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蘇聯은 38度線 以北을 ‘直接’ 統治했다|신동아

蘇聯은 38度線 以北을 ‘直接’ 統治했다

김학준이 다시 쓴 現代史 決定的 場面 ③

  • 김학준 檀國大 碩座敎授

    .

    入力 2020-10-02 10:00:02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우리는 지난 回에서 1945年 9月 下旬부터 11月 下旬의 3個月 사이에 美國과 蘇聯이 各各 自國의 占領 地域 안에 自國에 充實할 政府를 세우기 위한 暫定的 計劃을 세운 事實을 指摘했다. 말하자면, 이 時期에 韓半島에서 將次 두 個의 國家가 成立되는 原形이 거친 形態로나마 마련된 것이다. 

    •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까. 

    • 그 原因은 이미 이 時期에 美國과 蘇聯 사이에 世界的 次元에서 展開되기 始作한 冷戰에 있다. 美·小冷戰이 韓半島에 그대로 投影된 것이다. 第3回는 于先 美·蘇冷戰의 初期 樣相을 살피고 이어 그 影響 아래 두 强大國이 各各 南과 北에서 自身에 充實할 政權을 세워나가는 初期 過程에 關聯된 論點들을, 特히 蘇聯의 對北(對北) 占領政策에 焦點을 맞춰 다루기로 한다.

    論點1
    美·蘇冷戰은 언제 어떻게 始作됐나.

    트루먼(앞줄 왼쪽)과 스탈린(앞줄 오른쪽). [GettyImage]

    트루먼(앞줄 왼쪽)과 스탈린(앞줄 오른쪽). [GettyImage]

    美·蘇冷戰의 起源에 關한 論爭은 國際政治學界에서 매우 重要하면서도 뜨거운 論爭 가운데 하나였으며, 自然히 참으로 많은 著述이 出版됐다. 이 制限된 紙面에서 그 論爭을 仔細히 다루기는 事實上 不可能하다. 따라서 單純化해 짧게 說明하기로 한다. 

    스탈린의 急速한 東유럽 소비에트化가 西方世界를 긴장시키다 | 2次大戰을 契機로 聯合을 形成했던 美國과 蘇聯 사이의 協力關係는 나치獨逸의 敗亡이 눈앞에 닥친 1945年 4月 中旬이 되면서 葛藤·對立關係로 바뀌기 始作했다(또는 潛在하던 葛藤·對立이 表面化하기 始作했다). 나치獨逸의 支配 아래 놓여있던 東유럽 國家들을 解放시킨 蘇聯軍은 于先 폴란드를 占領하자마자 自身의 傀儡政府를 세웠으며, 이어 헝가리와 불가리아를 비롯한 나머지 國家들에도 自身의 傀儡政府 또는 親疏政府를 세워나간 것이다. 다만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는 各各 自身의 힘으로 나치獨逸을 물리쳤기에 蘇聯이 自身의 體制를 强要하기가 어려웠다. 

    이때는 蘇聯과의 協力을 重視한 ‘對蘇(對蘇) 宥和主義者’ 루스벨트 大統領이 別世하고 蘇聯을 ‘악(惡)의 存在’로 看做한 典型的 反共·反訴主義者 트루먼이 大統領職을 繼承한 直後였다. 그 스스로도 폴란드 問題를 深刻하게 바라보고 있던 터에, 駐蘇 美國大使 애버럴 해리먼은 勿論이고 英國 總理 처칠도 그에게 蘇聯의 領土 膨脹 政策에 對해 깊은 憂慮를 傳達했다. 그들은 攻擊的인 스탈린의 東유럽 政策을 放置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次例 警告하기도 했다. 

    트루먼, 몰로토프를 차갑게 對하다 | 트루먼은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말라”는 趣旨로 對答하곤 했는데, 그의 强勁 政策은 大統領에 就任한 때로부터 11日이 지난 4月 23日에 確然하게 드러났다. 白堊館을 豫防한 蘇聯 外務長官 몰로토프의 人事를 받자마자 憤怒한 목소리로 몰로토프의 發言을 中斷시키면서, 蘇聯이 얄타에서의 合意를 無視한 채 東유럽을 蘇聯의 衛星國家들로 채우려는 政策을 쓰고 있다고 非難하는 ‘講義’ 또는 ‘說敎’를 한 것이다. 山戰水戰을 다 겪은 百戰老將인 몰로토프가 “나는 平生 相對方으로부터 이런 式의 말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라고 대꾸하자, 트루먼은 “貴下는 約束을 履行하십시오. 그러면 貴下는 그런 式의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고 거칠게 反駁했다. 

    트루먼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나치獨逸이 降伏한 5月 8日 直後부터 그사이 美國이 蘇聯에 베풀던 武器 貸與를 一方的으로 끊었다. 스탈린이 激怒했음은 勿論이다. 最小限 이 두 가지만 綜合해도, 展示에 形成됐던 美·蘇 사이의 協助 雰圍氣는 이 時期에 이르러 相當히 損傷된 것이 確實해졌다. 그리고 이 事實을 重視하는 學者들은 이미 이 時點부터 美·蘇 사이에 冷戰이 始作됐다고 主張했다. 



    트루먼에게 責任이 있다 | 어떤 學者들은 狀況이 이렇게 바뀐 데는 트루먼에게 責任이 있다고 主張한다. 그들에 따르면, 그때 스탈린이 유럽에서는 美國과 英國을 비롯한 西方國家들의 憂慮와 境界를 불러일으킬 만한 領土 膨脹政策을 쓴 것이 事實이지만, 아시아에서는 훨씬 신중하게 處身하고 있었는데도 트루먼이 지나치게 反訴敵으로 對應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始作된 冷戰이 以後 어떻게 擴大됐으며, 그 責任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둘러싼 論爭에 對해, 우리는 앞으로 더 仔細히 살필 것이다. 그러나 이 時點에 限定해 살핀다면, 트루먼의 姿勢는 充分히 理解될 수 있다. 東유럽에서 나타난 徹底한 人權彈壓과 共産主義者들의 行悖, 特히 暗殺과 旣存 秩序의 顚覆을 包含한 蘇聯의 反民主的 政治 公爵은 그것이 아시아에서도 되풀이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充分했던 것이다. 이러한 美·蘇 사이의 初期 冷戰은 韓半島의 命運에 直接 影響을 주었다.

    論點2
    蘇聯占領軍의 北韓 統治는 間接統治였나 直接統治였나.

    蘇聯은 當時에도 그러했지만 後날에도 自身이 北韓을 占領하던 時期에 모든 것을 朝鮮人에게 맡겨 朝鮮人에 依한 統治가 實施됐다고 자랑했다. 特히 美國의 南韓占領政策과 比較해, “美國은 南韓을 直接統治했지만 우리는 北韓에 自律權을 주었다”고 敷衍하기도 했다. 이 主題에 關해, 決코 親蘇的이지도 親北的이지도 않은 客觀的 硏究者들도 “美國은 南韓에서 直接統治를 했으나 蘇聯은 北韓에서 間接統治를 했다”는 結論을 提示하곤 했다. 

    美國의 어떤 學者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그들은 “蘇聯의 北韓占領政策은 蘇聯의 東유럽占領政策과 많이 달랐다. 蘇聯이 東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現地人들을 無視하고 强壓 統治를 한 데 비해 北韓에서는 北韓人의 利益과 判斷을 尊重했다”고 論評하면서, 蘇聯의 北韓占領統治를 蘇聯의 東유럽占領統治와 同一視하는 方法은 誤謬라고까지 主張했다. 

    果然 그러했던가. 于先 北韓을 占領한 蘇聯軍 第1極東方面群 傘下 第25軍이 取한 一連의 措置를 살피기로 한다. 

    ‘붉은 軍隊는 무슨 目的으로 朝鮮에 왔는가’ | 北韓을 占領한 蘇聯軍은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의 이름으로 平壤에서 ‘붉은 軍隊는 무슨 目的으로 朝鮮에 왔는가’ 題下의 文件을 發表했다. 이 文件이 언제 發表됐는지에 對해서는 엇갈리는 主張이 여럿 있다. 그러나 蘇聯이 平壤에 駐屯하기 始作한 날인 1945年 8月 24일이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이 文件은 于先 “붉은 軍隊의 威力은 크고도 큽니다”라는 文句로 始作했다. 北韓人들에게 自身의 莫强한 武力을 誇示함으로써 앞으로 蘇聯占領軍에 抵抗하지 말라는 ‘脅迫’을 含蓄한 것이다. 그다음에, “붉은 軍隊는 이 威力을 다른 나라 사람들을 征服함에 利用하지 않았으며 또 利用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다짐하고, “붉은 軍隊는 朝鮮에 소비에트 秩序를 設定하거나 또는 朝鮮을 얻으려는 그러한 目的을 가지지 않았습니다”라고 敷衍했다. 

    더욱 具體的으로, “民主主義 原則과 市民의 自由를 强化하기 위한 目的으로 反日的이고 民主的인 政黨의 創黨과 그것을 위한 모든 活動을 許諾할 것입니다”라고 約束했다. 이 文件은 蘇聯軍의 解放者로서의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充分했다. 

    그러나 現實은 너무나 달랐다. 곳곳에서 婦女子에 對한 性暴行, 北韓 住民으로부터의 財物 奪取 等이 頻繁히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行脚은 1945年 12月 初旬에 이르러 問題의 深刻性을 認知한 本國 政府의 强力한 指示에 따라 中斷된다. 

    그렇지만 그런 일보다 훨씬 더 重要한 일들이 있었다. 蘇聯軍이 入北하기에 앞서, 第2回에서 指摘했듯, 朝鮮人들은 北韓의 모든 곳에서 이미 自治機構들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蘇聯軍은 入北하자마자 그 器具들을 自身의 입에 맞게 改編했으며, 여기에 抵抗하거나 어긋나는 사람들을 除去했다. 約 30萬 名에서 50萬 名에 이르는 北韓 住民의 목숨을 건 脫北·越南은 이러한 背景에서 發生했다. 

    軍警務司令部의 統治 | ‘붉은 軍隊는 무슨 目的으로 朝鮮에 왔는가’ 文件 發表와 同時에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는 1945年 8月 26日에 平壤에 ‘봐나야 코멘다투라’, 곧 軍警務司令部(軍警務司令部) 總司令部를 開設했다. 그러곤 主要한 詩(市)와 軍(郡) 等의 行政單位에 그 地域을 管轄하는 軍警務司令部를 세워, 그 數가 1945年 9月 28日께 時點에서 모두 54個에 이르렀다. 面·里·同意 單位에는 軍警務司令部가 設置되지 않았으나, 郡에 設置된 郡警務司令部의 管轄은 그 아래 單位들에까지 미쳤다. 

    軍警務司令部는 次次 더 擴大됐다. 1948年 中盤에는 그 範圍가 平安南道·平安北道·咸鏡南道·咸鏡北道·黃海道·江原道 等 都合 6個의 道(道)와 7個의 詩 및 85個의 軍에 미쳤으며, 이 모든 地域에 配置된 軍警務司令部 所屬 軍人의 數는 1262名에 이르렀다. 

    結論부터 말해, 그들이 바로 北韓의 實質的 支配者였다. 모스크바에서 當時 蘇聯의 機密文書들을 活用해 蘇聯의 北韓占領政策을 硏究한 전현수 경북대 敎授는 “軍警務司令官은 法令의 效力을 지닌 命令과 指示를 발(發)하고 이의 不履行을 蘇聯軍에 對한 敵對行爲로 處罰할 수 있었다. 그는 親日的인 政黨과 社會團體의 解散과 그 財産의 沒收 그리고 警察署와 憲兵隊의 勤務者들과 日本軍隊 軍務員들의 義務的인 登錄을 命하거나, 銃砲·刀劍·爆發物·라디오放送期의 所持와 製造를 禁할 수 있었으며, 通行時間의 制限은 勿論이고 郵便과 全身의 檢閱 그리고 居住移轉의 制限도 命令할 수 있었다”고 썼다. 

    前 敎授는 이어 “軍警務司令官은 (ⅰ)蘇聯軍 普及에 緊要한 施設과 商業機關 및 生産企業所의 操業 再開를 命하고 勞動者와 事務員의 職場 離脫을 禁할 수 있었으며, (ⅱ)主流 販賣와 密輸 行爲의 禁止, 痲藥業所와 私娼街의 閉鎖, 生必品 價格 統制의 權限도 保有했고, (ⅲ)道路와 橋梁의 修理, 破壞된 建物의 解體, 都市의 淸掃, 精米所와 發電所 및 上水道의 復舊와 軍事施設의 解體를 위한 義務勞動에 住民을 動員할 수 있었다”고 敷衍했다. 前 敎授의 解說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軍警務司令官은 自身의 管轄 地域에서 열리는 모든 集會와 會議에 蘇聯軍 代表를 派遣해 參觀하거나 監視하게 하는 權限을 가졌으며, 모든 演奏會와 演劇 公演을 事前에 檢閱하는 權限을 가졌고, 모든 新聞과 雜誌 및 其他 出版物을 廢止할 수 있는 權限을 가졌다. 

    住民에 對한 徹底한 監視 |
    軍警務司令官의 權限은 그것들 밖에도 더 많았다. 軍隊 內部에 對해서는 勿論이고 住民에 對해서도 麾下의 要員들을 통해 監視할 수 있었다. 그의 指揮를 받는 그들은 “우리 要員들이 모든 것을 決定한다”라는 스탈린의 口號에 따라 行動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政治工作에 熟達된 政治將校들로서, 大衆 動員과 煽動 그리고 反對 勢力 除去를 위한 暴力 行事를 主業으로 삼고 있었다. 

    實際로 當時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의 第2人者로 北韓 全域의 軍警務司令部를 指揮했던 軍事委員 니콜라이 레베제프 所長은 後날 “軍警務司令部는 反人民的 勢力을 絶對로 容納하지 않았다”고 公開 發言했다. 여기서 ‘反人民的 勢力’은 蘇聯軍의 占領統治 또는 共産主義 그 自體를 批判하거나 反對하는 사람 또는 集團을 의미했다. 


    1945년 8월 24일 함경남도 함흥에 도착한 소련 극동군 제25군. [독립기념관 제공]

    1945年 8月 24日 咸鏡南道 咸興에 到着한 蘇聯 極東軍 第25軍. [獨立記念館 提供]

    시베리아로의 流配 | 그 작은 實例들을 指摘해 보자. 이몽(李蒙)을 비롯한 溫乾한 社會主義者들과 無政府主義者들이 平壤의 한 飮食店에서 朝鮮民族社會當 結成을 討論한 事實을 알게 된 平壤의 軍警務司令部는 그 飮食店에 出入한 約 30名을 모두 檢擧했다. 그들은 發起人大會나 創黨式을 열어보기는커녕 政綱政策을 討論해 보지도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야 했다. 이용목(李容穆) 等이 推進한 太極協會 結成도 不法 團體를 結成하려 했다는 嫌疑로 調査를 받았다. 

    또 그때 咸興에서 作家 박연희(朴淵禧) 等과 함께 民主靑年會를 結成한 한교석(韓喬石)에 따르면, 自身을 包含한 民主靑年會의 幹部들은 10月 初 蘇聯軍 當局에 逮捕돼 시베리아로 流配됐다가 平壤刑務所로 移監됐다. 多幸히도 박연희와 한교석은 迂餘曲折을 겪은 뒤 脫北·越南하는 데 成功했지만, 이 事例들은 結社와 集會의 自由가 徹底히 禁壓됐었음을 보여준다. 

    思想과 表現의 自由에 對한 徹底한 彈壓 | 思想의 自由나 表現의 自由 亦是 成立될 수 없었다. 두 가지 事例만 指摘하기로 한다. 하나는 ‘高尙한 寫實主義’의 强要다. 스탈린 治下의 蘇聯은 藝術家들에게 “寫實主義라고 해서 現實 그대로 描寫해서는 안 되며, 소비에트社會의 高尙한 部分을 描寫해야 한다”라는 理論으로써 蘇聯 社會의 어두운 面을 描寫하지 못하게 强要했는데, 軍警務司令部는 이 理論을 北韓에 對해서도 그대로 適用했던 것이다. 

    1946年 12月 ‘응향(凝香) 事件’이 그 한 보기였다. 元山의 藝術人들이 ‘응향’이라는 詩集을 發行하자, 蘇聯軍 當局은 이 詩集이 ‘頹廢的이며 反動的’이라고 規定하고 自我批判을 强要했다. 이 詩集에 寄稿한 詩人 構想(具常) 그리고 表紙化를 그린 畫家 李仲燮(李仲燮)은 이 事件을 契機로 脫北·越南한다. 

    똑같은 일은 平壤에서도 일어났다. 황순원(黃順元)과 楊明文(楊明文) 等이 發刊한 ‘官署詩人집(關西詩人集)’을 ‘부르조아的이고 頹廢的’이라고 斷定한 蘇聯軍 當局은 關係者들을 嚴格히 調査한 뒤 自我批判을 强要했다. 이 일을 契機로 황순원과 양명문 亦是 脫北·越南한다. 

    위에서 指摘한 여러 事實을 綜合해 볼 때, “이제 모든 것이 죄다 朝鮮人 여러분에게 달렸다”라는 1945年 8月 15日子 ‘치스齒牙코프 大將의 布告文’의 그 有名한 句節은 헛말임이 確實했다. “이제 모든 것은 蘇聯占領軍에게 달렸다”가 現實이었다. 

    角度保安部長會議의 事例 |
    蘇聯占領軍이 얼마나 徹底하게 北韓을 直接統治했는지를 말해주는 事例들 가운데 하나가 1946年 7月 1日부터 3日까지 平壤에서 열린 角度(各道)保安部長會議에서 니콜라이 自救累進 大領이 내린 ‘指示’다. 이 會議의 會議錄 前文은 6·25戰爭 期間에 美軍에 入手돼 美國에서 公開됐기에 우리는 그 眞相을 알 수 있게 됐다. 

    이 會議錄에 따르면, 各 道의 保安部長은 自身이 管轄하는 道에서 鐵道警備隊와 受賞警備隊 및 祕密警察을 包含한 警察 全般과 檢察을 管掌하는 實質的 權力者였다. 各 道 保安部長들로부터 報告를 빠짐없이 聽取한 自救累進은 會議를 總括하는 자리에서 ‘指示’를 내렸다. 그는 稱讚할 部分은 稱讚하면서도 批判할 部分은 批判하고 保安要員들이 앞으로 遂行해야 할 任務에 對해 具體的으로 指示했다. 그의 指示가 끝나자, 保安部長會議를 召集한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保安局 局長 최용건은 “重大政治犯 取扱은 반드시 蘇聯軍의 指示下에 執行하라”고 强調했다. 

    保安局이 自體 新聞을 發行하자는 提議에 對해서도 “蘇聯軍司令部가 必要性을 느끼지 않으므로” 그만두자고 結論이 내려졌다. 이러한 問題에서도 最終決定權은 蘇聯駐屯軍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事例는 그저 斷片的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蘇聯軍 占領 아래서 北韓의 크고 작은 모든 問題는 蘇聯駐屯軍의 直接的 ‘指示’에 依해, 또는 同意에 依해 決定된 것으로, 蘇聯의 ‘直接統治’를 證明하기에 充分했다.

    論點3
    蘇聯의 北韓占領統治는 軍政이었나 아니었나.

    蘇聯의 北韓占領統治가 直接統治였나 間接桶치였나에 關한 論爭은 그것이 軍政이었나 아니었나의 論爭과 表裏關係를 形成했다. 直接統治였다는 主張은 그것이 軍政이었다는 主張으로 이어지고, 間接統治였다는 主張은 그것이 민정이었다는 主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핀 軍警務司令部의 役割은 蘇聯軍이 事實上 軍政을 實施했음을 보여주었다. 北韓 全域에 設置된 郡警務司令部가 住民을 監視하면서 北韓을 支配한 것이다. 그 點을 우리는 다음의 論點 4에서 仔細히 보게 될 것이다. 

    民政擔當副司令官職의 新設 | 蘇聯 政府는 日本이 太平洋地域聯合國最高司令部(SCAP)의 司令官 맥아더 怨讐를 相對로 降伏 文書에 調印한 1945年 9月 2日 다음 날에 北韓은 勿論이고 滿洲와 몽골 等 東北아시아의 主要 地域들을 占領한 蘇聯 極東軍 第1方面軍을 沿海州軍管區로 改編했다. 이때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9月 初旬과 中旬 사이에 沿海州軍管區는 北朝鮮駐屯蘇聯占領軍司令部에 軍警務司令部와 別途로 民政擔當副司令官職을 新設했다. 軍警務司令部를 통해 北韓을 徹底히 統制하면서도 蘇聯은 自身이 軍政이 아니라 민정을 實施하고 있다는 印象을 주기 위해 그러한 이름을 붙인 새로운 職責을 만들었던 것이다. 民政擔當副司令官은 우리가 다음에서 보듯 軍警務司令官과 함께 北韓 全般에 關한 占領統治를 强化하는 데 힘을 보탰다. 

    民政擔當副司令官으로는 沿海州軍管區에 所屬된 第35軍 軍事委員 로마넨코 所長이 任命됐다. 그와 그의 參謀들은 1945年 8月 初旬과 中旬 사이 平壤으로 赴任했으며, 行政政治部·司法檢察部·保安檢閱指導部·商業調達部·産業部·農林部·通信部·교통부·財政部·保健衛生部·敎育文化部 等 11個 富를 開設하고 1945年 10月 3日 公式으로 活動을 始作했다. 어느 무엇보다도 司法檢察部 및 保安檢閱指導部는 그 名稱이 말하듯 北韓 住民을 統制하거나 强壓하는 部署였다. 

    沿海州軍管區 軍事委員 테렌티 抛미치 스티코프 喪葬의 指示를 받으면서, 그는 北韓의 모든 機關과 住民들을 統制했다. 北韓 사람들 사이에 펴진 所聞으로는, 그는 여러 곳에 祕密 處刑場을 設置하고 蘇聯의 統治 方向이나 方式에 抵抗하는 北韓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祕密 處刑場이 平壤에만 17곳으로 늘어났다.

    論點4
    ‘스티코프 日記’는 假짜인가 眞짜인가.

    ‘스티코프 일기’.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스티코프 日記’. [國史編纂委員會 提供]

    蘇聯의 北韓占領統治와 關聯해 重要한 資料 가운데 하나가 沿海州軍管區 軍事委員 스티코프 喪葬의 ‘스티코프(쉬띄꼬프) 日記’다. 스티코프는 바로 위에서 說明한 沿海州軍管區의 第2人者였다. 그는 더구나 當時 蘇聯 權力構造에서 스탈린에 버금가는 2人者로 指目되던 蘇聯共産黨 中央委員會 政治局 正委員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사위였다. 

    스티코프의 맏아들, 아버지의 日記를 公開하다 | 이처럼 重要한 役割을 遂行했던 스티코프가 스스로 어떤 記錄을 남겼을까는 오랫동안 硏究者들의 關心事였다. 이 關心을 풀어주는 對答이 그의 日記였다. 蘇聯이 解體되고 그 後繼者로 러시아聯邦이 出帆한 때로부터 4年 뒤인 1995年에 스티코프의 맏아들은 50年 가까이 묻혀 있었던 아버지의 日記, 곧 ‘스티코프 日記’를 公開했다. 

    이 日記를 두고 學界에서는 論爭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그것을 ‘假짜’로 보았다. 特히 스탈린 時代에 各級 公職者들은 모두 自身에게 어떤 危害가 닥치는 境遇 日記帳이 搜索의 1次 對象이 되고 發見되면 不利한 資料로 쓰일 수 있기에 日記 쓰기를 自制했으며, 때로는 各 公職者의 생각과 行爲를 把握하기 위해 日記帳을 뒤지는 檢閱도 進行됐기에 日記 쓰기를 自制했던 터에, 어떻게 스티코프와 같은 最上位級 軍人이 日記를 남길 수 있었겠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묻는 이들은 蘇聯이 解體된 뒤 西方世界가 蘇聯 時代의, 特히 스탈린 時代의 資料라고 하면 비싸게 사주는 時流를 利用해 ‘스티코프 日記’라는 僞作(僞作)이 나왔을 것이라는 推測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티코프 日記’ 全體를 綿密히 檢討한 러시아 國內外 專門家들은 이것이 僞作이 아니라 眞本이라는 結論에 到達했다. 自身의 疾病을 包含해 本人이 아니면 決코 알 수 없는 많은 情報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內容이나 흐름에서 여러 다른 資料와 一致하는 部分이 많다는 事實, 그리고 그가 메모狂(狂)으로 平素에 많은 備忘錄을 作成해 保管한 事實 等이 그러한 結論을 뒷받침한 것이다. 

    핀란드에 蘇聯 傀儡政府를 세우는 일에 關與하다 | 그러면 스티코프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1907年 태어나 1929年 22歲의 나이로 蘇聯共産黨에 入黨한 그는 스탈린이 1930年代 後半에 主導한 大肅淸 以後 스탈린 스스로 蘇聯共産黨 指導部로 끌어올린 ‘새로운 피’의 一員이었고, 그리하여 蘇聯의 第2都市인 레닌그라드―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包含하는 레닌그라드注意 黨 第2祕書로까지 뛰어올랐다. 

    스티코프의 經歷에서 重要한 대목은 그가 蘇聯이 핀란드와 戰爭하던 때인 1939~1940年 이 戰爭을 擔當한 第7軍司令部의 軍事委員, 곧 第2人者였다는 事實이다. 蘇聯은 핀란드를 侵攻한 直後인 1939年 12月에 蘇聯에 接境한 핀란드의 都市 테리要키(오늘날의 젤레노고르스크)에 핀란드共産黨의 創設者로서 코민테른 中央執行委員會 祕書인 오토 쿠시넨을 首班으로 하는 핀란드民主共和國政府, 通稱 핀란드人民政府를 세웠다. 그것은 蘇聯의 傀儡政府였으며, 그러했기에 쿠시넨은 後날 핀란드政府로부터 國家反逆者로 規定돼 決코 故國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蘇聯에서 죽는다. 

    이 政府를 세우는 過程에 스티코프가 깊이 介入했음은 勿論이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經驗이 北韓에 親蘇國家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蘇聯의 ‘北韓總督’ | 蘇聯이 北韓을 占領한 뒤, 스티코프는 軍管區의 司令部가 位置한 하바롭스크에 앉은 채 實狀 北韓을 統治하는 ‘蘇聯總督’이나 마찬가지였다.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의 司令官 치스齒牙코프 上場, 司令部의 第2人者 軍事委員 레베제프 所長, 그리고 第3人者 民政副司令官 안드레이 로마넨코 所長 等은 모두 그의 指示를 따라야 했다. 

    스티코프의 役割에 對해, 레베제프는 自身의 回顧錄에서 “그가 朝鮮에 있건 管區參謀部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間에 그의 參與 없이 北朝鮮에서 이루어진 措置란 하나도 없는 것이다”라고 썼다. 레베제프의 이 回顧는 重要한 意味를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論議하고 있는 이 時期 北韓의 政治 過程이 거의 全的으로 스탈린의 腹案과 命令에 忠實한 스티코프에 依해 直接的이면서 强力한 影響을 받았음을 뜻한다.

    論點5
    ‘스티코프 日記’는 어떤 內容을 담았나.

    그러면 스티코프는 自身의 日記에 蘇聯의 北韓 統治와 關聯해 어떤 記錄을 남겼나. 이 물음에 對해 一一이 枚擧(枚擧)하기는 不可能하다. 蘇聯이 北韓을 直接統治했음을 보여주는 資料를 너무 많이 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日記에 記錄된 몇 가지 事例에 局限해 論議하기로 한다. 

    스티코프, 北韓에서 選擧를 指揮하다 | 첫째, 1946年 11月 3日에 實施될 北朝鮮 도·시·군 人民委員 選擧의 候補 登錄이 끝난 때로부터 엿새 뒤인 10月 21日에 스티코프는 飛行機를 타고 黃海道 海州로 갔다. 그 날짜의 日記를 보면, 그는 이 選擧의 全般에 걸쳐 매우 꼼꼼하게 點檢하고 指示를 내렸음을 알 수 있다. “各級 人民委員會에 特別宣傳室을 設置하도록 指示를 내렸고, 選擧戰線事業에 對한 美術家·文筆家·寫眞師·映畫撮影機의 活動을 點檢했다”는 句節이 그것을 말해 주었다. 

    이렇게 細密히 챙긴 뒤에, 스티코프는 平壤으로 가서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委員長이면서 ‘北朝鮮共産黨’ 責任祕書人 김일성을 비롯한 北韓의 指導者들 그리고 이미 越北해 平壤에서 活動하던 남조선로동당 副委員長 박헌영을 만났다.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保安局長 최용건으로부터는 ‘選擧準備活動의 進行’에 對한 報告를 받았으며, 蘇聯占領軍 防諜部隊長 步쟈긴 大領에게는 選擧와 關聯해 警戒를 强化하고 警覺心을 높일 것을 指示했고, 蘇聯占領軍 政治部長 알렉산드르 게오르기예비치 그로모프 大領을 따로 불러 “選擧 準備와 關聯해서 반드시 實行해야 할 措置들에 對해 指示했다.” 

    스티코프, 김일성의 演說文을 直接 修訂하다 | 沿海州軍管區로 돌아간 뒤, 스티코프는 김일성에게 따로 電話했다. “北朝鮮 人民 모두에게 選擧에 參與하도록 督勵하는 演說을 하라”고 指示한 것이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11月 1日 ‘朝鮮人民에게 高喊’이라는 演說을 했다. 그런데 이 演說도 事前에 스티코프가 細密하게 살핀 뒤 直接 修正했다. 스티코프는 自身의 1946年 10月 28日子 日記에서 “김일성의 演說文에 論評을 加하다. 내가 修正한 김일성의 演說文 草案을 傳達하다”라고 쓴 것이다. 

    當時 北韓의 權力構造에서 朝鮮人으로서는 第1人者인 김일성에게 어떤 演說을 하라고 指示하고, 또 그 演說文의 草案을 修正하라고 指示하며 스스로 修正할 程度로 스티코프는 北韓의 모든 것에 對해 介入한 것이다. 美軍이 占領한 南韓에서는 이에 相應하는 事例를 찾을 수 없다. 例컨대, 美軍司令官이 李承晩을 包含한 몇몇 指導者에게 “이렇게 演說해라, 저렇게 演說해라”라고 指示하거나 그들의 演說文을 미리 報告받아 修正을 加한 事例는 이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對比가 말해주듯, 北韓은 徹底히 蘇聯의 沿海州軍管區에 依해 統制되고 있었던 것이다. 

    스티코프, 選擧 現場을 視察하면서 指示하다 |
    11月 3日의 人民委員 選擧와 關聯해, 스티코프의 介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選擧 當日에 平壤市와 鎭南浦市의 選擧 現場을 直接 視察했으며, 選擧 現況을 寫眞 또는 映畫로 남기도록 指示했다. 選擧가 끝난 뒤에도 平壤에 남아 事後對策을 指揮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選擧 結果에 對한 中間發表文과 中央選擧指導委員會의 公式報道文을 作成하는 方法, 그리고 投票 結果를 集計하는 節次와 選擧 關聯 書類를 保管하는 方法 等에 對해서도 ‘地圖’했다. 또 當時 狀況과 關聯해 ‘南朝鮮의 金九 李承晩과 같은 反動分子들의 策動’을 非難하라고 指示했다. 非難의 對象에 李承晩보다 金九를 앞세운 것이 興味롭다.

    論點6
    蘇聯이 1945年 9月 初에 보인 一連의 措置를 둘러싼 論爭

    蘇聯軍은 1945年 9月 3日과 12日 사이에 38度線 以北에 있으면서 그 線에 接한 모든 地域에까지 占領을 끝냈다. 말하자면, 9月 12日에 이르러 蘇聯의 北韓占領은 完了된 것이다. 비슷한 時點인 9月 9日 美軍은 南韓 占領을 完了했다. 

    美·蘇 連絡將校 面談 | 이렇게 美軍과 蘇聯軍이 各各 占領을 完了하자 南韓을 管轄하던 도쿄의 맥아더 司令部는 모스크바 駐在 美國使節團을 통해 南韓의 美軍司令部와 北韓의 蘇聯軍司令部 사이에 連絡將校들을 交換·會談할 것을 蘇聯 側에 提議하라고 指示했으며, 모스크바의 蘇聯軍總參謀部는 이 提議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9月 11日 南韓 駐屯 美軍의 한 그룹이 서울 駐在 蘇聯總領事館의 管理 2名과 함께 平壤에 到着해,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의 第2人者 레베제프 軍事委員을 만났다. 

    이 面談에서 兩側은 (ⅰ) 서울과 平壤에 各各 自身의 連絡將校들을 派遣한다는 데 合意했고, (ⅱ) 38度線 附近의 兩側 部隊들 사이에 라디오와 電話 通信網을 開設한다는 데 合意했다. 그 結果 9月 下旬 서울에는 蘇聯軍 連絡將校團이, 平壤에는 美軍連絡將校團이 各各 自身의 事務室을 열었다. 그러나 라디오 및 電話 通信망 開設에 關한 合意는 매우 制限된 範圍 안에서 實現됐다. 蘇聯軍은 서울 駐在 蘇聯總領事館에 關한 情報만 받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蘇聯이 分斷의 現象을 비록 매우 初步的인 水準이기는 하나 改善하려는 美國의 試圖에 덜 熱情的이었거나 否定的이었다는 解釋을 可能하게 한다. 

    朝鮮에 關한 提案’ | 蘇聯軍의 이러한 態度는 蘇聯軍이 이미, 이 時點에 分斷 狀況의 改善에 對해서보다는 自身이 占領한 北韓을 自身의 領域으로 固着化하려는 데 目標를 두었음을 말해준다. 實際로 9月 初旬부터 下旬까지에 蘇聯으로부터 그러한 方向으로의 可視的인 措置들이 取해졌다. 말하자면, 大體로 이 時點부터 北韓에 對한 政策을 어떤 叢論的인 水準에서 벗어나 各論的인 水準으로 具體化하기 始作한 것이다. 

    이 點을 뒷받침하는 資料가 1945年 9月-날짜 未詳-에 蘇聯 外務部의 極東制2國이 作成한 ‘朝鮮에 關한 提案’이라는 文書다. 이 文書는 9月 12日 런던에서 열릴 美國·英國·蘇聯 3個國 外務長官 會談을 앞두고 蘇聯의 立場을 檢討하기 위해 마련된 文書들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9月 初旬 作成했다고 봐도 틀림없을 것이다. 이 文書의 作成者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制限된 紙面에서 이 文書의 內容을 仔細히 檢討하기란 매우 어렵다. 單純化해서 짧게 말한다면, 이 文書는 蘇聯이 韓半島에 對해 매우 攻勢的이며 積極的인 構想을 지녔음을 보여주었다. 韓半島에 對해, 얄타會談과 포츠담會談에서 約束됐듯, 美國·英國·中華民國·蘇聯 等 4大國의 信託統治가 實施돼야 하며 그 境遇 蘇聯은 釜山-鎭海, 濟州道, 仁川 等 세 地域을 蘇聯軍의 管轄 아래 둘 수 있도록 割當받아야 한다고 提案한 것이 그 한 보기다. 

    그러나 런던會談은 처음부터 美·蘇의 葛藤과 利害衝突이 表面化되면서 ‘陰鬱하게’ 進行됐으며 日本의 北海道를 分割해 一部를 蘇聯이 占領해야 한다는 蘇聯의 提議를 美國과 英國이 拒否하면서, 結局 決裂되고 말았다. 그러했기에 蘇聯은 韓半島와 關聯해 이 文書에 提示된 計劃을 會談에 提議하지 못했다. 이러한 狀況 展開는 蘇聯으로 하여금 적어도 自身이 占領한 北朝鮮만큼은 自身에게 確實히 友好的이며 充實한 國家로 만들어야 한다고 決心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論點7
    스탈린의 1945年 9月 20日子 ‘指令’을 둘러싼 論爭 : 
    그 ‘指令’은 蘇聯이 北韓에 單獨政權을 세우겠다는 意志와 計劃을 담은 것인가 아닌가.

    런던會談이 아무런 合意에 到達하지 못한 채 決裂된 때로부터 4日이 지난 9月 20日 스탈린은 소련군最高總司令官의 資格으로 沿海州軍管區 및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에 電報로 ‘指令’(李 用語는 蘇聯 스스로의 用語다)을 내렸다. 이 指令은 勿論 祕密裏에 내려졌으며, 蘇聯이 解體된 뒤에야 비로소 그 專門이 世上에 알려졌다. 

    이 誌齡의 核心은 “(北朝鮮에서) 反日的인 民主團體들과 民主政黨들의 廣範圍한 同盟에 기초해 부르조아民主主義的 政權을 樹立하도록 하라”는 데 있었다. 이것은 부르주아民主主義的 政權의 지붕 아래 共産 勢力과 非共産 勢力의 ‘純粹型 聯立’을 樹立하라는 뜻으로 풀이됐다. 東유럽에서 보았듯, ‘純粹型 聯立’은 共産黨의 單獨政權 樹立으로 가는 첫 段階였다. 여러 다른 條項이 함께 包含된 이 指令은 그 全文이 公開된 以後 學界에서 論爭을 불러일으켰다. 

    美國 펜실베이니아대 이정식(李庭植) 敎授는 스탈린이 北韓 地域에 ‘부르조아民主主義政權’이라는 單獨政府를 세우라고 指示했다고 分析했다. 그는 “이 重要한 指令에 南韓을 占領한 美軍과의 協議 問題나 朝鮮半島의 統合 또는 統一 問題에는 言及이 없었다”는 事實에 注目하면서, “그 事實은 스탈린이 이미 이 時點에 美國과의 協議를 통한 朝鮮半島의 統一에 對해 關心을 쏟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는 解釋을 提示했다. 綜合的으로, 그는 “李 指令은 韓半島의 分斷을 固着化하는 것이었다”는 結論을 提示하면서, 韓半島에서 分斷固着化를 먼저 追求한 쪽은 蘇聯이었다고 推論했다. 

    이정식 敎授의 이러한 主張에 對해, 김성보(金聖甫) 延世大 敎授는 首肯하지 않았다. 金 敎授는 “부르조아民主主義權力을 만들도록 指示한 것이 北韓 地域에만 排他的인 國家權力을 樹立하라는 意味인지, 그렇지 않으면 但只 北韓 地域에서 改革을 推進할 때 社會主義的 性格이 아닌 부르주아民主主義的 性格의 改革을 推進하고 이에 立脚해 權力構造를 形成해 나가라는 意味인지 不確實하다”고 보았다. 金 敎授는 問題의 指令이 作成됐을 때는 아직도 美國과 蘇聯 사이에 東北아시아 問題를 놓고 亂氣流가 形成되기 以前이라고 보고, 따라서 스탈린은 美國과의 協力을 아주 抛棄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라고 推論하면서, 이 指令은 電子의 性格을 지녔다기보다는 後者의 性格을 지녔을 것이라고 解釋했다. 

    그러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敎授는 이 指令을 “스탈린이 처음부터 北朝鮮 單獨政權의 樹立을 指示했음을 보여주는 極히 貴重한 文書”라고 評價하고, “李 指令이 내려간 時點부터 分斷을 向한 움직임이 始作됐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라고 主張했다. 전현수 敎授,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蘇聯의 元資料를 中心으로 蘇聯의 北韓 政策을 깊이 硏究한 이지수(李志樹) 명지대 敎授 亦是 비슷한 論旨를 展開했다.

    論點8
    ‘北朝鮮 10個 行政國’ 出帆은 北韓 單獨政權 出帆을 의미한 것이었나.

    스탈린의 ‘指令’을 具體化하는 作業은 곧바로 始作됐다. 9月 下旬에, 蘇聯軍銃政治局의 第7部 次長 社보즈니코프 所長은 沿海州軍管區의 政治將校들 및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의 政治將校들과 함께 平壤에서 合同會議를 열고 北韓을 이끌어나갈 ‘最高指導者’로 非共産系 民族主義者 曺晩植과 親疏共産主義者 金日成을 ‘指目’하고 두 사람의 ‘協力的 提携’를 摸索하기로 했다. 

    北朝鮮5道聯合會議의 召集 | 이 基本 틀이 세워지자,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 치스齒牙코프 司令官은 1945年 10月 8日부터 11日까지 平壤에서 ‘北朝鮮5道聯合會의’를 召集했다(이 무렵에 江原道는 從前의 6度에서 除外됐다). 이 會議에는 勿論 蘇聯軍司令部 代表도 無慮 20名이나 參席했다. 

    이 會議에 바탕을 두고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는 ‘北朝鮮 全體를 統轄하는 臨時的인 人民委員會를 創設하되 그 人民委員會를 指導하기 위해 蘇聯人들로 構成된 諮問機構 亦是 設置할 것’을 沿海州軍管區에 建議했으며, 沿海州軍管區는 곧바로 모스크바의 蘇聯軍總政治局을 통해 中央黨과 政府에 建議했다. 같은 時點에, 서울 駐在 蘇聯總領事館 폴리안스키 總領事도 本質的으로 같은 內容을 駐日蘇聯大使 야콥 말리크를 통해 本國 政府에 建議했다. 

    北朝鮮行政10國의 出帆 | 本國 政府는 이들의 建議를 받아들이고, 1945年 10月 17日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에 ‘指令’(李 用語 亦是 蘇聯이 使用한 用語다)을 내려보냈다. 그 核心은 1945年 11月 初 平壤에 ‘北朝鮮臨時民政自治委員會’를 構成하며, 이 委員會는 傘下에 産業·農業·財政·交通·通信·敎育·保健·保安·司法의 10個 行政國을 開設한다는 것이었다. 이 委員會와 傘下 10國은 모두 北朝鮮駐屯蘇聯軍司令部의 ‘直接的이고 常時的인 統制’를 받는다는 것도 包含됐다. 이 日程에 따라 10個 北朝鮮行政國은 11月 19日 平壤에서 公式 出帆했다. 

    이 機構의 性格을 둘러싸고 學界에서는 論爭이 展開됐다. 로버트 스칼라피노 敎授와 이정식 敎授는 自身들의 共著 ‘코리아에서의 共産主義’ 第1卷에서 이 機構가 事實上 ‘北韓의 胎兒적(胎兒的) 政府’였다고 評價했다. 다시 그들에 따르면, “그것은 北韓의 分離的(分離的) 國家의 樹立을 向한 첫걸음을 의미했다.” 

    이 解釋에 對해 브루스 커밍스 敎授는 同意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이 機構는 北朝鮮의 다섯 度(道)를 느슨하게 連結하거나 다섯 道 사이의 立場을 調整하는 하나의 連絡機構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機構의 出帆을 마치 蘇聯이 北韓만을 單位로 하는 하나의 統一된 行政機構를 創立한 것으로, 그리하여 韓半島에서 分斷을 追求하기 始作한 쪽은 美國이 아니라 蘇聯人 것으로 解釋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批判했다. 

    이러한 論爭을 두루 살핀 뒤 류길재(柳吉在) 敎授는 조심스럽게 自身의 分析을 提示했다. 그는 그때로부터 3個月 뒤인 1946年 2月 平壤에서 北韓 全體를 統轄하는 中央行政機構로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가 出帆했으며 “이 機構가 旣存의 ‘北朝鮮臨時民政自治委員會’ 및 傘下 10國 體制를 그대로 이어받았고 모든 業務는 斷絶없이 繼承되었다는 點에서 北韓의 中央集權化에 決定的인 契機가 됐다”고 評價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