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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울驛|新東亞

名作의 祕密

옛 서울驛

100年 近代遺産, 제대로 活用하고 있는가

  • 이광표 西原大 敎養大學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0-03-05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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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김재명 동아일보 記者]

    비록 植民 統治의 産物이지만, 그래서 異議를 提起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옛 서울歷史(驛舍)는 國內에서 가장 돋보이는 近代建築物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韓國人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空間이다. 붉은 甓돌로 쌓은 르네상스式 2層 建物에, 한가운데 비잔틴식 돔을 멋지게 올렸고, 中央 出入門 처마에 커다란 圓形 時計를 걸어놓은 모습. 

    옛 서울歷史는 KTX 開通으로 2004年부터 驛의 機能을 喪失했다. 只今은 ‘文化驛서울 284’로 看板을 바꿔 달고 主로 展示 空間으로 使用된다. 그런데 허전하다. 이곳에서 서울驛 100年의 歷史와 痕跡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지…. 그저 展示만 熱心히 企劃하는 것은 아닌지…. 저 意味深長한 建築物을 우리는 제대로 記憶하고 消費하고 있는지….

    경성역에서 서울驛까지

    옛 서울驛의 뿌리는 1900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當時 只今의 서울驛 北쪽 염천교 가까이에 南大門停車場이 생겼다. 1899年 우리나라 最初로 濟物浦에서 鷺梁津까지 京義線 鐵道가 생겼고 이듬해인 1900年 이 鐵道가 漢江을 지나 西大門까지 延長되면서 이에 必要한 南大門停車場이 염천교 옆에 생긴 것. 以後 1922年 南大門停車場이 경성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25年 경성역 建物을 새로 지었다. 그것이 바로 옛 서울驛 建物이다. 경성역은 光復 以後 1947年 서울驛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옛 서울歷史는 1922年 6月 建築 工事에 들어가 1925年 9月 竣工됐다. 設計는 日本人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가 맡았고, 公社는 南滿洲鐵道株式會社가 進行했다. 建物 規模는 地上 2層, 地下 1層에 總面積은 8216m²(2480餘 坪). 中央 建物엔 비잔틴風의 돔을 얹었고 앞뒤 4곳에 작은 塔을 세워 고풍스러운 雰圍氣를 냈다. 1層 創意 3分의 2 되는 곳까지는 石材로 마감하고 그 위와 2層은 軟粉紅 甓돌로 마감했다. 歷史의 처마엔 지름 1m가 넘는 大型 時計를 걸었다. 1層에는 待合室과 貴賓室, 2層에는 理髮室, 洋食堂(그릴)이 있었고 地下는 事務室로 使用했다. 

    옛 서울歷史는 KTX 서울歷史가 바로 옆에 新築되면서 2003年 12月 31日 鐵道驛으로서의 機能을 마감했다. 그때까지 80年 가까이 이 땅의 수많은 사람과 喜怒哀樂을 함께했다. 以後 한동안 비어 있던 옛 서울歷史는 2011年 8月 新築 當時의 形態로 復元됐고, 이름을 ‘文化驛서울 284’로 바꾸어 展示와 公演 等 複合文化空間으로 活用되고 있다.



    20世紀 가장 韓國的인 痕跡

    日帝가 경성역 建物을 新築하고 鐵道 建設에 熱을 올린 것은 韓半島를 侵奪하기 위해서였다. 中國과 러시아로 軍需物資를 運搬하고, 韓半島의 食糧 資源과 鑛山 資源을 掠奪해 실어 나르기 위한 意圖였다. 日帝의 意圖가 이렇다보니 鐵道를 利用하는 데에도 韓國人 差別이 頻繁했다. 동아일보는 1923年 3月 6日子 社說에서 “多少의 便利를 利用하여 朝鮮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주머니를 빼앗아 가는 交通機關”이라고 批判했다. 

    基本的으로 植民 侵略의 産物이었지만 유럽風의 새로운 모습 德分에 서울驛은 當時부터 話題였다. 東亞日報 1925年 10月 8日子엔 이런 記事가 실렸다. 

    “2層 洋屋 京城 停車場도 머지않아 손님을 맞고 보내게 된답니다…이 집 構造의 內容은 가보시면 아시려니와 內部에는 昇降機와 暖房 裝置도 있고…2층에는 理髮室과 크고 작은 食堂이 있다는데 200餘 名分의 宴會設備도 할 만 하답니다. 그 中에도 우스운 것은 中繼(中階)에는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便所를 만들어 두었답니다.” 

    유럽風의 異國的인 外觀이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2層 最初의 洋食堂 ‘그릴’은 洋食堂을 가리키는 普通名詞로 通用될 만큼 큰 人氣를 끌었다. 서울驛에는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었고, 그로 인해 다양한 事緣과 痕跡이 蓄積됐다. 以上의 小說 ‘날개’와 朴泰遠의 小說 ‘小說家 구보氏의 一日’에 登場하는 植民地 知識人과 都會人의 浪漫과 憂鬱, 獨立運動과 生計를 위해 滿洲로 떠난 亡命客 移住民들의 고단한 발걸음, 6·25戰爭과 避亂列車, 가난을 克服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無酌定 列車를 타고 서울로 向하던 사람들의 설렘과 두려움, 歸省票를 求하기 위해 긴 줄을 서서 밤을 지새운 記憶, 2層 그릴에서 맞선을 보던 靑春男女의 설렘…. 

    1930年代 末 日帝 侵奪이 極甚해지던 時節, 서울驛은 滿洲로 떠나는 사람들의 出發點이었다. 누군가는 먹고살기 위해 떠났고 누군가는 獨立運動을 하려고 서울驛에서 먼 길을 떠났다. 軍需物資度 서울驛을 거쳐 北方으로 移動했고, 돌아올 期約 없이 徵用을 떠나는 사람들도 서울驛에서 出發했다. 

    光復 直後엔 이런 일도 있었다. 1945年 9月 8日 경성역 朝鮮通運 倉庫에서 ‘朝鮮말 큰 辭典’ 原稿 2萬餘 醬의 뭉치가 發見됐다. 嚴酷했던 時節, 朝鮮語學會 한글學者들이 목숨을 걸고 作成한 朝鮮末 큰 辭典 原稿였다. 1942年 朝鮮語學會 事件으로 한글學者들이 逮捕되고 뺏긴 채 그 行方을 알지 못했던 그 原稿가 劇的으로 發見된 곳이 바로 옛 서울歷史였다. 

    서울驛은 그런 곳이었다. 지난 100年 우리의 榮辱과 哀歡이 가득한 곳이었다. 어느 하루도 그냥 넘어간 날이 없을 程度다. 그렇기에 옛 서울歷史에서의 經驗은 私的인 領域에 머물지 않는다. 그곳에서의 痕跡은 個人 次元에 그치지 않고 社會的·歷史的 次元까지 包含한다. 

    옛 서울驛은 普通의 列車驛이 아니다. 單純히 列車가 섰다 出發하고, 列車를 타고 내리는 空間이 아니다. 20世紀 韓半島와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政治的 經濟的 社會的 文化的 日常的 삶의 痕跡이 多層的으로 蓄積돼 있는 空間이다. 20世紀 韓國의 近代文化遺産 가운데 이보다 더 眞摯하고, 이보다 더 偉大한 空間의 痕跡이 또 어디 있을까.

    展示場으로 갇혀버린 옛 서울驛

    전시장으로 사용 중인 ‘문화역서울 284’ 내부. [고미석 동아일보 기자]

    展示場으로 使用 中인 ‘文化驛서울 284’ 內部. [고미석 동아일보 記者]

    옛 서울歷史는 한동안 放置되다 2011年 復元됐다. 復元 作業은 1925年 新築 時點으로 建物을 最大限 되살리면서 서울驛의 80年 歷史를 모두 담는 方向으로 進行됐다. 1920年代 寫眞을 土臺로 壁暖爐와 몰딩, 壁紙 等을 原形에 가깝게 復元했다. 建物 뒤쪽 外壁의 6·25戰爭 當時 銃彈 자국도 그대로 두었고, 1970年代까지 大統領이 利用했던 1層 貴賓室度 되살렸다. 

    1層 中央홀 天障에 있었던 天窓(天窓)도 되살렸다. 中央홀 天窓은 元來 8×8m 크기의 正四角形 스테인드글라스로 돼 있었는데 6·25戰爭으로 破壞된 뒤 閉鎖했다. 1925年 서울驛 新築 當時 스테인드글라스의 形態는 남아 있지 않아 새로 製作했다. 製作은 作家인 조광호 新婦가 맡았다. 1×1m짜리 有利 64章으로 構成된 새 中央홀 스테인드글라스는 慇懃하면서도 生動感 넘치는 모습이다. 한가운데에 3太極을 配置하고 그 周邊에 두 겹의 線이 다양한 色相의 하트 模樣으로 물결치듯 돌아간다. 四角形 스테인드글라스의 네 모퉁이에도 이 같은 디자인을 반복해 넣었다. 

    이렇게 復元된 옛 서울歷史에서는 主로 展示가 열린다. 가끔씩 公演이나 行事도 열린다. 그런데 展示와 公演을 통해 옛 서울驛 100年의 經驗과 痕跡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勿論 2層에 復元 展示室이 마련돼 있기는 하다. 이곳은 元來 옛 서울驛의 理髮所 자리였다. 여기에선 復元 工事 途中 確保된 建物 不在나 關聯 資料, 映像 等을 보여주고 있다. 復元 展示室을 마련한 것은 鼓舞的인 일이지만 理髮所 雰圍氣를 全혀 살리기 못한 點은 아쉬운 대목이다. 

    2層 大食堂 그릴 또한 마찬가지다. 그릴은 우리나라 最初의 洋食堂이었다. 그런데 그릴의 인테리어는 復元했지만 그곳에서 行해졌던 飮食과 關聯된 行爲의 痕跡은 全혀 만나볼 수 없다. 飮食과 聯關된 戰時나 公演은 勿論이고, 再現 行事 같은 것도 열리지 않는다. 옛 서울歷史에서는 普通의 갤러리나 公演場에서 선보이는 展示와 公演만 열리고 있다. 그릴이라는 空間만 남아 있고 서울驛 그릴과 關聯된 콘텐츠는 全혀 具現되지 않는 狀況이다. 

    옛 서울歷史를 찾는 사람들은 옛 서울驛의 本來 機能에 關한 追憶을 떠올리지만 復元된 建物 外에 그 機能的 痕跡을 찾아볼 수 없다. 復元된 建物의 物理的 形態에서도 옛 서울驛의 時間性·歷史性을 느낄 수 있긴 하지만, 展示 公演이라는 콘텐츠 側面에서 보면 그냥 普通의 展示이고 公演일 뿐이다. 戰時나 公演 場所가 오래된 建物(近代建築物)이라는 差異만 있을 뿐 곳곳에서 벌어지는 展示 公演과 다를 바 없다. 形態만 남아 있고 그곳이 담고 있던 行爲와 感性의 痕跡이 사라진 것이다.

    옛 서울驛 vs 文化驛서울 284

    스테인드글라스로 새로 제작한 옛 서울역 중앙홀 천창(天窓).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스테인드글라스로 새로 製作한 옛 서울驛 中央홀 天窓(天窓). [김재명 동아일보 記者]

    옛 서울歷史는 復元 以後 複合文化空間으로 活用되면서 公式的인 이름이 ‘文化驛서울 284’로 바뀌었다. 2011年 當時 文化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이 서울驛을 文化 空間으로 만들어 文化의 魅力을 傳播하는 據點으로 삼겠다는 趣旨로 ‘文化驛 서울’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옛 서울驛이 私的 284號라는 理由로 數字 284를 덧붙였다. 이에 關해 文化驛서울 284 홈페이지에 이런 說明이 실린 바 있다. 

    “對國民 公募를 통해 歷史的, 空間的, 都市的 象徵性을 結合해 誕生했습니다. 옛 서울驛의 私的番號(284)를 文化 空間이라는 콘셉트와 椄木하였습니다. 또한, 私的으로서의 모습과 그 價値를 保存하면서 同時에 다양한 文化가 交叉되는 驛으로서의 意味를 繼承하자는 意味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名稱은 그 槪念이 不分明해 大衆에게 와닿지 않는다. 文化驛이라고 하는 多少 模糊하고 抽象的인 槪念과 284라고 하는 難解한 數字가 얽혀 있는 形局이다. 사람들은 大部分 284라는 數字의 意味를 모른다. 그렇기에 284라는 數字는 別 意味가 없다. 

    예전처럼 ‘옛 서울驛’이라고 하면 서울驛이 지니고 있는 오랜 榮辱의 歷史와 普通 사람들의 無數한 삶의 哀歡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文化驛서울 284’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 누군가는 ‘옛 서울驛’이라고 하면 촌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勿論 촌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것이 외려 이 建物의 本質을 더 잘 具現한다. ‘文化驛서울 284’는 洗練된 느낌을 줄 수는 있지만 이 空間의 歷史와 本質은 보여주지 못한다. 結局 名稱에서도 옛 서울驛의 本來 歷史와 機能을 外面한 셈이다. 

    옛 서울驛(文化驛서울 284)은 建物을 原形으로 復元하고 復元 展示室을 마련했지만 거기 담겨 있던 無形의 痕跡은 제대로 復元하지 못했다. 서울驛의 歷史와 本來 機能을 外面한 채 흔하디흔한 展示 空間으로만 活用하고 있는 狀況이다. 

    私的 284號 옛 서울歷史를 復元하고 活用하고자 한 것은 그곳이 다름 아닌 ‘서울驛’이었기 때문이다. 日帝가 侵略 意圖와 함께 近代의 欲望을 視覺的으로 드러낸 空間이었다는 事實, 1925年부터 2003年까지 80年 가까이 無數히 많은 韓國人이 列車를 타고 내리던 서울의 關門이었다는 事實, 歷史와 삶의 다양한 層位의 痕跡이 남아 있다는 事實, 바로 그것에 注目해 復元 活用하고자 한 것이다.

    타고 내리는 것의 意味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 重要한 것은 列車驛으로서의 歷史(歷史)가 아닐 수 없다. 그 歷史가 只今 옛 서울歷史(文化驛서울 284)라는 存在의 出發點이다. 옛 서울驛에서 가장 本質的이고 根源的인 것은 列車를 타고 내리는 機能이다. 여기에 注目할 必要가 있다. 乘下車 機能을 一部 되살려야 한다는 말이다. 옛 서울歷史는 現在 KTX 서울歷史와 連結돼 있다. 옛 서울歷史에서 나가면 바로 鐵길이 있고 플랫폼이 있다. 鐵道 機能의 一部를 復元할 수 있는 狀況이다. 近代建築士 專攻인 안창모 경기대 敎授는 이렇게 말한다. 

    “서울歷史는 如前히 汽車驛으로서의 役割을 充分히 遂行할 能力이 있다. 只今도 舊 서울歷史의 플랫폼이 完全히 죽은 것은 아니다. 一部이기는 하지만 文化驛 뒤便의 플랫폼에서는 汽車를 탈 수 있고, 大統領의 地方 나들이 亦是 옛 서울驛의 플랫폼을 利用한다. 團地 플랫폼과 옛 서울歷史가 隣接해 있으면서도 機能的으로 連繫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플랫폼과 옛 서울歷史를 가로막고 있는 門만 連結한다면 舊 서울歷史는 다시 願機能을 回復할 것이고 이는 KTX 新歷史와 함께 훌륭하게 시너지 效果를 낼 수 있는 汽車驛의 役割을 遂行할 수 있을 것이다.” (안창모, ‘大韓帝國과 京仁鐵道 그리고 서울驛’, ‘鐵道저널’ 第19卷 第6號, 韓國鐵道學會, 2016)

    서울驛을 제대로 消費하려면

    우리는 100年 된 鐵道驛 建物에서 列車를 타고 내릴 수 없을까. 옛 서울歷史와 그 周邊에서 現在 타고 내리는 것이 完全히 不可能하다면 乘下車 機能을 굳이 되살리자고 말할 必要는 없다. 그렇다면 옛 서울驛 建物을 展示 公演 文化 空間으로만 活用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只今의 옛 서울歷史는 그런 狀況이 아니다. 바로 옆 KTX 서울歷史와 鐵道 레일이 連結돼 있고 列車가 數없이 오가고 있다. 옛 서울歷史는 待合室로 活用해도 充分할 程度로 安全하다. 하루의 一部 時間帶에 鐵道驛으로서의 機能을 一部 살린다고 해도 問題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옛 서울歷史의 機能을 封鎖했다. 옛 서울歷史와 新築 서울歷史를 애써 斷絶시켜 버렸다. 

    유럽이나 日本 等地를 旅行하다 보면 오래된 列車驛을 種種 만난다. 歲月의 痕跡이 흠뻑 묻어나는 列車驛. 우리는 그곳에서 熱心히 追憶을 만든다. 待合室 內部를 둘러보고 빛바랜 外觀을 背景으로 寫眞을 찍는다. 그것을 周邊 사람들과 共有하며 그 列車驛의 歷史와 文化와 建築에 對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 列車驛에서는 그런 모습을 發見할 수 없다. 100年 歷史의 옛 서울驛이 있는데도 말이다. 

    列車를 타고 내리는 機能. 그것의 一部라도 되살아날 때 옛 서울驛의 受難史度 제대로 記憶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가 서울驛에서 經驗했던 受難의 歷史는 모두 서울驛이 列車驛이었기 때문이다. 植民 統治의 受難과 恥辱을 제대로 記憶하기 위해서라도 옛 서울驛의 活用 方式은 本來의 機能에 더 充實해야 한다. 只今처럼 展示 企劃만 熱心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只今 옛 서울驛 100年의 歷史를 제대로 記憶하고 있는가. 저 近代建築物을 제대로 消費하고 있는가.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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