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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靑年, 韓半島人 最初 “鏡城의 한울” 가르다|신동아

스물한 살 靑年, 韓半島人 最初 “鏡城의 한울” 가르다

[名作의 祕密] 안창남, 大韓海峽 건너 操縱術 배워 와 獨立運動 投身

  • 이광표 西原大 휴머니티敎養學部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4-03-0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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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 最初 飛行士 안창남 錦衣還鄕

    • 잠자던 民族 自矜心 깨운 飛行機 ‘금강호’

    • 서울 人口 6分의 1, 飛行 보려 汝矣島 集結

    • 2020年 금강호 模型 復元해 國立航空博物館 展示

    1922년 12월 안창남의 비행기 금강호가 여의도 하늘을 날고 있다. [동아DB]

    1922年 12月 安昌男의 飛行機 금강호가 汝矣島 하늘을 날고 있다. [東亞DB]

    서울 汝矣島公園 한복판엔 特異한 來歷을 가진 飛行機가 한 臺 서 있다. 飛行機의 正式 名稱은 軍用 輸送機 C-47. 1945年 8月 18日 이범석, 老能書, 김준엽, 장준하 等 韓國光復軍 特攻隊(정진대) 隊員들이 美國 戰略情報局(OSS) 要員들과 함께 搭乘했던 輸送機度 이 飛行機였다. C-47은 中國 시안(西安)을 出發해 汝矣島 飛行場에 着陸했다. 大韓民國臨時政府 光復軍의 이름으로 美軍과 함께 國內에 進入해 日本軍과 戰鬪를 벌여 勝戰國 地位를 얻기 위한 戰略이었다. 光復 以前부터 準備한 國內進攻作戰이 日本의 降伏으로 成事되지 못하자 事後에라도 그 作戰을 實行하고자 했다. 이들은 汝矣島 飛行場 滑走路에서 重武裝한 채 警戒 中인 日本軍과 기꺼이 戰鬪를 벌이고자 했으나 美軍의 挽留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 날 새벽 中國으로 돌아갔다. 석 달 뒤인 1945年 11月 23日 大韓民國臨時政府의 金九 主席, 김규식 副主席, 이시영 國務委員, 김상덕 文化部長, 유동열 參謀總長, 엄항섭 宣傳部長 等 遙遠 1陣 15名이 이 飛行機를 타고 祖國 땅에 돌아왔다. 그때 着陸한 바로 그곳에 C-47이 展示돼 있다.

    서울 여의도공원 한복판에 전시한 군용 수송기 C-47. [이광표]

    서울 汝矣島公園 한복판에 展示한 軍用 輸送機 C-47. [이광표]

    여의도공원에 展示 中인 C-47은 1945年 當時 臨時政府 要人들과 光復軍이 탔던 그 飛行機는 아니다. 그 飛行機는 當時 美軍 所有였기에 現在 素材를 確認하기 어렵다. 서울市는 2015年 光復 70周年을 맞아 同一 機種의 飛行機를 求해 이곳에 展示했다. 汝矣島 飛行場은 日帝强占期인 1916年 日帝에 依해 造成됐다. 1945年 光復軍 隊員의 進入과 臨政 要因이 歸國은 汝矣島의 歷史에서 重要한 事件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1922年 이곳에서 意味深長한 이벤트가 벌어졌다.

    半島의 天空을 征服한 안창남

    최초로 한반도 하늘을 날았던 한국인 조종사 안창남. [동아DB]

    最初로 韓半島 하늘을 날았던 韓國人 操縱士 안창남. [東亞DB]

    1922年 12月 10日 낮 12時 22分 汝矣島 飛行場, 매서운 겨울 추위를 뚫고 프랑스 뉴포르(Nieuport)式 1人乘 斷髮 複葉機 한 臺의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아가기 始作했다. 3分 뒤인 낮 12時 25分 飛行機가 京城(서울)의 上空으로 솟아오르자 이를 지켜보던 5萬餘 名의 群衆은 一齊히 喊聲을 질렀다. 朝鮮(韓國)의 하늘에서 朝鮮人(韓國人)에 依한 最初의 飛行이 이뤄지는 瞬間이었다.

    日本에서 活動하던 스물한 살의 朝鮮 靑年 안창남(安昌男·1901~1930)의 故國 訪問 飛行은 그야말로 話題였다. 이 行事를 主催한 동아일보는 “半島(半島)의 穿孔(天空)에 最初의 환희/酷寒을 征服한 同胞의 熱誠” “5萬 觀衆을 熱狂케 한 高等飛行”이라고 讚辭를 보냈다(동아일보 1922年 12月 11日子). 安昌男의 飛行을 구경하기 위해 汝矣島 一帶에 몰린 사람은 5萬餘 名. 當時 鏡城 人口가 約 30萬 名이었으니 京城 人口의 6分의 1이 汝矣島에 모인 것이다. 當時 朝鮮人들은 安昌男의 故國 訪問 飛行에 왜 이렇게 熱狂했던 것일까. 안창남이 탔던 飛行機는 果然 어떤 模樣이었고, 그 飛行機는 只今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을까.

    1901年 京城에서 태어난 安昌男은 10代 때 飛行에 關心을 가졌다. 그는 1917年 9月 15日 서울에서 펼쳐진 美國人 飛行士 아트 스미스의 曲藝飛行을 目擊한 뒤 飛行士의 꿈을 키웠다. 그 꿈을 위해 휘문고보를 中退하고 1919年 3月 日本으로 건너갔다. 1年 넘는 準備 過程을 거쳐 1920年 8月 安昌男은 도쿄(東京)의 오구리(小栗) 飛行學校에 入學했다. 安昌男은 日本 飛行士 免許試驗을 거쳐 1921年 5月 3等 飛行士 免許를, 1922年 6月 2等 飛行士 免許를 取得했다. 이어 1922年 11月 6~11日 日本 帝國飛行協會가 主催한 도쿄~오사카(大阪) 區間 郵便飛行大會에 參加했다. 自身의 飛行機를 갖지 못했던 安昌男은 劣惡하기 짝이 없는 飛行機로 죽을 고비를 이겨내고 高難度의 往復 飛行을 遂行해 最優秀賞을 차지했다. 안창남이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1400㎞를 飛行한 것은 當時 日本에서 最長距離 飛行이었다.



    飛行士로 日就月將하던 安昌男은 두 가지 目標를 세웠다. 하나는 祖國의 하늘에서 直接 飛行을 하는 것(故國 飛行)이었고, 다른 하나는 飛行學校를 세워 祖國의 靑年 飛行士를 養成하는 것이었다.

    安昌男은 日本의 2等 飛行士 免許를 取得한 1922年 6月부터 故國 飛行을 準備했다. 꿈은 있었으나 돈이 問題였다. 어려운 經濟 與件 탓에 專用 飛行機를 求할 수가 없었다. 迂餘曲折 끝에 그는 두 달 뒤인 8月, 오구리 飛行學校에서 故國 飛行에 活用할 飛行機를 救했다. 그해 여름 安昌男의 付託을 받은 동아일보는 飛行 行事를 主催하기로 決定하고, 1922年 10月 19日子 事故(社告)를 통해 이를 널리 알렸다. 동아일보는 이 行事를 科學大衆化 運動의 一環으로 企劃했다.

    安昌男은 故國 飛行에 蹉跌이 없도록 어렵게 求한 飛行機를 熱心히 修理하고 丹粧했다. 엔진은 다른 飛行機에서 떼다가 裝着했다. 그는 이 飛行機에 ‘금강호(金剛號)’라는 이름을 붙이고 몸體 兩쪽에 ‘安昌男’ ‘J-TIAD’라고 크게 써넣었으며 꼬리 날개엔 金剛山 模樣의 圖案을 그려 넣었다. 이 圖案은 只今으로 치면 金剛山을 象徵하는 심벌 마크인 셈이다.

    몸體의 左右 앞쪽엔 韓半島 地圖와 프로펠러를 멋지게 組合해 그려 넣었다. 몸體의 나머지 空間엔 六角形을 連續으로 디자인하고 거기 여러 色을 채워 알록달록하게 꾸몄다. 安昌男은 故國 非行의 意味를 極大化하기 위해 飛行機의 이름을 금강호라 짓는 데서 나아가 外觀 디자인에도 功을 들였다. 安昌男은 금강호를 解體해 11月 17日 도쿄에서 船舶便으로 부쳤고, 금강호는 2週 뒤인 12月 2日 仁川港에 到着했다. 이어 汽車에 실려 鷺梁津驛을 거쳐 汝矣島 飛行場 格納庫로 옮겨졌다.

    最初 飛行士 맞으러 驛마다 모여든 人波

    1903年 美國의 라이트 兄弟가 誘引動力 飛行에 成功했다. 이때부터 飛行機는 近代 科學技術의 寵兒로 脚光받았다. 韓半島 上空에도 飛行機가 날기 始作했다. 1913年 龍山練兵場 上空에서 日本人에 依한 첫 飛行이 이뤄졌다. 日本人의 飛行이 繼續 이어졌고, 1920年부터는 西洋 飛行機들이 京城·新義州·大邱 等地에 寄着했다. 西洋 飛行機가 韓半島에 着陸할 때마나 엄청난 人波가 몰렸다. 近代 科學 신문물에 對한 好奇心의 發露였다.

    하늘을 나는 飛行機는 當時 植民地 朝鮮의 大衆에게 하나의 希望이었다. 그런 狀況에서 朝鮮人 飛行士 안창남이 日本에서 日就月將하고 있다는 事實은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安昌男의 一擧手一投足은 1920年부터 東亞日報와 ‘開闢’ 等 言論을 통해 時時刻刻 報道됐다. 이런 過程을 거쳐 安昌男은 人氣 스타로 자리 잡았다.

    故國 訪問 飛行을 위해 安昌男은 1922年 12月 3日 도쿄를 出發했다. 12月 4日 釜山市民의 歡迎을 받으며 釜山港에 到着했고, 다음 날인 12月 5日 午前 警盛行 列車에 올랐다. 안창남이 上京하는 동안 大邱驛, 大田驛, 平澤驛, 수원역, 영등포역은 수많은 歡迎 人波로 북적였다. 12月 5日 午後 8時 50分 안창남이 남대문역에 到着했을 때, 驛과 그 周邊엔 歡迎 人波로 가득했다. 安昌男의 母校인 微動公立普通學校 學生을 비롯해 휘문, 中央, 寶城, 中東, 協成, 淑明 等 서울의 私立高普 學生 數千餘 名과 天主敎, 基督敎, 佛敎, 大倧敎 等 宗敎靑年會 所屬 젊은이들이 마중을 나왔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서울 5個 券番(券番) 所屬 妓生 數百餘 名도 歡迎 隊列에 合勢했다. 12月 7日엔 京城 소공동의 公會堂에서 안창남 歡迎 行事가 열리기도 했다. 이를 두고 “當代 言論이 키워낸 슈퍼스타이자 最初의 아이돌이었다”(길윤형, ‘안창남, 서른 해의 불꽃같은 삶’)는 評價도 있다.

    故國 訪問 飛行에 즈음해 ‘錦江호야’ 라는 노래 歌詞도 만들어졌다. 東亞日報 1922年 12月 10日子 1面에 紹介된 이 歌詞는 신향산(辛香山)이라는 人物이 프란츠 슈베르트의 1828年 作 ‘세레나데(Standchen)’ 의 曲調에 맞추어 쓴 것이다. 모두 3節로 돼 있는데 1節의 歌詞는 이렇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錦江호야/半萬年 기다리든 그대로구나/그대가 부르짓는 큰 소래와 그 雄姿(雄姿)로/아- 깨워다오 그대여 이 잠을 깨워라/아하- 반가운 그대여 깨워라 이 잠을 아- 깨워라.” 금강호는 朝鮮人의 잠을 깨워 植民의 劣敗感을 물리치고 朝鮮의 未來를 이끌어갈 希望的이고 象徵的인 存在로 그려져 있다. 當時 大衆이 安昌男의 故國 訪問 飛行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왜 熱狂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불꽃처럼 뜨거웠던 30年 生涯

    여의도공원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안창남을 기억하기 위해 조성한 ‘역사의 터널’. [이광표]

    여의도공원에서 漢江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안창남을 記憶하기 위해 造成한 ‘歷史의 터널’. [이광표]

    1922年 12月 10日 汝矣島 飛行場과 그 周邊은 몰려든 人波로 人山人海였다. 鷺梁津驛에서부터 汝矣島에 이르는 길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동아일보는 “廣漠한 汝矣島 벌판에는 사람으로 城을 쌓고 사람으로 바다를 이루게 되었다”고 描寫했다.

    첫 飛行은 12月 10日 낮 12時 25分 始作됐다. 離陸한 금강호는 1000m까지 날아올라 龍山, 南山, 北岳山, 景福宮, 昌德宮의 上空을 旋回했다. 汝矣島 上空으로 돌아온 安昌男은 놀라운 曲藝飛行으로 마무리하면서 群衆을 魅了했다.

    “이어서 飛行機가 거꾸로 내리박히다가 다시 두어 番 가로 才操(재주)를 넘으매 觀衆은 그의 神妙한 才操(재주)에 너무 感激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歡呼하엿다. 飛行機는 다시 가던 길을 고치어 東便으로부터 西便으로 손에 잡힐 듯이 얕게 떠서 婦人席 있는 便으로 내려 닥치니 一般 觀衆이 飛行機에 差異지 아니할까 疑心할 만 河엿다.” (東亞日報 1922年 12月 11日子)

    安昌男은 같은 날 午後 두 番째 飛行을 實施했다. 금강호는 午後 2時 20分頃 京城 上空으로 다시 날아올라 800~900m까지 솟구친 뒤 橫轉(橫轉), 逆轉(逆轉), 旋回(旋回) 等의 高難度 飛行術을 선보였다. 두 番째 飛行에서 安昌男은 科學大衆化 캠페인 傳單 1萬餘 腸을 地上으로 뿌렸다. 行事를 主催한 동아일보가 故國訪問飛行後援會, 안창남과 共同 製作한 傳單으로, 科學技術 發達에 힘쓰길 바란다는 內容이 담겨 있었다. 當時 모습을 동아일보는 이렇게 報道했다. “五色地質로 박인 종이는 淸凉한 太陽빛에 비춰 무엇이라고 形容할 수 없이 玲瓏燦爛하게 번적번적하여 바람에 펄펄 날리는 光景에는 觀衆은 眞實로 飛行場의 全體가 떠나갈 듯한 喝采가 일어났다.”(동아일보 1922年 12月 11日子)

    사흘 뒤인 12月 13日 세 番째 飛行이 이뤄졌다. 이날 午後 4時 安昌男은 汝矣島 京城飛行場에서 曲藝飛行을 보여준 뒤 仁川으로 向했다, 仁川市民을 위해 200m 높이로 低空飛行을 하고 5時 5分에 汝矣島로 돌아왔다.

    1922年 植民地 朝鮮은 安昌男의 飛行에 熱狂했다. 安昌男은 슈퍼스타였고 大衆은 그의 飛行을 통해 近代科學 文明을 經驗하고 未來에 對한 希望을 꿈꾸었다. 그러나 安昌男의 人氣는 日帝의 警戒心을 觸發했다. 故國 訪問 飛行 以後 日本으로 돌아간 安昌男은 差別에 시달려야 했고, 오구리 飛行學校에서 植民 政策을 批判하는 發言을 했다는 理由로 日本 警察의 要視察 對象이 됐다. 1924年 9月엔 日本 赤化防止團 所屬 靑年들로부터 테러를 當하기도 했다. 이런 狀況 속에서 安昌男은 1924年 12月頃 中國으로 亡命했다. 安昌男은 飛行學校를 세워 航空 獨立軍을 養成하고 日本과 全面戰을 벌여 祖國 獨立을 爭取하고자 했다. 飛行士로 成長하던 過程에서 그가 세운 두 番째 目標였다. 베이징(北京), 산시(陝西)省 타이위안(太原) 等地에서 航空 獨立鬪爭의 길을 摸索하던 安昌男은 1928年 大韓獨立共鳴團(大韓獨立共鳴團)을 組織했다. 그러던 中 1930年 4月 타이위안 산시飛行學校에서 飛行機를 操縱하던 中 墜落 事故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30年의 불꽃같은 삶이었다.

    飛行士 安昌男의 30年 生涯가 불꽃처럼 뜨겁고 드라마틱했지만 그中에서도 가장 象徵的 瞬間으로는 1922年 12月 故國 訪問 飛行이 아닐 수 없다. 19歲의 나이에 日本으로 건너가 熱情的으로 飛行을 工夫한 安昌男은 不過 3~4年 만에 朝鮮과 日本에서 最高의 飛行士가 됐다. 그리고 바람대로 故國의 同胞 앞에서 自身의 非行 實力과 航空의 魅力을 限껏 誇示했다.

    安昌男의 故國 訪問 飛行은 흔히 ‘朝鮮人의 첫 朝鮮 上空 飛行’으로 評價받는다. 그러나 그 非行의 意味는 좀 더 複雜하고 多層的이다. 安昌男의 故國訪問 飛行은 1920年代 前後 朝鮮에서 前衛的이고 象徵的이며 大衆的인 近代 經驗의 하나였다. 금강호에서 쏟아진 傳單 1萬 張, 그걸 바라보는 5萬 與 群衆. 그것은 植民地 朝鮮에서 벌어진 一帶 社會的 事件이고 浪漫的 이벤트였다.

    여의도공원에서는 C-47과 安昌男의 痕跡을 함께 되새겨 볼 수 있다. 여의도공원에서 漢江으로 이어지는 길목엔 안창남을 記憶하기 위한 ‘歷史의 터널’이 造成돼 있다. 安昌男의 寫眞과 簡單한 프로필, 금강호의 寫眞을 터널 內部에 展示해 놓았다.

    젊고 모던한 금강호의 美學

    서울 강서구 국립항공박물관이 전시한 금강호 모형. [이광표]

    서울 강서구 國立航空博物館이 展示한 금강호 模型. [이광표]

    아쉽지만 금강호는 現在 남아 있지 않다. 동아일보에 실린 黑白寫眞 몇 張만 남아 있을 뿐. 그러다 2020年 國立航空博物館(金浦空港 바로 옆) 個館으로 다행스럽게 금강호의 模型을 볼 수 있게 됐다. 옛 寫眞 資料를 土臺로 國立航空博物館이 最大限 原形에 가깝게 再現해 展示한 것이다. 國立航空博物館은 2022年 안창남 故國 訪問 飛行 100周年을 맞아 ‘空中勇士 안창남’이란 企劃展을 開催하기도 했다. 이런 過程을 통해 우리는 安昌男의 불꽃같은 삶을 좀 더 具體的으로 만날 수 있게 됐다.

    금강호는 國立航空博物館 1層 展示室 上空에 매달려 있다. 그곳에서 금강호의 全貌를 좀 더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자그마한 뉴포르式 1人乘 斷髮 複葉機. 外觀은 안창남이 直接 디자인했다. 自身의 이름을 큼지막하게 넣고 韓半島 地圖를 兩쪽에 붙였다. 알록달록한 六角形 디자인이 젊고 모던한 雰圍氣를 풍긴다. 安昌男의 美的인 感覺이 飛行 實力 못지않았음을 如實히 보여준다.

    安昌男은 故國 訪問 非行의 所感文을 1923年 1月 ‘開闢’ 第31號에 寄稿했다. 거기 이런 대목이 나온다. “鏡城의 한울! 鏡城의 한울! 내가 어떠케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鏡城의 한울! 이 한울에 내 몸을 날리울 때 내 몸은 그저 甚한 感激에 떨릴 뿐이엇습니다.” 國立航空博物館 天障을 올려다보면서 1922年 12月 10日 하늘로 솟아오르던 금강호를 떠올려본다. 5萬餘 群衆의 喊聲이 들려오는 듯하다. 언젠가 저 금강호가 날아올라 서울 上空에서 銀빛 傳單紙 1萬 張을 흩뿌린다면 어떨까. 想像만으로도 幸福한 일이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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