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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作의 祕密] 昌德宮, 華麗한 샹들리에의 슬픈 歷史|新東亞

[名作의 祕密] 昌德宮, 華麗한 샹들리에의 슬픈 歷史

  • 이광표 西原大 敎養大學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1-02-0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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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西洋 樣式 導入해 改築한 昌德宮

    • 日帝의 個軸으로 權威 잃고 應接室 變貌 仁政殿

    • 自動車, 샹들리에 等 高價品 宮에 들어왔지만…

    • 裝飾品과 함께 구경거리 돼버린 王室과 王宮

    ‘달빛기행’은 창덕궁 야간개방 행사로 2010년부터 매해 이어지고 있다. [동아DB]

    ‘달빛紀行’은 昌德宮 夜間開放 行事로 2010年부터 每해 이어지고 있다. [東亞DB]

    유네스코 世界遺産 昌德宮에서 가장 크고 雄壯한 建物은 斷然 仁政殿(仁政殿). 景福宮으로 치면 勤政殿(勤政殿)이다. 昌德宮 人情錢의 正面 가운데 칸 窓살門은 大體로 열려 있다. 가끔씩 內部로 들어가 觀覽할 수도 있다. 仁政殿 內部를 들여다보면 임금이 앉는 御座(御座)가 있고 그 뒤로 ‘日月오봉甁(日月五峰屛)’이 놓여 있다. 御座 위로는 華麗한 裝飾의 닫집(寶蓋·寶蓋)李 펼쳐진다. 그런데 昌德宮 仁政殿엔 景福宮 勤政殿에서 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天障에 주렁주렁 매달린 샹들리에다. 朝鮮時代 韓屋 宮闕에 西洋式 電燈이라니…. 

    人情錢에 샹들리에가 매달리게 된 것은 1909年 봄. 純種 때다. 朝鮮時代 宮闕에 샹들리에가 걸려 있는 風景은 예나 只今이나 異國的이고 神奇하다. 어찌 보면 浪漫的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좀 달라진다. 무언가 쓸쓸함이 몰려온다.

    個軸으로 西洋 文物 들여온 昌德宮

    朝鮮의 마지막 王 그러니까 大韓帝國의 마지막 皇帝 純宗(1874~1926). 그는 皇帝로 卽位하고 4個月 지난 1907年 11月 德壽宮에서 昌德宮으로 居處를 옮겼다. 이어(移御)를 한 달 앞둔 1907年 10月, 純宗은 昌德宮의 修理를 命했다. 高宗이 昌德宮을 떠난 以後 줄곧 放置돼 왔기 때문에 여기저기 손을 볼 必要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08年 大大的인 工事가 進行됐다. 昌德宮뿐만 아니라 昌慶宮의 改造 作業도 함께 이뤄졌다. 

    順從이 命했다고 하지만 實際 作業은 日帝가 맡았다. 當時 宮內府(宮內府)의 日本人 勢力이 이 工事를 主導했다. 背後는 當然히 統監府(統監府)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이들은 “宮廷의 尊嚴을 維持하여 國王의 恩惠를 百姓들에게 보여주며 順從의 외로움을 달래고 順從의 餘暇 生活을 위해서”라는 名分을 내걸었다. 그리하여 宮殿 곳곳에 近代式 設備를 導入하고 建物 室內를 西洋式으로 고쳤다. 이에 그치지 않고 昌慶宮엔 博物館, 植物園, 動物園까지 만들었다. 昌德宮의 改築 工事는 1909年 봄 마무리됐다. 

    20世紀 初 大韓帝國의 宮闕에는 다양한 西洋 要素가 導入됐다. 德壽宮 石造殿(石造殿)이나 정관헌(靜觀軒) 같은 西洋 建築物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傳統 建築物 인테리어를 西洋式으로 꾸미고 西洋式 家具를 配置하는 式이었다. 仁政殿度 크게 바뀌었다. 人情錢을 감싸고 있는 行脚(行閣)李 바뀌었다. 旣存의 行脚을 撤去하고 前과 다른 模樣의 行脚을 造成한 것이다. 勿論 그 用途도 바뀌었으며 撞球臺, 커튼박스, 暖爐, 카펫 等 行脚 內部 또한 西洋式 設備가 들어섰다.



    仁政殿, 儀禮 空間에서 應接室로 轉落

    인정전 마루는 개축을 거치며 전돌(벽돌의 일종)에서 일본식 나무마루로 바뀌었다. [동아DB]

    仁政殿 마루는 改築을 거치며 前돌(甓돌의 一種)에서 日本式 나무마루로 바뀌었다. [東亞DB]

    仁政殿 建物 內部도 바뀌었다. 王의 御座 뒤에 세워놓는, 朝鮮의 象徵이자 王의 象徵인 ‘日月오봉甁’을 ‘鳳凰도(鳳凰圖)’로 바꾸었다. 그 옆에 日本에서 製作한 正體不明의 揮帳을 걸어두었다. 또 傳統 御座를 치우고 西洋式 椅子를 配置했다. 朝鮮王室의 權威를 退色시키고자 한 것이다. 

    日帝는 人情錢의 바닥을 日本式 나무마루로 바꾸었다. 朝鮮時代 宮闕 停電의 바닥은 늘 甓돌의 一種인 ‘前돌’이었다. 朝鮮時代에는 停電 建物 正面의 窓戶(窓戶)를 完全 開放해 重要한 儀禮를 擧行했다. 窓戶를 활짝 열어젖혀 內部와 外部를 連結하고 儀禮 空間으로 活用했다. 建物의 內部와 外部가 連結되면서 仁政殿 建物은 莊重함을 演出했다. 前돌 바닥은 이러한 用途에 적합한 構造였다. 

    그런데 內部 바닥을 나무마루로 바꾸고 前面의 窓戶를 한가운데 칸만 開放하도록 고쳤다. 가운데칸 窓戶를 除外하고 그 左右의 窓戶는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琉璃窓을 덧댐으로써 활짝 열 수 없게 만들었다. 이로 因해 仁政殿 正面은 모두 開放할 수 없게 됐고 結局 人情錢의 內部와 外部는 斷絶되고 말았다. 

    언뜻 보면 이를 單純한 機能 變化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昌德宮 停電으로서의 役割을 考慮한다면 매우 深刻한 問題다. 日帝는 改築을 통해 人情錢에서 朝鮮(大韓帝國)의 儀禮를 치르지 못하도록 했다. 人情錢은 本質的 機能 가운데 하나를 잃은 셈이다. 結局 人情錢은 單純한 接見室 兼 宴會 場所로 轉落하게 됐다. 純宗 夫婦가 이곳에서 맞이하는 사람은 主로 痛感이거나 總督,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온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1909年 昌德宮의 現實이었다.

    景福宮 헐어 만든 資材로 昌德宮 改築

    왕의 집무실인 창덕궁 희정당 샹들리에는 3개씩 6세트가 매달려있다. [동아DB]

    王의 執務室인 昌德宮 熙政堂 샹들리에는 3個씩 6세트가 매달려있다. [東亞DB]

    內戰(內殿) 空間인 熙政堂(熙政堂)과 大造殿(大造殿)도 바뀌어갔다. 희정당은 王의 居處이자 執務 空間이었고 大造殿은 王과 王妃의 沈澱이었다. 1910年 前後, 大造殿 西쪽에 王의 浴室人 어욕실(御浴室)이 생겼고 水洗式 便所 等이 들어섰다. 그 後 1917年 11月 熙政堂과 大造殿 一圓에 火災가 發生해 建物들이 모두 불타 버렸다. 順從과 순정효황후는 樂善齋(樂善齋)로 居處를 옮겼고 1920年에 熙政堂과 大造殿을 再建했다. 徹底하게 日本人의 뜻에 따라 設計와 工事가 進行됐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창덕궁 대조전에는 6개의 등이 걸려있는 샹들리에가 매달려있다. [동아DB]

    王과 王妃의 寢殿인 昌德宮 大造殿에는 6個의 等이 걸려있는 샹들리에가 매달려있다. [東亞DB]

    再建 事業은 出發부터 어이가 없었다. 景福宮의 殿閣을 헐어 그 不在를 使用했기 때문이다. 景福宮 康寧殿(康寧殿)을 헐어 그 不在로 熙政堂을 다시 지었다. 景福宮 交泰殿(交泰殿)의 不在로 大造殿을, 景福宮 만경전(萬慶殿)의 不在로 經訓角(景薰閣)을 再建했다. 熙政堂과 大造殿은 큰 變化를 겪게 됐다. 두 建物의 外觀은 傳統 建築이었지만 建物 內部는 完全히 새로운 形態로 바뀌었다.

    于先, 熙政堂 進入部에 突出型 玄關을 지었다. 車輛이 進出入하는 空間으로, 一種의 캐노피 같은 形態이다. 日本 메이지宮殿의 玄關과 비슷한 模樣이다. 1920年代 初 英親王 夫婦가 乘用車를 타고 희정당에 到着하는 모습이 담긴 寫眞이 이 突出 玄關의 用途를 明確히 보여준다. 純宗 夫婦 또한 이곳에서 어차(御車)를 타고 내렸다.

    最高級品으로 裝飾한 宮闕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어차. 
국내 현존 차량 중 가장 오래된 차다. [동아DB]

    順從과 순정효황후의 어차. 國內 現存 車輛 中 가장 오래된 차다. [東亞DB]

    景福宮 內 國立故宮博物館에 가면 純宗 夫婦가 使用했던 어차가 있다. 順從이 탔던 1918年式 캐딜락(美國 GM社 製作)과 순정효황후가 탔던 1914年式 다임러(英國 다임러社 製作)다. 純宗 夫婦 魚杈는 國內에 現存하는 自動車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아쉽게도 이 魚杈를 언제 어떻게 들여왔는지, 純宗 夫婦가 어떻게 타고 다녔는지에 關해선 記錄이 없다. 魚杈의 製作 年度나 全體的인 狀況으로 보아, 純宗은 1920年代에 이 캐딜락을 탔을 것이다. 

    熙政堂과 大造殿 區域의 行脚도 새로 만들었고 建物 內部에 浴室, 化粧室, 理髮室을 造成해 西洋式 空間으로 꾸몄다. 室內에 電氣·衛生·燻蒸暖房 設備를 導入했고, 有利·鐵物 等의 새로운 建築 材料를 使用했다. 室內에는 샹들리에와 電燈, 커튼박스, 카펫, 西洋式 椅子와 卓子, 거울과 寢臺, 洗面臺와 浴槽 等 西洋式 家具를 들여놓았다. 모두 入植(立式) 生活空間으로 꾸민 것이다. 

    熙政堂 接見室의 家口들은 大體로 프랑스의 루이 14歲, 루이 15歲, 루이 16歲 樣式이었다. 椅子 가운데에는 大韓帝國의 象徵物인 이화(李花·오얏꽃) 무늬가 디자인된 것도 있다. 이는 特別히 注文 製作한 것이다. 

    昌德宮의 여러 殿閣은 1908, 1909年을 거치며 形態가 바뀌기 始作했다. 그 무렵이면 朝鮮(大韓帝國)은 이미 主權國으로서의 位相을 大部分 잃어버린 때였다. 宮闕의 存在 意味도 喪失한 時期였다. 그래서인지 日本은 朝鮮의 宮闕을 마음 놓고 건드렸다. 人情錢은 儀禮 空間에서 멀어졌고 熙政堂, 大造殿과 함께 王室의 接客 場所로 變해 버렸다. 日帝는 “順從을 위한 空間 構成”이라고 했지만 그때나 只今이나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없다. 그저 弘報用이었을 뿐이다. ‘西歐의 近代 文物을 받아들여 朝鮮의 宮闕을 開化한 空間으로 꾸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點을 弘報하기에 가장 效果的인 裝置는 西洋式 接見室이었다.

    華麗한 만큼 서글픈 샹들리에

    接見室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裝飾은 샹들리에였다. 仁政殿 天障은 샹들리에로 가득하다. 仁政殿 샹들리에는 자못 華麗하고 肉重하다. 노란 천으로 휘감은 뽀얗고 큼지막한 電燈들. 蹴球공보다 더 큰 電燈들이 7個씩 짝을 이뤄 天障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샹들리에 틀에는 大韓帝國을 象徵하는 이화무늬를 돌아가면서 디자인해 넣었다. 

    只今이야 電氣도 흔하고 샹들리에도 친숙하지만 110餘 年 前이라는 事實을 생각해 보면 이는 凡常치 않은 일이었다. 우리나라에 電氣가 導入된 것은 1887年. 景福宮 건청궁(乾淸宮)에 처음 電氣불이 들어왔다. 에디슨이 電球를 活用한 以後 不過 8年 만이었다. 그 電氣불이 20餘 年 뒤 昌德宮에도 들어왔고 샹들리에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샹들리에 電氣불은 尖端 西洋 文物이었고 近代의 象徵이었다. 

    仁政殿 샹들리에가 肉重하면서도 고풍스럽다면 熙政堂과 大造殿의 샹들리에는 단출하고 簡明하다. 熙政堂 接見室의 샹들리에는 3個씩 6세트가 매달려 있다. 大造殿 샹들리에는 天障 한가운데에 6個의 等이 걸려 있는 모습이다. 

    熙政堂 接見室 샹들리에를 보면 그 뒤로 海岡 김규진(海岡 金圭鎭)의 大型 壁畫 ‘叢石亭絶景圖(叢石亭絶景圖)’와 ‘金剛山萬物肖陞卿圖(金剛山萬物肖勝景圖)’가 背景처럼 펼쳐져 있다. 熙政堂 接見室 壁에 大型 壁畫를 붙인 것은 1920年 熙政堂, 大造殿 區域을 再建할 때였다. 熙政堂뿐만 아니라 大造殿에는 以堂 金殷鎬(以堂 金殷鎬)의 ‘백학도(白鶴圖), 오일영(吳一英)과 이용우(李用雨)의 合作 ‘鳳凰도(鳳凰圖)’를, 經訓角에는 心山 盧壽鉉(心汕 盧壽鉉)의 ‘조일선官道(朝日仙館圖)’, 靑田 李象範(靑田 李象範)의 ‘三選館波濤(三仙觀波圖)’를 그려 壁에 붙였다. 當時 韓國의 傳統 花壇을 代表하는 畫家들이 그린 雄壯하고 華麗한 大型 作品들이다. 作品 하나하나는 모두 豪放하고 華麗하다. 이를 두고 우리의 傳統 要素와 西洋의 建築 要素가 調和를 이룬 것으로 評價하기도 한다.

    구경거리 돼버린 大韓帝國 王室

    하지만 희정당은 片箭(便殿)으로서의 機能을 喪失하고 接見室로 바뀌었다. 나라가 亡했으니, 便殿은 必要 없는 裝飾이 돼버렸고, 그래서 샹들리에 뒤便으로 보이는 金剛山 그림이 堂堂하고 우렁차면서도 한便으로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저 샹들리에와 金剛山 그림을 背景으로 順從은 日本이 보낸 總督과 그 一行을 만나야 했을 것이다. 

    人情錢은 內部와 外部가 斷絶되면서 儀禮 空間으로서의 機能을 喪失했다. 희정당은 片箭 機能을 잃고, 外部人을 接見하거나 그들과 食事하는 空間으로 바뀌었다. 그곳에서 行하는 接見과 食事는 日帝의 弘報 手段이기도 했다. 日帝는 1908年 人前庭 앞마당에서 品階石(品階石)과 薄石(薄石)을 걷어내고 牡丹 같은 꽃을 심었다. 仁政殿 앞마당을 觀光用 庭園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昌德宮을 透明한 琉璃그릇 속에 담긴 物體처럼 누구나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判斷을 내리고, 內外의 손님들에게 充分한 待遇를 하며 宮殿이든 後援이든 그 希望에 따라 觀覽할 수 있게 開放하여 王家의 近況을 直接 說明하기도 하면서 王家의 現在를 알리려 힘을 기울인다. 이로써 이(李)王家에 對해 우리나라가 얼마나 厚하게 禮遇하고 있으며 李王家가 얼마나 평화롭고 幸福한 生活을 하고 있는지 周邊에 널리 알려졌으며 特히 外國人이 誤解를 푸는 데 커다란 役割을 하였다.”(곤도 時로스케, ‘大韓帝國 皇室費社’, 이마고, 2007, 118쪽) 

    요즘엔 밤에도 古宮을 觀覽할 수 있다. 昌德宮 달빛紀行 프로그램도 그中 하나다. 夜間에 昌德宮을 둘러보는 것은 幻想的인 經驗이다. 달빛紀行에 몇 番 參與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人情錢과 희정당의 샹들리에가 떠올랐다. 100餘 年 前 샹들리에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고, 昌德宮의 밤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順從과 순정효황후는 샹들리에 불빛 아래 仁政殿 마루바닥을 거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當時엔 電氣 供給이 원활치 않아 電球가 자주 깜박였고 그로 인해 修理費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電球가 제 役割을 못 한 것이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그 模樣이 마치 乾達 같다고 해서 ‘건달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깜박깜박하는 電燈. 當時 우리의 國運과 비슷했던 것일까. 20世紀 初 新文明을 象徵하던 昌德宮의 電氣불 샹들리에. 샹들리에가 設置되고 그다음 해인 1910年 昌德宮에서 朝鮮의 五百 年 歷史는 幕을 내리고 말았다. 1910年 8月 22日 昌德宮 內戰의 興復헌(興福軒)에서 마지막 御前會議가 열렸고 一週日 뒤 朝鮮은 日本의 植民地가 됐다. 仁政殿 샹들리에는 明滅하며 亡國을 지켜보았다. 그 불빛에는 ‘帝國의 黃昏(黃昏)’李 짙게 드리워져 있다. 우리네 近代의 서글픈 두 얼굴이라고 할까. 그 서글픔까지 이제는 우리의 記憶이 됐고 나아가 人情錢의 美學이 됐다. 逆說的이다. 

    現在 熙政堂과 大造殿 保守 復元工事가 進行되고 있다. 여러 電燈과 샹들리에를 淸掃, 補修하고 點等 實驗도 進行한다. 그 過程에서 間歇的으로 熙政堂과 大造殿의 內部를 公開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昌德宮 곳곳의 샹들리에에 關한 具體的인 情報가 確認되지 않았다. 어디서 만들었고 어떻게 들여왔는지. 어딘가에 關聯 記錄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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