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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國民 2萬이 貯金筒 깨고 굶어가며 李舜臣 墓所 지켜냈다|신동아

亡國民 2萬이 貯金筒 깨고 굶어가며 李舜臣 墓所 지켜냈다

[名作의 祕密]

  • 이광표 西原大 휴머니티敎養學部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4-02-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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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銀行 빚 2000원에 抵當 잡힌 忠武公 墓所

    • 동아일보 報道로 對國民 募金 運動 始作

    • 誠金 보낸 國民이 남긴 1000餘 通 便紙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김윤석 분)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映畫 ‘露梁: 죽음의 바다’에서 李舜臣 將軍(김윤석 分)李 兵士들의 士氣를 북돋우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김한민 監督의 映畫 ‘露梁’李 2023年 12月 開封했다. 이로써 金 監督의 李舜臣 3部作 ‘明亮’ ‘閑散’ ‘露梁’이 全部 世上의 빛을 봤다. 映畫 ‘露梁’은 壯大하고 感動的이다. 忠武公 李舜臣(1545~1598)에 對한 執拗한 探究와 歷史에 對한 眞摯한 省察이 돋보인다.

    露梁海戰에서 이충무公은 숨을 거둔다. 映畫 末尾에는 이충무公의 喪輿를 運柩하는 場面이 나온다. 이충무公을 떠나보내며 땅을 치고 痛哭하는 朝鮮의 百姓들. 이충무公의 痕跡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後代 사람들은 이충무公을 어떻게 記憶하고 있을까. 統營의 閑山島, 珍島의 鳴梁, 河東의 露梁에도 있고, 牙山의 顯忠祠(顯忠祠)에도 있다. 國寶로 指定된 ‘亂中日記(亂中日記)’와 長劍 2자루, 寶物로 指定된 腰帶(허리띠)도 있다. 서울 光化門廣場의 李忠武公 銅像을 통해 偉大한 英雄을 記憶하기도 한다.

    그런데 좀 특별하고 異色的 遺物이 있다. 1930年代 初 이 땅의 普通 사람들이 이충무公을 기리면서 써 내려간 1000餘 通의 便紙다. 이 便紙들은 顯忠祠와 關係가 깊다. 李忠武公 祠堂인 顯忠祠는 朝鮮 肅宗 때인 1706年에 創建됐다. 이충무公이 世上을 떠난 지 100餘 年이 지난 時點이었다. 以後 1868年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令에 依해 顯忠祠는 撤廢됐다. 그 顯忠祠가 다시 세워진 것은 日帝强占期인 1932年이었다.

    當時 顯忠祠 重建 過程은 매우 劇的이었다. 顯忠祠 重建은 1931年 이충무公의 墓所와 位土(位土)가 擔保로 잡혀 競賣에 넘어갈 危機에 處한 것이 決定的 契機였다. 位土는 墓所 管理와 祭祀의 費用을 充當하기 위해 耕作하는 土地를 말한다.

    抵當 잡힌 李忠武公 墓所와 位土

    이충무公의 墓所와 位土가 銀行에 抵當 잡힌 事實이 世上에 처음 알려진 것은 東亞日報 1930年 9月 20日子를 통해서였다. ‘李忠武公 妙覺(廟閣)李 頹落/帝土(位土)는 銀行에 低糖되고 春秋향사(春秋享祀)도 그칠 地境’이라는 題目의 記事는 “李忠武公 宗家(13代 宗孫 이종옥)의 家勢가 기울어 忠武公 墓所와 位土가 抵當 잡혀 곧 잃어버릴 地境”이라고 傳했다. 1年 뒤인 1931年 5月 13日 동아일보는 ‘2000원 빚에 競賣 當하는 이충무公의 墓所位土’라는 記事를 내보냈다. 다음은 그 記事의 一部다.



    “壬辰亂, 거북船과 함께 歷史를 만든 民族的 恩人 이충무公의 位土 60斗落地機가 張差 競賣에 부칠 運命에 있다. (…) 13代 宗孫 이종옥 氏의 살림이 차차 零細해지면서 그 土地를 (擔保로) 1300원의 빚을 얻었던바, 只今은 利子까지 붙으면서 2400원이 되어 同一銀行에 들어가 있다. 同一銀行에서는 그 債務者인 이종옥 氏와 共同 所有者들인 李氏 一族 70餘 名에게 여러 番 督促을 했으나 갚지 못하자, 오는 5月 末까지 갚지 않으면 當然히 競賣 處分하겠다고 했다.”

    爲堂 鄭寅普는 동아일보 1931年 5月 14日子에 ‘民族의 羞恥, 債務에 시달리는 忠武公 墓所’라는 題目의 社說을 실었다. 5月 15日子에도 鄭寅普는 關聯 글을 싣고 “李舜臣의 墓所와 位土를 保存하는 것은 우리 朝鮮人의 共同 責任”이라며 “日記(亂中日記), 金臺(金帶), 長劍, 妙計(墓階), 屛風石, 비각 等의 修理保存을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9日 만에 모인 2919원

    동아일보 1931年 5月 13~15日子 記事를 통해 李忠武公 墓所와 位土 低糖 事件은 世上에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卽刻的인 反應을 보였다. 5月 16日부터 동아일보로 誠金이 遝至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해 5月 17日부터 誠金 寄託者 名單과 關聯 事緣 等을 紹介했다. 아울러 이 같은 雰圍氣를 살려 民族誠金運動으로 펼쳐나갔다. 동아일보는 1931年 5月 18日子에는 京城(서울)에 사는 황영소(13歲?輸送公立普通學校 5年) 황영희(6歲?中央幼稚園) 男妹의 事緣을 인터뷰 形式으로 紹介했다. 두 男妹는 “忠武公 酸素가 競賣될 地境에 빠졌다고 어른들이 東亞日報 보시면서 퍽 걱정을 하시기에 그러면 내 貯金筒을 가져갈까요? 하고 아버지께 여쭈었더니 그러라고 하시기에 가져 왔습니다”라고 했다.

    募金 9日째인 5月 24日 모인 誠金은 總 2819원 15錢. 李忠武公 後孫들이 갚아야 할 債務額을 넘어섰다. 1938年 9月 28日子 동아일보 記事에는 當時 不動産 價格이 치솟아 한 채當 300~400원 하던 서울 기와집 價格이 600원까지 치솟았다는 內容이 있다. 當時 서울 기와집 價格을 400원이라고 假定하면 總 性金額은 서울 기와집 70채를 살 수 있을 程度로 巨額이었다.

    하루 前인 5月 23日엔 윤치호, 鄭寅普, 韓龍雲 等이 李忠武公遺跡保存會를 結成했다. 遺跡保存會는 1931年 6月 8日 顯忠祠를 再建(重建)하기로 決意했다. 닷새 뒤인 6月 13日 債務(2372원 22錢)를 辨濟하고 位土의 抵當權 設定을 解除해 位土 文書를 되찾았다. 이어 遺跡保全會는 6月 18日 閑山島의 李忠武公 祠堂인 制勝堂(制勝堂)을 重修하기로 決意했다.

    民族誠金運動은 이런 過程을 거쳐 全國的인 李忠武公遺跡保存運動으로 擴散됐다. 李忠武公遺跡保存會는 1931年 7月 顯忠祠 重建 事業에 着手했다. 1年 동안의 工事를 거쳐 1932年 6月 5日 顯忠祠 落成式과 李忠武公 影幀 奉安式을 함께 擧行했다. 顯忠祠 落成式엔 全國에서 3萬餘 名이 몰릴 程度로 大盛況이었다. 誠金 募金運動은 顯忠祠 落成式이 열린 1932年 6月 5日 마무리됐다. 國內와 海外에서 2萬餘 明과 400餘 團體가 參與했고 最終 募金額은 1萬6021원 30錢이었다.

    文化財가 된 便紙 1000餘 通

    충무공 묘소를 지키기 위해 경성(서울)에 사는 황영소(13세·수송공립보통학교 5년) 황영희(6세·중앙유치원) 남매가 보낸 편지.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忠武公 墓所를 지키기 위해 京城(서울)에 사는 황영소(13歲·輸送公立普通學校 5年) 황영희(6歲·中央幼稚園) 男妹가 보낸 便紙. [文化財廳 顯忠祠管理所]

    1931年 5月부터 1932年 6月까지 14個月 동안 뜨겁게 展開된 民族誠金運動. 그 過程을 記錄한 資料는 現在 잘 남아 있다. ‘이충무公誠金關係書類’(7冊?東亞日報社 作成) ‘이충무公遺跡保存會書類’(1冊?東亞日報社 李忠武公遺跡保存回 作成) 等 8種 24點이다. 여기엔 誠金과 함께 傳達된 1000餘 通의 便紙가 包含돼 있다. 民族誠金運動에 參與한 個人이나 團體 가운데 一部는 誠金, 성금자 名單과 함께 보낸 便紙들이다. 이 資料는 2012年 牙山 顯忠祠 境內의 古宅 倉庫에서 發見됐다. 이충무公의 門中 後孫들이 이충무公遺族保存會로부터 넘겨받아 古宅 倉庫에 保管해 온 것이다. 只今은 文化財廳 顯忠祠管理所가 保管하고 있으며, 2022年 國家登錄文化財로 指定됐다. 公式 名稱은 ‘日帝强占期 李忠武公 墓所 保存과 顯忠祠 重建 民族誠金 便紙 및 資料’다.

    便紙를 보면, 誠金 參與者는 各界各層을 網羅한다. 幼稚園生, 普通學校?高等普通學校?夜學校의 學生, 帝國大學과 專門學校 學生, 各種 學校의 敎員, 運輸 從事員, 埠頭 勞動者, 魚物(魚物) 行上院, 劇場 職員, 祭祀(製絲)工場 女工, 고무工場 職工, 鐵工所 職員, 印刷所 職工, 세브란스病院 職員, 土器 商人, 券番의 妓生, 旅館 보이(점원), 禁酒斷煙回(禁酒斷煙會) 會員, 日本의 炭鑛 勞動者, 中國의 국숫집 職員, 酒類會社의 一家族 28名, 어린 男妹 等等. 美國의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 멕시코의 멕시코시티, 日本의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와카야마(和歌山) 후쿠이(福井) 時老母세키(下關) 후쿠오카(福岡) 고베(神戶), 中國의 단둥(丹東) 랴오닝(遼寧) 룽징(龍井) 옌벤(延邊) 等 海外 곳곳의 同胞들도 誠金運動에 參與하고 便紙를 보냈다. 어떤 어린이들은 學用品 값을 아끼거나 貯金筒을 깼고, 어떤 學生들은 松蟲이를 잡아 번 돈을 모았으며 누군가는 굶어가면서 勞動 품삯을 아꼈고 누군가는 담배를 끊고 돈을 모았다.

    원통함과 悲憤慷慨, 뼈저린 自省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에 자리 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 [동아DB]

    忠南 아산시 음봉면 山整理에 자리 잡은 忠武公 李舜臣 將軍의 墓. [東亞DB]

    많은 사람은 便紙에서 이충무公을 “民族의 恩人” “世界의 位인” “民族의 英雄” “民族의 守護神” “白衣民族의 生靈” “鐵船의 元祖” 等으로 稱했다. 그 便紙의 事緣을 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感動的이다. 李忠武公 墓所와 位土가 抵當 잡힌 것에 對한 心境, 誠金을 내게 된 動機, 이충무公에 對한 認識, 앞으로 墓所와 位土를 어떻게 管理해야 할 것인지에 對한 見解, 民族의 未來에 對한 苦悶 等 다양한 느낌과 意見이 담겼다. 特히 이충무公의 墓所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李忠武公 墓所를 꼭 지켜내겠다는 意志, 어려운 經濟 與件上 誠金을 많이 내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心境이 切切하게 다가온다. 一部 便紙의 全文을 紹介한다.

    “저는 어려서 아버지, 어머니와 永遠한 나라로 作別하고 할 수 없이 이리저리 몸을 굴려 다니다가 只今은 旅館보이 生活을 하는 아이입니다. 하루는 여러 손님들이 貴報를 읽으시면서 이충무公의 墓所 問題에 對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는데, 忠武公의 靈魂이 이 微賤한 제 가슴에까지 刺戟을 주어 感謝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 돈 많으시고 큰 집에 살고 있는 여러분의 가슴에도 忠武公의 靈魂의 에너지가 感泣이 되겠지요. 저는 차마 견딜 수가 없어서 가방을 털어보니 金 30錢이 있어 보내니 泰山을 일으킴에 한 줌의 흙이라도 보태어 이충무公의 墓所를 우리의 먼 將來까지 傳해주시옵소서. -박천읍內 東亞旅館 보이 유화성 올림”

    “二千萬 同胞 머릿속에 계신 忠武公의 하늘 같은 恩惠는 머릿속에 새겼는데 몇 百年 된 오늘에 잊어버리겠습니까. 다시 威勢를 벗어난 白衣同胞는 시들어 말라가는 모질고 악스러운 목소리로 멀리 떨어진 거북船 時代를 앙앙하게 부르짖을 따름입니다. 더욱이 共의 墓所 問題를 들은 白衣의 피를 이은 우리 同胞는 핏줄에 떨리는 哀痛에 때를 當한 설움과 痛歎한 눈물을 禁할 수 없습니다. 世波에 시달리는 孱弱한 몸은 1원의 餘裕도 없어서 50錢의 핏 돈으로 白衣同胞의 핏줄을 잇고자 하며 공의 하늘 같은 恩惠를 萬分의 一이라도 報答할까 敢히 바랍니다. 공의 神靈이시여 핏줄에 딸린 二千萬의 白衣同胞가 黑暗에서 彷徨하고 苦海에서 哀願하는 소리가 보이지 아니하고 들리지도 아니하십니까. 當代에 위엄스러운 거북船은 어찌 只今은 이름이 없습니까. 東西洋 바다 사이에서 기울어가는 흰 돗을 단 배는 거북船 오기만 苦待합니다. -牙山郡 둔포 獨自 김동섭”

    위에서 紹介한 것처럼 誠金 便紙에는 悲憤慷慨, 원통한 心情이 두드러진다.

    “이番에 꿈에도 잊지 못할 이충무公의 墓所 問題를 읽고 痛哭하며 歎息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願하기를 朝鮮 사람들이여, 피눈물을 많이 흘려야 합니다. 흘려서 그 墓所를 깨끗하게 씻긴 後에 眞實로 完全한 墓所가 될 줄로 믿습니다.”(경남 南海郡 南海面 북변동의 고학준)

    “우리 피 끓는 同胞로서 肉體가 粉碎되기 前에는 白衣民族의 生靈이 되시는 우리 忠武公 英妙만은 우리가 찾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경성의 동우親睦會)

    悲憤慷慨와 圓筒, 衝擊의 心情은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이충무公의 墓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對한 自省의 목소리였다.

    “오늘에 이르러 그 墓所까지 擔保 잡히는 地境에 處하였다 함은 實로 全民族의 罪요 數値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황해 평산의 한포엡윗소년회) “二千萬 同胞의 生命을 救하는 데 몸을 犧牲하신 거룩하신 어른의 墓所 하나를 지키지 못하고 競賣 딱紙가 붙게 한 우리들의 罪惡은 무엇이라 말할까요? 먼저 外國人이 이 事件을 알 때 朝鮮 사람을 얼마나 愛國心이 없고 뜨거운 피가 없고 뼈 없는 썩은 송장으로 알겠습니까?”(피 끓는 사람)

    그래도 十匙一飯으로 精誠을 모으면 墓所와 位土를 되찾을 수 있다는 自信感도 많이 보인다.

    “어찌 하더라도 거북船 어른을 求할 수 없을까요? 그까짓 債務 같은 것을”(도쿄의 苦學生), “티끌 모아 泰山이라고 했으니 우리 民族이 1원씩이라도 보태면 그까짓 3千원은 今方 償還할 것”(平南 江東의 최정조), “忠武公 墓地 債務쯤은 3000名이 1원씩만 支出해도 相換될 것”(京畿 開城의 허완 外)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있는 고택. 이순신 장군이 무과 급제 전 머물던 집이라고 한다. [동아DB]

    忠武公 李舜臣 將軍을 모신 忠南 아산시 顯忠祠에 있는 古宅. 李舜臣 將軍이 武科 及第 前 머물던 집이라고 한다. [東亞DB]

    亡國民에겐 心的 救援이던 忠武公

    李忠武公 墓所와 位土를 民族의 遺産으로 認識해 共同 管理해야 한다는 意見도 적지 않았다. 墓所와 位土를 低糖에서 解除한 뒤엔 덕수 李氏 門中이 管理할 것이 아니라 公共에서 管理하자는 提案이 代表的이다.

    “1萬 名만 응해도 그들 使孫(嗣孫)에게 委託하지 않고 다른 方法으로 永遠히 保存하도록 設計할 수도 있을 줄 압니다.” (京畿 開城의 허완 外) “함께 努力해서 民族의 羞恥가 되는 이 債務를 하루 빨리 削減시키고 이 社會에 永久히 忠武公을 奉安하며 그 遺物을 完全히 保存할 方法을 講究하는 運動에 있을 뿐입니다.”(경남 馬山의 민영호) “一時的 競賣 問題만 解決하지 않고 忠武公의 墓所, 사당, 位土, 비각, 遺物 等을 永久 完全하게 保管할 基本對策을 樹立해야 할 것으로 確信하는바…”(경남 釜山의 이충무公報恩會員 一同)

    誠金 便紙엔 이충무公의 遺物?遺跡에 對한 關心度 자주 드러났다. 이충무公뿐만 아니라 歷史的 人物의 遺物과 遺跡을 社會가 管理해야 한다는 認識도 나타났다. 現在의 視角으로 보면, 文化遺産 保存을 위한 市民運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충무公의 墓所와 位土를 되찾기 위해 始作된 民族誠金運動이 顯忠祠 重建, 李忠武公遺跡保存運動으로 發展한 것은 이러한 認識이 깔려 있었기에 可能했다.

    앞서 紹介한 한 便紙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공의 神靈이시여 핏줄에 딸린 二千萬의 白衣同胞가 黑暗에서 彷徨하고 苦海에서 哀願하는 소리가 보이지 아니하고 들리지도 아니하십니까. 當代에 위엄스러운 거북船은 어찌 只今은 이름이 없습니까. 東西洋 바다 사이에서 기울어가는 흰 돛을 단 배는 거북船 오기만 苦待합니다.” 흰 돛단배는 어둠에 갇혀 있는 朝鮮과 朝鮮人(白衣同胞)을 象徵한다. 거북船(李忠武公)은 現在의 어둠을 뚫고 돛단배를 救해줄 希望의 救世主다. 이렇게 當時 사람들은 이충무公을 救援의 存在로 받아들였다.

    映畫 ‘露梁’의 마지막 部分에서 이충무公의 喪輿가 露梁 바닷가를 지난다. 이충무公은 떠났으나 百姓들은 그를 보낼 수 없었다. 1931~1932年 誠金을 내고 便紙를 보낸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李舜臣의 墓所와 位土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된 植民地 朝鮮의 現實. 張三李四(張三李四) 普通 사람들은 뼈저린 罪責感으로 誠金을 보내고 便紙를 썼다.

    이충무公의 痕跡은 곳곳에 있다. 國寶 ‘亂中日記’, 國寶 李舜臣 長劍 같은 遺物도 남아 있다. 하지만 1000餘 通의 便紙는 또 다른 次元이라고 할 수 있다. 便紙에 가득한 1930年代 朝鮮 百姓의 純粹함과 切切함. 이보다 더한 感動이 어디 있을까.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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