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 南進步人士들을 ‘灰色分子’라고 여겨”|신동아

“北, 南進步人士들을 ‘灰色分子’라고 여겨”

[허문명이 만난 사람] 南北會談 300回 김기웅 前南北會談本部長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0-08-30 10:00:02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김정일까지 批判한 金正恩, 人生 첫 挫折 겪는 中

    • 金正日은 두려움에 시달린 不幸한 指導者

    • 白頭血統, 王손(王孫)에는 男女가 없다

    • 6月 挑發 意味는 ‘本때 보이기’

    • 屈辱的 南北關係 바로잡는 게 ‘版갈이’

    • 一貫되게 밀고 나갈 ‘독트린’ 必要한 時點

    [지호영 기자]

    [지호영 記者]

    김기웅(59) 前 統一部 南北會談本部長(歲寒帶 招聘敎授)은 1990年부터 거의 모든 南北會談에 關與했다. 首席代表를 비롯해 隨行員과 狀況室 勤務까지 包含하면 300餘 次例 會談에 參與했다. 分斷 以後 南北會談 680回 中 折半에 가깝다. 

    2013年 開城工團 正常化 協商 때 注目받았으나 只今껏 言論 인터뷰에 應한 적이 없다. 北韓의 挑發 威脅으로 南北 間 緊張이 高調된 狀態에 處했던 6月부터 最近까지 그를 세 次例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現場을 오랫동안 經驗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北韓 內部를 읽는 法이나 向後 對北政策의 方向 等에 關해 虛心坦懷한 對話를 나눴다. 南北關係의 過去 現在 未來에 對한 示唆點이 적지 않았다. 

    金 前 本部長은 서울대 外交學科와 大學院을 卒業하고 1990年 4月 統一部 南北會談事務局 會談運營과를 始作으로 統一部 情報分析局長, 開城工業地區 協力支援團長, 統一政策室長, 南北會談本部長을 거쳐 靑瓦臺 統一祕書官을 지내다가 2018年 8月 公職에서 물러났다. 外交部 對北政策課長으로도 일했다.

    朴智元·李麟榮 北韓만 바라보고 任命

    - 聽聞會가 마무리되면서 外交安保 라인이 새로 꾸려졌다. 이番 人事 總評은? 

    “한마디로 北韓만 바라보고 한 人事라고 본다. 우리 國民이 어떻게 바라볼까, 그 자리에 적합한 人物이 누구일까 考慮한 게 아니라 現 政府가 推進하는 目標를 達成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于先 생각한 것 같다.” 



    - 朴智元 國精院長 任命은 어떻게 보나. 

    “이미 司法的 判斷이 내려졌지만 對北 送金을 할 만큼 幕後에서 뛴 사람이다. 南北關係가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狀況에서 過去 經驗에 基盤을 두고 뭔가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 한마디로 北韓과 關係를 만들어낼 사람이라고 判斷해 앉힌 것 같다.” 

    - 그런 判斷이 맞다고 보나. 

    “變化된 國際情勢와 北韓 狀況, 南北關係를 考慮하지 않았다. 只今은 김정일 時代가 아니라 김정은 時代다. ‘朴智元 人脈’이 아직 北韓에 있는지도 疑問이고, 있다고 해도 作動할지 疑問이다. 게다가 北韓과의 線(線)이라는 것은 그들이 願할 때 稼動되는 것이지 우리 쪽 個個人의 能力 問題가 아니다. 

    徐薰 靑瓦臺 安保室長度 마찬가지다. 外交·安保政策 全體를 컨트롤하는 자리인데 南北關係가 그야말로 ‘戰略的 黃金期’에 있을 때, 卽 北韓이 屈辱感을 갖고 우리를 對하던 時期에, 그것도 非公式的 채널로 北韓과 協商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只今의 北韓을 보는 데는 오히려 歪曲된 認識을 招來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番 人事 背景을 크게 뭐라고 보나. 

    “政權 任期가 事實上 1年 半 程度밖에 남지 않은 狀況에서 切迫함을 느끼는 것 같다. 文在寅 政府가 推進하겠다고 公言한 많은 政策, 이를테면 終戰宣言, 軍事的 緊張 緩和, 新(新)韓半島經濟共同體, 南北基本協定, 離散家族問題 等 거의 大部分이 原點에 머물거나 오히려 더 나빠졌다. 計量的 指標를 보면 朴槿惠 政府 때보다 못하다. 南北對話만 해도 앞선 政府는 37回, 只今은 36回다. 離散家族 相逢도 앞선 政府는 두 番 했지만 이番 政府는 한 番밖에 성사시키지 못했다. 中國 等에서 이뤄지는 民間 次元의 離散家族 交流도 거의 제로 狀態다. 이런 狀況이라면 方向의 옳고 그름을 떠나 왜 約束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지 省察해야 한다.”

    對北政策 修正은 ‘信仰’ 저버리는 것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손을 잡고 판문점 분단선을 넘어 남쪽으로 건너오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2018年 4月 27日 文在寅 大統領(오른쪽)과 金正恩 北韓 國務委員長이 손을 잡고 板門店 分斷線을 넘어 南쪽으로 건너오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記者]

    - 政策에 問題가 있다면 修正하면 된다. 

    “文在寅 政府는 韓半島 周邊 狀況을 보는 歷史觀이나 價値觀이 앞선 政府들과 다른 것 같다. 分斷의 原因, 光復 以後 形成된 南北關係를 보는 自身들만의 管(觀)李 있다. 浪漫主義的, 理想主義的 目標를 갖고 있다고 할까. 노무현 政府 때 이루지 못한 未完의 宿題를 任期 內 解決하는 것에 執着하는 것 같다. 따라서 軌道를 修正하는 것은 마치 信仰을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現 政府 出帆 初期 가장 자주 들은 말이 ‘우리 政府는 朴槿惠 政府와 다르다’ ‘國民의 촛불로 이룩한 政府’라는 것이었다. ‘自身들의 생각=촛불 精神’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 對北政策이 理念에 따라 이뤄진다는 건가. 

    “아직도 햇볕政策 프레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깊게는 1988年 7·7宣言 以後 우리가 壓倒的으로 앞선 經濟力으로 北韓을 변화시켜 우리 民族의 힘으로 自主富强한 나라를 만들자는 생각에서 멈춰 있다. 하지만 狀況은 變했다. 過去 우리 狀況이 너무 좋았던 時節에 北韓이 보여준 屈辱的 態度가 如前히 持續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錯覺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김정은 體制는 김정일 體制와는 完全히 다른데 아직도 그걸 잘 認識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2019年 10月 金剛山 現地指導에서 김정은 國務委員長이 한 말이 있다. ‘先任者들이 國力이 여린 時節에 남의 도움을 받고자 잘못된 政策을 폈다’고 했다. 先任者란 누굴까? 바로 아버지 김정일이다. 當時 發言은 朝鮮中央TV를 통해 一齊히 報道됐다. ‘金剛山 事業=김정일 事業’이라는 걸 住民이 다 아는데 그 現場에서 대놓고 아버지를 批判한 것이다. 김정은 執權 以後 가는 곳마다 ‘일을 이 따위로 했느냐’ ‘進取的 氣像도 없고 無事안일주의에 빠져 있다’고 火를 내며 꾸짖었다는 消息을 들을 때마다 住民을 야단친 게 아니라 아버지를 批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金正日은 두려움에 시달린 不幸한 指導者

    - 金正恩이 김정일을 批判했다? 

    “두 사람의 삶은 完全히 다르다. 金正恩은 살면서 挫折이란 걸 느껴본 적이 別로 없다. 이에 비해 金正日은 매우 힘든 삶을 산, 어떤 面에선 不幸한 指導者다.” 

    - 不幸한 指導者라…. 

    “김정일은 統治 期間 내내 體制가 崩壞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過去로 時間을 돌려보자. 金正日은 1974年 後繼者로 指目된 뒤 忍苦의 歲月을 거쳐 1980年 第6次 黨大會를 契機로 實質的 統治를 始作했다. 그 時期 中國, 1985年에는 蘇聯이 改革開放을 推進한다. 安保 威脅이 생겼고 經濟 支援까지 끊겼다. 그러곤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共産圈이 大擧 參與한 88올림픽은 體制競爭에서 北韓의 完全한 敗北를 의미한 것이다. 올림픽 이듬해 베를린 障壁이 무너졌고 1990年 獨逸이 統一됐다. 이윽고 러시아와 中國이 韓國과 修交했다. 社會主義 陣營이 무너지고 國際秩序가 美國 中心으로 再編되는 狀況에서 아버지 김일성이 죽은 이듬해인 1995年 大壽해가 나 2000萬 人口의 相當數가 굶어 죽었다. 

    이런 狀況에서 指導者가 果然 未來에 對한 비전을 꿈꿀 수 있었을까. 洞口처럼 무너지거나 獨逸처럼 吸收統一될지 모른다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두려움과 不安의 連續이었을 것이다. 김정일이 내세운 ‘善君(先軍)政治’는 不安感에서 비롯한 危機管理 體制다. 

    北韓은 1980年代 後半 核武器 開發을 本格的으로 始作했다. 核을 가질 때까지는 美國과 韓國 脾胃를 맞추는 게 必要했다. 1992年 南北基本合意書와 非核化共同宣言이 나오게 된 背景이 그것이다. 當時 北韓은 우리의 要求를 거의 다 들어줬다. 金正日 立場에서 當時 第一 卑屈한 일이 뭐였는지 아나?” 

    그가 이렇게 묻더니 말을 이었다. 

    “南北韓 유엔 同時 加入을 受容한 것이다. 政權 樹立 以後 내걸어온 ‘朝鮮은 하나다’라는 原則을 버렸다. 韓國은 美國 傀儡政權이며 植民地이니 自身들만이 唯一하게 正統性 있는 朝鮮半島 主人이라는 思考의 基本 軸이 무너졌다. 韓國의 유엔 加入에 蘇聯이나 中國이 拒否權을 行使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苦肉之策으로 自身들도 加入할 수밖에 없었다. 當時 나온 슬로건이 ‘가는 길 險難해도 웃으며 가자’다. 當時 김정일의 內面은 宏壯히 흔들리고 複雜했을 것이다. 內部에서도 反對가 甚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金正日은 正말 어렵게 살다 간 悲運의 指導者다.”

    北韓이 亡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 北韓 體制가 그런 時節을 겪고도 健在하니 어떻게 보면 成功한 것이다. 

    “結果的으로 보면 그 成功에 韓國도 一助했다. 時間이 우리 便이라고 생각했다. 北韓은 於此彼 亡할 것이고 우리 뜻대로 北韓이 變化될 거라는 믿음 속에서 交流協力을 통한 變化, 接觸을 통한 變化가 먹힐 것이라는 期待를 가졌다. 캐피털(資本)이 들어가면 캐피털리즘(資本主義)도 들어간다는 自信感 속에서 말이다. 勿論 當時 國際 情勢나 東歐 共産圈의 沒落을 보면 그런 假說이 無理는 아니었으나 조금은 便安하고 느긋한 우리의 마음과 態度가 北韓의 生存戰略이 成功할 수 있도록 도왔다” 

    - 白頭血統 宗孫인 김정남의 삶은 金正恩과는 다른 것 같다. 

    “김정남은 留學 時節 蘇聯이 亡하는 것을 目擊했다. 衝擊이 正말로 컸을 것이다. 以後 歸國해 後繼者 授業을 받았다. 그가 짊어질 現實은 住民들이 굶어 죽고, 韓國과 競爭에서 徹底하게 敗한, 希望이라곤 보이지 않는 悽慘한 狀況이었다. 그 모두를 自身이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버거웠을까. 日本에 密入國하다가 들켜버리는 바람에 結局 後繼者에서 밀렸지만 生前에 김정남이 보여준 行動의 內面에는 그런 複雜함이 바닥에 깊게 깔려 있을 것이다.” 

    - 金正恩은 어떤가. 

    “金正恩은 달랐다. 2001年 스위스 留學을 마치고 歸國할 當時 經濟는 많이 回復된 狀態였고 核開發도 進展됐다. 後繼者 授業을 받으면서 멋지다고 여긴 사람이 할아버지 김일성이었을 것이다. 國際的으로는 社會主義圈 리더의 모습, 國內的으로는 人民의 眞心 어린 稱頌을 받는 모습이 담긴 記錄映畫를 보면서 韓國에 쩔쩔매며 公開 活動도 거의 하지 않았으며 新年辭조차 直接 發表하지 않고 隱遁하던 아버지 김정일과 많이 比較됐을 것이다. 

    金正恩은 中國이 美國을 威脅할 程度로 國力이 커질 때 政權을 맡았다. 中國의 高度成長, 軍事大國化를 지켜보면서 時間이 흐를수록 美國의 勢(勢)는 弱해지고 中國은 剛해질 것이며 이런 情勢는 自身에게 絶對 不利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核을 가졌다. 韓國보다 잘살지는 못해도 核 한 放으로 끝낼 수 있으니 朝鮮半島 主人은 自身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最近 20年間 ‘屈辱的 北南關係’는 正常이 아니며 바꿔야 한다고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金正恩이 執權 直後부터 말해온 ‘版갈이’의 意味다.” 

    金正恩이 생각하는 ‘版갈이’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南北關係 發展이나 韓半島 平和가 아니다. 그들 表現대로 ‘政治軍事的 對決 狀態 解消’가 版갈이의 本質이다. 金正恩은 1990年代 以後 韓國이 돈을 앞세워 만들어놓은 南北關係 틀을 認定하지 않는다. 只今 그가 願하는 건 돈이 아니라 中國을 등에 업고 核武器를 앞세워 自身이 主導하는 판으로 韓半島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돈으로 변화시킬 수 없어

    金 前 本部長은 “김정은을 돈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했다. 

    “우리나 美國이나 經濟的 인센티브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金正恩 立場에선 氣分 나쁜 말이다. 앞서 言及했지만 2019年 金剛山 現地指導 때 ‘先任者가 國力이 여린 時節에 남의 도움을 받고자 잘못된 政策을 폈다’고 한 건 ‘아버지 때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돈다발 흔든다고 넘어갈 사람으로 보지 말라’는 公開 宣言이나 다름없다.” 

    - 協商에서 좀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속셈 아닐까. 

    “金正恩은 겉과 속이 달랐던 아버지와 달리 속내를 率直하게 이야기한다. 核開發을 露骨的으로 言及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執權 後, 아니 어쩌면 태어난 以後 처음으로 큰 挫折의 時間을 지나고 있다.” 

    - 언제부터인가. 

    “2017年 以後 經濟가 急激히 나빠진 狀況에서 지난해 2月 하노이 北·美 會談이 깨진 以後부터다. 北韓 指導者로서는 처음으로 美國 大統領과 두 番이나 會談했고, 시진핑 中國 國家主席, 文在寅 大統領도 만나는 廣幅 行步를 보였지만 結果는 다시 原點으로 가 있는 狀況이다. 核·經濟 竝進路線 10年 統治가 올해로 딱 마지막 해인데 아무 結實이 없다. 굳이 成果라고 한다면 韓美聯合軍事訓鍊 一部 中斷, 非武裝地帶 GP 一部 撤收, 對北 擴聲器 放送과 傳單 遮斷 程度인데 다 一時的인 거다. 經濟는 어떤가. 올해가 經濟開發 5個年 計劃 마지막 해인데 成果를 보면 마이너스다. 住民들에게 쌀밥에 고깃국 먹게 해주겠다는 經濟强國 約束과 世界 어디도 부럽지 않은 軍事强國 約束에 비하면 초라하다. 더 큰 問題는 代案이 없다는 거다.” 


    金正恩의 挫折

    6월 16일 북한이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주도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노동신문]

    6月 16日 北韓이 金與正 勞動黨 第1副部長 主導로 開城 南北共同連絡事務所를 爆破했다. [勞動新聞]

    - 心理的으로 複雜하겠다. 

    “김정은의 挫折感이 表現된 게 지난해 12月 黨 中央위 全員會議에서 採擇한 두 가지 路線, ‘經濟는 自力更生, 對南·對美關係는 正面 突破’다. 어찌 보면 너무도 當然한, 內容이 없는 말이다. 自力更生은 過去 ‘苦難의 行軍’ 時節부터 쓴 말이고, 正面 突破도 宣傳 文句에 不過하다. 金正恩은 只今 無力感 속에서 內部的으로는 人民 管理와 經濟 살리기에 集中하고 美國과 南쪽의 狀況 變化를 銳意 注視하면서 自身이 움직일 수 있는 與件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는 戰略을 擇한 것으로 보인다.” 

    - 그런 狀況에서 나온 6月 金與正의 挑發은 어떻게 봐야 하나. 

    “事實 南北關係는 2018年 10月을 끝으로 거의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우리 政府에 對한 非難과 侮辱的 言辭가 漸漸 過激해지더니 이番에 行動으로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北韓은 文 大統領 訪北과 平壤宣言에 그 나름의 큰 期待를 했다. 하지만 以後 別 變化가 없는 거다. 6月 挑發은 ‘말로는 안 되겠다, 行動으로 보여주겠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總選에서 與黨 壓勝을 보면서 우리 側을 强하게 壓迫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고 본다. 時間的으로 이 政府도 올해 지나면 끝이고 美國 大選도 다가오고 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는 狀況이 되니 이거 안 되겠다. 組暴들 表現을 쓰면 ‘너 좀 맞자’ 하는 心情이었을 것이다.” 

    - ‘여기 와서는 다해줄 것처럼 寮舍를 떨더니 돌아가 하는 行動을 보니 아무것도 없다’는 平壤 옥류관 廚房長 말이 생각난다. 

    “‘文在寅 政府는 南北關係를 改善할 意思도 없고 意志도 없고 能力도 없다’는 北韓의 말은 眞心일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해 1月 1日 ‘韓美軍事訓鍊 中斷, 外部로부터 新武器 導入 中斷, 地上·空中·海上을 비롯한 軍事的 敵對關係 解消를 위한 實踐的 措置, 開城·金剛山 協力事業 再開, 平和體制를 위한 多子協商’ 等을 明示的으로 要求했다. 하지만 別 進展이 없으니 뭔가 작은 것이라도 具體的 行動으로 보이라고 우리를 壓迫하고 있다. 金正恩은 事實上 文 大統領이나 트럼프 大統領에 對해 期待를 접은 것 같다.” 

    그는 向後 가장 重要한 變數로 ‘美國 大選’을 꼽았다. 

    “大選 以後 다시 板을 짤 可能性이 크다. 그 過程에서 우리 政府가 變數가 아닌 上手라는 게 問題다. 우리 政府의 立場이 明確한 데다 바뀔 可能性이 없으니 豫測이 可能하고 다루기가 쉽다. 바꿔 말하면 우리로서는 政策 選擇의 餘地가 別로 없다는 뜻도 된다.”

    한다면 하는 사람들

    - 6月의 境遇 金與正이 挑發에 나서고 金正恩은 뒤로 빠져 있었다. 

    “김정은이 나서지 않았다는 건 어떤 餘地를 남겼다는 뜻도 된다. 實際로 北韓은 挑發 渦中에도 微妙하게 몇 가지 餘地를 남겼다.” 

    - 그게 뭔가. 

    “첫째, 南쪽과의 連絡 通信船을 끊는다면서도 國精院과 黨 中央위 間 通信船은 除外했다. 다 끊지는 않았다는 거다. 둘째, 總參謀部가 挑發 措置를 發表했을 때 黨 中央軍事위의 追認을 받겠다고 했다. 軍이 軍事委 追認을 받겠다고 밝힌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 같은 內容을 公開한 것 自體가 異常했는데, 軍事委가 곧 열릴 것이라는 豫告와 함께 措置가 바뀔 수도 있다는 點을 暗示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金正恩이 軍事行動 保留 메시지를 中央軍事委를 열지 않고 豫備會議에서 내놓았다. 이 亦是 前例가 없다. 旣存에 없던 會議를 굳이 만들었다는 건 向後 軍事委 決定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卽 挑發을 暫時 멈춘 것일 뿐 最終 決定이 남아 있고, 언제든 再開할 수 있다는 點을 强調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北韓의 메시지를 銳敏하게 읽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北韓은 聲明 等을 낼 때 時期, 發表 形式, 單語 選擇 하나하나까지 매우 신중하게 고른다. 北韓은 自身들이 내놓는 메시지를 우리 쪽이 宏壯히 深度 있게 分析하고 읽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저 배고파서 하는 소리’ ‘하나 마나 한 소리’ ‘늘 하던 소리’로 置簿하면서 섬세하게 들여다보지 않는 傾向이 있다. 南北關係가 黃金期였던 時節의 習慣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도 보인다.” 

    - 김정은 時代의 메시지 發信 方式이 過去와 달라진 게 있다면. 

    “性格이 急해 한꺼번에 다 쏟아내는 傾向이 있다. 김정일 時代에는 모니터, 報道 時點, 南쪽 國民 反應을 봐가며 하나하나 내놓았다. 冷溫湯이 있긴 했지만 振幅이 別로 안 컸고 豫測도 可能했다. 只今은 同時多發 몰아치기식이다. 變化 速度와 幅도 매우 크다. 暴發的이지만 緻密함이나 精巧함이 不足하다. 리더십과도 關聯이 있다고 본다. 밑에 사람들이 매우 힘들 것이다.” 

    그는 “北韓을 무서워할 必要도 없지만 우습게 봐서도 안 된다”고 했다. 

    “北韓을 對할 때 第一 重要한 것은 一貫性이다. 挑發에 對해 警戒하는 姿勢는 必要하지만 過度한 恐怖心은 도움이 안 된다. 木函地雷 事件 때는 탱크가 내려오고 戰時狀態까지 宣布됐다. 하지만 며칠 만에 다 끝났다. 核도 마찬가지다. 北韓이 核을 가졌다는 것을 分明히 認知하고 非核化 必要性을 冷靜히 論議해야 하지만 恐怖感에 휩싸여 할 일까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北韓의 오랜 强點이 宣傳·煽動이다. 우리가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으면 宣傳·煽動 效果가 없어진다. 그들로서는 가장 效率的 武器 하나를 잃는 게 된다. 

    그들을 過小評價해서도 안 된다. 그 어려운 時節에 核 開發에 온 에너지를 集中해 마침내 성공시킨 사람들이다. 合理的 잣대가 통하지 않는다. 2009年 北韓이 희천發電所를 3年 안에 다시 짓겠다고 했을 때 ‘不可能하다’ ‘今方 무너질 것’ 等 別別 얘기가 있었지만 現在 平壤의 電氣 不足을 相當 部分 解決하고 있다.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란 얘기다.”

    白頭血統, 王손(王孫)에는 男女가 없다

    - 果然 4代 世襲까지 갈까. 

    “現在로서는 豫想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나의 關心은 그런 것보다 金正恩이 世上을 어떻게 바라보고, 뭘 志向하는지에 있다. 나머지는 내게 單純한 興味거리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永遠한 것은 없다는 거다. 길게 보면 未來는 보인다. 그사이를 어떻게 管理하고 對處하느냐가 重要하다.” 

    - 金與正으로의 世襲 可能性은? 

    “金與正이 現在 對南關係를 實務的으로 이끌고 있다. 對外的으로 나서는 것도 全혀 異常하지 않다. 北韓이 黨 中央위 第1副部長이라고만 呼稱하고 所屬 部署를 公開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境遇 大體로 힘이 가장 莫强한 組織인 組織指導部를 實質的으로 맡고 있을 可能性이 크다. 金正日 時期에는 김정일이 直接 組織指導部 部長을 맡았다. 

    組織指導部長이 누구이든 金與正이 組織指導部를 管掌하고 있다면 黨에서의 實質的 힘은 金正恩 다음이다. 이番 對南 談話에서 ‘委員長 同志와 黨, 國家로부터 附與받은 權限에 따라 일을 한다’고 했다. 對敵事業部 全體會議를 主宰했다는 걸 보면 2人者 位置가 거의 確固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狀況은 일찍이 豫想된 바다. 金與正은 ‘白頭血統’이다. 一角에서는 女子가 指導者가 되는 게 어렵다고 보지만, 白頭血統에는 男女가 없다. 神聖한 王손인데 性別이 重要하겠는가.” 

    - 內部 쿠데타 可能性은? 

    “거의 없다고 본다. 北韓의 權力 集團은 現在의 시스템을 즐기고 있다. 金正日 時期에 若干 힘들었지만 核을 가졌고, 人工衛星도 쏜다. 平壤 사람들은 宏壯한 自負心을 갖고 있다. 甚至於 ‘南朝鮮보다 더 잘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겪은 北韓, 北韓 사람들

    金 前 本部長은 그동안 만난 北韓 側 會談 關係者 中 가장 印象的인 사람으로 ‘김영철(勞動黨 副委員長)’을 꼽았다. 

    “1990年 南北高位級會談 豫備會談 代表일 때 처음 만났다. 當時에는 所長(國軍 准將에 該當)이었다. 以後 南北 將星級 會談, 南北 國防長官會談 때 映像으로 만났다. 2014年 10月 板門店 南北軍事當局者 接觸 때 다시 대면했다. 24年 만의 再會였는데 문득 歲月의 無常함이 느껴져 ‘24年 만에 봅니다. 歲月이 참 無常합니다’라고 했더니 물끄러미 쳐다만 보더라.” 

    - 別名이 ‘毒蛇’라고 하던데 實際 그런가. 

    “宏壯히 스마트하고 軍事 問題에 精通하다. 南北會談과 關聯해 北韓 最高 專門家 中 한 사람이다. 過去 會談 歷史는 勿論 우리 쪽에서 했던 提案이나 言及을 훤하게 꿰고 있다. 모진 말套, 傲慢한 態度로 힘들게 하는 境遇도 많았다. ‘지난 合意書는 읽지도 않고 나왔나’라며 윽박지를 때도 있었다. 김영철은 김일성 時代부터 3代에 걸쳐 北韓 內部에서 信賴가 相當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든 김정일에게 直接 報告하고 署名을 받아올 수 있었던 사람으로 알고 있다. 北韓 같은 體制에서 3代에 걸쳐 살아남았으니 普通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對南 協商이나 訪南한 主要 人士들의 삶이 여러모로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게 무슨 말인가. 

    “北韓 代表들은 우리 言論에서 ‘溫和하다’ ‘合理的이다’ ‘南쪽을 理解하는 사람’ 같은 肯定的 評價가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毒蛇’처럼 否定的 評價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協商이 끝나면 結果가 어떻게 되든 批判받을 수밖에 없고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對南 協商家들은 北에서 볼 때 敵과 만난 사람들이다. 南側에 包攝됐다고 여겨질 수도 있고 發展賞을 보고 變心했다고 疑心받을 수도 있다. 要注意 人物이 돼 保衛省이나 黨 指導部로부터 監視받기 일쑤다. 그렇다 보니 ‘집에 달러를 숨겨놓았다’ ‘子息들이 어땠다’ 式으로 꼬투리가 잡힐 수도 있다. 그런데 서울에 와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내가 다음에 서울 가는 順序’라면서 들떠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協商 代表는 俳優… 監督 力量이 重要

    - 北韓이라는 協商 相對는 어떤 特徵이 있나. 

    “첫째, 公開·非公開 接觸에서 立場差가 別로 없다. 따로 조용히 만나도 見解가 똑같다. 둘째, 우리 쪽도 靑瓦臺가 會談 映像을 보면서 指示를 내리지만 平壤은 會談 中에도 一一이 指示가 내려온다. 나는 會談場에서 쪽紙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데 北側 代表團에는 隨時로 쪽紙가 들어온다. 셋째, 南北協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것은 重要하지 않다. 協商 代表들은 서울과 平壤 首腦部를 向해 말하는 거다. 決定은 兩쪽 最高 指導部가 한다. 그런 點에서 協商 代表는 舞臺에 선 俳優 같은 存在다. 監督이 있고, 觀衆도 있다. 俳優 力量에 따라 舞臺가 華麗해질 수도, 亡할 수도 있지만 基本的으로는 監督의 생각, 能力이 重要하다.” 

    - 南北對話나 協商에서 技術 같은 게 있나. 

    “우리 쪽 立場을 正確하게 傳達하고 相對가 뭘 願하는지 正確하게 읽는 것이 重要하다. 妥協의 餘地가 있느냐 없느냐를 判斷하는 것도 重要하다. 合意文 다음으로 會談이 잘됐는지 그렇지 않은지 決定하는 重要한 要素가 會談場에서 어느 쪽이 提起한 問題가 議題가 되는지 하는 點이다. 蹴球에서 骨 占有率처럼 말이다. 例를 들어 우리가 아무리 反駁을 잘했다고 해도 北側이 提示한 NLL(北方限界線)이나 國家保安法 問題 爲主로 對話가 이뤄졌다면 그쪽이 깔아놓은 판에서 논 게 된다. 北側이 願하는 對南 輿論戰에 이용당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北韓과 달리 우리는 會談 內容을 國民에게 알려야 하는 開放 體制라는 點도 늘 勘案해야 한다. 會談이 열리기도 前에 言論에 우리 側 立場이나 戰略 等이 報道된다. 協商 戰略에서만 보면 매우 不利한 要素다. 協商이 끝나면 合意書가 나오는데 監督이라고 할 수 있는 長官이나 大統領이 專門家는 아니다. 우리 側 監督을 만족시키는 同時에 우리 쪽 戰略이 充分히 反映돼 있으며 北側이 受容할 수 있는 文句를 만들어내는 게 協商팀의 力量이다. 技術的인 側面만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 對北協商家로서 第一 重要한 資質을 꼽는다면. 

    “南北關係 歷史나 基本 戰略에 對한 知識과 理解는 必須다. 各種 어젠다에 對한 整理가 잘돼 있어 서너 手 앞까지 내다보면서 北韓을 說得할 수 있는 論理를 갖춰야 한다. 또 타고나는 部分이긴 한데 相對가 치고 들어올 때 바로 對應하는 創意性과 瞬發力도 重要하다. 우리는 循環 補職이 第一 問題다. 北韓을 오래 接觸한 사람이 別로 없다 보니 現場에서 말로 當한 後 唐慌하는 境遇가 많다.” 

    - 그런 點에서 北韓 사람들은 똑똑한 協商家인가. 

    “平生 職業이 協商家인 사람이 大部分이다. 그동안 南北對話 歷史나 內容을 달달 외울 程度다. 어떤 땐 내가 모르는 우리 쪽 뉴스를 저쪽이 훨씬 많이 알 때도 있었다. 過去 南北高位級 會談 때 우리 側 代表가 人權 問題를 꺼낸 적이 있었다. 갑자기 雰圍氣가 썰렁해졌다. 北側 代表가 粉紅色 褓자기로 싼 褓따리 두 個를 冊床 위에 턱 놓더니 ‘이거 풀어놓고 南쪽 人權 問題를 밤새면서 이야기해 보자는 겁니까’라고 하더라. 이미 準備하고 왔던 거다. 北쪽 사람들이 方向이 틀려서 그렇지 熱心히 일하는 건 認定해 줄 部分이 있다.”

    벼랑 끝까지 간 木函地雷 協商

    - 特히 記憶에 남는 協商이 있다면. 

    “開城工團 正常化 協商이 떠오른다. 朴槿惠 政府 때인 2013年 北韓이 開城工團 南北 間 通行을 遮斷한 狀況이었다. 韓美軍事訓鍊이 핑계였다. 나는 3次 會談 때부터 首席代表로 參席했다. 7次 會談까지 이어진 끝에 正常化에 合意했다. 國內 輿論은 開城工團을 아예 없애자고 할 程度로 좋지 않았고 北側 讓步案을 이끌어내기도 쉽지 않은 狀況이었다. 

    協商 첫날, 北쪽 사람들과 握手할 때 그 사람들 손에 땀이 흥건해 ‘아, 내가 마음놓고 떠들어도 판이 깨지지 않겠구나’ 하는 直感이 왔다. 金正恩이 開城工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리라고 指示했다는 判斷이 들었다. 結局 北韓이 우리 企業들에 1年間 稅金을 免除(補償 責任)해 주고, 管理 權限을 南北이 共同으로 行使하는 式으로 合意가 이뤄졌다.” 

    - 2015年 木函地雷 事件 때는 3泊 4日 동안 한숨도 못 잤다고 들었다. 

    “GP에서 巡察을 돌던 우리軍 下士들이 목함지뢰를 밟아 다치는 일이 發生한 것은 다 記憶할 것이다. 調査 結果 北側이 地雷를 묻고 간 것으로 判明이 났다. 우리는 膺懲 次元에서 對北 擴聲器 放送을 展開했고 이에 北韓이 非武裝地帶 안에 抛 3發을 쏘았다. 여기에 맞서 우리 側이 155㎜ 抛 29發을 쐈더니 金正恩은 준(準)전시상태를 宣布했다. 탱크가 移動하고 西海岸 砲門이 열렸다. 미사일 發射 準備 움직임까지 보이는 等 軍事的으로는 거의 戰爭이 臨迫한 狀況이었다.” 

    - 어떻게 會談이 이뤄졌나. 

    “김양건 當時 北韓 統一戰線部長이 갑자기 김관진 靑瓦臺 安保室長을 만나자고 電話通知文을 보내왔다. 우리 側에서는 ‘北韓 統戰部長이 우리 安保室長을 만나는 건 形式과 格이 맞지 않는다. 만나고 싶으면 統一長官을 만나라’면서 拒絶했다. 그러자 北韓은 다시 ‘總政治局長 황병서가 김양건과 같이 나갈 테니 만나자’고 修正 提議를 해왔다. 一旦 北韓의 意見을 들어보자는 次元에서 김관진 室長과 홍용표 統一長官이 板門店 會談에 나갔다.” 

    - 雰圍氣는 어땠나. 

    “北側의 主張은 그 事件이 왜 일어났는지 모른다면서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거였다. 豫想한 대로였다. 김관진 室長이 ‘내가 全軍을 指揮했던 사람’이라며 어설픈 酬酌 부리지 말라는 뜻으로 이야기하자 조용해졌다. 

    當時 박근혜 大統領이 北韓의 公開 謝過와 再發防止 約束을 받아내겠다고 公開的으로 말했기 때문에 協商 目標가 분명했다. 3泊 4日 동안 밀고 당기는 協商이 이어졌다. 

    나는 南北會談本部長으로 會談 소프트웨어는 勿論 하드웨어까지 모두 챙겨야 해 한時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잠을 잘 수도 없었지만 오지도 않았다. 길다고 하면 긴 ‘밀당’ 結果 折衷案이 만들어졌다. 北韓의 遺憾 表明이 담겼고 우리의 再發防止 約束 要求와 北韓의 擴聲器 放送 中斷이 하나로 묶였다. 北韓도 滿足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北韓이 長距離미사일을 쏘면서 擴聲器 放送이 再開된다.”

    南側 進步人士들을 ‘灰色分子’라고 여겨

    2019년 6월 30일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동아DB]

    2019年 6月 30日 南·北·美 頂上이 板門店에서 歷史上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東亞DB]

    - 對話하고 合意해도 비슷한 일이 反復된다. 南北對話가 虛無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北韓보다 여러 面에서 壓倒的 優位에 서 있던 1990年代에는 安保威脅이 적었다. 北韓의 攻擊을 걱정한 게 아니라 ‘언제 亡하나’를 생각했다. 그러다 金正恩이 核을 가지면서 南北關係가 急激히 널뛰는 狀況이 됐다. 天安艦(爆沈), 延坪島(砲擊)를 비롯해 挑發이 繼續된다. 우리가 프레임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挑發의 强弱만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南北對話 自體에 歡呼하지만 對話는 問題를 푸는 方法이지 그 自體가 目的은 아니다. 서로가 問題를 풀겠다는 意志가 있어야 하고, 合意를 지키겠다는 履行 醫師가 있어야 對話가 意味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니하는 것만 못한 境遇도 많다.” 

    그는 代表的인 例로 하노이 北·美 頂上會談을 꼽았다. 

    “雙方이 속내가 다른데 겉으로 模樣만 맞춘 境遇다. 結局 속내가 다르다는 걸 雙方이 알게 돼 不信만 키웠다. 南北關係, 北·美關係의 눈높이가 頂上會談에 맞춰져 앞으로도 頂上이 만나야 일이 풀리는 狀況이 됐다. 向後 韓半島 問題를 解決해 가는 過程에서 새로운 接近을 하는 데 큰 制限 要素가 될 것이다. 金正恩이 한 合意를 北韓의 누가 비틀거나 修正할 수 있겠나.” 

    - 우리는 政權에 따라 對北政策 方向이 너무 달라 問題 아닌가. 

    “北韓 立場에선 報酬나 進步나 別 差異가 없다. 李明博, 朴槿惠, 文在寅 大統領 時期 中 南北對話와 牙山家族 相逢이 언제 第一 많았을까. 李明博, 朴槿惠 大統領 때는 離散家族 相逢을 各各 두 次例 했다. 文在寅 政府에서는 한 番뿐이다. 南北 對話도 別로 다르지 않다. 

    北韓 基準에선 韓國 政府가 進步냐 保守냐가 重要한 게 아니라 自己 要求를 얼마나 受容하는지가 重要하다. 自身들이 願하는 戰略 目標를 達成하는 게 優先이기 때문에 내세우는 理念이 重要한 게 아니라 戰略·戰術 次元에서 必要한 狀況이 되면 對話하고 만나고, 또 必要하면 挑發하는 것이다. 

    오히려 北韓은 韓國에서 進步로 통하는 人士들을 ‘灰色分子’로 보고 있다는 印象을 받았다. 實際로 北韓 人士들 中 우리 쪽 進步團體 人士들과 만난 것을 氣分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제대로 된 社會主義者나 共産主義者도 아니면서, 겉으로만 自己들을 엄청 理解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 앞으로의 南北關係는 어떻게 보나. 

    “金正恩은 自身이 願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韓半島에 平和는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한다. 급반전? 期待가 別로 안 된다. 적어도 올해 末부터 다음 政府까지는 威脅과 壓迫을 繼續할 것이다.” 

    그는 “變化하는 國際 情勢에 注目하면서 最近 30年의 南北關係를 다시 原點에서 생각하는 새로운 독트린이 必要한 時點”이라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現在 알다시피 美國의 가장 큰 적은 中國이다. 美·中 對決은 銃만 안 들었을 뿐 戰爭 水準이다. 우리 立場에선 共産黨이 이끄는 中國과 價値를 共有할 수는 없다. 調停者나 仲裁者가 되겠다는 것도 非現實的이다. 調整이나 仲裁는 强者가 하는 것이다. 힘이 있어서 北韓, 美國, 中國에 뭔가 줄 수 있을 때 可能한 일이다. 

    結局 매우 지혜롭게 行動하면서 交集合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가 果然 그럴 能力이 있는지 憂慮스러운 側面이 많다. 美國과 中國은 매우 冷靜하다. 우리를 이미 박쥐로 보고 있다. 사드(高高度미사일防禦體系) 問題를 겪으면서 누르면 굽힌다는 認識을 심어줬다. 안보는 흥정 對象이 아니라는 姿勢를 明確히 堅持하지 못해 克服하기 어려운 나쁜 先例를 만들었다. 

    韓半島의 主人은 우리라는 意識이 必要하다. 强大國에 둘러싸인 弱한 나라가 周邊 强大國들을 혼자 相對할 수 없다는 點도 認定해야 한다. 剛한 나라를 등에 업어야 한다. 冷酷한 國際秩序에 浪漫은 없다. 적어도 20年, 30年 앞을 내다보는 外交·安保 비전이 切實하다. 一貫되게 밀고 나갈 독트린이 必要한 時點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