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백선엽 將軍에게는 ‘죽음보다 敗戰을 두려워한 勇將’ ‘살아 있는 6·25戰爭 英雄’이라는 修飾語가 따라붙곤 했다. 6·25戰爭 激戰 中 하나로 꼽히는 ‘다부동 戰鬪’에서 恐怖에 질린 部下들에게 “내가 앞장설 테니 날 따르라. 내가 물러서면 날 쏴라”면서 督勵했다. 다부동 戰鬪 勝利는 仁川上陸作戰과 平壤 進擊의 발板이 됐다.
白善燁은 韓國보다 美國에서 더 認定받는 戰爭 英雄이었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現 駐韓美軍 司令官은 “眞心으로 그리워질 英雄이자 國家의 寶物”이라고 했다. 버웰 벨 前 駐韓美軍司令官은 美國 獨立戰爭을 이끈 조지 워싱턴에 比喩했으며, 존 틸럴리 前 駐韓美軍司令官은 “나의 스승이었다”고 回顧했다.
白善燁은 生前에 “自由와 平和는 絶對 空짜가 없다” “平和를 위해 戰爭을 記憶하라”고 말하곤 했다. 죽음을 앞두고 病席에서도 大韓民國의 安保를 憂慮하면서 “中國은 믿을 수 없다, 美國과 함께 가야 한다”고 强調했다. 白善燁은 6·25戰爭 때 國軍이 着用한 戰鬪服을 壽衣로 입고 永眠에 들었다.
1950年 10月 19日 平壤 占領 直後 밀番 美1軍團長과 戰況을 살피는 백선엽 將軍. [東亞DB]
1950年 10月 20日 平壤 進擊 때 大同江 隣近 선교리에서 美軍 空軍連絡將校와 함께 美1起兵師團의 位置를 把握하는 백선엽 將軍. [東亞 DB]
1950年 9月 16日 大邱 同村에서 仁川上陸作戰 消息을 들은 백선엽 將軍. [東亞DB]
1950年 8月 23日 洛東江 最前線 다부동에서 신성모 國防部長官을 案內하는 백선엽 將軍. [東亞DB]
1951年 1月 28日 水原飛行場에 到着한 맥아더 元首가 마중 나온 백선엽 將軍과 반갑게 握手하고 있다. [東亞DB]
1951年 2月, 리지웨이 유엔軍 司令官에게 서울 再奪還 作戰 計劃을 報告하는 백선엽 將軍. [東亞DB]
1951年 7月 16日 休戰會談에서 休息을 取하는 UN側 代表團. 왼쪽부터 크레이機 所長, 백선엽 將軍, 조이 除毒, 好디스 所長, 버크 除毒. [東亞DB]
海里 해리스 駐韓 美國大使가 2018年 11月 21日 백선엽 將軍의 生日 祝賀宴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맞잡으며 祝賀하고 있다. [해리 해리스 트위터]
로버트 에이브럼스(왼쪽) 駐韓美軍司令官과 마이클 빌스(오른쪽) 美8軍司令官이 백선엽 將軍의 서울 龍山區 事務室을 찾아가 100歲 生日(지난해 11月 23日)을 祝賀하며 셀카를 찍는 모습. [駐韓美軍 페이스북]
白堊館 國家安保會議(NSC)는 12日 “백선엽 將軍 같은 英雄 때문에 韓國은 繁榮한 民主共和國이 됐다”고 哀悼 聲明을 냈다. 白堊館 NSC가 現職도 아닌 轉役한 外國 將星의 죽음에 別途 聲明을 낸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寫眞은 NSC가 哀悼 姓名과 함께 올린 白善燁의 著書 英文版 ‘From Busan to Panmunjeom(釜山에서 板門店까지·1992). [白堊館 NSC 트위터 캡처]
7月 10日 別世한 백선엽 將軍의 國民葬 市民 焚香所가 마련된 서울 光化門廣場. [박해윤 記者]
7月 10日 別世한 백선엽 將軍의 國民葬 市民 焚香所가 마련된 서울 光化門廣場. [박해윤 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