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强力한 海洋大國 아테네 만든 三段路線 破壞力|新東亞

强力한 海洋大國 아테네 만든 三段路線 破壞力

[海戰의 勝負手 軍艦③] ‘디에크플루스’ 戰術과 놀라운 速度로 살라미스海戰 大勝

  • 정재민 防衛事業廳 陷穽事業팀長(國際法 博士), 前判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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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0-09-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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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부신 文明을 일군 祕訣, 民主主義

    • 三段路線은 왜 빨랐는가

    • 뱃머리 아래 붙여놓은 衝突하는 뿔

    • 海洋强國 넘어 帝國으로!

    그리스 삼단노선 모형. [위키피디아]

    그리스 三段路線 模型. [위키피디아]

    古代 그리스는 歷史上 前無後無한 指摘·文化的 遺産을 남겼다. 特히 메소포타미아 地方이나 나일江 流域과 같이 旣存 文明의 發祥地로부터 傳受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에서 처음 만들어낸 것이 셀 수 없이 많다는 事實이 놀랍다. 英國 哲學者 버틀란트 러셀은 名著 ‘서양철학사’에서 모든 歷史를 통틀어 그리스 文明의 突然한 發生만큼 놀랍고 說明하기 어려운 일은 없다고 했다. 

    그리스의 탈레스가 始作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哲學을 高度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數學科 幾何學도 그리스 時代에 飛躍的으로 發展했다고 한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人들度 數學科 幾何學을 했지만 그리스 時代에 비하면 初級 水準이었다고 한다. 當時 科學은 哲學의 一部였으므로 그리스가 始作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탈레스는 이미 天體의 運動을 硏究해 紀元前 585年 日蝕을 豫測했다.

    民主主義 國家 아테네는 戰爭도 잘했다

    기원전 466년 델로스 동맹과 페르시아제국의 에우리메돈 전투. [GettyImage]

    紀元前 466年 델로스 同盟과 페르시아帝國의 에우리메돈 戰鬪. [GettyImage]

    年代記에 따른 ‘歷史’ 技術 方式을 처음 始作한 것도 그리스人이다. 이 글이 2500年 前 벌어진 살라미스海戰에 對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헤로도토스가 記錄한 ‘歷史’ 德分이다. 그리스인들은 繪畫, 彫刻, 戱曲 等 藝術과 文學에서도 他의 追從을 不許하는 成果를 남겼다. 그 中心은 그리스 中에서도 아테네였다. 當時 아테네의 라이벌로서 强力한 軍事 權力으로 市民을 統制하던 스파르타가 이렇다 할 文化遺産을 남기지 못한 것과는 對照的이다. 

    그렇다면 人口 10餘萬 名의 작은 都市局 아테네가 어떻게 그토록 눈부신 文明을 일궈낼 수 있었을까. 이 質問에 對해 歷史學者들이 찾은 對答은 民主主義다. 아테네는 獨裁者로 突變하곤 했던 僭主를 몰아내고, 平民 사이에서 抽籤으로 뽑힌 議員들이 1, 2年 동안 돌아가면서 國情을 다스리도록 하며, 獨裁者가 될 餘地가 있는 사람은 陶瓷器의 조각에 이름을 적어 10年間 아테네 밖으로 쫓아내는(도편추방제) 等 當時로서는 獨特한 시스템을 構築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國家가 스파르타의 軍國主義가 아니라 아테네의 民主主義 體制를 理想的인 모델로 삼고 이를 具現하려고 숱한 땀과 피를 흘려온 것도 이러한 政治 시스템이 個個人의 多樣性을 尊重함으로써 그토록 燦爛한 文明을 일구어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놀라운 點은 戰爭도 잘했다는 것이다. 國家의 面的으로나 人口 水路나 數百 倍 큰 當代 最强國 페르시아의 侵攻을 세 次例나 막아냈다. 只今으로 치면 都市國家 싱가포르가 美國의 總攻擊을 連거푸 막아낸 것과 같다. 얼핏 생각하면, 두 國家의 規模가 같았다고 치더라도 國家 次元에서 嚴格하고 一絲不亂한 秩序를 構築하고 프로페셔널 軍人을 養成해 온 前提 君主國家의 軍隊가 平素에는 다른 일을 하던 一般 市民들이 戰爭을 奇貨로 參戰해 結成된 民主主義 國家의 軍隊를 이기는 것이 當然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아테네는 페르시아 大軍을 相對로 마라톤 戰鬪나 살라미스海戰에서 연이어 大勝을 거뒀다. 헤겔은 ‘歷史 哲學’에서 페르시아에 對한 그리스의 勝利를 이렇게 評價했다. 

    “한便에는 한 名의 君主 아래 結集된 東邦의 前提 體制가 있었고, 反對便에는 規模는 작지만 자유로운 個性이 넘치는 獨立國家들이 戰鬪 大型으로 맞섰다. 歷史上 精神의 힘이 物質의 羊보다 優越하다는 事實이 그토록 明白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디에크플루스’ 춤을 춘 ‘발레리나’ 三段路線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이긴 祕訣로 民主主義와 같은 社會體制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直接的 原因으로 아테네가 活用한 軍事 裝備와 戰術을 빼놓을 수가 없다. 마라톤 戰鬪에서는 靑銅 투구와 甲옷으로 重武裝한 步兵들이 고슴도치처럼 빽빽하게 密集한 大型을 짰다.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步兵들이 긴 槍을 위쪽과 前方으로 겨눈 팔랑크스(Phalanx) 大型이 그것이다. 살라미스 海戰에서는 빠른 機動이 可能한 三段路線을 活用해 ‘디에크플루스(Diekplus)’나 ‘페리플루스(Periplus)’ 같은 苦難도 戰術을 펼쳤다. 

    古代 海戰은 兩側의 艦船들이 서로 마주 보고 橫列로 堵列해 代置하는 것으로 始作했다. 戰鬪가 開始되면 서로 突進해 衝突한 다음 배 위에 탄 軍士들이 武器를 들고 積善으로 亂入해 白兵戰을 펼쳤다. 以後 衝角으로 敵船을 들이받는 戰術이 流行했다. 衝角은 衝突하는 뿔이라는 뜻으로 뱃머리 아래 붙여놓은 靑銅과 같은 단단한 金屬으로 만들어진 部分이다. 初期의 衝角은 뾰족했으나 이것이 敵船을 들이받고 나면 잘 빠지지 않는다는 問題가 提起돼 後期의 衝角은 뭉뚝한 形態로 變形됐다. 

    아테네 海軍도 基本的으로 衝角으로 敵船을 들이받는 戰術을 펼쳤다. 다만 我軍 艦船의 뱃머리로 敵船의 뱃머리를 마주 보고 들이받는 것은 두 倍가 모두 破壞된다는 點에서 效果的 戰略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敵船의 後尾나 側面을 노렸다. 海戰을 유리하게 가져가려면 敵船을 攻擊할 時間을 最大限으로 確保하는 한便, 敵船이 反擊할 時間을 最小限으로 줄여야 한다. 그러려면 敵船의 後尾나 側面을 攻掠하는 것이 效果的이다. 이를 위한 아테네 海軍의 두 가지 戰術이 바로 디에크플루스와 페리플루스였다. 

    페리플루스는 我軍 陣營의 左右 끝部分에 있는 艦船들이 相對 陣營 左右 끝의 바깥쪽으로 돌아들어 가서 敵船의 後尾나 側面을 衝角으로 들이받는 것이다. 디에크플루스는 여러 隻의 我軍 艦船이 縱隊로 줄을 지어 敵船의 隊列을 正面으로 突破하다가 다시 180度 돌아 나오면서 敵船의 後尾를 攻掠하는 것이다. 이때 我軍의 艦船들이 積善과 敵船 사이의 空間을 파고들며 突破하는 過程에서 敵船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노들을 부러뜨리기도 한다. 이 過程에서 敵船의 櫓잡이들은 잡고 있던 櫓로 인해 打擊을 받거나 부러진 櫓에 몸이 찔리게 된다. 盧가 破壞된 賊船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데 이때 뒤따라오던 艦船이나 180度 回轉한 艦船이 衝角으로 들이받아 擊沈시킨다. 

    디에크플루스는 페리플루스보다 훨씬 難易度가 높고 絢爛한 技術을 要求한다는 點에서 ‘살라미스海戰’의 著者 베리 스트라우스는 “발레만큼 어렵고 複雜한 技術을 요하는 죽음의 춤”이라고 表現했다. 積善을 돌아들어 가거나, 敵陣 깊숙이 파고들어 갔다가 재빨리 빠져나오거나, 衝角으로 들이받기 위해서는 我軍의 艦船이 積善보다 훨씬 더 빨라야 한다. 이렇게 빠른 速力을 實現한 것이 바로 三段路線이다. 

    三段路線은 빨랐다. 苦戰 記錄에 따르면 巡航速力이 6~8노트(1노트는 時速 1853m)였다고 한다. 투키디데스는 三段路線이 하루 300㎞를 航海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陷穽 專門家들은 三段路線이 旣存의 技術的 限界를 여러 側面에서 뛰어넘은 革新的 艦船, 造船術의 一大 革命이라고 評價한다. 三段路線은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 있었을까. 旣存에 쓰던 1單路線인 펜테콘토로스(櫓잡이 50名이 탄다는 意味로 ‘五十路線’이라고도 한다)와는 무엇이 다르던 것일까.

    三段路線은 왜 그리 빨랐던가

    배가 빨리 가려면 推進力은 크고 抵抗은 작아야 한다. 오늘날에도 배의 速力을 높이려고 推進力이 큰 엔진을 使用하면서도 배의 線形, 救助, 吃水(물에 잠긴 船體의 깊이), 素材 等 여러 側面에서 抵抗을 줄이는 努力을 한다. 路線時代에 엔진에 該當하는 것은 바로 櫓잡이들의 힘이다. 따라서 推進力을 높이는 方法은 單純하다. 櫓잡이의 數를 늘리면 되는 것이다. 問題는 抵抗을 줄이는 方法이다. 

    오늘날 朝鮮工學에서 言及되는 抵抗의 種類는 다양하다. 배가 前進할 때 船體 周邊 水面이 波動을 形成하면서 생겨나는 抵抗(造波抵抗), 波濤가 밀려와 船體에 부서지면서 생기는 抵抗(碎波抵抗), 睡眠 船體 部分이 空氣로부터 받는 抵抗(空氣抵抗), 물의 粘性으로 인해 생기는 抵抗(粘性抵抗), 操舵手를 直線 方向으로 維持하면서 생기는 抵抗(操舵抵抗) 等이 있다. 路線과 같은 比較的 느린 배의 速力에 가장 큰 影響을 미치는 抵抗은 摩擦抵抗이다. 摩擦抵抗은 船體가 前進할 때 물속에 잠긴 部分이 粘性을 띠는 물과 附着됨으로 인해 妨害받는 것을 말한다(전신 水泳服은 이를 줄이는 方向으로 設計된다). 

    摩擦抵抗은 물에 잠긴 船體의 表面的이 클수록 커진다. 旣存의 배에 櫓잡이를 더 많이 태우려면 1段路線의 境遇 배가 앞뒤로 더 길어져야 하는데 이 境遇 船體가 물속에 잠기는 部分의 表面的이 커지기 때문에 그만큼 摩擦抵抗度 커진다. 1段路線 위로 二層住宅처럼 櫓잡이들이 앉을 空間을 한 層 더 만들어 놓은 2段路線의 境遇에도 船體가 무거워지는 만큼 물속에 잠기는 部分이 많아지므로 그만큼 摩擦抵抗度 커진다. 要컨대 1單路線이든, 2單路線이든 櫓잡이가 늘어나는 만큼 摩擦抵抗이 커지기에 期待만큼 速力이 빨라지지 않는다. 

    反面 3段路線은 하나의 空間에서 3段의 櫓잡이를 모두 共存하되, 각단의 櫓잡이들이 다른 段의 櫓잡이들과 上下, 前後, 左右의 側面에서 나란히 붙지 않도록 지그재그로 立體的으로 配置한 것이다. 櫓를 저을 때도 3段의 櫓잡이들이 各其 다른 信號에 따라 櫓를 젓도록 함으로써 盧끼리의 衝突과 肥效率을 回避한다. 이런 方式으로 推進力을 3倍 確保하면서도 摩擦抵抗은 別로 키우지 않기 때문에 旣存의 배보다 훨씬 더 빨랐다. 三段路線의 革新的 面貌가 드러나는 點이 바로 이 地點이다. 

    三段路線은 乾燥도 빨랐다. 테미스토클레스가 海軍을 創設하기로 한 것이 紀元前 483年인데 살라미스海戰이 480年 勃發했다. 3年 안에 當代 最新 艦船 200餘 隻을 만든 것이다. 오늘날 學者들의 分析에 따르면 當時 三段路線 한 隻을 製作하는 데 6000 Man-Date라는 勞動力이 들어갔을 것으로 推定한다. Man-Date는 한 사람이 하루 동안 일하는 程度의 勞動力을 말한다(실무에서는 ‘攻守’라고 稱한다). 三段路線 한 隻을 만드는 데 6000 攻守가 必要하다는 것은 한 사람이 6000日 동안 일해야 三段路線 한 隻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算術的으로는 20名이 일하면 1年 만에 한 隻을 만들 수 있으며 2000名이 1年 동안 일하면 100隻을 만들 수 있다. 2年이면 200尺이다.

    때마침 發見한 은광에서 費用 調達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한 후 월계관을 쓰고 있다. [GettyImage]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海戰에서 勝利한 後 月桂冠을 쓰고 있다. [GettyImage]

    그러나 實際는 이보다 더 많은 人力 或은 時間이 必要했을 것이다. 艦船 建造는 野外에서 大規模로 이뤄지는 工事이기에 오늘날에도 비나 눈이 많이 오거나 그 밖에 無數한 突發 狀況으로 作業이 멈춰 설 때가 不知其數다. 게다가 위 6000 空輸는 設計공수를 除外한 것이다. 오늘날 軍艦의 공수를 論할 때는 크게 設計空輸와 乾燥攻守를 나눠 이야기한다. 設計가 完成된 뒤에 그에 따라 建造가 이뤄진다. 처음 만드는 艦艇의 境遇에는 設計攻守가 乾燥攻守의 3分의1 以上을 차지한다. 3段路線은 最新 艦艇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狀況이었기에 設計하는 데 相當히 오랜 時間이 걸렸을 것이다. 

    軍艦 만드는 일을 管理하는 나로서는 그리스 海軍이 數的 劣勢에도 不拘하고 페르시아 海軍을 이긴 것보다 3年 안에 最新 艦船 200隻을 만들었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軍艦을 硏究·開發하는 데 10年 以上 걸리는 境遇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軍艦 建造에 그렇게 오랜 時間이 걸리는 까닭은 透明性을 確保하고 各 機關과 專門家들의 見解를 聚合하고 反映하는 節次가 無數히 많기 때문이다. 

    아테네人들은 몇 隻의 배가 必要하니 만들겠다는 決心만 하면 足할 뿐 그 計劃을 國會, 企劃財政部, 國防部, 合同參謀本部, 海軍 等을 통해 審査나 承認을 받을 必要도 없었을 것이다. 해마다 豫算의 決算을 國會나 企劃財政部로부터 심사받을 必要도 없고, 事業妥當性調査나 所要檢證을 받을 必要도 없었을 것이다. 造船所를 選定하기 위해 複雜한 競爭 入札 節次를 거칠 必要도 없었을 것이다. 別途로 費用分析이나 原價檢證을 받을 必要도 없었을 것이다. 都合 2~3年씩 걸리는 試驗評價와 試運轉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訴訟·搜査·感謝·國會·言論의 指摘에 對應할 必要도, 수많은 行政 文書를 만들 必要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體制가 나쁘고 아테네 體制가 더 좋다는 뜻은 아니다. 元來 民主的 方式은 非效率的이고 獨裁的 方式은 效率的이다. 後者가 腐敗하기 쉬울 뿐이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 海軍을 처음 創設하면서 200餘 隻의 艦船을 最新銳 三段路線으로 乾燥한 것은 어느 작은 나라가 空軍을 처음 創設하면서 主力 戰鬪機를 最新銳 스텔스機 F-35로 장만한 것에 比肩할 만하다. F-35街 비싸듯이 最新 技術의 集約體人 三段路線은 비싸다. 그런데 마침 그리스에 銀鑛이 發見돼 돈 問題가 相當 部分 解決됐다. 그는 運도 참 좋은 사람이다. 

    三段路線은 戰場에서 非常한 戰鬪力을 發揮했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의 힘을 하나로 結集하는 데도 決定的 役割을 했다. 三段路線은 아테네 市民의 最大 關心事 中 하나였다. 市民들은 自身들이 그 費用을 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實際로 船舶 製作 費用은 아테네가 國家 次元에서 댔지만 三段路線의 維持費는 船長이 알아서 解決했다. 그래서 船長은 富裕한 사람이 맡는 境遇가 많았다. 다만 櫓잡이는 貧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될 수 있었다. 살라미스海戰 때도 아테네 市民 數萬 名이 三段路線과 五十路線 안에서 櫓를 저었다. 이 過程에서 個性이 剛한 아테네人들이 社會化되고 하나로 뭉치게 됐다. 

    살라미스海戰 勝利 以後 아테네는 紀元前 477年 150餘 個 그리스 都市國家를 이끌고 ‘델로스 同盟’을 結成했다. 델로스는 아폴론 神殿이 있는 에게海(海)에 있는 섬 이름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페르시아에 朝貢을 바치던 國家도 多數 包含돼 있었다. 델로스 同盟이 466年 에右메리돈 戰鬪에서 地中海에 殘存하던 페르시아軍을 完全히 꺾어버림으로써 아테네는 地中海의 霸權을 거머쥐고 强力한 海洋國家로 跳躍한다.

    三段路線 타고 海洋强國 넘어 帝國으로!

    海洋强國 地位를 維持하고자 더 많은 三段路線이 必要하게 된 아테네는 同盟國에 漸漸 더 많은 費用을 朝貢처럼 要求하기 始作했다. 旣存에 페르시아에 朝貢을 바치느라 힘들어하던 國家들은 이제 아테네에 朝貢을 바치느라 고달픔을 느꼈다. 아테네는 漸漸 페르시아帝國을 닮아갔다. 아테네 政治人들은 同盟國들을 ‘被支配國’이라고 부르기 始作했다. 아테네의 上流層은 페르시아風 衣裳과 藝術을 愛護했다. 同盟國들이 아테네에 反旗를 들면 아테네의 軍人들이 艦隊를 이끌고 가서, 페르시아軍이 아테네人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武力으로 鎭壓한 다음 叛亂者들을 處刑하거나 奴隸로 隸屬시켰다. 世界 最初의 民主主義를 만든 아테네가 不過 두 世代 만에 非民主的 帝國이 됐다. 

    그사이 수많은 그리스 사람이 페르시아로 亡命했다. 그 속에는 陶片追放制로 追放된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었다. 李舜臣이 壬辰倭亂 以後 日本으로 亡命한 것과 같다. 獨裁者가 될 사람의 이름을 적으라고 나눠준 陶片에는 이미 처음부터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約 70年 뒤 同盟國들이 하나둘 아테네를 떠나면서 델로스 同盟은 瓦解됐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戰爭에서 스파르타에 정복당해 그동안 建設한 海軍 艦隊를 내주고 滅亡했다. 오히려 살라미스에서 眞 페르시아가 더 오래 存續했다.



    정재민 | 前職 判事이자 現 行政府 公務員, 國際法 博士, ‘사는 듯 사는 삶’에 關心이 많은 作家, 쓴 冊으로는 에세이 ‘只今부터 裁判을 始作하겠습니다’ ‘혼밥判事’ 小說 ‘보헤미안랩소디’(世界文學賞 大賞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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