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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判事] 코로나 時代의 혼밥|新東亞

[혼밥判事] 코로나 時代의 혼밥

코로나19, 사랑, 혼밥에 對하여

  • 정재민 前 判事, 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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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0-04-14 09: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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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裁判은 傷處로 始作해서 傷處로 끝난다. 當事者들 傷處에 비할 순 없지만 判事도 傷處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飮食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鬱寂함의 조각이 커피 속 角雪糖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慰勞를 받는다. 그러면서 “判事는 判決로 말한다”고 해서 法廷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便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코로나19 시즌이다. 大韓民國이라는 汽車가 고스란히 災難映畫 세트 속으로 들어가 停車해 버린 것 같다. 예전에는 每番 내 自身이 김밥 속 단무지처럼 느껴지던 出勤길 地下鐵 안에서 요즘은 늘 앉아 간다. 職場에서는 化粧室에서 볼 일 보고 손 안 씻고 나가는 사람이 싹 사라졌다. 退勤길에는 平素 거리를 메우던 人波와 소리가 마스크 뒤로 싹 숨을 죽여버렸다. 엊그제는 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던 有名 파스타집에 가서 食堂을 통째로 專貰 낸 財閥처럼 밥을 먹는 珍貴한 經驗을 했다. 가게 社長이 間만에 손님을 봐서 그런지 平素와 다르게 반가운 表情으로 맞이해 줘 몸 둘 바를 몰랐(지만 氣分이 썩 좋지는 않았)다. 

    요즘은 法廷에서도 모두 마스크를 쓴다. 判事도 마스크를 쓴 채 裁判을 進行하고, 檢査도 마스크를 쓴 채 新聞하고, 辯護士도 마스크를 쓴 채 辯論하고, 矯導官도 마스크를 쓴 채 마스크 쓴 被告人을 데리고 간다. 판·檢事의 法服이 검은色이므로 마스크도 검은色이 어울릴 것 같지만 大槪 흰色을 쓴다. 요즘은 警察이 犯人을 逮捕할 때도 手匣보다 마스크를 먼저 씌워야 할지 모른다. 警察에게 쫓기는 犯人이 코로나 確診者人 양 行世하며 警察한테 침을 뱉으면, 마치 불을 뿜는 도롱뇽을 만난 것처럼 무척 당혹스러울 것 같다. 침을 뱉는 것은 暴行죄에 該當하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를 머금은 침을 뱉으면 傷害罪가 되는 것 아닌가 궁금해진다.

    마스크를 쓴 世上

    요즘은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우리 職場 賣店이나 圖書館은 마스크를 안 쓰면 入場 禁止다. 會議를 할 때 한 名이라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으면 모두 어쩔 줄 몰라 한다. 反面 마스크를 쓰면 말을 하기 싫어진다. 德分에 焦點 없이 말을 길게 늘어놓는 上司 發言이 짧아져 좋기도 하다(그래 안다. 나를 商社로 둔 우리 職員들도 그렇다는 것을). 

    처음에는 마스크가 宏壯히 不便했는데 쓰고 生活해 보니 또 지낼 만하다. 마스크를 쓰고 말을 하고 電話도 한다. 1939年 英國 政府는 獨逸과 戰爭을 準備하면서 모든 國民에게 防毒面을 쓰고 日常生活을 할 것을 請했다. 不安해진 英國 國民은 모두 防毒面을 썼다. 발레리나, 스탠드바 백댄서, 電話交換手度 하나같이 防毒面을 썼다고 한다. 防毒面度 아닌 마스크를 쓰고 못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마스크를 쓰고 말싸움 하고, 월드컵 蹴球를 하고, 甚至於 섹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마스크를 쓰고는 到底히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食事(食事)다. 제아무리 達人 金炳萬이라도 밥 먹을 때는 마스크를 벗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 먹는 行爲가 이렇게 특별한 것이었다니. ‘혼밥判事’ 作家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코로나19는 밥 먹다가도 傳播된다고 한다. 初期 確診者도 작은 테이블에서 함께 밥을 먹다가 感染됐다. 그래서 요즘에는 新天地 敎人과 같이 禮拜드리는 일을 除外하면 낯선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게 가장 危險한 일이 됐다. 安全하고 賢明한 選擇은 혼밥이다. 

    많은 職場에서 도시락을 싸 와 혼자 먹을 것을 勸奬한다. 이것은 마치 에이즈가 流行한다고 自慰行爲를 勸奬하는 것과 같다(같나? 뭔가 좀 異常하다). 退勤 後 食堂을 찾지 않고 집에 가서 飮食을 配達시켜 먹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 나 亦是 週末 내내 여기저기서 配達된 카레, 된醬찌개, 게, 足발, 피자, 沙果, 딸기를 먹었다. 요즘은 된醬찌개 같은 집밥 飮食 材料도 配達된다. 그냥 데우기만 하면 된다. 코로나19를 契機로 집에서 飮食을 配達받아 먹는 삶의 方式이 널리 擴散해 事態 終熄 後에도 相當 部分 維持될 것만 같다. 집에서 먹으니 너무 便하다. (다음 달부터는 연재명을 ‘配達의 判事’로!) 

    밥은 元來 함께 먹는 것일까. 되도록 다른 사람과 같이 먹는 게 좋고, 혼밥은 코로나19街 流行하는 동안 또는 함께 먹을 사람이 없을 때 不可避하게 할 만한 非正常的인 行爲인가. 이런 質問은 事實 어리석은 구석이 있다. 혼자 먹는 것과 같이 먹는 것은 各各 長短點이 있으니까. 혼자도 잘 먹고 같이도 잘 먹으면 第一 좋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苦悶을 하는 것은 먹는 方式이 삶의 方式을 反映하고, 따라서 이 問題가 삶의 가장 根本的인 部分과 關聯돼 있기 때문이다. 幸福이 他人과의 關係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아니면 홀로 반듯하게 서는 것에 있는지 하는 것이다. 勿論 이番에도 ‘혼자 成熟한 發展을 이루면서 同時에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내는 것’李 正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코스 料理가 되려면 메인뿐 아니라 애피타이저나 디저트도 좋아야 한다는, 하나마나한 말과 같다. 다 좋으면 좋다는 걸 누가 모르나. 더 重要한 게 무엇인지 識別할 必要가 있다. 

    사람이 幸福해지려고 할 때도 制限된 精誠과 時間을 삶의 어떤 部分에 主로 投資할 것인지 苦悶해야 한다. 選擇과 集中이 必要하다. 애피타이저나 디저트보다는 메인 料理가 더 重要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메인이고 무엇이 애피타이저나 디저트인지 가려내야 한다.

    더불어 밥을 먹는다는 것

    食口(食口)의 辭典的 意味는 ‘한집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말한다. 쉽게 말해 밥을 같이 먹는 關係다. 映畫 ‘卑劣한 거리’를 보면 組暴 조인성이 部下를 모아놓고 말한다. “食口가 뭐여? 食口란 건 말이여. 같이 밥 먹는 입구녕이여. 저 혼자 따로 밥 먹겠다는 놈은 뭐여. 그건 食口가 아니고 호로새끼餘. 그냐 안 그냐?” 조인성 말에 따르면 혼자 먹으면 ‘호로새끼’가 된다. 

    호로새끼의 辭典的 意味는 ‘배운 데 없이 막되게 자라 敎養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아, 그렇다면 혼밥하고 있는 나는 배운 것 없이 막되게 자라 敎養 없는 號로OO판사가 되는 것인가. 여기서 보듯 우리 社會는 그동안 밥은 되도록 남과 같이 먹는 것이라 믿어왔다. 

    古典으로 꼽히는 ‘사랑의 技術’ 著者인 精神分析家 에리히 프롬은 모든 娛樂, 快樂, 勞動, 甚至於 創造 行爲도 人間 實存의 根本的 問題에 對한 似而非 解答일 뿐이라고 했다. 그에 對한 眞正하고 完全한 解答은 서로 다른 人間 사이의 融合, 곧 사랑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내가 즐겨 읽는 心理學 冊의 著者로 스탠퍼드大 精神分析學 敎授인 얄롬 博士도 人間의 가장 큰 幸福은 他人과의 關係에서 얻을 수 있다고 斷言했다. 實際로 周邊을 둘러보면 他人과 關係를 맺는 데 삶의 焦點을 맞춘 사람이 많다. 어떤 이는 달曆의 大部分이 다른 사람과 저녁 먹고, 行事에 參與하고, 골프 치고, 동아리 活動을 하는 일 따위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마치 사람으로부터 氣를 빨아먹는 뱀파이어처럼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얼굴에 活氣가 넘친다. 戀人과의 關係에 加用한 時間과 熱情 大部分을 쏟는 이도 他人과의 關係에서 幸福을 찾는 사람이다. 自己가 屬한 組織에서 인정받고자 熱과 誠을 다해 충성하는 사람도 이런 部類라고 할 수 있다. 

    나도 사람들과 함께 먹고, 노는 것이 즐겁다. 特히 내가 平素 좋아하는 사람, 처음 보더라도 특별한 魅力이 있거나 尊敬할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과 함께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信賴할 만한 他人에게 認定을 받으면 氣分이 좋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이 삶에서 누릴 수 있는 最高의 幸福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生涯 最高의 幸福은 相對가 누구이냐에 따라 左右되는 相對的이고 卽興的인 것은 아닐 것만 같다. 

    他人과 맺는 關係 中 가장 에너지를 많이 쏟는 關係는 戀人과의 關係일 것이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戀愛를 하면 正말 幸福한가. 勿論 幸福해진다. 설레고 기쁘다. 戀人 觀點에서 생각하고 戀人의 눈으로 世上을 보면서 關心과 興味와 人格이 擴張된다. 勇氣가 생기고 膽大해진다. 肉體的 欲求도 充足된다. 그러나 그런 뜨거운 感情은 오래지 않아 식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기 위해 다른 누구와의 關係보다 間隙을 좁히지만 그럴수록 서로의 差異가 너무 크다는 것을, 둘이 하나가 되는 건 不可能하다는 것을 悽絶하게 깨닫는다. 외로움과 空虛함을 채우려고 戀人을 만나는데 만날수록, 가까워질수록 더 외롭고, 더 空虛해진다. 때로는 그 좁은 間隔 때문에 相對가 품고 있던 서슬 퍼런 攻擊性의 칼에 베이고 만다. 마치 疫病이 猖獗했던 마을처럼 뜨거운 사랑이 지나고 나면 남은 사람 마음의 자리에 傷處, 背信感, 슬픔, 외로움, 幼稚함 等으로 얼룩진 廢墟가 남기 일쑤다.

    關係와 幸福

    法廷에서 만나는 원수지간인 사람들은 다들 한때 너무 사이가 좋던 이들이다. 兄弟姊妹거나, 夫婦였거나, 戀人이었거나, 數十 年 知己 親舊거나. 그런 사람들끼리 틀어지면 暴力이, 칼부림이, 險한 말다툼이 생겨난다. 平素 데면데면하던 사이에서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以上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裁判한 事件 中에 到底히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兄이 强度罪를 저질러서 5年 동안 監獄 生活을 했다. 그의 어린 딸을 동생 夫婦가 맡아 키웠다. 그런데 兄이 出所한 날 동생과 술을 마시다 칼로 동생 배를 찔렀다. 理由는 동생이 自己가 없는 동안 딸을 키워준 것을 너무 많이 생색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리 조카라도 남의 딸을 돈 한 푼 받지 않은 채 5年이나 키워줬는데, 그 程度면 100年 동안 生色을 내도 할 말 없는 것 아닌가. 나는 人間의 非情함을 이야기할 때마다 이 事件이 생각난다. 

    프로이트는 人間은 태어나 엄마와 分離되면서부터 獨立된 存在로서 孤獨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戀人 사이의 뜨거운 合一의 感情은 어릴 적 엄마와 하나였던 狀態로 回歸하려는 것으로 成熟에 反하는 一種의 退行이라고 봤다. “사랑이 最高”라고 한 프롬도 한便으로는 “사랑처럼 엄청난 希望과 期待 속에서 始作됐다가 반드시 失敗로 끝나고 마는 活動이나 事業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存在의 孤獨

    當代 最高 天才로 꼽힌 쇼펜하우어는 혼자 食堂에 가면 2人分 값을 치르고 두 자리를 얻어 옆자리를 비워놨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을 嫌惡했다. 사람은 根本的으로 곁에 있는 이가 自己보다 잘되면 猜忌하고 自己보다 못되면 便安해 하는 存在라고 봤다. 사랑은 人間 種族 保存을 위한 속임數에 不過하다고 여겼다. 그러한 他人과의 關係에서 어떻게 最高의 幸福을 期待할 수 있겠는가. 

    삶은 基本的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보다 致命的인 苦痛이 山積해 있다. 自由는 누군가에 依해 끊임없이 束縛당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健康은 惡化하고, 經濟 事情은 끊임없이 生存을 威脅하고, 隨時로 삶의 意味가 稀微해져 虛無가 찾아온다. 누구를 만나도 結局에는 외롭다. 그럼에도 우리는 每日 밥을 먹는다. 혼자도 먹고, 他人과도 먹고. 혼자 먹고 싶은 날도 있고, 他人과 먹고 싶은 날도 있다. 혼자가 외롭고 무섭고 虛無해 他人을 찾아나서는 날도, 他人과의 關係에서 傷處와 劣等感을 받아 혼자 있고 싶은 날도 있다. 추운 겨울날 내던져진 고슴도치 두 마리처럼 가까이 다가가 껴안으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反對로 떨어지면 추위에 떠는 일을 反復하는 것이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숱한 날에도 밥은 먹어야 한다. 그 單純한 事實이 새삼 흥미롭고도 무섭다. 於此彼 每日 먹어야 하는 밥이라면 그렇게 비틀거리면서 먹고 싶지는 않아서, 溫湯과 冷湯을 오가면서 추위를 더 느끼고 싶지 않아서, 혼밥判事는 그냥 추운 데서 혼자서 먹기로 “定했다.” 그러나 안다. 언젠가 自家 隔離가 지겨워지면, 삶의 苦痛이라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좀 潛潛해지면 다시 함께 밥 먹을 他人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前職 判事이자 現 行政府 公務員. ‘사는 듯 사는 삶’에 關心 많은 作家. 쓴 冊으로는 에세이 ‘只今부터 裁判을 始作하겠습니다’, 小說 ‘보헤미안랩소디’(第10回 世界文學賞 大賞作) 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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