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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白善燁은 眞正한 英雄이었다|신동아

내가 만난 白善燁은 眞正한 英雄이었다

英雄이 없는 게 아니라 英雄을 보지 못하는 우리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0-07-15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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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문명이 만난 사람]

    • 美步兵博物館에 울려 퍼지는 百 將軍의 育成

    • “내가 後退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美軍 高位人士 “白善燁은 韓國의 조지 워싱턴”

    • “師團長이 先頭에 서서 直接 突擊에 나섰다”

    • 白 將軍이 親日派면 日帝强占期를 산 모두가 親日派

    • 90歲 넘어서도 惡夢을 꾸다

    • 曺國은 白善燁을 잊은 지 오래였다

    백선엽 장군. [동아DB]

    백선엽 將軍. [東亞DB]

    2009年 6月 19日 美國에서 뜻깊은 博物館이 開館했습니다. 조지아州 콜럼버스시 포트베닝 陸軍步兵學校 內 步兵博物館입니다. 2年 7個月 工事 끝에 낡고 좁던 建物이 번듯한 3層 建物로 탈바꿈했습니다. 開館日은 234年 歷史를 가진 美國 陸軍 步兵 創設 記念日이었습니다. 

    ‘軍(軍)의 根幹’이라 할 步兵의 歷史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이 博物館 3層에는 6·25戰爭 展示館(415m²)도 있습니다. 韓國 政府, 三星그룹, 韓國軍 將校들의 募金이 主要 財源이 돼 마련된 空間입니다.

    美步兵博物館에 울려 퍼지는 백선엽 將軍의 育成

    7월 15일 오전 대전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뉴시스]

    7月 15日 午前 大田市 유성구 國立大前賢充員에서 ‘高(故) 백선엽 將軍 安葬式’이 열리고 있다. [뉴시스]

    다양한 視角 資料를 갖춘 展示館 안에 들어서면 한 韓國人 老兵(老兵)의 목소리가 흐릅니다. 7月 10日 別世한 6·25戰爭 英雄 고(故) 백선엽 將軍의 育成입니다. 白 將軍이 博物館 開館 3個月 前 直接 訪問해 錄音한 것이라고 합니다. 

    白 將軍이 美國을 다녀온 直後인 2009年 7月 記者에게 淡淡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當時 雰圍氣를 傳하던 表情과 音聲에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났습니다. 

    記者는 2009年 6月 그의 6·25戰爭 回顧錄 ‘君과 나’(時代精神)의 監修를 맡은 因緣으로 故人과 數次例 만나 食事하고 對話할 機會가 있었습니다. 그를 만날 때마다 살아 있는 戰爭英雄, 오늘의 大韓民國을 있게 한 ‘참軍人’에 對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부끄러움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그를 용산 美8軍 司令部에서 만났습니다. 食事를 마치고 그와 함께 境內를 걷는데 젊은 美軍들이 먼발치에서 알아보고 뛰어와 敬禮를 했습니다. 속으로 살짝 衝擊을 받았습니다. 果然 우리 韓國의 젊은 軍人 中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떻게 젊은 美軍들이 그를 멀리서 알아보고 敬禮를 할까 궁금症이 일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事實이지만 駐韓美軍들에게 그는 ‘살아 있는 傳說(living legend)’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白善燁은 韓國의 조지 워싱턴”

    歷代 駐韓美軍司令官들은 ‘韓國戰爭의 英雄이신 백선엽 將軍님’을 呼名하며 이·就任辭를 하고 있었고 美 國防部 職員들은 每年 리더십 敎育으로 百 將軍 講演을 들으러 訪韓하고 있었습니다. 將軍 進級을 한 美軍들도 韓國에서 그의 戰鬪 指揮 體驗을 듣는 게 必須 코스였습니다. 

    駐韓 美8軍은 美軍 部隊에 配屬된 韓國軍(카투사·KATUSA) 優秀 兵士에게 주는 賞을 ‘白善燁上’이라 명명하고 있었으며 國內 美8軍 隸下 27個 部隊도 每年 6月이 되면 앞다퉈 그를 招請해 講演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1992年 펴낸 英文版 ‘From Busan to Panmunjeom(釜山에서 板門店까지)’은 駐韓 美軍은 勿論 戰死(戰史)나 軍에 關心이 있는 사람들의 必讀書로 꼽히는 美國 內 스테디셀러로 韓國에 配屬되는 美軍은 當然히 읽어야 할 冊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얼굴을 잘 알고 있을 젊은 美軍들이 먼발치에서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거지요. 

    白 將軍은 2013年 名譽 美8軍司令官에 任命됐고 2016年엔 韓國人 最初로 美8軍司令官 이·就任式에 招待되기도 했습니다. 白 將軍 生日에는 恒常 駐韓美軍司令官이 參席했는데 그러고 보니 海里 해리스 駐韓 美國大使가 휠체어를 탄 將軍 앞에서 무릎을 꿇고 生日을 祝賀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러니 그의 別世 消息에 美軍 全·現職 將星들이 眞心으로 가슴 아파하는 哀悼辭를 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지요. 이들의 追悼辭는 乾燥하고 儀禮的인 멘트가 아닌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眞正한 尊敬心이 묻어나는 言語들이 담겨 있습니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駐韓美軍司令官은 “眞心으로 그리워질 英雄이자 國家의 寶物”이라고 했고, 버웰 벨 前 駐韓美軍司令官은 美國 獨立戰爭을 이끈 ‘조지 워싱턴’에 比喩했으며, 존 틸럴리 前 駐韓美軍司令官은 “나의 스승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밖에 제임스 서먼, 빈센트 브룩스 前 駐韓美軍司令官들도 앞다퉈 追慕 聲明을 냈습니다.

    靑瓦臺가 할 말을 白堊館이 代身해

    美國 白堊館과 高位 將星들의 이런 모습은 11年 前 龍山 美軍基地 境內에서 만난 젊은 美軍들의 敬禮와는 또 다른 울림을 줍니다. 軍人으로서 함께 戰場을 누빈 兄弟愛 같은 게 느껴집니다. 實際로 白 將軍의 存在는 美國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싸운 戰爭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證言者로서의 意味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不在가 크게 여겨졌으리라 斟酌이 됩니다. 

    더 깜짝 놀랐던 것은 白堊館 國家安保會議(NSC)가 7月 12日(現地 時刻) “白 將軍 같은 英雄 德分에 韓國은 繁榮한 民主共和國이 됐다”고 哀悼 聲明을 낸 일일 것입니다. 白堊館이 最高 外交安保機構인 NSC 名義로 現職도 아닌 轉役한 外國 將星의 죽음에 別途 聲明을 낸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靑瓦臺가 해야 할 말을 白堊館이 代身하는 昨今의 狀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難堪할 따름입니다. 

    그의 6·25戰爭 回顧錄 ‘君과 나’에는 戰鬪 곳곳에서 한 몸이 돼 싸웠던 美軍과의 逸話가 많이 登場합니다. 故人은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戰鬪를 치르면 民族과 나라를 넘어 同志가 된다. 피로 맺어진 同盟, 血盟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기꺼이 犧牲한 나라 國民들은 남이 아니라 兄弟다.” 

    6·25戰爭에서 百 將軍이 美軍과 함께 遂行한 作戰은 숱하게 많으나 最高의 前과(戰果)는 洛東江 最前線의 다부동 戰鬪일 것입니다. 

    白 將軍이 이끌던 1師團은 開戰 初期 臨津江 戰線에서 北韓軍의 首都 進入을 끝까지 沮止하다 서울이 陷落되는 바람에 거의 맨손으로 漢江을 넘다시피 합니다. 白 將軍은 流浪하는 兵士들을 끌어모아 水原 附近 풍덕천 戰鬪에서부터 洛東江 戰線에 이르기까지 끈질긴 接戰으로 敵의 南下를 遲延시키면서 洛東江 最後 防禦線 다부동에 이릅니다. 

    1950年 8月이었습니다. 銃도 제대로 支給받지 못한 1師團은 手榴彈과 銃劍을 動員한 肉薄戰을 벌이며 한 달 넘게 그야말로 血戰을 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北韓軍 2萬餘 名의 總攻勢를 3代 1도 되지 않는 8000餘 名 兵力으로 막아냅니다. 다부동 戰鬪의 勝利는 以後 聯合軍의 反擊과 仁川上陸作戰의 契機를 만듭니다.

    “내가 後退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1952년 9월 3일 미국 유학을 떠나는 장교단 환송 행사에 참석한 백선엽 장군(왼쪽).

    1952年 9月 3日 美國 留學을 떠나는 將校團 歡送 行事에 參席한 백선엽 將軍(왼쪽).

    이 다부동 戰鬪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戰爭史가(史家)들은 스파르타의 300勇士가 마케도니아 海岸의 테르모필레 峽谷에서 페르시아 大軍을 막다가 全員 玉碎한 戰死(戰史)와 種種 比較할 程度입니다. 다부동 戰鬪는 美軍과의 첫 合同作戰이었습니다. 孤立된 高地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戰鬪에 지쳐 後退하던 部下 軍人들에게 피를 吐하며 督勵하던 白 將軍의 有名한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더 後退할 場所가 없다.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美軍을 보라. 美軍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後退하다니 무슨 꼴이냐. 對한 男兒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先頭에 서서 突擊하겠다. 내가 後退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師團長이 先頭에 서면 敵의 標的이 되고 狙擊되면 部隊를 指揮할 사람이 없어집니다. 그런데도 師團長이 몸을 사리지 않고 ‘突擊 앞으로’를 외치니 兵士들의 悲壯함이 어떤 水準으로 高揚됐을지는 斟酌이 가고도 남습니다. 

    當時 다부동 戰場에서 百 將軍과 함께 싸우다가 1971年 駐韓美軍司令官으로 오게 된 존 마이켈리스는 大領으로 參戰한 6·25戰爭을 回顧하면서 “師團長이 先頭에 서서 直接 突擊에 나서자 兵士들의 喊聲이 골짜기를 振動했다. 韓國軍은 新兵(神兵)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回顧합니다.(‘군과 나’ 參照)

    “當時 美軍 指揮官들은 韓國軍 部隊의 戰鬪 能力과 指揮官 能力을 銳敏하게 觀察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언제 韓國軍과 聯合해 싸우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美軍이 1師團과 白 將軍의 戰術能力과 戰鬪精神을 믿지 못했다면 다부동 골짜기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血盟이라지만 美軍은 남의 나라 國民입니다. 더구나 第2次 世界大戰 後 平和를 謳歌하다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 徵兵돼 온 美軍 兵士들이 잘 싸워주기를 바라는 것도 無理인데 自己 나라를 自身들이 지키겠다는 意志와 결氣가 없는 남의 나라 軍隊를 지켜줄 理는 萬無하겠지요. 白 將軍은 이런 點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白 將軍의 말입니다. 

    “우리가 山 위에서 擊退되면 美軍은 골짜기에서 孤立된다. 美軍이 무너지면 우리는 山中에 孤立된다. 相對에 對한 信賴가 없으면 不安해서 싸울 수가 없다. 美軍도 狀況이 좋을 때는 ‘오케이’ ‘오케이’ 하지만 不利할 때는 冷酷하게 變한다. 國軍이 自己 責任을 完遂해 信賴를 얻고 그들로부터 도와줄 價値가 있는 戰友라는 信任을 얻지 못하면 聯合作戰은 成功하기 어렵다.” 

    6·25戰爭 當時 유엔軍司令官을 지낸 매튜 B 리지웨이 유엔軍司令官과 제임스 A 밴플리트 美8軍司令官도 ‘君과 나’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白善燁을 처음 만난 것은 1951年 初였다. 우리의 指揮下에 있을 동안 白善燁은 師團, 軍團, 그리고 그보다 높은 指揮系統을 거치며 繼續해서 뛰어난 能力을 보여주었다. 그가 大韓民國 陸軍에서 가장 뛰어난 作戰 指揮官이라는 데는 異見이 있을 수 없다. 戰鬪란 리더십을 檢證하는 가장 苛酷한 試驗場이다. 무엇보다 그는 職業軍人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基本的이고 確固한 敎義인 國家에 對한 忠誠, 個人에 對한 名譽, 道德的 勇氣, 部下들에 對한 變치 않는 愛情, 그리고 勝利를 向한 意志가 있었다.” 

    白 將軍은 美軍 德分에 목숨도 여러 番 求합니다. 1·4後退로 退却하면서 極度의 憤怒와 羞恥心, 虛脫感, 緊張으로 헛소리까지 하던 그를 업다시피 해 트럭에 태워 탈출시킨 사람도 美軍이었고, 戰爭 내내 그를 괴롭힌 말라리아를 完治해준 사람도 美軍 軍醫官이었습니다.

    國軍의 土臺를 만들어준 美軍

    國土의 大部分을 抛棄해야 했던 開戰 初期 國軍은 北韓軍의 敵手가 되지 못했습니다. 訓鍊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小銃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으며 5萬分의 1 縮尺의 細密한 地圖도 없어 掛圖龍 ‘大韓民國 顚倒’에 依存하면서 山과 골짜기를 區別하지도 못한 채 戰鬪에 投入됐습니다. 戰場에서 肉薄戰을 벌여야 했던 그야말로 民兵隊 水準이었습니다. 

    口令도 美國 또는 日本 말을 우리말로 直譯한 것을 使用할 程度였고 兵士들이 6·25戰爭 때 처음 電車를 보고 질려 ‘戰車 恐怖症’에 시달릴 程度였다고 白 將軍은 證言합니다. 

    戰鬪를 하면서 兵力을 增强시키고 新兵들도 훈련시키는 渦中에 兵站 基盤施設까지 닦아야 했던 눈물겨운 現場의 한가운데에 白 將軍이 있었던 것입니다. 

    1950年 11月 20日子 中共軍 第66軍司令部가 刊行한 전훈速報에는 中共軍 副司令官 덩畫家 作成한 記錄이 나옵니다(‘군과 나’ 參照). 

    “美軍은 戰車와 砲兵의 協同 戰鬪가 臟器다. 空軍의 垈地 攻擊力도 强하다. 그러나 步兵이 弱하다. 죽음을 두려워해 果敢한 攻擊이나 陣地를 死守하겠다는 意志가 없다. 낮에만 行動하는 버릇이 있다. 夜間戰鬪나 近接戰에는 아주 未熟하다. 普及이 끊기면 곧 戰意를 喪失하고 後方을 遮斷하면 스스로 물러난다. 韓國軍은 모든 面이 未熟하다. 訓鍊이 絶對 不足하다. 火力과 戰鬪力을 比較할 때 美軍 師團의 3分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戰意는 어느 程度 갖추고 있다.” 

    國軍이 後날 베트남戰爭에서 美軍과 어깨를 나란히 할 程度로 成長한 것은 6·25戰爭에서의 經驗 때문이었으며 여기에는 美軍의 도움이 決定的이었다고 白 將軍은 말합니다. 

    實際로 戰爭 期間 國軍은 美軍이 提供하는 集中 訓鍊을 받았습니다. 美軍에게 받은 訓鍊이 오늘날 陸軍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基礎가 됐습니다. 大邱參謀學校가 設置됐고(1951. 12.) 4年制 陸士가 鎭海에 創設됐으며(1952. 1.) 1951年 末에는 美 步兵學校에 將校 250名, 美 砲兵學校에 100名을 短期 留學시켜 陸軍이 急成長하는 契機가 됐습니다. 休戰 때까지 戰線의 3分의 2를 國軍이 擔當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土臺 德分이었습니다. 

    白 將軍은 生前에 卓越한 美軍들과 함께 일했던 것이 대단한 榮光이었다며 代表的인 사람으로 리지웨이 司令官을 꼽습니다. 

    “서울 收復을 함께했던 리지웨이 司令官은 지프를 타고 一一이 戰場을 누비며 將兵들의 敬禮만 보고도 詐欺를 評價했고 掌匣과 洋襪은 제대로 普及되고 있는지, 兵士들이 따듯한 飮食을 먹고 있는지, 甚至於 故鄕에 보낼 便紙紙를 갖고 있는지까지 神經 쓴 細心한 司令官이었다.”

    白 將軍이 親日派면 日帝强占期를 산 모두가 親日派

    白 將軍은 1920年 11月 23日 平壤에서 鎭南浦쪽으로 2㎞ 떨어진 平安南道 江西郡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났습니다. 講書地方은 일찍이 西洋 文物과 基督敎가 傳播됐고 敎育熱도 剛한 곳입니다. 島山 安昌浩, 古堂 曺晩植 先生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白 將軍은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平壤으로 移徙 옵니다. 生活苦를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三男妹를 데리고 大同江 江물에 同伴 投信을 祈禱했을 程度라고 하는군요. 江물로 뛰어들려던 刹那에 큰누나가 “나무도 뿌리를 내리려면 3年이 걸리는 데 우리는 平壤에 온 지 1年밖에 안 됐다. 적어도 3年은 버텨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決心하자”고 痛哭하는 바람에 되돌아 나왔다고 白 將軍은 證言합니다. 

    以後 어머니와 누나가 고무工場 女工으로 일하면서 形便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白 將軍도 普通學校에 入學했으며 優等生들이 主로 入學했다는 名文 平壤師範學校를 1940年 2月 卒業합니다. 卒業班 때 後日 飛行士로 이름을 날린 박영환 等 만주군관학교 學生들로부터 軍人을 해보라는 勸誘를 받고 軍人의 길을 가기로 決心합니다. 

    白 將軍은 生前 인터뷰에서 “극강(克强)으로 가고 있던 日本의 힘을 제대로 알고 싶어 軍人이 됐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滿洲國 軍隊 將校들을 養成하던 2年制 奉天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1942年 初 헤이룽장(黑龍江) 자무쓰(佳木斯)의 滿洲軍 身柄學校 敎官을 1年 程度 歷任한 뒤 配置받은 곳이 ‘間島特設帶’입니다. 그를 向한 ‘獨立軍을 때려잡은 親日派’란 烙印은 바로 이 間島特設帶 服務입니다. 間島特設帶는 日本이 세운 傀儡國家人 滿洲國에 依해 1938年 創設됐습니다. 獨立軍을 掃蕩한 部隊였기 때문에 故人이 獨立軍을 때려잡은 親日派란 主張이 생겨난 겁니다. 

    1930年代 滿洲 抗日鬪爭은 獨立軍이 主軸도 아니고 中國共産黨 指揮를 받는 동북항일연군이 主軸이었습니다. 그가 赴任한 건 1943年 2月로 抗日戀君이 潰滅하고 김일성 等 朝鮮人 殘餘 勢力도 蘇聯으로 逃避한 뒤였습니다. 그런 理由로 白 將軍은 肝도 勤務 時節 巡察 活動만 했고 交戰은 없었다고 生前에 여러 次例 밝힌 바 있습니다. 

    만주군관학교에 入學해 日帝 軍隊의 一員이 된 것을 親日派로 낙인찍는 것도 白 將軍이 1920年에 태어난 植民地 靑年이었다는 點을 생각해 보면 無理한 것입니다. 

    그 時節 朝鮮 땅에서 어느 누가 光復을 豫感할 수 있었겠으며 只今 大韓民國이란 나라 自體를 想像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式이라면 當時 朝鮮에서 태어나 日帝가 强要한 敎育을 받고 職業을 가진 사람 모두를 親日派로 내몰 수도 있다는 論理가 됩니다. 죽어서 辯護할 수 없는 사람들에 對해 산 者들이 只今의 論理로 裁斷하는 것은 傲慢이자 橫暴입니다. 

    白 將軍은 1945年 8月 9日 小滿(蘇滿)國境을 突破해 滿洲 中心部로 進擊하는 蘇聯軍을 만나 白頭山 登攀路 入口에서 武裝解除를 當합니다. 이때 蘇聯軍을 따라온 韓人 通譯에게 朝鮮 사람들 未來가 어떻게 될지 물었더니 “朝鮮은 곧 獨立된다”고 答했답니다. 그는 이 말을 듣자마자 數百㎞ 먼 길을 꼬박 걸어 故鄕 平壤으로 돌아옵니다. 

    平壤은 이미 蘇聯軍이 占領하고 있었고 金日成이 出現해 急浮上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親戚이 當時 平南人民政治委員會 委員長이던 曺晩植 先生 祕書室長으로 일했습니다. 그 親戚의 紹介로 曺晩植 先生의 祕書室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이 事務室에는 김일성도 가끔 찾아왔다고 하는군요. 白 將軍은 金日成이 後날 우리가 아는 金日成이 되리라고는 想像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數個月 後 曺晩植 先生이 監禁당하자 1945年 12月 27日 38線을 넘어 越南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6年 國軍의 前身인 國防警備隊에 入隊해 釜山 第5聯隊 中隊長을 맡아 國軍 創軍 元年 멤버가 됩니다.

    90歲 넘어서도 惡夢을 꾸다

    白 將軍은 停電이 될 때까지 3年 1個月 2日 17時間이라는 긴 時間 동안 最前線의 野戰指揮官으로 活躍합니다. 北韓의 侵攻으로 軍隊가 釜山 앞바다까지 後退해 밀려 떨어질지 모르는 存亡의 危機에서부터 鴨綠江까지 國軍이 進擊해 統一의 꿈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瞬間까지 6·25戰爭의 最前線을 體驗한 드문 軍人이었습니다. 

    또한 韓美聯合作戰을 實際 狀況에서 數없이 遂行했고, 停戰會談에서 國軍을 代表해 유엔軍 側 代表團 一員으로 敵軍과 마주 앉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前後 陸軍 最高 責任者로서 美軍 援助를 받아 國軍을 再建하는 데도 心血을 기울였습니다. 

    戰場에서는 人間 本性의 맨 밑바닥이 드러나는 法입니다. 白 將軍은 非正常的인 戰爭터에서도 平常心을 잃지 않았고, 部下를 愛情과 誠意로 對함으로써 最大의 忠誠과 前科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며칠間 굶으면서도 部下들에게 먹을 것을 讓步하고 自身은 雪糖물로 버틴 逸話는 有名합니다. 開戰 初期 漢江 以北 戰線에서 退却하는 狀況에서 將兵들에게 한 말에서는 끝까지 목숨을 함께하겠다는 悲壯함이 느껴집니다. 

    “오늘 아침 서울이 陷落됐다. 漢江다리도 爆破됐다. 美軍이 參戰한 模樣이지만 우리나라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于先 始興 步兵學校에서 재집결하자. 如意치 않으면 智異山으로 가자. 거기서 籠城하며 게릴라가 돼 徹底히 抗戰瑕疵. 2, 3年 버티면서 유리한 情勢를 기다리자.” 

    生前 그는 記者에게 “90歲를 넘겨서도 惡夢을 꾼다”고 했습니다. 敵에게 밀리다가 多急하게 소리를 지르며 깨는 꿈을 자주 꾼다고 하면서요. 

    白 將軍은 戰爭 中 잃은 戰友들을 생각할 때 가장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自身을 英雄이라고 치켜세우면 “勇敢하게 나아가 戰鬪를 치르다 숨지거나 다친 將兵들이 眞짜 英雄”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生前에 “戰爭이 터지자마자 서울이 넘어가 退却할 때 間間이 마주친 民間人과 뱃沙工들의 無表情 속에 담긴 怨望과 背信感 어린 눈빛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라고 했습니다. 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軍人이 逃亡을 가느냐는 눈빛이 腦裏에서 떠나질 않았다면서 말이지요. 

    風前燈火의 曺國을 온몸으로 지킨 그의 삶을 돌이켜 보노라면 그 時期 白 將軍이 없었더라면 나라의 運命은 고사하고 내 運命이 어찌 됐을지, 식은땀이 날 程度입니다.

    曺國은 白善燁을 잊은 지 오래였다

    曺國은 白善燁을 잊은 지 事實 오래입니다. 最近까지도 個人的 親分이 있는 몇몇 部隊를 除外하고 大多數 軍隊에서 그를 招請한 일은 別로 없다고 합니다. 6·25戰爭이 南侵인지 北侵인지도 잘 모르는 요즘 靑少年 中 ‘白善燁’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는 聯隊長, 師團長, 軍團長, 參謀總長을 거쳐 國軍 最初 4星 將軍을 지냈습니다. 1956年 5月 25日 鄭·副統領選擧로 李承晩 大統領이 3選을 한 後 大邱 不正選擧 事件으로 內務部 長官이 辭退하자 立脚 提議를 받았지만 軍人으로 一生을 마치고 싶다면서 辭讓했습니다. 平生을 흔들리지 않고 軍人 외길을 걸어온 百 將軍의 삶은 ‘어른이 없다’ ‘英雄이 없다’고 恨歎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英雄이 묻힐 顯忠院 障지를 놓고 벌인 論難은 그 정점일 것입니다. 英雄이 없다고 恨歎할 게 아니라 있는데도 보지 못한 우리의 ‘눈 나쁨’을 恨歎할 일입니다. 故人의 冥福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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