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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事件 當時 擔當 書記官 최병효 前大使 證言|新東亞

아웅산 事件 當時 擔當 書記官 최병효 前大使 證言

최병효 前大使 “全斗煥 ‘네윈式 上王政治’ 欲心에 버마 訪問” vs 全側近 민정기 “우스꽝스러운 臆測”

  • 김우정 記者

    friend@donga.com

    入力 2020-10-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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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當時 外務部 書記官, 버마 等 서남아 巡訪 實務 도맡아

    • 巡訪 計劃 없던 버마, 全斗煥이 막판 追加

    • 國政諮問委員들 네윈 만나 全意向 傳했을 것

    • 當時 國政諮問위 關係者 “委員들 네윈 안 만나, 全巡訪과 無關”

    • 버마 外傷 “事故 當日 韓側이 墓所 지붕 點檢”

    • 아베 신타로 日外相, 테러 後 韓國 全方位 支援

    • 韓日關係 只今 같으면 도움 못 받았을 것

    • 全, 治績 자랑하다 事件 言及하니 ‘沈默’

    • 아웅산 墓所 테러, ‘獨裁外交’의 悲劇

    • 證言 담은 冊 ‘그들은 왜 殉國해야 했는가’ 出刊 豫定



    전두환은 네윈이 되고 싶었을까. 

    최병효(71) 前 노르웨이 大使는 “전두환 前 大統領은 長期執權을 위해 獨裁者 네윈의 ‘上王政治’를 模倣하고자 1983年 버마를 訪問했다”고 10月 中旬 出刊될 著書에서 主張했다. 

    1983年 10月 8日, 전두환 當時 大統領은 버마(現 國名 미얀마)를 國賓 訪問했다. ‘西南亞·大洋洲 5個國(버마·印度·스리랑카·濠洲·뉴질랜드) 및 브루나이 巡訪’ 첫 訪問地였다. 北韓과 體制 對決을 의식한 ‘非同盟權’ 外交와 經濟協力이 名目이었다. 到着 이튿날 午前, 專 前 大統領은 버마의 獨立英雄 아웅산 將軍의 墓所를 訪問할 豫定이었다. 韓國 政府 高位人士로 構成된 遂行段이 먼저 到着해 行事場에 堵列한 瞬間, 北韓 工作員이 設置한 爆彈이 터졌다. 서석준 副總理 兼 經濟企劃院 長官·李範奭 外務部 長官 等 閣僚와 함병춘 大統領祕書室長·이계철 州(駐)버마 大使·이중현 동아일보 記者 等 韓國 側 人士 17名이 숨졌다. 

    崔 前 大使는 1982年 3月~1984年 3月 外務部 西南아시아과 書記官으로 勤務하며 當時 大統領 巡訪 關聯 實務를 도맡았다. 巡訪 計劃案 等 重要 公文을 起案했다. 駐노르웨이 大使·州로스앤젤레스 總領事 等을 歷任하고 2009年 隱退해 36年 外交官 生活을 마쳤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記者]

    “17名의 英靈 왜 殉國해야 했는지 記錄 남긴 것”

    崔 前 大使는 自身의 記憶과 關係者 證言, 外交文書를 바탕으로 10月 中旬 ‘그들은 왜 殉國해야 했는가? 버마暗殺爆發事件의 外交的 省察’을 出刊할 豫定이다. 當時 버마 巡訪이 專 前 大統領의 長期執權 構想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 核心 內容이다. 

    “17名의 英靈이 왜 殉國해야 했는지, 當時 實務를 맡은 公職者로서 歷史에 記錄을 남기려 한다”는 崔 前 大使를 만나 인터뷰했다. 

    - 아웅산 墓所 테러 事件에 對해 證言하고 나선 理由는. 

    “나는 버마 巡訪과 關聯해 처음부터 끝까지 實務를 맡은 大韓民國 唯一의 公務員이다. 다만 現職 外交官으로서 機密을 漏泄할 수는 없었다. 退職 後 2014年부터 關聯 外交文書가 조금씩 機密 解除되기 始作했다. 이를 參考해 歷史에 제대로 된 記錄을 남기자는 使命感을 느꼈다.” 

    - 事件의 歷史的 評價는 끝나지 않았나. 

    “그렇지 않다. 只今까지 加害者인 北韓에만 焦點이 맞춰졌다. 北韓의 蠻行을 糾明해 責任을 追窮하는 것은 重要한 포인트다. 다만 그것이 全部는 아니다. 專 前 大統領이 버마에 간 理由를 糾明해야 한다. 버마는 當初 大統領의 巡訪地가 아니었으나 뒤늦게 追加됐다. 전두환 前 大統領은 當時 버마의 獨裁者 네윈 議長을 ‘벤치마킹’하고자 버마를 찾은 것으로 봐야 한다.” 

    네윈(1911~2002) 議長은 1962年 쿠데타로 政權을 잡았다. 1982年 大統領 7年 任期를 마치고 側近 雨傘油를 大統領職에 앉혔다. 1983年 當時에도 執權 社會主義계획당 議長으로서 實權을 維持했다. 네윈 特有의 ‘上王(上王) 政治’다. 專 前 大統領도 이를 의식했는지 2017年 出刊한 ‘全斗煥 回顧錄’ 2卷(495쪽)에서 다음과 같이 言及했다. 

    “當初 外務部가 準備한 서남아 巡訪 計劃에는 包含되어 있지 않았던 버마가 追加된 데 對해 後날 臆測이 提起됐다는 報告를 받았다. 버마의 執權黨인 社會主義계획당 議長 네윈 將軍의 權力 維持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버마 訪問이 追加됐다는 것이 臆測의 內容이라고 했다. (中略) 外務部의 當初 計劃에 버마는 包含돼 있지 않았는데 내가 追加하라고 指示한 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버마 訪問을 追加하게 된 理由가 ‘네윈 云云…’이라는 推測은 그야말로 엉뚱한 想像力으로 지어낸 얘기일 뿐이다.”

    “버마, 巡訪地 檢討에 끼지도 못해”

    - 全 前 大統領이 ‘上王政治’ 欲心에 버마를 訪問했다는 主張의 根據가 무엇인가. 

    “전 前 大統領의 巡訪 日程과 關聯해 外務部가 作成한 ‘西南亞·大洋洲 巡訪計劃案’을 내가 起案했다. 決裁欄에는 外務部 長官과 國務總理, 大統領 세 사람만 있었다. 長官 決裁 後 總理室에 傳達했고 김상협 總理 決裁도 別 頉 없이 이뤄졌다. 1983年 5月 20日 이범석 長官이 大統領에게 計劃案을 들고 갔으나 ‘버마를 追加하라’는 大統領 指示로 返戾됐다. 總理까지 決裁가 끝났고, 그全 數個月 동안 靑瓦臺와 外務部, 安企部가 日程에 對해 協議했다. 이 過程에서 방글라데시·파키스탄 等 다른 나라도 巡訪地로 檢討했으나 버마는 그中에 끼지도 못했다.” 

    - 總理까지 決裁한 ‘巡訪計劃案’은 只今 어디 있나. 

    “外交部 外交史料館에서 찾아봤으나 사라졌다. 前職 外交官들에게 搜所聞해도 그 文書를 봤다는 사람이 없다. 누군가 故意的으로 없애기라도 한 것인지….” 

    專 前 大統領이 當時 버마의 네윈 社會主義계획당 議長을 ‘벤치마킹’하고자 버마를 訪問한 것 아니냐는 疑惑은 여러 次例 提起됐다. 다만 버마가 巡訪地에 追加되기 前, 巡訪 計劃이 어떤 節次로 進行됐는지 具體的으로 證言한 것은 최병효 前 大使가 처음이다.

    “누군가 故意的으로 없앴는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직후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부상자가 수용된 버마 육군병원을 찾았다. [동아DB]

    1983年 10月 9日 아웅산 墓所 테러 事件 直後 전두환 大統領 內外가 負傷者가 收容된 버마 陸軍病院을 찾았다. [東亞DB]

    - 大統領 指示 後 外務部 措置는 어땠나. 

    “當日 李範奭 外務部 長官이 州버마 大使에게 親展을 보냈다. 大統領이 버마 巡訪을 考慮하는데 別問題 없을지 大使 意見을 묻는 內容이었다. 受信者만 읽고 破棄해야 하는 親前이기에 난 그 內容을 元來 알 수 없다. 다만 長官 補佐官이던 김성엽 事務官(前 駐애틀란타 總領事)李 巡訪을 準備하는 實務者도 內容을 알아야 한다며 내게 寫本을 傳達했다. 그런데 하루 만인 5月 21日 저녁, 이계철 臺詞가 ‘駐在國 治安狀態는 良好하다. 버마 政府도 大統領 訪問을 歡迎할 것으로 判斷된다’고 長官에게 親展을 보냈다. 當時 버마 國內에는 叛軍의 活動이 活潑했다. 네윈이 2人者인 情報部長을 肅淸한 지 얼마 안 돼 政局도 不安했다. 이런 狀況에서 駐在 大使가 그토록 짧은 時間에 肯定的 回信을 보낸 것이 疑訝했다. 이 大使도 테러로 殉國했다. 確認할 길 없지만, 現地 大使에게는 버마 巡訪과 關聯해 外務部가 아닌 別途 라인에서 뭔가 指示가 있었던 것 아닐까.” 

    - 버마 訪問은 ‘非同盟 外交’ 底邊을 넓힌다는 名目으로 推進됐다. 

    “根據가 弱하다. 버마가 ‘非同盟 그룹’의 創立 멤버이기는 하나 實際 活動은 消極的이었다. 네윈 執權 後 社會主義 體制를 强化하며 外部와 關係를 漸次 斷絶했다. 例外가 北韓이었다. ‘東南亞의 北韓’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北韓과 가깝게 지냈다. 經濟的으로도 버마는 韓國에 魅力이 없었다. 當時 아시아 最貧國으로서 韓國 企業이 投資할 餘地도 없었다. 그 時點에 大韓民國 大統領이 버마에 간다는 것은 네윈式 統治 制度를 參考하려는 意圖로 읽힐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崔 前 大使는 “大統領의 ‘버마 追加’ 指示를 듣고 나니 번뜩 떠오르는 事件이 있었다. 그에 앞서 國政諮問會議(1980年 設置된 憲法上 大統領 諮問機構로 國家元老諮問會議로 改稱 後 1989年 事實上 廢止됐다.) 委員들이 뜬금없이 버마를 訪問한다며 外務部에 協助를 要請했다”며 다음과 같이 回顧했다. 

    “大統領의 ‘버마 追加’ 指示 열흘 前쯤, 國政諮問會議가 外務部에 公文을 보냈다. 이영섭 前 大法院長 等 國政諮問委員 3名이 버마·印度·스리랑카를 訪問하니 外務部가 各國 公館에 協助해 달라는 것이었다. 國政諮問委員들이 修交國이지만 社會主義 體制인 버마에 가는 것이 疑訝했다. 外遊性 旅行으로 斟酌하고 長官 名義의 專門을 起案해 김병연 亞洲局長(前 駐노르웨이 大使) 田結로 州버마 大使에게 보냈다.” 

    - 國政諮問委員의 버마 訪問이 大統領 巡訪과 무슨 關係인가. 

    “놀라운 것은 이들이 버마에 가서 네윈을 만났다는 點이다. 네윈은 元來 다른 國家元首도 잘 안 만나주는 人物이다. 專 前 大統領도 버마 到着 後까지 네윈을 만날 수 있을지 不透明했다. 큰 事故가 나자 네윈 側이 謝過 次元에서 專 前 大統領과 만났다. 國政諮問委員職은 名譽職에 不過했다. 네윈이 만나줄 理由가 없다. 國政諮問委員들이 버마의 統治體制를 參考하려는 專 前 大統領의 親書를 所持했던 것 아닌가 疑心된다. 當時 州버마 大使館의 송영식 參事官(前 주호주 大使)도 네윈이 國政諮問委員들을 만나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하지 않나.” 

    송영식(80) 前 大使는 2012年 出刊한 回顧錄(‘나의 이야기-38年 外交 人生 그리고 삶과 家族’)에서 專 前 大統領의 버마 訪問이 빠르게 進行된 理由가 “이영섭 前 大法院長을 團長으로 하는 國政諮問會議 代表團이 國賓 訪問 可能性 打診 訓令 時期와 겹치는 5月 25日부터 5月 28日까지 미얀마를 訪問해 네윈 黨議長을 비롯한 政府 要路 接觸과 外務長官 晩餐 參席 等의 親善外交 活動을 展開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164쪽)고 言及했다. 

    宋 前 大使는 9月 8日과 14日 두 次例 電話 通話에서 “當時 國政諮問委員들이 버마에서 네윈을 만났는지 正確히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記者가 回顧錄의 該當 句節을 읽어주니 “내가 記憶이 생생할 때 回顧錄을 썼으니, 그렇게 썼다면 國政諮問委員들이 네윈을 面談했을 可能性이 있다”고 말했다.

    當時 國政諮問위 關係者 “雨傘油 만나 ‘88올림픽 支援’ 要請”

    최병효 前 大使의 主張과 相衝하는 證言도 있다. 1983年 當時 大統領政務祕書官으로서 國政諮問會議 業務를 봤던 김두영(80) 氏는 “當時 이영섭 前 大法院長(2000年 別世)과 홍승만 前 大韓辯護士協會長(1986年 別世), 고재필 前 議員(2005年 別世) 等 國政諮問委員 3名은 버마·印度·스리랑카를 訪問했다. 내가 遂行次 同行했다”면서도 “國政諮問委員들은 네윈을 만나지 않았다. 내가 陪席한 가운데, 雨傘油 大統領을 만나 ‘88올림픽을 서울에서 開催할 豫定이니 支援해 달라’고 얘기했다. 大統領 親書도 없었다”고 말했다. 

    國政諮問委員들이 버마를 찾은 理由에 對해 묻자 “當時 國政諮問委員들이 세 名씩 팀을 이뤄 世界 各國을 親善 訪問했다. 專 前 大統領 巡訪과는 全혀 關係없다”고 答했다. 버마 訪問이 ‘네윈式 統治 體制’ 參考와 聯關 있는 것 아니냐는 質問에는 “말도 안 된다. 배우려면 韓國에서도 硏究할 수 있다. 버마 大統領을 만나 論議할 얘기도 아니잖나”라고 말했다. 

    崔 前 大使는 當時 警護의 虛點에 對해서도 새로운 證言을 했다. 그는 “이제까지 버마 側이 韓國 警護室의 事前 點檢을 막아 爆彈을 미리 探知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버마 側이 아웅산 墓所가 버마의 ‘聖域’이라는 理由를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韓國 側의 警護 責任을 稀釋하려는 辨明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仔細히 說明해 달라. 

    “내가 버마 側의 反論을 直接 들었다. 1983年 10月 13日 서울에서 ‘殉國外交使節 合同國民葬’李 嚴守됐다. 外傷을 團長으로 하는 버마 側 弔問使節團은 10月 12~14日 2泊 3日 日程으로 訪韓했다. 버마 外相은 14日 신라호텔에서 이원경 體育部 長官(아웅산 墓所 테러 事件 關聯 政府特使. 이범석 長官 後任으로 外務部 長官 任命)과 朝餐 席上에서 ‘버마 側이 韓國 警護員의 아웅산 墓所 事前 調査를 禁했다는 韓國 言論 報道는 事實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當時 김병연 亞洲局長과 함께 朝餐에 同席한 나는 버마 外相의 發言을 記錄해 뒀다. 該當 記錄은 只今도 外交部에 ‘버마暗殺爆發事件 經緯 및 處理結果’란 題目으로 保管돼 있다.” 

    - 그런 事實이 只今껏 알려지지 않은 理由는. 

    “事件 直後 버마 政府의 公式 見解를 確認한 것은 (이원경 長官, 김병연 亞洲局長과) 내가 처음이다. 버마 側은 韓國 言論 報道에 抗議했을 뿐, 問題를 더 키우고 싶지 않아 했다. 나도 現職 外交官 時節에는 機密을 嚴守해야 해 밝힐 수 없었다. 이제야 말하는 것이다.” 

    崔 前 大使는 自身의 證言을 뒷받침할 또 다른 根據가 있다고 말했다. 日本 側이 버마 外相의 主張을 再次 確認해 줬다는 것이다. 崔 前 大使는 “버마 大使는 우리와의 朝餐 이튿날, 아베 신타로 外相이 도쿄에서 主催한 晩餐에서도 ‘韓國 言論이 나를 非難하는 態度를 보였다. 버마 側이 聖域이라는 理由로 墓所 事前 點檢을 拒否했다고 虛僞 報道했다’고 强調했다”고 말했다.

    “日, 韓國 側 付託으로 버마 外傷 招請”

    - 버마 外相이 日本에서 한 發言을 어찌 아나. 

    “日本 外務省이 우리 側에 알려줬다. 이 또한 ‘버마暗殺爆發事件 經緯 및 處理結果’에 記錄했다. 애初에 아베 外相이 歸國길의 버마 외상을 招請해 晩餐을 연 것도 韓國 側 付託에 따른 것이다. 日本이 버마 側에 早速한 眞相 糾明을 當付해 달라는 付託이었다.” 

    - 日本이 事件 收拾과 關聯해 韓國을 도왔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事實이다. 테러 다음 날(10月 10日) 밤, 우리 外交官들이 묵던 호텔로 州버마 日本 大使代理가 찾아왔다. ‘버마 現地의 韓國 外務部 亞洲局長에게 日本大使館이 把握한 狀況을 브리핑하라’는 本國 外務省 指示를 받은 것이다. 訪問 몇 時間 前 버마가 ‘코리안’ 容疑者를 逮捕했는데, 北韓 工作員이었다. 韓國과 日本 모두 아직 이 事實을 모르고 있었다. 日本 大使代理는 이미 諸般 情報를 分析해 우리에게 北韓 所行이 분명하다고 브리핑했다. 그는 12日에도 다시 찾아와 버마 側 事件調査 狀況 等 有用한 情報를 提供했다. 

    아베 外相은 아들(第90·96~98代 日本 總理 아베 新潮)과 달리 자민당 內 親한(親韓) 人事였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當時 總理도 韓國에 親和的이었다. 只今 같은 韓日關係에서는 日本 側 支援을 期待하기 어렵다. 過去事 問題와 關聯해 日本 側에 繼續 抗議하되 外交的 實利는 챙겨야 한다. 專 前 大統領에게 過誤가 많지만 對日外交를 잘했다는 點은 評價해야 한다. 專 前 大統領도 나와 만났을 때 日本과 敦篤했던 關係를 治績으로 내세우더라.” 

    - 全 前 大統領을 直接 만났나. 

    “LA總領事 在職 時節인 2007年 1月, 專 前 大統領이 家族과 LA에 왔다. 前職 大統領으로서 禮遇는 박탈당했지만 모른 척할 수 없지 않나. 專 前 大統領과 골프와 食事를 하는 等 한나절을 함께 지냈다. 내가 當時 外務部 實務者였다며 아웅산 墓所 테러 事件을 擧論했다. 몇 時間 동안 自身의 治績에 對해 얘기하더니 그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더라.” 

    - 아웅산 墓所 테러 事件의 歷史的 敎訓은. 

    “世界 外交史에 前例 없는 慘事였다. 그럼에도 韓國 政府 次元의 綜合的 調査는 現在까지 없었다. 全斗煥 政權 같은 獨裁 政府의 外交는 根本的 限界가 있다. 國民이 아닌 獨裁者의 意向대로 모든 것이 決定된다. 正常的 外交 라인이 아닌 非線이 介入해 意思決定 過程도 非合理的이다. 獨裁 外交란 土壤에 여러 惡材가 겹치면 어떤 慘事가 일어날까? 1983年 버마 아웅산 墓所 테러는 그 結果를 如實히 보여준다.”

    “獨裁 政府 外交는 根本的 限界”

    버마 巡訪 背景을 둘러싼 疑惑에 對해 前 前 大統領의 見解는 어떨까. ‘신동아’는 9月 10日 專 前 大統領에게 郵便으로 取材 質疑書를 보냈다. 1983年 버마 訪問 目的이 버마式 統治 體制에 對한 ‘벤치마킹’이었는지, 國政諮問委員들의 앞선 訪問과 關聯이 있는지 等을 묻고 答辯을 要請했다. 이튿날 專 前 大統領 側 警護員은 記者에게 電話해 “質疑書가 담긴 郵便物을 받았다. 專 前 大統領께 傳達하겠다”고 말했다. 9月 15日까지 全 前 大統領 側은 取材 質疑書에 答하지 않았다. 

    전두환 前 大統領 側近으로 그의 回顧錄을 整理한 민정기(78) 前 大統領公報祕書官은 버마 巡訪이 ‘네윈式 統治 體制’ 參考와 關聯이 있지 않으냐고 묻자 “우스꽝스러운 臆測이다. 그와 關聯해서는 (前 前 大統領) 回顧錄 內容을 보면 된다”고 一蹴했다. 閔 前 祕書官은 專 前 大統領의 健康 狀態에 對해 “알츠하이머라는 것이 病勢가 나아지는 法은 없다. (發病 後) 10年 가까이 되므로 病勢가 좋지 않다. 方今 前 일도 記憶 못 하는 狀況”이라며 取材에 應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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