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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蘇 占領軍, 統治權力으로 자리 잡다|신동아

김학준이 다시 쓴 現代史 決定的 場面②

美·蘇 占領軍, 統治權力으로 자리 잡다

解放 直後 約 3個月의 狀況 : 이미 드러난 美國과 蘇聯 사이의 理解 衝突

  • 김학준 檀國大 碩座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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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0-09-0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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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解放과 더불어 그동안 朝鮮을 强點·統治한 核心的 中央機關이던 朝鮮總督府가 解體되면서 韓半島에는 一時的으로 權力 空白이 發生했다. 그러나 平壤에는 8月 16日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가 樹立되고 서울에는 9月 12日 ‘南朝鮮駐屯美國陸軍軍事政府’가 樹立되면서 權力 空白은 메워졌다. 日本軍을 代替해 美軍과 蘇聯軍이 새로운 統治權力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 美國의 占領統治와 蘇聯의 占領統治는 모두 初期의 일정한 期間에 혼란스러운 樣相을 보였다. 그러나 大體로 1945年 9月 下旬부터 11月 下旬의 3個月 사이에 美國과 蘇聯은 韓半島에 統一政府를 세우는 길은 매우 險難하다는 結論을 내리고 各各 自國의 占領地域 안에 自國에 忠實한 政府를 세우기 위한 暫定的인 計劃을 세운다. 第2回는 이 期間에 關聯된 論點들을 다룬다.

    論點1
    呂運亨이 日帝 總督府로부터 移讓받은 權力의 實體는 무엇이었나.

    朝鮮總督府가 日帝의 降伏이 臨迫했음을 正確히 認知한 때는 1945年 8月 10日이었다. 도쿄放送은 이날 午前 9時 30分 “日本 政府는 天皇의 地位에 아무런 變更이 없는 條件이라면, ‘日本의 無條件 降伏을 要求한’ 포츠담宣言을 受諾할 用意가 있다”고 밝혔는데, 總督府 警務局은 短波放送을 통해 이 消息을 接한 것이다. 

    多急해진 總督府는 朝鮮에 사는 日本人들의 生命과 財産을 지키고 그들을 無事히 本國으로 歸還시키려면 ‘朝鮮의 名望 있는 指導者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判斷했다. 그리하여 總督府의 第2人者인 政務總監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總督府 안에서 韓人으로 最高의 地位에 있는 調査課長 최하영(崔夏永)을 불러 ‘朝鮮의 名望 있는 指導者들’에 對해 물었다. 최하영은 그들에 對해 對答했다. 그러나 自身의 回顧錄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송진우, 總督府 提議를 拒絶하다 | 政務總監 엔도는 8月 12日 總督府 警務局長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를 통해, 그리고 8月 13日 總督府 警務局 保安課 幹部들 및 京畿道知事 이쿠타 世子브로(生田淸三郞)를 通해, 송진우(宋鎭禹)에게 制限된 範圍 안에서 行政權을 넘겨주겠으니 도와달라고 提議했다. 宋鎭禹는 日帝强占期에 民族紙 동아일보社 社長을 歷任했으며 두 次例에 걸쳐 投獄됐고 ‘親日’의 欠을 全혀 남기지 않은 徹底한 排日主義者(排日主義者)였다. 宋鎭禹는 어떠한 權限이든 聯合國으로부터 받아야 한다고 主張하면서 그 提議를 拒絶한 채 稱病하면서 蟄居했다. 

    여운형, 總督府 提議를 받아들이다 | 이틀 뒤인 8月 14日 午後 11時 朝鮮總督府는 日帝가 곧 降伏할 것이라는 消息을 國營通信社 도메이쓰신(同盟通信) 京城知事를 통해 傳達받았다. 더욱 多急해진 總督府는 高位 幹部會議를 열어 여운형(呂運亨)과 對話하기로 決定했다. 呂運亨은 1919年 3月 1日 擧族的·擧國的으로 일어난 獨立運動의 延長線 위에서 1919年 4月 13日 中國 상하이에서 成立된 大韓民國臨時政府(略稱 臨政)에 參與했으며, 抗日運動과 關聯해 中國에서 逮捕된 뒤 本國으로 送還돼 投獄됐던 經歷을 지녔다. 

    呂運亨은 엔도의 要請에 應해, 두 사람 사이의 歷史的 面談은 1945年 8月 15日 午前 8時 서울 中區 필동에 있는 엔도의 官邸에서 이뤄졌다. 疑心의 여지없는 抗日獨立運動家인 呂運亨은 이 機會를 活用하는 것이 朝鮮의 獨立에 도움이 된다고 判斷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呂運亨은 엔도에게 다섯 가지 條件을 提示하고 그것이 水落되면 自身도 總督府의 提議에 應하겠다고 對答했다. 



    그것들은 ①모든 政治犯 및 經濟犯의 卽刻 釋放 ②集團生活地인 서울의 3個月(8~10月)分 食糧 確保 ③治安 維持와 새 國家 建設을 위한 活動에 對한 一切의 不干涉 ④學生 및 靑年의 訓鍊과 組織化에 對한 一切의 不干涉 ⑤朝鮮 內의 各 事業場에 있는 勞動者들의 새 國家 建設 活動에 對한 協力 및 一切의 不干涉 等이 包含됐다. 엔도에게 呂運亨의 提議는 自身이 豫想한 範圍를 넘어선 것들이었다. 그러나 엔도에게는 아무런 다른 代案이 없었다. 

    더구나 이미 8月 9~10日 韓半島의 北端에 進入했으며 14日에는 그 一部가 平壤에 進駐한 蘇聯軍이 繼續해서 南下하는 境遇 서울도 蘇聯軍의 占領 아래 놓일 危險性이 크며, 이렇게 되는 境遇 左派 性向이 짙은 呂運亨의 協助는 必須的이었다. 그리하여 엔도는 呂運亨에게 日帝에 依해 아홉 次例에 걸쳐 投獄됐던 抗日民族主義者 安在烘(安在鴻)에게도 함께 治安 維持에 協力해 달라고 傳해줄 것을 付託하면서 呂運亨이 提示한 要求들을 無條件 受諾했다. 

    이 面談과 關聯해 적어도 다음 세 個의 論爭이 뒤따랐다. 첫째, 呂運亨이 朝鮮總督府로부터 移讓받은 權力의 實體에 關해서다. 한때 呂運亨도 그러했지만 側近의 몇몇 사람은 呂運亨이 總督府로부터 ‘政權’을 引受받았다고 回想했다. 그러나 엔도는 後날 日本에서 연 記者會見에서 ‘政權’이 아니라 ‘治安權’을, 그것도 制限된 範圍 안에서 넘겨주었다고 回顧했다. 여러 資料를 살핀 뒤, 硏究者들은 呂運亨이 받은 것은 ‘政權’이 아니라 ‘制限된 範圍 안에서의 治安權’이었다는 結論을 내렸다.

    論點2
    呂運亨이 總督府로부터 政治資金을 받았다는 
    美軍 資料는 正確한 것인가.

    광복 이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

    光復 以後 韓半島에 進駐한 美軍.

    呂運亨과 엔도의 面談이 있었던 때로부터 約 25日 뒤 서울에 自身의 軍事政府를 세운 美軍은 呂運亨과 엔도의 面談에서 엔도가 呂運亨에게 2000萬 엔을 주었으며 呂運亨은 그 돈을 받아 그 以後의 政治活動 費用으로 썼다고 記錄으로 남겼다. 이 記錄을 깊이 檢討한 신복룡(申福龍) 敎授에 따르면, 그때의 2000萬 엔은 2006年 時點에서 20億 원을 上廻하는 큰돈이었다. 

    韓國을 占領한 美軍司令官 존 하지 中將은 1945年 10月 5日 呂運亨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대가 日本人의 돈을 얼마나 받았느냐. 그대가 日本人의 돈을 받았다는 報告가 많이 들어왔다”고 詰難했다. 이에 對해 呂運亨은 받은 일이 없다고 反駁했다. 그러나 論難은 뒤따랐다. 맥아더 怨讐가 日本을 占領한 뒤 日帝 戰犯들을 處罰하기 위해 1946年 5月~1948年 11月 도쿄에 세운 極東國際軍事裁判에서 이 問題가 提起됐을 때, 그 裁判에 起訴된 戰犯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 엔도는 “아는 것이 없다”고 答辯했다. 

    硏究者들의 意見도 엇갈렸다. 어느 硏究者는 받은 것이 事實이라고 論評한 反面, 朝鮮=韓國 近·現代史의 權威者인 펜실베이니아大學校 名譽敎授 이정식(李庭植) 博士는 呂運亨이 돈을 받았다는 資料는 美軍政의 그 記錄 以外에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論評했다.

    論點3
    呂運亨이 總督府로부터 비록 治安權이라도 引受받아 
    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세운 것은 正當한가.

    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發足 | 呂運亨은 自身이 朝鮮總督府로부터 ‘政權’을 引受받았다고 생각하고, 自身이 日帝强占期 끝 무렵이던 1944年 여름에 祕密裏에 組織한 朝鮮建國同盟을 中心으로 1945年 8月 15日 午後 7時 서울 종로구 季冬의 한 建物에서 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結成했으며 委員長으로 就任했다. 朝鮮建國同盟이 果然 實存했었느냐에 對해 疑問을 提起한 硏究者가 있다. 그러나 實存했었다는 呂運亨과 그의 支持者들의 回想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呂運亨은 이튿날 當時 鍾路區 원서동에 있던 휘문中學校 校庭에서 大衆集會를 열고 朝鮮建國準備委員會(建準)의 出帆을 宣言했다. 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出帆은 南과 北의 朝鮮=韓國人 多數에게 好意的으로 받아들여져, 南과 北 모두에서, 特히 南韓 곳곳에서 빠른 速度로 支部들이 發足됐다. 

    北韓에서는 著名한 共産主義者들이 各自의 地域에서 ‘人民委員會’ 또는 ‘自治委員會’라는 이름 아래 別個의 委員會들을 發足했으나, 北韓의 中心地인 平壤에서는, 日帝와 妥協한 일이 없었던 民族主義者 曺晩植이 中心이 돼 서울의 建準을 韓半島의 ‘中央的’ 統治機關으로 받아들이고 北韓을 代表하는 地方機關으로서의 ‘平南建準’을 出帆시켰다. 南北韓에서의 이러한 狀況 展開에 留意해, 當時 美軍政廳 官吏였으며, 歸國한 뒤 컬럼비아大學校에서 美國의 南韓 占領 統治를 主題로 博士學位를 받은 그랜트 美드는 建準을 韓半島에서의 ‘事實上의 政府’라고 論評했다. 

    프랑스 中國 필리핀에서 占領者로부터 政權을 받은 事例들 | 여기서 하나의 論點이 提起됐다. 그것은 朝鮮總督府로부터 ‘政權’ 또는 ‘治安權’을 引受받아 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세운 것이 道德的으로 正當했느냐의 論點이다. 

    이미 宋鎭禹는 日帝로부터는 ‘政權’이든 ‘治安權’이든 어느 것도 받아서는 옳지 않다고 主張했었다. 그는 ①1940年 나치獨逸이 軍事占領한 프랑스에서 1次 大戰의 英雄 필리프 페탱 元首가 그들로부터 ‘政權’을 받아 프랑스 南部都市 비시에서 ‘프랑스국(國)’을 세워 그 首班으로 일했던 것 ②1940年 日帝가 軍事占領한 中國 난징에서 中華民國 政府의 要因이었던 왕정위(汪精衛)가 그들로부터 ‘政權’을 받아 난징國民政府를 세우고 그 行政院長에 就任했던 것, 그리고 ③1943年에 日帝가 軍事占領한 필리핀에서 호세 라우렐이 日帝로부터 ‘政權’을 받아 第2共和國을 세우고 大統領에 就任한 것 等은 모두 傀儡政府에 지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면서, 朝鮮=韓國에서도 日帝로부터 ‘政權’을 받아 政府를 세운다면 그것은 正當性과 合法性이 缺如된 傀儡政府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警告했다. 原則主義者였던 송진우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고 理解된다. 

    呂運亨의 事例는 앞의 事例들과 달랐다 | 對照的으로 政治의 現實性을 重視하는 境遇, 呂運亨의 決定은 首肯될 수 있다. 35年 동안 朝鮮을 占領統治했던 日帝의 降伏이 臨迫했고, 南韓과 北韓에 對한 美軍과 蘇聯의 個別的 軍事占領을 눈앞에 둔 超非常時局에서, 于先 朝鮮=韓民族의 統一的 中央政府를 세워 占領軍으로부터 그것을 旣定事實로 認定받아 놓는 것이 獨立國家 樹立의 지름길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다른 한便으로, 呂運亨이 直面한 當時의 狀況은 페탱과 왕정위 및 라우렐이 各各 直面했던 狀況과 큰 差異가 있다. 그 세 境遇 모두 敵國이 自國을 軍事占領한 直後에 該當되지만, 呂運亨이 直面한 狀況은 旣存의 敵國이 敗亡의 結果로 確實히 물러나고 勝戰한 새 占領國을 맞이해야 하는 歷史의 完全히 새로운 段階였다. 朝鮮=韓民族에게 일정하게 自身의 새 運命을 開拓할 수 있는 行動 空間이 주어졌을 때, 비록 ‘制限된 範圍의 治安權’을 日帝로부터 받았다 할지라도 建準을 세웠다는 것은 敵國의 傀儡政府를 세운 것이 아니라 朝鮮人의 獨自的 ‘統治機構’를 세우려고 한 試圖로 풀이될 수 있다.

    論點4
    ‘조선인민공화국’은 正當性과 合法性을 가졌는가.

    呂運亨은 美軍이 仁川에 上陸하기 이틀 前인 1945年 9月 6日 서울에서 約 1300名으로 構成된 ‘全國人民代表者大會’를 召集하고 이 大會의 議決을 거쳐 自身이 이끌던 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조선인민공화국(略稱 人工)으로 改編했다. 이 大會는 조선인민공화국의 註釋에 아직 美國에 머물러 있던 李承晩을, 그와는 아무런 相議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그의 同意를 받지 않은 채 選出하고, 副主席에 呂運亨을 選出했다. 거듭 말하지만, 呂運亨은 美國으로 하여금 이 ‘人工’을 南韓의 公式的인 政府로, 한발 더 나아가 韓半島의 唯一한 公式 政府로 承認하도록 誘導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 構想과 計劃에 對해서는 앞으로 따로 論議하기로 하고 여기서 于先 討論돼야 할 것은 ‘全國人民代表者大會’가 果然 그 이름에 걸맞은 資格을 가졌느냐에 對해서다. 첫째, 이 大會에 參席한 ‘代表’들이 어떤 節次를 밟아 ‘代表’로 選出됐는지 當時에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確實하지 않다. 둘째, 이 大會에 參席한 ‘代表’들의 名單은 當時에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셋째, 이 大會가 열린 날짜와 場所 및 議題가 事前에 公式的으로 發表된 일이 없었다. 國家의 樹立을 宣言하는 일과 같은 매우 重要한 議題는 事前에 公開됐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點들을 綜合할 때, 이 大會는 ‘全國人民代表者大會’라는 이름에 決코 符合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 大會가 樹立을 宣言한 ‘조선인민공화국’의 適法性과 正當性은 認定되기 어렵다.

    論點5
    人工 樹立은 呂運亨의 作品이었나 박헌영의 作品이었나.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 5000여 군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1945年 8月 16日 여운형 建國準備委員會 委員長이 5000餘 群衆 앞에서 獅子吼를 吐하고 있다. [미디어韓國學 提供]

    이러한 問題가 提起되자 呂運亨의 親同生으로 當時의 狀況에 밝은 여운홍(呂運弘)은 뒷날 “‘人工의 樹立’은 純全히 小兒病的인 極烈 共産黨員들이 꾸며낸 하나의 演劇이었다”고 辨明했다. 呂運亨의 側近으로 建準의 出帆에 깊이 關與했던 이영근(李榮根)도 人工의 適法性을 否認했다. 그는 建準의 擴大를 막고 建準 自體를 破壞하려는 朝鮮共産黨 黨首 박헌영(朴憲永)과 그 支持者들이 이 大會를 急造했다고 回顧하면서 그러했기 때문에 建準에서 重要한 役割을 遂行했던 최근우(崔謹愚)와 自身을 비롯한 親(親)여운형-反(反)박헌영 勢力은 이 大會 召集 自體에 反對했다고 回顧했다. 그는 이때 ‘代表’라는 이름으로 大會에 參席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박헌영 勢力이 서울과 仁川의 工場들에서 急히 動員한 勞動者가 많았다는 事實을 公開하면서, 人工의 樹立이 不當했다고 力說했다.
     
    呂運亨의 또 다른 側近 이기형(李基炯) 亦是 呂運亨은 受動的이었으며, 朝鮮共産黨이 이 일을 推進했다고 回顧했다. 呂運亨의 理論的 代辯人 役割을 遂行했던 이동화(李東華)도 같은 趣旨로 回顧했다. 越北해 北韓의 高位人士로 活動하던 呂運亨의 딸 여연구(呂?九)는 훨씬 더 剛한 語調로 박헌영이 ‘人工’을 組織했다고 非難했다. 아버지가 박헌영이 事前에 모든 것을 準備해 놓은 채 大會에 꼭 參席해 줘야겠다고 要求해 應했을 뿐이라고 辨明한 것이다. 이러한 辨明들을 綜合해, 이정식 敎授는 “人民共和國의 設立은 박헌영界의 共産黨에 依한 宮中革命이었다”라고 斷定했다. 

    呂運亨은 人工 樹立의 適法性과 正當性에 對한 問題 提起를 豫想했던 것 같다. 이 點은 그가 이 大會에서 臨時議長으로 選出된 直後 演說하면서 “非常한 때는 非常한 人物들이 非常한 方法으로 非常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데서 드러난다. 같은 脈絡에서, 呂運亨은 10月 1日에 記者會見을 통해 “(…) 時急한 非常措置로 聯合軍이 進駐하면 卽席에서라도 國權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準備한 것이 卽 조선인민공화국이었다. 人民이 承認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은 그대로 成立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一連의 發言은 呂運亨이 그저 박헌영界의 政治的 陰謀에 빠져든 것은 아니고 그 스스로 일정한 範圍 안에서 積極的으로 움직였다는 推定을 可能하게 한다.

    論點6
    呂運亨은 왜 躁急하게 ‘조선인민공화국’ 樹立을 宣言했을까.

    그러면 呂運亨은 왜 그러한 길을 밟았던가? 그는 日帝가 敗亡하기 直前에, 當時로서는 드문 도쿄帝國大學 法學部 政治學科 卒業生으로 마르크시즘·레닌이즘에 對해서는 勿論이고 國際情勢에 對해 밝았던 이동화로부터 ‘現下 國際情勢에 對한 分析과 展望’이란 論文을 報告받았다. 이 論文은 基本的으로 日帝가 敗亡한 以後의 國際情勢를 ‘收斂論(收斂論)’에 서서 接近했다. 풀어 말해, 美國도 資本主義를 修正하는 길을 걷고, 蘇聯도 共産主義를 修正하는 길을 걸음으로써 結局 共通의 廣場으로 收斂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2次 大戰 때 나치獨逸 · 파시스트이탈리아 · 日制 等 樞軸國에 맞서기 위해 暫定的으로 協力한 美國과 蘇聯의 關係는 相互共存의 關係로 發展할 것이라고 展望한 것이다. 

    呂運亨은 이 論文을 읽은 뒤, 이동화에게 “果然 美國과 蘇聯이 協力을 繼續해서 維持해 나갈까?”라고 물었다. 이것은 呂運亨이 이 論文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解釋을 可能하게 한다. 그렇지만 그 亦是 비슷하게 생각했을 蓋然性이 높다. 

    그래서 呂運亨은 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公式的인 政府로 宣布해 旣定事實로 만들어놓고 곧 서울에 進駐할 美軍으로부터 追認을 받게 되면 蘇聯 亦是 거기에 呼應하리라고 豫見했던 것 같다. 以後 그가 걸은 길이 그러한 推定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 그는 언제나 美占領軍과 對話를 試圖하면서 蘇聯占領軍과의 對話 亦是 試圖하는 政治 行步를 取하며, 蘇聯占領軍이 自身의 提議에 呼應할 것이라는 期待를 1947年의 어느 時點까지는 維持했던 것이다. 

    實際로 그는 于先 美軍에 接近했다. 9月 6日 自身의 親同生 여운홍, 그리고 백상규(白象奎) 및 조한용(趙漢用) 等 3人을 仁川으로 보내 美軍의 入港을 기다리게 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9月 8日 美軍의 旗艦(旗艦)에 乘船해 下肢를 包含한 美軍 高位 幹部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自身들이 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代表하고 있다고 主張하면서 呂運亨을 비롯한 7名의 韓人 指導者 名單을 넘겨주고 美軍은 이들과 協力해야 한다고 提議했다. 呂運弘은 9月 6日부터 仁川에 머물렀기 때문에 朝鮮建國準備委員會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바뀐 것을 모르고 있었다. 

    美國, ‘人工’을 否認하다 | 그들의 期待와는 달리 美軍 高位 幹部들은 呂運弘의 提議에 否定的인 立場을 取했다. 自身들이 占領할 南韓에서 ‘左翼革命’이 일어나는 것을 豫防해야 한다는 基本 指針을 받고 南韓에 到着한 그들은 서울의 朝鮮總督府와 交信하면서 이미 ‘조선인민공화국’을 共産主義者들의 集結體라고 把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結局 美軍은 서울에 進駐한 때로부터 사흘 뒤인 9月 12日 自身이 세운 美軍政 以外에는 어떤 政治的 實體도 政府로 認定할 수 없다고 公式的으로 闡明함에 따라 呂運亨의 그 腹案은 實現되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美軍政은 ‘조선인민공화국’은 勿論 그것의 基盤이던 朝鮮建國準備委員會度, 그리고 各 地方에 세워져 기능하던 人民委員會들도, 모두 否認했다. 이에 따라 呂運亨은 自身이 이제까지 維持해 온 組織을 活用해 1945年 11月 12日 서울에서 조선인민당을 創黨하는 길 以外에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論點7
    美國이 ‘조선인민공화국’을 承認했더라면 
    그것이 基礎가 돼 韓半島에 統一政府가 세워질 수 있었을까.

    美軍政의 이러한 決定에 對해, 美國의 몇몇 學者는 매우 批判的으로 보았다. 當時 美軍政廳의 官吏였고 後날 大韓民國政府가 樹立되자 駐韓 美國大使館 問情官으로 奉職한 그레고리 헨더슨이 그들 가운데 代表的인 사람이다. 

    그들은 美軍政이 ‘人工’을 認定했거나 最小限 ‘建準’을 公式的 政府로 認定했더라면 于先 解放 以後 南韓에서의 混亂을 豫防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어 ‘人工’도 그러했지만 ‘建準’ 亦是 韓半島 全體를 끌어안은 全國的 政治組織體였던 만큼 그것을 바탕으로 統一政府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南北 分斷이 굳어지는 것을 豫防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主張했다. 

    蘇聯, ‘人工’을 否認하다 | 그러나 이러한 家庭은 當時의 現實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美國도 그러했지만, 蘇聯 亦是 ‘建準’이나 ‘人工’을 全혀 認定할 수 없었다. 特히 ‘人工’에 關해 當時 南韓에서 蘇聯을 代表하던 唯一한 國家機關인 서울 駐在 蘇聯總領事館의 알렉산드르 폴랸스키 總領事는 本國 政府에 “南朝鮮에서는 이 政府를 누구도 政府로 認定하지 않았다”고 冷笑的으로 報告했다. 

    總領事館의 第2人者 아나톨리 샤브新 副領事의 夫人으로 總領事館 圖書室長이던 파냐 샤브視나도 自身의 回顧錄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은 未熟함과 不徹底性을 보여줬다. 서울을 中心으로 한 人民共和國 建國에 對한 모든 發想은 現實的인 狀況을 考慮하지 않았는데, 對外的인 條件으로 보아 처음부터 革命의 土臺가 北朝鮮에 놓여 있었다는 事實을 看過한 것이 그것이다”라고 썼다. 샤브시나가 率直히 指摘했듯, 蘇聯은 ‘革命의 土臺’가 南韓이 아니라 北韓에 놓여 있다고 본 것이다. 

    이 論點을 깊이 硏究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大學校 러시아·東유럽硏究所 敎授 에릭 半 리(Erik Van Ree) 博士의 分析도 흐름을 같이한다. 그는 蘇聯은 처음부터 ‘建準’이나 ‘人工’에 對해 好感을 갖지 않았다고 論評했다. 北韓을 蘇聯軍이 占領하고 있는 터에 朝鮮 全體를 統轄하겠다는 政治組織이 南韓에서 出現한 것을 好意的으로 對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蘇聯의 言論媒體들이 이들에 對해 全혀 報道하지 않은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金日成, ‘人工’을 否認하다 | 蘇聯도 그러했지만, 當時 北韓에서 蘇聯軍의 庇護 아래 朝鮮共産黨을 이끌던 김일성 亦是 ‘人工’을 否認했다. 北韓의 官營私學을 代辯해 金日成 公式 傳記를 쓴 백봉(白峰)의 ‘民族의 太陽 김일성將軍’(平壤, 1968)은 1945年 11月 15日 열린 ‘朝鮮共産黨 北部造船分局’ 第2次 擴大委員會에서 김일성이 ‘人工’에 對해 “政權이란 몇몇이 모여서 宣布하는 것으로 세워질 수 없음을 指摘하시었다”고 자랑스럽게 썼다. 

    金日成 스스로도 後날 이 問題에 對해 분명한 語調로 回想했다. ‘金日成著作選集’ 第1卷(1979)에 따르면, 김일성은 그 會議에서 “人民共和國은 우리 人民의 支持를 받을 수 없는 者들로 構成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反共分子이며 親美分子人 리승만을 비롯하여 親日派 民族反逆者들과 假짜 革命家인 派閥分子들이 들어가 있으며, 참다운 愛國者인 健實한 共産主義者들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라고 演說했다. 

    김일성은 또 “이러한 政府가 人民大衆의 利益을 擁護하는 政權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은 自明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人民共和國은 所謂 特權階級을 위한 反人民的인 부르죠아정권이라고밖에 斷定할 수 없습니다. 우리 共産主義者들이 어떻게 이러한 政府를 認定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非難한 後 “우리는 人民共和國을 우리 人民의 政權으로 認定할 수 없으며, 또 認定할 義務도 없습니다. 人民共和國을 支持할 것을 主張하는 것은 참다운 人民政權을 세우는 것을 抛棄하는 反人民的 行爲입니다”라고 敷衍했다고 回顧했다. 

    이렇게 볼 때, 當時 美軍政이 ‘人工’을 承認했더라면 그것이 南北韓 統一政府를 세우는 過程에서 基本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假定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김일성도 그렇고 더구나 蘇聯도 南韓에서 出帆한 ‘人工’을 南北統一政府 樹立의 뼈대로 全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論點8
    美軍政이 大韓民國臨時政府를 承認했더라면 
    그것을 基礎로 韓半島에 統一政府가 세워질 수 있었을까.

    수십 년 타향을 헤매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1945년 환국했지만 미 군정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數十 年 他鄕을 헤매던 大韓民國臨時政府 國務委員들은 1945年 還國했지만 美 軍政에 依해 ‘個人 資格’으로 歸國해야 했다. [國史編纂委員會]

    앞에서 指摘했듯, 美軍政은 美軍政의 樹立 直後 ‘建準’과 ‘人工’ 모두를 否認하고 同時에 大韓民國臨時政府度 否認했다. 오로지 美軍政만이 南韓에서 唯一한 政府라고 宣言했다. 이 措置에 對해, 헨더슨은 美軍政이 朝鮮=韓民族의 오른쪽 날개(臨政)와 왼쪽 날개(建準 및 ‘人工’) 모두를 꺾어놓았다고 非難했다. 

    美軍政이 臨政을 否認한 것은 確實히 잘못이었다. 美國은 日帝 敗亡 以前에도 臨政을 하나의 亡命政府로 承認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狀況이 全的으로 바뀐 日帝 敗亡 以後에도 如前히 그러했던 것이다. 萬一 美國이 臨政을 承認하고 臨政을 迅速하게 歸還시켜 적어도 南韓만이라도 ‘統治’하는 政府로 기능하게 했더라면 南韓에서의 混亂은 어느 程度 豫防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뼈대로 삼아 公式的 政府 樹立 또는 建國이 可能했었을 것이다. 

    蘇聯, 臨政을 貶下하다 | 비록 그렇게 했다고 해도, 臨政을 뼈대로 韓半島 全體를 統轄하는 統一政府의 樹立이 수월할 수 있었을까. 結論부터 말해 對答은 否定的인데, 이 물음과 關聯해 當時 蘇聯과 北韓이 取한 態度를 살피기로 하자. 

    蘇聯이 韓半島에 對해 가진 認識은, 日帝의 敗亡을 76日 程度 앞둔 1945年 6月 29日 蘇聯 外務部 極東制2國이 마련한 ‘코리아’라는 報告書 그리고 日帝의 降伏이 눈앞에 닥친 1945年 8月 1日 蘇聯共産黨 中央委員會 情報局 ‘公報’에 揭載된 ‘코리아의 國內外 情勢에 對해’에서 感知된다. 앞의 境遇, 蘇聯은 코리아에 親疏政權이 들어서도록 努力해야 한다는 뜻을 담으면서 美國과 中華民國에 對한 警戒心을 表示했으며, 後者의 境遇 臨政에 對한 反感을 그대로 드러냈다. 臨政의 初代 大統領이던 李承晩 그리고 臨政의 마지막 註釋이던 金九 모두를 ‘反動的’이라고 깎아내리고, 臨政을 ‘장제스 政府의 補助金을 받는 保守的 性向의 勢力’으로 貶下한 것이다. 臨政의 외무부장 趙素昻(趙素昻)에 對해서도 “金九보다는 덜 反動的이지만 親美的이다”라고 論評했다. 

    李承晩과 金九를 비롯한 朝鮮=韓國의 民族指導者들에 對한 蘇聯의 誹謗은 日帝가 敗亡한 直後에도 繼續됐다. 글 두 篇을 살펴보자. 첫째, 모스크바에서 出版된 蘇聯의 國際 問題 專門誌 ‘노보例 브레미야’(새로운 時代·1945年 8月 15日)에 실린 야브로이의 ‘朝鮮, 그 過去와 現在’다. 이 글은 美國에서 李承晩을 돕는 로버트 올리버가 워싱턴에서 出版한 ‘코리아: 잊혀진 나라’(1944)에 對한 書評이다. 여기서 野브로이는 李承晩을 ‘反訴主義者’ ‘反動’ ‘親美主義者’로 罵倒한 데 이어 임정의 主要 指導者들에 對해서도 그렇게 貶下했던 것이다. 

    野브로이의 글은 臨政 指導者들에 對한 誹謗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解放된 朝鮮이 美國과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되고 蘇聯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면서, 더욱 具體的으로, 蘇聯이 占領한 北韓만은 決코 反蘇親美의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 글은 앞으로 朝鮮이 土地改革을 遂行해야 한다는 主張도 提起했다. 히틀러의 獨逸로부터 解放된 유럽國家들에서 遂行되는 方式에 따라 朝鮮에서도 土地改革을 遂行함으로써 朝鮮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勸告한 것인데, 이 勸告는 單純한 勸告가 아니라 蘇聯이 北韓에 嚴重하게 賦課할 課題임은 勿論이었다. 

    둘째, 蘇聯 外務部 極東制2國의 주코프가 作成한 報告書 ‘朝鮮人 政治가 李承晩의 特徵’(1945年 8月 23日)이다. 이 報告書는 “朝鮮人 政治亡命家들 사이에서 李承晩은 가장 反動的인 人物이다. 最近 그는 한 次例도 아니고 여러 次例에 걸쳐 美國에 反소비에트的 聲明을 提出했다”라고 상기시켰다. 

    以上에서 살핀 두 篇의 글은 무엇을 말하는가. 되풀이해 말하지만, 그 글들은 朝鮮에서 反소적인 政治人이 影響力을 갖게 되는 것에 對해 蘇聯이 깊은 警戒心을 지녔음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朝鮮에서 反소적인 政治人이 影響力을 갖게 되는 것은 반드시 막겠다는 蘇聯의 暗默的인 意志가 담겨 있다. 結局 蘇聯은 最小限 自身이 占領한 北朝鮮에서만이라도 反소적인 勢力을 除去하고 親疏的人 政權을 세워야겠다는 뜻을 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親疏政權이 土地改革을 비롯해 社會主義的 措置들을 取해야 한다는 뜻을 아울러 보여주었다. 

    北韓, 臨政을 侮辱하고 貶下하다 | 臨政에 對한 北韓의 態度는 蘇聯의 그것보다 훨씬 侮辱的이었다. 이 事實을 理解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臨政의 歷史的·精神的 基盤인 3·1運動에 對한 當時 北韓 指導者들의 認識을 살피기로 한다. 그들의 認識은, 特히 김일성의 認識은 1946年 3月 1日 發表된 記念辭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3·1運動의 歷史的 意義는 充分히 認定하면서도, 그 運動을 이끌었던 ‘零度層’이 美國 大統領 윌슨의 民族自決主義에 對해 ‘幻想’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懦弱, 無能, 童謠, 無經驗’했기에 群衆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했다고 非難했다. 그는 이어 그들이 부르주아 階級이었음을 상기시킨 뒤 ‘投降 變節 墮落’의 길을 걸었다고 非難했다. 民族指導者 33人에 對해서나 그들이 發表한 獨立宣言書에 對해서도 全혀 言及하지 않았다. 

    3·1運動에 對한 이러한 認識은 그 運動의 直接的 産物인 臨政에 對한 侮辱으로 이어졌다. 當時 北韓에서 朝鮮共産黨을 統轄하던 朝鮮共産黨北部造船分局 宣傳部長 오기섭(吳琪燮)은 1946年 1月 2日 平壤에서 열린 大衆講演會에서 臨政을 ‘大寒臨時政府’라고 한 뒤 ‘大寒臨時政府’는 事實上 別것 아니라고 嘲弄했다. 그는 “‘大寒臨時政府’는 거의 모두 吏曹(李朝) 兩班의 子弟들로써 構成돼 人民의 土臺가 없는 亡命政治家團體에 지나지 않으며, 3·1運動 以後에는 國內와 關係가 없고 朝鮮解放運動과 分離돼 있었다”라고 貶下한 데 이어, 甚至於 “大寒臨時政府는 外交權을 팔아먹은 賣國團體이며, 어떠한 國際 會合에도 參席이 容認된 일이 없고 따라서 參席해 본 일이 없는 幽靈機關이다”라고까지 誹謗했다. 臨政 傘下의 光復軍에 對해서도 “光復軍이라고 해야 174名에 지나지 않는다”고 깎아내렸다. 

    오기섭은 日帝强占期에 박헌영을 支持하면서 共産主義運動에 參與해 13年에 걸쳐 投獄됐던 抗日鬪士였다. 바로 그 事實 때문에 1950年代 中盤 金日成이 박헌영界 共産主義者들을 肅淸할 때 除去됐다. 그러나 그의 臨政否認論이 除去된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 政權은 처음부터 끝까지 臨政을 貶下하고 否認했다. 2019年 文在寅 政府가 3·1運動과 臨政樹立 100周年을 맞아 南과 北이 함께 記念行事를 開催하자고 提議했을 때 全혀 應하지 않은 까닭이 거기에 있다. 

    以上에서 살폈듯, 蘇聯과 北韓 모두 臨政을 徹底히 否認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美國이 臨政을 朝鮮=韓民族의 合法 政府로 認定했다고 해도 蘇聯과 北韓은 그것에 同意하지 않았을 것임은 確實하다.

    論點9
    美軍의 占領 當時 布告文과 蘇聯의 占領 當時 布告文은 어떻게 比較될 수 있을까.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직후 내각 청사 앞에서 소련군 민정사령부의 주요 간부와 북조선노동당의 주요 계파를 대표하는 당 중앙위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1948年 9月 北韓 政權 樹立 直後 內閣 廳舍 앞에서 蘇聯軍 民政司令部의 主要 幹部와 北朝鮮勞動黨의 主要 系派를 代表하는 黨 中央委員들이 記念撮影을 하고 있다. [미디어韓國學 提供]

    大韓民國臨時政府와 조선인민공화국에 對한 蘇聯의 이러한 態度는 蘇聯占領軍이 北韓에 進入한 直後 發表한 布告文의 精神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論點을 일으킨다. 여기서 우리는 于先 蘇聯占領軍의 첫 番째 布告文을 再照明하게 된다. 

    蘇聯의 布告文 | 北韓 東北部로부터 攻擊해 들어오면서, 蘇聯軍은 北韓을 占領할 이반 치스齒牙코프 大將의 이름으로 8月 15日에 平壤과 元山에서 우리말로 쓰인 ‘布告文’을 發表했다. ‘치스코프 大將의 布告文’이라는 標題의 이 布告文은 北韓의 많은 곳에서 傳單 形態로 撒布됐다. 

    이 布告文이 發表된 날짜가 正確히 언제였는지에 對해, 그사이 學界에서 論難이 뒤따랐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 布告文을 揭載한 新聞과 年鑑에 날짜가 全혀 標示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硏究者는 8月 24日에 發表됐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蘇聯의 政府記錄保存所에서 發掘된 資料에 根據해 蘇聯科學院 東方學硏究所가 1981年에 펴낸 ‘蘇聯과 北韓과의 關係, 1945~1980’(大韓民國 國土統一院 調査硏究室 飜譯, 1988)은 그 날짜를 8月 15日로 明記했다. 

    길지 않은 이 布告文은 “朝鮮人民들에게!”로 始作해 곧바로 “朝鮮人民들이여! 쏘련 軍隊와 同盟國 軍隊들은 朝鮮에서 日本掠奪者들을 救出해냈다. 朝鮮은 自由國이 되었다”로 이어졌으며 “朝鮮사람들이여 記憶하라! 幸福은 當身들의 手中에 있다. 當身들은 自由와 獨立을 찾았다. 모든 것이 죄다 當身들에게 달렸다”라는 文句로 이어지다가 “解放된 朝鮮人民 만세!”로 끝을 맺었다. 中間中間에 語塞하기도 하고 甚至於 誘致하기도 한 表現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全般的으로 朝鮮人民들을 激勵하는 흐름을 維持했으며, 읽는 이에 따라서는 感動的인 雰圍氣를 보여주었다. 

    確實히 이 布告文에 나타난 精神은 우리가 바로 앞에서 살핀 蘇聯의 一連의 文書 또는 論說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北韓의 進路를 親疏反美의 方向으로 이끌어가겠다는 言說은 “모든 것이 죄다 當身들에게 달렸다”는 句節이 헛口號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일깨워주었다. 

    美國의 布告文 | 蘇聯占領軍司令官의 布告文과는 對照的으로 9月 1日과 9日 發表된 美國의 南韓占領司令官 하지 中章의 ‘布告文’ 第1號와 第2號 그리고 9月 9日 南韓 上空에서 撒布된 太平洋美陸軍總司令官 맥아더 元首의 ‘布告文’ 第1號와 第2號는 南韓을 ‘解放된 地域’이 아니라 ‘占領된 地域’으로 規定함과 아울러 占領統治에 抵抗하는 사람들에게 ‘軍法會議’를 거쳐 ‘死刑’을 비롯한 法的 處罰을 加하겠다는 따위의 脅迫的이면서도 殺伐한 語彙들로 채웠다. 바로 이 事實 때문에, 이 時期에 關한 硏究者들 사이에서는 또 하나의 論點이 提起됐다. 그것은 “蘇聯은 北韓에서 朝鮮人의 自律權을 認定하고자 했음에 反해 美國은 南韓에서 朝鮮人의 自律權을 認定하지 않고 强壓統治를 하고자 했다”는 問題 提起를 둘러싼 論爭이 벌어진 것이다. 

    이 點은 이미 그때 南韓의 指導者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北韓의 指導者들 사이에서도 자주 提起됐다. 例컨대, 김일성은 平壤에서 열린 北朝鮮勞動黨 第2次 大會의 第2日(1948年 3月 28日) 會議에서 行한 ‘北朝鮮勞動黨 中央委員會 事業決算報告’에서 치스齒牙코프의 布告文과 맥아더의 布告文을 對備하면서, 蘇聯은 “略小民族의 獨立과 自由를 尊重하며 擁護하고 (있음에 反해…) 美軍은 略小民族의 自主權을 侵犯하며 그들을 다시 奴隸化하려고 試圖하고 있다”라고 主張한 것이다. 

    蘇聯의 布告文과 美國의 布告文 比較 | 下肢의 布告文과 맥아더의 布告文은 確實히 適切하지 못한 語彙들로 構成됐으며 韓人들을 憤怒하게 만들기에 充分했다. 그런데 美國 側 布告文과 蘇聯 側 布告文을 比較함에 있어서 그것들이 發表된 時點을 注目할 必要가 있다. 

    치스齒牙코프의 布告文은, 앞에서 指摘했듯 1945年 8月 15日 發表됐다. 이 時點에서 치스齒牙코프가 果然 코리아가 北緯 38度線을 境界로 分割된다는 事實을, 그리하여 蘇聯이 北緯 38度線 以北의 코리아를 占領統治하게 된다는 事實을 確實하게 알고 있었을까. 스탈린이 트루먼으로부터 이 事實을 通告받은 時點은 蘇聯의 現地時間으로 8月 15日 午後 또는 8月 15~16日 深夜였을 蓋然性이 높은 點을 考慮할 때, 치스齒牙코프의 布告文은 自身의 軍隊는 다만 日本軍을 敗退시키기 위해 코리아의 北部에서 軍事作戰을 遂行하며 그 地域을 暫時 占領한다는 目標를 優先的으로 念頭에 두었을 蓋然性이 높다. 

    그러한 目標 아래, 蘇聯軍은 北韓 民衆을 激勵하고 自身에 對한 北韓 民衆의 自發的 支持를 높이는 쪽으로, 다시 말하면, 心理戰의 次元에서 布告文을 作成했던 것 같다. 이러한 脈絡에서, 이 時期를 깊이 硏究한 이완범(李完範) 敎授는 “(李) 布告는 自身들이 占領軍이라는 事實을 僞裝하기 위해 高度의 奸巧한 搜査(修辭)를 驅使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論評했다. 

    이에 비해, 下肢의 布告文과 맥아더의 布告文은 코리아를 北緯 38度線을 境界로 分割해 占領한다는 決定과 合意가 明白하게 成立됐고 그러한 뜻이 聯合國 最高司令官의 ‘一般命令’ 第1號로 示達된 以後에 發表됐다. 따라서 美軍 側은 占領統治의 法的 · 制度的 基礎가 되는 이 ‘一般命令’ 第1號의 틀 안에서 一連의 布告文을 作成했을 것이다. 

    實際로 蘇聯占領軍度 下肢의 布告文과 맥아더의 布告文이 發表된 그 時期에, 自身의 最初의 布告文 趣旨와는 다르게 北韓을 自身의 ‘占領된 地域’으로 다루고 있었다. 우리가 다음 回에서 보게 되듯, 이 時期에 蘇聯은 코리아에 信託統治를 實施하는 方案을 構想했으며, 釜山-鎭海·濟州島·仁川 等을 自身의 管轄 아래 두는 方案을 構想했고, 北韓에 소비에트體制를 移植하는 方案을 硏究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當身들의 手中에 있다”가 아니라, “이제는 모든 것이 우리들 蘇聯의 手中에 있다”였던 것이다.

    論點10
    美軍政廳 樹立 直後 美軍政廳은 왜 韓人의 自尊心을 傷하게 하는 措置를 取했던가.

    美軍은 南韓에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思慮 깊지 못하게 行動했다. 무엇보다도 美軍은 日本 警察이 칼을 찬 채 堵列한 狀態에서 仁川에 上陸했으며 日本 警察은 美軍을 歡迎하기 위해 나온 韓人 2名을 ‘秩序維持’라는 名分 아래 射殺했기 때문에, 韓人들은 緊張하고 있었다. 美軍이 서울로 들어올 때도 韓人들이 미워하는 日本軍으로 하여금 年度에 堵列해 있게 했다. 

    잘못은 繼續됐다. 하지는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韓人을 侮辱하는 一連의 發言들을 했을 뿐만 아니라, 38度線에 對해 疑訝해하는 韓人들에게 “나는 모른다. 本國 政府의 國務部에 물어보라”라는 式으로 無誠意하게 對答했다. 

    그것보다도 더욱 深刻하게 그는 總督府의 日本人 및 朝鮮人 官吏들이 軍政廳에서 勤務하도록 許容했다. 이런 措置에 對해 韓人들이 抗議했는데도, 美軍政廳 軍政長官 아치볼드 아널드 所長은 9月 14日 朝鮮總督府의 局長級 以上 高位官吏들만 解任했을 뿐 日帝時代의 警察機構는 앞으로도 ‘存續’된다는 趣旨의 聲明을 發表했다. 이것은 南韓 사람들의 큰 反撥을 불러일으켰다. 그 結果, 9月 18日 트루먼 大統領이 直接 그 以下級 日本人 官吏들 全員의 解任을 發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널드의 聲明은 取消되지 않았으며 韓人의 憎惡 對象인 日章旗(日章旗)는 10月 10日에 가서야 官廳에서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美軍政은 日帝時代의 警察器具들과 警察官들을 中心으로 10月 21日 自身의 傘下에 警務局을 創設했다. 警務局은 1946年 4月에 警務部로 昇格된다. 

    그러면 美軍政廳은 왜 이러한 措置를 取했던가. 그 解答은 當時 美國 트루먼 政府의 아시아 政策에서 찾게 된다. 트루먼 政府는 樞軸國이 敗亡한 時點에서 앞으로 美國의 敵(敵)은 蘇聯과 共産主義라고 判斷하고, 東아시아에서 蘇聯과 共産主義에 맞서기 위해서는 지난날에는 敵國이었다고 해도 日本을 ‘民主化’시키고 ‘復興’시켜 自身의 同盟國으로 키워야 한다는 政策 方向을 構想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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