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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최영미 “나는 鬪士가 아니다, 내 앞에 떨어진 일을 한 것뿐”|신동아

詩人 최영미 “나는 鬪士가 아니다, 내 앞에 떨어진 일을 한 것뿐”

[허문명의 SOUL] 新作 散文集 펴낸 최영미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0-05-1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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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鷄卵이 아니다, 바위다.

    • 神 내림 받듯 쓴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요즘 내 머릿속엔 數字밖에 없다

    • 只今이 좋다,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 서른에 잔치 끝내고 예순에 맞는 幸福, 다들 ‘쉽게’ 幸福해지자

    • 적게 벌어 적게 사는 삶, 自足한다

    • 사랑은 어렵지만 幸福은 쉽다

    누구나 힘든 時期를 사는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뒤숭숭하고 먹고살기가 漠漠한 이런 때야말로 精神 줄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허문명의 SOUL’은 삶을 뒤흔들어대는 여러 難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靈魂과 精神 줄을 꽉 붙잡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3回 主人公은 30年 넘게 詩를 써온 詩人 최영미입니다. <編輯者 週>



    [박해윤 기자]

    [박해윤 記者]

    詩人 최영미(59)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가 最近 펴낸 散文集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읽으면서였습니다. 

    “作家로서 自尊心 다 팽개치고 市場 바닥에 나서니 오히려 맘 便하다. 다 제 業이다. 사람 잘 못 사귀고, 혼자 도도하고 뻣뻣하게 살아온 代價를 只今 치르고 있다.” 

    “언제 훌훌 떠나도 좋게 집을 만들지 말고 살자. 이게 그동안 삶의 모토였다. 집이니 차니 男便이니 옷欌이니 이런 것들 없어도 사는 데 크게 不便하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所有 않고 버틴 건데 요즘 들어 남들이 다 가진 걸 갖지 못하면 사는 게 無智 疲困하다는 걸 알았다.” 



    “作家가 되지 않았다면 더 幸福했을 텐데. 後悔하지만 이미 지난 일. 차라리 讀書禮讚을 늘어놓아 只今의 나를 合理化하고 讀者들을 誘惑하는 게 더 나으리.”

    나는 鷄卵이 아니다, 바위다

    이 땅에서 時人으로 산다는 것, 特히 女性 詩人으로 산다는 것에 對해 오래 苦悶해 왔을 그도 이제 還甲(그는 1961年生입니다)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습니다. 그는 詩集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펴낸 以後 지난해 髙銀 詩人을 겨냥한 ‘怪物’을 發表하고 法廷 鬪爭에 이르기까지 文壇에 各種 話題를 뿌렸습니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에는 그런 그도 지난 삶에 對한 悔恨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많았습니다. 한便으로 이렇게 率直할 수 있다는 건 內面에 도도히 흐르는 삶에 對한 超然함 德分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012年 原稿 請託을 한 以後 그와의 再會는 8年 만이었습니다. 그는 보랏빛 원피스를 입고 인터뷰 場所에 나왔습니다. 그동안 世波에 많이 시달렸을 텐데 얼굴은 生氣가 돌았습니다. 

    - 젊어 보인다. 

    “철이 안 들어 그렇다.” 

    - 나이 들어 철 안 드는 것도 어렵다. 

    “하긴 그렇다. 어렸을 때야 當然히 철이 들 수가 없고. 40, 50이 되면 選擇이니까.” 

    - 어떻게 보면 自己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아온 거 아닌가. 怨도 限도 없겠다. 

    “只今까진 그랬지만 앞으로 繼續 그러면 亡한다.” 

    깔깔, 少女 같은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神 내림 받듯 쓴 ‘서른, 잔치는 끝났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했다가 고 시인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2월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공판을 마치고 취재진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髙銀 詩人의 性醜行 疑惑을 暴露했다가 고 詩人으로부터 損害賠償 請求訴訟을 當한 최영미 詩人이 지난해 2月 15日 서울 서초구 서울中央地方法院에서 열린 宣告公判을 마치고 取材陣 앞에서 發言하고 있다. [뉴시스]

    - 裁判 이야기를 안 물어볼 수가 없다. 髙銀 詩人이 大法院 上告를 抛棄함으로써 勝利로 終結됐다. 所感이 어떤가. 

    “裁判에 人生을 浪費해 좀 抑鬱하다. 나는 鬪士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앞에 떨어진 일을 한 것뿐이다. 나를 만나본 사람들 特히 민주당 사람들 中에는 ‘최영미 詩人이 잔치가 끝났다는 題目의 詩를 써 過去를 淸算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우리보다 變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80年代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돈에 戀戀하지 않고. 權力에 屈服하지 않는 그런 삶을 지키며 살아왔다. 남들은 鷄卵으로 바위치기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바위라고 생각했다.” 

    그의 詩集 ‘다시 오지 않는 것들’에 收錄된 詩 ‘바위로 鷄卵깨기’에는 이런 堂堂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나는 내 名譽가 그의 名譽보다/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무슨 무슨 賞을 받지 않았지만, 무슨 무슨 賞 候補로도 오르지 않은//계란으로 바위를 친 게 아니라/바위로 鷄卵을 깨뜨린 거지//우상을 崇拜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썩은 鷄卵으로 쌓아올린 巨大한 피라미드를/흔든 건 내가 아니라 當身들이었지

    - 當身에게 詩(詩)란 뭔가. 

    “속에 고인 덩어리를 터뜨리는 거다. 멋모르고 詩人이 됐다. 첫 詩集을 낼 때는 생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터져 나왔다. 世上에 할 말이 너무 많았던 거다. 자다가 깨면 詩가 와 있었다고 할까. 그냥 쓰면 詩가 됐다. 두 番째 詩集 ‘꿈의 페달을 밟고’부터는 달라졌다. 時人이라는 自覺이 생겼다. 詩語를 다듬고 校程度 보면서 세련돼졌다고 할까. 그러면서 짜내고 만들기 始作했다. 생각하지 않고, 만들지 말고, 받아 적어야 좋은 詩가 나온다. 뭘 모르고 쓰는 게 좋은 詩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只今도 나를 쓰게 만드는 原動力은 ‘生活’이다. 日常에서 느끼는 생각, 느낌,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마음속에 뭔가가 고이려면 나만의 時間이 必要하고 世上과 距離를 두어야 한다. 그래야 안에 쌓이는 게 많다.” 

    實際로 그의 詩는 生活에서 우러나온 게 많습니다. ‘50代’란 詩를 옮겨볼까요.

    헤어진 愛人보다 階段이 무서워//2층에서 내려올 때도 엘리베이터//비 오는 날, 버스에 빈자리가 없으면/예술이고 喇叭이고 다 귀찮아(중략) 축 늘어진 고기가 되어/손잡이에 매달려 흔들리면, 生이 總體的으로 흔들리지(중략) 

    - 詩人도 마감에 쫓기나. 

    “畫家들이 展示 日程 잡히면 밤새고 熱心히 作品을 生産하듯 나도 마찬가지다. 恒常 媤집 낼 때 이番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내 머릿속엔 數字밖에 없다

    - 왜? 

    “할 말을 다한 것 같아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나왔을 때도 그랬다. 周邊에서 ‘최영미는 다시는 媤집 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努力해서 쓰는 게 아니라 神 내림을 받듯 쓴 詩라는 거다. 그런 媤집은 平生 한 番 갖기도 어렵다고 하더라. 돌이켜 보면 내 삶과 바꾼 거였다. 어떻게 보면 詛呪이기도 하지. 근데 앞으론 몰라. 요즘 내 머릿속에는 數字밖에 없다.” 

    - 1人 出版社를 運營한다고 들었다. 

    “‘어떻게 하면 再考를 없애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난 인터넷도 멀리 했고 카톡도 늦게 始作했는데 出版社를 始作한 以後 인터넷에 자주 들어간다. 컴퓨터를 켜고 그 複雜한 로그인을 해서 書店마다 들어가 販賣 現況을 살펴보고 달曆에 적고 다음 版을 언제 찍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한다. 販賣가 不振한 날은 하루 終日 憂鬱하다. 하루에 온라인 書店에서 10卷은 나가야 하는데….” 

    - 다른 사람 冊도 좀 내면 어떤가. 

    “그러고 싶다. 좋은 詩人 글 받아서 좋은 詩集 내고 싶은데 아직 餘力이 없다. 코로나 때문에 打擊이 크다. 요즘은 넷플릭스만 보는 것 같다.” 

    - 講演도 못 다니고 있겠다. 

    “올 스톱됐다. 月給 받는 사람이 第一 부럽다.” 

    - 詩集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1萬 部 넘게 찍었으면 많이 팔린 거 아닌가. 

    “그렇다. 코로나가 始作될 즈음 出刊한 ‘돼지들에게’ 改正增補版度 2刷에 들어갔다.” 

    - 作家가 出版社 社長이 되면 쓰고 싶은 걸 쓰는 게 아니라 팔리는 詩, 讀者 입맛에 맞추는 詩를 생각하고 쓰게 되지 않을까. 

    “굶어죽을 바에야 그럴 일은 없다.” 

    - 그런 堂堂함은 어디서 나오나. 

    “自信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20代, 30代보다 只今이 幸福하다는 거다. 30代 내 周邊에 있던 사람들보다 只今 있는 사람들이 더 낫다. 돌이켜 보면 젊은 時節은 늘 不安했다. 뭘 해야 할지 몰랐고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고.” 

    暫時 沈默이 흘렀고 그의 눈瞳子가 흔들렸습니다.

    只今이 幸福하다

    “돌이켜 보면 別생각 없이, 그때그때 나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았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文學賞을 탈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많이 안 했다. 그때그때 내가 꽂히는 대로 오바마에 빠지고, 蹴球에 빠지고.” 

    - 참, 한때 蹴球狂이었지. 

    “10年間 거의 每日 蹴球 競技를 봤다. 英國 月刊誌 ‘월드 사커(World Soccer)’를 사러 春川에서 汽車 타고 光化門 교보문고까지 갔다. 40代를 蹴球에 바쳤다. 한 新聞社에 提案해 유럽 蹴球 奇行을 했는데 5週間 유럽을 돌면서 只今은 스타가 된 孫興慜, 박지성 다 만났다. 온몸에 錄音器 카메라 노트북 메고 혼자 유럽을 떠돌면서 밤에 競技 보고 새벽까지 原稿를 썼다. 바르셀로나 PC 房에서 原稿를 보낸 적도 있다. 로마 한 호텔에서 몇 달 만에 거울을 봤는데 온몸이 傷處투성이였다.” 

    - 生活에 不便이 없었으니까 可能했던 거 아닌가. 

    “40代 때만 해도 原稿 請託이 들어왔다. 貯蓄도 조금씩 했다. 혼자 살 때는 節約하면 됐다. 2010年 程度까지는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50代 들어서 父母에 對한 扶養 責任이 생기면서 ‘돈 걱정’하기 始作했다. 아들이 없다 보니 맏딸인 내가 堪當할 일도 있었다. 春川 살 때 아버지가 아프고, 엄마가 아프고, 갑자기 責任感이 몰려왔다.” 

    - 왜 春川으로 갔나. 

    “純全히 住居費 때문이었다. 傳貰費가 너무 오르는 거였다. 집 보러 다니는데 坪數가 작을수록 狀態가 엉망이었다. 結局 一山을 抛棄하고 눈 감고 찍은 게 春川이었다. 그때는 電鐵이 생기기 前이라 1億 원이면 집을 샀다. 4年 半을 살았다.” 

    - 다시 一山으로 온 理由는? 

    “小說 ‘靑銅庭園’의 背景이 1980年代였는데, 서울에서 資料를 많이 찾아야 했다. 게다가 엄마가 入院한 病院까지 오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를 모실 療養院을 알아보느라 電鐵과 버스를 열 番이나 갈아탄 적도 있다. 到底히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에 다시 首都圈으로, 一山으로 왔다.” 

    - 散文集을 보면 ‘왜 이렇게 살았을까. 왜 이 길을 擇했을까’ 문득문득 悔恨 같은 게 느껴진다. 한때는 生活保護對象者가 됐음을 公開한 적도 있는데. 

    “페이스북 하면서 公開한 건데, 生活補助金이 아니라 勤勞奬勵金을 받은 것이었다. 나는 그前까지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中産層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稅務署에서 지난 年度 所得이 1300萬 원 以下고, 집도 없으니 奬勵金 對象者라더라.” 

    - 每달 나오는 거였나. 

    “동생이 한 첫 質問하고 똑같다(웃음). 한 番 나오면 끝이다. 몇 十萬 원. 어떻든 中産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게는 多少 衝擊이었다. 다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많이 번다는 거잖아. 韓國 사람들이 富者구나 싶었다. 周邊 사람에게 月給을 물어보기 始作했다. 年所得 얼마니? 敎師 月給은? 내가 勤勞奬勵金 받았다고 했더니 굶고 사는 줄 알고 라면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百貨店 갔더니 ‘基礎生活受給者가 百貨店도 다니느냐’고 물어보더라. 그런 不快한 視線도 經驗했다. 韓國 사람들은 가난하면 無視한다면서 옷이라도 잘 입고 다니라고 동생이 옷을 사주기 始作한 것도 그즈음이다.” 

    언뜻 부끄럽거나 深刻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는 始終一貫 밝은 表情이었습니다.

    적게 벌어 적게 산다, 自足한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8년 만이었다. 그는 별로 늙지 않았다. [박해윤 기자]

    그女를 다시 만난 건 8年 만이었다. 그는 別로 늙지 않았다. [박해윤 記者]

    - 요즘 사람들이 第一 두려워하는 게 가난해지는 것 아닐까. 

    “돈을 對하는 두 가지 態度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많이 벌어 많이 쓴다고 幸福할까? 나는 富者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적게 벌어 적게 산다, 自足한다.” 

    - 어떻게 實踐하나. 

    “특별할 것 없다. 사고 싶어도 마음에 드는 物件이 없다. 돈이 問題가 아니다. 옷도 구두도 한 季節에 하나면 充分하다. 맘에 드는 것 가끔 있지만 너무 비싸다. 그래서 안 산다. 가난? 別거 아니다. 小說 ‘흉터와 무늬’ 쓸 때 참 어려웠다. 輸入 하나 없이 몇 年 동안 長篇을 써야 하는 狀況이었다. 正말 漠漠했다. 엄마한테 돈을 꾸기도 했다. 그때 한 달에 얼마로 살 수 있나 테스트한 적이 있다. 100萬 원 없이도 살더라. 傳貰 살았는데 通信費 等 基本으로 每달 25萬 원은 나갔다. 나머지는 節約했다. 50萬 원이면 한 달 生活費가 되더라. 거의 食費였다. 車가 없으니 交通費도 別로 안 들었다. 없으면 쪼개 쓰는 재미가 있다.” 

    - 인색해지지 않나, 마음이. 

    “元來 사람 잘 안 만나니 쓸 데도 別로 없다. 모르는 사람 만나는 게 두렵다. 모르는 사람 만나 맛없는 飮食 먹으면 돈 쓰고 氣分 나쁘고 너무 싫다.” 

    그의 詩 中 ‘내버려둬’라는 게 있습니다. 內容은 이렇습니다.

    詩人을 그냥 내버려둬/혼자 울게 내버려둬//가난이 지겹다 투덜거려도/달을 쳐다보며 浪漫이나 먹고살게 내버려둬/무슨 무슨 保險에 들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건강검진 왜 안하냐고 잔소리하지 말고/누구누구에 잘 보이라고 訓戒일랑 말고/저 혼자 잘난 맛에 까칠해지게 내버려둬/사교의 테이블에 앉혀 억지로 拍手치게 하지 말고/편리한 앱을 깔아주겠다/대출이자가 싸니 어서 집사라/헛되이 부추기지 말고/집없이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둬/헤매다 길가에 고꾸라지게/제발 그냥 내버려둬

    - 길가에 고꾸라지게 제발 내버려둬 달라는 말은 眞心인가. 

    “反語法이지. 내버려두지 말라는 말이지(그가 또 깔깔 웃더니 이내 深刻한 表情이 됐습니다). 마지막에 ‘世上을 怨望하며 눈을 감지 않게’라는 行을 썼다가 지웠다.” 

    - 世上을 怨望한 적 있나. 

    “있지.” 

    - 잘못 살았다는 생각 때문에? 

    “主로 혼자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왜 大韓民國은 假짜가 眞짜보다 더 待接을 받을까, 왜 惡化가 良貨를 構築할까. 내가 보기엔 저 글은 假짜인데, 같은 생각 말이다.” 

    - 當身이 쓴 散文集에는 ‘나와 다른 陣營, 틀린 便에도 옳은 사람이 있음을, 늘 올바른 쪽도 틀린 쪽도 없다는 事實을 알게 되며 철이 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假짜와 眞짜度 없는 것 아닌가. 

    “客觀的인 事實은 存在하지 않나. 내가 裁判을 해봤잖아. 했느냐, 안 했느냐 팩트는 있는 거다. 藝術에도 事實은 存在한다. 한 걸 안 했다고 하고 안 한 걸 했다고 하면 안 되지.”

    ‘이 나라는 나와 맞지 않는다’ 느꼈다

    문득 話題를 바꾸고 싶어졌습니다. 

    - 點(占) 같은 거 본 적 있나. 

    “내 돈 내고 본 적은 한 番도 없다.” 

    - 運命을 믿나. 

    “性格이 運命이다.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다.” 

    - 性格은 타고나는 것인가. 

    “遺傳子도 重要하지만 만들어가는 要素도 있다.” 

    - 當身 性格 잘 아나. 

    “너무 잘 알아 頉이다.” 

    - 自責感이나 後悔는? 

    “男子 兄弟가 없다 보니 男子에 對한 理解가 不足했다. 文人이 周邊에 없었고 文學을 專攻하지 않은 狀態에서 갑자기 詩人이 됐다. 첫 詩集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嫉視와 警戒의 對象이 됐다. 謙遜했어야 했는데, 우리 집 遺傳子에 謙遜함은 없다. ‘尺’도 못한다. 大學까지 서울대를 나왔으니 世上은 내게 더 謙遜함을 要求했는데 내가 그걸 못 했다. 傲慢해 보이고 그랬다. 그건 내가 反省한다.” 

    - 冊에 ‘멀쩡한 사람 바보로 만드는 S臺 꼬리票’라는 句節이 있다(그는 서울대 西洋史學科를 卒業했습니다). 

    “韓國 社會가 學歷 社會이지 않은가. 文化藝術界는 서울大 出身이 드물다. 少數라서 받는 不利益이 있다. 注目받는다는 利得도 있지만, 男子는 괜찮은데 서울大 나온 女子들은 運身의 幅이 좁다. 한때 就職하려고 메리야스 會社 社報 編輯者에 支援했는데 서울對 出身은 人和에 問題가 있다며 떨어뜨렸다. 擔當者가 ‘아마 다른 會社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하더라.” 

    - 大韓民國 最高 學閥인데. 傲慢함은 없었나. 

    “있었지만 깨졌다. 근데 나는 깨졌는데 周邊에서 부담스러워했다. 서울大 나온 男子들한테 幻滅도 많이 느꼈다. 홍대 大學院 다닐 때 너무 좋았다. 來日이 試驗 날인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애들이 다 알려주고 노트도 빌려주고 그랬다.” 

    두 時間餘가 흘렀습니다. 우리는 暫時 쉰 뒤 다시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숨을 고른 뒤 그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오래前부터 이 나라가 나한테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30代 中盤부터 移民 가고 싶었다.” 

    - 어디로? 

    “어디든. 韓國의 文學 시스템에 適應이 안 됐다. 사람 만나는 것 싫어하고, 文壇 社交界 싫어하는 내 性格에 늙으면 어떻게 될지 느껴졌다. 다른 나라 言語로 詩를 쓰든지, 職業을 바꾸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니 運動選手를 했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근데 그때 文壇에서 賞을 준 거야. ‘돼지들에게’ 詩集을 正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냈는데 그걸로 이수文學賞을 탔다. 마침 獨逸 월드컵이 열렸고 放送 3社에서 同行 取材 러브 콜이 왔지만 契約 直前에 깨졌다.” 

    - 왜? 

    “汝矣島 放送局에서 카메라 테스트를 한 後 放送國 幹部를 紹介받는 瞬間, 서로가 서로를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言論界, 特히 放送國 男子들이 女子 作家를 無視하는 것도 싫었다.” 

    - 靈魂이 成熟해졌다고 느끼는 때가 있나. 

    “長篇 두 卷 쓰고 나서다. 거의 自傳的 小說이었는데. 나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날을 理解하고 容恕하게 됐다. 내가 自尊心이 强해 나 自身을 容恕하기 힘든 사람이었는데 그래,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認定하게 됐다.” 

    - 宗敎가 있나. 

    “가톨릭 洗禮는 받았지만 聖堂에 안 간다. 神을 믿지는 않지만 느끼는 瞬間이 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볼 때, (暫時 沈默 後) 엄마 療養病院에 있을 때 힘들고 아픈 사람이 다른 사람 配慮하는 모습을 보면서 神을 느낀다.”

    宗敎는 없지만 神을 믿는 瞬間들

    - 누구나 中年이 되면 父母가 아픈 狀況에 맞닥뜨린다. 最近 4年間 거의 每日 도시락을 싸들고 母親 療養病院에 다녔다고 썼더라. 

    “처음 몇 달은 憂鬱했지만 風景이 익숙해지더라. 거기에도 社會가 있고 드라마가 있다. 꾀病 부리는 할머니도 있고, 家族끼리 마구 싸우기도 한다. 온갖 집 事緣도 다 듣는다. 假飾이라곤 숨을 곳이 없는 人間 市場이다. 憐憫의 程度 생긴다. 子息 있다고 다 幸福한 것도 아니더라. 看護師들을 正말 다시 보게 됐다. 醫師들은 暫時 왔다가지만 看病人과 看護師들은 리얼리스트들이다. 이건 다른 이야긴데, 療養病院에는 두 種類의 사람들이 있다.” 

    - 어떤? 

    “家族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이 中에 누가 더 幸福할까?” 

    - 너무 當然한 質問 같다. 家族이 있는 사람들 아닐까. 

    “盧, 家族이 없는 사람들 얼굴이 더 밝다.” 

    - 뜻밖이다. 

    “期待가 없으니까 그렇다. 엄마 病室에 같이 있는 한 할머니에게 家族이 찾아온 것을 한 番도 본 적이 없다. 美國에서 살다 왔다고 하는데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 할머니 얼굴이 第一 밝고 훤했다. 自己도 휠체어에 依支하는 아픈 渦中에도 다른 사람들을 살핀다. 남에게 좋은 일 하니까 얼굴도 밝다. 어떤 할머니는 子息들이 왜 안 올까 맨날 不平한다. 孫子가 왔는데도 한 달에 한 番은 와야지 타박한다.” 

    - 老後를 생각하면 憂鬱하지 않나. 

    “생각 別로 안 한다. 늙어가는 것도 別로 두렵지 않다. 나는 只今도 사는 게 즐겁다. 내가 貪食家高 慇懃한 美食家다. 싸고 좋은 밥집도 많이 안다. 좋아하는 蹴球 競技 3탕 4탕 본다. 幸福, 不幸? 不幸하지 않으면 幸福한 거다. 나는 내가 不幸해지는 條件을 안 만든다. 例를 들어 모르는 사람하고는 안 만난다. 職場 生活을 하지 않으니 人間關係를 어느 程度 調節할 수 있다. 人生은 ‘싫은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天國’이다. 나는 나만 나를 안 괴롭히면 幸福하다.” 

    그는 “健康檢診 받은 지도 10年이 됐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健康檢診을 받을 때 醫師가 自己가 오늘 본 患者 中에 내 表情이 第一 좋다면서 앞으로도 그렇게 사시라, 밝고 肯定的인 사람은 癌에 안 걸린다고 하더라. 나는 基本的으로 樂天的인 사람이다.” 

    - 得道한 사람 같다. 

    “得道까지는 아니지만 좀 내려놓은 게 있다.”

    사랑은 어렵지만 幸福은 쉽다

    - 契機가 있었나. 

    “特別히 어떤 時點이라기보다 엄마 아빠가 아프면서 삶과 죽음에 對해 생각을 많이 했다. 恒常은 아니지만 大體的으로 내가 願하는 일을 해오며 살았던 것 같다. 아무리 비싸도 가고 싶은 데 가고 멋도 엄청 부려봤다.” 

    - 사랑도 願 없이 해보고? 

    “그건 좀 自身 없다. 脆弱點 中 하나다, 사랑은.” 

    - 남은 삶에서 하고 싶은 거 있나. 

    “이집트에 가고 싶다. 沙漠 못 가봤다. 外國에서 어디든 1年 以上 살고 싶다. 석 달 以上 머물지 못했다. 裁判 끝나면 이기든 지든 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묶였다.” 

    - ‘쉽게 幸福해지자’는 말을 자주 쓰던데. 

    “예이츠가 쓴 詩 ‘다시 부르는 옛 노래’ 中 ‘쉽게 사랑하라’는 말에서 따온 거다. 예이츠도 쉽게 사랑을 못 해 悔恨에 잠겨서 말한 거다. 사랑도 幸福도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좀 어렵지만 幸福은 쉽다. 萬若 不幸했다면 나는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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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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