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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北 삐라=不法, “宇宙의 기운” 모아 人權 外面?|新東亞

對北 삐라=不法, “宇宙의 기운” 모아 人權 外面?

[閔境遇 586칼럼⑩] ‘平和·統一의 同伴者’라는 판타지의 過剩

  • 閔境遇 閔境遇數學敎育硏究所 所長

    mkw1972@hanmail.net

    入力 2021-01-11 10: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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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익환, 임수경이 남긴 痕跡

    • “내가 생각하는 曺國은 南北 全體”

    • “統一 없이 民主 없다”는 옛 救護

    • 運動圈이 신채호·金九에 注目한 까닭

    • 李仁榮, 왜 ‘北韓’ 아닌 ‘北’이라 부르나

    *586世代 NL(民族解放 系列) 理論家이자 祖國統一汎民族聯合(범민련) 事務處長 出身인 筆者가 文在寅 時代에 表하는 遺憾.

     2020년 12월 29일 대북전단금지법이 공포되자 국민의힘 지성호(왼쪽에서 두 번째), 태영호 의원(왼쪽에서 네 번째) 등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대북전단금지법 위헌 무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2020年 12月 29日 對北傳單禁止法이 公布되자 國民의힘 池成浩(왼쪽에서 두 番째), 太永浩 議員(왼쪽에서 네 番째) 等이 서울 종로구 憲法裁判所 앞에서 對北傳單禁止法 違憲 無效 記者會見을 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記者]

    2020年 12月 14日 ‘對北傳單禁止法(南北關係發展法 改正案)’이 國會 本會議를 通過했다. 文在寅 大統領은 같은 달 29日 對北傳單禁止法을 公布했다. 北韓 人權과 關聯한 團體들이 北韓을 向해 傳單을 撒布하는 行爲를 制止할 수 있는 法的 根據가 마련됐다. 通過 當時만 해도 反對 輿論은 豫想보다 크지 않았다. 尹錫悅 檢察總長 懲戒를 둘러싼 이슈의 波長이 워낙 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狀況이 달라지기 始作한 것은 美國, 英國에 이어 체코와 캐나다 等이 問題를 提起하면서부터다. 그 나라들은 對北傳單 撒布가 表現의 自由와 關聯된 매우 本質的인 市民的 權利라고 判斷했다. 나는 對北傳單禁止法의 裏面에 담긴 더 本質的인 問題를 探究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南北關係의 正體性과 關聯돼 있다. 한마디로 갈음하면 ‘우리에게 北韓은 무엇인가’다.


    “當身이 생각하는 祖國은 韓國이지만…”

    大韓民國은 1948年 建國됐다. 建國 時機를 놓고 다양한 論爭이 있었다. 國家란 抽象的이고 模糊한 槪念이 아니다. 憲法을 가지고 政府를 構成하며 國家를 保衛할 軍隊를 가진 具體的인 存在를 國家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本來 意味에 符合하는 國家는 1948年 8月 以外에는 存在하지 않는다. 臨時政府의 樹立을 大韓民國의 建國으로 解釋하는 것은 虛妄한 主張이다. 

    1948年 樹立된 國家의 直接的인 뿌리는 1945年 南北 分斷에서 비롯한다. 1945~1948年, 더 나아가 1950~1953年의 政治的 背景을 살필 必要가 있다. 이 時期 大韓民國 政府의 性格을 決定한 것은 民族이 아니라 理念이었다. 血統과 言語가 같은 쪽과 結合하기보다는, 같은 民族이 아닌 美國과 價値觀 및 이념적인 結合을 重視했던 것이다. 



    1945~1953年 大韓民國 政府가 들어서는 過程에서 暴力과 衝突이 頻繁히 發生했다. 南과 北은 5000年 以上 하나의 民族이었다. 따라서 38線 以南에 政府가 들어섰다면 그 政府가 38線 以北에 들어선 나머지 政府와 어떤 關係인지 說明해야 한다. 

    各自의 利害關係에 따라 다양한 說明이 뒤따랐다. 먼저 大韓民國 政府의 立場이다. 1960年代까지 北韓은 政府를 僭稱하는 半(反)國家團體였다. 이에 따르면 38線 以北 地域은 大韓民國의 領土이긴 하지만 一時的으로 政府의 統制權이 維持되지 않는 特別 地球다. 다음은 北韓의 立場이다. 北韓 또한 38線 以南을 一種의 美收復地區로 봤다. 朝鮮勞動黨 規約에 따르면 革命과 建設의 單位는 北韓이 아니라 韓半島 全體다. 

    或은 서로를 平和와 統一의 同伴者로 볼 수도 있다. 1970年代부터 이런 생각을 바탕에 둔 主張이 漸次 힘을 얻기 始作했다. 마침 1972年에 7·4 南北 共同 聲明이 發表됐다. 以前까지 大韓民國 政府 立場에서 보면 北韓과 對話는 그 自體로 問題였다. 그러나 얼마든지 彈力的으로 立場을 調整하는 方法도 있다. 大韓民國 政府는 38線 以北까지 管轄權을 擴大하기 위해 武力에 依存할 수도 있지만 平和的인 方法을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可能하면 後者의 方法을 擇하는 게 當然히 좋다. 

    後者의 方法, 卽 ‘平和的인 管轄權 擴大’라는 생각의 바탕 위에서 1972年 7·4 南北 共同 聲明, 1991年 南北基本合意書 採擇, 2000年 6·15 宣言이 可能했다. 筆者가 보기에 노태우, 김영삼 政府는 勿論 김대중, 노무현 政府까지 大體로 ‘平和的인 管轄權 擴大’의 바탕 위에 서있다. 

    1980年代 中盤부터 異色的인 見解가 登場하기 始作한다. 몇 가지 象徵的인 事件을 紹介하겠다. 1989年 4月 在野를 代表하는 문익환 牧師가 北韓을 訪問했다. 文 牧師는 김일성과 會談하고 祖國平和統一委員會와 共同聲明을 發表했다. 特別히 기억나는 것은 文 牧師가 國內로 돌아와 搜査 받는 渦中에 搜査官과 나눴던 對話다. 多少 不正確할 수 있지만 趣旨는 明確하다. 

    搜査官: “牧師님 當身의 行爲는 利敵行爲 아닙니까?” 

    문익환: “當身이 생각하는 祖國은 韓國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曺國은 南北 全體다.”


    民主主義는 統一의 下位 槪念?

    같은 해 7月 北韓을 訪問한 林秀卿은 北韓 訪問期의 題目을 “어머니, 하나 된 祖國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달았다. 1945~1953年 38線 以南에 들어선 國家는 自由主義와 市場經濟에 기초한 親美 性向 政府가 이끌었다. 事態의 中心에 大韓民國이 있고 北韓 問題는 그 다음일 뿐이었다. 

    그런데 문익환, 임수경과 같은 方式에 비춰 본다면 國家는 南과 北을 包括하는 統一 祖國이어야 한다. 大韓民國 政府는 統一 政府를 志向하지 않는다면 不完全하거나 瑕疵가 있는 存在다. 在野勢力은 이런 主張을 口號에 담아 외치곤 했다. 政府를 反(反) 統一勢力으로 指稱하거나 “民主 없이 統一 없고 統一 없이 民主 없다”는 口號 等을 외치는 式이었다. 

    論點을 整理해 보자. 大韓民國의 民主化는 資本主義와 自由主義를 受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民主化는 統一과는 다른 線上에 있는 槪念이었다. 그런데 在野 勢力이 꺼낸 “統一이 되어야만 民主株主義가 實現될 수 있다”는 主張은 民主主義가 統一(또는 자주)의 下位 槪念이라는 뜻이었다. 統一 政府가 大韓民國 政府보다 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문익환이나 林秀卿보다 더 强烈한 象徵은 金九다. 韓國의 歷史的 正統性과 關聯해 가장 敏感한 人物이 李承晩이다. 그가 大韓民國 政府의 初代 首班이었기 때문이다. 문익환, 임수경과 같은 主張을 펴는 사람들은 大韓民國 政府의 反(反) 統一性을 糾彈하기 위해 李承晩의 다양한 欠缺을 꼬집으며 攻擊했다. 이 過程에서 浮刻된 人物이 申采浩와 金九다. 

    申采浩는 獨立運動의 方法으로 武裝鬪爭을 强調했다. 事實 獨立運動의 方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武裝鬪爭日 수도 있고 學校나 病院을 짓는 等 啓蒙的 方式일 수도 있다. 그러나 大韓民國의 現代史 談論은 獨立運動의 여러 方法 中 武裝鬪爭을 特히 擁護하는 樣相으로 發展한다. 나는 이것이 李承晩과 大韓民國 單獨 政府를 否定하는 傾向과 關聯 있다고 생각한다. 

    壓卷은 金九다. 重慶 臨時政府를 이끌며 武裝鬪爭의 길을 보여준 點, 1948年 南北連席會議를 통해 北韓을 訪問한 點, 1949年 안두희에게 暗殺된 點 等 그의 삶에는 드라마틱한 要素가 많다. 特히 金九가 重要한 까닭은 自然人 金九가 아니라 그의 行跡을 自身들의 路線과 政見의 主된 論據로 삼는 2021年 現在의 어떤 政治 勢力 때문이다. 

    文在寅 大統領은 臨時政府에 각별한 愛情을 보여준다. 李仁榮 統一部 長官은 聽聞會에서 李承晩에 對한 質問에 對해 “李承晩 大統領이 國父라는 主張에는 率直히 同意하기 어렵다”면서 “우리의 國富는 金九가 됐어야 했다는 歷史 認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1948年 當時 金九는 南쪽에만 들어선 單獨政府는 國家의 品格과 權威를 갖고 있지 않다고 主張했다. 文在寅 政權은 이와 같은 視角을 지녔던 政治가 金九를 追慕하면서 특별한 메시지를 傳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前 統一運動家가 본 李仁榮 인터뷰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2020년 12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북전단금지법(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출석했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李仁榮 統一部 長官이 2020年 12月 14日 서울 汝矣島 國會에서 열린 ‘對北傳單禁止法(南北關係發展法 改正案)’에 對한 無制限 討論(필리버스터)에 出席했다. [김동주 동아일보 記者]

    이와 關聯해 2020年 11月 18日 李仁榮 長官의 KBS 9時 뉴스 인터뷰를 紹介한다. 유튜브에 檢索하면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나는 偶然히 이 인터뷰를 들었다. 인터뷰를 들으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李 長官의 다른 인터뷰를 接했을 때 感情도 類似하다. 一旦 듣고 오시기를 勸한다. 

    者, 그의 인터뷰 中 異常한 點을 못 느꼈는가. 그럼 내 이야기를 듣고 이 長官의 인터뷰를 다시 들어 보기 바란다. 統一을 强調하는 사람과 勢力들을 理解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1995~2005年 범민련 南側本部 事務處長이었다. 범민련의 公式 名稱은 祖國統一汎民族聯合이다. 범민련은 南과 北, 海外 等 3個 部門으로 構成돼 있었다. 여기서 問題가 되는 게 남과 北 本部의 이름이다. 

    一旦 범민련 南韓本部-北韓本部라고 부를 수 없다. 北韓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범민련 南朝鮮本部-北朝鮮本部라고 부를 수도 없다. 當然히 南韓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南北 모두에 中立的인 名稱을 써야 한다. 그래서 採擇된 單語가 南側과 北側이다. 이와 비슷한 事例가 있다. 1990年代 初盤 以後 南北 스포츠 單一팀의 名稱은 늘 코리아였다. 

    別 것 아닌 것 같지만 1990~2000年代 統一運動圈에서는 꽤 深刻한 問題였다. 統一運動圈은 大韓民國 政府가 統一志向的인 政府(이들의 表現대로라면 ‘民主 政府’)로 交替돼야 하고 統一 韓國을 志向한다는 趣旨에서 38線 以北의 政治 勢力을 北韓이라 부르지 않았다. 代身 북 또는 北側이라 불렀다. 

    者, 이제 다시 이 長官의 인터뷰를 들어보기 바란다. 그는 正確히 ‘北’이라고 呼稱한다. 北韓이라 부르지 않고 있다. 統一이나 南北關係와 關聯한 論議에서 어쩌면 內容보다 重要한 게 어떤 用語를 使用하느냐다. 

    이와 같은 脈絡에서 市民團體의 對北傳單 撒布에 對해 생각해보자. 統一運動圈의 論理대로라면 南과 北은 假想의 統一政府를 이뤄갈 共同의 運命共同體다. 對北傳單 撒布는 假想의 運命共同體를 이룬 한쪽 當事者를 威脅할 수 있는 行爲다. 따라서 이 行爲는 市民的 權利가 아니라 一種의 敵對 行爲이자 反統一, 反民主行爲가 되는 것이다. 

    이즈음에서 내가 統一運動을 할 때 겪은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1980~2000年代 南北 사이에 各種 對話와 만남이 있었다. 同時에 수많은 敵對 行爲도 벌어졌다. 1983年 버마 아웅 산 墓域 테러 事件, 1987年 KAL機 爆破 事件 等이 代表的이었다. 特히 KAL機 爆破 事件이 일어난 時期는 學生運動圈에서 이른바 ‘親北派’가 成長하던 時期와 一致했다.


    北韓의 敵對行爲와 南北頂上會談 사이

    나는 當時 KAL機 事件에 對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政府의 自作劇이라는 主張의 背景에 對해서도 比較的 仔細히 알고 있다. 여러 가지 狀況을 綜合하면 그것은 北韓의 所行이다. 1987年 어느 時點에는 그것이 政府의 自作劇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30年도 넘게 지난 只今에 와서 KAL機 爆破 事件이 北韓 所行이 아니라고 믿을 根據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北韓에 對한 判斷을 構成하는 데 있어 北韓이 저지른 수많은 敵對行爲를 別般 考慮하지 않는다. 但只 하나의 事件으로 머릿속 어딘가 適當한 곳에 묻어두고 ‘平和와 統一의 同伴者’라는 판타지만 過剩해서 借用한다. 이것이 ‘김정은의 北韓’李 저지른 挑發(天安艦 爆沈, 延坪島 砲擊 等)과 南北頂上會談이 아무런 不便함 없이 共存하는 背景이다. 與圈이 對北傳單을 두고 市民的 權利가 아니라 假想의 共同體에 對한 敵對 行爲로 보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 1965年 出生
    ● 서울대 國史學科 卒業
    ● 서울대 人文大 學生會長
    ● 祖國統一汎民族聯合 事務處長·進步連帶 政策委員會 副委員長
    ● 著書 : ‘數學 工夫의 再構成’ ‘새로운 保守의 아이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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