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는 떠받들고 천안함은…분해서 못 죽는다”|신동아

“세월호는 떠받들고 천안함은…분해서 못 죽는다”

[6·25 70周年] 文大統領에게 天安艦 責任 따진 故 민평기 上司 어머니 윤청자 女史

  • 배수강 記者

    bsk@donga.com

    入力 2020-05-23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얼마나 예쁜 아들이었는데… 屍身 너무 추워 보여

    • 文 막아서며 “天安艦 누구 所行이냐”

    • 文 ‘認定한다’는 말, 무슨 뜻인지 몰라 달려갔다

    • 끝내 ‘천안함은 北韓 所行’ 한마디 안 하고…

    • 大統領 參席 消息에 ‘選擧 때문이구나’

    • 김영철 訪南한다기에 靑瓦臺 뛰어들려 했다

    • 歲月號 當時 遺族들에 直接 쑨 綠豆粥 160人分 膳物

    • 天安艦 再調査? 제대로 하겠나, 우스갯거리 만들지

    • 補償金 寄附하고 海外 參戰勇士에 食事 待接

    • 나라 바로잡을 때까지 똥물이라도 먹고살아야지

    [박해윤 기자]

    [박해윤 記者]

    지난 3月 27日 國立大前賢充員에서 열린 第5回 西海守護의 날 記念式에서 焚香을 하던 文在寅 大統領을 막아선 白髮老人이 있었다. 그는 文 大統領에게 “天安艦 爆沈 事件이 누구 所行이냐”고 泣訴하듯 물었다. 

    老人은 2010年 3月 26日 北韓 潛水艦의 魚雷 攻擊으로 沈沒한 天安艦 乘務員 고 민평기 上司의 어머니 윤청자(77) 女史다. 그는 이날 記念式 直後 스트레스性 心臟浮腫으로 病院 身世를 졌다. 當時 尹 女史 아들은 “記念式 일로 어머니가 너무 답답해하셔서 인터뷰를 하면 病勢가 더 심해질 수 있다”며 ‘신동아’의 인터뷰 要請을 鄭重히 拒絶했다. 무엇이 그렇게 답답했을까. 

    한 달餘 家族과 對話 끝에 5月 14日 午前 忠南 扶餘郡의 한 神經外科에서 尹 女史를 만날 수 있었다. 尹 女史는 얼마 前 다리 骨折을 當해 入院 中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病院에서 마련해 준 빈 病室로 힘겹게 들어서던 그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슈” 하며 드링크 飮料 두 甁을 건넸다. 그와 빈 病床에 걸터앉아 3月 27日 ‘그날’로 되돌아갔다.

    내가 文大統領에게 다가간 理由

    윤청자 여사가 3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분향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윤청자 女史가 3月 27日 國立大前賢充員에서 열린 西海守護의 날 記念式에서 焚香하는 文在寅 大統領에게 質問을 하고 있다. [뉴시스]

    -다리는 괜찮으세요? 

    “힘들죠. 第 不注意로 넘어져 骨折傷을 입었어요.” 

    -3月 27日 西海守護의 날 記念式 다음 날 一部 뉴스가 났는데요. 

    “現場에 있던 記者들이 썼나 봐요. 農事짓고 있는데 밭으로 찾아온 記者도 있었는데 正式 인터뷰는 안 했어요. 제 속마음을 애기하기도 싫었고요.” 



    -그렇군요. 그날 記念式에 參席한 文 大統領에게는 왜 다가갔나요. 

    “前날(3月 26日) 天安艦 爆沈 10周忌 行事를 하고 집에 와 있었어요. 27日은 合同 行事였는데 大統領이 온다는 걸 全혀 몰랐어요. 27日 行事場에 가니 ‘大統領이 온다’며 수군거리기에 ‘機會’를 노렸어요(서해수호의 날은 제2연평해전, 천안함 被擊, 延坪島 砲擊挑發로 犧牲된 55勇士를 함께 기리는 記念日이다).” 

    -왜 機會를 노렸나요. 

    “大統領을 만날 機會가 없었으니까요. 혼자 생각 많이 했어요. 大統領께 말은 하고 싶은데, 옆으로 바로 다가가면 警護員들이 나를 잡을 거 같았어요. 그래서 한 걸음씩 몰래몰래 다가가 焚香하는 大統領 손을 붙잡고 물었어요. ‘大統領님, 누가 天安艦 우리 아이들을 저렇게 했는지 確實하게 말씀해 주세요. 누가 했는지’라고.” 

    -大統領 答辯은 어땠나요. 

    “‘우리 政府에서는 認定하고 있어요. 認定합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무엇을 認定한다는 意味였나요. 

    “그러게요. 나는 그게 답답했어요. 이남일 수도 있고, 이북일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요. 大統領 손을 놓으니 焚香하고 바로 내려가셨어요. 焚香 뒤 天安艦 46勇士 等 墓域參拜가 豫定돼 있었는데, 버스(遺家族을 태운 團體버스)를 타고 가면 大統領을 못 보겠다 싶어 허겁지겁 먼저 가서 기다렸죠.” 


    大統領 參席 消息에 머리끝이…

    -왜요. 

    “大統領의 ‘認定합니다’는 말, 그 말이 都大體 무슨 말인지 確認하려고요. 뭘 認定한다는 건지.” 

    -그래서요. 

    “大統領을 비롯해 높으신 분들이 次例로 오시기에 再次 가서 물었어요. ‘大統領님 이番에는 (天安艦 爆沈이 누구 所行인지를) 確實히 밝혀주세요’ 했더니 ‘알았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期於코 ‘北韓 所行’이라는 말은 안 해요.” 

    -大統領이 參席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땠나요. 

    “瞬間 머리끝이 쭉 올라가더라고요. 歷代 大統領들과 달리 文 大統領은 한 番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遺家族들은 ‘投票(4·15 總選) 앞두고 있어 票 얻으러 왔나’ 하고 생각했죠.” 

    -서운한 感情이 있었나요. 

    “子息을 그렇게 보냈는데 서운한 게 왜 없겠어요. 家庭에 父母가 있다면 나라에는 大統領이 國民의 父母 아닌가요. 國民은 아파하는데 ‘새끼(子息뻘) 같은’ 金正恩(北韓 國務委員長)에게 끌려다니고, 2018年 平昌冬季올림픽 閉幕式에 (天安艦 爆沈 主犯으로 알려진) 김영철(北韓 朝鮮勞動黨 中央委員會 副委員長)을 끌어들이는 大統領이 어디 있나요. 그때 金영철이가 온다고 해서 靑瓦臺 앞에서 天安艦 遺族들과 데모하고, 이 답답한 心情을 傳達하려 靑瓦臺에 뛰어 들어가려고 했어요. 只今도 天安艦 爆沈이 北韓 所行이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大統領이 (北韓 所行)이라고 말해 줬으면….” 

    -國家報勳處 等에서 天安艦 遺家族들에게 當時 김영철의 訪南에 對해 理解를 求하지는 않았나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런 소리 한番 들었으면 願이 없겠어요. 南北 狀況이 이러니 理解해 달라고 했으면…분통이 터져 눈을 못 減겠어요. 그런데 政治人들이나 官僚들은 딴 데 가서는 어떻게 했나요. 입에 올리기도 싫어요.” 

    尹 女史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쳤다. 

    “天安艦 追慕 行事 때 오는 政治人들은 遺族에게 人事도 안 하고 愛國歌도 안 부르는 境遇도 많았어요. 그런데 세월호 事故 때 政治人들 行動은 어땠나요. 民主黨 政治人들은 ‘歲月號’는 떠받들고, 나라를 지키다 散花한 天安艦 事件은 ‘北韓 所行이 아니다’ ‘爆沈 原因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遺族들은 왜 날뛰느냐’ 같은 모진 말을 쏟아내요. 그런 말 한 政治人들 멱살이라도 잡으려고 全國을 돌아다닌 적도 있고, 天安艦 追慕 行事에 온 親北(性向) 人士에게 抗議하기도 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子息이 아파서 보냈다면 그건 父母와 먼저 간 사람 몫이지만 天安艦 46名은 무슨 罪가 있나요. 그런데도 北韓을 斗頓하고 이렇게 遺族 가슴에 大못 박으면 됩니까. 그 생각을 하면 四肢가 떨려요. 앞으로 누가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나는 분해서 죽지도 못해요. 나라 지키다 殉國한 勇士들을 尊重해야죠. 나라를 바로잡을 때까지 똥물이라도 먹고살아야죠.”

    농사지은 綠豆로 粥 쑤어 찾아간 彭木港

    尹 女史는 2014年 세월호 事件 當時 全南 珍島郡 팽목항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直接 栽培한 綠豆로 粥을 쑤어 160人分을 도시락에 담아 갔다. 以心傳心이었다. 

    “내 子息을 그렇게 보내고 보니 歲月號 父母들 마음이 어떤지 너무 잘 理解가 됐다. 작은 위로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갔다”는 그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記者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동안 質問을 할 수 없었다. 

    尹 女史는 天安艦 爆沈 事件이 있던 2010年 3月 26日 밤을 생생히 記憶했다. 천안함은 그날 午後 9時 22分 北韓 潛水艦의 魚雷 攻擊으로 沈沒했다. 어려운 質問을 했다. 

    -天安艦 事故 當時 記憶이 나세요. 

    “생생하죠. 밤에 TV를 보니 ‘西海에서 天安函이 두 동강 났다’고 해서 가슴이 후들후들거렸어요. 坪機가 平澤에서 勤務했으니 或是나 해서 電話를 했죠. 그런데 信號는 가는데 받질 않아요. 밤새 받지 않아요. 얼마 있다가 失踪者 名單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아들 이름이 안 보여 安堵했는데, 5次 失踪者 名單에 評機가 나왔어요. 아이고,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펄쩍펄쩍 뛰다가 슬리퍼 바람에 둘째 아들이 있는 論山으로 가서 곧장 平澤으로 갔어요.” 

    尹 女史는 한 손은 가슴에, 한 손은 아들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손짓을 했다. 

    “軍艦을 타고 아들이 散花한 바다로 가는데 칼바람이 왜 그렇게 불던지 오래 있지도 못했어요. 그때 빨리 좀 찾아달라고 얼마나 소리쳤는지…. 結局 한 달 뒤에 아들 屍身을 收拾했는데, 太極旗를 덮고 얼굴만 내민 坪機가 얼마나 추웠으면 얼굴에 浮氣(浮氣)도 없어요. 너무 추워 보여 품에 안으려니 軍人들이 屍身을 만지지 못하게 해요. 火葬터에 갈 때 아들 다리를 만져보니 兩쪽에 깁스를 해 놨더라고요. 만지면 屍身이 毁損될까 봐…. 얼마나 예쁜 아들이었는데요.” 

    -고 민 上士는 어떤 아들이었나요. 

    “5男妹 中에 막내였는데, 工夫도 第一 잘해서 大學도 중어中文學科 首席으로 들어갔어요. 男便이 第一 아끼던 아들이었어요. 그래서 男便도 衝擊이 컸어요. 顯忠院에 갈 때면 나는 땅을 치면서 원통해하지만 男便은 저 멀리 가서 앉아 혼자 울고 있어요. 男便은 退職 後 文化財解說師로 일했는데, 아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는 每日 술에 依支했어요. 結局 膀胱癌에 걸려 再昨年 80歲를 一期로 坪機가 있는 데로 가셨어요.”

    “銃알이라도 만들어달라”

    윤청자 여사가 2011년 3월 25일 경기 평택시 해군 제2 함대사령부에서 열린 ‘3·26 기관총’ 기증식에 참석해 K-6 기관총을 살펴보고 있다. 윤 여사 왼쪽은 김성찬 당시 해군참모총장.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윤청자 女史가 2011年 3月 25日 京畿 평택시 海軍 第2 艦隊司令部에서 열린 ‘3·26 機關銃’ 寄贈式에 參席해 K-6 機關銃을 살펴보고 있다. 尹 女史 왼쪽은 김성찬 當時 海軍參謀總長. [원대연 동아일보 記者]

    -가슴이 아팠겠어요. 

    “말해서 뭐해요. 우리는 惶悚하죠. 아직 屍身을 收拾하지 못한 6名의 父母들도 있는데 그분들 마음은 오죽하겠어요. 以後에 天安艦을 引揚했다고 해서 가 보니 너무 悽慘해 큰아들 報告 ‘坪機가 前生에 무슨 罪가 있느냐. 그리고 補償金이 무슨 必要가 있느냐. 國防을 튼튼히 하는 데 써야겠다’고 했더니 아들도 ‘그렇게 하시라’더군요.” 

    아들을 떠나보내고 3個月 뒤인 2010年 6月, 當時 이명박 大統領은 天安艦 遺族을 靑瓦臺로 招請했다. 이 자리에서 尹 女史는 補償金 1億 원을 寄附했고, 海軍은 深思熟考 끝에 이 誠金을 包含해 5億 원을 들여 陷穽에서 敵을 直接 打擊할 수 있는 K-6 機關銃 18梃을 購入해 ‘榮州函’ 等 2艦隊 所屬 9隻에 2梃씩 裝着했다. 銃身에는 ‘3·26 機關銃’이라고 새겼다. 2011年 3月 25日 天安艦 爆沈 1週期를 맞아 열린 ‘3·26 機關銃 寄贈式’에서 尹 女史는 새로 裝着한 3·26 K-6 機關銃을 붙잡고 嗚咽했다. 

    -그래서 補償金을 傳達했군요. 

    “靑瓦臺가 招請해서 갔는데 돈을 누구에게 傳達할지 몰랐어요. 그래서 警護員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높은 사람’ 좀 불러달라고 했더니 自己에게 말하라고 해요.” 

    -그래서요? 

    “‘北韓 놈들이 다시는 귀여운 아들딸들을 하늘에 보내지 않도록 銃알이라도 만들어달라’고 誠金을 傳達했어요. 그런데 大統領이 얘기를 들었나 봐요. 좀 있다가 찾는다고 해서 갔더니 李 大統領이 人事를 하며 慰勞해 줬어요. 그 때도 大統領에게 ‘國防을 튼튼히 해달라’고 付託했어요. 저는 혼자서 農事짓고 먹고 살아요. 돈도 많이 必要 없어요. 힘내라고 營養劑도 주고 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營養劑를요? 

    “2010年 어느 날 택시를 타고 5名이 찾아왔대요. 제가 없으니 둘째 아들에게 ‘어머니가 얼마나 아프시겠느냐’며 주고 갔대요. 나중에 열어보니 職員들이 모은 誠金도 있더라고요. 以後 每年 營養劑와 膳物을 보내줘요. 그런데 올해는 마스크를 보내주셨는데, 마침 連絡處가 印刷된 包裝紙를 통해 連絡이 닿았어요. 京畿道에서 企業을 하는 분이었는데 10年 만에 通話를 했어요. 얼마나 고마운지….” 

    尹 女史는 會社 職員들이 募金해 傳達한 誠金(898萬8000원)도 2艦隊 司令部에 寄附했다.

    6·25戰爭과 ‘앞잡이’들

    -올해는 6·25戰爭 70周年이 되는 해이기도 해요. 

    “8살 때 6·25街 나서 只今도 생생히 記憶해요. 그때 忠南 舒川郡 魔性縣이라는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머슴살이하던 사람들이 警察이나 富者들을 北韓 人民軍에게 密告하면 人民軍들이 와서 죽이고 불을 지르고 했어요. 戰爭이 끝난 뒤에는 家族을 잃은 住民들이 이들 ‘앞잡이’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물어뜯고…당시 避難을 가면서도 사람이 보이면 논두렁에 숨어 지냈어요. 戰爭은 絶對 일어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國防만큼은 튼튼히 해야 하는데, 政府는 北韓도 받지 않겠다는 쌀을 왜 주려고 합니까. 北韓은 우리 것 받아먹고(대북지원) 核을 만드는데, 우리도 必要하면 核武器까지 만들어 對備를 해야죠. 얼마 前 北韓이 哨所에 銃을 쐈는데도(5월 3日 北韓軍의 中部戰線 非武裝地帶 내 監視哨所(GP) 銃擊 事件) ‘誤發 事故’라며 덮는 데 汲汲하잖아요. 北韓 김정은도 그래요. 제 百姓들 밥 잘 먹여서 거둘 생각은 안 하고 自己 배만 불려야 되겠어요. 저는 戰爭을 經驗해 보니 6·25 때 우리를 도와준 參戰國들에 感謝 人事를 하고 싶어 몇 해 前에는 에티오피아에 다녀왔어요.” 

    -에티오피아에는 어떻게…. 

    “에티오피아 軍人 數千 名(3518名 派兵, 658名 戰死)李 韓國에 와서 목숨을 잃었는데, 參戰勇士들 大部分이 어렵게 산다는 걸 TV를 통해 알게 됐어요. 國民으로서 ‘고맙다’는 人事라도 하고 싶어 參戰勇士를 돕는 牧師 한 분을 紹介받았어요. 두바이를 經由해 에티오피아에 가서 參戰勇士 20餘 名에게 點心 食事 한番 待接하고 왔어요. 너무 고맙다고 人事했죠.” 


    “柳寬順 烈士는 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너무 먼 距離인데요. 

    “子息들에게 ‘나 좀 보내다오’ 했더니 子息들은 距離가 멀다고 말려요. 그래서 柳寬順 烈士는 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그 程度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겼더니 딸이 同行하기로 하고 3000萬 원을 만들었어요. 1000萬 원은 經費로 쓰고 2000萬 원은 參戰勇士를 위해 써달라고 하고 왔어요.” 

    -참여연대 等 一角에서는 如前히 天安艦 再調査를 主張하는데요. 

    “現 政府에서 再調査를 한다면 제대로 再調査해 주겠어요? 나는 無識해도 그런 건 알아요. 오히려 우스갯거리를 만들어놓지. 只今도 天安艦 爆沈이 北韓 所行이 아니라는 사람이 많은데…내 맘을 하늘이 알겠어요, 땅이 알겠어요.” 

    -그렇군요. 

    “저는 잘 모르지만 政治는 왜 하고, 나라는 왜 지키나요. 싸움하려고? 權力을 부리려고?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아서 괜찮아요. 우리 祖上들이 苦生해서 살려놓은 이 나라를 精神 바짝 차리고 바로잡아야 해요. 6·25戰爭 70周年에 나라 빼앗길까 걱정입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