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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判事’의 한끼 | 따뜻한 모닝 빵을 구워온 2年|新東亞

‘혼밥判事’의 한끼 | 따뜻한 모닝 빵을 구워온 2年

  • 정재민 前 判事, 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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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0-06-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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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裁判은 傷處로 始作해서 傷處로 끝난다. 當事者들 傷處에 비할 순 없지만 判事도 傷處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飮食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鬱寂함의 조각이 커피 속 角雪糖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慰勞를 받는다. 그러면서 “判事는 判決로 말한다”고 해서 法廷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便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2年이 조금 못 되는 期間 每달 혼밥判事 이야기를 써왔지만 事實 나는 3年 潘 前 判事職을 그만두고 行政府 官僚로 새 出發을 했다. 判事로서의 삶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判事로 지내면서 내 나이와 깜냥에 比해 過分한 待接을 받았다. 實際보다 더 반듯하고 지혜로운 사람인 것처럼 尊重받았다. 法廷 안팎에서 善意든 惡意든 거짓말을 할 必要도 없었다. 그저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判決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한 해 한 해 더 내 일이 좋아지고 뭔가가 깊어졌다. 그럼에도 判事를 그만둔 가장 根本的인 理由는 人生이 한 番뿐이라서다. 유럽 旅行을 갈 때 처음 간 프랑스 파리가 좋다고 始終 파리에만 머무르는 것은 좋은 選擇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좀 더 사는 듯 살고 싶었다. 처음부터 判事가 된 것은 蹴球로 치면 選手 生活 없이 審判이 된 셈이다. 이제는 더 늦기 前에 選手로 直接 뛰면서 팀과 함께 歡喜와 挫折을 모두 經驗해 보고 싶었다. 새처럼 虛空에 머물며 멀찍이서 世上을 내려다보는 代身 뱀처럼 直接 大地를 뒹굴어보고 싶었다. 世上을 法廷에서 말과 글로만 間接的으로 體驗하는 代身 世上 속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退勤 後나 週末까지도 犯罪나 離婚 事件에 파묻혀 있는 代身 散步를 나가는 이웃집 토토로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飮食을 時間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먹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할 말이 消盡될 때까지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글도 더 읽고 또 쓰고 싶었다. ‘신동아’ 德分에 ‘정재민의 리걸에세이’를 2年間 連載하면서 判事 生活을 整理할 機會를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첫 에세이 ‘只今부터 裁判을 始作하겠습니다’도 出刊했다. ‘신동아’에 한 番 더 連載할 機會가 주어졌을 때 나는 飮食 이야기를 해보겠노라고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많이 먹지는 않지만 一旦 먹을 때에는 후루룩, 츠룹츠룹, 꿀꺽 맛있게, 熱心히 먹는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글쓰기도 좋아하는데, 먹는 것에 對해 글 쓰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혼밥判事를 쓰는 法

    實際로 ‘혼밥判事의 한 끼’를 쓰는 時間은 늘 幸福했다. 日曜日 아침 일찍 居室에 놓인 하얀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쓰는 只今도 그렇다. 고개를 들면 琉璃門 밖으로 아파트 꼭대기 너머 카푸치노의 牛乳 거품처럼 떠 있는 구름이 보인다. 커피를 入口가 큰 머그盞에 담아놓았더니 커피香이 居室 가득 퍼진다. 音樂도 없으면 안 된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귀로는 音樂을 들으면서 눈으로는 구름을 쳐다보면서 입으로는 커피를 마신다. 그러니까 글이 써져도 좋고, 안 써져도 좋다(그래서 안 써질 때가 훨씬 많은 건가). 볕이 들면 볕을 팔뚝으로 느끼면서,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들으면서, 눈이 오면 눈으로 뒤덮이는 世上을 구경하면서 글을 쓴다. 짜장면, 순대, 豆腐 같은 것은 테이블 옆에 두고 먹으면서 썼다. 地方에 出張을 가면 조용한 카페를 찾아가서 홀로 있는 밤의 寂寂함이 사라질 때까지 쓴다. 그러니 혼밥判事 글을 쓰는 時間이 어찌 幸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튀김에 對해 이야기하는 일

    讀者들은 이미 느꼈겠지만 나는 飮食 自體를 說明하려고 ‘혼밥判事의 한 끼’를 連載한 것은 아니다. 나는 프랑스 有名 料理學校 出身이 아니고 미슐랭 스타 食堂을 탐방하는 美食家도 아니다. 짜장면, 순대, 통닭, 곰湯, 돼지갈비 같은 平凡한 飮食에 說明을 덧붙이는 것이 무슨 意味가 있겠는가. 이 글은 에세이라는 데 傍點이 있다. 飮食을 빌려 窮極的으로 사람과 삶에 對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決코 雜文이 아닌(무라카미 氏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雜文집’을 보면 作家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느 讀者로부터 이런 質問을 받는다. “며칠 前 就職 試驗에 ‘原稿紙 4枚 以內로 自己 自身에 關해 說明하시오’라는 問題가 나왔는데 到底히 說明할 수 없었습니다. 프로 作家인 무라카미 氏라면 그런 글도 술술 쓰십니까?” 이 質問에 對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對答한다. “不可能합니다. 차라리 굴튀김에 關해 써보는 건 어떨까요. 當身이 굴튀김에 關한 글을 쓰면, 當身과 굴튀김의 相關關係나 距離感이 自動的으로 表現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結局 當身 自身이 어떤 사람인지에 關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혼자 밥 먹는 이야기를 忠實히 하다 보면 굳이 直接 說明하지 않더라도 平凡한 判事가 法과 裁判과 사람과 世上을 보는 視角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나는 飮食 世界와 法 世界를 나란히 놓아보고 싶었다. 飮食은 그 속에 들어간 炭水化物, 나트륨, 脂肪이 各各 몇 퍼센트인지, 레시피가 무엇인지로 置換할 수 없다. 같은 成分, 같은 레시피라도 飮食 模樣과 냄새와 맛은 決코 같지 않다. 사람도, 사람 行爲도, 그 사람 人生도 말과 글로, 法과 判例만으로 評價할 수 없다. 飮食을 알면 알수록 ‘맛이 있다, 없다’라고 單純하게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을 살면 살수록 人間을, 그의 行爲를, 그의 人生을 有罪와 無罪, 違法과 適法,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判斷할 수 없다는 것을 切實히 느끼게 된다. 

    飮食을 成分과 레시피가 아닌 飮食 自體의 맛과 냄새와 溫氣로 느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사람과 人生도 그 自體로 理解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決코 쉽지 않은 일이다. 法科大學에서도, 法學 書籍에서도, 先輩 判事들에게서도 좀처럼 배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裁判에 自信感을 갖지 못하고 結局 判事도 그만두게 된, 決코 작지 않은 理由이기도 하다. 내가 그동안 文學作品을 읽고 別 素質도 없으면서 글을 써온 건 그러한 不足함을 어느 程度 解消할 수 있을까 하는 漠然한 期待 때문이기도 하다.

    琉璃알遊戱의 祕密

    只今은 이렇게 글을 쓰고 변변찮은 小說이나 에세이도 몇 卷 냈지만 學窓時節에는 내가 글을 쓸 것이라고는 想像도 하지 못했다. 나는 高校 時節 그 흔한 文學 少年도, 讀書狂度 아니었다. 冊을 좋아하는 便이기는 했다. 그때 읽은 小說 中에 헤르만 헤세가 末年에 쓴 大作 ‘琉璃알遊戱’가 있다. 이 小說은 數百 年 後 유럽에서 藝術, 哲學, 宗敎 같은 精神文化가 琉璃알遊戱로 統合되고 한 名의 琉璃알遊戱 演技者가 世界人을 위해 琉璃알遊戱를 선보인다는 設定을 갖고 있다.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한 少年이 平生에 걸쳐 修鍊을 거치면서 琉璃알遊戱 名人이 되는 過程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琉璃알遊戱를 具體的으로 描寫하지는 않는다. 어려운 冊을 苦生하면서 읽었는데 大體 琉璃알遊戱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게 抑鬱해 일곱 番을 거듭 읽어봤지만 속 시원한 答을 얻을 수 없었다. 인터넷이 없던 時節이라 檢索할 수도 없었다. 國語先生님에게 여쭈었지만 試驗에 안 나온다는 말만 들었다. 더는 方道가 없어 抛棄하고 지냈다. 

    大學校 3學年 때 司法試驗 공부용으로 獨逸語 授業을 들었다. 受講 申請을 늦게 하는 바람에 가장 人氣 없는 授業을 選擇하게 됐다. 登錄한 學生이 채 다섯 名이 안 됐다. 그나마도 學生들이 번갈아가면서 缺席했다. 어느 날 다른 學生이 모두 오지 않는 바람에 나는 敎授님과 단둘이 授業을 하게 됐다. 그때 문득 잊고 있던 琉璃알遊戱가 떠올랐다. 나는 “헤르만 헤세 小說에 나오는 琉璃알遊戱가 大體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어보았다. 敎授님은 한瞬間도 躊躇하지 않고 答을 했다. “琉璃알遊戱는 小說을 隱喩한 거야. 헤세는 小說 至上主義者野. 小說이 모든 藝術을, 藝術뿐만 아니라 모든 價値를 아우를 수 있는 統合的인 良識이라 본 것이지. 난 안 좋아해, 헤세.” 

    유레카! 敎授님은 헤세를 안 좋아한다고 했지만 藝術, 哲學, 宗敎 等 모든 精神文明의 精髓를 뽑아놓은 琉璃알遊戱가 小說 쓰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꽤나 그럴듯하게 들렸다. 實際 小說은 藝術, 哲學, 宗敎 等 모든 걸 담아낼 수 있으니까. 琉璃알遊戱 名人이 世上 사람들에게 精神文化의 즐거움을 享有하도록 하듯 作家도 冊을 통해 많은 사람과 疏通할 수 있으니까. 高校 時節 ‘琉璃알遊戱’를 일곱 番 읽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人間의 가장 高潔하고 綜合的인 精神 作業이라고 믿게 됐던 琉璃알遊戱의 자리를 그 瞬間부터 小說이 代替하게 됐다. 

    當場 小說을 써보고 싶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學窓 時節 法大 가는 것, 法曹人 되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마땅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 法大에 온 데 對해 스스로 자랑스럽지 못했다. 그래서 法曹人이 되는 것 外에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는지 苦悶하던 터였다. 그길로 學生會館 文具店에 찾아가 두꺼운 노트 한 卷을 샀다. 짬이 나면 거기다 小說을 썼다.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그래서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專攻 工夫가 잘 안 될 때 머리를 식히려고 小說을 썼는데 차츰 小說을 쓰다 머리를 식히려고 工夫를 하기도 했다.

    모닝 빵을 굽는 마음

    그렇게 서너 달 程度 지나니 짧은 小說 한 篇이 거의 完成됐다. 學窓 時節 親했던 두 男子와 한 女子가 成人이 된 뒤 한 男子가 죽고 남은 男子와 女子가 結婚해서 사는 얼개를 가진 ‘配慮’라는 小說이었다. (只今은 痕跡을 찾을 수 없다는 事實이 安堵感을 주는 글이다). 나는 司法硏修院生이 된 直後 最初로 開催된 行政自治部 主催 公務員文藝大田에서 이 小說로 ‘奬勵賞’을 받았는데 이때 너무 크게 ‘奬勵’돼 只今까지 글을 쓰게 됐다. 

    그 小說을 完成하던 날 조금만 더 쓰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버티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커피 한 盞 마시지 않고 오렌지주스만 마시면서. 試驗工夫 할 때에도 밤을 새운 적은 없었다. 그렇게 첫 小說을 完成한 다음 寄宿舍 休憩室로 가서 出力을 했다. 몇 次例 덜거덕거린 프린터가 찌징찌징찌징찌징하는 소리로 새벽 고요를 깨며 活字로 가득한 A4用紙를 한 張씩 吐해냈다. 만져보니 따뜻했다. 마치 새벽에 빵집에서 구워낸 모닝 빵의 溫氣처럼. 내가 쓴 小說이 하얀 종이 위에 반듯한 活字로 찍혀 나오는 것을 보고 마치 나의 첫 冊이 出刊되기라도 한 것처럼, 氣分이 모닝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 草稿를 冊가방에 넣고 授業을 들으러 學校로 가던 寄宿舍 뒤 오솔길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밤새 잠을 한숨도 못 자고, 每日 먹던 토스트를 먹지도 않았는데 몸이 둥실둥실 떠다니듯 가벼웠다. 別로 親하지 않던 親舊를 만났는데 나도 모르게 너무나 반갑게 人事하게 됐다. 

    只今도 글을 完成한 날에는 어김없이 그날 새벽의 프린터 作動 소리, 모닝 빵처럼 따뜻했던 종이, 黃金色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촉촉한 오솔길 아침이 떠오른다. 글을 쓸 때는 오렌지주스가 아니라 커피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도 함께. 지난 2年間 그날의 모닝 빵을 만드는 마음으로 ‘혼밥判事의 한 끼’를 써왔다. 모닝 빵은 대단한 技術보다 精誠이 重要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나는 허름하지만 깨끗한 空間을 마련하고, 튼튼한 테이블과 삐걱거리지 않는 椅子를 놓고, 내가 여러 番 들어서 고른 잔잔한 音樂을 틀고, 香이 좋은 커피를 내리고, 손님들이 마치 익숙한 自身의 空間처럼 느낄 수 있도록 室內를 가꾸고, 손님 앞에 따뜻한 빵을 내놓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 빵을 먹는 사람이 溫氣와 맛을 느낀다면, 하루 半나절을 버틸 힘을 얻는 데 작은 寄與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러면 나에게도 힘이 된다. 사는 듯 살아가는 데 必要한 힘. 이 特別하고 힘든 時期를 버틸 수 있도록 사는 듯 살고 싶어 하는 世上의 모든 이에게 조금씩만 힘이 더 생기기를 바라며 連載를 마친다.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前職 判事이자 現 行政府 公務員. ‘사는 듯 사는 삶’에 關心 많은 作家. 쓴 冊으로는 에세이 ‘只今부터 裁判을 始作하겠습니다’, 小說 ‘보헤미안랩소디’(第10回 世界文學賞 大賞作) 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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