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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이 다시 쓴 6·25戰爭 16大 爭點|新東亞

김학준이 다시 쓴 6·25戰爭 16大 爭點

內爭적 要素 지닌 國際展…스탈린이 休戰會談 막아

  • 김학준 檀國大 碩座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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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0-06-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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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덧 光復 以後 最大의 民族 慘事였으며 오늘날까지도 韓民族 모두에게 큰 負擔을 안기는 6·25戰爭 70周年을 맞이했다. 이 階梯에 이 戰爭을 둘러싼 수많은 爭點 가운데 16가지만 가려 그 內容을 살펴보기로 한다. 

    • 이 戰爭이 남긴 遺産을 앞으로 어떻게 淸算하고 무엇보다 이 戰爭이 남긴 掆鼓(强固)韓 南北 對決體制를 瓦解시켜 窮極的으로 南과 北이 眞情으로 하나가 되는 길로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 苦悶해 보는 作業은 後날의 課題로 남기기로 한다.

    [GettyImage]

    [GettyImage]

    論議의 出發點: 戰爭의 名稱을 規定하는 方式

    이 戰爭의 爭點들 가운데 出發點은 名稱에 關한 論爭인데, 이 論爭을 理解하기 위해 于先 戰爭의 名稱을 規定하는 方式에 對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學界에서 어떤 戰爭의 名稱을 定할 때 몇 個의 基準이 있다. 첫째, 戰爭이 일어난 場所 또는 國家의 이름을 따는 方式이다. 紀元前 5世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半島를 中心으로 일어났고 스파르타의 勝利로 매듭지어진 戰爭은 펠로폰네소스戰爭으로 명명했고, 19世紀 初期에 美國이 멕시코의 텍사스를 차지하기 위해 멕시코와 벌였고 結局 美國의 勝利로 歸結된 戰爭-李 戰爭에 저 有名한 알라모戰鬪가 包含된다-은 멕시코戰爭으로 명명했다. 

    19世紀 中葉 帝政러시아가 터키의 크리미아半島를 軍事占領하자 英國과 프랑스가 함께 派兵해 러시아를 敗退시킨 戰爭은 크리미아戰爭으로 명명했다. 바로 이 戰爭 때 英國의 看護師 나이팅게일의 名聲이 確立됐다. 

    20世紀에 들어와 日帝는 東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侵略하고 마침내 美國을 相對로 戰爭을 치르다가 敗亡하고 말았는데, 스스로 이 戰爭을 ‘大東亞戰爭’ 또는 ‘大東亞民族解放戰爭’이라고 불렀다. 다른 한便으로, 日帝에 對抗해 싸운 美國은 이 戰爭을 ‘太平洋戰爭’으로 명명했다. 

    2次 大戰이 끝난 以後에 일어난 戰爭들을 살펴보자. 베트남에서 일어난 南·북베트남 사이의 戰爭에 美國이 參戰했으며 結局 북베트남의 勝利로 歸結된 戰爭은 베트남戰爭으로 명명했고, 이 戰爭의 展開 過程에서 戰場(戰場)李 이웃 라오스와 캄보디아 等 인도차이나 全域으로 擴大되자 인도차이나戰爭으로 명명했다. 1940年代 末부터 1970年代 初까지 네 次例에 걸쳐 中東에서 일어난 이스라엘과 아랍圈 사이의 戰爭은 境遇에 따라 팔레스타인戰爭 또는 수에즈戰爭으로 불렀으나 全般的으로 中東戰爭으로 명명했다. 

    1970年代 英國이 포클랜드를 되찾으려는 아르헨티나를 相對로 벌여 勝利를 거둔 戰爭은 포클랜드戰爭으로, 그리고 蘇聯이 아프가니스탄을 侵攻하고 傀儡政府를 세우는 데까지는 成功했으나 結局은 撤收할 수밖에 없었던 戰爭은 아프가니스탄戰爭으로 명명했다. 



    둘째, 戰爭의 相對方 이름을 따는 方式이다. 古代 로마가 오늘날의 레바논 一帶에서 商業國家를 세웠고 오늘날의 튀니지 一帶에 進出한 페니키아(當時 로마인들의 發音으로는 포에니) 사람들을 相對로 두 次例에 걸쳐 싸운 戰爭은 포에니戰爭으로 명명했다. 오늘날의 튀니지에 자리를 잡았던 카르타고의 ‘英雄’ 한니발은 第2次 포에니戰爭 때 活躍했다. 

    19世紀 全般에 英國과 러시아가 中心이 된 聯合國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相對로 싸우면서, 이 戰爭을 나폴레옹戰爭이라고 불렀고, 19世紀 末과 20世紀 初 사이에 英國은 自身의 植民地를 擴張하는 過程에서 아프리카 南部에 이미 定着해 國家를 세운 네덜란드人을 相對로 戰爭을 벌였는데 그 네덜란드人을 通稱한 보어(Boer)를 따서 보어전쟁이라고 불렀다. 後날 英國의 總理로 選出돼 第2次 世界大戰을 勝利로 이끄는 데 일정하게 이바지한 처칠은 이때 從軍記者로 參戰해 戰爭의 實相을 英國에 널리 알렸다. 

    셋째, 交戰國 雙方의 이름을 함께 넣는 方式이다. 유럽에서 프로이센(漢文으로 普露西亞, 英語로 프러시아)과 프랑스가 벌인 보불戰爭이 그 한 보기다. 이 戰爭의 이름을 들으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이 알자스로렌이다. 戰爭에서 敗戰한 프랑스는 이 地域을 프로이센에 割讓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方式으로 命名된 事例는, 아시아에서 淸國과 日本이 벌인 淸日戰爭 그리고 러시아와 日本이 벌인 러일戰爭, 美洲에서 美國과 스페인(漢文으로 西班牙)李 싸운 美·西戰爭, 1937年 日帝가 中國을 侵略함으로써 始作된 中·日戰爭 等이다. 中國이 統一된 베트남(漢文으로 越南)을 相對로 벌였으나 勝敗가 분명하지 않은 狀態에서 끝난 戰爭은 中·月戰爭으로 命名됐다. 

    넷째, 戰爭의 어떤 뚜렷한 特徵으로써 명명하는 方式이다. 19世紀 中盤 英國이 請을 相對로 阿片을 마구 팔아 阿片中毒者가 늘어나자 請에 輸入된 英國의 阿片을 불태워버림으로써 일어났고, 結局 英國의 勝利로 歸結된 戰爭을 阿片戰爭으로 명명한 것이 代表的 事例다. 

    비슷한 事例가 第4次 中東戰爭人 ‘욤 키푸르 戰爭’이다. 第3次 中東戰爭에서 慘敗한 이집트와 시리아는 復讐心에 불타 萬般의 準備를 갖춘 뒤 1973年 10月 6日 이스라엘을 奇襲的으로 攻擊했다. 바로 이날은 유대人의 全國的 큰 行事 ‘욤 키푸르’ 곧 ‘성스러운 贖罪日’이었다. 이스라엘이 放心한 틈을 노린 것이었다. 

    다섯째, 戰爭의 期間을 中心으로 명명하는 方式이다. 14世紀로부터 15世紀까지 1世紀에 걸쳐 프랑스와 英國 사이에 間歇的이면서도 持續的으로 일어난 戰爭은 百年戰爭으로 命名됐다. 1967年 勃發해 이스라엘의 勝利로 歸結된 第3次 中東戰爭은 6日 만에 끝났기에 6日戰爭으로도 불렸다. 이 戰爭에서 이스라엘의 國防長官 모세 다얀이 世界的인 將軍으로 떠올랐다. 

    여섯째, 많은 列强이 介入한 世界 規模의 戰爭으로,제1차 世界大戰(1914~1918)과 第2次 世界大戰(1939~1945)李 代表的 事例다.

    戰爭의 名稱을 둘러싼 論爭

    그러면 1950年 6月 25日부터 1953年 7月 27日까지 37個月에 걸쳐 進行된 韓半島에서의 戰爭은 어떻게 命名돼 왔는가. 日本은 南北韓 全體를 ‘朝鮮’으로 統稱하는 慣行을 適用해 ‘朝鮮戰爭’으로 명명했다. 美國을 비롯한 英語圈에서는 壓倒的으로 ‘코리안 워(Korean War)’를 使用했다. 프랑스語圈이나 獨逸語圈 그리고 러시아語圈에서는 모두 ‘코리아의 戰爭’으로 飜譯될 수 있는 名稱을 使用했다. 

    大韓民國의 境遇, 開戰 初期에는 ‘6·25事變’ ‘6·25動亂’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戰爭이 擴大되면서 그것이 ‘事變’이나 ‘動亂’의 範圍를 훨씬 벗어나 國際政治學이 말하는 戰爭의 範疇에 屬한다는 事實을 認定해 곧 ‘韓國戰爭’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命名은 우리로서는 語塞하다. 흔히 ‘韓國’이라고 하면 그것은 大韓民國을 가리키는데, ‘韓國戰爭’이라고 하면 ‘大韓民國 안에서 일어난 戰爭’으로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北韓은 ‘朝鮮人民에 依한 正義의 祖國戰爭’ 줄여서 ‘祖國解放戰爭’ 또는 ‘正義의 祖國戰爭’이라고 부른다. 이 命名은 蘇聯이 나치獨逸의 侵略을 받아 거기에 抵抗한 戰爭을 ‘曺國守護를 위한 偉大한 愛國戰爭’으로 부른 前例와 흐름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나치게 北韓 中心的인 것이면서 一方的이다. 무엇보다 自身이 南侵을 開始함으로써 民族的 慘劇을 招來한 事實을 가리고 있다. 

    유엔軍의 成功的인 反擊으로 北韓 政權의 崩壞가 臨迫한 時點에서 北韓 政權을 救出하기 위해 中國은 ‘人民支援軍’이라는 이름 아래 派兵했는데, 이 戰爭을 ‘抗美援朝(抗美援朝) 戰爭’이라고 불렀다. ‘美國에 對抗하고 朝鮮을 支援한 戰爭’이라는 뜻이다. 우리로서는 日本의 命名이나 北韓의 命名은 勿論이고 中國의 命名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두 自己네 立場에서의 命名이기 때문이다. 

    이 命名들을 모두 拒否하면서, 김창순 前 北韓硏究所 理事長은 ‘6·25南侵戰爭’이라는 名稱을 提示했다. 그것이 이 戰爭의 眞相을 말해주는 것이기는 하나, 參戰國들을 비롯한 西方世界의 많은 나라가 介入한 事實을 充分히 反映하지 못하는 欠이 있고 또 外國의 硏究者들로부터 ‘지나치게 一方的’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비슷한 脈絡에서, 한영춘 前 단국대 敎授는 ‘金日成 攻難(共亂)’이라는 名稱을 提示했다. 中國의 ‘예(禮)’에 따르면, 正統性을 가진 國家나 政府를 相對로 非正統 勢力이 武力을 動員해 對抗하는 境遇를 ‘亂’이라고 하며 그래서 한 例를 들면 洪景來의 武力 動員도 ‘洪景來의 亂’이라고 하는데, 김일성의 南侵戰爭이야말로 正統性을 가진 大韓民國을 相對로 非正統 勢力인 金日成이 武力을 動員해 對抗했기에 ‘김일성의 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金日成이 ‘共産主義者’인 것을 强調한다는 뜻에서 ‘金日成 攻難’이라고 하는 것이 適切하다는 提議였다. 

    이러한 모든 事例를 檢討한 뒤 國內의 많은 硏究者는 ‘6·25戰爭’이라는 名稱이 좋겠다는 데 意見을 모았다. 勿論 이 名稱에도 問題는 뒤따른다. 于先 世界의 어떤 戰爭에도 開戰日을 앞세운 境遇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便으로, 美國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敎授와 英國의 존 할러데이(Jon Halliday) 敎授는 이 戰爭이 1950年 6月 25日에 始作된 것이 아니라는 意見을 提示했다. 이 戰爭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48年의 ‘濟州島事件’-보기에 따라서는, ‘濟州道叛亂’ 또는 ‘美軍政의 單選單政路線에 反對하는 統一志向的 抵抗運動’-에서 그리고 그 延長線上에서의 ‘旅順事件’ 및 38導線에서의 南北 武力 對決에서 始作된 것이었다는 解釋이다. 國內의 어떤 學者는 “이 名稱은 6·25 直後에 南韓에서 高調된 反共的·半북적 社會 雰圍氣 속에서 외치던 口號 ‘想起하자 6·25’를 연상시켜 南北 和解를 志向하는 雰圍氣를 깨뜨릴 수 있다”고 主張하며 이 名稱의 使用에 同意하지 않는다. 

    그러나 筆者는 다음과 같은 事實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38度線 周邊에서 南과 北 사이의 武力 衝突은 1949年 以後, 特히 1950年에 들어와 移轉 時期에 비해 懸隔히 줄어들고 있었다는 事實이다. 當時의 韓半島 內的 狀況을 살펴보면 北韓의 김일성이 改悛하지 않았다면 이 戰爭은 回避될 수 있었다는 判斷이다. 김일성은 1949年에 이어 1950年에도 蘇聯을 찾아가 스탈린과 會談하면서 南侵일을 6月 25日로 특정하는 데 合意했다. 그렇기에 ‘6·25戰爭’이라고 명명하는 데 일정하게 限界가 있는 것은 事實이지만, ‘韓國戰爭’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最近에 美國과 日本의 硏究者들 가운데는 이 戰爭을 ‘第3次 世界大戰을 代替한 東北아시아戰爭’으로 명명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傾聽할 만한 見解라고 생각한다.

    內戰이었나 國際戰이었나

    이 戰爭을 둘러싼 또 하나의 爭點은 內戰이었나 國際戰이었나에 關해서다. 美國과 英國의 어떤 硏究者들은 이 戰爭이 內戰이었다는 解釋을 提示하면서, ‘코리안 시빌 워(Korean Civil War)’라고 명명했다. 같은 民族이면서도 南과 北으로 나뉜 雙方이 對決한 戰爭이었다는 解釋이다. 그들 가운데 一部는 이 戰爭의 性格에 對해 ‘民族解放戰爭’ 또는 ‘人民解放戰爭’이라는 解釋도 提示했다. 抗日獨立運動家들이 主軸을 이룸으로써 民族史의 正統性을 지닌 北韓이 親日派들이 主軸이 됨으로써 民族史의 正統性을 지니지 못한, 極端的으로 말해, ‘反民族的’ 南韓을 相對로 ‘解放戰爭’을 遂行했다고까지 强辯했다. 

    日本에서도 內戰설이 有力하다. 다만 “內戰으로 始作됐으나 美軍을 主軸으로 하는 유엔軍의 參戰으로 國際戰으로 擴大됐다”는 解釋이 뒤따랐고, 오늘날에는 大體로 이 解釋이 主流를 形成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國際的 內傳說’이다. 

    對照的으로 西方世界의 硏究者들은, 特히 韓國의 硏究者들은 이 戰爭을 國際戰으로 把握한다. 開戰에 앞서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에 密約이 있었고 마오쩌둥이 이 密約에 뒤늦게나마 加擔했다는 事實에 미루어, 그리고 이 密約에 따라 特히 스탈린이 여러 方面에서 김일성을 軍事的으로나 財政的으로 支援했다는 事實에 미루어, 이 戰爭은 歲 共産國家의 密約에 따라 始作된 戰爭이었고, 거기에 對抗해 西方國家들이 參戰함에 따라 擴大된 만큼 國際戰으로 解釋하는 것이 正確하다고 그들은 主張했다. 

    그것이 眞相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戰爭에는 內爭적(內爭的) 要因이 깊이 介入돼 있다. 이 戰爭에 앞서 南과 北은 相對方을 自身에게 흡수시키려는 政策을 公公然히 追求했으며 그 目的을 達成하기 위해 軍備를 擴充하려고 努力하고 있었다. 이 事實을 充分히 認定하면서도 筆者는 이 戰爭은 國際戰이었다는 解釋을 支持한다. 앞에서 이미 指摘했듯, 스탈린과 김일성의 密約, 開戰에 對한 스탈린의 明示的 指示와 支援, 그리고 마오쩌둥의 同意 等이 이 戰爭의 性格을 分明히 말해준다. 그러나 內爭적 性格을 일정하게 認定해 ‘內爭적 要素를 지닌 國際展’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맥아더가 北韓의 南侵을 誘導했다는 主張은 妥當한가

    6·25 전쟁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운데). [미국 국립문서 기록관리청]

    6·25 戰爭 當時 駐韓유엔軍司令官 더글라스 맥아더(가운데). [美國 國立文書 記錄管理廳]

    이 戰爭이 北韓의 南侵 個市로 始作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歷史的 事實이다. 이 點은 어느 무엇보다도 1994年 6月 김영삼 大統領이 모스크바를 訪問했을 때 옐친 러시아 大統領이 넘겨준 옛 蘇聯의 機密 文書에서 再確認됐다. 우리는 이 文書를 ‘옐친文書’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러나 이 文書가 公開되기 以前에는 美國이 韓國을 부추겨 北韓의 南侵을 誘導했다는 主張이 特히 美國學界 一角에서 提起됐다. 그 代表的 硏究者가 가브리엘 콜코(Gabriel Kolko) 敎授였다. 그는 嫌疑를 一次的으로 美國의 극동군總司令官이던 맥아더 元首에게 씌웠다. 1949年 10月 1日 成立된 中華人民共和國을 붕괴시켜 世界的 英雄으로 자리를 굳히고 그 氣勢를 몰아 1952年 實施될 美國 大統領選擧에서 當選되려는 野望을 실현시키기 위해 李承晩 大統領을 부추겨 北侵을 敢行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北韓의 反擊을 誘導해 擴戰되도록 計劃했다는 推論을 提示한 것이다. 

    그러면 맥아더는 어떤 判斷에서 이 大統領을 부추겼다는 것일까. 그는 當時 이 大統領이 國內 政治에서 野黨의 攻勢 앞에 窮地에 몰려 있었고 그래서 그 亦是 戰爭을 통해 反戰의 脫出口를 찾고자 했다는 推論을 提示했다. 그런데 여기서 重要하게 指摘돼야 할 것은 그는 어떠한 1次 資料도 提示하지 못하고 그저 그 스스로의 表現대로 ‘推測’을 提示했을 뿐이었다. 

    그러한데도 그가 쓴 冊 ‘힘의 限界: 2次 大戰 以後 美國의 外交政策’이 美國 主要 大學에서 敎科書 가운데 하나로 採擇됐기에 學生들에게 큰 影響을 줄 수 있었다. 

    콜코 敎授의 推論과 비슷한 脈絡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힌 커밍스 敎授의 ‘韓國戰爭의 起源’ 第2卷은 ‘韓國軍의 海州侵攻’을 내세웠다. 6·25戰爭 直前에 韓國軍이 黃海道의 道廳 所在地 海州를 侵攻해 戰端을 열자 北韓이 反擊을 加함으로써 結局 大規模 戰爭으로 擴大되기에 이르렀다는 假說을 提示한 것이다. 이 假說 亦是 옐친文書가 公開되기 以前에 쓰인 것이었다. 韓國에서는 美國의 1次 資料를 徹底히 點檢한 정병준 敎授와 이완범 敎授 等에 依해 이 假說은 完全히 否定됐다.

    애치슨 宣言은 北韓의 南侵을 誘導한 미끼였을까

    美國의 ‘北韓 南侵 誘導’설에 連結되는 爭點은 1950年 1月 美國 國務長官 애치슨이 全國記者協會에서 行한 演說에 關聯됐다. 그는 美國의 極東防衛線을 말하면서 韓國을 除外했는데, 誘導說을 提示한 硏究者들은 이 演說이 北韓의 南侵을 誘導한 미끼였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大部分의 硏究者들은 그렇지 않다는 結論을 提示했다. 애치슨 發言에 앞서 맥아더는 극동군 總司令官 資格으로 1948年 以後 一貫되게 韓國을 除外하는 案을 本國 政府에 올렸고, 이는 公知의 事實로 밝혀져 있었으며 애치슨 演說은 그것의 再確認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들은 主張했다. 冷戰史 分野에서 世界 第1人者라는 評을 받는 존 루이스 個디스(John Lewis Gaddis) 예일대 敎授는 애치슨 演說이 北韓의 南侵을 誘導했다는 解釋을 全面 否認했다.

    김일성의 開戰 提案을 처음에는 拒否한
    스탈린이 나중에는 承認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1950년 김일성과 이오시프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대화하고 있다. [Enemy in the Mirror 홈페이지]

    1950年 김일성과 이오시프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對話하고 있다. [Enemy in the Mirror 홈페이지]

    옐친文書에 따르면, 김일성은 처음에는 平壤 駐在 蘇聯臺詞를 통해, 이어 1949年 3月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의 會談에서 거듭 南侵 計劃을 說明하고 承認을 懇請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拒絶했다. 美國이 軍事介入할 蓋然性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戰爭은 美國과 蘇聯 사이의 直接的 軍事 對決로 擴大될 수 있다고 判斷했던 것이다. 

    그러나 1950年 3月 다시 모스크바에서 열린 會談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끈질긴 提議를 承認했다. 스탈린으로 하여금 態度를 바꾸게 만든 要因들은 무엇이었을까. 옐친文書에서도 이 물음에 對해서는 明確한 對答이 發見되지 않았다. 그러나 硏究者들은 다음의 要因들을 提示했다. 

    첫째, 1949年 10月 1日 中華人民共和國이 ‘成立’된 事實이다. 스탈린은 늦게까지도 中國大陸을 마오쩌둥이 이끄는 中國共産黨이 掌握하리라고는 豫想하지 못했다. 그 豫想을 깨고 中國共産黨은 장제스가 이끈 中華民國을 타이완으로 밀어내고 大陸을 掌握한 것이다. 硏究者들은 “이것이 스탈린으로 하여금 ‘이제 共産主義의 물결이 아시아를 휩쓸기에 이르렀다’는 判斷을 내리게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스탈린은 1950年 2月 모스크바에서 마오와 會談하고 두 나라 사이의 相互防衛援助條約을 締結함으로써 中小同盟을 形成한다. 

    둘째, 1949年 10月 蘇聯이 마침내 原子爆彈을 保有하게 됐다. 이로써 美國의 原爆 獨占 時代는 끝이 났다. 硏究者들은 이것 亦是 스탈린에게 自信感을 갖게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박헌영이 南侵 計劃을 反對했다는 主張은 事實인가 아닌가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1946年 여름에 越北했고 1948年 9月 北韓 政權이 樹立됐을 때 제1부수상 兼 外務相으로 任命된 박헌영이 受賞 김일성의 南侵 計劃에 反對했다는 主張이 퍼져 있었다. 自身이 남조선로동당의 ‘마지막 地下總責’이었다고 主張하는 박갑동이 쓴 冊들은 이 主張을 되풀이해 强調했으며, 甚至於 박헌영을 ‘平和的 方法으로 統一을 推進했던 사람’으로까지 描寫했다. 

    이것은 全혀 事實이 아니다. 옐친文書는 박헌영이 김일성을 따라 모스크바를 訪問했을 때 스탈린 앞에서 北韓軍이 내려가면 ‘地下의 남로당願들’李 一齊히 呼應해 蜂起할 것이라고 큰소리치면서 南侵 計劃을 積極的으로 提示했다고 밝히고 있다. 


    北韓은 애初에 際限戰을 追求했는가 全面戰을 追求했는가

    앞에서 擧論한 콜코 敎授는 ‘北韓은 애初에 際限戰을 追求했을 뿐 全面戰을 追求하지 않았다’는 推論을 提示했다. 그에 따르면, 北韓은 서울을 占領하고 南韓을 相對로 統一政府를 세우기 위한 協商을 提議하면 南韓이 唐慌한 狀態에서 그 協商에 應할 것으로 計算했다고 推測했다. 그는 自身의 推論 根據들 가운데 하나로 北韓軍이 서울을 占領下高度 사흘 동안 ‘南進’을 中斷한 채 서울에 머물러 있었던 事實을 提示했다. 

    그러나 이 推論 亦是 事實이 아니다. 다른 文書들도 그러했지만 特히 옐친文書는 北韓이 처음부터 全面戰을 計劃하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北韓軍은 왜 사흘 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나

    앞에서 方今 말했듯, 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온 北韓軍은 6月 28日에 서울을 占領하고 더는 南行하지 않은 채 서울에 머물렀다. 이 사흘은, 막 大韓民國 陸軍參謀總長 兼 3軍 總司令官으로 任命된 정일권이 回顧했듯, 大韓民國을 살려준 貴重한 時間이었다. 鄭 總長에 따르면, 이때 北韓軍이 서울에 머물러 있지 않고 南行을 繼續했더라면 美軍이 介入할 時間 餘裕가 없었고 大韓民國은 結局 潰滅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學界에서는 北韓軍의 사흘 서울 滯留에 對해 討論을 繼續했다. 

    그 結果, 春川地球에서 國軍의 宣傳과 善防으로 北韓軍 가운데 主要 部分이 그곳에 묶여 서울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重要한 事實이 밝혀졌다. 그리고 後날 公開된 蘇聯 文書에 따르면, 北韓軍이 서울을 ‘完全’ 占領했다는 旣存의 說明에 問題가 있었다. 서울의 重要한 部分들을 占領한 것은 事實이었지만 영등포를 비롯한 外郭 地域은 ‘完全’히 占領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蘇聯 文書에 따르면, 서울에 들어온 北韓軍과 平壤의 本部 사이에 交信이 不充分해 本部가 現況을 제대로 把握하지 못해 南行 指示를 서둘러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美國을 主軸으로 하는 유엔의 介入은 正當했는가 正當하지 않았는가

    6·25전쟁 중 수원에서 북진하는 
유엔군 탱크부대.  [동아DB]

    6·25戰爭 中 水原에서 北進하는 유엔軍 탱크部隊. [東亞DB]

    爭點 2에 連結되는 또 하나의 爭點은 美國을 主軸으로 하는 유엔의 介入이 正當했는지에 聯關된다. 北韓은 勿論이고 蘇聯을 비롯한 共産國家들 모두 그리고 中立國家들 가운데 一部는 正當하지 않았다고 主張했다. 內傳說을 提示하는 硏究者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것이 正當하지 않았다고 力說했다. 한 民族 사이의 內戰에 왜 外部 勢力이 介入했느냐고 그들은 詰難했다. 

    西方世界에서 좀 더 極端的 見解를 提示한 硏究者는 濠洲國立大學校의 著名한 歷史學者 게이븐 매코맥(Gavan McCormack) 敎授였다. 그는 “그때 美國을 主軸으로 하는 유엔이 介入하지 않았더라면 이 戰爭은 北韓의 勝利로 빨리 끝났을 것이며 비록 肅淸이 뒤따랐다고 해도 그 肅淸은 親日派를 비롯한 反民族 勢力에 局限됐을 것이고 그 數는 많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들이 介入함으로써 戰爭이 3年 以上 繼續되면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게 됐다”라고까지 썼다. 

    筆者는 美國을 主軸으로 하는 유엔의 介入은 正當했다고 判斷한다. 大韓民國의 誕生 過程에 이미 유엔이 關與했으며, 萬一 美國을 비롯한 西方國家들이 유엔의 決議에 따라 參戰하지 않았더라면 大韓民國의 崩壞는 避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萬一 大韓民國이 北韓에 依해 崩壞됐더라면 南韓에 對해서도 北韓式의 無慈悲한 共産統治가 施行됐을 것인데, 그것이 가져왔을 慘劇은 참으로 끔찍했을 것이다. 

    現代 文明國家에서는 어떠한 ‘罪人’이라도 正當한 裁判을 받을 權利가 있다. 이 權利가 夫人되는 國家는 非文明的이면서 暴壓的인 全體主義 國家일 뿐이다. 아무리 ‘親日派’였고, 또 北韓이 말하는 ‘反民族分子’ 또는 ‘反動分子’라고 해도 正當한 裁判을 받아 自身의 罪에 相應하는 處罰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北韓이 南侵 直後의 일정한 期間에 걸쳐 自身의 占領 地域에서 恣行한 ‘人民裁判’은 決코 許容될 수 없다.

    유엔軍의 38度線 月經과 北進은 正當했는가

    美國을 主軸으로 하는 유엔軍의 反擊이 開始되고 大韓民國으로서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던 洛東江戰鬪에서 北韓軍을 敗退시킴으로써 勝機를 잡은 유엔軍 그리고 國軍은 北進을 繼續했으며 仁川上陸作戰의 成功을 통해 마침내 서울을 收復하고 38度線으로 北進을 繼續했다. 이 時點에서, 勞動黨이 이끄는 英國 政府를 비롯해 西方國家들 안에서는 38度線에서 停止할 것을 提議했다. 이제 이른바 戰前原狀(戰前原狀)李 回復된 만큼 여기서 戰爭을 멈춰야 하며, 萬一 38度線 以北으로 進軍을 繼續하면 戰爭이 擴大되면서 蘇聯軍이나 中共軍이 介入할 수도 있고, 萬一 그렇게 된다면 3次 大戰으로 擴大될 수 있다는 論理였다. 

    이 論理는 그 以後에도 몇몇 學者에 依해 되풀이됐다. 그때 戰爭을 멈췄더라면, 이 戰爭은 約 3個月 만에 끝날 수 있었고 被害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主張했다. 이 戰爭은 結局 1953年 7月 27日 休戰으로 歸結됐는데 休戰線이 38度線과 비슷하다는 事實을 생각한다면, 2年을 더 싸우며 엄청난 被害를 낸 뒤 事實上 元來의 狀態로 돌아왔으니 이런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느냐고 그들은 反問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首肯할 만한 點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깊이 더 생각해 봐야 할 點이 있다. 于先 當時 大韓民國 國民 사이에 擴散돼 있던 “이 機會에 統一을 成就瑕疵”는 熱望이었다. 特히 8·15 光復 以後 北韓에서 共産統治를 經驗하고 嫌惡를 느껴 越南한 國民은 거의 모두가 北進統一을 苦待했다. 이러한 雰圍氣를 大韓民國의 어떤 統治者가 抑制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美國 政府는 北進統一을 積極的으로 支持했다. 그래서 美國 政府의 主導 아래 유엔 總會는 유엔軍의 38度線 月經을 支持하는 決議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다른 한便으로, 戰爭을 開始한 北韓은 敗退를 거듭하면서도 征戰할 뜻이 全혀 없었다. 後날 公開된 中國 文書에 따르면, 김일성은 中國 政府에 對해 “우리는 山으로 들어가서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北進을 원산만~大同江 線에서 멈추는 것이 賢明하지 않았을까

    學界 一角에서는, 유엔軍의 38度線 以北 進擊을 支持하면서도 ‘그때 北進을 원산만과 大同江을 잇는 線에서 멈추는 것이 賢明하지 않았을까’ 하는 質問을 提起했다. 이 線에서 멈췄더라면, 後날 中共軍이 介入할 餘地를 없앨 수 있었고, 또 그 線에서 멈춘 境遇 北韓의 ‘領土’는 極度로 制限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北韓이 하나의 ‘國家’ 또는 ‘政權’으로 存續하기 어려워 結局 自然스럽게 崩壞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때의 國民的 雰圍氣를 考慮할 때 到底히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萬一 李承晩 大統領이 그러한 決定을 내렸더라면 于先 軍部의 抵抗 더 나아가 國民的 抵抗에 直面했을 蓋然性이 높다.

    中共軍이 介入하지 않을 것이라는 맥아더의
    主張에는 암수가 끼어 있었나

    美軍을 主軸으로 하는 유엔軍의, 그리고 유엔軍 一員으로서 國軍의 進擊이 繼續되면서 西方世界에서는 中共軍의 介入 蓋然性이 豫告되기 始作했다. 쉽게 말해, 中共軍이 結局 軍事介入해 戰爭이 길어질 것이라는 警告가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對해, 當時 國軍을 包含한 유엔軍을 指揮하던 맥아더 總司令官은 反論을 폈다. 自身의 仁川上陸作戰 成功에 壓倒된 中共이, 더구나 이제 ‘建國’된 지 1年이 채 되지 않는 中共이, 敢히 派兵하지 못할 것이라는 判斷이었다. 그러나 그의 判斷을 뒤엎고 中共은 1950年 10月 派兵했고, 이로써 이 戰爭은 맥아더의 表現대로 ‘完全히 새로운 戰爭’으로 바뀌었다. 

    이 事實에 對해 西方世界의 어떤 硏究者들은 맥아더의 豪言壯談에 ‘암수’가 끼어 있었다고 推測한다. 中共軍이 介入할 것을 내다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戰爭이 擴大되면 될수록 中共을 相對로 戰爭을 持續할 名分이 분명해지고 ‘戰爭英雄’으로서 自身의 存在感은 커진다는 속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多數의 硏究者는 誤判이었다고 본다. 合同參謀本部를 비롯한 本國 政府도 成功할 確率이 거의 없다고 判斷했던 仁川上陸作戰을 劇的으로 성공시킨 뒤 書房權의 讚辭를 한 몸에 받게 되면서 ‘傲慢’해졌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傲慢에 醉해 中共軍은 敢히 介入하지 못할 것으로 誤判했다는 것이다.

    中共軍의 軍事介入은 政黨했나

    韓國軍이 鴨綠江과 豆滿江에 到達해 統一이 눈앞에 다가온 時點이던 1950年 10月 下旬 中共軍이 奇襲的으로 鴨綠江을 건넜다. 充分한 準備를 갖추지 못한 유엔軍은 後退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統一의 꿈은 挫折됐다. 

    어떤 硏究者들은 中共軍의 介入을 ‘正當’한 것으로 봤다. 그 根據로 于先 1950年 9月 30日 밤 中共 總理 兼 外交部長 저우언라이가 週中 印度大使 파니카르를 통해 트루먼 大統領에게 傳達한 메시지를 指摘한다. 여기서 藷芋는 “萬一 南朝鮮 軍隊가 38度線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겠다. 그러나 外國 軍隊가 38度線을 넘어 北上한다면 우리는 派兵하지 않을 수 없다”고 警告함으로써, 國際法의 用語로는 ‘開戰의 名分’을 提示했는데도, 트루먼 大統領이 이 警告를 無視했다는 것이다. 

    中共은 그 以後에도 유엔軍이 38度線을 넘어 국경인 鴨綠江과 豆滿江에 到達하게 되면 그들은 곧 滿洲를 侵略할 것이고 이어 中國大陸을 侵略할 것이라는 憂慮를 表示하면서 ‘保家衛國(保家衛國)’의 論理를 展開했다. ‘집을 保護하고 國家를 지키기 爲해’ 派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美國 政府는 유엔軍이 그 國境을 侵犯할 뜻이 없음을 거듭 分明히 했음을 想起할 必要가 있다. 

    國境에 對한 憂慮는 分明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는 國境에 對해 憂慮하면서 同時에 스탈린을 생각하고 있었다. 當時 스탈린은 中共이 유럽의 유고슬라비아처럼 蘇聯의 影響에서 벗어나 獨自 路線을 걷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마오가 티토처럼 行動하는 것이 아닌가 疑心하고 있었다. 마오는 이 疑心을 풀어주는 것이 自身을 위해서나 中共을 위해서 必要하다고 計算하고 스탈린의 要請에 따라 派兵한 것이다. 

    우리 大韓民國으로서는 統一의 好機를 빼앗기는 苦痛을 맛보아야 했다. 그것으로 말미암은 分斷의 長期化에 對한 責任의 一部는 바로 中共의 軍事 介入에 있다.

    유엔軍은 果然 細菌戰을 實施했나

    1951년 7월 휴전회담에 참석한 유엔군 대표들. [동아DB]

    1951年 7月 休戰會談에 參席한 유엔軍 代表들. [東亞DB]

    中共軍의 參戰으로 戰爭이 擴大되고 길어지던 時點인 1951年 2~3月 蘇聯과 中共은 그리고 그들에 뒤따라 北韓은 유엔軍이 細菌戰을 實施하고 있다고 ‘暴露’하면서 유엔軍을 猛非難했다. 美國은 그 ‘暴露’가 事實에 根據를 두지 않은 謀略 宣傳이라고 맞받아치면서, 眞相을 가리기 위해 국제적십자사에 調査를 要請하자고 提議했다. 그들은 이 提議를 拒否했다. 

    그 以後 많은 硏究書가 出版됐다. 어떤 것은 共産 側의 主張에 기울어졌고 어떤 다른 것은 共産 側의 主張에 根據가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最近의 硏究는 밀튼 라이튼버그(Milton Leitenberg)가 1998年과 2000年 各各 發表한 論文이다. 옛 蘇聯共産黨 中央委員會 文書處에서 1998年 1月 12件의 文書을 찾아낸 筆者는 이 文書에 根據해 中共과 北韓 및 蘇聯이 主張했던 美國의 ‘生物學武器 使用’은 根據가 없거나 造作된 것이었다는 結論을 提示했다.

    休戰을 어느 쪽이 遲延시켰나

    1951年 7月 休戰會談이 始作되면서 國際社會는 休戰 또는 終戰이 빨리 成立될 것이라는 期待를 가졌다. 그러나 會談은 豫想 밖으로 길어져 無慮 2年을 끌었다. 人的 犧牲과 物的 損失이 커졌음은 勿論이다. 이렇게 되자, 休戰을 어느 쪽이 遲延시켰느냐는 論爭이 일어났다. 유엔軍 側에서는 共産軍 側에, 그리고 共産軍 側은 유엔軍 側에 各各 責任을 돌렸다. 

    이 論爭은, 오늘날에도 繼續되고 있다. 美國의 ‘左派’ 歷史學者들은 트루먼 行政府에 責任을 물었다. 트루먼 行政府가 蘇聯을 비롯한 共産 世界의 ‘非人道主義的’ 性格을 世界的으로 浮刻하기 위해, 捕虜送還 問題가 提起됐을 때 ‘全員 送還’李 原則인데도 ‘捕虜 個個人의 自由意思를 確認하자’는 案을 앞세움으로써 會談을 遲延시켰다는 것이다. 

    李承晩 大統領의 決斷인 ‘反共捕虜 釋放’의 正當性을 우리가 疑心하지 않는 것처럼, 美國의 提案이 人道主義에 立脚한 것은 確實하며, 이것을 拒否한 共産 側에 問題가 있었다. 그동안 遲延된 休戰會談이 1953年 3月 스탈린이 죽으면서 急激한 進展을 보인 事實은 스탈린이 休戰會談 進展을 가로막은 張本人이었음을 傍證한다.

    6·25戰爭은 베트남戰爭의 前例였나

    1960年代 末 以後 베트남戰爭이 激化하면서, 特히 美國의 베트남戰爭 軍事 介入에 反對하는 雰圍氣가 擴散하면서, 베트남戰爭에 對한 批判的인 硏究가 深化됐고 그 過程에서 6·25戰爭에 對해 關心이 새롭게 커지는 가운데 6·25戰爭을 베트남戰爭의 前例로 把握하는 著述들이 出版됐다. 英國의 歷史學者 칼룸 맥도널드(Callum MacDonald)의 ‘베트남戰爭에 앞선 코리아戰爭’이 代表的 事例다. 

    그 著書들은 例外 없이 코리아에서의 戰爭과 베트남에서의 戰爭 사이에는 닮은 點이 많다는 上司론(相似論)을 提示했다. 獨立運動家 호찌민이 이끄는 北(北)李 植民地 勢力에 協力한 사람들로 構成된 南(南)을 相對로 民族解放運動을 展開하는 것은 獨立運動家 김일성이 이끄는 北이 植民地 勢力에 協力한 사람들로 構成된 남을 相對로 民族解放運動을 展開한 것과 닮았다는 것이다. 코리아에서 北이 展開한 民族解放運動을 美國을 비롯한 外勢가 가로막았듯이, 베트남에서 北이 展開한 民族解放運動을 亦是 美國을 비롯한 外勢가 가로막았다고 그 著書들은 指摘했다. 

    李 上士論을 提示한 代表的 政治人이 1972年 實施된 美國 大統領選擧에서 민주당 候補로 立候補한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聯邦 上院議員이다. 그는 그러한 論理에서 베트남으로부터 美軍을 撤收시켜야 하며 코리아에서도 美軍을 撤收해야 한다고 提議한 것이다. 

    그러나 이 上士論에는 問題가 있다. 베트남의 境遇 南쪽에서도 호찌민을 支持하는 사람이 많았음이 事實이다. 그러나 코리아의 境遇 南쪽에서는 김일성을 支持하는 사람은 土着 共産主義者들을 除外하고는 없었다. 비록 大韓民國 政府의 施策에 反對하거나 不滿을 가졌다고 해도 金日成을 支持하거나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이 베트남과 코리아의 큰 差異였다.

    김학준
    ● 1943年 中國 선양(瀋陽) 出生
    ● 제물포고, 서울大 政治學科 卒業美國 켄트주립대 政治學 碩士 美國 피츠버그大 政治學 博士
    ● 서울對 政治學과 敎授
    ● 第12代 國會議員
    ● 大統領公報首席祕書官
    ● 韓國政治學會 會長
    ● 檀國大·인천대 理事長
    ● 동아일보 會長
    ● 現 檀國大 碩座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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