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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政府 들어 짙어진 ‘躁急症 共和國’의 弊害|新東亞

申平의 ‘풀피리’⑨

文政府 들어 짙어진 ‘躁急症 共和國’의 弊害

法院을 ‘工場’이라 부르는 大法官들…韓에 긴즈버그 없는 理由

  • 申平 辯護士·㈔公正世上硏究所 理事長

    lawshin@naver.com

    入力 2020-09-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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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大法官, 憲法의 最終解析자라는 確固한 自己認識

    • 韓大法官, 司法 官僚의 한 사람으로 正體性 規定

    • 5年마다 後任 채워 넣기 汲汲한 實情

    • 公務員·學界까지 躁急性 부채질하는 文化

    • 中은 學長·總長 長期的 觀點에서 大學 發展 構想

    • 美에서 學科長 되면 學科에 自己 숨결 불어넣어

    • 世宗市로 首都以前? 統一時代 비전 뭉개는 短見

    *19代 大選 當時 申平 辯護士(64·司法硏修院 13期)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候補 中央選對委에서 ‘公益提報 支援委員會’ 委員長과 ‘民主統合포럼’ 常任委員을 지냈다. 그는 文在寅 政府가 들어선 뒤 與圈을 向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公平無私(公平無私)韓 知識人의 本보기 役割을 하고 있다.

    2019년 8월 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방청객들이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 상고심 선고를 지켜보고 있다.

    2019年 8月 29日 서울 瑞草區 大法院 大法廷에서 傍聽客들이 이른바 ‘國政壟斷’ 事件 上告審 宣告를 지켜보고 있다.

    몇 해 前, 親舊인 大法官 두 사람과 저녁 食事를 했다. 大學同氣이자 서울大 法大 學報인 ‘피데스’(Fides)를 같이 만들었던 親舊들이다. 내가 그들에게 恨歎했다. “우리 社會는 模範이 되는 英雄을 잘 만들어내지 않는다. 쉽게 잊어버린다. 大法官이 얼마나 重要한 자리냐? 너희 故鄕인 大田과 光州에서나마 너희를 기리는 記念館 하나 만들면 자라나는 世代에 얼마나 善한 影響을 주겠나.” 내 말에 그들이 對答했다. “大法官 한 番 했다고 우리 社會가 크게 認定해주는 것은 아니다. 記念館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9月 18日 美國 大法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가 워싱턴 自宅에서 膵臟癌 轉移에 따른 合倂症으로 死亡했다. 美國 全域은 그를 追慕했다. 깊은 슬픔 속에서 그가 남긴 遺産을 되새겼다. 그의 官은 女性 最初로 議會에 安置됐다. 그와 不俱戴天의 政治的 敵對者이자 거친 입을 가진 트럼프 大統領도 議會에 가서 弔問을 표했다. 美國에서는 아이들까지 웬만한 大法官의 이름을 다 안다.

    大法官들이 말하는 ‘우리 工場’

    9월 23일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시민들이 고(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안치된 관을 향해 조의를 표하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9月 23日 美國 워싱턴 聯邦大法院 앞에서 市民들이 高(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聯邦大法官이 安置된 棺을 向해 弔意를 표하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韓國과 美國에서 大法官을 對하는 姿勢는 이처럼 크게 差異가 난다. 差異를 결정짓는 가장 큰 要因은 美國의 大法官 終身制다. 美國 大法官은 한 番 任命되면 죽거나 스스로 물러날 때 까지 繼續 勤務한다. 韓國 大法官이나 憲法裁判所 裁判官의 任期는 6年이다. 거기에다 거의 單任에 그친다. 任期가 滿了되면 後任 채워 넣기에 急하다. 

    美國 大法官은 憲法의 最終解釋者로서 國家의 나아갈 方向을 決定한다는 確固한 認識을 갖는다. 韓國 大法官은 司法 官僚의 한 사람으로 自身의 正體性을 認識한다. 甚至於 大法官들의 말套에서 ‘司法府’를 表現하는 말이 ‘우리 工場’ 或은 ‘우리 會社’다. 남 앞에서 “내가 大法官이요!”라고 하는 代身 謙讓의 意味로 그런 表現을 쓰기도 하지만, 大法官으로서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公務員 社會에서는 專門性 習得이 別로 考慮되지 않는다. 公務員 補職을 빨리 빨리 회전시킨다. 大學도 마찬가지다. 박 터지게 싸워 얻은 學長이나 總長職이지만 두 番은 엄두내기 어렵다. 뒤에 待機者가 가득 몰려있으니 빨리 비워주지 않으면 그 壓力을 堪當하기 힘들다. 

    學會도 大部分 1年 或은 2年을 임기로 會長이 交替된다. 會長 하려고 뒤에 까맣게 줄 서 있기 때문이다. 自然히 組織의 責任을 맡아도 長期的 觀點에서 組織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短期的으로 남에게 좋은 模樣을 보이는 成果에 執着한다. 그래야 그 組織을 그만둔 後 더 나은 組織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學者들의 硏究도 마찬가지다. 短期 硏究課題가 大部分이다. 敎授들의 給與 策定, 昇給審査 等을 위해 論文이 엄청나게 重要한 役割을 한다. 韓國硏究財團 같은 곳은 大槪 1年 안팎의 短期課題를 硏究費 支援 條件으로 提示한다. 學者가 生涯를 걸고 硏究하는 課題에 硏究費를 支給하는 風土는 우리 實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硏究費를 받아 쓰인 많은 論文 中 重要한 意味를 갖는 論文은 그리 많지 않다. 적잖은 論文은 筆者와 審査者를 除外하고서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 社長된다. 아마 우리가 科學 分野에서 노벨賞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原因은 硏究의 躁急性을 부채질하는 이 잘못된 硏究費 策定 體系에 있지 않을까 한다.

    서울대의 어느 特別한 助敎 制度

    ‘빨리 빨리 文化’가 갖는 效用性도 分明 있다. 이것이 우리의 激甚한 競爭 文化와 맞물릴 때 시너지가 날 수 있다. 뼈를 깎는 努力과 犧牲이 뒤따르게 돼서다. 우리가 只今 누리는 經濟的 繁榮은 大部分 이에 힘입었다. 그럼에도 結果에 對한 躁急性은 길게 보아 韓國社會의 圓熟한 成長을 가로막는다. 이런 面에서 나는 高(故) 권이혁 先生을 한 番씩 생각한다. 

    權 先生은 醫師 出身으로 卓越한 行政力을 펼친 분이다. 1980年 서울대 總長이 된 뒤 새로운 助敎 制度를 創設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때까지 助敎는 各 敎授에 個人的 因緣으로 묶여 있었다. 硏究室에서 눈물 나는 徒弟式 授業의 過程을 거친 뒤 指導敎授가 마련해주는 大學의 講師나 專任講師로 赴任하는 式이었다. 

    그는 이를 革罷하고자 學問 後續世代로서의 助敎 制度를 만들었다. 權 先生이 總長으로서 마련한 助敎職은 當時 문교부(文敎部) 長官으로부터 任命狀을 받는 正式 國家公務員이었다. 1981年 當時 月 給與가 40萬 원 以上이었다. 어느 敎授로부터도 指示를 받지 않았다. 公式的으로 定해진 뚜렷한 業務가 없었다. 많은 境遇 出勤을 하건 말건 助敎 自身의 判斷에 맡겼다. 이 異常한(?) 助敎가 바로 서울대에서 傳說처럼 傳해오는 ‘公採 1期 助敎’다. 

    나는 運 좋게 公採 1期 助敎에 選拔됐다. 하늘을 날아갈 듯 기뻤다. 總長이던 權 先生은 直接 助敎 敎育을 實施했다. 40年 前 일이어서 다른 內容은 다 까먹었으나, 每日 願書 한 페이지씩은 반드시 읽으라고 했던 말씀이 생생하다. 나는 그 분의 말씀대로 이 나이가 되어서도 每日 자리에서 일어나, 또 自己 前 반드시 英語放送을 視聽한다. 그래서 世上 돌아가는 形便에 밝다. 政治件, 醫學이건, 文化件 기초적인 最新 知識은 두루 涉獵한다. 尖端의 知識을 얻은 德에 나는 외진 시골에 살면서도 外國人 누구와 만나더라도 堂堂하게 말을 나눌 수 있다.(참고로 그 後 서울대에서 그와 같은 ‘특별한 助敎制度’는 撤廢됐다.) 

    나는 權 先生의 意圖를 곰곰이 생각해왔다. 아마 이런 뜻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한 사람의 괜찮은 硏究者를 얻기 위해 國家가 相當한 投資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硏究者로 익어가는 過程에서 자유로운 創意性을 갖는 게 무엇보다 重要하다고 判斷했으리라. 그는 數十 年 後 큰 役割을 할 硏究者를 養成하려는 생각을 助敎 制度에 投影했던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 後 先生의 뜻에 符合하는 水準의 硏究者는 될 수 없었다. 法曹界에 몸을 담아 空白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艱辛히 先生이 그은 範疇를 벗어나지 않는 硏究結果를 우리 社會에 바쳤다는 程度의 矜持는 갖는다.

    좁은 視角으로 社會를 바라보는 韓國

    엉뚱한 곳으로 글이 흘러가는 게 아닐까 하나, 釜山市長과 경북도지사를 歷任했던 내 外叔 김덕엽 氏가 大學生이던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하나 더 紹介하고 싶다. 내 記憶에서 조금의 毁損도 없이 고스란히 남은 이야기다. 

    太平洋 戰爭이 絶頂으로 치달았던 때였다. 日本 軍人들이 練兵場에서 熱心히 軍事訓鍊에 沒頭했다. 忽然 한 學生이 望樓에 올라 휘파람으로 流行歌를 불렀다. 軍人들은 憤慨했다. 저 놈을 그냥 둘 수 없다고 部下들이 나서는데, 部隊長이 말렸다. “戰爭은 언젠가 끝난다. 그 뒤의 日本 社會를 짊어지고 나가는 것은 저들이다. 저들의 浩然之氣를 우리가 막아서는 안 된다.” 

    日本은 只今 디지털 文化를 積極 受容하지 못해 社會 全 分野에 걸쳐 成長 動力을 키우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거기에는 日本의 ‘가나文字’가 主된 端初를 提供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하나, 日本人들이 우리에 비해 갖는 長點도 있다. 그中 가장 重要한 건 그들이 過去 帝國을 經營하면서 갖게 된 넓고 長期的인 視角이 아닐까 한다. 日本은 絶對 躁急하지 않다. 

    나는 中國도 자주 오갔다. 中國 大學의 學長이나 總長은 韓國의 學長·總長과 比較하면 훨씬 長期的인 觀點에서 大學의 發展을 構想한다. 학회장의 任期도 普通 5年이다. 連任까지 하면 韓國 學界의 視線으로 봐서는 엄청난 期間이다. 長期間에 걸쳐 그들은 世界 學者들과의 交流를 體系的으로 推進해 中國 學界를 발전시켜 나간다. 

    美國에서 學科長이 되면 敎授 人事까지 左右한다. 學科長을 맡으면 自身의 숨결을 불어넣을 權限이 주어진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美國이건 日本이건 中國이건 韓國처럼 躁急하고 좁은 視角으로 社會를 바라보는 곳은 없다. 우리는 그 點에서 좀 지나치다.

    世宗市로 首都를 移轉하겠다는 短見

    이 政府가 그래도 잘한 일 하나가 있다. 忍耐心을 갖고 南北 平和·協力의 줄을 놓치지 않은 채 維持해온 것이다. 屈從的이라고 非難하는 이가 있으나, 敵對的인 南北關係로 돌아간다면 잃어버리는 게 얼마나 클지 생각해보라. 

    萬若 核 問題가 어떤 式으로건 合意에 이르면 南北의 平和·協力이 本格化할 것이다. 解氷의 물결은 南北統一의 꿈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다. 統一은 어려운 問題이나 瞬息間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統一 時代에 對한 비전을 뭉개고 世宗市로 本格的인 首都 移轉을 하겠다는 短見을 가진 이들이 旅券에 많다. 世宗市는 地政學的으로 絶對 統一 韓國의 首都가 될 수 없다. 統一이 된다면 世宗市에 지은 많은 建物은 無用한 投資로 끝나는 셈이다. 

    또 江南 집값을 잡겠다고 엉뚱하게 龍山驛 整備廠에 아파트를 세우겠다는 政策을 세워 부랴부랴 서두르고 있다. 그곳에 國際業務地球를 만들겠다는 以前 政府 때의 構想을 엎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國際業務地球에서 創出되는 國富(國富)의 量은 아파트와 比較되지 않는다. 이 亦是 統一 時代를 考慮한다면 얼빠진 짓이다. 統一韓國의 首都는 서울이 될 可能性이 가장 높다. 그러면 서울驛의 重要性이 훨씬 커진다. 

    그러면 龍山驛 整備廠과 같은 넓은 公知의 役割이 아주 커진다. 國際業務地球를 만들면 그 象徵性과 效用性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고(故) 朴元淳 前 서울市長이 統一 時代에 서울驛이 遂行할 機能에 關해 構想을 밝힌 일이 있다. 나는 아직 한 番도 統一을 對備한 서울의 都市 再區劃에 關해 政府 側의 비전을 들은 記憶이 없다. 

    이런 일이 한두 가지이랴? 어떤 일이 터지면 收拾에 汨沒한다. 그러다 엉뚱한 것을 건드린다. 國家의 將來를 考慮하면 到底히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까지 건드린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것에 執着한다.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 唯獨 이 政府 出帆 뒤 그런 傾向이 强하게 나타난다. 政府나 與圈이 나쁜 뜻을 갖고 近視眼的 態度로 一貫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다만 그들이 躁急함에 시달리는 건 明白하다. 國家의 長期 目標를 考慮하지 않고 조급히 내놓는 잘못된 政策이 쌓인다. 그럴수록 與圈이 無能하다는 批判도 漸增한다.

    國運 살아있으면

    2022年 3月 뽑힐 指導者는 國民의 꿈과 想像力, 靈感을 刺戟하는 비저너리(visionary)이기를 懇切히 願한다. 文在寅 政府 時期의 답답한 無彩色을 脫皮해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가는 指導者의 役割이 切迫하다. 遠大한 目標를 提示하며 國民의 共感을 끌어내는 指導者 말이다. 새로운 指導者는 時代精神(zeitgeist)을 깨닫고 이를 自身의 것으로 體化한 사람이어야 한다. 國運이 살아있으면 早晩間 그런 指導者가 우리 앞에 出現하리라 믿는다.

    올해 이곳에는 모진 태풍이 두 번이나 지나갔다. 집의 단감나무는 용케 많은 열매를 남길 수 있었다. 나무는 처절한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각자의 환경에서 이렇게 최선을 다한다.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신평 제공]

    올해 이곳에는 모진 颱風이 두 番이나 지나갔다. 집의 단감나무는 용케 많은 열매를 남길 수 있었다. 나무는 悽絶한 死鬪를 벌였을 것이다. 모든 生命은 各自의 環境에서 이렇게 最善을 다한다. 肅然해지지 않을 수 없다. [申平 提供]


    ● 1956年 出生
    ● 서울대 法學科 卒業
    ● 第23回 司法試驗 合格·司法硏修院 第13期
    ● 仁川地方法院, 서울家庭法院, 大邱地方法院 判事
    ● 경북대 法學專門大學院 敎授, 韓國憲法學會 會長 歷任
    ● 著書: ‘法院을 法廷에 세우다’ ‘로스쿨 敎授를 위한 로스쿨’ ‘들판에 누워’(시집)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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