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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 늑장 降伏이 韓半島 分割 가져왔다|신동아

日帝의 늑장 降伏이 韓半島 分割 가져왔다

김학준이 다시 쓴 韓半島 分斷 原因③

  • 김학준 檀國大 碩座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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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0-08-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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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月 15日로 우리 겨레는 分斷 75周年을 맞이한다. 오늘날 南과 北을 통튼 7600萬 겨레가 겪는 苦痛과 悲劇의 뿌리는 바로 이 分斷이다. 分斷이 있었기에 離散家族이 發生했고 戰爭이 뒤따랐으며 37個月을 끈 이 戰爭으로 國土는 蹂躪되고 수많은 同胞가 목숨을 잃거나 浮上했고 다시 한 次例 큰 規模의 離散家族이 發生했다. 무엇보다 南과 北 사이에 敵對感이 높아져 오늘날까지도 解消되지 않은 채 對決을 維持하고 있다. 最近에 와서는 ‘第2의 韓國戰’이 일어날 것 같은 雰圍氣마저 造成되고 있다. 그러면 이 分斷은 都大體 어떤 背景에서 이뤄진 것일까.

    論點10 : 日本은 왜 降伏을 遲延시키고 있었는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1953年 7月 27日 停戰協定 調印式. [美國國立文書記錄管理廳 提供]

    美國과 蘇聯이 코리아로의 眞空을 위한 軍事作戰을 論議할 程度로 戰況은 日本에 決定的으로 不利하게 展開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美國과 英國은 共同으로 日本에 降伏을 要求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日本은 왜 降伏하지 않고 있었나. 

    이 重要한 時點에 日本은 蘇聯과 美國을 相對로 從前과 平和를 위한 이른바 和平工作을 祕密裏에 推進하고 있었다. 蘇聯은 日本의 交涉에 冷淡했다. 스탈린은 日本과의 戰爭에 들어가 勝戰國의 一員이 될 때 얻을 利益이 훨씬 클 것으로 豫想했다. 美國은 暫時 日本 提議에 應함으로써 엄청난 死傷者가 發生할 수 있는 日本 本土에서의 作戰을 避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原爆을 쓰는 것이 낫겠다는 判斷으로 기울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대목이 있다. 그것은 트루먼 大統領의 委囑을 받아 후버 前 공화당 大統領이 이끈 諮問委員團의 建議였다. 그들은 코리아와 臺灣을 日本이 그대로 統治한다는 條件을 提示하면 日本이 從前에 合意할 것이라는 方案을 建議한 것이다. 트루먼은 이 建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建議는 美國이 境遇에 따라서는 코리아를 버릴 수 있음을 말해 주었다.

    論點11 : 무엇이 日本의 降伏을 이끌어냈을까.

    트루먼 大統領의 決定에 따라, 美軍은 日本 現地時刻으로 1945年 8月 6日 아침 히로시마에 原子爆彈을 投下했다. 그런데도 日本이 降伏 意思를 表示하지 않자 美軍은 現地時間으로 8月 9日 午前 나가사키에 두 番째 原爆을 投下했다. 그때로부터 꼭 12時間이 지난 時點에 蘇聯은 日本을 相對로 한 戰爭에 들어갔다. 더는 버티기 어려워졌다고 判斷한 日本은 8月 15日 降伏을 宣言했다. 

    그러면 무엇이 日本의 降伏을 이끌어냈을까. 이 重要한 물음에 對해, 美國 政府는 當然히 美軍의 原爆 投下를 내세웠고, 蘇聯 政府는 蘇聯軍의 參戰을 내세웠다. 學界의 意見도 兩分돼 있다. 그러나 그때 外務大臣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美國이 히로시마에 原爆을 投下한 때로부터 이틀 뒤이면서 蘇聯이 宣戰布告를 하기 直前의 時點에 國王에게 原爆 投下에 關한 狀況을 報告하면서 이를 轉機로 삼아 戰爭 終結을 決心하도록 建議했으며, 國王이 이 建議를 받아들인 事實을 重視하는 境遇, 原爆 投下가 降伏을 이끌어냈다고 解釋해도 無理가 아닐 것이다.



    論點12 : 日本의 늦어진 降伏이 코리아의 分割을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가 매우 遺憾스럽게 생각하는 事實에 着眼하게 된다. 그것은 日本이 平和工作에 매달려 降伏을 늦췄기에 自國 國民에게 엄청난 損害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韓半島의 分割을 가져왔다는 事實이다. 트루먼 大統領이 한때 期待했던 대로 日本이 적어도 8~9日 前에만 降伏했어도 蘇聯軍의 韓半島 進入을 막을 수 있었고, 그렇게 됐으면 韓半島의 分割은 回避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日帝는 敗亡하면서도 우리 民族에게 또 한 次例의 엄청난 損害를 끼쳤다는 非難을 받을 만하다.

    論點13 : 마침내 38導線에서의 分割 : 分割線을 더 올릴 수 없었을까.

    日本의 降伏이 臨迫했음을 確認한 美國 戰爭部는 8月 10日 저녁 韓半島에서 美軍과 蘇聯이 各各 占領할 地域을 確定 지을 線을 마련했다. 具體的으로, 戰爭部 次官補 존 매클로이의 指示를 받아 딘 러스크 陸軍 大領과 찰스 本스틸 陸軍 大領은 함께 그 線으로 38度線을 提示했다. 이미 蘇聯軍이 北緯 41度線까지 進攻해 온 現實을 考慮해, 적어도 首都 서울 그리고 第1項 釜山과 第2項 仁川을 美軍의 占領地域 안에 包含시키는 것으로 滿足할 수밖에 없다는 判斷에서 38度線을 採擇한 것이다. 이 決定을 매클로이 次官補는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의 指示로부터 受諾까지 約 30分이 所要됐다. 

    매클로이는 38度線 案을 國務部·戰爭部·海軍部 調停委員會에 올렸으며, 이 委員會는 8月 12日 이 建議를 檢討했다. 이 자리에 우리가 앞에서 살폈던 존 링컨 准將이 參席해 積極的으로 支持했다. 이에 따라 이 委員會는 이 案을 8月 14日 트루먼에게 報告했으며, 트루먼은 이튿날 스탈린에게 ‘通告’했다. 스탈린은 卽時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로써 38導線에서의 分割이 決定됐다. 

    여기서 우리는 分割에 서글픔을 느끼면서도 分割線의 上向 調整을 擧論한 가드너 海軍 少將의 意見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는 調整委員會議 討論 때 39度線을 提議했지만 링컨의 强力한 反論에 부딪혀 貫徹하지 못했다. 

    美國人 宣敎師로 韓半島의 地理를 깊이 硏究한 섀넌 매큔 敎授에 따르면, 38導線에서의 分割 結果로, 12個의 江과 75個 以上의 샛江이 잘렸고, 수많은 산이 갈렸으며, 181個의 작은 牛馬車길, 104個의 地方道路, 15個의 幹線道路, 6個의 鐵路가 切斷됐다. 이 分割線은 1953年 7月 27日 成立된 朝鮮=韓國停戰協定의 結果 休戰線으로 바뀌었고, 오늘날까지 持續되고 있다.

    *‘신동아’는 ‘김학준이 다시 쓴 韓半島 分斷 原因’을 7月 30日, 31日, 8月 1日 午前 10時 總 3回에 걸쳐 連載합니다. 이番 記事는 그 세 番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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