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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는 밤’과 피자|新東亞

‘혼밥判事’의 한끼

‘별 헤는 밤’과 피자

  • 入力 2020-02-2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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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裁判은 傷處로 始作해서 傷處로 끝난다. 當事者들 傷處에 비할 순 없지만 判事도 傷處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飮食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鬱寂함의 조각이 커피 속 角雪糖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慰勞를 받는다. 그러면서 “判事는 判決로 말한다”고 해서 法廷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便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GettyImage]

    [GettyImage]

    나는 只今 居室에 놓인 테이블 앞에서 컴컴한 琉璃門 밖을 내다보며 피자에 麥酒를 마시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고기, 햄, 올리브, 파인애플이 토핑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흔히 配達시켜 먹는 브랜드 피자다. 조금 식었지만 늦은 밤에 麥酒와 같이 먹으니 맛이 나쁘지 않다. 밤하늘에 별은 안 보이니 尹東柱처럼 별을 헤아릴 수는 없고 그의 詩 ‘별 헤는 밤’을 빌려 한입씩 베어 먹는 피자 조각을 이렇게 셀 뿐이다.

    配達員이 지나간 食卓에는 피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食卓 위의 피자를 다 먹을 듯합니다. 

    피자 한 입에 追憶과, 피자 한 입에 사랑과, 피자 한 입에 쓸쓸함과, 피자 한 입에 憧憬과… 


    西洋 사람들은 술 마신 다음 날 解酲을 하려고 햄버거를 먹는다던데 나는 햄버거는 모르겠고 피자를 먹고 海葬 效果를 느낀 적은 있다. 피자를 삼키면 모차렐라 치즈와 도우가 僞裝과 창자에 묻은 알코올을 쓱쓱 닦아 내려가는 것처럼 헤롱거리던 精神이 回復된다. 나이가 들수록 消化 機能이 슬며시 떨어져 그토록 좋아하던 라면도 잘 먹지 못하는데 피자는 아직 消化하기에 큰 負擔이 없다. 잘 熟成된 도우로 만든 피자는 밥 못지않게 消化가 잘된다.



    피자 헤는 밤

    20年쯤 前에 高等學校 親舊들과 自動車로 美國 橫斷 旅行을 한 적이 있다. 美國이 그렇게 넓은 줄 모르고 샌프란시스코에서 運轉을 始作해 夜밤에 로키산맥을 넘다가 食怯하고는 덴버에서 抛棄하고 말았지만. 그때 美國 皮잣집들에서 끼니를 解決할 때가 많았는데 세 가지가 印象的이었다. 하나는 피자가 果然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을 程度로 正말 컸다는 點, 둘은 우리 입맛에 너무 짰다는 點, 셋은 美國 사람들이 피자에 콜라가 아닌 麥酒를 곁들여 먹고 있던 點이다. 只今이야 피자에 麥酒를 곁들여 먹는 ‘피麥’이 널리 퍼졌지만 그때 韓國에서는, 마치 라면 옆의 김치처럼, 피자는 無條件 콜라와 먹는 것으로 認識돼 있었다. 韓國에 돌아와 피자를 麥酒와 같이 먹자고 提案했다가 親舊들한테 무시당하거나 핀잔을 듣거나 했다. 只今은 그 親舊들도 피자 먹으면서 죄다 麥酒를 마시더라. 하긴 뭘 먹든 술을 마시니까 처음부터 피자와 麥酒의 宮合 問題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피자’라는 單語가 처음 記錄에 登場한 것은 西紀 997年頃 作成된 비잔틴 帝國에 關한 라틴語 文獻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나폴리 隣近에 있는 ‘가에타’라는 港口都市에서는 財産을 一定 程度 所有한 사람은 聖誕節과 復活節마다 그 地域을 管轄하는 樞機卿에게 피자를 12個씩 가져다 바치는 風習이 있었다. 以後 ‘피자’는 中南部 이탈리아로 퍼져나갔다. 

    16世紀 나폴리에서는 피자가 길거리에서 가난한 사람이 먹는 代表的인 飮食이었다. 그때 피자 토핑으로는 토마토가 主로 올랐다. 토마토는 아메리카 大陸에서 유럽으로 流入됐는데 유럽 사람들은 처음에 토마토에 毒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좀처럼 먹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한 나폴리 사람들이 값싼 토마토를 피자에 올려 먹기 始作한 것이다. 피자는 곧 有名해졌다. 그때도 이미 나폴리 貧民村에 觀光 온 사람들은 地域 特産物을 맛보듯 피자를 먹었다. 記錄에 따르면 1800年代 初 나폴리에 피자 專門店이 50餘 個 생겨났다고 한다.

    ‘眞正한 피자 協會’

    [GettyImage]

    [GettyImage]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르게리打 피자의 由來도 재미있다. 1889年 이탈리아 사보이가의 마르게리打 女王이 나폴리를 訪問했을 때 有名한 피자專門店 主人이 세 種類의 피자를 準備했다. 女王은 그中에서 토마토의 빨간色, 모차렐라의 흰色, 바질의 綠色으로 이탈리아 國旗를 表現한 피자를 가장 좋아했고, 이것이 오늘날 마르게리打 피자로 傳해지게 됐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밥을 直四角形으로 平平하게 편 다음 한가운데에 빨간 당근채와 파란 시금치를 올리고 네 귀퉁이에 검정 나물을 세 줄씩 配置해서 ‘大韓帝國皇帝 비빔밥’을 出市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1984年에는 ‘眞正한 나폴리 피자 協會’(True Neapolitan Pizza Association)라는 組織도 생겨났다고 한다. 韓國으로 치면 ‘眞正한 忠武김밥協會’나 ‘眞짜 議政府部隊찌개協會’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 協會는 眞正한 나폴리 피자의 具體的 條件을 確立했다. 예컨대 피자를 반드시 돔形 火덕에서 나무 長斫으로 구워야 한다거나, 도우를 돌릴 때 機械나 道具를 使用하지 않고 손을 使用해야 한다거나, 피자 直徑이 35㎝를 넘으면 안 된다거나, 피자 한가운데 두께가 3分의 1㎝보다 두꺼우면 안 된다는 것 等이다. 

    判決文을 피자에 比喩하면 大法院은 ‘眞正한 判決文協會’라고 할 수 있다. 判決의 形式, 內容, 論理, 根據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對해 細細한 基準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그에 맞지 않는 判決은 效力을 認定하지 않고 破棄해 버린다. 

    나폴리 피자는 도우가 쫄깃하고 바깥 部分인 크러스트에 褐色 그러데이션을 넣는 게 特徵이다. 빵이 비스킷처럼 바삭夏至 않고 카스텔라처럼 푹신하지도 않다. 醋밥에서 밥알 틈 사이에 存在하는 空氣가 醋밥 맛을 左右하듯 酵母를 넣은 반죽의 熟成 過程에서 發生한 空氣層이 글루텐을 만나 어떻게 調和를 이루는지에 따라 도우 質感과 色깔, 맛이 左右된다. 

    나폴리 피자는 長斫불로 火덕에서 굽기 때문에 料理師가 불을 다루는 能力이 重要하다. 잘못하면 속이 덜 익거나 겉이 타버린다. 잘 익히려면 도우가 불에 얼마나 敏感한지, 長斫이 얼마나 말랐는지까지 考慮해야 한다. 

    19世紀 이탈리아 移民者가 美國으로 進出하기 始作하면서 피자는 世界的인 飮食으로 傳播됐다. 일하느라 늘 바쁜 이탈리아 移民者들이 선 채로 빨리 먹고 다시 일하러 가기 便한 피자를 愛用했다. 이탈리아 移民者 中에서 시칠리아 出身은 主로 시카고로 가고, 나폴리 出身은 主로 뉴욕으로 갔다. 시카고 피자는 깊이가 있는 그릇에 굽기 때문에 “딥 디시 피자”라고도 한다. 도우 깊이가 3cm나 된다. 크러스트 바깥은 바삭하지만 도우는 寢臺처럼 푹신하다. 도우 位는 두툼하고 肉香이 그득한 소시지와 끈적끈적한 치즈가 支配한다. 菜蔬가 설 자리는 없다. 모차렐라, 체다 等 도우에 올라가는 치즈 羊이 나폴리 피자보다 많다. 

    反面 뉴욕式 피자는 平平하고 크고 넓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피자 도우度 비스킷처럼 바삭하면서 탄탄하다. 바쁜 이탈리아 일꾼이 선 채로 들고 먹어도 內容物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도우가 탄탄하게 받쳐준다. 正統 뉴욕 피자는 소시지, 치즈 外에 토핑 가짓數가 많지 않다. 

    이탈리아 피자의 傳播 經路는 이탈리아 마피아의 進出 經路와 비슷하다. 이탈리아 마피아도 시카고와 뉴욕으로 進出했다. 映畫 ‘대부’나 ‘좋은 親舊들’, 美國 드라마인 ‘소프라노스’ 等 이탈리아 마피아를 다룬 映畫나 드라마는 피자만큼 大衆的 人氣를 누린다. 우리나라에서도 組暴 映畫 比重이 높다. 내 境遇에는 暴力이 亂舞한 映畫를 보면 저것은 무슨 罪, 懲役 몇 年 程度 되겠군 하는 생각이 자꾸만 스쳐가서 觀覽에 妨害가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즐기는 便이다. 判事가 法廷에서 事件 關聯者의 말을 듣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 理由는 判斷을 내리고 判決文을 써야 하는 責任과 負擔을 진 채로 듣기 때문이다(내가 ‘혼밥判事’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飮食을 먹으면 맛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 映畫를 볼 때는 間만에 그런 最終 判斷 負擔 없이 事件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더 즐기는 것 같다. 

    마피아 映畫가 魅力的인 理由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仔細히 보면 마피아가 他人과 關係를 맺고 活動하는 方式이 政治界, 産業界 方式과 根本的으로 다르지 않다. 後者는 敎養과 合法을 假裝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마피아는 모든 欲望을 率直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더 담백해 보인다.

    暴力의 追憶

    마피아 映畫에서는 現實에서 좀처럼 具現할 수 없는 暴力의 饗宴을 볼 수 있다. 人間은 本性 깊은 곳에 暴力的 性向을 搭載하고 있다. 平素에는 평화롭게 어슬렁거릴 수 있지만 決定的인 利益을 놓고 競爭해야 할 때는 自己보다 힘이 弱한 者를 暴力으로 굴복시키고 支配하고자 한다. 다만 法과 敎養과 文化와 他人의 視線의 힘으로 暴力性을 制御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制御裝置가 弱해지거나 自己 內面의 힘이 빠질 때는 어김없이 暴力的 本性이 치솟아 오른다. 

    요즘 學校에는 ‘一陣’들이 있다지만 내가 地方 小都市에서 中學校를 다닐 때는 ‘組織’이라고 불리는 애들이 있었다. 어른 組織暴力輩 똘마니의 똘마니 程度 될 것이다. 그래도 同年輩에게는 무시무시한 存在였다. 그 아이들은 틈만 나면 담배를 피우고 침을 찍찍 뱉었다. 只今 생각하면 너무 異常하게도 어른 골프服을 입고 다녔다. 그것도 마치 小便器 앞에 선 것처럼 벨트를 骨盤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로. 登下校 때는 只今 피자 配達用으로 많이 쓰는 오토바이를 마치 할리데이비슨이라도 되는 것처럼 深刻한 表情으로 멋을 부리면서 떼를 지어 타고서 暴走族 흉내를 냈다. 威勢를 부리면서 다른 아이를 함부로 괴롭히거나 돈을 빼앗았다. 그들을 制壓할 힘을 가질 수 없었기에 모른 척 傍觀해야 하는 게 不便하고 火가 나고 自尊感이 傷했다. 

    司法硏修院 2年次 때 故鄕 檢察廳 支廳에서 檢察 時報를 한 적이 있다. 거기서 地方 組織暴力輩의 系譜도를 봤다. 頭目, 副頭目, 行動大將 等의 이름과 寫眞이 있었다. 書類를 보면 대단한 組織으로 보였지만 實狀은 허술했다. 假令 主 活動 區域이 ‘OO 粉食店’ 一帶였다. 檢察廳에 派遣된 刑事와 함께 그곳을 걸어가다가 깍두기 머리를 하고 私債業者처럼 두꺼운 金목걸이를 걸고 있는 뚱뚱한 사내 둘이서 中·高等學生 서너 名을 겁주면서 돈을 빼앗고 있는 場面을 目擊했다. 나는 옆에 있는 刑事를 믿고 그들 앞에 서서 “그런 거 하지 마세요”라고 하고 學生들을 보냈다. 金목걸이들이 온 얼굴에 荒唐함을 머금고 서로 마주 보다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거칠게 물었다. “니 뭔데?” 옆에 있던 刑事가 “나쁜 놈들 잡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金목걸이가 다시 물었다. “先生님?”

    人間 本性의 深淵

    이런 式으로 말하면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甚至於 귀여운 시골 不良輩 같겠지만 實際로는 危險한 아이도 적지 않았다. 中學校 3學年 때 같은 班 아이 中 한 名이 牌싸움을 하다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기도 했고, 高等學校 3學年 때는 우리 班 아이가 牌싸움을 하다가 鈍器를 머리에 잘못 맞아 죽은 적도 있었다. 暴力이 흔했다. 敎師들부터 甚한 暴力을 휘둘렀다. 따귀를 때리거나 발길질을 하는 것은 例事였다. 집에서도 父母에게 맞는 아이가 많았다. 

    요즘에는 그에 비하면 작은 暴力도 學校暴力委員會에서 다룬다고 한다. 그러면 暴力性이 줄어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最近 言論에서 보는 아이들의 集團 暴力은 옛날 우리가 學校 다닐 때 ‘組織’들이 하던 것보다 훨씬 殘忍하다. 무섭다. 여기서 무섭다는 것은 그 行爲의 暴力性을 넘어 人間 自體가 무섭다는 것이다. 그러한 殘忍함이 같은 人間이라는 理由로 내 本性의 深淵에도 있을지 몰라서 두렵다. 

    그것은 實은 裁判할 때마다 드는 心情이기도 하다. 내가 被告人과 같은 環境에서 자라 被告人과 같은 힘을 갖고 被告人과 같은 狀況에 處했다면 나는 저렇게 하지 않았을까. 어릴 때, 젊을 때는 아니라고 斷乎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았는데 漸漸 더 自身이 없다.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前職 判事이자 現 行政府 公務員. ‘사는 듯 사는 삶’에 關心 많은 作家. 쓴 冊으로는 에세이 ‘只今부터 裁判을 始作하겠습니다’, 小說 ‘보헤미안랩소디’(第10回 世界文學賞 大賞作) 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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