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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은 매크로하고, 指示는 마이크로했다|신동아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④

비전은 매크로하고, 指示는 마이크로했다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0-12-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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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電子 企業이 電氣車 開發해야 한다

    • 프랑크푸르트 宣言의 前哨戰 LA 會議

    • 10年間 三星은 놀았다

    • ‘三星 디자인은 2流’ 후쿠다 報告書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04년 반도체 공장을 방문했을 때 모습. [삼성전자 제공]

    故(故) 이건희 三星그룹 會長이 2004年 半導體 工場을 訪問했을 때 모습. [三星電子 提供]

    李健熙 會長의 1993年 2月 1日 LA 出張은 當初 美國의 主要 去來先과 支社를 둘러보기 爲한 것이었다. 現地에 到着한 李 會長은 家電製品 賣場과 割引店을 돌아다녔다. 最大 市場 美國에서의 成敗야말로 生存과 直結되는 일이니만큼 三星 製品의 現住所를 눈으로 確認해보자는 趣旨였다. 

    이게 웬일인가. 三星 製品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賣場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누구 한 사람 눈길을 주지 않았다. 韓國에선 最高 브랜드로 통할지 몰라도 美國에선 3流 싸구려로 取扱받는 現場을 直接 目擊한 衝擊이 얼마나 컸을까. 當時 同行한 隨行員들은 “흘깃 훔쳐본 얼굴이 뒤통수를 얻어맞기나 한 듯이 내내 일그러져 있었다”고 傳한다. 

    李 會長은 卽時 社長團을 LA로 불러들였다. 平素 會社에 出勤도 잘 하지 않고 蟄居하다시피 해온 이 會長의 갑작스런 呼出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LA라니, 모두 超緊張 狀態로 飛行機에 몸을 실었다.

    프랑크푸르트 宣言의 前哨戰 LA 會議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허문명 기자]

    현명관 前 三星物産 會長. [허문명 記者]

    현명관 前 三星物産 會長은 新經營 初期(1993年 10月~1996年 12月) 祕書室長으로 李 會長을 가까운 距離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最近 自敍傳 ‘偉大한 去來’를 펴내기도 한 그를 만나 當時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느 날 이창렬 祕書팀長으로부터 ‘萬事를 제치고 LA로 오라’는 連絡을 받았습니다. 삼성전자는 勿論 主要 系列社 社長들도 다 불렀다면서 말이죠. 나는 좀 疑訝했습니다. 삼성시계 社長을 맡고 있었는데 時計는 全量이 內需여서 輸出하는 게 全혀 없는데 왜 나까지 오라고 할까 생각하며 서둘러 飛行機를 탔습니다. 



    李 會長이 묵고 있는 LA 센추리플라자 호텔에 到着하니 멕시코 티후아나 工場을 둘러보다 急히 날아온 김광호 三星電子 副會長을 비롯해 主要 系列社 社長들이 到着해 있었습니다. 왜 불려왔는지 理由를 모르기는 다 마찬가지였지요.” 

    더 荒唐한 건 到着하자마자 祕書팀長이 달러를 나눠 주며 百貨店과 家電製品 賣場을 돌아다니면서 쇼핑을 하라는 것 아닌가. 서울에 處理할 일이 山더미처럼 쌓여 있는 系列社 社長들을 이 멀리까지 오라고 해놓고 쇼핑을 하라고?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다들 어리둥절했다는 게 現 前 室長 傳言이다. 하지만 이 會長의 意圖를 알아차리는 데는 時間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욱 前 三星綜合技術院長 回顧다. 

    “李 會長이 느낀 걸 그대로 본 거죠. 現場에서 본 三星 製品은 형편없었으니까요. 눈에 잘 띄는 높이의 展示臺에는 소니, 도시바 같은 日本 製品, 그 다음이 美國産이었습니다. 三星 製品은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가게에선 故障 난 채로, 다른 가게에선 덤으로 끼워 파는 景品으로 내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힘들여 만든 우리 製品이 悲慘한 待接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마디로 慘澹했습니다.”

    “三星은 10年間 놀았다”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 원장. [허문명 기자]

    손욱 前 삼성종합기술원 院長. [허문명 記者]

    1993年 2月 18日 任員 23名이 아침 食事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集合 場所인 호텔 宴會場으로 모였다. 그런데 또 이게 웬일인가. 宴會場 바닥에는 三星 製品을 包含해 美國, 日本 有名 브랜드 TV, 캠코더, 冷藏庫, 洗濯機, 카메라, 電子레인지가 모조리 分解된 채 깔려 있는 것 아닌가. 現 前 室長 말이다. 

    “後날 韓國 新聞에는 ‘世界 主要 電子製品 比較 展示會가 열렸다’고만 짧게 紹介됐지만 當時 行事는 이 會長이 徹底히 혼자 企劃하고 만들어낸 이벤트였습니다. 필립스, 소니, 제너럴 일렉트릭, 월풀 製品이 모두 解體돼 回路와 配線이 드러나 있었는데 電氣 技術者가 아닌 제 눈으로 보기에도 三星 製品은 그야말로 許接했습니다. TV만 해도 三星 것은 配線이 이리 저리 꼬여 複雜했는데 소니는 깨끗하고 심플했으니까요.” 

    李 會長은 製品 하나하나 部品 數를 一一이 세어 보이기까지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VCR만 해도 三星 部品 個數가 도시바보다 30% 많은데 價格은 오히려 30% 싸다. 이러니 어떻게 競爭이 되겠는가? 이番에 우리 商品이 얼마나 賤덕꾸러기가 돼 있는지 눈으로 確認했을 것이다. 뚜껑이 깨져 있거나 떨어져 나간 것도 있더라. ‘三星’ 製品은 구석에 처박혀 2, 3年間 먼지를 자욱하게 뒤집어쓸 程度로 싸구려가 아니다. 이렇게 만들 거라면 이름을 返納해라.” 

    다시 縣 前 室長 말이다. 

    “李 會長은 비전과 未來를 이야기할 때는 宏壯히 巨視的인, 매크로(macro)韓 眼目을 갖고 있었지만 製品에 對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매우 緻密하고 섬세한 마이크로(micro)的인, 이른바 兩面的 事故를 다 가진 분이라는 걸 切感한 現場이었습니다. 例를 들어 TV 리모컨을 들고서는 ‘리모컨에서 가장 많이 쓰는 버튼이 뭔가. 온·오프 아닌가. 필립스 것은 가운데 있는데 우리 건 찾기가 어렵다”면서 改善을 指示했죠. 그날 家電製品 分解 部品 展示는 그 自體로 매우 큰 衝擊이었습니다.” 

    그는 自身의 冊 ‘偉大한 去來’에서 當時 이 會長 모습은 마치 목숨을 건 사람처럼 切迫해 보였다며 이렇게 적고 있다. 

    “누가 會長을 감(感)에만 依支한다고 말했던가. 會長은 正말 眞心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가까이서 본 會長은 마치 사랑하는 女人에게 完全히 몸이 달아 있는 靑年이었고 戰爭터에서 살기 위해 悽絶하게 몸부림치는 軍人이었다. 會長은 正말 목숨을 건 賭博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李健熙 革命’에 몸을 담가 改革에 앞장서자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始作했다. 아마 다른 社長들도 마찬가지 心情이었을 것이다.” 

    當時 會議에서 前年度인 1992年 輸出實績 不振 原因을 說明하던 任員 한 사람이 “系列社들 責任도 있다”는 式으로 남 탓을 하는 듯한 말을 하다가 “저런 式으로 남 탓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직까지 三星에 붙어 있는가”라는 李 會長의 불號令을 듣고 退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앞으로 電氣車 나온다

    李 會長이 LA 會議에서 發言한 內容을 읽다보면 當時 그가 얼마나 緻密하고 깊게 일에 集中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 美國에서 괜찮은 골프채 드라이버 하나 값이 500달러 以上이다. 部品이 1000個가 넘는 三星 27인치 컬러TV 한臺가 400달러 內外다. 말이 된다고 보나. 

    -三星은 美國에서 지난 20年間 엄청난 損失을 보았다. 멤버십 피(fee) 치고는 너무 오래, 많이 支拂했다. 國家的, 그룹적, 事業部別, 品目別로 障礙要因은 뭔가. 美國 땅이 워낙 넓으니 全域에 걸쳐 市場 占有率을 가져가지 말고 特定 地域을 集中的으로 攻掠해 보는 건 어떤가. 

    -앞으로 美國 法이 電氣自動車를 10%까지 生産하도록 돼 있다. 揮發油車는 點字 電氣·電子化 돼 가고 있다. 電子 業種에서 自動車 部品, 電氣自動車를 開發해야 한다. 

    -2年 前에도 마쓰시다 VCR을 내가 直接 뜯어보고 많은 指摘을 했다. 以後 뭐가 變했나. 日本 業體들과 戰略·戰術的으로 協力하는 問題를 檢討하라. 

    -海外旅行 간 韓國 사람들이 輸出된 國産 家電製品, 카메라가 國內에서 살 때보다 더 싸다고 사 갖고 歸國한다. 國內 市場에서는 開放으로 밀려들어온 外國 製品이 우리 것보다 비싸게 팔린다. 이와 關聯해 政府와 相議할 일은 없는가. 

    -서울에서 占有率이 競爭社보다 떨어지는데 女性들을 重點的으로 파고들어라. 女性들이 모인다 싶은 곳에는 다 가봐라. 

    -‘김치 冷藏庫’ 廣告는 金星에 졌다. 노란 바탕色 빼고 ‘機能’ 部分을 擴大하라. 廣告文句 中에서 ‘추운 게 대순가(대수인가)’ 하는 게 있던데 ‘대순가’란 表現이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먹히는 表現인가. 제일기획 水準이 이 程度인가. 


    李 會長은 2月 18日부터 나흘間 現場에서 任員會議를 主宰하고 3月 2日 LA를 떠나 도쿄로 날아간다. 그러곤 3月 4日 系列社 社長團 46名을 도쿄로 불러 모은 뒤 世界 電子市場의 메카로 불리던 아키하바라를 샅샅이 누비며 日本의 競爭力을 硏究하라고 指示한다. 서울로 돌아온 이 會長은 3月 22日 三星그룹 創立 55周年 記念式이 열린 서울올림픽公園 體操競技場 舞臺에 섰다. 아버지 이병철 會長이 이뤄낸 일을 지키고 維持하는 ‘守城(修城)’의 經營者가 아니라 아버지를 뛰어넘는 ‘第2의 創業’을 하겠다고 宣言한 지 딱 5年 되는 날이었다. 海外市場을 돌아보며 三星의 水準을 確認한 그의 말에는 悲壯感이 서려 있었다.
     
    “앞으로 2000年까지 남은 時間은 7年입니다. 三星이 世界超一流 企業으로 가느냐, 주저앉고 말 것이냐를 決定하는 마지막 決斷의 時期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技術과 情報야말로 競爭力의 源泉이 되는 時代가 열렸습니다. 먼 後날 三星의 歷史에서 여러분과 내가 이 時代를 빛낸 主人公으로 함께 記錄될 수 있기를 懇切히 바랍니다.” 

    5月로 접어들면서는 大衆 앞에 서는 廣幅 行步를 始作한다. 12日 中小企業 經營者 對象 講演, 15日 고려대 講演, 17日~20日 KBS 라디오 經濟展望臺 出演, 26日 韓國科學技術員 講演 等이었다. 前例 없던 이런 行步는 自身의 改革 메시지가 會社 次元을 넘어 國民들의 共感帶 없이는 具現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됐다는 게 後날 分析이다.

    新經營 宣言 방아쇠, 후쿠다 報告書

    사람들은 世上 밖으로 나온 ‘隱遁의 經營者’를 好奇心 어린 눈으로 봤지만 當時 그의 생각과 메시지는 큰 注目을 받지는 못했다. 이 같은 그의 行步를 銳敏하게 捕捉한 쪽은 美國이었다. 5月 3日子 美國 隔週刊 綜合經濟地 ‘포춘’은 이 會長 얼굴을 表紙로 裝飾하고 그의 改革 메시지를 커버스토리로 다룬다. 

    李 會長은 6月 다시 도쿄로 날아간다. 그가 當時 묵은 오쿠라호텔은 신라호텔과 提携 關係를 맺은 곳으로 이 會長과도 因緣이 깊었다. 選對 會長과 도쿄에 갈 때마다 묵었던 곳이고 도쿄로 선을 보러온 아내 홍라희 女史와 丈母를 묵게 한 곳도 이곳이었다. 꼭 10年 前인 1983年 2月 8日 新年 事業構想을 위해 도쿄에 머물던 아버지 이병철 會長이 後날 三星의 運命을 바꿀 大規模 半導體 投資에 나서기로 決心한 곳도 그곳이었다. 

    1993年 6月 이 호텔에서 三星의 運命을 바꾸는 新經營 宣言의 방아쇠를 당기는 일이 벌어진다. ‘후쿠다 報告書’가 바로 그것이다. 후쿠다 報告書는 三星電子 日本人 디자인 顧問이었던 후쿠다 다미오가 作成한 것이다. 그는 1975年 교토(京都) 工藝纖維大學에서 碩士課程을 修了하고 같은 해 NEC(일본전기) 디자인센터에 入社한 뒤 1989年 獨立해 ‘오피스 후쿠다’를 設立하자마자 삼성전자에 迎入됐다. 

    李 會長은 1993年 6月 도쿄에서 후쿠다 拷問을 비롯해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日本人 拷問들을 만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들의 率直한 말을 듣고 衝擊을 받는다. 

    2015年 6月 4日 三星 社內 媒體 ‘미디어 三星’은 新經營 22周年을 맞아 후쿠다 前 顧問을 直接 만났다. 三星에서 10年을 일하고 日本으로 돌아간 그는 工藝纖維大學 敎授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育成에는 후쿠다 報告書에 무슨 內容을 담았는지, 이 會長과 어떤 對話를 나눴는지, 이 會長의 디자인 哲學은 무엇이었는지, 三星 製品을 비롯한 ‘메이드 인 코리아’의 水準이 어땠는지 等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많다. 인터뷰 中 一部를 紹介한다.

    “模倣에만 急急한 三星은 2流”

    -當身이 入社한 1989年 三星 水準은 어땠나. 

    “다른 나라 製品을 模倣한 것이 많아 컬처 쇼크(文化 衝擊)를 받았다. 소니가 1流라면 파나소닉은 1.2流, 샤프나 山腰는 1.5流라고 할 때 三星은 2流라는 느낌이 들었다. 三星뿐 아니었다. 서울 市內 百貨店에 가보면 日本이나 유럽 어딘가에서 본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 많이 보였다. 나로서는 衝擊的인 일이어서 디자이너들에게 ‘絶對 남의 것 흉내 내지 마라. 오리지널이 아니면 世界 市場에서 이길 수 없다’고 했다.” 

    그는 2004年 10月號 ‘니케이(日經) 디자인’과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三星의 디자인部 狀態는 寒心했다. 30代 課長 1名, 1~2年次 젊은 디자이너 10名이 다였다. 젊은 디자이너들은 圖面(圖面) 그리는 法부터 가르쳐야 할 만큼 水準이 낮았다. 디자인에 對한 思考方式도 日本 것을 흉내 내는 걸 當然視해서 商品 企劃書에 ‘소니 ○○의 디자인처럼’이라고 쓸 程度였다.” 

    -問題는 뭐였나. 

    “디자이너들은 舊態依然한 敎育을 받은 境遇가 많아 最新 디자인 콘셉트나 프로세스 知識이 不足했다. TV 新製品을 苦悶한다고 할 때 設計者가 內部를 決定하고 外形을 디자인해 달라고 하면 디자이너는 鉛筆을 들고 스케치를 했다. 順序가 完全 反對여야 한다고 말했다. 消費者 便宜性이라는 디자인 콘셉트를 定하는 게 먼저라면서 말이다. 錄音器를 만든다고 할 때 冊床 위에 놓고 錄音하기 괜찮은가, 버튼을 失手 없이 누르기 괜찮은가, 이런 걸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商品企劃, 디자인, 設計 部署가 서로 連繫되지 않으면 水準 높은 製品이 나오지 못하는데 삼성전자는 다 따로따로였다. 

    韓國 사람은 윗사람을 尊重하는 儒敎精神이 있는데 當時는 只今보다 훨씬 甚해 上士 말은 모두 맞다고 여겼다. 部下 職員들이 좋은 디자인을 提案해도 좀처럼 採擇되지 못했다. 디자인은 正答이 없다. 젊은 사람들 感性이 맞는 境遇도 많다. 그런 境遇 相對가 部長이든 任員이든 說得해야만 한다. 나는 디자이너들에게 ‘싸워도 괜찮다’고 했다. 

    實際로 情報通信 部門에서 設計파트와 디자인室이 摩擦을 빚은 적이 있다. 設計 파트 쪽은 原價를 10원이라도 낮춰야 한다고 했고 디자이너는 그렇게 하면 이미지 損失이 커 그걸 돈으로 따지면 1000萬 원도 넘는다고 맞섰다. 結局 火가 난 디자이너가 自己가 만든 模型을 밟아버리고 會議室을 나가 버렸다.”

    후쿠다 顧問은 入社 後 첫 3年間 報告書를 每달 만들어 提出했지만 아무런 反應이 없었는데 1993年 6月 이 會長이 直接 重要한 內容을 整理해 달라는 要請이 있어서 ‘후쿠다 報告書’를 만들고 會長을 만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當時 報告書 波長이 대단했다.
     
    “李 會長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飛行機 안에서 나와 다른 日本人 拷問이 만든 두 個의 報告書를 읽고 크게 火를 냈다고 들었다. 到着하자마자 任員들을 次例次例 불러들였고 이어 宏壯한 會議가 始作됐다는 消息도 들려왔다. 當時 나는 日本에 있었는데 재팬三星 職員으로부터 ‘앞으로 한두 달間 서울에 가지 않는 게 좋겠다. 자칫 돌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두 달 뒤 韓國에 갔을 때 雰圍氣는 意外로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任員 對象 講演 要請도 늘었고 잘 모르는 任員으로부터 食事 招待를 받기도 했다.” 

    그는 그러면서 “李 會長의 프랑크푸르트 宣言을 起點으로 危機感이 單番에 造成되면서 三星 內部에 改革이 必要하다는 意識이 조금씩 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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