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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星電子가 아오지탄광으로 불렸던 理由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新東亞

三星電子가 아오지탄광으로 불렸던 理由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李 會長, ‘技術 동냥’ 다니며 侮辱도 많이 當했다”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3-1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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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어령의 ‘李健熙론’ 全文 紹介

    • “創造하는 科學者나 藝術家 斷面 봤다”

    • 누구도 가고 싶지 않던 半導體 部署

    • “會社인지 놀이터인지 한숨 푹푹 나와”

    • 日 業體 누르고 市場 60% 거머쥐기까지

    삼성전자 반도체 초기 상황을 진두지휘했던 김광호 전 부회장이 공장을 돌며 직원들과 소통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三星電子 半導體 初期 狀況을 陣頭指揮했던 김광호 前 副會長이 工場을 돌며 職員들과 疏通하고 있다. [三星電子 提供]

    李健熙 會長이 唯一하게 남긴 著作인 ‘생각 좀 하며 世上을 보자’에는 ‘내가 만난 李健熙’라는 題目으로 이 會長에 對한 名詞들의 簡略한 印象 批評이 담겨있다. 그中에서 얼마 前 作故한 이어령 先生(前 文化部 長官)의 글이 있다.

    間間이 一部가 言論에 紹介된 적은 있지만 專門을 紹介하는 것도 意味가 있어 보인다. 이어령 先生의 글에 담긴 이 會長의 面貌가 새롭게 다가온다. 特히 平生 말과 글을 써 왔던 知識人으로서 이 會長 人生의 傍點이 口號나 말이 아니라 行動과 實踐에 찍혀 있다는 點을 높이 評價하는 대목이 와 닿는다. 앎과 삶이 一致했던 文化界 巨匠이 이 會長을 바라보는 視線이어서 울림이 크다. 다음은 專門이다.

    이어령이 만난 李健熙

    “사람들은 여러 가지 理由에서 만난다. 그러나 만나게 되는 처음의 動機와 그 結果가 아주 달라지는 境遇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라 過程, 그리고 그 結果에 따라서 決定된다. 그것은 永遠한 未完의 조각을 새겨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李健熙 會長의 만남도 그러했다.

    내가 처음 이 會長을 만난 것은 英國의 에든버러 博物館에 韓國館을 設立할 수 있게 協助를 求할 때였다. 아무리 나라일이라고는 하나 무슨 請託을 하기 위해 남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던 나로서는 그 자리가 얼마나 거북하고 쑥스러웠는지 모른다. 더구나 이 會長과는 個人的인 親分은 勿論이고 血緣이나 學緣 그리고 遲延조차 없어 함께 나눌만한 話題를 찾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이 會長은 寡默한 분이라 自然히 그 만남은 무거운 沈默 속에서 이루어졌다.

    신라호텔이었던가. 李 會長과 마주 앉아 食事를 하던 그 房에는 分明 壁時計 같은 것이 있었을 理 萬無했는데도 그때 일을 回想하면 어디에선가 한밤中에 울려오는 것 같은 鈍重한 時計錘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沈默의 空白은 李健熙 會長의 낯선 그 音聲으로 조금씩 채워지기 始作했다. 바로 이 會長을 만나고 난 뒤 뜻밖에도 第一企劃팀이 나를 訪問해 왔고. 文化部의 아이디어 가운데 豫算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民間 次元에서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特히 韓國의 歷史와 文化가 世界 잘못 認識된 것을 바로잡는 일은 海外에 支社를 가지고 있는 三星 프로젝트로 推進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 默默히 듣기만 하던 이 會長, 그리고 덤덤하게 아무런 反應도 보이지 않던 바로 그 이 會長 自身의 뜻이었음을 알고 나는 큰 衝擊을 받았다.

    에든버러 博物館의 韓國館 設立을 아무 條件 없이 쾌히 承諾할 때만 해도 나는 그것을 그저 企業人의 事業的인 決斷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但只 그 語塞한 沈默을 避하기 위해서 한 소리들인 데도 이 會長은 그 말의 잿더미 속에서도 貴重한 韓國 文化의 問題를 꺼내고 21世紀 文明에 對한 새로운 挑戰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가 절로 수그러지는 瞬間이었다. 實際로 그 뒤 삼성그룹은 各國 支社를 통해서 外國 敎科書에 잘못 記錄된 韓國 關係 資料들을 調査蒐集하고 그것을 修正하는 일에 많은 貢獻을 했다.

    長官職을 물러난 뒤 나는 삼성복지재단 理事會에서 또는 무슨 諮問會 같은 자리에서 여러 番 이 會長을 만날 機會를 가졌다. 그때마다 처음 沈默 속에서 들었던 時計錘 소리가 경이로운 새 목소리로 바뀌게 되는 衝擊을 맛보곤 했다.

    한담 속에서도 나는 늘 李健熙 會長의 21世紀 文明에 對한 날카로운 洞察力과 韓國文化에 對한 確固한 認識에 對해 讚歎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分野에서 專門家를 自處해 왔던 내 自身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이 會長의 語訥한 몇 마디 말 속에서 깨닫게 될 때에는 나 自身의 無力感까지 느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분의 知識은 冊에서만 얻은 것이 아니라 世界를 舞臺로 한 폭넓은 企業 現場 속에서 直接 얻고 닦은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열 마디 할 때 李健熙 會長은 한마디를 하지만 그 한마디가 내 열 마디를 누른다.

    내가 李健熙 會長을 만날 때마다 無力感을 느끼는 理由는 좀 더 깊은 데 있다. 그것은 李健熙 會長의 知識과 洞察力은 곧 實踐이며 行動이라는 點이다. 한番은 三星에서 開發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批判했더니 6個月 後에는 놀랄 만큼 버전 業(up)韓 것을 擔當者가 直接 들고 와 프리젠테이션을 한 적도 있었다.

    휴머니티의 面에서도 그렇다. 하루는 李健熙 會長과 함께 한 자리에서 三星에서 開發한 特殊用途의 컴퓨터에 對한 說明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一種의 OCR프로그램을 利用하여 視覺 障礙人들에게 冊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勿論 福祉事業의 一環으로 이 會長의 發想과 意志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도 疏外된 이웃들의 아픔을 더는 일이라면 果敢하게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直接 챙기는 熱情을 直接 目擊할 수 있는 場面이었다.
    李 會長은 그것을 더 補完하여 韓國만이 아니라 國際機構를 통해서 世界의 모든 視覺 障礙人들이 惠澤을 받을 수 있게 하라고 指示했다. 남들이 보는 公開 席上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만의 食事 자리였기 때문에 그 말이 더욱 眞率하게 들렸다.

    한番은 아주 偶然히 日本에서 韓國으로 돌아오는 飛行機 안에서 이 會長을 만났다. 飛行機를 타기 直前 배웅을 나왔던 日本 고단샤(講談社) 스스키 副社長으로부터 日本 經濟新聞社에서 主催한 李健熙 會長의 講演을 듣고 感動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그 反應을 좀 알려드리려고 했지만 말할 機會를 찾지 못했다.

    李 會長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同行者들과도 내내 한마디 말을 나누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깊은 沈默 속에서 울려오는 時計錘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나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분의 옆얼굴에서 企業人이 아니라 외롭고 깊은 沈默 속에서 끝없이 무엇인가를 創造해가는 科學者나 藝術家의 한 斷面을 보았다. 나는 그때 이 會長과의 만남을 分明히 하나의 單語로 整理할 수 있었다. ‘그는 homo faber(호모 파베르, 道具의 人間)가 아니다. homo pictor(호모 픽土르, 創造的 人間)’라고….”

    電子事業 하려면 必要하긴 한데

    삼성반도체의 전신인 경기 부천시 한국반도체 공장. [삼성전자 제공]

    삼성반도체의 前身인 京畿 부천시 韓國半導體 工場. [三星電子 提供]

    三星은 1977年 韓國半導體 持分을 100% 引受한 後 會社 이름을 ‘三星半導體株式會社’로 바꾸지만 별다른 成果를 거두지 못했다. 트랜지스터 生産을 빼고는 별다른 品目이 없었고 事業을 擴張할 돈도 없었다. 及其也 2年 뒤인 1979年 11月에는 삼성전자 內 半導體 事業部로 吸收된다. 이 過程을 陣頭指揮한 이가 김광호 前 三星前者 副會長이다.

    金 前 副會長은 入社 後 내내 TV生産팀에서 일하다 半導體 事業部로 옮긴 뒤 以後 半導體 部門 代表理事 社長(1990年), 三星電子 社長(1992年), 三星電子 副會長(1994年), 三星전관(現 三星SDI) 會長(1997年)을 지냈다. 三星電子의 初期 半導體 工程을 指揮하며 半導體를 키운 代表的 專門 經營人이다. 그가 傳하는 初期 狀況은 이렇다.

    “韓國半導體를 引受했던 1970年代 말은 三星電子가 제대로 된 經營을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甚至於 이병철 會長이 제게 ‘姜君이 電子에서 1300億을 말아먹었다’고 말씀하셨을 程度였으니까요. 勿論 弄이 섞인 말씀이셨지만 投資金額에 비해 成果는 미치지 못했던 狀況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推定컨대 當時 祕書室에선 ‘아니, TV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어떻게 半導體를 하겠다는 것이냐’ 反對를 많이 했을 겁니다. 當然한 反應 아니었을까요. 더구나 三星이 (韓國 半導體를) 먼저 사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더 以上 못하겠으니 손들고 가져가시오’ 하는 狀況이었기 때문에 ‘왜 不實 덩어리를 떠안느냐’는 懷疑的인 輿論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三星이 電子事業을 하는 한 半導體는 꼭 必要하다는 데에 技術者들이라면 모두 認識하고 있었습니다. 日本에 恒常 끌려 다니는 處地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우리도 自立을 해야 한다는 切迫感이 있었지요. 當時 日本 企業들은 當時 우리를 거의 ‘가지고 노는’ 水準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部品이 없다’며 발뺌하거나 國際 時勢보다 비싸게 받으려 했으니까요.”

    色(色)信號 IC開發하면서 硏究所 出帆

    1983년 호암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 진출 선언 이후 4년 만에 1메가디램 해외 첫 출하를 축하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1983年 湖巖 이병철 會長의 半導體 進出 宣言 以後 4年 만에 1메가디램 海外 첫 出荷를 祝賀하는 모습. [三星電子 提供]

    半導體 事業은 삼성전자로 吸收된 뒤에도 全般的으로 遲遲不進했다. 그런 渦中에도 눈에 띄는 成果는 있었다. 色信號를 分離해 畵面에 띄워 주는 작은 칩인 色(色)信號 IC를 開發한 것이다. 色信號 IC는 컬러TV에 반드시 必要한 核心 部品이었는데 마침 出帆한 5共和國 전두환 政府가 컬러TV 放送을 許容(1980年)하면서 莫大한 需要가 發生하던 次였다. 三星이 開發하기 前까지만 해도 全量을 日本 輸入에 依存해야 했던 部品이기도 했다.

    三星電子 半導體 事業部는 當時로서는 巨金이던 3億5000萬원이라는 開發費를 들여 1981年 11月 色信號 IC 開發에 成功했다. 이는 트랜지스터나 만들던 旣存 半導體 技術 水準을 한 段階 올려놓은 成果였다.

    彈力을 받은 三星電子는 1982年 1月 京畿 富川市 工場에 半導體 硏究所(地下1層~地上 3層)를 別途로 만들기에 이른다. 旣存까지는 生産 部署 한 귀퉁이에서 제대로 된 裝備나 資金 支援도 받지 못하고 賤덕꾸러기 身世를 면치 못하던 半導體 硏究 開發 事業이 바야흐로 本格的인 軌道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家電製品에 들어가는 칩을 小規模로 開發하고 生産했을 뿐 D램은 생각지도 못한 때였다.

    技術 동냥 다녔던 李健熙 會長

    지난 回에서 筆者는 李健熙 會長이 生前에 “日本, 美國을 直接 다니면서 半導體 技術者들을 만나 技術을 傳授해달라고 事情하는 ‘技術 褓따리 장사’를 했다”는 말을 傳했는데 김광호 前 副會長은 그런 狀況을 이렇게 記憶했다.

    “源泉 技術이 없으니 先進 技術을 배워 와야 하는데 누가 쉽게 알려주겠습니까. 제가 直接 본 것은 아니지만 實際로 會長님이 美國과 日本 企業들을 一一이 찾아다니며 技術 좀 가르쳐 달라고 事情하며 애를 많이 쓰셨다는 것은 저를 包含해 當時 任職員들이 모두 傳해 들어 알고 있는 事案이었습니다.

    會長은 ‘技術 동냥’을 다니며 侮辱도 많이 當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美國 會社들을 接觸하며 ‘技術 移轉 좀 해 달라’고 할 때 마다 ‘We do not sell technology, we sell Products (우리는 製品을 팔지 技術은 팔지 않는다)’는 말만 듣고 허탕치고 歸國 飛行機에 몸을 실었던 날들이 많았다는 거죠.

    하기야 韓國이 只今처럼 잘 살기는커녕 國際社會에서 全혀 存在感이 없던 아시아 低開發國이었던 데다 日本은 그렇다 쳐도 特히 美國人들 立場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開發途上國의 企業人이 찾아와서 半導體 技術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속으로 얼마나 코웃음을 쳤을지 想像이 가지 않습니까.

    더 안타까웠던 것은 三星 內部에서조차 反對만 많았지 이 副會長(當時 職銜) 생각을 제대로 理解하고 實行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副會長으로서 絶對 表面으로는 나타나지 않으시고 뒤에서 조용히 ‘이거 좀 해봐라' ‘저거 좀 해봐라’ 하신 적이 많았는데 大部分 職員들이 半導體에 對한 理解가 不足하다보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成果를 내지 못하는 境遇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金 前 副會長은 具體的인 事例를 記憶해냈다.

    “1980年인가 81年度로 記憶하는데 페어차일드라고 美國에 有名한 半導體 會社를 가까스로 說得해 D램 技術을 移轉해 주겠다는 言質을 받은 模樣입니다. 이 副會長이 當場 檢討해보라고 했지만 經營도 어려운 狀況에서 到底히 資金力으로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任員陣들이 難色을 표하는 바람에 抛棄했던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餘談이지만, 이 副會長은 열린 마음으로 部下 職員들을 便하게 對해주셨습니다. 富川 工場에서 일할 때 가끔 ‘밥 먹었냐’고 電話를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아직 안 먹었습니다’라고 하면 奬忠洞 宅으로 오라고 하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습니다. 맞담배를 피우며 技術 얘기, 製品 얘기. 會社 얘기 있는 그대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으니까요.”

    半導體 事業팀이 閑職이던 時節

    2021년 12월 22일 서울 종로구 평창로 자택 서재에서 동아일보와 마지막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2021年 12月 22日 서울 종로구 平昌로 自宅 書齋에서 동아일보와 마지막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어령 前 文化部 長官. [장승윤 동아일보 記者]

    只今이야 三星電子 半導體가 大韓民國을 넘어 名實相符한 글로벌 獨占 事業이 됐지만 草創期에는 三星 內部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部署였다고 한다.

    金 前 副會長 亦是 三星電子의 核心 事業部였던 TV生産팀에서 일하다 갑자기 半導體 業務를 하라고 해서 “辭表를 써야 하나 생각할 程度로 漠漠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의 말이다.

    “1979年 9月쯤으로 記憶합니다. 湖巖이 三星半導體株式會社를 電子로 吸收해 半導體 事業팀을 만들 豫定이고 여기에 電子 사람들을 보낼 것이라는 所聞이 播多하게 돌았습니다. 다들 ‘설마 내가 가는 일이 있으랴’하면서 完全 남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죠. 저 亦是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構內食堂에서 點心을 먹고 있는데 강진구 社長이 急하게 부른다고 해서 밥 먹다 말고 달려갔더니 ‘會長께도 報告가 됐으니 빨리 三星半導體로 가서 引受引繼를 하라, 半導體를 電子 내 事業部로 吸收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三星半導體會社는 ‘아오지 炭鑛’으로 불렸습니다. 죽어라 苦生만하고 未來를 保障받지 못한다는 거였죠. 人事發令 消息을 傳해들은 同僚 職員들은 ‘完全 물 먹은 人事’라며 ‘絶對 가서는 안 된다’고 亂離도 아니었습니다.”

    實際 가보니 어땠나요.

    “現場 狀況은 더 深刻했습니다. 社長이 제 손바닥을 딱 치면서 ‘引受 끝!’ 하더니 가버리는 거 아닙니까. 工場을 둘러보니 말이 半導體 會社地 家電製品에 들어가는 칩을 小規模로 開發하고 生産하는 水準이었습니다. 職員들은 일거리가 없어서 놀고 있고…. 會社인지 놀이터인지 한숨만 푹푹 나오더라고요. 너무 體系가 안 잡혀 있었으니까요.”

    職員들 雰圍氣는 어땠습니까,

    “한마디로 洶洶했습니다. 會社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所聞이 좍 퍼져 있었죠. 저는 會社를 살리러 온 사람이 아니라 整理하러 온 사람이라는 말들이 돌고 있었습니다. 果然, 며칠이 지나자 엔지니어들이 줄 辭表를 내고 나가 버리는 거 아닙니까. 20~30名이 한꺼번에 나간다고 하니까 初期에는 이 사람들 뜯어 말린다고 애 많이 썼습니다.”

    當時 從業員은 얼마나 있었나요.

    “韓 1000餘 名 程度 됐습니다. 工場이 京畿 富川과 서울 대방동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富川은 강기동 博士가 만든 것이었고 대방동은 페어차일드가 運營하던 國內 組立 工場을 三星이 샀던 거였습니다.

    저는 대방동과 富川을 왔다 갔다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始作해야 할지 寞寞했습니다. 너무 앞이 안보여 中間에 抛棄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及其也 강진구 社長을 찾아가 ‘저더러 그냥 ‘조용히 會社 나가라’고 하셨으면 바로 辭表 쓰고 나갔을 텐데 왜 나를 이런 곳으로 쫓아 보냈습니까’ 抗議한 적이 있을 程度였습니다.”

    그는 于先 대방동 工場을 富川으로 합치는 일부터 始作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런 저런 反對 意見이 많았습니다. 富川이 좁다는 거예요. 그래서 ‘事務室 칸막이 다 뜯어내고 冊床을 다닥다닥 붙여 모아라, 그래도 모자라면 내 冊床은 玄關 앞에 갖다 놔라’ 하는 式으로 亂離를 쳐 가지고 工場과 事務室을 다 富川에 쑤셔 넣다시피 했습니다.

    어느 程度 時間이 지나면서 事務室과 人力이 安定됐다는 判斷이 들 때 쯤 半導體 時計 칩을 만들어 팔기 始作했습니다. 當時엔 臺灣과 홍콩이 主要 消費國이었습니다. 홍콩을 數도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제가 以前까지 TV를 만들던 사람이었으니까 그쪽 電子業界에도 顔面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TV팔던 사람이 어쩌다 하찮은 時計 칩을 팔러 왔나’ 하는 表情으로 새까맣게 어린 職員들까지 엄청 恝視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먹혔습니다. 當時 홍콩 時計業體들은 칩을 臺灣과 홍콩을 왔다 갔다 하는 褓따리 장사들한테 主로 사고 있었는데 저 같은 總責任者가 直接 날아 와서 價格이며 納期를 約束하니까 믿음을 준 거죠.

    하지만 쉽지는 않았어요. 美國 맥도날드 賣場에서 ‘기브 어웨이 프레즌트(Give away Presenrt)’라고 얼마 以上 햄버거를 사면 플라스틱 손목時計를 空짜로 주는 이벤트를 했는데 배터리 다 떨어지면 버리는 1回用 時計였습니다. 그런 곳들을 相對로 장사를 했으니 얼마나 零細한 데를 찾아 다녔겠습니까. 비싼 紅蔘 몇 通씩 사 갖고 가서 나눠 주면서 제발 좀 發注해 달라 事情하면서 다녔습니다.”

    日本 業體들의 牽制

    그는 무엇보다 第一 힘들었던 일이 日本 業體들의 牽制였다고 했다.

    “當時 時計 칩 市場은 日本 OKI라는 電氣會社에서 만든 게 壓倒的인 獨占力을 갖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三星이 들어오니까 치킨 게임을 始作한 겁니다. 個當 50센트에 팔던 걸 價格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49센트에 팔기 始作했더니 이番엔 48센트, 우리가 46에 팔았더니 44 이런 式으로 덤핑을 하는 겁니다. 及其也 30센트까지 내려왔어요. 우리나 日本이나 팔면 팔수록 모두 赤字가 나는 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過程에서 重要한 敎訓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어떻든 物件을 繼續 만드니 生産 노하우가 생겨 不良率이 확 줄어들었습니다. 半導體에서 專門的으로 얘기하는 槪念 中에 ‘러닝 커브(Learning Curve, 學習 曲線)라는 게 있습니다. 새로운 技術을 처음 배울 때에는 더디게 익히지만 어느 時點을 지나면 확 加速度가 붙는다는 거죠. 칩 價格이 30센트로 내려오고 生産量이 늘면서 不良率이 확 떨어져 우리도 드디어 黑字가 나기 始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꾸로 치킨 게임에 나서 19센트까지 떨어뜨렸습니다.

    結局 OKI가 손을 들고 물러나면서 三星이 世界 市場의 60%를 거머쥐게 됩니다. 世界 市場이라고 해봐야 臺灣하고 홍콩이 全部였지만 어떻든 우리 마음대로 市場을 쥐락펴락 하게 되니 신이 났습니다. 以後에도 絶對로 값을 올리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어떻든 이게 草創期 半導體 狀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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