罪搜査處(公搜處) 反對 鬪爭을 펼쳤다. 大選 勝利에 寄與한 基準을 지난해 上半期까지로 넓히면 그는 斷然 1等 功臣이다.
그는 大選 過程에서 尹錫悅 大統領 當選因果 李俊錫 代表 사이의 葛藤을 仲裁했다. 國民의힘 關係者는 “金 院內代表는 仲裁의 鬼才”라고 好評했다. 尹錫悅 政府 첫 執權黨 院內司令塔度 仲裁 能力이 要求되는 자리다. 次期 總選 前까지는 國會 地形이 與小野大다. 그는 野黨과의 協治를 成功的으로 끌어내야 한다. 與黨 院內代表로도 成果를 보이면 그는 富·蔚·警(釜山·蔚山·慶南) 盟主의 位相을 갖게 될 展望이다.
● 1959年 蔚山
● 부산동고, 서울대 法科大學
*‘尹錫悅 파워 엘리트 263人’ 全體 記事는 ‘신동아’ 4月號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