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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上佐 德祖스님 “큰스님 謙遜 마음에 사무쳐”|신동아

法頂스님 10周忌 | 佛日癌을 찾아서

맏上佐 德祖스님 “큰스님 謙遜 마음에 사무쳐”

讀書노트, 講演 肉筆 原稿 最初 公開!

  • 정현상 記者

    doppelg@donga.com

    入力 2020-02-19 09: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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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과 글과 行動이 一致했던 分

    • 無所有는 不必要한 것 갖지 않는 것

    • 俗家 母親喪에도 가지 않아

    • 生命中心思想과 맑고 향기롭게 精神

    • 遺言 以後 장례법 簡素化

    • 글을 고치고, 또 고쳤다

    • 열린 宗敎觀과 和合精神

    [정현상 기자]

    [정현상 記者]

    2月 3日 午後 全南 順川 松廣寺에서 佛日癌(佛日庵)으로 가는 ‘無所有길’에 접어들었다. ‘無所有’ 精神을 主唱한 법정 스님이 平素에 다녔던 오솔길이다. 느린 걸음으로도 30~40分이면 佛日癌에 到着할 수 있다고 했다. 갈림길 初入에 里程標 노릇을 하는 經句版이 눈에 들어온다. 

    ‘當身이 眞情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 그 일에 專心專力을 기울이라. 그래서 當身의 人生을 환하게 꽃피우라.’(법정 스님 ‘오두幕 便紙’ 가운데) 

    사람들은 모두 人生을 환하게 꽃피우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 目標를 向해 가는 길이 비록 ‘無所有길’처럼 좁고 孤獨하다 해도 專心專力하다 보면 어느새 到着해 있을 것 같다. 오르막이다 보니 내딛는 발걸음이 더디고, 차가운 바람에도 땀이 솟는다.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다시 스님의 말씀이 담긴 작고 귀여운 經句版이 길을 案內한다.

    追慕 雰圍氣 高調

    [이종승 동아일보 기자]

    [이종승 동아일보 記者]

    ‘冥想은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이고 바라봄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끓는 煩惱를 내려놓고 빛과 소리에 無心히 마음을 열고 있으면 잔잔한 平安과 기쁨이 그 안에 깃들게 된다.’(‘오두막 便紙’ 가운데) 

    2月 19日은 법정 스님 涅槃 10週期다. 2010年 3月 11日(陰曆 1月 26日) 돌아가셨지만 佛家에서는 陰曆으로 期日을 따지기 때문에 이날을 맞이해 조촐한 追慕法會가 서울 城北區 吉祥紗에서 열린다. 올해는 여느 때보다 追慕 雰圍氣가 더 일고 있다. 스님을 기리는 冊도 잇따라 出刊됐고, 無所有 어린이 글짓기 大會, 音樂會(3月 8日, 吉祥紗), 寫眞展(2月 18日~3月 11日, 吉祥紗) 等 여러 行事도 計劃돼 있다. 



    書店에선 法定 스님의 재가 弟子인 정찬주 小說家가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思想이 드러난 句節들을 뽑고 冥想한 ‘법정 스님의 人生應援歌’(茶宴), 스님의 여러 散文 中 幸福·自然·冊·나눔이란 主題로 글을 가려 뽑아 만든 ‘스스로 幸福하라’(샘터)가 于先 눈에 띈다. 1960年代 佛敎新聞에 揭載된 법정 스님의 글을 모은 ‘낡은 옷을 벗어라’는 거칠지만 젊은 스님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스님이 生前에 펴낸 冊은 모두 絶版됐다. 스님이 遺言狀에 “그동안 풀어놓은 말 빚을 다음 生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出版한 모든 出版物을 더 以上 出刊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님의 精神을 따르려는 이들은 스님의 뜻을 기리는 더 많은 關聯 出版物이 나오기를 期待하고 있다. 이런 雰圍氣를 보여주듯 中古 場터에서도 스님의 冊들이 꾸준히 去來된다. 敎保文庫 中古場터에서는 ‘새들이 떠나간 숲은 寂寞하다’ 1996年 初版本(7000원)과 ‘산방한담’ 1983年 初版本(3500원)李 5萬5000원에 나와 있다. 

    佛日癌으로 出發하기 前날인 2月 2日 日曜日 午後 서울 城北區 吉祥紗에 들렀다. 스님이 회주(會主)로 있던 곳이다. 차가운 날씨에도 不拘하고 절을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吉祥紗 第一 안쪽 建物인 眞影閣에는 스님의 陣營과 各種 遺品이 展示돼 있다. 10週期를 맞이해 이곳에 스님의 누더기 옷과 바루, 1967年度에 使用한 洗手대야, 첫 削髮을 記念하는 거울과 索道機, 親筆 原稿도 새롭게 展示된다. 담壁 아래 양지바른 곳엔 스님의 遺骨도 모셔져 있어 특별한 기운이 서린 空間이다. 마루 한쪽엔 ‘스님에게 傳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은 두꺼운 노트가 놓여 있고, 그 안엔 법정 스님에 對한 尊敬과 그리움의 글이 가득했다.

    말과 글과 行動이 一致했던 分

    법정 스님이 열반한 뒤 맏상좌 덕조 스님이 불일암을 지키고 있다. 불일암의 수류화개실 벽에 법정 스님 사진이 걸려 있다. [정현상 기자]

    법정 스님이 涅槃한 뒤 맏上佐 德操 스님이 佛日癌을 지키고 있다. 佛日癌의 水流화개실 壁에 법정 스님 寫眞이 걸려 있다. [정현상 記者]

    ‘스님, 말과 글과 行動이 모두 一致하시는 분. 尊敬하고 마냥 그리워했는데, 요즈음은 每週 한番 (吉祥紗에) 나와서 스님의 冊을 통해서 智慧를 배우는 時間을 갖고 있습니다.’(2020년 1月 21日, 合掌)

    ‘비우고 싶어 왔는데, 더 얻어가는 氣分입니다. 엄마와 함께 좋은 時間 보내고 갑니다.’(1월 18日, 濟州에서 온 母女)

    ‘스님을 恒常 뵙고 싶습니다. 여기에 다녀갈 수 있어 幸福합니다. 恒常 그리워하며 生活하고 있습니다.’(1월 18日, 某氏)

    涅槃한 지 10年이 지났지만 法定 스님의 精神的 遺産은 이렇듯 그를 따르는 大衆의 마음속에 가득하다. 이들은 스님의 자취를 찾아 길上司뿐 아니라 1970年代 初 머문 강남구 봉은사, 全南 順天 佛日癌, 海南 右水營 生家, 修行者로 첫발을 내디뎠던 未來事 효봉癌 等으로 巡禮길에 나선다. 갈 수만 있다면 江原道 五臺山의 오두幕과 美國 로스앤젤레스 考慮사도 例外는 아닐 것이다.

    吉祥紗는 百席 詩人의 戀人으로 알려진 길상화(本名 김영한) 菩薩이 내놓은 城北洞 대원각 터에 1997年 創建됐다. 길상화 菩薩은 平素 법정 스님이 强調하고 實踐한 無所有 思想에 感動해 1000億 원臺 땅을 스님에게 施主했다.

    佛日癌은 元來 高麗 時代 16國史의 한 名이던 7代 子正國師가 세운 子正癌 자리에 법정 스님이 1975年 重建한 곳이다. 스님은 이곳에 17年間 머물렀다. 1992年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는 佛日癌을 떠나 江原道 오두幕으로 옮겼다. 居處를 옮긴다고 宣言하자 佛日癌 訪問客이 줄어들었고, 以後 스님은 겨울이면 추운 江原道를 떠나 따뜻한 佛日癌에 들러 暫時 머물다 가곤 했다. 그래서 佛日癌은 법정 스님의 자취가 가장 많이 배어 있는 곳이다.

    이런 逸話도 있다. 법정 스님의 俗家 外四寸 누님이자 現場 스님의 어머니가 “스님 돌아가시고 나면 이제 어디로 가서 스님을 뵐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법정 스님은 “제가 보고 싶으면 佛日癌으로 가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生前에 스님을 뵌 적이 없는 記者가 佛日癌을 찾아가야 할 理由는 充分했다.

    無所有는 不必要한 것 갖지 않는 것

    불일암으로 가는 무소유길. [정현상 기자]

    佛日癌으로 가는 無所有길. [정현상 記者]

    20餘 分 오솔길을 오르자 작은 대숲이 나타났다. 이 길의 이름이 왜 無所有길인지 알려주는 經句版이 보인다.

    ‘無所有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不必要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選擇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富보다 훨씬 값지고 高貴한 것이다.’(‘산에는 꽃이 피네’ 가운데)

    대숲 너머가 佛日癌이다. 가파른 벼랑길 한 쪽에 쉬었다 가라고 나무椅子가 놓여 있다. 抄錄의 冬柏잎 사이로 피어난 冬柏꽃 한 송이가 봄消息 같다. 一柱門 같은 대숲 터널을 지나자 佛日癌 境內가 보였다. 菜麻밭은 벌써 봄맞이 고랑을 만들어뒀다. 낮은 나무 밑동에 박새가 와서 머물다 客을 보고 날아간다. 돌階段을 올라서자 本채 마당엔 落葉 하나 없이 깨끗하다. 법정스님의 글에 자주 登場하는 헌칠한 厚朴나무(香木련)가 잎을 다 떨군 채 우뚝 서 있다. 스님의 遺骨은 이 厚朴나무 곁에도 모셔져 있다. 누군가 스님에게 바친 정갈한 프리지아 꽃다발이 香氣를 내뿜고 있다.

    只今 佛日癌을 지키는 이는 맏上佐 德操 스님이다. 德操 스님은 1983年 松廣寺에서 出家해 行者 時節 법정 스님을 侍奉하며 戒를 받았다. 1997年 ‘맑고 향기롭게’ 根本度量 吉祥紗가 創建되면서 12年間 住持를 맡기도 했다. 3年 前에는 ‘마음꽃을 줍다’란 冊을 펴냈다.

    법정 스님은 두 가지 遺言狀을 남겼다. 하나는 社團法人 ‘맑고 향기롭게’에, 다른 하나는 上佐들에게 남기는 遺言이었다. 그 가운데 特히 德操 스님에게 내리는 遺言이 있었다. ‘德祖는 맏上佐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決濟中에는 堤防船員에서, 解除中에는 佛日癌에서 10年間 오로지 修行에만 邁進한 後 司祭들로부터 맏死刑으로 尊重을 받으면서 司祭들을 잘 이끌어 주기 바란다.’ 德操 스님은 遺言이 있기 1年 前 佛日癌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로부터 11年째 佛日癌을 지키고 있다. 이제 法定 스님의 遺言대로 맏上佐로서 司祭들을 잘 이끄는 일만 남았다.

    법정 스님은 다른 司祭들(德人, 德門, 덕현, 덕운, 德津, 덕일)에게도 當付했다. ‘德祖가 맏死刑으로서 尊重을 받을 수 있도록 修行을 마칠 때까지는 勿論 그 以後에도 信義와 禮儀로 서로 尊重하고 合心하여 맑고 향기로운 度量을 이루고 遂行하기 바란다.’

    俗家 母親喪에도 가지 않아

    佛日癌 本채에 법정 스님이 손님을 맞이하던 다실(茶室)이 딸려 있다. 한 坪(3.3㎡)이 될까 말까 한 이곳을 스님은 數榴花個室(水流花開室)이라고 불렀다. 물 흐르고 꽃 피는 房이라는 뜻이다. 그 앞에 스님이 굴참나무로 손수 만든 ‘빠삐용 椅子’가 놓여 있다. 椅子 등받이 위에는 ‘默言! 訪問時間 午前 8時~午後 4時’라고 적힌 나무 懸板이 壁 쪽으로 기대어 있다. 椅子에는 吉祥紗에 있는 것과 비슷한 芳名錄에 수많은 事緣들이 적혀 있다. 

    午後 1時 어름, 德操 스님은 客들을 水流화개室에서 맞이했다. 법정 스님의 꼿꼿한 姿態가 담긴 寫眞 額子가 壁에 걸려 있고, 그 아래 법정 스님이 쓴 ‘名線(茗禪)’이라고 적힌 木板이 多基板 위에 세워져 있었다. 명선은 ‘茶와 線은 같다’(茶禪一如)는 뜻이다. 德操 스님이 德談을 건넸다. 

    “새해 福 많이 받으세요. 健康하세요.” 

    -冬安居 中에 갑자기 찾아와 罪悚합니다. 

    “여기는 安居解除가 없어요. 1年 內 똑같아요. 松廣寺 같은 大衆(大衆·比丘, 比丘尼, 優婆塞, 優婆夷) 살림에선 서로가 지키지만, 여기는 解除가 없어요. 똑같아요.” 

    -1年 내내 안거라고요? 

    “그렇지요. 큰절에서는 解除되면 석 달 동안 背囊(걸網) 메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自由가 없어요.” 

    德操 스님은 손님에게 茶 待接을 하기 위해 물을 끓였다. 茶盞과 받침臺를 사람 數字에 맞게 配列하고, 끓은 물을 茶酒煎子에 붓고 茶잎을 띄웠다. 

    “우리 큰스님(法定 恩師스님) 계실 때만 해도 安居 期間에는 지켜야 할 것들을 徹底하게 지켰어요. 그러다 보니 當身의 俗家 母親이 돌아가셨는데도, ‘決濟 中인데 내가 어떻게 나가나’라며 나가지 않으셨어요. 只今은 많은 大衆이 그런 精神을 본받으려고 하면서 사는 거지, 그렇게 嚴格하게 지키지는 않아요. 安居 中에 法會에도 나가고, 佛子들도 만나고 하거든요.” 

    -佛日癌을 오르는 길이 두 갈래이던데, 일부러 오솔길 쪽으로 올라왔습니다. 

    “그 길이 참 좋지요?” 

    -네,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只今은 많이 넓어졌지요. 以前엔 그야말로 오솔길이었어요. 큰스님 계실 때만 해도 그야말로 좁은 길이었어요. 큰스님 가신 뒤에야 길이 좀 넓어졌어요. 지난 10年 사이에 사람들이 워낙 많이 오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生命 中心 思想과 맑고 향기롭게 精神

    -길이 좁을 때는 짐을 지고 다니기는 어려웠겠어요. 

    “큰스님께서 멀리 出他하셨다가 돌아오신다는 傳喝을 받으면 그 오솔길을 빗자루로 다 쓸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큰스님을 모셨어요. 그래서 빗자루질 하는데 道士가 다 됐답니다. 어느 處士님이 저에게 ‘市廳에서 勤務했어요?’라고 하시기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俗家에서 淸掃夫였느냐고 弄談을 하셨던 겁니다, 하하.” 

    -法廷 스님의 글과 精神이 死後 10年이 지난 只今도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는 理由가 궁금합니다. 

    “스님의 글을 읽고 只今 時代를 反芻해 보면 다 울림이 있어요. 돌아가는 現象이 그때나 只今이나 다 똑같으니까요. 思想은 流行을 따르지 않습니다. 思想을 감싸는 外皮는 流行이 있을지 모르지만, 알맹이는 流行이 없어요. 스님께서 感性이나 當時 流行한 흐름만 탔다면 只今 맞지 않을 겁니다. 스님의 모든 思想은 부처님 가르침에 基盤하고 있고, 그것을 글이라는 道具를 통해 現代人이 理解하기 쉽게 大衆化·現代化한 것입니다.” 

    涅槃 10週期를 맞이해 법정 스님의 思想을 特히 再照明하자고 主張하는 이가 있다. 바로 정찬주 小說家다. 그는 20餘 年 前 法定 스님을 뵌 자리에서 “讀者들이 스님 冊을 사랑하는 理由는 스님만의 詩的인 感性이나 現實을 바라보는 銳角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며 “(스님의 글에는) 人間은 勿論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等 有·無情物의 生命의 價値가 같다는 生命 中心 思想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법정 스님은 “無染擧事, 새로울 것은 없어요. 西洋이 人間 中心이라면 東洋의 佛敎는 生命 中心의 眞理입니다”라는 答이 돌아왔다. 情 作家가 最近 펴낸 ‘법정 스님의 人生應援歌’에 나오는 逸話다.

    八萬大藏經과 빨래板 事件

    -德操 스님은 큰스님의 思想에 對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큰스님의 核心 思想이 生命 中心 思想이라는 것에 同意합니다. 그리고 實踐的 次元에서는 무엇보다 ‘맑고 향기롭게’ 精神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自然·世上·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자는 精神인데요. 큰스님은 水經 스님이 環境運動할 때 積極 支持하셨고, 佛日癌의 本社인 松廣寺의 큰 不辭도 自然이 毁損된다는 생각에 否定的인 見解를 披瀝하셨으며, 1970年代 奉恩寺의 開發을 反對하는 글을 써서 宗團과 葛藤도 빚었습니다. 우리가 自然 속에 살기 때문에 自然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 世上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기 위해 이웃과 나누며 살자고 했지요. 吉祥紗가 無料給食을 아주 일찍부터 했어요. 그리고 갖고 싶은 것 다 가진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마음이 空虛해지기 始作하므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이 ‘맑고 향기롭게’ 運動을 始作한 契機가 있다. 1993年 蓮꽃이 佛敎를 象徵하는 꽃이라는 理由로 獨立記念館, 昌德宮 부용정 蓮못의 蓮꽃을 모두 除去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衝擊을 받은 法定 스님은 이런 索莫한 現實에서 푸근하고 향기로운 마음의 蓮꽃을 피우자며 ‘맑고 향기롭게’라는 純粹 市民運動을 始作했다. 1994年 3月 發足 以後 ‘맑고 향기롭게’는 서울, 大邱, 慶南, 釜山, 光州 모임을 두고 全國的으로 活動하고 있다. 

    -어려운 思想도 쉽고 재미있게 傳達하는 게 宏壯한 技術인데, 법정 스님의 글은 참 便安하게 읽힙니다. 

    “스님께서는 經典의 말씀에서도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다 풀어서 說明했어요. 그 點이 特히 남다른 點이었지요. 절집의 用語를 自制하고, 居士님과 菩薩님들이(불자들이) 理解하기 쉬운 말을 썼어요. 傳統的으로 佛家에서 漢字 套가 많이 쓰였는데, 스님이 言語革命을 일으킨 거라고 생각해요.” 

    법정 스님이 이처럼 大衆的 글쓰기에 나선 契機가 있다. 1960年代 海印寺에 머물 때였다. 어느 날 시골 아주머니가 八萬大藏經이 保管된 藏經閣을 지나치면서 法定 스님에게 “八萬大藏經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서 “方今 보고 오지 않았느냐”고 反問하자 “아, 그 빨래板같이 생긴 것 말인가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經板은 漢文을 나무판에 陽刻해 뒀으니 글을 모르면 그것이 빨래板과 비슷해 보일 法도 했던 것이다. 

    “거기서 衝擊을 받은 겁니다. 아무리 좋은 얘기라 한들 알아듣지 못하면 그게 빨래板과 다르지 않다는 거지요. 우리는 大藏經板을 엄청난 寶物로 여기지만, 그 內容을 모르면 그게 아무런 意味가 없는 거지요. 법정 스님은 이 일을 契機로 經典의 한글 飜譯이 切實하고, 쉬운 글쓰기의 必要性을 切感했다고 해요. 알아들어야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部分에서 相當히 깨어 있었던 겁니다.” 

    -티베트에서는 글을 몰라도 마니차(佛敎 經典을 넣은 經通)를 돌린다고 합니다. 한 番 돌리면 그 안에 담긴 經典을 읽은 것과 같고, 그 法音(부처님 말씀)이 世上에 퍼진다고 믿는다던데요. 

    “그것은 그 나라의 精神이지요. 티베트의 판空超(南草) 湖水에 갔더니 驚異 새겨진 盞을 물에 담가요. 왜 그러느냐고 묻자 물고기에게 經典을 읽어준다는 意味라고 해요, 하하. 旗대에 經典을 새긴 旗발을 다는데, 바람이 불어오면 부처님 말씀이 바람에 날아가 世上에 퍼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重要한 것은 意味입니다. 어떤 意味를 附與하느냐에 따라 價値가 있고 없음이 나뉩니다. 解脫은 요즘말로 하면 幸福입니다. 모든 苦痛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왔다 갔다 하는 幸福이 아니라 永遠한 幸福이 解脫이지요.”

    遺言 以後 장례법 簡素化

    -法廷 스님의 視角으로 보면 傳統을 固執하는 佛敎界도 바뀌어야 할 部分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래도 强要하는 말씀은 없었어요. 부처님의 말씀도 事實 그렇고요. 佛敎界 어른인 큰스님이 佛者를 向해서도 普遍妥當한 말씀을 했지, ‘이것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强要의 말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重要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重要한가요. 

    “事實 佛敎界 內部에서도 그처럼 影響力 있는 분이 强力하게 發言해주기를 바랐을 겁니다. 하지만 스스로 實踐할 뿐, 强要의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요. 正말 疏脫하신 분이었지요. 가실 때도 虛禮虛飾 없애라고 當付하셨잖아요. 棺도 없이 平素 입으시던 歌詞 하나 걸치고 가신 겁니다. 큰스님 涅槃한 뒤 절집 葬禮法이 아주 簡素하게 달라졌어요. 그것이 出家 修行者 本然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法廷 스님이 文學 工夫를 많이 했나요. 

    “큰스님은 아름다운 用語를 많이 쓰고, 言語 感覺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文學 工夫 德分이었지요. 出家한 뒤에도 冊에 對한 執着이 많아서 효봉 恩師스님으로부터 惹端도 맞았다고 합니다. 出家한 뒤에 四寸동생에게 冊 보내달라고 要請했을 程度였으니까요. 다른 큰스님들은 제가 行者이던 時節 房에 經典 外에 다른 冊이 있으면 불태우라고 했어요. 出家해서 왜 必要 없는 바깥 冊을 보느냐는 거였지요. 그런데 當身은 讀書를 固執하셨단 말입니다, 하하. 知的인 探究心이 엄청나게 강하신 분이었어요.” 

    -큰스님께서 特히 어떤 장르에 關心이 많으셨나요. 

    “藝術家的 才能이 뛰어나셔서 映畫뿐 아니라 美術, 音樂, 寫眞 等에 關心이 많았어요. 音樂을 좋아하니 누군가 오디오를 膳物했어요. 平素엔 사람들이 들락거려서 잘 들을 수 없고, 혼자 계실 때 가끔 들었는데요. 庵子를 찾는 이 없는 비 오는 어느 한낮에 제가 松廣寺에서 올라오던 中이었는데 佛日癌에 가까이 오니까 ‘빠바방’ 하고 커다란 音樂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제가 나타나니까 스님은 조금 겸연쩍으셨는지, ‘비 오는 날이 가장 좋아, 빗소리에 맞춰 音樂을 들을 수 있으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音樂에 宏壯히 造詣가 깊으셨어요. 그러다 조금 지나자 오래 갖고 있으면 執着하게 된다며 오디오를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습니다. 소리에 워낙 銳敏하시다 보니, 法會에 가서 音響이 안 좋으면 두 番 다시 그 절에는 안 가십니다. 그래서 제가 吉祥紗에서 (住持)所任을 볼 때 音響에 엄청 神經을 썼습니다. 스님은 자유로운 靈魂을 좋아해서 小說 ‘그리스인 조르바’의 作家 카잔차키스度 좋아하셨지요.”

    마음에 사무치는 큰스님의 謙遜

    -큰스님 떠나신 자리에, 10年 동안 머물고 있는 것이 負擔되지는 않는지요. 

    “저는 큰스님이 가셨다는 생각이 別로 들지 않습니다. 10年이 지나도 只今 이곳에 계신 듯해요. 影幀을 모시고 每日 禮佛하고, 스님이 계셨던 이 空間에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實感이 잘 나지 않습니다. 勿論 빈 空間이 느껴지긴 합니다만, 스님이 이곳에 계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어요.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안 계신다고 느낀다면 제 마음대로 하겠지만, 계신다고 생각하니 恒常 一擧手一投足이 조심스럽습니다.” 

    요즘 佛日癌이 법정 스님이 계실 때와는 다른 정갈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큰스님의 精神을 찾아서 이곳을 訪問하는 분들은 다 冊에서 읽은 느낌과 그림만 머릿속에 넣어 갖고 옵니다. 큰스님의 글을 보면 깔끔하거든요. 그런 雰圍氣가 只今 이곳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면 結局 큰스님에 對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恩師스님께 누가 되지 않으려고 熱心히 度量을 가꾸고 있습니다. 제게는 큰스님이 아직 살아계신 겁니다.” 

    -10餘 年 佛日癌에서 遂行하면서 깨달음이랄까, 마음에 사무친 것이 있었다면 무엇인지요. 

    “저에겐 아직 깨달음이 없고요. 마음에 사무치게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큰스님의 謙遜함입니다. 큰스님은 博學多識해서 모르는 部分이 거의 없었지만, 自慢하지 않으셨어요. 남들은 깨달았다고 表現하지만, 當身은 絶對 그런 말 하지 않으셨어요. 勿論 깨달음은 말로 表現할 수 없는 境地니까, 또 말로 한다고 해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이고요. 우리가 그 境地에 갔을 때에야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뿐이지요. 다른 여러 어른 스님을 많이 親見했지만, 큰스님만 한 분을 뵙지 못했어요.” 

    -謙遜이 큰 가르침이었군요. 

    “謙遜함이 日常에 배어 있었어요. 法會를 다니다 보면 스님께 卽席 法文을 請하는 境遇가 있었는데 큰스님은 謙遜해하며 마다했어요. 準備되지 않은 法文은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法文 內容이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바늘 하나로 다 꿸 수 있어요. 徹頭徹尾하게 準備합니다. 그리고 講演을 하고 나면 原稿를 다 태웁니다.”

    글을 고치고, 또 고쳤다

    법정 스님의 유골은 불일암 후박나무 곁(사진)과 길상사 진영각 담장 아래 묻혀 있다. [정현상 기자]

    법정 스님의 遺骨은 佛日癌 厚朴나무 곁(寫眞)과 吉祥紗 眞影閣 담牆 아래 묻혀 있다. [정현상 記者]

    -에세이도 恒常 數未詳館, 正確한데요. 

    “스님의 (原稿紙에 쓴) 原稿를 보면 깨끗한 게 없어요. 고치고 또 고칩니다. 脫稿하기까지 수많은 校庭과 修正을 통해 完成本을 만듭니다. 活字化되면 살아 있는 글이기 때문에 雜誌 못한다고 表現하셨어요.” 

    佛家에서는 謙遜을 自己를 낮추고 남을 높인다는 뜻의 하심(下心)이라고도 한다. 

    “제가 아는 한 큰스님은 남을 無視하거나 當身이 잘났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어서는 매우 乖角(怪짜)이셨다고 해요. 特히 海印寺 時節 큰스님들 얘기 들어보니, 想像이 안 될 程度였더군요. 그래서 當時 別名이 ‘伽倻山 억새풀’이었다고 합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베일 程度로 날카로웠다는 겁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매우 부드러운 분으로 바뀌셨지요.” 

    -10周年이라고 訪問客이 많아졌나요. 

    “이곳에서 行事를 하는 건 아니어서, 特別히 많아진 것 같지는 않고요.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옵니다.” 

    -그사이에 厚朴나무는 많이 자랐는지요. 

    “지난 10年 동안 나무만 鬱蒼해진 것 같습니다, 하하. 우리는 그에 半에 半도 자라지 못했는데, 나무들은 正말 많이 자랐지요. 스님은 自然의 아름다움에 對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마음이 아름다우시니까 꽃을 좋아하셨고요.” 

    정찬주 小說家에 따르면 법정 스님은 “모든 欲心을 다 내려놓을 수 있겠는데, 아름다움에 對한 欲心을 내려놓기는 힘들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性情이 매우 섬세하셨어요. 出他하실 때는 必要한 것 없느냐고 물으시고, 旅行 다녀오실 때는 꼭 膳物도 사 오셨어요. 大衆을 向해서는 매우 冷靜하게 말씀하시지만, 個人的으로는 弄談도 잘 하시고, 위트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스님이 法文에서 ‘가장 좋은 절은 吉祥紗가 아니라 親切’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뭔가를 眞摯하게 渴求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親切했어요. 當身이 밥까지 지어서 같이 먹자고 하기도 했고요.”

    讀書노트와 講演 原稿 最初 公開

    佛日癌에는 侍者가 없이 法定 스님 혼자 居處했고, 詩者는 松廣寺에서 佛日癌까지 왔다 갔다 하며 侍奉했다. 법정 스님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자 일부러 신발을 감추고 房에서 人기척 없이 지내기도 했다. 松廣寺에서 佛日癌으로 가는 갈림길에 ‘佛日癌’을 뜻하는 ‘ㅂ’字 하나만 標示해 둔 案內板을 만든 것도 법정 스님이다. 

    -個人的으로 法定 스님의 자취를 記憶할 만한 것이 있는지요. 

    “스님께서는 글을 많이 쓰셨지만, 出版하지 않은 것들은 大部分 태워서 없앴어요. 그런데 제가 侍奉할 때, 저에게 불태우라고 한 原稿 가운데 제가 태우지 않고 갖고 있는 것들이 조금 있는데요. 제게는 그것들이 너무 所重해 보였고, 이런 것마저 없다면 나중에 스님을 어떻게 記憶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當身의 훌륭한 習慣은 메모하는 것인데요. 讀書한 뒤 冊 內容을 要約한 讀書노트(解說記事 309쪽)를 만들었어요. 그것을 한 卷 갖고 있고요. 講演 原稿도 몇 個 갖고 있습니다.” 

    實物을 보고 싶다고 하자 德操 스님은 因法堂으로 갔다가 原稿 한 褓따리를 들고 들어왔다. 言論에는 最初로 公開하는 元本 肉筆 原稿였다. A4 折半 크기의 讀書노트는 色이 노랗게 變해 겉面에 적힌 글字도 지워져 있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眞實에 對하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性 프란치스코’,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와 ‘러브’ 等에 對한 書評은 스님이 共感한 것이 무엇인지 確認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人間과 自然’이라는 題目의 講演 原稿도 눈에 띄었다. 법정 스님은 1988年 國際學術大會에서 이 內容을 發表했고, 以後 이 內容은 若干의 修正을 거쳐서 隨想錄 ‘텅 빈 充滿’에 실었다. 

    -德操 스님도 吉祥紗 住持를 맡고 있을 때는 아주 直線的이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只今 생각하면 제가 많이 젊을 때였어요. 所任 볼 때 主로 스님의 말씀에 따라 일을 했는데, 잘 안될 때도 있었고요. 스님의 精神을 펼치기 위해 앞만 바라보고 갔지요. 일을 벌여놓았는데, 마지막에 그만두라고 하실 때도 있었어요. 어떤 일을 벌이면 關係들이 얽혀 있는데, 그만두라고 하시니 正말 漠漠했어요. 그래도 스님의 意見을 尊重했지요. 큰스님께서는 現實과 以上 가운데 主로 크고 理想的인 말씀들을 하셨어요. 예컨대 스님은 돈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저는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住持로서 절을 運營해야 하니까 職員 給與나 行事 費用 같은 것을 따져야 했습니다. 어느 날은 査察 財政에 도움이 될 프로젝트를 하나 企劃해서 進行 中이었는데, 갑자기 中斷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理由는 ‘절에 돈이 많아지면 問題가 생긴다’는 거였어요, 하하. 그게 스님의 精神입니다.”

    일곱 上佐의 그리움

    -無所有 精神과 一致하네요. 

    “佛日癌에 오신 분들이 無所有 얘기를 많이 하십니다. 그리고 法定 스님이 無所有를 말씀하시면서 왜 茶(小型車 SM3)를 運轉하고 다니시는지 묻는 분들도 있었어요. 無所有는 아무것도 갖지 말자는 게 아니라 過度한 것을 所有하지 말고, 가진 것을 나누자는 精神임을 알면 좋겠습니다. 큰스님은 無所有가 곧 나눔이라고 말씀하셨어요.” 

    -上佐들 모두에게 10週期는 特別할 듯합니다. 

    “우리 食口(上佐)가 모두 7名입니다. 各自가 큰스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같을 겁니다. 그런데 큰스님을 받들고 생각하는 方式은 서로 다릅니다. 큰스님의 어느 部分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은 各自의 생각이고, 맞다, 틀리다는 것으로 裁斷할 수는 없지요. 누구는 그리워서 울고, 罪悚한 마음에 울고, 가르침을 새기며 울고 하겠지요.” 

    -法廷 스님은 ‘(寺)맑고 향기롭게’에 남기는 말의 첫 部分에 ‘모든 분들에게 깊이 感謝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繼續 懺悔하겠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돌아가시면서까지 懺悔하겠다는 말씀에 謙虛해집니다. 

    “佛家에서 말하는 懺悔는 三從懺悔입니다. 우리가 알고 짓는 罪, 모르고 짓는 罪, 意圖하지 않게 남을 시켜서 짓는 罪가 있습니다. 修行者는 그런 마음으로 懺悔합니다. 큰스님께서도 當身 모르게 傷處받은 사람이 있으면 容恕해다오 하는 마음 아니었을까요. 큰스님께서 무슨 큰 罪를 지었겠어요. 그 또한 謙遜의 말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열린 宗敎觀과 和合精神

    갑자기 門 밖이 시끄러워져 다실 門을 열자 數十 名이 佛日癌을 둘러보고 있었다. 參拜客들은 德操 스님을 찾았다. 하루에 海印寺, 通度寺, 松廣寺를 들러 禮佛을 드리는 佛子들이라고 했다. 松廣寺에 들렀다가 佛日癌까지 올라온 것이다. 

    법정 스님을 찾는 이들은 非但 佛子만은 아니다. 스님은 平素 “히말라야로 오르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며 다른 宗敎도 尊重했기 때문에 非佛敎 信者도 많다. 어떤 이는 芳名錄에 “佛敎와 관계없는 사람이지만 스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깨우침을 받았다”고 적기도 했다. 스님은 열린 宗敎의 現場에 있었다.
     
    “1998年 2月 24日 서울 明洞聖堂 講論하는 곳에는 가톨릭 神父가 아닌 僧服을 입은 분이 서 있었다. 異色的인 風景이었다. 그것은 1997年 12月 14日 金壽煥 樞機卿이 吉祥紗 開院法會에 參席하여 祝辭해주신 答禮의 性格으로 明洞聖堂이 세워진 지 100年을 記念하고자 마련한 講論 자리였다. 스님의 思想과 哲學을 듣기 위해 聖堂을 가득 채운 神父와 修女, 가톨릭 信徒들이 귀를 기울였다. 講論 主題는 經濟危機 克服과 淸貧의 삶이었다.”(‘법정스님 人生應援歌’ 中에서) 

    법정 스님의 和合 精神을 본받아 宗敎뿐 아니라 理念, 地域, 貧富 葛藤이 우리 社會에서 눈 녹듯 사라지길 祈願해 본다. 佛日癌에서 내려가는 오솔길에 陽明한 햇살이 公平하게 뿌려졌다.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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