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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戰의 勝負手 軍艦] 李舜臣 百戰百勝 保障한 朝鮮 板屋船의 怪力|新東亞

[海戰의 勝負手 軍艦] 李舜臣 百戰百勝 保障한 朝鮮 板屋船의 怪力

“나무못으로 軍船(軍船) 乾燥瑕疵” 申叔舟의 科學的 提案

  • 정재민 前 防衛事業廳 지원함事業팀長 박나영 海軍 少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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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1-02-13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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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板屋船, 櫓잡이·戰鬪員 空間 分離한 本格的 軍船

    • 물 먹으면 膨脹, 船體 내구도 높이는 나무못 利用

    • 雙돛대·平平한 배 바닥 갖춰 韓半島 海域에 最適化

    • 逃亡가는 척하다 90° 回轉해 火砲 發射

    • 火砲 發射 反動에 부서진 大型 倭船 ‘亞타케婦女(安宅船)’

    • 朝鮮 勝字銃筒 射距離 1km vs 日本 鳥銃 100m

    영화 ‘명량’ 속 명량해전 장면.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映畫 ‘明亮’ 속 鳴梁海戰 場面. [CJ 엔터테인먼트 提供]

    壬辰倭亂의 3代 大捷은 閑山島大捷·행주大捷·晉州城大捷이다. 해前으로 範圍를 局限하면 李舜臣 提督이 이끈 閑山島大捷·鳴梁大捷·露梁大捷이다. 李舜臣과 朝鮮 水軍을 빼놓고 壬辰倭亂을 論할 수 없다. 朝鮮 水軍의 連戰連勝이 李舜臣의 뛰어난 指揮 德分만은 아니었다. 軍船과 軍需支援 시스템이 朝鮮 水軍을 뒷받침했다. 陸上의 戰鬪도 武器體系·戰鬪 裝備가 重要하지만 海戰은 더더욱 그렇다. 海軍에게 軍船은 武器인 同時에 兵力이 駐屯하는 部隊 그 自體이기도 하다. 壬辰倭亂 當時 朝鮮·日本 水軍이 運用한 軍船과 戰術의 差異를 比較해 보면 왜 李舜臣이 이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 理由를 알 수 있다.

    倭寇 侵略의 트라우마

    1392年 建國 直後 朝鮮은 水軍 養成에 힘썼다. 朝鮮 前期 水軍이 陸軍으로부터 獨立해 別途의 軍種이 됐다. 高麗 末 倭寇 侵略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調整은 主要 港口에 指揮官인 度安武處置社(都安撫處置使·朝鮮 初期 水軍의 으뜸 벼슬)와 節制使(節制使)를 두었다. 이들 밑에 都萬戶(都萬戶·一般 萬戶보다 높은 職責), 萬戶 等을 配置해 水軍을 指揮했다. 

    1454年 編纂된 ‘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水軍의 數는 約 5萬 名이었다. 朝鮮軍 全體의 折半에 該當한다. 主로 바다 近處에 사는 사람들, 盧 젓기에 익숙한 사람을 水軍으로 뽑았다. 陸軍이 한 해 3個月씩 4交代 勤務인 데 反해 水軍은 2交代 勤務였다. 水軍은 海上 訓鍊 外에도 軍船 數理와 築城은 勿論 貢物·進上品으로 쓸 海産物까지 採取해야 했다. 

    1485年 編纂된 ‘經國大典’에 따르면 水軍道 陸軍처럼 ‘秦觀(鎭管)體制’에 따라 編成됐다. 鎭管體制는 地方軍이 各 要衝地를 中心으로 外侵을 스스로 막는 體制다. 各 道의 要衝地마다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이 設置됐다. 規模가 가장 큰 主鎭의 指揮官은 水軍節度使였다. 거진과 猪津은 各各 水軍僉節制使와 水軍萬戶가 指揮官이었다.

    “陸上에서 倭寇 막자”

    建國 後 時間이 지나며 朝鮮 水軍은 弱化됐다. 水軍은 鎭管體制에 맞춰 萬戶의 指揮 아래 軍船에서 待機하며 海上 防禦를 擔當해야 했다. 大部分의 壯丁들은 海上勤務가 어렵고 힘들어 水軍 入隊를 忌避했다. 나라에 抛(布·베)를 納付하고 合法的으로 軍役을 免除받는 사람도 늘었다. 이에 成宗 때부터 艦上 勤務 代身 陣에 聖寶(城堡·敵을 막기 위해 城 밖에 臨時로 만든 小規模 要塞)를 設置하고 水軍道 陸上에서 勤務하도록 했다. 水軍과 陸軍의 區分이 模糊해졌다. 中宗 때 海戰을 抛棄하고 陸上에서 倭寇를 막자는 ‘房왜肉煎론(防倭陸戰論)’도 登場했다. 結局 水軍은 弱化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當時 運用한 軍船의 數字로도 確認된다. ‘世宗實錄地理志’(1454)와 ‘經國大典’(1485)을 比較해 보면 軍船은 829隻에서 737隻으로 100隻 假量 줄었다. 水軍의 數는 5萬177名에서 4萬8800名으로 줄었다. 15世紀 中盤 무군選(無軍船·水軍이 配置되지 않은 豫備 軍船)은 全體 軍船 829隻 中 단 57尺이었다. 15世紀 後半에 이르면 全體 軍船 737隻 中 約 3分의 1에 該當하는 249隻이 무군船이었다. 水軍 兵力과 軍船의 數가 줄어든 反面, 무軍船의 數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水軍 電力의 弱化를 보여준다.

    朝鮮 水軍의 主力 ‘戰鬪專用’ 板屋船

    朝鮮 初期 한동안 倭寇의 侵入이 潛潛했으나 穩全한 平和는 아니었다. 倭寇는 三浦倭亂(1510)과 乙卯倭變(1555) 等 몇 次例 朝鮮을 侵略했다. 旣存 鎭管體制가 倭寇의 侵入에 제대로 對應하지 못한다는 事實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에 宣祖는 壬辰倭亂 勃發 前, ‘制勝方略(制勝方略)’ 體制를 導入했다. 制勝方略은 有事時 中央에서 派遣된 指揮官이 地方軍을 이끌고 敵侵에 맞서는 體制다. 敵의 局地 挑發에는 效果的이었으나 壬辰倭亂처럼 正規軍과 벌이는 全面戰에서 限界를 보였다. 特히 指揮官이 戰場 地形과 部下들의 事情에 어두운 것이 弱點이었다. 壬辰倭亂 初期, 釜山에 上陸한 日本軍이 陸地에서 連戰連勝한 理由다.
     
    制勝方略 體制에 따라 水軍의 境遇도 有事時 中央에서 달려온 指揮官이 指揮를 맡아야 했다. 水軍은 作戰 地域의 해로(海路)에 能通해야 한다. 各 軍船을 運用하는 노하우도 하루아침에 攄得할 수 없다. 이런 特性 때문에 水軍은 制勝方略下에서도 個別 艦隊·軍船 指揮官의 裁量權이 强調됐다. 그 德에 水軍은 壬辰倭亂 開戰 直後의 混亂 속에서도 效果的으로 敵에 맞설 수 있었다. 

    對備 態勢는 解弛해졌지만 强力한 主力艦이 朝鮮 水軍을 支撐했다. 壬辰倭亂 時期 朝鮮의 主力艦은 1555年(明宗 10年)에 開發된 板屋船이었다. 오늘날 朝鮮 水軍의 象徵처럼 여겨지는 거북船은 壬辰倭亂 中 가장 많이 保有했을 때도 7隻 內外에 不過했다. 反面 板屋船은 壬辰倭亂 勃發 2年次에 그 數가 200餘 尺에 達했다. 

    朝鮮은 建國 初期에 大選(大船)·中大選(中大船)·重船(中船)·快選(快船)·猛船(孟船)·別膳(別船) 等 總 13種의 軍船을 829隻 保有했다. 數字는 많았지만 明確한 規格에 따라 建造하지 못했다. 戰鬪力의 限界가 뚜렷했다. 이에 1461年(世祖7年) 申叔舟는 旣存 軍船을 改良해 戰鬪와 조운(漕運)을 겸하자고 主張했다. 그 結果 1465年 開發된 것이 兵漕船(兵漕船)이다. 이름 그대로 軍事作戰(兵)과 遭運에 모두 使用할 수 있는 배다. 有事時 戰時體制로 재빠르게 轉換할 수 있는 劃期的 方法이었다. 平素 船體 윗面의 上場(上粧·船體 最上層의 甲板)을 撤去해 漕運船으로 活用하다가, 戰爭이 일어나면 上場을 設置해 軍用으로 썼다. 

    1485年(成宗16年) ‘經國大典’에서 兵漕船은 猛船(猛船)으로 名稱이 바뀌었다. 猛船의 ‘맹(猛)’은 재빠르다는 뜻이다. 如前히 租稅 運送과 戰鬪 兼用이었다. 크기에 따라 大·中·小猛船으로 區分했다. 大猛船은 軍事 80名이 搭乘할 수 있었고, 漕運船으로 使用할 때 穀物 約 800席(石·144㎏) 程度를 運搬할 수 있었다. 猛船은 戰鬪보다 遭運에 더 많이 쓰였다. 그 渦中에 三浦倭亂(1510年) 等 倭寇가 여러 次例 侵入했다. 倭寇와의 싸움에서 猛船이 戰鬪 任務 遂行에 不適合하다고 드러났다. 積善보다 느리고 鈍했던 것이다. 

    明宗 以後 倭寇도 中國에서 火砲를 一部 導入했다. 大型 軍船을 만들고 線上에 防牌를 設置해 中國·朝鮮 正規軍과의 싸움에 對備했다. 이에 猛船이 아닌 새로운 戰鬪艦이 開發돼야 한다는 必要性이 提起됐다. 오늘날로 치면 새 武器體系에 對한 所要(所要)가 提起된 것이다. 

    1555年(明宗10年) 朝鮮은 덩치가 크고 火力을 大幅 補强한 戰鬪 專用 船舶을 開發했다. 바로 板屋船이다. 漸漸 大型化되는 倭寇의 軍船에 效果的으로 對抗하기 위해서였다. ‘增補文獻備考(增補文獻備考)’는 板屋船을 船體 길이 20m 內外 크기에 100名 以上이 搭乘할 수 있는 큰 싸움倍로 規定했다. 板屋船을 일컬어 ‘작은 性이나 堤防과 같다’고 表現하기도 했다.


    넓어진 甲板에 火砲 配置해 火力 增强

    조선 수군 ‘판옥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朝鮮 水軍 ‘板屋船’. [한국학중앙연구원 提供]

    單純히 크기만 커진 것이 아니라 배의 構造 自體도 改善됐다. 板屋船은 櫓를 젓는 船室과 戰鬪員을 태운 甲板을 分離한 多層 戰艦이었다. 板屋船 以前 朝鮮의 싸움배는 모두 單層이었다. 戰鬪員과 非戰鬪員이 같은 空間에 있어 效率性이 떨어졌다. 이와 달리 板屋船은 甲板과 上甲板이 따로 있어 戰鬪員과 非戰鬪員을 分離할 수 있었다. 櫓를 젓는 格軍(格軍)은 두 甲板 사이 安全한 空間에 몸을 숨겨 盧 젓기에 集中할 수 있었다. 砲手와 死守는 높은 位置에서 敵軍을 내려다보며 戰鬪에 臨할 수 있었다. 

    배의 크기가 두 倍 以上 커지며 火力도 强化됐다. 大猛船 庭園은 80名이었으나 板屋船에는 125名 以上이 搭乘했다. 格軍이 없어 넓어진 上甲板에 大砲를 더 많이 設置해 火力을 높였다. 戰鬪員을 保護하기 위한 防牌板과 餘張(몸을 숨기고 활을 쏠 수 있도록 設置한 構造物)을 設置했다. 그 높이가 相當히 높아 日本 水軍의 長技인 白兵戰·창검술이 無力化됐다. 上甲板 위에 나무로 만든 2層 樓閣을 세워 指揮所로 活用했다. 

    한便 當時 日本 水軍의 主力함은 세키婦女(?船)였다. 세키婦女는 亞타케婦女(安宅船)와 高바야婦女(小早船) 사이의 重刑 戰艦으로 約 70名이 乘船했다. 亞타케婦女는 ‘집이 달린 배’라는 뜻의 大型 軍船이었다. 日本에서 ‘海上의 城’이라 불릴 만큼 巨大한 威容을 자랑했다. 日本 戰國時代 封建 領主들이 威勢를 誇示하기 위해 만든 배였다. 實際 戰鬪보다 장수들의 旗艦으로 쓰였다.


    ‘집 달린 배’ 亞타케婦女

    日本 軍船과 朝鮮 軍船은 重要한 構造的 差異를 보였다. 于先 船體를 만드는 木材가 달랐다. 日本 軍船은 杉나무와 전나무를 썼다. 소나무에 비해 덜 단단한 데다 板材가 얇아 배를 製作하기 쉽다. 板材가 얇으면 배가 가벼워져 機動力이 向上된다. 反面 무거운 火砲를 多量 실을 수 없고, 朝鮮의 단단한 板屋船과 衝突하면 船體가 쉽게 깨졌다. 日本 水軍의 主力 電線 세키婦女와 旗艦으로 쓰인 亞타케婦女 모두 板屋船에 들이받히면 束手無策이었다. 

    板屋船의 主材料는 단단하고 두꺼운 소나무 板材였다. 强度와 耐久性이 높다. 소나무로 만든 板屋船은 速度가 느렸지만 大型 火砲를 多量 摘載해 發射할 수 있을 程度로 튼튼했다. 木材를 結合하는 方法도 差異가 있었다. 日本은 여러 張의 얇은 板材를 겹치는 데 쇠못을 利用했다. 朝鮮은 나무못으로 두툼한 소나무 板材를 이어 붙여 배를 만들었다. 

    朝鮮 特有의 軍船 乾燥 方式이 暫時 ‘脫線’한 적도 있었다. 1430年(世宗 12年) 調整은 나무못을 使用하던 旣存 船舶 建造 方式을 바꿀지 檢討했다. 一部 臣僚가 軍船에 單一 板材와 나무못을 使用하면 耐久性이 낮아진다고 主張했기 때문이다. 日本 배는 여러 張의 板材를 쇠못으로 結合해 튼튼하면서도 가볍다는 憂慮도 提起됐다. 이에 따라 世宗 때 얇은 板材 여러 張을 쇠못과 나무못으로 結束해 만든 軍船을 建造하기 始作했다. 軍船의 速度가 빨라졌지만 耐久力은 낮아졌다. 

    이런 問題點을 看破해 傳統的 軍船 乾燥 方式으로 돌아가자고 主張한 人物이 바로 신숙주였다. 1473年(成宗 4年) 申叔舟는 “倭船을 觀察하니 板子가 얇고 쇠못을 많이 썼다. 往來하는데 輕快하고 便하지만 배가 요동치면 못 구멍이 차츰 넓어져 물이 새기 때문에 배가 쉽게 썩는다”며 日本式 軍船의 弱點을 指摘했다. 申叔舟는 1443年(世宗 25年) 書狀官으로서 日本을 直接 訪問했다. 現地 社會相을 觀察해 ‘海東諸國記’를 著述했다. 그는 “日本에서 갑자기 海賊의 奇襲을 받았으나 (타고 있던 朝鮮式 배의) 돛을 달고 航海해 곧 따돌렸다”며 朝鮮式 배의 機動力도 遜色없다고 指摘했다. ‘日本通’인 그의 主張이 받아들여져 나무못을 利用한 軍船 乾燥 方式으로 回歸했다. 板屋船 建造의 基本 틀이기도 하다. 

    板屋船은 나무의 接合 部位에 ㄱ字와 ㄴ者 模樣의 홈을 판 後 나무못으로 잇는 方式을 使用했다. 이음새 部分은 外部 衝擊을 받을수록 더욱 堅固하게 結合됐다. 나무못은 바닷물을 머금으면 부피가 膨脹해 이음새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船舶의 損傷 없이 解體해 修理하기도 容易했다. 反面 쇠못을 使用한 日本은 軍船은 못과 나무가 完全히 結合하지 못했다. 船體에 微細한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時間이 지날수록 이음새의 쇠못이 녹슬어 배의 全般的 내구도가 떨어졌다.


    日本 水軍, 大型 群仙圖 火砲 3門 搭載가 限界

    兩國 軍船은 배의 바닥 構造도 달랐다. 板屋船은 배 바닥이 平平한 平底船(平底船)이었다. 물에 닿는 面積이 넓어 速度는 느리지만 安定的이었다. 韓半島 西海·南海처럼 水深이 낮고 潮水差가 큰 바다에서 運用이 容易하다. 戰鬪 中 必要하면 제자리에서 360° 急旋回度 可能했다. 朝鮮 水軍의 强點인 火砲를 運用하기 유리한 條件이었다. 火砲 發射에 따른 反動을 效果的으로 分散시키는 것도 平底船의 長點이었다. 

    反面 세키婦女는 바닥이 뾰족한 尖底選(尖底船)이었다. 船體 바닥이 V字 形態로 좁다 보니 물의 抵抗을 덜 받아 速力이 빨랐다. 水深이 깊은 바다에서 運用하거나 海峽을 건너기에 유리했다. 다만 回轉 半徑이 커 方向 轉換이 어려웠다. 潮水 車가 크고 波濤가 세게 치는 바다에서 起動하는 것이 不利했다. 

    두 나라 배의 돛도 달랐다. 朝鮮과 日本의 軍船은 基本的으로 路線과 帆船의 形態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바람을 利用한 長距離 航海를 할 때는 돛을 利用했다. 戰鬪에 突入해 纖細한 起動이 必要하면 格軍이 櫓를 저어 움직였다. 돛 하나로 움직이는 외돛배人 日本 軍船은 順風만 利用할 수 있었다. 反面 板屋船은 雙돛대를 달아 逆風이 불어도 갈지(之)자 模樣으로 前進할 수 있었다. 板屋船은 潮水干滿의 差가 甚하며 섬·暗礁가 많은 朝鮮 海域에 最適化된 배였다. 홈(home)競技에선 絶對 질 수 없는 無敵함이었다. 

    板屋船의 戰鬪力을 極大化한 ‘畫龍點睛’은 火砲였다. 朝鮮은 高麗 末의 火砲 製作·運用 技術을 繼承해 發展시켰다. 크고 튼튼한 船體가 長點인 板屋船은 抛 發射에 따른 衝擊을 充分히 견뎠다. 朝鮮 水軍은 板屋船에 天字銃筒(天字銃筒)·地字銃筒(地字銃筒) 等 多樣한 火砲 約 24門을 搭載했다. 乘艦한 戰鬪員은 個人 火器인 勝字銃筒(勝字銃筒)과 활로 武裝했다. 

    反面 日本 水軍은 線上에 火砲를 거의 搭載하지 못했다. 세키婦女는 크기가 너무 작아 火砲를 搭載할 수 없었다. 亞타케婦女에 裝着한 火砲를 試驗 發射하자 船體가 衝擊을 견디지 못하고 破損된 일도 있었다. 結局 火砲 3門 程度를 設置하는 것이 限界였다. 日本 水軍 指揮部가 火砲 搭載에 消極的일 수밖에 없었던 根本 原因이 바로 그것이었다. 日本 水軍은 鳥銃과 칼을 앞세워 艦上 白兵戰을 試圖했으나 如意치 않았다. 朝鮮 水軍이 保有한 火砲 中 가장 强力한 天字銃筒은 구경 13cm에 射距離가 900報(1.08㎞·1步는 1.2m)에 達했다. 日本 軍船을 遠距離에서 制壓할 수 있었다. 

    조일 兩國 水軍의 武器體系는 判異했다. 그 差異는 戰術에도 그대로 反映됐다. 日本은 敵艦에 빠르게 接近해 鳥銃을 쏘거나, 갈고리 달린 밧줄을 相對方 배에 걸고 올라타 白兵戰(白兵戰)을 치렀다. 一名 ‘等線肉薄戰術(登船肉薄戰術)’이다. 

    朝鮮 水軍은 굳이 敵艦에 接近할 必要가 없었다. 日本軍 鳥銃 射距離(100m)보다 멀리 떨어져 脯를 發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追擊을 避해 逃亡가는 척하다가 갑자기 90° 回轉해 舷側(舷側·배의 左右 側面)의 脯를 發射할 수 있었다. 또 水深이 얕은 곳으로 誘引해 日本 軍船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日本 軍船은 艦上 白兵戰을 試圖하기 위해 接近하다 火砲 洗禮에 沈沒하거나 坐礁하기 일쑤였다.


    朝·日 海戰, 砲兵과 步兵의 싸움

    一旦 日本 水軍이 板屋船에 接近하는 데 成功해도 難關이 있었다. 通常 板屋船의 船體 높이는 세키婦女보다 높았다. 日本 水軍이 白兵戰을 하려면 사다리를 타고 배 위로 올라가야 했다. 朝鮮 水軍은 높은 甲板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敵을 攻擊할 수 있었다. 乘組員의 數는 亞타케婦女(櫓꾼 90名, 戰鬪員 200名)가 板屋船(櫓꾼 110名, 戰鬪員 50名)보다 많았다. 日本의 水軍 兵卒은 鳥銃·활은 勿論 칼과 槍을 지닌 步兵이었다. 敵艦 乘組員보다 많은 머릿數가 重要했다. 反面 朝鮮 水軍의 兵卒은 火砲를 運用하는 砲兵에 가까웠다. 

    李舜臣은 朝鮮 水軍·軍船의 强點을 正確히 알고 있었다. 이를 十分 發揮할 수 있는 戰術을 計劃하고 具現해 냈다. 世界 海戰史의 흐름을 보자. 유럽의 境遇 1571年 路線 時代의 마지막 해前인 레판토 海戰이 벌어졌다. 1588年에는 帆船 時代의 始作을 알린 칼레 海戰이 있었다. 비슷한 時期 朝鮮 水軍은 유럽의 路線·帆船의 結合 形態인 板屋船을 運用했다. 完全한 帆船은 아니지만 戰術 面에서 帆船 時代의 艦砲戰을 驅使한 셈이다. 路線 時代의 白兵戰에 머문 日本 水軍이 艦砲戰을 驅使한 朝鮮 水軍을 이기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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