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査頓이던 三星·LG 創業株價 등 돌린 事緣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新東亞

査頓이던 三星·LG 創業株價 등 돌린 事緣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還甲의 湖巖은 왜 電子事業에 뛰어 들었나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4-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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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製 分解 뒤 寫眞 찍어 設計圖 그리며…

    • TV를 馬糞紙로 包裝해 팔던 時節

    • 時計 修理工을 비디오 技術者로 쓰다

    • 事業家의 世界에서는 家族보다 市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오른쪽)와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가 1983년 11월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 호암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이병철 삼성그룹 創業主(오른쪽)와 스티브 잡스 애플 創業主가 1983年 11月 서울 中區 태평로 三星本館 湖巖 執務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三星電子 提供]

    삼성전자에서 綜合技術院長, 戰略企劃室 新事業팀長, 最高技術責任者(CTO)를 歷任한 임형규 前 社長은 半導體 技術 開發의 산 證人이다. 그가 삼성전자에 들어가 半導體 開發에 參與하게 된 初期 狀況을 듣다 보면 當時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의 말이다.

    “서울大 工大 4學年이던 1975年 가을 學科 揭示板에 ‘韓國 半導體’라는 會社에서 두 名을 選拔해 韓國科學院(1981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統合돼 현재 韓國科學技術員(KAIST)李 된다)과 算學 連繫로 就業과 碩士 工夫, 兵役特例까지 提供한다는 公告文이 붙었습니다.

    京畿 富川에 있는 工場 見學을 시켜준다고 해서 가봤는데 外觀도 깨끗하고 構內食堂  飮食도 깔끔했습니다. 앞으로 半導體가 有望할 것이고 三星에서 最近 이 會社를 引受해 人力을 育成하려 한다는 說明도 있었습니다. 條件이 워낙 좋다 보니 競爭率이 매우 높았는데 多幸히 合格해 이듬해 1月  韓國半導體 入社와 한국과학원 碩士課程 進學을 同時에 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짚고 싶은 것은 當時 힌국科學院은 朴正熙 大統領 指示로 설립 3年째를 맞고 있었는데 美國에서 尖端技術을 工夫하고 돌아온 30代, 40臺가 敎授로 招聘돼 最尖端 産業技術을 가르치는 특별한 大學院이었다는 點입니다. 最高의 敎授陣과 實驗 施設로 將次 韓國 産業技術을 끌고 갈 엘리트 養成을 위해 國家가 나선 거였지요. 또 當時 唯一하게 兵役特例 惠澤을 주는 大學院이었으니 朴正熙 政府가 얼마나 科學技術 人材 養成에 에너지를 集中하고 있는지를 自然스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入學生 全員이 國費 或은 企業 奬學生이었고 寄宿舍 生活을 했습니다.”

    當時는 維新 反對 運動이 한창이던 時節이라 朴正熙 政權에 對한 反感도 컸지만 그는 韓國科學院에서 熱誠的으로 後進들을 養成하던 敎授들 德分에 愛國心이 생겼다고 했다.



    “半導體를 가르치시던 김충기 敎授님은 韓國 半導體 歷史에서 잊어서는 안 될 人物입니다. 美國 尖端 半導體 會社 페어차일드사에서 이미지 센서 半導體를 硏究 開發하다가 政府의 科學技術者 招聘으로 30代 後半 젊은 나이에 歸國했는데 첨단 半導體 開發 理論과 實務에 밝았고 明快한 講義로 有名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硏究 開發者들의 姿勢에서부터 나라 사랑하는 마음까지 심어주어 저를 비롯한 젊은 學生들에게 큰 影響을 주었습니다. 學生들은 金 敎授로부터 半導體 設計, 公正 知識을 빠르게 習得했고  實驗室에 수입된 裝備를 設置하고 半導體 클린룸 建設 現場 經驗까지 했습니다.”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林 前 社長이 大學院 碩士課程을 卒業했을 때 이미 會社 이름이 三星半導體㈜로 바뀌어 있었다고 했다.

    “주된 生産品은 손목時計用 칩이었고 當時 電子製品에 廣範圍하게  쓰이던 汎用 트랜지스터를 自體 開發해 막 生産에 着手한 狀態였습니다. 저는 黑白TV에 쓰는 ‘소리 增幅器(Sound Amplifier)’ 開發을 맡았는데 自體 技術이 없다 보니 日本 製品을 모두 分解한 뒤 寫眞을 찍어 設計圖를 그리고 部品을 만들어 逆으로 組立하는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方式을 썼습니다. 回路 設計부터 製作 工程까지 모두 혼자 解決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着手 10個月 만에 頂上 作動하는 칩을 얻었는데 우리나라 最初로 自體開發한 집적회로여서 한동안 삼성전자 亦是博物館에 展示되던 記憶이 납니다.

    다음으로 맡은 프로젝트가 會社 主力 生産品 中 하나였던 CMOS通信用 칩이었는데 收率이 제로여서 生産이 중단된 狀態인데 原因을 찾으라는 거였습니다. 結論은 輸入한 原資材 마스크 自體의 不良이라는 매우 기초적인 問題였는데 技術 水準이 瘠薄하다보니 아무도 몰랐습니다. 우리 水準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보여주는 事故였지요. 이후 輸入되는 마스크나 웨이퍼는 適切한 檢事 規定을 만드는 것으로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습니다.

    以後 半導體 製造와 關聯한 檢査 設備 導入 檢證, 새로운 素子 및 工程技術 開發에 本格的으로 뛰어들었는데 當時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 PC를 막 내놓던 時期여서 새롭게 胎動해 급속하게 成長하던 分野가 CPU, Memory 칩 製品 開發이었습니다.

    인텔의 4bit MPU인 80시리즈가 나오고 4K SRAM, 16K DRAM이 出現하고 있었는데 美國 出張 中에 購買한 4K SRAM을 앞서 言及한 ‘리버스 엔지니어링’ 方式으로 設計하고 必要한 工程開發에 着手했는데 사내에서는 뚜렷한 顧客도 없는 메모리 技術開發을 뭐 때문에 하느냐는 憂慮가 많았습니다.

    저는 곧 海外 留學길에 오르게 되면서 後續 開發은 후배들이 맡았는데 美國 留學 後에도 이 프로젝트의 불확실한 未來가 한참 동안 맘에 걸린 記憶이 있습니다. 그런데 留學을 떠난 후 1年 半이 지난 1983년 初 湖巖 이병철 會長이 메모리 半導體 進出을 선언해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勿論 이러한 큰 轉換을 豫測하고 했던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結果的으로 메모리 技術을 豫習한  셈이 돼 自矜心을 가졌던 記憶이 있습니다.”

    半導體 以前에 알아야 할 電子産業 進出史

    삼성전자 내 部署로 吸收된 半導體 事業部는 以後 다시 看板을 바꾸게 된다. 1982年 10月 三星이 ‘韓國電子通信’을 吸收하면서 ‘三星半導體通信’李 된 것. ‘이番에야말로 眞짜 半導體를 만들겠다’는 湖巖의 決心이 서고 나서였다.

    以後 半導體 事業은 6年 뒤 李健熙 會長이 就任한 直後인 1988年 11月 삼성전자로 다시 吸收됐고 三星電子는 가전, 情報通信, 半導體 等 3個 事業 部門을 거느리는 巨人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여기서 暫時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다름 아닌 三星의 電子産業 進出과 關聯된 內容이다. 알려졌다시피 三星의 뿌리는 日帝强占期이던 1938年 3月 1日 大邱에서 設立된 三星上廻다. 創業主 湖巖은 6·25戰爭 以後 三星物産, 第一製糖, 제일모직을 세웠고 韓國흥업은행(現 우리銀行), 안국화재(現 삼성화재)를 引受했다.

    湖巖은 여기에 滿足하지 않았다. 電子産業이라는 前人未踏의 길을 擇했을 때 湖巖의 나이는 還甲을 앞두고 있었다. 統計廳 資料에 따르면 1970年 韓國 男子들의 平均 壽命은 58.7歲였다. 大韓民國 最高 甲富로서 이미 이룩한 富(富)를 누리고 살아도 充分한 때에 湖巖은 새로운 事業을 始作했다. 以後 半導體 事業도 마찬가지였다. 湖巖의 目的은 돈이 아니었기에 可能한 것이었다. 그의 生涯는 企業家 精神의 決定版이 아닐 수 없다.

    筆者가 三星의 半導體 進出 過程을 紹介하기에 앞서 三星이 電子産業 自體를 始作하게 된 背景을 言及하려는 理由는 그것이 뿌리에 該當하기 때문이다.

    湖巖에게 電子産業 進出은 1段階 消費財 産業을 卒業하고 2段階인 産業化로 進入하는 一生一大의 決斷이었다. ‘湖巖自轉’에는 當時 苦悶의 一端이 이렇게 드러나 있다.

    “戰後(戰後) 日本 經濟 復興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雪糖이나 纖維 等 輕工業에서 出發해 차츰 制約, 機械, 製鐵 等으로 産業 改編의 기틀이 잡혀갔다. 그나마 낡은 舊式 設備였는데 韓國動亂을 契機로 飛躍的인 發展을 이룩할 수 있었다.

    1960年代 後半의 電子 産業을 보면 龜尾를 追跡한 日本에서는 그 開化期를 맞고 있었고 臺灣은 바야흐로 그 導入을 서두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손을 댄 企業이 있었으나 外製 部品을 導入해 組立하는 初步的 段階였고 뚜렷한 長期的 비전이 없는 實情이었다.

    品質도 粗惡했고 價格도 엄청나게 비쌌다. 흑백텔레비전 값도 웬만한 俸給生活者들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싼 水準이었다. 技術革新과 大量生産에 依한 電子製品 大衆化는 遙遠했다.”

    湖巖의 말대로 1970年代 初 韓國의 電子産業은 라디오 産業이 主流였던 後進國 中에서도 後進國 水準이었다. 그런 狀況에서 三星을 비롯해 韓國의 企業들이 大擧 電子 事業에 進出하게 된 것은 朴正熙 政府가 羅針盤 役割을 한 德分이다.

    朴正熙 大統領은 1960年代 中後半 大韓民國을 살릴 未來 먹거리 産業으로 電子産業 振興策을 本格化하면서 各種 稅制惠澤과 行政 支援을 해주고 大企業에 電子産業 參與를 勸誘했다. 韓國 財閥의 成長史가 但只 스스로 잘 나서 只今처럼 일어선 것이 아니라 國民에게 빚진 바가 많다는 것을 다시 한 番 확인시키는 대목이다. 여기에 對해서는 後述할 機會가 있을 것이다.

    “TV 部品 하나 만들 수 있는 게 없었다”

    湖巖은 電子産業이야말로 技術, 勞動力, 附加價値, 內需와 輸出 等 여러모로 韓國에 必要한 事業이라는 감(感)을 가졌다. 그의 벤치마킹 對象은 앞서 湖巖自轉에도 言及돼 있지만 日本이었다. 그 時節에도 世界 電子産業은 宇宙開發과 軍事技術 分野에서의 絶對的 優位를 바탕으로 美國이 主導했다. 그런데 日本이 果敢하게 進出하면서 不過 10餘年 만에 美國과 겨루는 技術 水準을 이루고 있었다. 日本이 하는데 우리가 못하랴, 湖巖은 傲氣가 發動했다.

    三星은 三星物産에 開發部를 設置하고 電子會社 設立 作業에 들어갔다. 아무리 未來 産業에 對한 感이 오고 政府가 支援해준다고 해도 只今까지 하지 않던 새로운 事業에 進出하는 것은 마음만 먹는다고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없었다.

    湖巖의 長男 고(故) 이맹희 氏의 冊 ‘묻어둔 이야기’에는 當時 三星電子 設立 初期 狀況이 잘 記錄돼 있다. 그의 回顧다.

    “아버지 決定대로 一旦 電子 産業을 始作하기로 했지만 進行過程은 퍽 漠漠했다. 當時에는 半導體(IC)가 아니라 眞空管을 使用하는 텔레비전을 만들 때였는데 眞空管은커녕 TV 部品 하나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없었다. 甚至於 組立을 마친 TV를 包裝할 스티로폼조차 없어서 馬糞紙로 箱子를 만들어 내보냈을 程度였다.

    大韓民國 産業界 全體가 電子 産業을 해본 적이 없으니 어디서 사람을 求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于先 三星 系列社에 있는 電子 關聯 職種에 勤務하는 사람들을 全部 불러 모았지만 그 亦是 어거지로 했던 일이었다.”

    當時만 해도 삼성그룹 안에서 機械를 만져본 거의 唯一한 職群은 放送局 카메라맨이었다고 한다. 다시 이맹희 氏의 말이다.

    “내 記憶엔 동양방송에서 온 사람들이 第一 많았던 것 같다. 그中에는 放送局에서 카메라를 만지다가 온 사람도 있고 錄畫 機械를 만지다가 느닷없이 發令을 받아 온 사람들도 있었다. 只今 생각해보면 엉터리 같은 일이었지만 當時로서는 第一 正確한 人員 需給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後날 三星이 國內 처음으로 비디오를 만들기 始作했을 때에는 時計 修理工들을 불러 모아 始作했다. 時計 修理工이라면 그래도 精密 機械를 만지는 사람들이니 비디오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判斷 때문이었다. 하지만 到底히 不可能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다시 그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時節이었으니 TV 만드는 일에 放送局 技術者들을 불렀던 것은 나름대로 合理的인 判斷에 따른 거였다.”

    느닷없이 電子産業 한답시고 뛰어든 會社

    사람을 求하는 일도 이렇게 荒唐하게 始作됐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이맹희 氏의 말이다.

    “어쨌든 사람들을 모으고 企業은 設立했는데 이番엔 當場 할 일이 없다는 妙한 狀況에 부딪혔다. 그동안 對外的으로는 美國으로 뛰어가고 日本으로 技術 傳授를 위해서 뛰어다녔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先進國 大型 電子 會社들과 合作만 하면 모든 것이 다 解決되는 줄 알았다. (…) 結局 日本의 山腰와 NEC, 美國의 코닝 글라스와 合作을 하게 되었다. NEC에서는 眞空管 技術을 傳해주기로 했고 第一 重要한 部品인 브라운管은 美國의 코닝 글라스와 合作 生産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合作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진 않았다. 美國의 코닝 글라스를 찾아가니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제니스나 洗濯機 等으로 有名한 월풀도 마찬가지였다. 三星은 그들과 合作을 할 만한 技術이나 與件이 全혀 되지 않았다.

    그들은 硏究員만 2萬餘 名을 두고 運營하던 企業들이었고 三星은 느닷없이 電子産業을 始作한답시고 放送局에서 사람을 데려다 TV를 만들려고 생각하던 會社였다. (…) 山腰는 1年 남짓 손잡고 일하다가 아버지와 親分이 있던 이우에 社長이 죽은 後 거리가 생겨서 곧 헤어졌다. 山腰로부터 技術을 傳受받은 것은 別로 없고 다만 山요가 人件費 싼 韓國에서 스피커, 트랜스포머를 비롯해서 모두 4가지의 製品을 만들어 가지고 간 程度였다.”

    그의 證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새로운 事業에 對한 豫測이 마치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듯 맞아 떨어진 게 아니라 대단히 어렵고 힘든 選擇이었다는 點이다. 이것은 日本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結果的으로 몇 年 뒤 사라지고 만 眞空管에 對해 最高 技術力을 자랑하고 있던 日本 先進企業조차 向後 數十 年間 眞空管 時代가 이어지리라는 잘못된 判斷을 하고 있던 것이다. 다시 이맹희 氏의 말이다.

    “그때는 只今과 같은 IC時代가 到來하기 直前이었다. 하지만 國內에서는 곧 닥쳐올 IC에 對해서 아무도 斟酌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眞空管의 크기가 漸漸 더 작아지고 受像機 한 臺마다 必要한 眞空管의 數字가 漸次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NEC側도 마찬가지였다. 會社 關係者들은 ‘現在 眞空管은 앞으로 數十 年間 發展을 하면서 永遠히 利用될 것입니다. 只今 眞空管 工場이 그리 많질 않은데 現在 韓國의 與件이 眞空管 生産에 퍽 좋습니다. 아마 앞으로 아시아圈에서는 唯一하게 韓國에서 眞空管을 만들어서 輸出하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컬러텔레비전 眞空管은 언젠가 3個로 줄어들 것이고 그 狀態는 永遠히 갈 것이며 이미 팔린 製品의 眞空管이 破損되면 새로운 것이 必要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三星에서 眞空管 生産 工場을 세우면 앞으로 相當 期間 많은 利得을 볼 것이라고도 했다.”

    結果的으로 이 豫測은 正確하게(?) 빗나갔다. 向後 歷史가 證言하고 있다시피 眞空管은 그 後 不過 3年 만에 完全히 사라졌다. 當時 三星도 NEC의 豫測을 받아들여 眞空管 生産 機械를 輸入했다가 狼狽를 보았다. 日本에서 中古 機械를 輸入하는 것이 禁止돼 있어 政府 要路에 ‘기름(筆者 株-賂物을 의미하는 듯)’을 치면서까지 NEC가 使用하던 眞空管 生産 機械를 輸入, 設置했지만 곧 쓸모없는 機械가 돼버렸다고 이맹희 氏는 씁쓸해했다.

    三星山腰電氣의 誕生

    1972년 삼성산요전기 사업장 전경. [삼성전자 제공]

    1972年 三星山腰電氣 事業長 前景. [三星電子 提供]

    1969년 5월 일본 산요전기로 떠나는 기술연수생 결단식 모습. 아래 왼쪽은 산요전기 오사카 공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연수생들. 오른쪽은 일본에서의 연수 모습. [삼성전자 제공]

    1969年 5月 日本 山腰電氣로 떠나는 技術硏修生 結團式 모습. 아래 왼쪽은 山腰電氣 오사카 工場으로 가는 飛行機에 오르는 硏修生들. 오른쪽은 日本에서의 硏修 모습. [三星電子 提供]

    나중에 半導體 事業을 할 때도 그랬지만 大韓民國 企業人들은 技術 없는 나라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다.

    三星은 1969年 3月 日本 山腰電氣와 基本 合作 契約을 締結하는데 不利한 條件이 많았다. 山腰가 經營에 參與하는 것은 勿論 輸出權, 輸入原資材 供給權, 商品券, 內需 商品 登錄權 等을 모두 갖고 삼성전자는 國內 販賣權만 갖는다는 內容이 骨子였다. 어떻든 그렇게 해서 出發한 會社가 ‘三星山腰電氣’다. 이 會社는 1969年 4月 日本에서 創立 發起人 大會를 열고 本格 出帆한다.

    그런데 이番에는 또 다른 伏兵을 만난다. 다름 아닌 國內 企業들의 反撥이었다. 旣存 業體들은 삼성전자가 새로운 製品을 開發하는 게 아니라 旣存 다른 業體처럼 團地 部品을 組立하는 會社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認可해줘서는 안 된다는 論理를 폈다. 하지만 裏面에는 剛한 境界와 競爭 心理가 자리 잡고 있었다. 結局 삼성전자는 生産品 全量을 國內에는 팔지 않고 輸出만 한다는 條件으로 會社 設立 認可를 받게 된다. 다음은 湖巖自轉에 나오는 內容이다.

    “電子産業의 將來 展望에 關한 見解를 ‘中央日報’에 發表하고 本格的인 準備에 着手했다. 業界는 시끄러워졌다. 三星이 進出하면 韓國의 電子業界는 다 亡한다고 旣存 메이커는 勿論, 甚至於 國會議員까지 動員해 새로 始作하는 電子産業의 沮止 運動을 猛烈히 展開했다.

    政府 官僚들의 움직임도 遲遲不進해서 不得已 大統領에게 내가 直接 電子産業의 將來性을 說明하며 國家的 事業이 돼야 한다고 强調했다. 結局 電子産業 全般에 關한 開放 指示가 내려져 1969年 1月 13日 三星電子工業의 設立을 보게 되었다.”

    三星의 電子産業 進出과 關聯해 ‘묻어둔 이야기’에는 湖巖이 査頓 會社였던 LG 創業主인 九人會 會長과 不和를 빚던 일이 言及되고 있다. 事業家의 世界에서는 家族 以前에 自身의 市場을 지키는 일이 優先일 수밖에 없음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여서 紹介하고 싶다.

     1974년 삼성산요전기에서 삼성전기로 사명을 바꾼 뒤의 생산라인. [삼성전자 제공]

    1974年 三星山腰電氣에서 삼성전기로 社名을 바꾼 뒤의 生産라인. [三星電子 提供]

    1968年 봄의 이병철과 具仁會

    “三星이 電子 産業에 뛰어든 過程에서 꼭 한番 밝히고 지나가야 할 것이 럭키 金星(現 LG)과의 關係이다.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電子 産業을 三星에서 始作하기로 하면서 아버지와 금성사의 九人會 會長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場所에 내가 있었다.

    元來 同業은 힘들다고 하지만 아버지와 丘 會長은 比較的 無難하게 지내온 便이었다. 어린 時節부터 親分이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동안 別로 서로의 事業 領域을 侵害할 必要가 없었다는 것도 두 분이 和睦하게 지낼 수 있는 條件이 되었다.

    摩擦 없이 잘 지내던 두 집안이 競爭心을 보인 건 동양방송을 같이 하면서였지만 外部的으로는 그리 쉽게 드러나질 않았다. 누이同生 숙희와 妹弟 自虐이가 結婚을 함으로써 兩 집안이 사돈지간이 되었고 그런 關係가 發展해서 放送局을 같이 하기로 했던 것이다. 放送局을 하면서 隱然中에 서로가 警戒를 하던 時節에 電子産業 問題가 터져 나왔다. 三星이 電子事業을 하는 것을 금성사 쪽에서 그토록 싫어할 줄은 豫想하지 못했다.

    68年 봄의 일이다. (…) 아버지와 丘 會長님, 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談笑를 나누다가 아버지가 電子 産業에 對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舊 社長, 우리도 앞으로 電子 産業을 하려고 하네.’

    只今도 分明히 記憶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가는 套로 이야기를 던졌는데 反應은 豫想치 못하게 터져 나왔다. 丘 會長은 벌컥 火를 내면서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느닷없이 쏘아붙였다. 卽, 利益이 보이니까 査頓이 하고 있는 事業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나와 아버지로서는 全혀 豫想할 수 없었던 反應이었다. 아직 電子 産業을 始作한 것도 아닌 時期에 설마 不滿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火를 낼 줄은 想像도 하지 못했었다.

    그때까지는 퍽 親하게 지내셨던 두 분은 이 일로 아주 서먹서먹해졌다. 나는 그 後로도 아버지가 그토록 難堪해하고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丘 會長이 火를 내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憫惘해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로 두 분 사이는 아주 멀어졌다. 그 後 妹弟 自虐이는 三星의 일을 하고 있다가 금성사로 돌아갔다. (…) 釜山의 地方 新聞과 中央日報 사이에 이를 두고 攻防戰을 벌인 것도 이 直後의 일이다. 釜山의 K新聞은 금성사에서 引受해 運營하던 것인데 그 新聞에서 ‘電子 産業 業界의 主張’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三星의 電子 産業 進出은 不當하다는 記事를 連續해서 내보냈다. 中央日報의 副社長을 맡고 있던 나는 K新聞이 너덧 番 그런 記事를 내보낼 때마다, 그렇지 않다는 要旨의 記事를 中央日報를 통해 싣도록 했다.

    비록 記事를 싣는 頻度는 中央日報 쪽이 적다고 하더라도 K新聞은 地方지요, 中央日報는 中央紙라서 中央日報의 影響力이 훨씬 더 컸다.

    結局 6個月 程度 新聞紙上을 통해서 攻擊하던 금성사가 抛棄함으로써 나도 中央日報에 금성사에 對한 攻擊的인 記事의 揭載를 中止하라고 했다.

    그런 일 外에도 製品이 生産, 出庫된 以後에는 代理店들 사이에 주먹다짐까지 있었지만 이젠 그런 일은 다 흘러간 그야말로 些少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後發業體가 생김으로써 금성사에도 刺戟이 되었고 두 會社 모두 그를 통해 오늘날 對外的으로 輸出을 할 程度로 成長했다고 생각한다. 예나 只今이나 國內 市場을 두고 壅拙한 다툼을 하는 것은 나는 늘 헛되다고 믿고 있다. 그야말로 자그마한 國內 市場이 아니라 無限한 海外 市場으로 나갈 任務가 兩司에 同時에 지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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