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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度線은 우리 歷史 最初 分割線 아니다|신동아

38度線은 우리 歷史 最初 分割線 아니다

김학준이 다시 쓴 韓半島 分斷 原因①

  • 김학준 檀國大 碩座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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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0-07-30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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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月 15日로 우리 겨레는 分斷 75周年을 맞이한다. 오늘날 南과 北을 통튼 7600萬 겨레가 겪는 苦痛과 悲劇의 뿌리는 바로 이 分斷이다. 分斷이 있었기에 離散家族이 發生했고 戰爭이 뒤따랐으며 37個月을 끈 이 戰爭으로 國土는 蹂躪되고 수많은 同胞가 목숨을 잃거나 浮上했고 다시 한 次例 큰 規模의 離散家族이 發生했다. 무엇보다 南과 北 사이에 敵對感이 높아져 오늘날까지도 解消되지 않은 채 對決을 維持하고 있다. 最近에 와서는 ‘第2의 韓國戰’이 일어날 것 같은 雰圍氣마저 造成되고 있다. 그러면 이 分斷은 都大體 어떤 背景에서 이뤄진 것일까.

    論點1
    韓半島의 地政學的 位置를 내세우는 것은 宿命論으로 非難받아야 할까.

    韓半島의 分斷은 地政學的 位置를 떠나서는 說明하기 어렵다. 새삼 말할 必要 없이, 韓半島는 海洋 勢力과 大陸 勢力 사이에 놓여 있어서 두 勢力의 戰略的 利害가 衝突하는 境遇 어느 한 勢力이 獨占的으로 掌握하거나 두 勢力이 妥協해 分轄함으로써 한 部分만이라도 갖고자 했다. 이러한 意味에서, 게르만 勢力과 슬라브 勢力 사이에 놓여 있어서 두 勢力의 戰略的 利害가 衝突하거나 一致된 境遇 두 勢力에 依해 分割되기도 했고 國家 自體가 消滅하기도 했던 폴란드에 比喩되곤 했다. 

    日帝 植民史學者들은 이 事實에 注目해 半島史觀(半島史觀)을 定立했다. 朝鮮은 半島가 주는 運命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日帝의 植民地가 됐다고 해도 運命으로 받아들인 채 살아야 한다는 뜻을 明示的이건 默示的이건 주입시킴으로써 朝鮮=韓國人의 氣를 꺾고자 했던 것이다. 實際로 朝鮮=韓國人들 가운데 여기에 기울어졌던 사람들은 우리 民族의 將來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一種의 民族虛無主義에 빠졌던 것이 事實이다. 

    이 半島史觀에 積極的으로 挑戰한 國內의 代表的 國史學者가 이기백 敎授였다. 그는 半島가 주는 地政學的 制約을 認定하면서도, 우리 民族의 優秀한 頭腦와 進取的 氣像은 우리 民族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 制約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뛰어넘어 世界史의 進運을 先導하게 될 것임을 力說했다. 

    光復 以後 大韓民國의 歷史는 그 逆說이 억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난 뒤 獨立을 얻은 수많은 나라 가운데 民主化와 産業化를 同時에 成就한 나라는 大韓民國 하나뿐이라는 現實이 그것을 雄辯하고 있다. 大韓民國 國民은 허허벌판 위에 世界 10位圈의 經濟大國을 일으켜 세웠으며 “韓國에서 民主主義를 찾는다는 것은 쓰레기 속에서 薔薇꽃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한 英國 記者의 비웃음을 無色하게 만들 程度로 大韓民國을 ‘民主化의 鞏固化(鞏固化) 段階’로 進入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大韓民國이 折半을 차지한 채 또 다른 折半을 차지한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對峙하고 있는 땅인 韓半島’의 地政學的 性格을 아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海洋 勢力을 代表하는 美國과 大陸 勢力을 代表하는 中國이 힘을 겨루면서 戰爭으로 치달릴 것 같은 險惡한 姿勢를 取하고 있는데, 萬一 두 强大國 사이에 戰爭이 일어난다면 그 불꽃이 韓半島로 번질 可能性을 排除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緊迫한 國際狀況에서 우리가 어떤 立場을 取하고 어떤 政策을 選擇하느냐에 따라 우리 앞날은 달라지게 된다.



    論點2
    38度線이 우리 歷史에서 最初의 分割線이었을까.

    우리는 흔히 1945年 8月 15日 光復과 더불어 주어진 北緯 38導線에서의 分割이 우리 歷史에서 最初의 分割이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틀린 생각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正確한 事實은 아니다. 우리 歷史에서 最初라고 말할 수 있는 分割은 백제와 高句麗를 次例로 멸망시킨 新羅와 唐나라 聯合軍에 依해 7世紀 末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韓半島 西쪽의 大同江과 東쪽의 원산만을 잇는 線을 境界로 以北은 唐나라에 歸屬시키고 以南은 新羅에 歸屬시켰던 것이다. 이 線은 大體로 北緯 39度 2分에 該當된다. 

    여기서 우리가 記憶해야 할 것은 列强이 以後 韓半島의 分割을 考慮할 때 自身들이 ‘韓半島의 목(neck of the Korean Peninsula)’이라고 부르는 이 線을 分割線 候補에 包含시킨다는 事實이다. 例컨대, 美國 國務長官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自身의 名著들 가운데 하나인 ‘外交’에 “1950年 가을에 유엔軍이 38度線을 넘어 北進을 繼續하던 때 이 線에서 멈출 수도 있었다”고 指摘했다. 이것은 이 線을 境界로 韓半島를 分轄함으로써 戰爭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는 뜻을 含蓄하고 있다. 

    高麗 後期에도 이 線에 近接한 北緯 38度 5分의 線에서 分割된 일이 있었다. 元宗 10年인 1269年 서북면兵馬使英(西北面兵馬使營)의 機關(記官) 崔坦(崔坦)李 亂을 일으켜 오늘날의 平壤인 書經을 비롯한 北界(北界)의 54個 成果 자비령 以北의 黃海道 6個 城을 奪取한 뒤 원(元)에 歸附하자, 元 世祖 쿠빌라이는 자비령을 境界로 以北을 東寧府라 명명하고 원에 내속시킴과 同時에 崔坦을 東寧府 總管으로 임명한 것이다. 考慮는 그때로부터 21年이 지난 忠烈王 16年인 1290年에 이르러 겨우 이 地域을 돌려받아 分割에서 벗어났다.

    論點3
    왜 戰爭을 전후한 時點에 分割이 論議됐는가.

    朝鮮王朝에 들어와서는 韓半島가 分割된 일이 없었다. 그러나 朝鮮에서 列强이 介入된 戰爭이 豫見되거나 實際로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分割이 擧論됐다. 

    壬辰倭亂 때의 境遇 | 첫째, 壬辰倭亂 때였다. 宣祖 25年인 1592年 4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命令에 따라 倭軍이 朝鮮을 侵略하자 7月 明나라는 軍隊를 보내 朝鮮을 支援했고 그 結果 1593年 4月 倭軍은 漢陽에서 撤收했다. 大陸國家人 中國은 朝鮮이 海洋國家 日本에 依해 掌握되는 것을 防止하고자 한 것이다. 

    大體로 이때부터 明과 왜 사이에 平和交涉이 開始됐는데, 6月에 이르러 도요토미는 7個項 條件을 提示하는 가운데 朝鮮의 景氣·輕傷·全羅·忠淸 4度를 自身에게 割讓하고 나머지를 朝鮮이나 名이 統治해도 좋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明나라 朝廷에서는 웨이쉐썽(魏學僧)을 中心으로 이 提議에 暫時 關心을 보였다. 그러나 最終的으로 이 要求를 拒否한 데 이어 李舜臣 將軍이 勝戰을 거듭한 朝鮮과 함께 倭를 敗退시킴으로써 分割은 豫防될 수 있었다. 

    淸日戰爭 直前의 境遇 | 둘째, 그때로부터 約 300年 지난 淸日戰爭 直前이었다. 朝鮮을 둘러싸고 淸나라와 日本 사이에 戰雲이 짙어가던 1894年 7月 22日 英國 外務長官 킴벌리 卿은 朝鮮의 北쪽을 請이 占領하고 朝鮮의 南쪽을 日本이 占領하는 條件 아래 두 나라가 戰爭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構想을 두 나라에 提示했다. 그는 占領의 線을 提示하지는 않았으나 萬一 두 나라가 그 提議를 받아들였다면, 그 線은 大體로 北緯 38導線이었거나 거기에 近接했을 것이다. 

    청은 萬一 自身의 占領地에 朝鮮의 首都 漢陽이 包含된다면 그 提議에 應하겠다고 對答했다. 그러나 日本은 勝戰을 確信하고 있었기에 그 提議를 물리쳤다. 이 모든 過程에서 朝鮮 朝廷은 完全히 排除돼 그러한 論議가 進行되고 있다는 事實조차 몰랐다. 

    여기서 우리는 왜 英國이 仲裁案을 내놓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海洋國家인 英國은 같은 海洋國家인 日本을 支援하고 있었다. 그런데 英國이 보기에 淸日戰爭이 일어나면 日本이 반드시 勝利하리라고 確信할 수 없었다. 그래서 日本이 于先 折半이라도 차지할 수 있게끔 分割案을 提示했던 것이다. 

    俄館播遷의 時期 : 38度線이 最初로 提示되다 | 셋째, 俄館播遷 時期와 還宮 以後의 時期였다. 淸日戰爭에서 日本이 勝利해 朝鮮에 對한 影響力을 더욱 크게 確保하게 되자, 朝鮮 朝廷은 大陸 勢力인 러시아(그때의 呼稱으로는 俄羅斯)의 힘을 끌어들여 海洋 勢力인 日本의 影響力을 牽制하고자 했다. 이러한 人痾擧逸(引俄拒日) 政策의 先鋒에 閔妃가 있었다. 日本의 對應은 野蠻的인 閔妃 弑害였다. 놀란 高宗은 1896年 2月 調整을 서울 駐在 러시아公使館으로 옮겨 거기서 親러內閣을 維持했다. 

    唐慌한 日本은 1896年 5月 26日 모스크바의 우스펜스키 大社員에서 擧行된 러시아 皇帝 니콜라이 2世의 戴冠式에 國王의 特赦로 陸軍怨讐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派遣하고 그를 통해 6月 9日 러시아 外務長官 알렉세이 로바노프에게 朝鮮의 分割을 提議하게 했다. 38度線 以北의 朝鮮을 러시아의 影響圈 아래 두고 以南의 朝鮮을 日本의 影響圈 아래 두도록 合意하자는 趣旨였다. 38度線이 分割線으로 提示된 最初의 境遇였다. 

    로바노프 外務長官은 이 提議를 拒絶했다. 그때 러시아는 慶尙南道의 마산포(馬山浦·러시아語 表記로는 Mozampo)를 비롯한 南海岸의 不凍港들에 關心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朝鮮의 國王과 政府가 自國의 公使館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日本의 提議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自國에 決코 不利하지 않다고 計算했던 것이다. 

    러시아 皇帝의 戴冠式에는 朝鮮에서도 宮內府特進官 兼 全權特命公使 閔泳煥을 團長으로 하고 尹致昊를 團員으로 하는 使節團이 參席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흥정을 全혀 把握하지 못했다. 

    俄館播遷 淸算 直後의 時期 | 그때로부터 다시 2年이 지나서 高宗은 러시아公使館 生活을 淸算하고 慶運宮으로 돌아온 以後, 朝鮮을 大韓帝國으로 格上시키면서 改革을 推進하기 始作했다. 이러한 狀況에서, 朝鮮에 對한 러시아의 影響力은 줄어들었으며 日本의 影響力은 커졌다. 

    새로운 轉換을 目擊하면서, 1898年 朝鮮 駐在 러시아公使 알렉세이 드 스페이에는 朝鮮 駐在 日本公使에게 平壤을 包含하는 朝鮮의 北部를 러시아가 차지하고 漢陽을 包含하는 朝鮮의 南部를 日本이 차지할 것을 提議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決戰을 準備하고 있던 日本은 拒絶했다. 


    1904년 2월 9일 인천 제물포항에서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침몰하는 러시아 여객선 ‘순가리호’를 지켜보는 조선인들. [동아DB]

    1904年 2月 9日 仁川 濟物浦港에서 日本 海軍의 攻擊으로 沈沒하는 러시아 旅客船 ‘瞬間犁鶘’를 지켜보는 朝鮮人들. [東亞DB]

    러일戰爭 直前의 境遇 : 39度線이 最初로 提示되다 | 넷째, 러일戰爭 直前이었다. 그사이 日本이 軍事力을 增强시킨 데 이어 1902年 1月 英國과 同盟을 맺고 러시아를 相對로 戰爭도 辭讓하지 않을 態勢를 보이자 러시아는 朝鮮을 分割해 日本을 撫摩시키고자 했다. 1903年 10月 3日, 駐日 러시아公使 로만 로마노비치 로젠 男爵을 통해 日本 政府를 相對로 (1)39度線 以北의 朝鮮을 두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도 軍隊를 보내지 않는 中立地域으로 만들고 (2)그 以南의 朝鮮에 對한 日本의 ‘특별한 利益’을 러시아는 保障한다는 안을 提議했다. 分割線으로서 39度線이 提議된 最初의 事例다. 

    이 提議에 對해, 日本은 恨만(韓滿) 國境을 境界로 삼아 兩쪽에 各各 50㎞의 中立地帶를 設置할 것을 提議했다. 이것은 朝鮮에 對한 러시아의 影響力을 完全히 排除하겠다는 日本 政府의 뜻을 담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 提議를 拒否했다. 이에 日本은 1904年 2月 10日 러시아를 相對로 선전포고했으며, 그 이듬해 러시아를 完全히 굴복시켰다. 

    여기서 다시 想起하고자 하는 事實은 같은 海洋國家인 英國의 積極的인 日本 支援이다. 大陸國家 러시아를 牽制하기 위해 英國은 러시아軍隊가 英國의 影響 아래 있는 수에즈運河를 通過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러시아軍隊는 아프리카大陸을 돌아 印度洋으로 빠져나오는, 길고 지루한 旅路를 航海했다. 이미 그 過程에서 러시아軍은 士氣가 떨어졌으며 막상 決戰場 東海에 當到하면서 禮記(銳氣)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日本軍에게 一敗塗地(一敗塗地)하고 말았다. 

    이제 元來의 質問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왜 韓半島를 둘러싸고 戰爭이 臨迫한 時點 또는 戰爭이 일어난 時點에 分割이 擧論됐는가. 海洋 勢力이나 大陸 勢力은 韓半島를 어느 한쪽이 獨占的으로 支配하는 것보다는 自身도 參與해 分轄함으로써 折半이라도 確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計算했기 때문이다. 

    淸나라를 패배시킨 데 이어 ‘强大國’ 러시아마저 굴복시킨 ‘新興國’ 日本의 完勝 앞에서, 韓半島를 獨占 支配하려는 日本의 野心을 抑制할 나라는 어디에도 없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海洋國家로서 日本을 支援해 온 美國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大統領은 곧바로 日本과 러시아의 代表를 美國 뉴햄프셔주의 軍港 포츠머스로 招請해 日本의 獨占的 朝鮮 支配를 뒷받침하는 條約을 성립시켰다. 英國은 이 條約을 支持했다. 여기에 힘입어 日本은 곧 朝鮮을 ‘保護國’으로 만들었으며 그때로부터 5年이 채 되지 않은 1910年 8月 朝鮮을 完全히 竝呑했다.

    *‘신동아’는 ‘김학준이 다시 쓴 韓半島 分斷 原因’을 7月 30日, 31日, 8月 1日 午前 10時 總 3回에 걸쳐 連載합니다. 이番 記事는 그 첫 番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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