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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半島 分割은 얄타會談에서 密約되지 않았다|신동아

韓半島 分割은 얄타會談에서 密約되지 않았다

김학준이 다시 쓴 韓半島 分斷 原因②

  • 김학준 檀國大 碩座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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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0-07-31 10: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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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月 15日로 우리 겨레는 分斷 75周年을 맞이한다. 오늘날 南과 北을 통튼 7600萬 겨레가 겪는 苦痛과 悲劇의 뿌리는 바로 이 分斷이다. 分斷이 있었기에 離散家族이 發生했고 戰爭이 뒤따랐으며 37個月을 끈 이 戰爭으로 國土는 蹂躪되고 수많은 同胞가 목숨을 잃거나 浮上했고 다시 한 次例 큰 規模의 離散家族이 發生했다. 무엇보다 南과 北 사이에 敵對感이 높아져 오늘날까지도 解消되지 않은 채 對決을 維持하고 있다. 最近에 와서는 ‘第2의 韓國戰’이 일어날 것 같은 雰圍氣마저 造成되고 있다. 그러면 이 分斷은 都大體 어떤 背景에서 이뤄진 것일까.

    論點4 : 코리아에 對한 信託統治 構想에서 韓半島 分割의 起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日帝가 韓半島를 竝呑한 뒤 國際社會는 그것을 旣定事實로 받아들였다. 어느 한 나라도 國權을 빼앗긴 朝鮮에 對해 弔意를 표하지 않았고 日帝의 暴擧에 對해 抗議하지도 않았다. 이제, 美國에서 李承晩의 抗日獨立運動을 도왔던 로버트 올리버 敎授의 表現으로, 코리아는 ‘잊힌 나라’가 됐다. 

    이처럼 매우 不利한 國際 與件 속에서도, 朝鮮=韓國人이 獨立을 要求하며 抗日運動에 나섰다는 것은 當然하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3·1運動과 大韓民國臨時政府 樹立 그리고 韓國光復軍 創軍 等은 朝鮮=韓國人의 獨立 熱望과 鬪志를 反映했다. 그렇지만 國際社會는 如前히 無關心하거나 冷淡했다. 甚至於 스탈린의 蘇聯은 蘇聯 領土 안에서 活動하던 우리 獨立運動家들의 相當數를 追放하거나 迫害하기도 했다. 

    日本의 朝鮮=韓國에 對한 獨占 支配는 오래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日本의 決定的 敗着이 始作됐다. 美國과 英國 等 海洋國家들의 支援을 받아 朝鮮=韓國을 獨占 支配할 수 있었던 日本은 1941年 軍國主義者들의 잘못된 發想과 判斷으로 오히려 海洋國家들을 敵으로 돌리고 히틀러의 나치獨逸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이탈리아와 손을 잡은 데 이어 그들과 함께 ‘樞軸國’ 同盟을 形成한 채 太平洋戰爭을 일으킨 것이다. 

    當時 美國에서 獨立運動을 이끌던 李承晩이 自身의 名著 ‘日本 내막기’에서 豫見한 그대로였다. 이로써 日本은 나치獨逸과 파시스트이탈리아를 共同의 敵으로 삼은 美國·英國·蘇聯·프랑스·中華民國 中心의 聯合國과 戰爭關係에 들어가게 됐다. 

    이렇게 戰爭이 擴大되면서 聯合國 사이에서 一連의 會談이 열리게 됐고, 그 會談 가운데 몇몇 會談은 朝鮮=韓國의 將來를 다루거나 거기에 影響을 주기에 이르렀다. 이 會談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워싱턴에서의 美·英 外務長官會談(1943年 3月), 美·英·中 頂上 사이의 카이로會談(1943年 11月), 美·英·蘇 頂上 사이의 테헤란會談(1943年 11月), 美·英·蘇 頂上 사이의 얄타會談(1945年 2月), 美·英·蘇 頂上 사이의 포츠담會談(1945年 7~8月) 等이다. 



    이 會談들을 하나하나 個別的으로 分析하기에 앞서 꼭 指摘해야 할 事實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美國은 日帝가 敗亡한 以後 코리아에 卽刻的이면서 完璧한 獨立을 주기보다는 일정한 期間에 걸쳐 코리아에 관계된 國家들이 共同으로 參與하는 信託統治의 實施를 考慮했다는 事實이다. 카이로會談에서 ‘適當한 節次를 밟아(in due course)’라는 曖昧模糊한 句節로 처음 國際會談의 合意文書에 登場한 이 構想에 對해 서로 對立되는 分析이 提示돼 왔다. 이 構想이 結果的으로 蘇聯과 韓半島 分割에 參與하는 結果를 가져오게 되고, 日帝가 敗亡한 以後에도 蘇聯이 韓半島 問題에 介入하는 根據를 마련했다는 主張, 反面에 그 構想을 朝鮮=韓國人이 받아들였더라면 信託統治가 끝난 뒤 分割이 아니라 完全한 統一을 보게 됐을 것이라는 主張이 그것이다.

    論點5 : 蘇聯을 極東展에 끌어들이려고 한 聯合國의 政策에서 韓半島 分割의 起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둘째, 一連의 戰時 聯合國會談에서 特히 1943年 10月 以後, 日本을 相對로 하는 戰爭 이른바 極東展에 蘇聯이 參加하도록 美國이 끈질기게 要求한 事實이다. 日本과의 戰爭을 事實上 혼자 遂行하던 美國은 蘇聯이 同參해 준다면 負擔이 크게 줄어들고 또 戰爭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으로 期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獨逸과의 戰爭을 事實上 혼자 遂行하던 蘇聯으로서는 兵力을 東北아시아로 分散하기 어려웠다. 

    이 問題는 于先 테헤란會談에서 縫合됐다. 美國과 英國이 1944年 5月 1日 유럽에 進攻해 이른바 第2의 戰線을 形成함으로써 蘇聯을 도울 것이라고 約束하고, 蘇聯은 ‘獨逸이 完全히 敗亡한 뒤’ 對日戰에 參戰할 수 있을 것임을 約束한 것이다. 

    이 約束은 1944年 10月 모스크바에서 열린 처칠과 스탈린 사이의 會談, 처칠-스탈린 會談에 蘇聯 駐在 美國大使 해리먼과 住所(駐蘇)美國軍事使節團長 존 딘 所長이 合席한 會談, 美國과 蘇聯 사이의 高位 軍事會談 等에서 더 具體化됐다. 이 一連의 會談에서, 스탈린은 蘇聯이 極東의 日本軍을 擊破하기 위한 計劃을 說明하는 가운데 ‘코리아의 北邊(北邊)에 位置한 港口들’을 蘇聯의 陸軍과 海軍이 占領해야 한다고 提議했고, 美國과 蘇聯은 ‘默認’했다. 이로써 咸鏡北道의 港口들인 雄基·羅津·淸津 等에 對한 蘇聯軍의 作戰에 關해, 비록 默示的이지만, 美國-英國과 蘇聯 사이에 合意가 成立됐다. 

    이 默示的 合意는 韓半島의 將來와 關聯해 重要한 意味를 가졌다. 우리가 앞으로 다시 살피게 되듯, 蘇聯軍의 韓半島 進入에 合意함으로써 結局 韓半島가 美國과 蘇聯에 依해 分割되는 端初를 열어놓은 것이다.

    論點6 : 韓半島의 分割은 얄타會談에서 密約된 것인가.

    1945년 2월 소련 얄타의 리바디아 궁전에 모인 연합국 수뇌들. 앞줄 왼쪽부터 처칠 영국 총리,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들은 승전 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국이 독일을 분할 점령한다는 것 등에 합의했다.

    1945年 2月 蘇聯 얄타의 里바디아 宮殿에 모인 聯合國 首腦들. 앞줄 왼쪽부터 처칠 英國 總理, 루스벨트 美國 大統領, 스탈린 蘇聯 共産黨 書記長. 이들은 勝戰 뒤 美國, 英國, 프랑스, 蘇聯 等 4國이 獨逸을 分割 占領한다는 것 等에 合意했다.

    그 合意로부터 4個月 뒤인 1945年 2月 蘇聯의 얄타에서 美國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大統領, 蘇聯의 스탈린 總理, 英國의 처칠 總理 等이 參席한 聯合國 頂上會談이 열렸다. 얄타는 當時 蘇聯을 構成하던 15個 共和國 가운데 하나인 우크라이나共和國의 크림半島에 位置한 休養港口로, 蘇聯이 解體되면서 우크라이나共和國도 獨立하자 自然히 우크라이나에 歸屬됐다. 그러나 2014年에 러시아의 푸틴 大統領이 크림半島를 되찾아오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所屬으로 굳어졌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韓半島의 分割이 이 얄타會談에서 밀약됐다는 所聞이 定說로 받아들여졌다.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曺國의 分割을 到底히 現實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韓人들은, 그 分割에는 自身들을 數千 年 동안 이러저러한 形態로 괴롭히거나 逼迫했던 周邊 强大國들의 ‘弄奸’李 介入됐을 것으로 確信했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前 大韓民國臨時政府 大統領이면서 ‘프린스턴대학교 政治學 博士’ 李承晩이 얄타會談 直後 ‘얄타密約說’을 提起하자 많은 사람이 쉽게 믿은 것이다. 李承晩이 大韓民國 大統領으로 選出되자 그의 見解는 定說로 굳어져 李承晩 政府 時代에는 敎科書에 그렇게 斷定的으로 쓰였다. 

    그러나 ‘얄타密約說’은 全혀 事實이 아니다. 이 會談에 關聯된 모든 文書가 公開된 뒤 살펴본 結果 어느 쪽도 韓半島 分割을 提起한 일이 없었으며, 韓半島와 關聯해 ‘分割’ 또는 ‘38度線’이라는 單語 自體가 登場한 境遇가 아예 없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얄타會談이 韓半島의 分轄에 對해 無關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會談에서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提議를 받아들여 美國이 많은 代價를 支拂해야 한다는 前提 아래 “獨逸이 降伏한 때로부터 3個月 以內에 極東展에 參加한다”라고 公式 約束했다. 實際로 蘇聯은 그 3個月이 꼭 채워진 1945年 8月 8日 日本을 相對로 宣戰布告를 하고 對日戰에 參加하면서 코리아의 北邊 港口에 進入하기 始作한다.

    論點7 : 트루먼 行政府의 出帆은 韓半島의 運命에 어떤 影響을 미쳤는가.

    그런데 얄타에서 또 하나의 重要한 諒解가 이뤄졌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어느 한 나라에 依한 코리아의 軍事占領에 反對한다는 데 뜻을 같이함으로써 코리아에 對한 ‘共同占領’에 原則的으로 合意한 것이다. 그러나 그 具體的 方法과 內容을 끌어내지 못함으로써 韓半島의 將來를 如前히 曖昧模糊한 狀態로 남겨놓았다. 

    그때로부터 約 2個月이 지난 1945年 4月 12日 루스벨트가 病死했다. 自然히 副統領 트루먼이 곧바로 大統領으로 就任했다. 

    이렇게 트루먼 行政府가 出帆하면서 執行한 外交政策의 性格과 方向에 對해서는 오늘날까지 學界에서 討論이 進行되는데, 그 核心 論點은 2次大戰의 終結을 전후한 時點 以後 展開된 東西冷戰이 트루먼의 大統領職 繼承으로 始作됐다는 主張에 連結됐다. 

    그 代表的 論者가 美國의 國際政治學者 마크 갈리치誤 博士다. ‘冷戰은 아시아에서 始作됐다’는 冊을 쓴 그는 徹底한 反共主義者이면서 反訴主義者人 트루먼이 大統領이 되면서, 共産主義나 蘇聯에 對해 ‘理解하는’ 立場을 取함과 同時에 ‘宥和政策’을 편 前任者와는 달리, 蘇聯과 한 旣存 約束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 約束을 可能하면 지키지 않는 쪽으로 이끌었다고 主張한 것이다. 여기에 對한 反論이 뒤따른 것이 事實이지만, 트루먼 就任 以後 美國이 蘇聯에 對해 强勁한 政策을 쓰기 始作한 것은 事實이다. 그렇게 된 要因으로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指摘할 수 있다. 

    첫째, 當時의 유럽 情勢였다. 蘇聯은 東유럽을 席卷하고 있었으며 特히 폴란드는 徹底히 蘇聯의 衛星國家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스탈린이 얄타에서의 約束을 깨뜨리고 東유럽에서 領土的 膨脹政策을 追求하는 것으로 비쳤다. 또 蘇聯이 유럽에서 占領한 地域들에서 보여주는 人間基本權 侵害와 蹂躪은 트루먼의 反訴反共主義的 信念을 强化시켰다. 

    둘째, 英國 總理 처칠의 거듭된 警告였다. 그는 폴란드의 狀況은 東유럽을 蘇聯의 支配權 아래 두려는 스탈린의 政策을 그대로 證明하고 있다고 主張하면서 聯合國이 果然 얄타協定을 遵守해야 할 것인지 懷疑를 表示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얄타協定의 修正을 要求하는 이른바 얄타修正主義를 이끌었다. 

    셋째, 美國 國內에서 그리고 行政府에서 對蘇(對蘇)强勁論이 優勢해졌다는 事實이다. 그들은 蘇聯의 行態에 미뤄, 東北아시아를 蘇聯의 支配權 아래 두려고 試圖할 危險性이 크다고 警告했다. 따라서 그들은 美國이 이제라도 얄타協定의 틀에서 벗어나 蘇聯의 對日戰 參加를 막아야 한다고 主張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얄타修正主義가 擡頭한 것이다. 

    트루먼의 大統領職 繼承 直後 大田은 終末을 向해 빠르게 進展됐다. 5月 8日 獨逸은 聯合國에 無條件 降伏했다. 나치獨逸의 同伴者였던 이탈리아는 1943年 7月 일어난 쿠데타로 무솔리니를 權座에서 追放한 데 이어 聯合國에 降伏했다. 이렇게 유럽에서 大田이 이탈리아와 獨逸의 敗亡으로 매듭지어진 狀況에서, 美軍은 6月 30日 오키나와 全體에 對한 占領을 完了했으며 日本 本土로의 眞空에 들어갔는데, 이로써 樞軸國들 가운데서 마지막 生存者인 日本의 敗亡은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이제 聯合國의, 特히 美國의 關心은 日本의 將來, 그리고 附隨的으로 日本의 植民地인 코리아에 對해서도 移轉 時期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쏠리게 됐다. 

    코리아에 對한 關心의 核心은 軍事作戰이었다. 이 問題와 關聯해 蘇聯의 對日戰 參加 問題가 다시 뜨겁게 討論됐다. 當時 戰況에 미뤄 蘇聯軍의 參戰이 不可避하다는 意見, 對照的으로 蘇聯軍의 參戰은 結局 코리아를 包含한 東北아시아를 蘇聯의 影響圈으로 편입시키게 될 것이므로 막아야 한다는 意見이 맞섰다. 그러나 大勢는 蘇聯軍 參戰, 蘇聯軍의 韓半島 進入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다만 例外的으로 美國 戰爭部(오늘날의 國防部) 傘下의 合同參謀本部에 所屬된 合同戰爭計劃委員會는 1945年 6月 28日에 作成한 計劃案에서 美國의 韓半島 單獨占領案을 採擇했다. 이완범 敎授가 指摘했듯, 美國은 蘇聯의 韓半島 北部에 對한 關心을 알면서도 코리아 全體를 自身의 勢力圈 안으로 편입시킨다는 方向으로 暫定的 結論을 내린 것이다. 萬一 美國이 이 案을 끝까지 貫徹할 수 있었다면, 韓半島의 分割은 回避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 美國은 이 안을 버리고 蘇聯軍과의 共同點令案을 採擇한다.

    論點8 : 蘇聯은 코리아에 對해 어떤 計劃을 準備하고 있었나.

    비록 廢棄되지만 美國의 合同戰爭計劃委員會가 美國의 韓半島 單獨占領案을 採擇한 그 時點에 蘇聯은 코리아와 關聯해 적어도 두 가지 計劃안을 마련했다. 첫째, 6月 28日 스탈린은 蘇聯軍이 咸鏡北道의 羅津·淸津·隆起 세 港口를 占領한다는 元來의 計劃을 公式的으로 裁可했다. 둘째, 그다음 날에 蘇聯 外務部 極東制2國은 코리아가 앞으로 蘇聯에 對한 攻擊의 발板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코리아에 ‘蘇聯과 코리아 사이에 友好的이고 緊密한 關係를 維持할 政府’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는 建議案을 만든 것이다. 이 建議案은 “코리아에 對해 聯合國이 信託統治를 實施하게 되면 蘇聯은 두드러진 役割을 遂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탈린이 再嫁했을 것으로 推定되는 이 建議案은 무엇을 뜻하는가. 蘇聯은 日帝가 敗亡한 以後의 코리아에 對해 自身의 影響力을 行使할 수 있는 與件을 造成해 놓아야 한다는 意志를 分明히 밝힌 것이다. 이제 코리아에서 蘇聯이 自國의 利益을 놓고 美國과 競爭하거나 對立하게 될 可能性은 높아졌다.

    論點9 : 韓半島의 分割은 포츠담會談에서 密約된 것인가.

    以上에서 살폈듯, 코리아의 將來에 對한 論議가 活潑해지기 始作한 흐름 속에서 1945年 7月 17日 敗戰國 獨逸의 首都 베를린 近郊의 포츠담에서 戰時聯合國會談으로서는 마지막인 會談이 트루먼 美國 大統領과 스탈린 蘇聯 總理 및 처칠 英國 總理 사이에 열렸다. 이 會談이 進行되던 때 英國에서 實施된 總選擧에서 豫想을 깨고 勞動黨이 勝利함에 따라 7月 26日에 總理가 된 勞動黨 黨首 애틀리가 7月 28日부터 英國代表團을 이끌었고 敗北한 保守黨 黨首 처칠은 歸國했다. 

    한때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會談에서 韓半島의 分割이 밀약됐다는 主張이 提起됐다. 얄타에서 決定된 것이 아님이 밝혀지자 그렇다면 포츠담에서 決定된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推測에서 出發한 主張이다. 그러나 이 會談의 記錄이 事實上 모두 公開됨에 따라 그것 亦是 事實이 아님이 밝혀졌다. 다시 말하지만, 코리아에 關해 ‘分割’이라든지 ‘38度線’이라는 單語는 全혀 登場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想起해야 할 點은 이때의 美國 大統領 트루먼이 前任者와는 달리, 共産主義 그 自體와 蘇聯에 對해 徹底히 不信하고 있었다는 事實이다. 그는 共産主義와 蘇聯은 ‘生來的인 惡(惡)의 存在’이면서 ‘속임數의 代價’인 만큼 처음부터 協商을 통해 共同의 目標를 達成할 수 있다는 見解는 非現實的이라는 信念을 지니고 있었다. 特히 會談이 열린 時點에 美國은 原子爆彈 實驗에 成功했기에 훨씬 더 큰 自信感으로 蘇聯을 相對할 수 있었다. 그래서 韓半島를 蘇聯과 나눠 갖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갖지 않았다. 

    오히려 트루먼은 ‘獨逸이 降伏한 때로부터 3個月 以內’에 對日戰에 參加한다는 스탈린의 얄타에서의 約束을 撤回시키거나 無效化시키고 싶은 希望을 가졌다. 바꿔 말해, 蘇聯의 參戰 없이 美國 單獨의 軍事力으로 日本의 降伏을 받아내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그 속셈은 감춘 채 스탈린에게 蘇聯이 對日戰에 參加할 뜻을 如前히 갖고 있는지 물었다. 스탈린은 參戰의 뜻을 分明히 밝혔다. 그러나 스탈린은 蘇聯의 參戰이 8月 15日 以前에는 不可能하다는 趣旨를 덧붙였다. 

    여기서 트루먼은 8月 初旬 日本에 原爆을 投下하면 蘇聯의 參戰 없이도 日本의 降伏을 받아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日本은 勿論이고 코리아와 滿洲도 美國 單獨으로 占領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래서 트루먼은 7月 27日 于先 처칠과 共同으로 日本에 對해 無條件 降伏을 要求하는 포츠담宣言을 發表했다. 스탈린은 이 時點에서는 蘇聯이 日本과 中立·不可侵條約을 維持하고 있다는 事實을 考慮해 이 宣言에 同參하지 않았다. 그는 8月 8日 日本에 對해 선전포고하면서 비로소 이 宣言에 同參한다. 

    위에서 살폈듯, 포츠담 頂上會談에서는 코리아의 分割이 全혀 擧論되지도, 合意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트루먼을 遂行한 美國 軍事代表團과 스탈린을 遂行한 蘇聯軍事代表團 사이에서는 코리아에 다한 共同占領計劃이 原則的인 水準에서 論議됐고, 代替로 코리아의 北쪽은 蘇聯軍이 占領하고 南쪽은 美國이 占領한다는 데 諒解가 成立됐다. 美國 軍事代表團 안에서는 美軍이 占領하는 地域은 ‘38度線에 가까운 선’ 以南이 될 것이라는 意見이 提示됐다. 그러나 美國 軍事代表團이 이 意見을 蘇聯 軍事代表團과 나누지는 않았다. 

    여기서 記憶해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美國 軍事代表團 사이에서 ‘38度線에 가까운 선’을 境界로 美軍과 蘇聯軍이 各各 分割 占領한다는 이 意見이 提示된 자리에 合同參謀本部의 戰略·政策團長 조지 링컨 准將이 參席하고 있었다는 事實이다. 우리가 앞으로 보듯, 그는 美國 政府가 8月 12日, 蘇聯을 相對로 38導線에서의 分割을 提議하기로 決定하는 會議에 參席한다.

    *‘신동아’는 ‘김학준이 다시 쓴 韓半島 分斷 原因’을 7月 30日, 31日, 8月 1日 午前 10時 總 3回에 걸쳐 連載합니다. 이番 記事는 그 두 番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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