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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는 獨裁者지만 설 傳統까지 捏造하진 않았다|신동아

朴正熙는 獨裁者지만 설 傳統까지 捏造하진 않았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코로나, 次例와 祭祀 刷新 機會였는데…

  • 노정태 哲學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入力 2021-02-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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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紅東白西, 棗栗梨柹’ 根本 없는 床차림?

    • 紅東白西는 예부터 歲時風俗의 한 樣式

    • 日帝 殘滓도 朴正熙 ‘창조’도 아냐

    • 文獻上으로도 100年 넘는 傳統

    • 産業化·都市化와 密接히 聯關

    • 女 抑壓하는 傳統 改善할 宿題는 남아

    뷰파인더는 1983年生 筆者가 陣營 論理와 묵은 觀念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時代 診斷書’입니다.

    명절 때마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 차례상’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하지만 홍동백서는 과거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도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名節 때마다 紅東白西, 棗栗梨柹 等으로 대표되는 ‘傳統 茶禮床’을 놓고 甲論乙駁이 벌어진다. 하지만 紅東白西는 過去 植民地 朝鮮人들에게도 낯선 槪念이 아니었다. [김재명 동아일보 記者]

    每年 言論에서 두 番씩 꼭 다루는 素材가 있다. 紅東白西, 棗栗梨柹 等으로 대표되는 所謂 ‘傳統 茶禮床’에 根據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그저 素朴하게 마음으로 祖上님께 精誠을 보이면 充分하다거나, 뭐 그런 이야기 말이다. 

    이番 설은 多少 例外的이다. 5人 以上 集合 禁止가 내려졌고 言論도 政府 政策 方向에 副應하기 위해 해묵은 ‘茶禮床에 傳統은 있는가’라는 主題를 꺼내들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올해 上半期부터 백신 接種이 始作되고 下半期에 마무리된다면 秋夕에는 익숙한 레퍼토리를 또 듣게 되지 않을까 싶다.


    朴正熙가 儒敎 이데올로기 심으려 했다?

    2017年 1月, “설은 男女老少 모두 노는 날…茶禮床엔 떡국이면 充分”이라는 題目으로 發行된 ‘聯合뉴스’ 記事를 되짚어보자. 이제는 친숙하다 못해 食傷해진 內容이다. 記事에 따르면 專門家들은 “茶禮床은 元來 簡素하게 차린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成均館 박광영 儀禮部長은 “紅東白西니 棗栗梨柹니 하는 規則은 朱子家禮 같은 예서(禮書)에 나오는 게 아니고, 約 40年 前부터 내려오는 民間 慣習”이라고 說明했다. 紅東白西는 朱子家禮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傳統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接할 수 있다. 같은 記事를 보면 맛 칼럼니스트 黃橋益은 茶禮床 基準에 對해 이렇게 말했다. “決定的으로 朴正熙 政府가 儒敎 이데올로기를 심으려고 ‘家庭儀禮準則’을 發表해 祭祀 床차림 基準을 定했다.” “元來 儒敎 禮法에는 뭘 놔라, 뭘 놓지 말라 하는 게 없다. 떡국 하나만 놓아도 充分하다.” 



    두 가지 論議를 합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첫째, 紅東白西 棗栗梨柹 等은 朱子家禮에 적혀있지 않은, 말하자면 ‘根本 없는’ 床차림이다. 둘째, 그러한 意識이 傳統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背景에는 어떤 外部 要因이 있다. 셋째, ‘根本 없는 床차림’이 傳統 行世를 하게 된 元兇은 朴正熙의 ‘家庭儀禮準則’이다. 

    歷史를 보면 그런 主張에 根據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1934年 11月 11日, 朝鮮總督府가 ‘儀禮準則’을 發表하여 冠婚喪祭와 關聯된 朝鮮의 多樣한 歲時風俗에 基準을 提示했다. 以後 1955年 ‘儀禮規範’, 1961年의 ‘標準儀禮’를 지나, 1968年 12月 7日 朴正熙 政權에 依해 ‘家庭儀禮準則’李 公表되고 이듬해인 1969年부터 施行됐다. 

    家庭儀禮準則을 비롯해 그때까지 發表된 準則은 法的 强制力을 지니지 않는 勸告條項이었다. 朴正熙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973年 3月, 家庭儀禮準則을 ‘家庭儀禮에 關한 法律’로 바꾸어 强制性 있는 規範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이렇듯 民間 家庭儀禮를 法令으로 制度化하여 勸告를 넘어 强制한 것은 世界的으로 類例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儀禮準則’은 日帝에 依해 처음 導入됐다. 朴正熙는 그것을 아예 法으로 못 박았다. 이렇게만 써놓고 보면 滿洲軍 將校 出身 朴正熙가 우리 固有의 傳統과 美風良俗을 깡그리 깔아뭉개고, 그 자리에 紅東白西니 棗栗梨柹니 하는 것들을 갖다 놓은 것만 같다. 앞서 引用한 記事처럼 그런 건 “約 40年 前부터 내려오는 民間 慣習”일 뿐 ‘眞正한 傳統’은 아니지 않을까?


    1920年代 植民地 朝鮮人들도 알았다

    紅東白西는 ‘우리의 傳統’이 맞다. 적어도 40年보다는 오래되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통해 옛날 新聞을 뒤져보면 알 수 있는 內容이다. 紅東白西로 대표되는 樣式化된 床차림은 1920年까지 거슬러 올라가 確認할 수 있다. 

    1920年 6月 26日 ‘朝鮮日報’에 실린 “朝鮮儒林에게 高喊 (2)”라는 글을 읽어보자. 

    “今之儒者(禁止儒者)가口(구)로눈禮樂射御書數(예악사어서수)라能言(능언)하지만은其實(기실)은能通(능통)한者(자)一有(일유)타言(언)하기不能(불능)이니禮(예)의糧粕卽喪服(양박즉상복)의前三後四(전삼후사)와祭需(제수)의紅東白西等(홍동백서등)이나主張(주장)하야知禮者(지례자)로自爲(자위)하는普通儒者(보통유자)를多見(다견)하얏지만은...” 

    이는 ‘요즘 周나라 禮法에 精通하다고 말하는 儒生이 많지만 實은 能通한 사람이 한 名 있다 하기도 어렵고, 喪服을 어찌 입어야 하는지 祭需를 차릴 때 紅東白西가 어쩌니 저쩌니 말하며 自身이 例를 잘 안다고 하는 平凡한 儒生들을 많이 보았지만...’ 程度로 解釋할 수 있다. 

    이를 통해 1920年代 植民地 朝鮮人들에게 紅東白西라는 槪念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日帝가 强制한 國籍 不明의 風俗 같은 것도 아니다. 紅東白西는 儒敎의 禮法에 對해 대단한 知識과 識見을 가지고 있지 않은 ‘普通儒者’들도 입에 담으며 거들먹거리는 흔한 知識이었다. 大衆에게 널리 퍼져 있는 歲時風俗의 한 樣式, 卽 傳統이었던 것이다. 

    올해가 2021年이니 紅東白西의 傳統은 文獻으로 確認되는 것만 봐도 無慮 100年이 넘는다. 朴正熙가 家庭儀禮準則을 制定하기 前이었던 1961年의 新聞 記事에서도 紅東白西의 存在를 確認할 수 있다. 1961年 2月 16日子 ‘朝鮮日報’ ‘萬物商’의 한 대목이다. 

    “祭床(祭床)의 陳說法(眞說法)은 까다롭고 또이른바 『家家禮(家家禮)』라, 집집마다 禮法(禮法)李 다를수있지마는 大體(大體)로 基本法則(基本法則)은 『紅東白西(紅東白西)』요 『棗東栗西(棗東栗西)』다.” 

    朴正熙가 家庭儀禮準則을 發表한 해는 1968年이다. 그러니 朴正熙가 紅東白西라는 虛構의 傳統을 捏造하여 公權力을 利用해 民間에 强要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紅東白西는 日帝時代와 朴正熙 以前에도 韓半島에 있었고 그 後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1969年 4月 12日子 ‘東亞日報’, 1977年 12月 2日子 ‘경향신문’을 보면 집집마다 지내는 忌祭祀나 次例가 아닌 마을 共同의 거릿制 等에서도 紅東白西에 따라 床을 차린다는 記錄이 나온다. 韓半島에 居住하는 수많은 이들이 靈的 存在와 疏通하는 儒敎的, 或은 巫俗的 床차림을 할 때 紅東白西에 따랐다. 紅東白西를 傳統이 아니라고 해야 할 理由가 있을까?


    都市의 삶과 온갖 傳統의 萎縮

    설을 일주일 앞둔 2월 4일 경기 성남시의 한 전통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제수용품을 구매하고 있다. 코로나19와 한파로 인해서 시장은 한산한 모습이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설을 一週日 앞둔 2月 4日 京畿 성남시의 한 傳統市場을 찾은 市民들이 祭需用品을 購買하고 있다. 코로나19와 寒波로 인해서 市場은 閑散한 모습이다. [송은석 동아일보 記者]

    家庭儀禮準則은 韓國의 産業化와 密接한 關聯이 있다. 오늘날은 名節 및 祭祀가 가장 큰 社會的 論爭거리로 남아있지만, 1960年代 무렵만 해도 ‘祖國 近代化’의 가장 큰 걸림돌은 긴 葬禮式이었다. 父母가 世上을 떴을 때 自身의 孝心 및 財力을 誇示하기 위해 5日葬, 7日場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時節이다. 

    農耕 社會라면 葬禮가 길어진다 해도 큰 問題가 없다. 다들 비슷한 곳에 살면서 農事를 지으니 彈力的으로 業務와 葬禮를 調律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朴正熙가 追求하는 近代化된 工業 國家는 그런 式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朴正熙의 大韓民國에서는 누구나 定해진 날짜만, 最大限 짧게 葬禮를 치르고 돌아와, 工場과 事務室에서 일해야 했다. 朴正熙는 그리하여 ‘準則’을 配布하였지만 모두가 順順히 말을 듣지는 않자 아예 法을 만들어버렸다. 

    强勁한 ‘祖國 近代化’의 흐름은 1980年代가 되면서 한풀 사그라졌다. 理由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執權의 正當性이 不足했기도 하거니와, 全斗煥 自身이 朴正熙처럼 ‘祖國 近代化’에 執着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1984年 家庭儀禮準則 規制를 줄이도록 指示했다. 

    하지만 全斗煥이 直接 나서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都市를 基準으로 할 때는 3日場이 定着되어 가는 雰圍氣였다. 긴 時間을 들여 많은 손님을 받고, 임권택 監督의 映畫 題目처럼 ‘祝祭’를 벌이는 式의 葬禮를 치를만한 環境 自體가 歷史의 遺物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1987年 ‘東亞日報’에 실린 이 記事는 急變하고 있던 當時의 風俗圖를 喜劇的으로 보여준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가끔 코미디에서나 나오는 것 같은 現實을 目擊한다. 며칠 밤새 시끄러운 것이야 共同 生活하는 곳이기 때문에 理解하지만, 아파트의 移徙짐을 運搬하기 위해 使用되는 곤돌라가 수선을 피우며 管을 올리고 내리는데 使用될 때마다 남의 初喪집이지만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이제 韓國人은 집에서 죽기 어려워졌다. 病院에서 죽고 葬禮式場으로 간다. 이렇듯 ‘죽음’과 關聯된 意識을 家庭이 아닌 病院 같은 公的 空間에서 處理하게 된 것은 韓國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프랑스 歷史學者 필립 아리에스가 ‘죽어가는 者의 孤獨’에서 잘 描寫했듯이, 모든 國家와 文化圈은 近代化 過程에서 죽음의 空間과 삶의 空間을 分離한다. 또 親族의 죽음을 處理하는 儀式을 家族 外의 누군가에게 ‘아웃소싱’한다. 

    卽 韓國人이 흙으로 담을 쌓은 草家집과 기와집을 버리고 아파트로 대표되는 都市의 삶을 擇하면서, 冠婚喪祭를 비롯한 온갖 ‘傳統’은 萎縮될 수밖에 없는 運命이었다.


    ‘朝鮮人’에서 ‘韓國人’으로

    1969년 2월 15일 가정의례준칙에 서명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 [동아DB]

    1969年 2月 15日 家庭儀禮準則에 署名하는 朴正熙 當時 大統領. [東亞DB]

    朴正熙는 獨裁者였다. 그 事實을 否定할 수는 없다. 朴正熙의 鐵拳統治와 强要가 없었더라면 冠婚喪祭의 文化的 變化가 이렇게까지 빨리 벌어질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變化의 土臺에는 經濟 成長과 都市化가 있다. 여기에도 朴正熙의 影響은 至大했다. 結局 朴正熙가 原因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朴正熙가 ‘眞짜 傳統’을 破壞하고 그 자리에 ‘紅東白西 같은 根本 없는 假짜 傳統’을 집어넣었다는 式의 敍述은 옳지 않다. 朴正熙는 家庭儀禮準則을 制定하는 過程에서 民俗學者, 국어학자, 歷史學者 等 諮問을 求할 수 있을법한 國學者(國學者)들에게 幅넓게 諮問을 求했다. 

    諮問委員 中 가장 代表的인 人物이 바로 日帝時代에 朝鮮語學會 事件으로 獄苦를 치르기도 했던 國語學者 一夕 李熙昇이다. 그는 家庭儀禮準則 制定에 參與했을 뿐 아니라 積極的으로 그 趣旨를 國民에게 說得하기도 했다. ‘李熙昇 全集’ 9卷에 收錄되어 있으며, 1969年 3月 9日 ‘週刊中央’을 통해 發表된 ‘家庭儀禮準則’이라는 寄稿文에서 李熙昇은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意味에서 이番에 政府로부터 家庭儀禮準則이라는 것을 制定하여 一般에 公布하였으니, 從來의 慣習으로 볼 때에, 좀 疏忽하다고 느껴질 點도 없지 않을 것이나, 이는 여러 委員들이 우리 社會의 現實이나 將來를 高麗·展望하면서, 고래의 禮節을 可能한 限 尊重한 것이니, 누구나 批判보다 앞서 實踐하여 보면, 그 制定의 動機와 眞意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家庭儀禮準則을 國家에서 配布하고 甚至於 法으로 强制한 것은 여러모로 異例的인 일이다. 하지만 異例的이라는 게 꼭 ‘非正常的’이라는 뜻은 아니다. 家庭儀禮準則의 制定과 配布 및 施行 過程을 둘러싼 論難은 舊韓末 以後 韓半島의 居住民이 시달려야 했던 숱한 歷史的 浮沈, 그리고 光復과 韓日修交 以後 겪었던 急激한 近代化의 副産物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朝鮮人’이 아닌 ‘韓國人’이 되었고, 只今도 되어가고 있는 中이다. 

    이 글은 紅東白西와 家庭儀禮準則을 擁護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算術的으로 모든 집안이 兩班 家門일 理는 없다. 그럼에도 집집마다 次例와 祭祀를 지내는, 特히 女性에게 抑壓的인 이 傳統을 오늘에 맞게 改善해 나가자는 게 이 글의 趣旨다. 

    그러자면 一旦 感情的인 反應을 暫時 접어두고 그 兩面的인 屬性을 理解할 必要가 있다. 紅東白西 棗栗梨柹 같은 床차림 規則을 朴正熙가 온 國民에게 가르친 것은 맞다. 그렇게 보자면 오늘날의 次例와 祭祀 文化는 ‘만들어진 傳統’이다. 

    하지만 그것을 朴正熙가 ‘創作’했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다. 家庭儀禮準則 中 一部는 적어도 1920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韓半島의 傳統에 根據를 두고 있다. 그 原文을 읽어본 사람이 몇 名이나 될까 싶은 朱子家禮보다는 모든 이가 알고 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닌 紅東白西가 우리의 ‘傳統’에 더욱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問題는 傳統이 오늘의 狀況과 脈絡에 符合하느냐다. 5日葬이나 7日場으로 치러지는, 시끌벅적한 祝祭를 彷彿케 하는 葬禮式은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韓國人은 이제 아파트 或은 都市의 마당 없는 住宅에 산다. 집에는 棺을 두고 殮을 하고 손님을 맞이할 空間 自體가 없다. 生의 막바지의 鬪病과 臨終은 大部分 病院에서 맞이하게 되며 곧장 葬禮式場으로 向한다. 

    結婚 亦是 마찬가지다. 요즘에도 ‘傳統婚禮’를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 境遇도 禮式場 或은 別途의 場所를 빌리는 境遇가 一般的이다. 1960年代로부터 고작 數十 年이 지났을 뿐인데, 집에서 치르는 婚禮는 想像조차 하기 어려워졌다. 男子의 成人式을 일컫는 冠禮는 아예 형해화됐다. 冠婚喪祭 中 남은 것은 祭禮, 卽 次例와 祭祀뿐이다. 祭祀는 結婚이나 葬禮와 달리 商業化하기 어려운 分野다. 그러므로 없애건 高侈件 오늘날에 맞도록 更新하려면 社會가 積極的으로 論議하고 意識的으로 雰圍氣를 바꿔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如前히 ‘媤월드’ 속에서

    이 時點에서 문재인 政權을 批判하지 않을 수 없다. 文在寅 政權은 出帆 初期 페미니스트 政權을 標榜했다. 그렇다면 일찍부터 各界各層의 國民을 불러 모아 올바른 次例와 祭祀 文化에 對한 意見을 收斂하고 公論의 場을 열 必要가 있었다. 多數의 女性이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대목이 바로 名節이니 말이다. 

    論議가 제때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假定해보자. 그랬더라면, 코로나19라는 全 地球的 危機는 오히려 次例와 祭祀라는 家庭儀禮를 根本的으로 再檢討하고 刷新할 수 있는 歷史的 契機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朴正熙를 뛰어넘어 ‘家庭儀禮準則’의 큰 基調를 修正했다는 點에서 文在寅 大統領의 業績으로 歷史에 記錄됐을지도 모른다. 

    現實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大統領’ 文在寅은 1960年代의 家庭儀禮準則과 關聯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19街 닥쳐왔다. 코로나19 死亡者와 遺族들은 제대로 된 作別과 哀悼의 機會도 얻지 못하고 있다. 結婚式場은 줄廢業을 하고 賀客들은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 하느라 바쁘다. 그럼에도 次例와 祭祀는 남아, 이番 설에도 며느리들은 ‘媤월드’에서 어떻게 行動해야 하나 苦悶하고 葛藤했다. 危機를 克服하고 한 段階 跳躍할 機會를 덧없이 놓친 셈이다. 우리의 삶을 根本的으로, 함께 苦悶할 수 있는, 좋은 政治가 切實하다.


    ● 1983年 出生
    ● 高麗大 法學科 卒業, 서강대 大學院 哲學科 碩士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韓國語版 編輯長
    ● 著書 : ‘論客時代’ ‘탄탈로스의 神話’
    ● 曆書 : ‘밀레니얼 宣言’ ‘民主主義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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