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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字 달缸아리|新東亞

名作의 祕密

百字 달缸아리

“내가 달缸아리라 부르자 꽃이 되었다”

  • 이광표 西原大 敎養大學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0-04-0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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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멋 내지 않으면서도 慇懃한 멋 創造

    • 朝鮮 100年間 만든 陶瓷器, 國內外 20餘 點

    • 金煥基가 이름 붙인 달缸아리가 주는 感動

    • 지난해 6月 서울옥션에서 31億 원 落札

    [문화재청 제공]

    [文化財廳 提供]

    2019年 6月 서울옥션 美術品 競賣에서 朝鮮時代 白瓷 ‘달缸아리’ 한 點이 31億 원에 落札됐다. 國內 陶瓷器 競賣 最高價 新記錄이었다. 한 해 前인 2018年에는 서울옥션 홍콩 競賣에서 또 다른 百字 달缸아리가 24億7500萬 원에 팔렸다. 最近 10年 넘게 近現代美術에 밀려 苦戰을 면치 못하던 古美術 市場이기에 달缸아리의 ‘선전’은 놀라운 消息이 아닐 수 없었다. 百字 달缸아리에 魅了된 사람이 慇懃히 많다. 왜 그렇게 달缸아리를 좋아하는 걸까. 누군가는 “뽀얀 乳白色과 單純한 形態, 넉넉함과 자연스러움”을 稱頌하고 누군가는 “朝鮮時代 儒敎文化의 儉朴함”을 높이 꼽는다.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魅力과 人氣 祕訣의 全部일까.

    교토, 나라에서 생긴 일

    일본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이 복원한 달항아리.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제공]

    日本 오사카 市立 동양도자미술館이 復元한 달缸아리.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館 提供]

    1955年 어느 날, 30代 在日同胞 事業家 正祖門은 日本 교토의 散調(三條) 뒷골목 骨董品 距離를 걷고 있었다. 그는 어느 갤러리 陳列欌 앞에 멈춰 서 琉璃窓 너머 百字 달缸아리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뽀얗고 둥그런 白瓷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暫時 後 갤러리 門을 열고 들어가 主人에게 價格을 물었다. 200萬 엔이었다. 當時로서는 집 두 채 값. 正祖門은 달 模樣의 缸아리에서 故鄕을 發見했다. 日本 땅에서 精神없이 살아온 그에게 그 缸아리는 깊은 餘白이었다. 正祖門은 躊躇하지 않고 12個月 割賦로 百字 달缸아리를 손에 넣었다. 그 有名한 ‘正祖門 컬렉션’은 이렇게 始作됐다. 

    正祖門은 慶北 醴泉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日本으로 건너갔다. 어린 時節 日本 社會의 差別 속에서 家族은 뿔뿔이 흩어졌고, 正祖門은 埠頭 勞動者로 막일을 하면서 지냈다. 成人이 되면서 그는 事業을 始作했고, 조금씩 돈을 모았다. 1955年 白瓷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우리 文化財를 알게 되면서 부지런히 우리 文化財를 蒐集했다. 蒐集 遺物을 한데 모아 1988年 교토 北쪽 地域의 閑寂한 住宅街에 博物館을 세웠다. 考慮美術館이다. 考慮美術館은 교토 地域의 文化遺跡을 踏査하는 韓國人이 꼭 들러야 할 코스로 자리 잡았다. 考慮美術館의 看板은 亦是 百字 달缸아리다. 

    1995年 7月 4日 대낮, 日本의 由緖 깊은 古都 나라 地域의 管音源(觀音院)에 한 男子가 侵入했다. 그는 성큼성큼 客室로 들어섰다. 거기 朝鮮時代 百字 달缸아리가 놓여 있었다. 周圍를 暫時 둘러보더니 달缸아리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곤 散文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現場을 目擊한 住持 스님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왔다. 警備員도 함께 달려와 男子의 앞을 막아섰다. 멈칫하던 男子는 달缸아리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힘껏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달缸아리는 散散조각이 났다. 豫想치 못한 突發 狀況에 住持 스님이나 警備員은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는 사이 男子는 山門 밖으로 逃走했고, 그 犯人은 永永 잡지 못했다. 

    住持 스님은 부서진 陶瓷器 조각을 收拾했다. 작은 가루까지 솔로 쓸어 封套에 담았다. 커다란 陶瓷器 조각은 新聞紙로 쌌다. 셀 수 있는 破片만 해도 300조각이 넘었다고 한다. 얼마 後 이 消息이 알려지자 오사카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官은 官音源 住持 스님에게 “달缸아리 破片을 寄贈해 줄 수 있느냐”고 問議했다. 住持 스님은 拒絶했다. 그러나 美術館은 거듭 寄贈을 付託했고, 結局 觀音원은 부서진 陶瓷器 破片들을 美術館에 寄贈했다.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官은 부서진 달缸아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苦悶했다. 조각들을 그대로 保管 展示할 것인지, 修理 復元할 것인지. 2年에 걸친 論議 結果, 缸아리를 最大限 修理 復元하기로 했다. 散散조각 난 陶瓷器를 修理 復元한다는 것은 普通 일이 아니었지만 美術館은 그래도 試圖해 보기로 했다. 日本 內 最高 水準의 陶瓷器 修理復元 專門家를 불러 相談을 始作했다. 하지만 많은 專門家가 손사래를 쳤다. 어려운 涉外 過程이었지만 結局 한 곳이 意氣投合했고, 7個月 동안의 作業 끝에 復元에 成功했다. 

    英國 런던의 英國博物館(브리티시뮤지엄) 한국실에 가면 百字 달缸아리가 있다. 이 달缸아리는 英國의 陶藝家 버나드 리치가 1935年 韓國에서 購入한 것이다. 朝鮮 陶瓷器에 心醉했던 그는 달缸아리와 함께 英國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幸福을 안고 갑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有名하다. 英國博物館이 이 달缸아리를 所藏하게 된 것은 1997年. 英國博物館이 韓國室을 만들기로 했을 때였다. 그때 우리나라의 代表的인 컬렉터 가운데 한 사람인 한광호 한빛文化財團 名譽理事長(서울 평창동 花亭博物館 設立者)은 當時 英國博物館에 100萬 파운드를 寄附했다. 그 돈으로 英國博物館은 이 달缸아리를 購入했고, 以後 韓國室에 展示하고 있다.

    런던에서 만나는 달缸아리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한국실에 전시돼 있는 백자 달항아리.

    英國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한국실에 展示돼 있는 百字 달缸아리.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博物館 1層 展示室 中間 通路엔 한국실이 있다. 이곳 한복판에 展示된 作品은 百字 달缸아리다. 現代 陶藝家 박영숙이 製作한 것이다. 20世紀 作品이지만, 그 雰圍氣가 18世紀 朝鮮時代 달缸아리 못지않다. 이 달缸아리는 2012年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博物館 ‘最高 컬렉션’으로 뽑힌 바 있다. 이 博物館은 英國 著名人士 다섯 名을 選定해 그들로부터 博物館 最高 컬렉션을 推薦받는 이벤트를 進行한다. 그 一環으로 2012年 英國 俳優 주디 덴치가 달缸아리를 最高 컬렉션으로 꼽은 것이다. 박영숙의 달缸아리는 朝鮮時代 것보다 더 크다. 朝鮮時代 百字 달缸아리는 높이가 普通 40~50cm인데, 박영숙은 그 높이를 더 키워 60~70㎝에 이르는 大型 달缸아리를 많이 製作한다. 그렇다보니 그의 달缸아리는 더 豪放하고 더 堂堂하다. 

    18世紀 前後는 朝鮮時代 白瓷의 全盛期였다. 깨끗함과 세련됨을 두루 갖춘 白瓷들이 만들어져 朝鮮의 道字 文化와 飮食 文化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달缸아리다. 달缸아리는 가로 세로의 比率이 1對 1 程度인데 그 모습이 둥근 달덩어리 같다고 해서 달缸아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달缸아리를 눈여겨보면 몸통 한가운데 가장 불룩한 部分이 어긋나 있다. 그 部分이 若干 비뚤어져 있어 어깨 部位의 左右 높이가 差異가 나는 境遇도 있다. 달덩어리처럼 完璧하게 동그란 模樣이 아니라 若干 不均衡하고 뒤뚱거리는 模樣이다. 

    왜 그럴까. 커다란 缸아리의 境遇, 윗部分과 아랫部分을 따로 만든 다음 이 둘을 서로 붙여 完成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그 接合 部位가 이처럼 若干 뒤틀린 것이다. 朝鮮時代 陶工들은 이 接合 部位를 깔끔하게 다듬지 않고 서로 어긋나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部分을 칼로 깎아내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냥 두었다는 것은 朝鮮白瓷가 完璧하고 人爲的 아름다움보다는 若干 不完全하지만 人間的인 자연스러움을 追求했음을 의미한다.

    달缸아리의 美學과 名稱 미스터리

    아무런 무늬를 넣지 않고 이렇게 單純한 模樣으로 白瓷를 만들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한 勇氣 없이는 不可能한 일이다. 治粧을 하는 것보다 治粧을 自制하는 것이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멋을 내지 않으면서 慇懃한 멋을 創造하는 것, 이것이 白瓷의 美學이고 달缸아리의 美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장 朝鮮的이라고 한다. 이러한 形態의 白瓷는 中國과 日本에선 發見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달缸아리를 두고 韓國籍 美感이라고 말한다. 국립중앙박물관長을 지낸 최순우는 달缸아리를 두고 “넉넉한 맏며느리 같다”고 했다. 美術史學者 兼 考古學者였던 金元龍은 “理論을 超越한 百의(白衣)의 美”라고 노래했다.화가 金煥基는 “單純한 原形이, 單純한 純白이, 그렇게 複雜하고 그렇게 微妙하고 그렇게 不可思議한 美를 發散할 수가 없다. 실로 造形美의 極致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뽀얗고 둥근 달缸아리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無心(無心)의 思惟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궁금症이 있다. 百字 달缸아리에 關한 硏究 論文이 意外로 적다는 事實이다. 朝鮮 後期 白瓷 硏究나 白瓷 缸아리 硏究는 많이 이뤄졌으나 百字 달缸아리만을 獨立的으로 다룬 學術論文은 드물다. 朝鮮時代 白瓷의 歷史 속에서 製作 期間이 그리 길지 않은 데다 現在까지 傳해오는 朝鮮時代 달缸아리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百字 달缸아리는 17世紀 後半부터 約 100年 동안에만 만들어졌다. 朝鮮時代 白瓷의 歷史에서 보면 달缸아리는 그리 긴 歷史를 占有하지 못한 셈이다. 現在까지 傳하는 百字 달缸아리는 國內外 合쳐 20~30點에 不過하다. 

    또 다른 궁금症은 달缸아리라는 名稱에 關한 것이다. 10餘 年 前 한 陶藝家와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다. 

    “달缸아리라는 이름을 누가 붙였을까요? 或是….” 

    百字 달缸아리의 元來 이름은 달缸아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缸아리를 漢字語로 號(壺)라고 한다. 그래서 百字 달缸아리를 白瓷大湖(白磁大壺)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只今 우리가 보는 달缸아리 模樣의 그릇을 朝鮮時代엔 港(缸)이라 했다. 正確한 記錄이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달 模樣의 커다란 缸아리는 百項(白缸) 백對抗(白大缸)으로 불렀을 것으로 推定한다. 이것이 19世紀末~20世紀初 日帝强占期를 거치면서 白瓷大湖, 白瓷원호(白磁圓壺)로 불리게 됐다.

    白瓷에 미친 金煥基와 홍기대의 證言

    1954년 김환기 아틀리에(왼쪽)와 김환기 작 백자와 꽃. [환기미술관 제공, 서울옥션 제공]

    1954年 金煥基 아틀리에(왼쪽)와 金煥基 作 白瓷와 꽃. [환기미술관 提供, 서울옥션 提供]

    最近 國內에서 가장 잘나가는 畫家는 金煥基다. 그의 抽象化 ‘宇宙’가 2019年 11月 홍콩 크리스티 競賣에서 132億 원에 落札됐다. 2018年 5月 서울옥션 홍콩 競賣에서 또 다른 抽象畫家 85億 원에 落札됐다. 國內 美術品 競賣 上位圈 作品은 모두 金煥基의 抽象化다. 朴壽根, 李仲燮을 完璧하게 밀어냈다. 

    그런데 金煥基는 元來 白瓷 컬렉터였다. 日本 留學을 마치고 1937年 歸國한 金煥基는 1940年代 中盤 朝鮮白瓷에 빠져들었다. 그는 1944年 서울에서 暫時 鍾路畫廊을 經營하면서 骨董商과 百字를 만났고 以後 熱心히 百字를 사들였다. 그는 後날 “한때는 缸아리 속에서 산 적이 있다… 市中에 나가면 自然히 骨董品 가게로 발길이 向했다. 들르면 으레 한두 個 點을 찍고 나오게 됐으니 恰似 내 缸아리 趣味는 阿片中毒에 지지 않았다”고 回顧한 바 있다. 6·25戰爭으로 인해 그의 白瓷 컬렉션이 많이 부서지고 없어졌지만, 그래도 1954年에 撮影한 金煥基의 畫室 寫眞을 보면 冊欌에 朝鮮白瓷가 가득하다. 둥글고 큼지막한 달缸아리度 보인다. 

    2014年 흥미로운 冊이 한 卷 出刊됐다. 1950年代 서울에서 舊하산房(九霞山房)이라고 하는 骨董 가게를 運營했던 홍기대가 쓴 ‘友黨 홍기대, 朝鮮白瓷와 80年’이란 冊이다. 거기 6·25戰爭이 끝난 1953年 무렵의 얘기가 나온다. 當時 골銅像會에서 白瓷를 즐겨 찾았던 사람으로는 火가 도상봉과 金煥基가 代表的이었다. 홍기대는 이렇게 記錄했다. 

    “手話(金煥基)가 陶瓷器를 사기 始作한 것은 解放 以後로…백자 缸아리 中 日帝 때 둥글다고 해서 마루쓰洑(圓壺)라고 불렀던 한 缸아리를 特히 좋아해 그가 달缸아리라고 이름 붙였다. 키가 크고 점잖은 사람으로 明洞에서 缸아리를 사면 그걸 가슴에 안고 城北洞까지 걸어갔다.” 

    홍기대의 證言을 整理하면, 金煥基가 커다랗고 둥근 白瓷大虎를 1950年代 처음 百字 달缸아리로 이름 붙인 것이다. 金煥基와 交分이 두텁던 최순우는 그 後 달缸아리라는 用語를 자주 使用했다. 최순우는 1963年 4月 17日子 동아일보에 ‘잘생긴 며느리’라는 題目의 寄稿를 통해 달缸아리라는 用語를 公式的으로 使用했다. 

    “나는 身邊(身邊)에 놓여있는 吏曹白瓷(李朝白磁) 缸아리들을 늘 多情한 愛人 같거니 하고 생각해 왔더니 오늘 白髮이 星星한 老 感想家 한 분이 찾아와서 시원하고 부드럽게 생긴 큰 乳白色 달缸아리를 어루만져보고는 혼자말처럼 ‘잘생긴 며느리 같구나’ 하고 자못 즐거운 눈치였다.” 

    金煥基는 1940年代 末~1950年代 初 白瓷를 熱心히 畫幅으로 옮겼다. 그의 白瓷 缸아리 그림에는 달이 登場한다. 金煥基는 ‘靑白瓷 缸아리’(1955)라는 글에 이렇게 적었다.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白瓷 缸아리가 놓여 있다…칠야삼경(漆夜三更)에도 뜰에 나서면 허연 缸아리가 儼然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 때면 缸아리가 吸收하는 月光(月光)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에게 달은 白瓷 缸아리였고 白瓷 缸아리 또한 달이었다. 抽象化로 들어서기 前 1950年代 金煥基는 白瓷와 달을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렇게 白瓷大湖에 처음으로 달缸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춘수와 金煥基, 꽃과 달缸아리

    金煥基가 白瓷大湖, 白瓷援護에 달缸아리라 이름 붙인 것은 매우 意味深長하다. 그건 詩人 김춘수의 時 ‘꽃’의 美學과 恰似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前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처럼 달缸아리라는 새로운 이름은 白瓷大湖의 運命을 바꿔놓았다. 白瓷대호와 百字 달缸아리라는 名稱을 比較해 보면 쉽게 理解할 수 있다. 同一한 對象을 부르는 말이지만 다가오는 意味와 情感은 사뭇 다르다. 白瓷對抗, 白瓷大湖라는 名稱은 白瓷의 크기만을 勘案한 것이다. 白瓷援護라고 하면 白瓷의 形態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기에 白瓷大湖나 白瓷원호는 至極히 形式的일 뿐 感動이 없다. 

    그러나 달缸아리라는 名稱은 다르다. 둥근 形態뿐 아니라 달이 지니고 있는 文學的, 藝術的, 哲學的, 歷史的 이미지를 함께 連結해 준다. 우리가 달缸아리라고 부르는 瞬間, 달에 얽힌 다양한 이미지가 聯想돼 떠오르게 된다. 그것은 個人的인 것일 수도 있고, 社會的 歷史的인 것일 수도 잇다. 때로는 耽美的日 수도 있다. 달缸아리라고 부르는 瞬間, 사람들은 저마다의 풍요로운 記憶을 自身도 모르게 이끌어낸다. 白瓷大湖나 白瓷援護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感動的이고 깊이와 餘韻이 있다. 그 이름이 그냥 白瓷大湖였다면 只今과 같은 感動을 주지 못할 것이다. 只今도 白瓷大湖, 百自願號로 부른다면 사람들은 이 缸아리를 只今처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文化財 가운데 이보다 더 아름답고 文學的인 名稱이 어디 있을까. 白瓷大湖는 달缸아리라는 이름에 依해 다시 태어났다. 專門 硏究者와 專門 컬렉터들의 領域을 넘어 大衆에게까지 다가간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저 커다란 朝鮮白瓷를 白瓷大湖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오래된 陶瓷器, 오래된 그릇에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달缸아리로 부르는 瞬間, 그것은 아름다움의 對象이 됐고 새로운 感動이 됐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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