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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創刊 100年, 歷史에 새긴 瞬間들|新東亞

동아일보 創刊 100年, 歷史에 새긴 瞬間들

日帝强占期 民族魂 鼓吹 獨裁에 맞선 ‘言論自由’ 守護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名譽敎授

    presskr@empas.com

    入力 2020-04-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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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 最初 殉職 記者, 東亞日報 장덕준

    • 忠武公 李舜臣 遺跡 保存

    • 文盲退治, 農村啓蒙 運動 先鋒

    • 3·15 不正選擧 告發, 政治깡牌 退出

    • 雜誌 創刊, 放送 進出로 報道·批判 機能 强化

    1920年 4月 1日 創刊한 동아일보가 100周年을 맞았다. 지난 100年은 民族과 함께한 苦難과 榮光의 歷史였다. 3·1運動의 結實로 태어난 新聞이 100年을 이어오면서 現代史의 赤裸裸한 實錄(實錄)이 된 것도 意味 있다. 實錄에는 자랑스러운 內容도, 부끄러운 모습도 남았다. 政治, 經濟, 社會, 文化 모든 分野 歷史가 年代記 巡으로 담겨 있다. 높은 곳에서 最下層까지 다양한 사람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時代의 거울이다. 그렇기에 어떤 時期, 어느 紙面이 더 重要한지는 보는 觀點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日帝强占期 20年 동안 發行된 紙面도 한마디로 評價할 수 없다. 論調와 主張이 狀況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民族紙 面貌에 遜色없는 製作 態度와 抗日的인 論調를 보인 때가 있었다. 그러나 1930年代 日本 軍國主義 時期에 發行된 紙面에서는 다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民族 全體가 植民治下의 屈辱을 겪던 時期에 唯獨 新聞만 鮮明한 抗日 論調를 持續할 수 없었을 것이다. 

    光復 後에도 6·25戰爭 期間과 權威主義 政權 아래서 發行된 新聞을 오늘 觀點에서 評價하면 首肯하기 어려운 面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狀況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 境遇가 있었다 하더라도 동아일보가 國家와 民族을 위해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初心만큼은 잃지 않았다고 본다. 發行 中斷이라는 彈壓을 받기도 하고 內部 葛藤이 表出되는 때도 있었지만 100年을 버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東亞日報 100年 歷史에서 主要 事件을 골라내기는 事實上 不可能하다. 여러 角度에서 얼마든지 다른 評價를 내릴 수도 있다. 따라서 아래 列擧하는 事例는 ‘主觀的인 觀點’에서 거칠게 選定한 동아일보 歷史의 한 部分이라는 點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言論 歷史에 記錄될 主要 事件임은 틀림없다고 본다.

    1 最初의 殉職 記者 장덕준

    한국 최초의 순직 기자 장덕준 선생 추도회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0년 4월 3일자 기사. [동아DB]

    韓國 最初의 殉職 記者 장덕준 先生 追悼會를 報道한 東亞日報 1930年 4月 3日子 記事. [東亞DB]

    추송(秋松) 장덕준(張德俊·1892~1920)은 우리나라 最初의 殉職記者다. 그는 동아일보 創刊 發起人이었고, 故鄕 黃海道에서 동아일보 創刊을 위한 走禽(株金) 募集에 나서기도 했다. 創刊 뒤에는 論說班員과 通信部長, 調査部長을 겸했다. 當時 동아일보 編輯局長은 이상협, 論說主幹은 장덕준의 동생 장덕수였다. 



    장덕준은 동아일보 創刊 다음 날인 1920年 4月 2日子부터 13日子까지 10回에 걸쳐 ‘朝鮮 所要(騷擾)에 對한 日本 輿論을 批評함’이라는 題目의 칼럼을 실었다. 여기서 소요란 3·1運動을 일컫는 말이다. 장덕준은 이 칼럼을 통해 3·1運動을 歪曲하는 日本 各界 主張을 條目條目 批判했다. 例를 들면 이렇다. 日本 교토帝國大學 法學敎授 오가와 고타로(小川鄕太郞)는 1919年 11月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 新聞’에 ‘朝鮮統治론’이라는 글을 揭載했다. 이 글에는 “朝鮮에는 多數의 無識者가 있으며, 多數한 無識者는 獨立의 以上이 없다”는 內容이 있다. 장덕준은 이에 反駁하며 “朝鮮人의 獨立思想과 愛國精神은 血液과 腦髓에 依해 發生한다. 決코 少數 野心家와 煽動家에 依한 것이 아니므로 先覺者와 有識者를 團束, 壓迫하더라도 朝鮮魂과 獨立思想은 秋毫도 打擊받을 理 없다”고 强調했다. 

    장덕준은 當時 持病인 肺結核으로 健康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民族意識을 鼓吹하는 論說을 동아일보에 持續的으로 發表하고, 全方位的인 取材 活動도 펼쳤다. 1920年 여름에는 東아시아를 訪問한 美國 議員團을 取材하고자 中國 베이징에 다녀오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그해 9月 26日 日帝로부터 武器停刊 處分을 받았다. 9月 24日과 25日子에 連續으로 실은 社說 ‘祭祀(祭祀)問題를 再論하노라’가 直接的 理由였다. 總督府는 이 社說이 日本人이 信念의 中樞로 삼는 거울, 구슬, 칼 等 이른바 神奇(神器) 3種을 冒瀆함으로써 結果的으로 皇室의 尊嚴을 冒瀆했다고 主張했다. 동아일보가 8月 30日부터 14回에 걸쳐 連載한 ‘對英(大英)과 印度’ 技士도 問題 삼았다. 英國이 印度에서 저지른 惡政을 論하면서 暗暗裏에 이를 朝鮮과 對備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滿洲 훈춘(琿春)에서는 日本軍이 朝鮮 同胞를 無差別 殺害하는 일이 벌어졌다. 金佐鎭 將軍이 이끄는 獨立軍이 ‘靑山裏 戰鬪’에서 勝利한 데 對한 報復으로 그 地域에 사는 朝鮮人 5000餘 名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虐殺한 것이다. 장덕준은 이 消息을 듣고 10月 中旬 現地로 달려갔다. 當時 新聞이 停刊 中이라 取材를 한다 해도 報道할 紙面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血痰(血痰)을 吐할 만큼 健康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同胞가 大量虐殺 됐다는 消息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며 汽車에 몸을 실었다. 

    以後 장덕준은 間島의 中心 都市 쥐쯔제(局子街)에서 좀 더 들어간 곳에 宿所를 잡고 日本軍 蠻行을 取材했다. 當時 그가 쓴 글에는 “殺風景이 일어나 恐怖의 기운이 가득한 間島 一帶에는 罪가 있고 없고 間에 男女老少가 殺戮의 亂을 當하고 있다”는 대목이 있다. 그렇게 取材에 邁進하던 12月 어느 날 아침, 장덕준은 日本人 두세 名에게 불려 나간 後 永遠히 消息이 끊어졌다. 이리하여 우리 言論史上 첫 殉職 記者가 됐다. 나이 29歲의 일이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64年 4月 30日 言論 發展에 功이 많은 言論인 다섯 名을 選定해 新聞會館에 肖像畫를 奉安했다. 이때 김인승 畫伯이 그린 장덕준의 肖像畫가 現在는 프레스센터 19層 記者클럽에 걸려 있다. 歲月이 흐르는 동안 많이 變色됐지만 不屈의 記者 精神만은 決코 退色하지 않고 날이 갈수록 빛을 發하고 있다.

    2 忠南 牙山 顯忠祠 中搜

    동아일보는 1931年 5月 13日 忠武公 李舜臣 墓가 있는 忠南 牙山 땅이 後孫의 負債 탓에 競賣 直前에 놓인 狀況을 報道했다. 이튿날인 5月 14日에는 1面에 ‘民族的 羞恥, 債務에 시달린 忠武公 墓所’라는 題目의 社說을 실었다. 

    “우리들의 歷史의 記錄 面에서 그 人格으로나 그 私的(事績)으로나 忠武公 李舜臣의 위를 갈 사람이 얼마 없으리라. 그의 位土(位土)와 墓所가 競賣를 當하게 된다니 이런 變異 또 잇으랴 이런 民族的 辱이 더 잇으랴”로 始作되는 社說에는 筆者가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筆致로 봐서 當時 編輯局長 李光洙가 쓴 것이 確實하다. 李光洙는 歷史的 人物 가운데 李舜臣, 生存 人物 中에는 安昌浩를 尊敬했다. 

    동아일보는 社說을 통해 “百姓과 國土를 累卵의 危機에서 救出한 民族的 恩人 忠武公의 位土와 墓所가 債權者 손에 넘어가는 것”을 民族的 犯罪로 規定하면서 “우리는 一層 民族文化에 對한 崇仰心과 愛着心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呼訴했다. 

    李光洙는 그 直後인 5月 19日 直接 忠武公 遺跡 巡禮길에 올랐다. 忠南 溫陽, 全南 木浦, 光州 等을 거쳐 全南 麗水, 慶南 統營 및 閑山島까지 누비는 日程이었다. 이 過程에서 忠武公의 옛집과 墓所를 찾고, 後孫과 地域 維持 等도 만났다. 莫重한 編輯局長 職責을 내려놓고 5月 29日까지 現場 取材를 마친 뒤 6月 26日부터 小說家 李光洙로 돌아와 동아일보에 歷史小說 ‘李舜臣’ 連載를 始作했다. 

    以後 동아일보가 主導한 忠武公 遺跡保存 運動은 全國的인 呼應을 얻어 成功的으로 마무리됐다. 社員들도 앞장서 誠金을 냈고, 全國的으로 1萬6021원30錢이 모였다. 祠堂을 짓고 影幀을 모시기에 充分한 額數였다. 이때 남은 돈 386원 65戰은 顯忠祠 基金으로 積立했다. 

    李光洙 小說 ‘李舜臣’은 遺跡保存 事業이 進行되는 동안 繼續 連載돼 1932年 4月 3日 178回로 마무리됐다. 民族의 英雄 忠武公을 照明한 이 小說의 感動이 遺跡保存 事業 成功에 큰 影響을 미쳤을 것이다.

    3 ‘글장님’ 없애기 브나로드運動

    동아일보 1931년 
7월 24일자에 실린 
브나로드운동 참가자 
모집 사고. [동아DB]

    동아일보 1931年 7月 24日子에 실린 브나로드運動 參加者 募集 事故. [東亞DB]

    開化期 以來 우리 言論이 벌인 實踐 運動 가운데 可視的인 成果를 낸 두 가지 代表的인 캠페인이 있다. 1907年 始作된 國債補償運動과 1920年代 後半부터 1930年代 中盤까지 進行된 文字普及, 文盲退治 運動이다. 

    이 中 後者는 日帝强占期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同時에 進行한 全國 規模의 民衆 啓蒙運動이었다. 두 新聞社가 運動을 本格的으로 展開하던 무렵, 國內外에는 여러 危機가 重疊돼 있었다. 1927年 新幹會가 創立돼 民族運動의 單一戰線을 志向했으나 눈에 띄는 活動을 벌이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獨逸 나치 勢力이 躍進해 世界戰爭 勃發의 緊張이 높아갔다. 美國은 大恐慌(1929)을 겪고 있었고, 日本 또한 1927年 3月부터 몰아친 恐慌에 힘겨워했다. 日本 政府가 그해 4月 25日 支拂猶豫(모라토리엄)를 宣言해 朝鮮 또한 深刻한 經濟的 打擊을 입은 狀態였다. 여기에 第 1, 2次 朝鮮共産黨 事件(1925·1926), 光州學生運動(1929), 滿洲事變(1931) 等이 이어지며 朝鮮總督府의 强壓政策이 度를 더해갔다. 

    日帝는 當時 우리나라에서 韓國語 抹殺을 包含한 民族 抹殺 政策을 推進했다. 日本語를 ‘國語’라 하고, 學校 現場에서도 日語를 쓰도록 强要했다. 韓國語 使用은 禁止했다. 이런 狀況에서 한글을 普及하는 건 實踐的인 抗日運動이었다. 

    文字普及 運動이 本格化한 1930年 무렵 朝鮮 人口는 2000萬 名이 若干 넘었는데 이 中 1700萬 名假量이 文盲이었다. 人口의 90%에 肉薄하는 水準이다. 文盲退治가 時急하고 重要한 當面 課題였음을 보여준다. 

    동아일보는 1928年 3月 17日子 社說 ‘文盲退治의 運動’에서 母音 10字, 子音 14字를 합쳐 24者가 前婦人 科學的 文字를 물려받고도 民族의 9割이 文盲으로 있는 건 民族的 恥辱이라고 說破했다. 이에 “擧族的으로 文盲退治 運動에 앞장서게 됐다”고 趣旨를 밝혔다. 또 3月 25日부터 29日까지 連日 社會面 머리에 ‘글장님 없애기 運動’ 計劃을 紹介한 뒤 創刊 記念日인 4月 1日을 期해 이 運動의 本格 始作을 宣言하기로 計劃했다. 

    이를 위해 동아일보 本社와 지·分局이 萬般의 準備 態勢를 갖췄다. 全國에 宣傳 포스터를 걸고 少年團 市街行進, 飛行機를 動員한 傳單 撒布, 人力車와 自轉車에 꽂고 다닐 宣傳 旗발 製作, 讀者에게 配付할 한글 元本 等을 準備했다. 4月 2日에는 各界 名士 30餘 名을 招聘해 講演會를 열 計劃도 세웠다. 演士로는 조병옥(趙炳玉), 민태원(閔泰瑗), 이종린(李鍾麟), 윤치호(尹致昊), 최두선(崔斗善), 安在烘(安在鴻), 홍명희(洪命憙), 崔鉉培(崔鉉培), 최남선(崔南善), 김기전(金起田), 방정환(方定煥), 유각경(兪珏卿), 권덕규(權悳奎) 等 當代 國語學界 權威者와 言論人 等 敎育, 宗敎, 思想, 言論界 名望家를 두루 涉外했다. 

    그러나 朝鮮總督府는 그해 3月 29日 突然 禁止 命令을 내렸다. ‘文盲退治’라는 標語가 러시아에서 번져온 것이며, 포스터에 그려진 붉은 筋肉의 勞動者 모습이 共産主義 色彩를 풍긴다는 理由였다. 少年 集會나 街頭行列이 靑少年에게 좋지 않은 影響을 준다고도 主張했다. 이런 理由로 關聯 行事 全體를 禁止하며 ‘우리글 元本’도 押收했다. 朝鮮總督府는 나아가 運動 禁止 事實을 報道한 동아일보 記事까지 押收했다. 

    1928年 推進한 文字普及運動은 總督府 妨害로 挫折됐지만 동아일보는 屈하지 않았다. 1931年 文盲打破를 비롯해 農村啓蒙 運動으로까지 範圍를 넓힌 ‘브나로드’運動을 始作했다. 브나로드는 러시아語로는 ‘民衆 속으로’라는 뜻으로, 1873年부터 1895年까지 러시아 知識人이 農民層에 파고들어 벌인 啓蒙運動 이름이다. 동아일보는 그해 7月 16日 ‘第1回 學生 하기(夏期) 브나로드 運動-男女學生 總動員, 休暇는 奉仕的으로’라는 記事를 내며 브나로드運動의 出發을 알렸다. 當時 口號는 “配偶者! 가리키자! 다함께!”였다. 以後 1934年까지 네 次例에 걸쳐 進行된 이 運動은 큰 成果를 거뒀다. 

    編輯局長 李光洙는 連載小說 ‘李舜臣’을 끝낸 지 9日 뒤 바로 새 小說 ‘흙’ 連載를 始作했다. 1932年 4月 12日부터 이듬해 7月 10日까지 271回에 걸쳐 이어진 이 作品은 農村啓蒙 運動을 그린 캠페인 小說이다. 小說家 沈熏(沈熏·1901~1936) 또한 이와 같은 主題의 小說 ‘상록수’를 써서 브나로드運動이 大衆的 支持를 얻는 데 寄與했다.

    4 日章旗 抹消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 [동아DB]

    1936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金메달리스트 손기정 選手의 가슴에 달린 日章旗를 지우고 報道한 동아일보 紙面. [東亞DB]

    1936年 8月 25日子 東亞日報 2面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金메달리스트 손기정 選手 寫眞이 실렸다. 그의 가슴에 달려 있던 日章旗가 지워진 狀態였다. 

    1930年代 滿洲事變과 中日戰爭이 벌어진 뒤 國內 言論 論調는 크게 萎縮되는 狀況이었다. 하지만 抗日 精神이 完全히 消滅되지는 않았다. 東亞日報 日章旗 抹消 事件이 이를 立證한다. 

    손기정이 올림픽 마라톤 競技에 優勝한 날은 1936年 8月 9日이다. 新聞은 모두 이 消息을 大書特筆하고 ‘祝勝란’까지 마련했다. 各界의 祝賀 電話와 電報가 新聞社에 殺到했고, 到處에서 祝賀金이 遝至했다. 東亞日報, 朝鮮日報, 朝鮮中央日報 等 朝鮮 3代 新聞은 20餘 日 동안 이 消息에 紙面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손기정의 마라톤 制霸를 讚揚한 것은 民族的 自尊心을 鼓吹하려는 意圖였다. 朝鮮總督府는 이런 狀況과 新聞 論調를 銳意 注視했다. 

    各 社에 “손기정 記事 取扱을 注意하라”고 指示하는 한便 各界에서 計劃한 祝賀會, 손기정 記念體育會館 設立 發起會, 演說會 等 各種 行事를 禁止했다. 그럼에도 言論과 社會 各界의 熱意는 식지 않았다. 손기정을 國民 英雄으로 높이 評價하는 雰圍氣가 造成된 이때, 동아일보가 그의 가슴에 붙은 日章旗를 抹消한 寫眞을 실었다. 

    事實 그보다 12日 앞선 8月 13日子 2面에도 日章旗를 지운 寫眞을 이미 실었다. 이때는 檢閱 當局이 눈치채지 못했는데 8月 25日子 新聞에 더욱 分明히 削除한 寫眞이 실리면서 問題가 커진 것이다. 總督府는 이 事件이 單純한 過失로 일어난 게 아니라고 봤다. 記者들이 마음 깊이 民族意識을 지니고 있어 發生한 것으로 規定하고 동아일보에 停刊處分이라는 强勁 措置를 取했다. 

    警察은 當時 事件 關聯者 여러 名을 拘束했다가 40日 만에 풀어주면서 이들에게 新聞社를 떠나도록 强要했다. 이 일로 運動部 이길용, 調査部 所屬 火가 이상범, 寫眞部 신낙균(誇張)·서영호·백운선, 編輯部 임병철, 社會部 장용서가 退社했다. 이길용 等 5名은 앞으로 言論機關에 一切 關與하지 않으며, 萬一 다른 事件에 連累되면 이 事件의 責任까지 加重해 嚴罰을 받을 것을 覺悟한다는 內容의 覺書까지 썼다. 동아일보 社長 宋鎭禹 等 幹部들도 當時 이 事件에 責任을 지고 新聞社를 떠났다.

    5 송진우, 장덕수 被殺

    光復 後 많은 言論人이 政界에 進出했다. 古下(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도 그中 한名이었다. 告하는 言論人, 敎育者, 獨立運動家, 政治家였다. 1919年 3·1運動 當時 民族 指導者 48名에 包含돼 獄苦를 치렀다. 동아일보 創刊 當時에도 獄中에 있던 그는 1921年 9月 出獄 後 社長에 就任했다. 31歲의 血氣 넘치는 靑年 時節이다. 以後 25年 동안 세 次例에 걸쳐 동아일보 社長 또는 主筆을 맡은 그는 民族 言論을 이끄는 實質的인 牽引車였고, 民衆의 指導者였다. 하지만 1945年 12月 30日 새벽 서울 원서동 自宅에서 여섯 名의 暗殺犯이 쏜 銃에 맞아 눈을 감고 말았다. 

    雪山(雪山) 장덕수(張德秀·1894~1947)는 2年 뒤인 1947年 12月 2日 自宅에서 암살당했다. 동아일보 創刊 當時 26歲 靑年으로 招待 主幹을 맡은 그는 創刊號 1面에 실린 ‘住持(主旨)를 鮮明(宣明)하노라’를 執筆했다. 동아일보 創刊의 歷史的 意味와 社名을 壓縮的으로 敍述한 글이다. 當時 그가 宣言한 ‘①朝鮮民衆의 表現機關으로 自任하노라 ②民主主義를 支持하노라 ③文化主義를 提唱하노라’라는 精神은 오늘날까지 東亞日報 斜視(社是)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동아일보가 創刊 後 곧 晝間制를 廢止하면서 副社長 兼 主筆(1921.9~1923.4)을 맡게 된 張德秀는 新任 社長 宋鎭禹와 함께 初期 東亞日報를 이끌었다. 1945年 12月 東亞日報 復刊 때 다시 取締役(取締役·過去 理事를 이르던 말)을 맡았으나 主 活動舞臺는 政界였다. 한국민주당 외무부장, 政治部長 等을 맡아 首席總務(黨首) 金性洙와 함께 大韓民國 政府 樹立을 위해 努力하다 銃擊을 當했다. 

    張德秀의 刑 장덕준이 韓國 最初의 殉職 記者가 된 것은 앞서 살펴봤다. 동생 장덕진(張德震·1898~1924)은 상하이臨時政府 義警團員(義警團員)으로 獨立運動 資金을 마련하려다 中國人 銃에 맞아 숨졌다. 3兄弟가 모두 悲鳴(非命)으로 生을 마감한 것이다.

    6 4·19 不正選擧 糾彈

    1960年 4·19 學生 革命 雰圍氣를 言論이 앞장서 造成한 事實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는 執權黨의 非理와 이에 맞서는 各界 鬪爭을 끈질기고 勇敢하게 報道했다. 國民 便에 서서 執權黨 橫暴를 告發하고 不正選擧를 監視한 言論이 있었기에, 國民 또한 힘을 얻어 거리에 나설 수 있었다. 

    特히 危險을 무릅쓰고 取材에 앞장섰던 사람들로 寫眞記者의 功勞를 잊을 수 없다. 寫眞記者는 언제나 事件 現場에 있어야 하고, 危險한 일이 벌어지면 가장 가까운 距離까지 接近해 생생한 場面을 捕捉해야 한다. 따라서 危險한 狀況에 露出되기 十常이다. 1960年 當時 동아일보 寫眞記者들은 蔓延했던 政治깡牌 亂動을 正面에서 撮影하고 不正投票 現場을 목숨 걸고 暴露해 國民的 憤怒를 일으켰다. 이것이 4·19 革命의 導火線이 됐다. 

    4·19 直後 發刊된 타블로이드판 寫眞畫報집 ‘民主革命의 記錄’에는 當時 동아일보 寫眞部長 최경덕, 次長 이명동, 記者 박용운·홍성혁 等 네 名이 撮影한 現場 寫眞 283張이 담겨 있다. 3·15 不正選擧부터 李承晩 大統領 下野까지 歷史의 瞬間瞬間이 담겨 있는 이 冊은 6月 1日 初版 2萬 部를 印刷한 지 10餘 日 만에 全量 賣盡됐다. 다음 달 나온 裁判 1萬 不渡 다 팔렸다. 

    이 冊은 單一 事件을 主題로 新聞社에서 發刊한 最初의 報道寫眞集이다. 報道寫眞의 威力과 寫眞이 갖는 眞實性, 正確性, 歷史性 等을 유감없이 發揮한 歷史의 記錄이기도 하다. 이 冊을 통해 寫眞記者들이 獨裁 政權을 무너뜨리고 民主主義의 署長을 여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이 널리 알려졌고. 報道寫眞 및 寫眞記者에 對한 社會的 評價가 높아졌다. 以後 國內 報道寫眞의 一大 轉換期가 펼쳐지게 된다.

    7 신동아 筆禍 事件

    1968年 동아일보가 發行하는 月刊誌 ‘신동아’ 12月號에 김진배·박창래 두 記者가 共同 執筆한 ‘次官(借款)’ 記事가 실렸다. 原稿紙 250枚 分量의 深層 取材 記事였다. 政府의 外資導入 政策을 批判하는 內容인 이 記事에는 政權이 特定 借款業體에 特惠를 베풀고 反對給付로 政權 維持를 위한 資金을 제공받고 있다는 內容이 담겨 있었다. 

    신동아가 發刊되자 卽時 中央情報部가 움직였다. 筆者인 두 記者를 비롯해 신동아 部長 손세일, 記者 심재호·이정윤 等을 次例로 連行 또는 自進出頭 形式으로 召喚해 審問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에게는 反共法 違反 嫌疑를 適用하려 試圖하기도 했다. 이에 野黨이 國會 對政府 質疑를 통해 政府의 言論彈壓을 糾彈했고, 編輯人協會와 記者協會가 當局 處事에 抗議하는 共同聲明을 냈다. 

    하지만 살아 있는 權力의 힘은 强했다. 이 필화(筆禍)로 東亞日報 發行人이 바뀌고 重鎭 言論人 多數가 新聞社를 떠나야 했다. 동아일보가 權力의 壓迫을 견디지 못해 천관우(동아일보 主筆), 홍승면(신동아 週間 兼 論說委員), 손세일(신동아 部長) 等을 解任한 데 따른 것이다. 이는 權力의 露骨的인 言論 彈壓이 滿天下에 드러난 象徵的인 事件이자, 言論이 權力에 屈服할 수밖에 없었던 不幸한 事例로 言論界에 긴 波長을 남겼다. 이를 契機로 國內 言論 現實에 對한 自己反省과 批判이 記者協會 等을 中心으로 活潑히 展開됐다.

    8 廣告 彈壓

    1974年 朴正熙 政權은 ‘維新憲法’을 앞세워 言論을 强力히 統制했다. 이에 동아일보 記者들은 그해 10月 ‘自由言論守護大會’를 열고 다음과 같은 決議文을 採擇했다. 

    “(前略)우리는 自由言論에 逆行하는 어떠한 壓力에도 屈하지 않고 自由民主社會 存立의 基本要件인 自由言論 實踐에 모든 努力을 다할 것을 宣言하며 우리의 뜨거운 心臟을 모아 다음과 같이 決意한다. 

    1. 新聞, 放送, 雜誌에 對한 어떠한 外部 干涉도 우리의 一致된 團結로 强力히 排除한다. 

    1. 機關員의 出入을 嚴格히 拒否한다. 

    1. 言論人의 不法 連行을 一切 拒否한다. 萬若 어떠한 名目으로라도 不法 連行이 恣行되는 境遇 그가 貴社할 때까지 退勤하지 않기로 한다.” 


    以後 동아일보는 人權運動家나 野黨 人士 等을 照明하는 記事를 잇달아 揭載했다. 政權은 이를 統制하고자 企業들이 동아일보에 廣告를 내지 못하도록 壓力을 加했다. 一線 記者들의 言論自由 守護運動을 遮斷하기 위해 權力이 꾸민 陰謀였고, 維新 政權의 言論 목조르기였다. 그해 12月부터 廣告 契約을 解止하겠다는 會社가 하나둘 나타나기 始作했고 동아일보는 經營에 큰 危機를 맞았다. 1974年 12月 26日子 東亞日報 4, 5面 下端은 廣告를 내겠다는 會社를 찾지 못해 白紙 狀態로 世上에 나갔다. 

    이러한 言論彈壓은 國民의 거센 反感을 불러일으켰다. 激忿한 市民들이 동아일보에 激勵 廣告를 揭載하며 ‘보이지 않는 손’의 橫暴에 맞서 싸웠다. 著名한 知識人과 文人, 宗敎人, 野黨 政治人뿐 아니라 市民과 學生 等 수많은 사람이 記名 또는 無記名으로 동아일보에 廣告를 揭載해 彈壓받는 言論社를 激勵했다. 이들의 應援이 廣告 없는 廣告欄을 가득 채웠다. 言論 自由와 民主主義를 守護하려는 國民의 努力이었다. 

    廣告 解約 事態는 萬 7個月 後인 1975年 7月 16日 무렵부터 풀리기 始作해 며칠 사이에 瞬息間에 마무리됐다. 以後 廣告面이 제 모습을 찾았지만, 동아일보는 莫大한 損失을 입었다. 廣告彈壓 期間에 新聞 購讀이 約 12萬 部 增加했지만 經營에 別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동아가 입은 가장 큰 被害는 이 事態가 原因이 돼 일어난 記者 解職과 그로 인한 人的 損失이었고, 그들과의 메울 수 없는 깊은 葛藤이 以後 오래 이어졌다. 이른바 ‘동아일보 事態’는 1970年代 言論界를 뒤흔든 試鍊이었고, 우리 言論이 일찍이 經驗한 적 없는 陣痛이었다.

    9 雜誌 ‘신동아’ 創刊

    1931년 11월 발간된 ‘신동아’ 창간호 표지. [동아DB]

    1931年 11月 發刊된 ‘신동아’ 創刊號 表紙. [東亞DB]

    1931年 創刊된 ‘신동아’는 우리나라 雜誌 近代化에 하나의 里程標를 세운 媒體로 評價된다. 1930年代는 日帝가 滿洲事變, 中日戰爭 等의 侵略戰爭을 擴大해 나가던 때였다. 韓半島가 日帝의 兵站基地化韓 時期에 동아일보가 發行한 이 雜誌는 旋風的인 人氣를 끌었다. 동아일보라는 安定的인 母會社가 發行해 充實한 編輯이 可能했고, 個人의 主張을 담기보다 民族의 空氣(公器) 구실을 遂行하려고 努力한 것이 좋은 評價를 받았다. 이에 따라 全國 補給網을 가진 다른 新聞社의 雜誌 發行을 刺戟해 이른바 ‘新聞雜誌 時代’를 이끌었다. 

    그러나 신동아는 通卷 59號까지 發刊한 뒤 ‘손기정 日章旗 抹消 事件’의 影響으로 1936年 廢刊됐고, 28年 後인 1964年 復刊했다. 言論倫理委員會法 波動으로 政府와 言論이 팽팽히 對立하던 時節, 신동아는 ‘精神에 있어 동아일보의 延長’이라는 大原則 아래 ‘읽히는 雜誌’를 標榜했다. 1960年代 신동아는 1930年代에 그랬던 것처럼 다른 日刊紙가 雜誌 發刊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이때부터 다시 한番 우리나라에 ‘新聞雜誌 時代’가 열렸다.

    10 放送 進出

    동아일보는 1963年 4月 25日 東亞放送(DBS)을 開局했다. 新聞社가 經營하는 最初의 라디오 放送이었다. 東亞日報 斜視(社是)에 따라 ‘귀로 듣는 東亞日報’를 目標로 報道 및 批判 機能을 强化했다. 하지만 동아방송은 1964年 6·3事態 때에는 ‘鸚鵡새’라는 告發 性格 放送칼럼을 發生해 舌禍(舌禍)를 입었다. 프로그램 關聯 記者와 PD 等 6名이 戒嚴普通軍法會議 公判廷에 섰고, 戒嚴이 解除된 後 5年 1個月 만에 無罪判決을 받았지만 적잖이 苦楚를 겪었다. 1980年에는 新軍部의 强壓的인 言論統廢合에 따라 11月 30日 告別放送을 끝으로 DBS가 廢房되는 悲運을 맞기도 했다. 以後 2011年 開國한 채널A가 디지털 뉴미디어 時代의 綜合編成채널로 자리매김했다. 

    앞에서 밝힌 대로 東亞日報 100年 歷史에서 紀念碑的인 事件 몇 個를 고르는 일은 無謀하고 不可能하다. 紙面도 턱없이 不足하다. 그러나 一旦 記憶될 事件을 主觀的으로 選定했음을 밝혀둔다.


    鄭鎭奭
    ● 중앙대 英文科, 서울大 碩士(新文學), 英國 런던政經大 博士(言論學)
    ● 前韓國記者協會 編輯室長, 寬勳클럽 事務局長, 言論仲裁委員會 委員, 放送委員會 委員
    ● 前한국외국어대 社會科學大學長 兼 政策科學大學院長
    ● 現한국외국어대 名譽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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