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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 主流 1960年代生의 東北工程 뺨치는 ‘民主公正’|新東亞

[사바나] 主流 1960年代生의 東北工程 뺨치는 ‘民主公正’

[2020 大韓民國 新主流 大解剖⑤] 386이 民主化 世代? 現代史 最高의 ‘象徵操作’

  • 노정태 哲學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入力 2020-08-27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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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현듯 얻은 ‘民主化 運動家’의 名譽

    • 1987年 抗爭, 兩金·言論·檢察·在野·市民 合作品

    • 學生만 示威? 都市貧民度 警察에 돌 던지며 싸워

    • 1995年 與, 必要에 依해 386에 民主化 勳章 달아줘

    • 70年代 運動圈과 80年代 運動圈 分岐點 反美主義

    • 美로부터 解放? 87年 全斗煥 武力鎭壓 막은 게 美國

    • 實際 寄與한 만큼만 누리게 제 몫 찾아줘야

    *사바나 草原처럼 탁 트인 2030 놀이터. 밀레니얼 플레이풀 플랫폼.

    2000년 3월 26일 서울 여의도 당시 민주당사에서 열린 ‘386세대를 위한 후원회’에서 서영훈 대표(왼쪽에서 세 번째) 등이 민주당 386세대 후보인 임종석(왼쪽에서 두 번째), 이인영(오른쪽에서 세 번째), 우상호(오른쪽에서 두 번째) 씨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금액 3만8600원을 모금함에 넣고 있다. [동아DB]

    2000年 3月 26日 서울 汝矣島 當時 민주당舍에서 열린 ‘386世代를 위한 後援會’에서 서영훈 代表(왼쪽에서 세 番째) 等이 민주당 386世代 候補인 任鍾晳(왼쪽에서 두 番째), 李仁榮(오른쪽에서 세 番째), 禹相虎(오른쪽에서 두 番째) 氏 等이 지켜보는 가운데 募金額 3萬8600원을 募金함에 넣고 있다. [東亞DB]

    “2020年 現在 大韓民國은 産業化 世代에서 民主化 世代로 主流가 交替되고 있다.” 或은 “主流 交替가 完成됐다.” 이제는 너무 흔하게 들려오는 이야기다. 그러니 文章 속 單語를 하나씩 짚어가며 따져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産業化 世代’란 1950年代에 태어나 1970年代 高度成長期에 靑年期를 보내고 이제 隱退 年齡帶에 이른 1次 베이비부머를 主로 指稱한다. ‘民主化 世代’는 1960年代에 태어나 1980年代에 靑年期를 보내고 이제 社會的으로 큰 影響力을 發揮할 나이가 된 이른바 ‘386世代’를 뜻한다. 

    大韓民國 權力의 무게追加 1950年代生에서 1960年代生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말은 反駁할 餘地가 크지 않다. 하지만 産業化 世代에서 民主化 世代로 主流가 交替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386世代는 民主化 世代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民主化 世代로 불리는 것은 大韓民國 歷史上 가장 成功的인 ‘象徵操作’이자 ‘프로파간다(Propaganda) 行爲’라고 나는 생각한다.

    民主化 勢力으로 包裝

    1986년 3월 5일 김영삼·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등이 직선제 개헌추진 천만인서명운동본부 현판식을 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동아DB]

    1986年 3月 5日 김영삼·金大中 民推協 共同議長 等이 直選制 改憲推進 千萬人署名運動本部 懸板式을 한 뒤 拍手를 치고 있다. [東亞DB]

    사람들은 民主化 世代라는 表現에 對해 딱히 疑問을 提起하지 않는다. 一種의 政治的 慣用句가 됐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렇듯 별다른 批判 없이 民主化 世代라는 用語가 使用됐을까. 起源은 1990年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世代社會學 專門家인 朴在鴻 경상대 社會學科 敎授는 2006年 ‘교수신문’에 ‘先産業化 後民主化, 政治的 世代區分 옳지 않아’라는 題目으로 글을 썼다. 朴 敎授는 産業化 世代와 民主化 世代라는 用語가 定着된 起源을 다음과 같이 說明하고 있다.

    “50∼60代 産業化 世代와 30∼40代 民主化 世代라는 表現의 起源은, 第15代 總選을 앞둔 1995年 末 當時 與黨인 신한국당이 迎入 對象 人士를 分類하는 過程에서 政界 元老 等의 安定 希求 勢力을 産業化 勢力으로, 在野 運動을 하는 改革 勢力을 民主化 勢力으로 包裝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推定된다.”

    이처럼 1995年 當時 신한국당이 民主化 勢力이라는 用語로 指稱하던 對象은 386世代뿐만 아니라 在野 運動圈 全般을 包括했다. 勿論 어찌 됐든 當時 執權 與黨이 386世代에 民主化의 勳章을 달아줬다는 點은 分明하다. 

    1995年은 舊蘇聯이 崩壞하고 몇 年이 지난 뒤다. 北韓은 이른바 ‘苦難의 行軍’을 겪던 時節이다. 韓國에서는 往年의 運動圈들이 새로운 人生을 찾고 있던 무렵이기도 하다. 정작 이들은 변변히 내세울 만한 經歷이 없었다. 一部는 出版·映畫·音樂 等 文化 領域에서 活動하며 크고 작은 頭角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當時는 政治가 ‘소프트 파워’(文化·藝術 等이 行使하는 影響力)와 距離를 두던 時節이다. 社會 全般的으로 學生運動圈에 對한 不信 섞인 눈빛도 如前히 存在했다. 386世代가 私敎育 市場에 積極 뛰어들어 돈을 벌기 始作한 時點은 1990年代 後半에 이르러서였다. 

    그런데 예나 只今이나 學生運動圈의 ‘長期(長技)’는 組織力이다. 김영삼의 신한국당은 386世代를 ‘젊은 피’로 輸血키로 決定한 뒤 民主化 勢力이라는 레토릭(rhetoric)을 活用하며 이미지를 洗濯해 줬다. 當時 執權黨이 直接 나서서 民主化 勢力(或은 世代)李 完全無缺하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歷史的 貢獻을 했다고 包裝해 준 것이다. 바야흐로 一部 386世代 人士들의 삶에 새로운 活路가 뚫렸다. 

    設令 신한국당의 揀擇을 받지 못했더라도 失望할 必要는 없다. 김영삼이 386世代 出身 運動圈을 迎入하자 平生 ‘빨갱이’라고 陰害받아 왔던 金大中 亦是 運身의 幅이 넓어졌다. 그는 1995年 7月 政界 復歸를 宣言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創黨했다. 이듬해 치러진 第15代 總選에서 김대중은 32歲의 金民錫(前 서울대 總學生會長)을 서울 영등포 乙에 出馬시켰다. 各各 延世大 總學生會長을 지낸 宋永吉과 禹相虎 亦是 1990年代 後半 김대중을 통해 政界에 入門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386世代가 비로소 社會 主流로서 첫 걸음을 뗐다.

    中國 東北工程에 견줄 ‘民主公正’

    整理하자. 只今도 그렇지만 當時에도 政治權은 30代 젊은 人物을 迎入하려 했다. 當時 30臺가 386世代다. 이들 世代 사이에는 合法·不法의 境界를 넘나들며 組織 活動을 해본 經驗은 있으되 社會 進出에는 어려움을 겪던 高學歷者 무리가 떠돌았다. 하지만 當場 政治權에 進出할 만한 그럴듯한 經歷이 全無했다. 이에 그들이 必要했던 主流 政治權은 앞장서서 386世代 一部에 民主化 世代라는 勳章을 달아줬다.

    실은 産業化뿐 아니라 民主化에 끼친 1960年代生의 影響力은 그리 크지 않다. 民主化 運動의 歷史는 李承晩의 獨裁에 맞서 中學生과 高等學生까지 돌 던지고 싸운 1960年, 或은 朴正熙에 맞선 鬪爭이 펼쳐진 1970年代까지 溯及해 올라갈 수 있다. 1980年代에 386世代가 大學生 身分으로 전두환의 新軍部를 不便하게 했던 것은 그 긴 鬪爭의 歷史 中 一部에 지나지 않는다.

    時期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勢力의 크기나 當事者들이 겪은 苦難의 比重을 보더라도 그렇다.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政治 巨木은 議員職 剝奪, 家宅軟禁, 疑問의 交通事故와 拉致, 死刑 宣告 等을 겪으면서도 軍部獨裁 終熄을 向한 主張을 굽히지 않았다. 兩金을 따르는 家臣 그룹, 卽 상도동系와 동교동系 亦是 無數한 苦楚를 치렀지만 보스에 對한 忠誠心을 維持했고 結局 1987年 直選制 改憲을 이뤄내는 데 寄與했다.

    그에 비하면 1980年부터 1987年까지 大學生들이 民主化에 直接的으로 寄與한 바는 그리 크지 않다. 勿論 新軍部가 볼 때 성가신 存在였을 것이다. 그러나 新軍部의 權力 核心을 威脅할 만큼의 힘은 發揮하지 못했다. 學生運動圈은 權力을 갖기에 너무도 어렸다. 

    1987年 抗爭이 展開된 過程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 點은 分明하다. 東亞日報와 中央日報라는 두 巨大 旣成 言論이 反旗를 들어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을 報道했다. 新軍部는 덮고 넘어가려 했지만 檢察이 反撥해 事件을 睡眠으로 꺼내 政治 爭點으로 승화시켰다. 日帝强占期 獨立運動까지 系譜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抵抗的 基督敎 勢力, 이른바 ‘在野’의 元老들이 힘을 보탰다. 게다가 김영삼과 김대중 두 名의 指導者가 代案으로 存在했다. 國民 輿論이 그 두 名을 통해 언제든지 政權 交替의 물결로 이어질 蓋然性이 컸다.

    當時 大學生들이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아니다. 熱心히 示威를 했고, 서울대生 박종철과 연세대生 이한열이 犧牲됐다. 그들의 죽음은 政權을 쓰러뜨릴 더 큰 示威의 起爆劑가 됐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觸發 原因에 지나지 않았다. 基底에 깔린 動力은 1961年 5·16 軍士政變 以後 國民 사이에서 꾸준히 累積돼 온 民主化에 對한 熱望이었다. 그렇기에 서울에서 示威가 激化하자 이른바 ‘넥타이部隊’가 政權에 反對하며 목청을 드높였다. 大學은 고사하고 中學校도 못 나왔을 都市의 基層 貧民들이 警察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싸웠다.

    結局 新軍部는 降伏했다. 大統領 直選制를 約束했고 憲法은 改正됐다. 新軍部가 權力을 몽땅 빼앗긴 건 아니지만 兩金과 그 追從 勢力인 上島洞, 동교동系에 힘이 실렸다. 第6共和國은 開幕과 함께 ‘3金 時代’(김영삼·金大中·김종필)로 轉換됐다. 그러니 北韓에서 흘러들어온 主體思想 文件을 달달 외우며 이 나라를 革命的으로 둘러엎을 窮理나 하던 젊은이들의 힘으로 新軍部가 쓰러졌다고 包裝하는 건 明白한 歷史 歪曲이다. 마치 中國의 東北工程에 比肩할 만한 ‘民主公正’이다. (*동북공정은 中國 國境 안에서 일어난 모든 歷史를 中國史의 一環으로 編入하려는 中國 當局의 프로젝트로, 歷史歪曲 論難을 빚었다.)


    1983年生이 월드컵 겪었다고 월드컵 神話 만들었나?

    1987年 抗爭 무렵 大學에 다닌 이들을 그럼에도 民主化 世代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87年 政局으로부터 큰 影響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87年의 大激變을 스스로 만들어낸 德이라고 解釋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2001年에 大學에 들어가 2002年에 國際蹴球聯盟(FIFA) 한·日 월드컵을 經驗한 나를 ‘월드컵 世代’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나는 2002年 월드컵의 雰圍氣 속에서 靑年期를 보냈고 큰 影響을 받았다. 그런 面에서 나를 월드컵 世代라 부르는 건 妥當하다. 그러나 2002年 월드컵 4强 神話를 나 或은 내 또래들이 만든 건 아니다. 월드컵에서 뛴 選手 中에는 내 또래가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월드컵 自體는 分明 내 윗世代의 作品이었다. 그 巨大한 흐름 속에서 나는 작은 部品이자 背景에 지나지 않았다. 

    問題는 월드컵 世代와 달리 386世代의 自意識이 매우 肥大하다는 데 있다. 386世代는 처음부터 主流意識에 가득 차 있었다. 이 나라의 意思決定 및 輿論을 自身들이 쥐락펴락할 것이라고 믿어 疑心치 않았다. 그들을 政治權에서 召喚한 方式 自體가 그 世代의 肥大한 自意識을 더욱 부추겼다. 學生運動 좀 하다가 野人으로 떠돌았는데 불현듯 ‘民主化 運動家’라는 名譽를 얻게 됐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386世代는 어떤 이름으로 呼名돼야 마땅할까? 暫時 世代 問題를 硏究한 最初의 社會學者 카를 만하임의 智慧를 빌리자. 만하임은 ‘世代 問題’에서 世代를 區分하는 세 가지 基準을 提示했다.

    첫째, 世代 位置. 이는 1980年代生, 2000年代生처럼 出生 時期에 따라 나누는 方式으로 價値 評價와 無關하다. 386世代에는 80年代 學番이라는 範疇가 덧붙지만, 基本的으로는 1960年代生이라는 世代 位置가 그들을 槪念化한 셈이다.

    둘째, 實際 世代. 世代 位置가 社會的 要素에 따라 區分되는 것을 뜻한다. 假令 1929年生과 1924年生은 世代 位置上으로는 類似하지만 實際 世代는 確然히 區分된다. 1924年生은 太平洋戰爭 末期인 1944年에 入隊 年齡인 스무 살이 되면서 戰爭터에 끌려갔다. 한 番의 戰爭에서 살아남은 後 1950年 韓國戰爭에서 또 入隊 年齡에 包含돼 두 番의 軍 生活을 한, 지지리도 運 나쁜 ‘묻지 마라 甲子生’이다. 反面 1929年生은 入隊 年齡, 卽 成人이 됐을 때 이미 日帝가 亡했다. 太平洋戰爭까지 몸소 겪을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日帝 賦役 論難’으로부터 相對的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셋째, 世代 單位. 地域·所得·敎育·其他 變數에 따라 같은 經驗을 共有한 이들을 묶는 槪念이다. 386世代라는 이름에서 1980年代 學番에 傍點을 찍으면 비슷한 時期 大學을 함께 다닌 經驗을 强調하는 것으로, 世代 單位에 注目하는 셈이다. 같은 論理에 따라 民主化 世代라는 名稱은 世代 單位 안에서도 特定 集團을 다시 分類하는 槪念이다. 1960年代에 태어나 1980年代에 大學을 다닌 이들 中, 熱心히 學生運動을 했고 後날 自身들이 民主化 運動을 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만 該當하는 用語일 테니 말이다.

    386 支配하는 이데올로기 反美

    1987년 6월 시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동아DB]

    1987年 6月 市民들이 大統領 直選制를 要求하며 서울市內를 行進하고 있다. [東亞DB]

    만하임의 區分 方式을 考慮할 때, 1980年 以後 學生運動을 했고 이를 政治的 資産 삼아 只今은 主流가 돼 있는 世代 單位를 指稱할 수 있는 가장 適切한 用語는 따로 있다. 그들은 民主化 世代가 아니라 反美(反美)의 洗禮를 剛하게 받은 世代로 呼名돼야 한다. 反美主義는 1970年代까지의 運動圈과 1980年代 以後의 運動圈을 가르는 가장 큰 分岐點이다. 同時에 오늘날까지도 該當 世代 單位의 意識世界를 支配하는 가장 强力한 이데올로기다.

    386運動圈의 主流는 왜 反美主義에 傾倒됐을까. 1980年 光州에서 벌어진 悲劇에 對한 解釋 때문이다. 그들의 ‘公式的’인 美國官(觀)을 要約하면 이런 式이다.

    ‘光州抗爭이 發生할 무렵 美國은 航空母艦을 韓國 쪽으로 보내고 있었고, 따라서 軍事的으로 全斗煥 政權을 壓迫해 空輸部隊를 源泉 遮斷하거나 鎭壓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美國은 光州의 悲劇을 放置했는데, 이는 어쩌면 放置를 넘어선 積極的 公募日 수 있다. 왜냐하면 戰時作戰權은 유엔司令部에 있고 結局 美軍의 許諾 없이 韓國軍은 움직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光州의 悲劇 背後에는 美國이 있고 우리는 1980年 現在까지도 美國의 植民地에 不過했지만 그 事實을 모르고 살았다. 只今부터라도 우리 民族은 解放돼야 한다. 美國을 혼내주기 위해, 美國으로부터 獨立해 眞正한 民族國家를 되찾기 위해, 北韓과 積極的으로 손잡거나 民衆의 抵抗을 꾀하는 等 革命을 摸索해야 하며, 美國의 꼭두각시인 日本과는 더욱 徹底하게 對立해야 한다.’

    1980年 以前에는 進步라고 해서 反美主義를 當然視하지 않았다. 民族主義者였지만 同時에 親美 右派였던 장준하, 反共 進步 基督敎 思想家였던 咸錫憲 等을 떠올릴 수 있겠다. 基層 單位에서도 事情은 비슷했다. 임미리가 著書 ‘京畿東部’에서 描寫하고 있는바, 後날 성남시로 昇格하는 競技 廣州郡에서는 1971年 8·10 事件 以後 貧民運動, 夜學運動, 宣敎活動 等이 活潑히 벌어졌다. 無理한 强制 移住의 弊害와 開發 및 補償 過程에서의 不平等에 焦點을 맞춘 運動이었다.

    하지만 命脈은 後날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代身 光州民主化運動의 影響을 받은 ‘또 다른 光州’ 出身의 學生들이 나타나 ‘京畿東部’의 母胎가 됐다. “大學街에 퍼진 光州 虐殺 美國 責任論을 勘案하면 그 뒤 城南의 靑年·學生運動이 NL쪽으로 기운 것도 偶然은 아니었다.”(‘경기동부’ 中)

    勿論 大學街의 反美 感情이 同一하지는 않았다. 特히 서울과 光州의 認識差가 컸다. 박찬수는 ‘NL 現代史’에서 “匿名을 要請한 全南大 出身 人士의 末路는, 當時(1985) 共同 鬪爭을 準備하면서 서울과 光州 사이에 反美 口號의 水準과 美國文化院 打擊 水位를 놓고 葛藤이 있었다”고 傳한다. 

    하지만 大勢 變化는 분명했다. 1986年 9月 8日 전남대 5·18 廣場에서는 ‘反帝反파쇼民族民主鬪爭委員會(민민투)’ 出帆式이 열렸다. 이 組織은 後날 PD로 進化하는 CA(制憲議會) 系列이 主導한 것이다. 하지만 “學生 數百 名은 ‘制憲議會 召集’을 내걸면서도 ‘輸入開放 强要하는 美製를 몰아내자’ ‘制憲議會 召集鬪爭으로 美製를 몰아내자’는 口號를 외쳤”(‘NL 現代史’ 中)고, 사흘 뒤에는 같은 場所에서 ‘反美救國鬪爭委員會(反美투)’가 出帆했다.

    運動圈 內部에 屬한 이들 사이에서는 熾烈한 路線 鬪爭이 展開됐겠으나, 外部者의 視角에서 巨大한 흐름의 變化는 分明해 보인다. 駐韓美國大使館 韓國課長을 지낸 前職 外交官 데이비드 스트라우브는 ‘反美主義로 보는 韓國 現代史’에서 飯米가 主流가 된 過程을 이렇게 要約하고 있다.

    “1979~1980年 事件들 以後 發生한 反美主義 내러티브는 決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1987年에도 韓國人들은 美國의 行動을 過去와 똑같은 렌즈를 통해 보고 있었다. 이 反美 내러티브는 繼續 살아남았으며, 甚至於 오늘날까지도 特히 所謂 386世代라고 일컬어지는 當時 大學生이었던 世代 사이에 남아 있다.”

    그들은 民主化된 大韓民國 追求하지 않았다

    設令 이와 같은 反美 내러티브가 事實이라 해도 以後 現代史의 進行을 놓고 보면 如前히 疑問이 남는다. 1987年 民主化 過程에서 美國이 寄與한 바를 어떻게 理解하고 評價할 것인가? 反美의 觀點에서 現代史의 다양한 事件을 論하는 김형민(筆名 傘下)은 1987年 抗爭의 成功 裏面에 美國의 입김이 作用했음을 順順히 認定한다. 進步 性向 인터넷媒體 뉴스톱에 실린 ‘6月 抗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칼럼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亦是 가장 큰 作用을 한 것은 美國이지 싶다. 美國 CIA는 판勢를 읽은 後 駐韓美軍에서 탱크 5臺를 支援받아 特戰司, 守防司 等의 韓國軍 部隊 正門 앞에 가서 故障이라도 난 듯 버티고 세워놓았다고 한다. 卽 ‘나오지 마라’는 示威를 한 셈이었다. 하이라이트는 亦是 駐韓 美國大使 릴리였다. 그는 레이건의 親書를 傳達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武力을 動員하지 마십시오. 레이건 大統領의 뜻을 거슬러 軍隊를 動員한다면 80年 光州에서와 같은 不幸한 事態가 再發될 겁니다.’ 한 나라의 大使가 駐在國 大統領에게 할 소리 水準은 넘어 있었다. 릴리는 이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軍바리野. 正말 그러면 너도 죽어.’” 

    美國에 1980年 光州의 悲劇을 傍觀한 責任이 있다고, 卽 反美 내러티브에 어느 程度 妥當한 구석이 있다고 假定해 보자. 그렇다 해도 美國은 1987年 全斗煥의 武力 鎭壓 試圖를 가로막았다. 다시 말해 서울이 第2의 光州가 되지 않도록 기꺼이 ‘善한 影響力’을 發揮함으로써 빚을 어느 程度 갚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김형민의 ‘歷史 팩트체크’가 事實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한番 새겨진 敵愾心과 憎惡는 腦에 새겨진 文身과 같다. 事實과 論理를 아무리 부어서 박박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反美主義를 抛棄한다는 것은 하나의 思想과 理念을 버리는 次元을 넘어선다. 自身의 젊은 時節, 그 靑春을 함께한 親舊와 同僚, 그들이 提供하는 便安한 人間關係와 따스한 追憶을 모두 否定하는 行爲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反美는 한 世代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 卽 存在의 理由가 되고 말았다. 

    反美를 외친 世代가 韓國의 民主化에 寄與한 바는 없는가?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곧 民主化 世代라고 말하는 것은 語不成說이다. 그들은 民主化된 大韓民國을 追求하지 않았다. 過去 學生運動圈이었으나 現在 便宜店主로 活動하고 있는 奉達號(筆名)는 ‘신동아’ 7月號에서 正直하게 告白한다. 

    “反美, 從北이 本質이었던 우리 運動을 民主化 運動이라 부르는 것은 도둑질하려고 銀行에 들어갔다가 우연찮게 銀行 强盜를 잡은 도둑을 英雄으로 推仰하는 形局이랄까. 勿論 强盜를 잡은 것은 맞지만 元來 自身의 意圖를 告白하지는 못하더라도 조용히 反省할 必要는 있을 것이다.”

    歷史 再評價와 제 몫 찾아주기

    그 ‘强盜’를 自稱 民主化 世代가 혼자 잡은 것도 아니다. 1987年 抗爭의 成功에는 김영삼·김대중이라는 不世出의 政治 指導者와 그들을 믿고 따르던 勢力, 그리고 默默히 투표하고 示威에 參與한 多數의 市民이 있었다. 또 1980年의 悲劇을 反復하지 않기 爲해 內政 干涉 論難의 餘地를 무릅쓰고 新軍部를 억누른 美國의 役割 또한 再評價돼야 한다. 

    다시 말해 自稱 民主化 世代의 歷史的 貢獻과 位相은 過大評價됐다. 勿論 그들의 役割을 全部 否定할 수는 없다. 하지만 民主化라는 자랑스러운 歷史的 成就는 그 時代를 살았던 모든 이의 것이다. 民主化 世代는 없다. 다만 1960年代에 태어나 1980年代에 大學을 다녔고, 反美主義의 影響을 剛하게 받은 世代가 있을 뿐이다. 그들이 實際로 寄與한 바에 걸맞도록 제 몫을 찾아주어야 마땅하다.


    노정태
    ● 1983年 出生
    ● 高麗大 法學科 卒業, 서강대 大學院 哲學科 碩士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韓國語版 編輯長
    ● 著書 : ‘論客時代’ ‘탄탈로스의 神話’
    ● 曆書 : ‘밀레니얼 宣言’ ‘民主主義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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