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洗濯機 뚜껑을 칼로 깎아 組立하다니… 當場 工場을 세우라”|신동아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⑤

“洗濯機 뚜껑을 칼로 깎아 組立하다니… 當場 工場을 세우라”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1-01-13 10:00:02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富者 나라 日本도 熱心히 일하는데…

    • 會社가 썩었다, 모두가 나를 속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이듬해인 1994년 그룹 시무식에서 연설하는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獨逸 프랑크푸르트 新經營 宣言 이듬해인 1994年 그룹 始務式에서 演說하는 李健熙 會長. [三星電子 提供]

    후쿠다 拷問을 비롯한 日本人 拷問들과 새벽까지 討論을 마친 이건희 三星그룹 會長은 잠도 거의 자지 않은 後 이튿날 아침 拷問들과 골프까지 친 뒤 프랑크푸르트行 飛行機에 올랐다고 한다. 當時 祕書室 隨行팀長이던 손욱 前 三星綜合技術院長 回顧다. 

    “李健熙 會長이 30時間 以上 주무시지 않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飛行機에서 주무실 것이니 隨行팀長은 幸運’이라는 弄談까지 돌았다. 그런데 웬걸, 李 會長이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文書 두 個를 꺼내더니 ‘읽어보고 理由와 對策을 分析 報告하라’고 하는 것 아닌가. ‘후쿠다 報告書’와 ‘棋譜 報告書’였다.”
    다음은 孫 前 院長과의 一問一答. 

    - 후쿠다 報告書는 三星電子의 디자인 戰略 不在를 指摘한 것으로 안다. 技保 報告書는 뭐였나. 

    “棋譜 顧問도 13年間 삼성전자에서 顧問으로 일해 온 日本人이었다. 오디오 設計 技術을 가르쳤다. 그가 쓴 報告書 內容은 한마디로 三星 職員들이 整理整頓을 못 한다는 거였다. 例를 들어 日本 硏究 開發者들은 部品, 測定器 같은 道具들을 쓰고 나면 다음 사람이 今方 찾아 쓸 수 있게 元來 位置로 다시 가져다 놓는다거나 硏究 데이터도 잘 整理해 나중에 잘 活用하도록 하는데 三星 職員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三星에 몸담은 13年 동안 그렇게 强調했는데 只今까지 안 되고 있으니 會長이 直接 나서야 할 때라는 內容이었다.” 

    ‘三星 60年史’ 및 當時 記錄에서 추린 후쿠다 및 技保 報告書의 主要 內容은 當時 三星만의 問題가 아니라 우리 大企業의 그즈음 모습을 생각해 보게 한다.


    ‘5 Why’

     2010년 5월 17일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열린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이날 삼성전자는 26조 원 규모를 투자해 성장동력을 강화하겠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삼성전자 제공]

    2010年 5月 17日 三星나노시티 火星캠퍼스에서 열린 ‘半導體 16라인 起工式’에 參席한 李健熙 會長. 이날 삼성전자는 26兆 원 規模를 投資해 成長動力을 强化하겠다는 戰略을 發表했다. [三星電子 提供]

    다시 손 前 院長과의 對話. 



    - 飛行機에서 報告書를 읽고 어떤 意見을 냈나. 

    “當時 隨行員이 6名이었다. 會長 뒷座席에 앉아 討論이 始作됐다. 會長은 全혀 잠을 자지 않고 答을 기다렸다. 우리들은 ‘責任意識과 主人意識이 없어서 그렇다’ ‘룰에 對한 槪念이 없고 處罰이 弱해서 그렇다’ 等 한두 時間마다 答을 내 말씀드렸는데 會長은 滿足하지 않은 듯 ‘다시‘ ‘다시’를 反復했다. 

    結局 프랑크푸르트에 到着해 駐在員들과 저녁을 먹고 난 뒤까지 討論이 이어졌다. 하지만 繼續 ‘아니다’라는 答만 들어야 했다. 會長은 마치 끝장을 보겠다는 心算인 것처럼 느껴졌다. 

    子正 넘어서까지 이런 狀況이 이어지자 보다 못한 홍라희 女史가 ‘사람들도 疲困하니, 이제 答을 알려드리세요. 그래야 來日 또 일을 할 수 있죠’라고 하자 그제야 ‘自己 自身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禪問答 같은 말을 하며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新經營 初期 祕書室 國際金融팀長, 人事팀長을 지내며 이 會長 通譯을 맡기도 했던 황영기 前 三星證券 社長(現 韓美協會長)도 當時 遂行팀員으로 全 日程을 함께했다. 그의 記憶은 좀 더 具體的이다. 

    “理由와 對策을 묻는 會長께 ‘敎育이 잘못돼서 그렇습니다. 基本 秩序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每事 얼렁뚱땅하는 文化가 옛날부터 몸에 배어와서 그렇습니다. 賣出 達成에 汲汲해서, 量 爲主로 ‘物量 떼기’ 하느라 그렇습니다’ 等等 各自가 머리에서 짜낸 意見들을 말씀드리니 會長은 ‘그래, 그렇다 치자. 근데 왜 그리 됐노?’ 다시 反復해 되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다시 ‘어려서부터 家庭敎育이나 이런 것들부터 問題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軍隊 가서 要領 피우는 거를 배우는 것도 理由인 것 같습니다’라고 또 나름대로 생각을 말했다. 그러면 會長은 다시 ‘그럼 우리 社會는 와 그래 됐노?’ 이런 式으로 質問이 繼續됐다. 우리는 더는 答을 할 수 없었다. 그때 생겨난 말이 바로 會長의 ‘5 Why’다. 卽 問題가 생기면 적어도 다섯 番 ‘왜’를 물어야 한다는 거였다.” 

    生前의 李 會長이 報告를 받을 때 적어도 다섯 番 ‘왜냐’고 물었다는 것은 三星맨들 사이에서 有名한 이야기다. 普通 사람들은 當然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어린아이 같은 質問을 던져 本質에 接近하는 것을 즐기며 探究했다는 것이다. 

    현명관 前 祕書室長 말이다. 

    “한마디로 問題의 本質에 接近하겠다는 執念과 努力이 대단했다. 어느 날 任員會議에서 ‘물은 왜 차가운가’라는 質問이 날아왔다. ‘얼음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얼음은 왜 讚歌?’ ‘0度 以下에서 얼기 때문입니다’ ‘왜 0度 以下에서 얼음이 되는가’ 이런 式이었다. 會長은 한番 關心을 가지면 專門家 水準의 知識을 얻을 때까지 執拗하게 파고들어 갔다. 半導體는 勿論 自動車에서부터 電氣오븐까지 디자인과 技術을 細細하게 알고 있었다. 그를 모시는 사람들도 當然히 그런 熱誠을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會社가 썩었다, 모두가 나를 속였다

    프랑크푸르트에 到着한 다음 날, 이 會長은 유럽 駐在員들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소니 錄音器를 켜놓고 “그동안 내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밑에까지 電波가 안 됐다. 無條件 내 말을 錄音해서 各 事業場 末端까지 들려줘라”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LA와 도쿄에서 會議를 한 것은 우리 家電製品이 世界市場에서 얼마나 賤待받고 國際 競爭力이 뒤졌나 하는 것을 直接 보여주어 精神을 차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日本人 拷問들이 쓴 報告書를 읽고, 나 自身부터 얼마나 뭘 모르고 있었나를 깨달았다. 나는 平生 樂觀的이고 肯定的으로 살아왔다. 웬만한 失手나 數十, 數百億 원의 損害에도 까딱하지 않았다. 이番에는 火가 몹시 치밀어 오른다. 5年 前에 여러분들 나한테 뭐라고 그랬나? 實務를 모르는 소리한다, 富者집에서 자랐으니 月給쟁이 苦衷을 알겠나. 그러면서 내 말을 밑으로 傳達도 안 했다. 그럼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은 現實을 알았나. 各 系列社 社長들, 祕書室長, 祕書室 팀長들은 모두 나를 속였다. 집안에 ‘病菌’이 들어왔는데 5年間, 10年間 속여왔다. 所謂 ‘側近’들이 이 程度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느 程度이겠는가.” 

    李 會長이 日本人 拷問들이 쓴 報告書를 읽고 이렇게까지 火를 낸 데에는 그럴 만한 理由가 있었다. 

    三星電子가 이병철 選對 會長 時節부터 日本人 技術者들로부터 많은 技術을 習得해 成長한 것은 널리 알려진 事實이다. 選對 會長 때는 經營 全般에 對한 助言을 해주는 程度였지만 李健熙 會長 때는 經驗과 技術을 가진 專門家들을 迎入해 具體的 助言을 들었다고 한다. 조용상 前 三星재팬 代表理事 말이다. 

    “李 會長은 正말 그들을 極盡히 待接했다. 當身 스스로를 낮추고 禮儀와 誠意를 다하는 모습에 感動한 日本人 拷問들은 三星에 助言과 情報를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職員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疏忽히 듣고 잘 받아들이지 않는 雰圍氣였다. 會長은 이런 모습이 捕捉될 때 불같이 火를 내곤 했다.” 

    신필렬 前 三星라이온즈 社長은 1972年 三星物産에 入社해 祕書室 財務팀에서 일을 始作했다. 1976年부터 이병철 選對 會長의 祕書팀長을 맡았다. 그의 말이다. 

    “三星에 迎入된 日本人 拷問들은 조금이라도 三星에 寄與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日本에서 新製品이 나오면 재빠르게 調査해서 리포트로 써내기도 했지만 當時 삼성전자에서 그걸 눈여겨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李健熙 會長은 副會長 時節부터 ‘(名色이) 拷問인데 불러갖고 이야기도 듣고 자꾸 相議해야 할 것 아닌가?’ 하면서 답답해했다. 그러다 會長에 就任해 經營에 本格的으로 나서면서 ‘拷問들을 重視하는 雰圍氣’를 만들려고 애썼다. 會長이 되자마자 第一 먼저 삼성전자 內 꽤 파워가 있는 部長 목을 친 게 代表的이었다. 會長이 副會長이던 時節 그 部長에게 日本人 專門家들을 紹介하면서 ‘배울 게 많을 것이니 이분을 통해 사람도 뽑고 하라’고 했는데 한귀로 듣고 흘려버린 거다. 

    會長은 當身이 副會長으로 힘이 없을 때여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잠자코 있다가 會長이 되자마자 部長을 불러 ‘내가 옛날에 日本人들을 몇 名 紹介해 줬는지, 그분들로부터 배운 게 뭔지 이야기해 보라’고 한 거다. 擔當 部長이 제대로 答을 하지 못하니 그 卽時 날려버렸다.” 

    李 會長은 ‘日本人 拷問 活用’을 아예 人事 項目에까지 집어넣어 明文化했다고 한다. 홍성일 前 祕書室 監査팀長 말이다. 

    “會長은 火를 내는 境遇가 거의 없었는데 日本人 拷問 이야기만 나오면 ‘貴하게 모셔왔는데 썩힌다’고 逆情을 냈다. 當時만 해도 日本人 立場에서 韓國 會社 技術 顧問으로 가는 건 日本 內에서 逆賊 소리를 듣는 거라며 그렇게 어렵게 오신 분들을 뒷房 늙은이 取扱한다는 거였다. 그분들을 眞正한 同僚로 만들어서 일이 끝나면 인사동 같은 데 모시고 가 燒酒도 한盞 사드리고 해야 머릿속에 있는 ‘眞짜’가 튀어나와 우리 財産이 된다고도 했다. 結局 어느 날, 더는 말로 안 되겠다고 느끼셨는지 監査 項目에 ‘拷問 活用도’라는 項目을 새로 만들어 人事 評價에까지 反映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機會가 있겠지만, 李健熙 會長의 日本觀은 특별했다. 李 會長은 日本人들에게 朝鮮을 支配한 植民의 記憶이 鮮明하던 1950年代와 1960年代에 初等學校와 大學校를 日本에서 다녔다. 韓國人이 ‘조센진’으로 통하던 그 時節, 게다가 感受性이 가장 銳敏하던 그 時節에 그가 얼마나 差別待遇를 받았을지는 능히 斟酌이 된다. 

    그는 反日 感情을 갖는 代身 日本을 알려고 努力했고 日本의 長點을 배워 마침내 日本을 이기겠다고 決心했다. 技術로 日本을 이기는 克日(克日)만이 最高의 復讐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 생각은 結局 世界 最高 電子會社 소니를 이김으로써 實現됐다. 植民地 歷史가 半世紀가 넘어가는 只今도 日本과 잘 지내자고 말하면 ‘土着倭寇’ 소리를 듣는 昨今의 狀況을 故人의 삶과 겹쳐보면 한숨만 절로 나온다.

    후쿠다 및 技保 報告書에 火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 會長은 그날 밤 호텔 房에서 한 篇의 비디오를 보고 다시 絶望에 빠진다. ‘후쿠다 報告書’에 이어 프랑크푸르트 宣言의 ‘第2의 방아쇠’가 된 이른바 ‘洗濯機 事件’이다. 

    當時 三星은 사내放送(SBC)을 통해 內部 問題를 告發하는 一種의 社內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을 製作하고 있었는데 이 會長이 본 비디오는 도쿄 하네다 空港에서 傳해진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 到着해 호텔 房에서 열어본 테이프에는 三星前者 洗濯機 組立 過程을 撮影한 20餘 分 分量 映像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生産 라인 職員들이 洗濯機 뚜껑 여닫이 部分이 맞지 않자 卽席에서 칼로 2㎜를 깎아 組立하는 것 아닌가. 

    이튿날 아침, 이 會長은 激昂된 語調로 이렇게 말한다. 

    “오늘 아침 洗濯機 不良을 담은 테이프를 보았다. 會社가 썩었다. 完全히 썩었다. 엉터리 不良品을 쌓아놓고 損害를 보고 있는데 왜 만들어야 하나. 마켓 셰어 5, 6% 줄어드는 게 겁나는가? 뭐가 겁나서 내 말이 안 먹혀 들어가나, 가슴이 터진다. 

    不良은 罪惡이다. 完全히 라인을 스톱시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하는데 왜 안 되는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工場을 세워라. 洗濯機는 國內 販賣가 다여서 在庫가 쌓여 있다. 왜 量만 생각하고 만들어재끼나. 덤핑한 不良品 산 사람들 絶對 三星 거 안 산다는 거 아닌가. 팔면 팔수록 이미지 나빠지고 장사는 더 안 되는데 그런 單純한 計算이 안 되나? 내가 小學校 6學年 때부터 電子製品 사고 쓰고 돌리고 만진 사람이다. 나만큼 日本 技術者 經營者 販賣者 얘기 들어본 사람 있나? 三星에서 前者에 對해 나만큼 아는 사람 있나. 그런데 왜 내 말을 안 듣나.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이런 式이면 내 다 치워 나갈라 한다.” 

    李 會長은 不良品을 팔면서 罪責感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無責任하고 非道德的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不良 洗濯機 組立 라인 모습은 該當 工場만의 問題는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單純히 不良을 줄이자거나 品質을 높이자는 程度로 말해서는 고쳐질 性質의 狀況이 아니었다는 判斷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황영기의 말이다. 

    “瀉出 技術이 不足했던 國內에서 그런 일은 三星에만 該當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하루 物件을 納品하는 것에만 置重하던 時代였다. 그게 우리 製造業의 全般的인 現住所였다. 하지만 이 會長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洗濯機 뚜껑을 칼로 깎는 짓은 野蠻的이며 그런 일을 버젓이 하면서 日本人 拷問들을 排斥하고 있다는 생각에 結局 暴發한 거다.” 

    李 會長은 곧바로 서울에 있는 李鶴洙 祕書室 次長에게 電話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社長들과 任員들을 全部 프랑크푸르트로 모이게 하라. 이제부터 내가 直接 나선다.” 

    갑작스러운 불號令을 받은 核心 經營陣 200餘 名이 허겁지겁 飛行機에 몸을 실었다. 윤종용 삼성전자 社長, 祕書室 김순택 經營管理팀長, 현명관 삼성물산 建設部門 社長을 비롯해 큰兄 이맹희의 長男이자 長조카 이재현 제일제당 常務(當時 33歲), 작은兄이자 故人이 된 둘째 兄 이창희의 長男 李在寬 새한미디어 社長(當時 30歲), 아들 이재용 現 三星電子 副會長(當時 25歲) 等이 續續 獨逸 프랑크푸르트 外郭에 있는 그라벤브루흐 所在 캠핀스키 팔켄슈타인 호텔에 到着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