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激動의 都市, 러시아 모스크바|新東亞

유럽歷史紀行

激動의 都市, 러시아 모스크바

예나 只今이나 차르와 貴族들의 都市

  • 백승종 韓國技術敎育大 名譽敎授

    chonmyongdo@naver.com

    入力 2020-03-07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차르, 革命, 混沌, 資本主義, 兩極化의 都市

    • ‘洋파 模樣’ 바실리, 붉은 廣場, 레닌의 무덤…

    • ‘차르’ 時代 연 이반 3歲, ‘近代化 期數’ 표트르 大帝

    • 니콜라이 2世 戴冠式에 參席한 忠情公 閔泳煥

    • 華麗한 GUM 百貨店, ‘제멋대로’ 大符號 子弟들

    크렘린 궁전. [GettyImage]

    크렘린 宮殿. [GettyImage]

    모스크바는 날씨도, 貧富의 差異도 極端的이다. 이곳에는 1200萬 名(2014年 基準) 市民이 居住한다. 一部는 西歐의 價値를 내면화했다고 볼 수 있으나 큰 틀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西유럽과는 完全히 다른 價値가 ‘모스코비치’(모스크바 사람)의 가슴을 支配한다. 이 都市의 空氣는 家父長的이고 權威的이었다.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들의 獨特한 生活感情을 皮膚로 느꼈다. 차르(皇帝)와 보야르(高位 貴族들)는 아직 살아 있었다.

    크렘린 宮殿에서

    크렘린이 歷史의 主 舞臺가 된 것은 13世紀였다. 모스크바 公國의 創建者 有利 돌고루키가 이곳에 木柵을 둘러 要塞를 構築했다. ‘城砦(城砦)’ 또는 ‘城壁(城壁)’을 뜻하는 러시아語가 크렘린이다. 이곳은 1237~1238年間 世界 最强 軍隊의 攻擊을 받았다. 몽골軍이었다. 그들은 이 요새를 簡單히 陷落시켰다. 몽골의 支配는 240年間이나 繼續됐다. 아직 몽골이 다스리던 14世紀, 크렘린의 再建이 始作됐다. 몽골이 물러가면서 더욱 活氣를 띤 再建事業은 17世紀에 이르러 完成됐다. 

    宮闕 안에 華麗한 建物이 빽빽이 들어섰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러시아正敎會 聖堂들이었다. 우스펜스키 聖堂(聖母昇天 聖堂)을 비롯해, 聖母受胎告知 聖堂과 大天使 聖堂이 가장 이름났다. 19世紀 初, 나폴레옹의 軍隊가 쳐들어와 無嚴하게도(?) 우스펜스키 聖堂을 馬廏間으로 使用했다. 프랑스 軍隊가 물러가자 聖堂은 本來의 機能을 回復했다. 러시아帝國의 마지막 차르人 니콜라이 2世는 이 聖堂에서 盛大한 戴冠式을 擧行했다. 

    거기서 나는 忠情公 閔泳煥을 떠올렸다. 민 功은 1896年 高宗의 特赦로 그 戴冠式에 參席했다. 나중에 그는 世界 一周의 所感을 글로 整理해 ‘해千秋犯(海天秋帆)’이란 冊子로 묶었다. 여러 해 前, 나는 민 公의 글을 읽으며 祖國의 將來를 念慮하던 그의 切切한 마음을 보았다. 

    憂鬱한 마음을 떨치기 위해 모스크바에 사는 親舊 이고르와 함께 크렘린 宮殿의 뜨락을 걸었다. 애써 明朗한 마음으로 걷다 보니 和暢한 봄볕이 느껴졌다. 눈앞에 宮殿의 名所들이 비로소 次例로 나타났다. 그中에서 武器庫 博物館은 아직도 記憶에 생생하다. 博物館은 12世紀 以後 러시아의 武器를 所藏한 곳이었다. ‘차르 푸슈카’라는 大砲가 特히 눈길을 끌었다. 무게가 40t, 砲身 길이가 5.34m, 구경이 89cm에 畏敬이 120cm라고 했다. 1586年 안드레이 超코브가 製作했는데, 世上에서 가장 큰 在來式 曲射砲다. 러시아의 部와 能力을 誇示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이반 大帝(3歲)의 鐘塔度 훌륭했다. 크렘린의 여러 建築物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鐘塔 뒤便에는 ‘차르 種’이 있었다. 높이가 6.14m, 지름은 6.6m, 무게가 202t이라 해서 놀랐다. 世上에서 가장 큰 종이라는데, 깨진 조각 하나의 무게가 11.5t이란다. 種의 表面에는 차르 알렉세이 夫婦가 實物 크기로 彫刻돼 있어 흥미로웠다.

    차르의 時代: 이반 大帝와 이반 4歲

    이고르와 나는 크렘린을 벗어나 暫時 休息을 取했다. 붉은 廣場 건너便에 雅淡한 레스토랑이 있었다. 이고르는 獨逸 留學 時節에 사귄 親舊다. 우리는 샤슬릭을 注文했다. 傳統的인 꼬치料理다. 羊고기, 돼지고기, 쇠고기에 양념을 해 菜蔬와 함께 꼬치에 꿴 것이다. 구워서 먹는데 맛이 一品이었다. 主로 祝祭 때 이 料理를 즐긴다고 한다. 한 盞의 보드카를 곁들였더니 最上이었다. 

    窓밖으로 부산히 오가는 人波를 느끼면서 우리는 이반 大帝(3世·1440~1505)에 對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몽골의 拘束으로부터 러시아를 解放시켰다. 正確히 말해, 킵차크칸國의 支配에서 벗어났다. 大帝는 비잔틴 帝國의 사위였다. 콘스탄티누스 11歲의 조카딸 소피아가 그의 皇后였다. 그때 러시아는 비잔티움의 文化를 積極 受容해 크게 發展했다. 이반 3世는 領土 開拓에도 힘써 東北러시아를 統一(1485)韓 人物이기도 하다. 

    1453年 비잔틴 帝國은 滅亡했다. 그러자 大帝는 自身이 콘스탄티노플의 後繼者라고 主張했다. 그는 러시아가 곧 ‘第3의 로마’라며 東方正敎 首長을 自任했다. 本來 비잔틴 皇室의 문장인 ‘雙頭의 禿수리’도 러시아의 것으로 삼았다. 또한 로마 皇帝 카이사르를 러시아式으로 읽어 自身을 ‘차르’라고 稱했다. 

    그런데 차르다운 러시아 皇帝는 이반 大帝의 孫子인 이반 4歲였다. 그는 初盤에 不運했다. 早失父母한 그를 高位 貴族層人 보야르가 强하게 牽制했다. 怜悧한 그는 下級 貴族과 商人들의 支持를 바탕으로 大權을 쥐었다. 以後 보야르와 숨막히는 權力鬪爭이 벌어졌고, 結局 皇帝가 이겼다. 그의 統治는 殘酷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이반 그로즈니’(恐怖), 이반 뇌제(雷帝)라고 불렀다. 16世紀 獨逸 等 유럽 各國에서 流行한 삐라(獨語, Flug Blaetter)에서 그는 ‘恐怖의 王’으로 描寫됐다. 그는 왜 그토록 殘酷한 차르가 됐을까. 重病을 앓고 난 뒤 찾아온 後遺症이라는 설, 차르들이 앓은 憂鬱症이라는 설, 憂鬱症과 水銀 中毒을 함께 앓았다는 說 等이 있으나 確認된 바는 없다. 

    모스크바에서는 누구나 러시아의 政治와 經濟를 討論한다. 이고르와 나도 그랬다. 우리는 러시아의 歷史的 發展에 劃期的으로 寄與한 또 한 사람, 피터(표트르 1歲) 大帝를 話題로 삼았다. 피터大帝가 태어났을 當時 러시아는 유럽의 邊方이었다. 이에 不滿을 가진 大帝는 스스로를 러시아 最高의 啓蒙君主로 만들었다. 그를 모두가 稱讚하는 理由다. 

    1697年 그는 使節團을 이끌고 네덜란드로 갔다. 이어서 英國과 獨逸도 巡廻했다. 造船術과 大砲 製作 技術 等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1年 3個月間의 유럽 旅行 中 그는 勞動者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工場에서 直接 일을 배우기도 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럽 滯留는 그에게 一種의 數學旅行이었다. 그는 유럽의 風俗과 制度까지 徹底히 硏究해, 러시아를 改革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大帝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不凍港(不凍港)을 얻기 위해 努力했다. 그리하여 유럽으로 가는 關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建設했다. 이 都市는 運河가 많아 암스테르담을 聯想시킨다. 新都市 建設에 動員된 建築家는 果然 네덜란드 出身이었다.

    아름다운 ‘붉은 廣場’에서

    방부 처리돼 유리관 속에 안치된 레닌. [백승종 제공]

    防腐 處理돼 琉璃管 속에 安置된 레닌. [백승종 提供]

    이고르와 나는 크렘린 周邊을 바로 떠나지 못했다. ‘붉은 廣場’의 魅力 때문이었다. 宮殿의 北東쪽에 자리한 이 廣場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本來 이름부터가 ‘크나스나야’(아름답다) 廣場이다. 17世紀부터 그렇게 불린다. 

    이곳에서 가장 人氣 있는 古跡은 상트 바실리 大聖堂(Saint Basil’s Basilica)이다. 여덟 個의 塔이 매우 印象的이다. 洋파를 聯想시키는 지붕의 色相과 模樣이 저마다 달라서 더욱 魅力的이다. 이반 4歲가 카잔칸國을 倂合한 記念으로 지었다(1552). 大聖堂의 建設 責任者는 야코블레프였다. 皇帝는 바실리 大聖堂보다 더 아름다운 建物을 짓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멀쩡한 두 눈을 멀게 했다는 傳說이 남아 있다. 事實과는 距離가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러시아正敎는 이반 3歲 때 出帆한 國家 宗敎다. 共産 政權 時節에는 甚한 彈壓을 받았으나, 그들이 沒落하자 華麗하게 復活했다. 오늘날 러시아에는 正敎會가 人氣를 끌고 있다. 共産 政權 아래서 宗敎를 完全히 잊고 지내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聖堂을 찾고 있다. 宗敎의 놀라운 復元力이 神奇하기만 하다.
     
    모스크바에 처음 到着했을 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하나 있었다. 地下鐵이다. 유난히 땅속 깊은 곳에 歷史(驛舍)가 있었다. 大理石으로 華麗하게 裝飾된 九干이 많고, 神奇하게도 地下鐵 中間 中間에 博物館도 있었다. 아마 世上에서 가장 아름다운 地下鐵이 아닐까 한다. 

    모스크바 地下鐵은 總延長이 300km다. 서울과 비슷하다. 모스크바 市內는 서울만큼이나 交通難이 深刻하다. 그러나 地下鐵은 出退勤 時間을 除外하면 閑寂하다. 迅速하고, 快適해 하루 平均 利用客이 700萬 名을 넘는다. 이 亦是 서울과 비슷한 水準이다. 

    다시 地上으로 視線을 옮긴다. 都心 한가운데 레닌의 무덤이 있다. 花崗巖으로 지은 建物인데, 琉璃管을 地下에 設置해 두고 레닌의 屍身을 防腐 處理했다. 琉璃管 속 레닌은 잠자는 것 같은 모습으로 參拜客을 기다린다. 그의 墓도 後世에 影響을 줘 中國의 마오쩌둥과 北韓 김일성의 墓도 비슷한 樣式으로 設計됐다. 

    레닌으로 말하면 볼셰비키 革命의 指導者로 初期 蘇聯 政權의 主役이었다. 革命 直前 그는 스위스의 취리히에 亡命해 있었다. 當時 獨逸 政府는 그를 政治的으로 利用하기로 作定했다. 獨逸 當局은 레닌을 特別 列車에 태워 모스크바로 歸還하게 했다. 레닌은 革命에 成功해 世界史를 바꾼 人物이 됐다. 그러나 정작 獨逸은 아무 利得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第1次 世界大戰에 敗北해 엄청난 被害를 보았다. 歷史의 아이러니다. 

    어느 날, 이고르는 나를 自身의 親舊 집으로 불렀다. 다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食事 때가 되자 집主人은 보르시치를 내놓았다. 러시아의 傳統 수프였다. 肉水를 만들고 거기에 沙糖무, 살코기, 토마토, 洋파, 감자, 당근 等을 次例로 넣고 끓인 料理였다. 沙糖무 때문에 수프는 저절로 붉은色을 띤다. 러시아에서는 어느 집이나 보르시치를 자주 끓여 먹는다. 

    맛있는 수프를 먹을 때도 스탈린이란 獨裁者가 나의 腦裏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食後에 굴락 歷史博物館을 찾았다. 내게는 스탈린 時代의 悲劇을 體驗하는 場所였다. 스탈린 時代, 많은 사람이 集團收容所에서 죽어갔다. 博物館은 그 當時의 政治犯 收容所를 復元한 것이다. 關係者에게 들은 말인데, 犧牲者 家族이 찾아와 當事者와 關聯 있는 文書를 請求하기도 한단다. 가슴 아픈 일이다.

    막심 고리키

    알다시피 러시아는 文學이 發達한 나라다. 共産黨이 支配하던 時代에도 人氣 作家가 많았다. 人氣의 最高峯은 막심 고리키가 아니었을까. 그의 ‘어머니’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程度다. 

    막심 고리키는 制定러시아 末期에 最下層 市民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글재주가 卓越해 서른 살도 되기 前 人氣 作家로 浮上했다. 그의 名聲은 톨스토이와 雌雄을 다툴 程度였다. 1917年 共産革命이 일어나자 그는 레닌을 支持했다. 그러면서도 共産黨에 加入하지 않는 超然함을 보였다. 

    第1次 世界大戰이 끝나고 모스크바에도 一團의 平和가 왔다. 그러자 다양한 大衆 施設이 門을 열었다. 고리키 公園이 代表的이다(1928년 開場).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市民公園이다. 江邊을 따라 3km나 되는데 湖水도 끼고 있다. 市民들에게 더없이 좋은 休息 터다. 特히 겨울철에는 公園의 中央에 超大型 스케이트場이 設置돼 市民을 기쁘게 한다. 

    모스크바에는 藝術家의 이름을 딴 公共施設이 正말 많다. 푸시킨 美術館도 例外가 아니다. 本來는 모스크바 大學이 다양한 美術品을 蒐集해 體系的으로 管理하려고 만든 展示 空間이었다(1912). 1937年 現在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共産 政權 時節, 古代 이집트와 그리스를 비롯해 비잔틴 帝國과 近代 유럽의 美術品을 많이 蒐集했다. 요즘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彌陀視 美術館에 버금갈 程度다. 

    이고르는 나에게 또 다른 博物館 하나를 推薦했다. 宇宙博物館이었다. 그곳에는 유리 가가린의 遺物이 눈길을 끌었다. 가가린은 地球 바깥을 體驗한 最初의 人間이었다. 宇宙飛行士로서 그가 宇宙 空間에 머문 것은 108時間이었다. 1961年, 그가 탄 蘇聯의 人工衛星이 發射臺에 裝着됐다. 그 時節에는 人工衛星이 成功的으로 發射될 確率이 50%도 채 안 됐다. 죽음을 不辭한 宇宙飛行이었다. 살아 돌아오는 奇跡이 일어날 可能性은 몹시 稀薄했으나 가가린은 微笑를 지었다. 

    가가린은 魅力 滿點의 人物이었다. 웃음 띤 그의 환한 表情은 마치 蘇聯의 밝은 未來를 豫告하는 明白한 象徵인 양 여겨졌다. 그는 가난한 農夫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蘇聯의 國家 英雄으로 成長했다. 蘇聯 當局은 이 英雄이 或是 不意의 事故를 當할까 念慮해 아예 飛行 禁止 命令을 내렸다. 그러나 가가린은 다시 飛行機를 操縱하고 싶어서 當局을 說得했고, 1968年에 드디어 飛行 禁止令이 풀렸다. 그런데 가가린은 기쁜 마음에 다시 操縱杆을 손에 쥐었지만, 바로 첫 番째 飛行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미스터리한 事故였다.

    고르바초프 以後의 모스크바

    소비에트 體制는 1世紀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바로 그 時代 蘇聯의 混亂을 收拾할 責任을 맡았다. 東歐圈 沒落의 根本的인 原因은 무엇일까. 質問은 明白하지만 對答하기는 如干 어려운 일이 아니다. 

    分明한 事實은 이런 變化의 바람이 1980年代 폴란드에서 일어났다는 點이다. 蘇聯도 改革 路線을 選擇했다. 1985年, 蘇聯共産黨 書記長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改革)를 闡明했다. 以後 東獨 社會가 휘청거렸고, 체코도 헝가리도 改革開放의 물결에 휩쓸렸다. 

    1990年 10月 3日, 東歐圈의 强大國 東獨이 西獨에 完全히 吸收 統合됐다. 東獨에 滯留하던 蘇聯軍도 全員 撤收했다. 마침 그때 나는 西獨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통독 過程을 詳細히 알 수 있었다. 헬무트 콜 西獨 總理는 蘇聯에 莫大한 經濟 援助를 約束했다. 

    그때 東獨에 派遣돼 活躍하던 蘇聯의 國家保安委員會(KGB) 幹部 中에 블라드미르 푸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野心的인 人物이었다. 그는 蘇聯으로 돌아가 보리스 옐친의 側近이 됐고, 나중에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代身해 最高 權力者로 浮上하자 더욱 乘勝長驅했다. 이 野心滿滿한 策略家는 現代 러시아의 ‘차르’가 됐다. 

    蘇聯이 崩壞한 다음, 러시아 社會는 急速度로 資本主義 秩序를 受容한다. 모스크바에는 富와 奢侈의 象徵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華麗한 쇼윈도를 자랑하는 굼(GUM) 百貨店은 透明한 琉璃 지붕 아래 온갖 豪華 商品을 멋들어지게 陳列해 놓았고, 모스크바 最高의 富者들은 이곳으로 모였다. 굼은 19世紀 末에 創立돼 1953年에 現在의 모습으로 改築됐다. 3層짜리 建物인데, 소비에트 時節에도 蘇聯의 經濟的 繁榮을 誇示하는 宣傳 舞臺였다. 現在 굼은 資本主義 물결을 타고 順航하고 있다. 200餘 個 店鋪가 各樣各色의 專門 商品을 去來한다. 

    러시아는 一種의 마피아 社會라고 봐도 좋다, 60名假量의 大富豪가 러시아 社會를 所有하고 있다. 마치 차르와 보야르의 時代가 되돌아온 것 같은 錯覺이 든다. 富豪들의 子弟는 甚한 浪費癖에 사로잡혀 있다. 이고르와 나는 眞情으로 모스크바의 兩極化를 걱정했다. 러시아 特殊層의 삶은 지나치게 호화롭다. 그들은 數百에서 數千 ㎡나 되는 超大型 住宅이나 아파트에서 산다. 모스크바의 高位層은 交通信號도 깡그리 無視한다. 그들은 사이렌을 꺼내 乘用車 지붕 위에 얹고 어디로든 疾走한다. 交通 秩序 같은 것은 庶民들이 지키는 法이다. 

    모스크바를 떠나기 前 나는 江줄기를 훑어 오르내리는 크루즈에 몸을 실었다. 遊覽船으로 이 巨大한 都市를 一周하는 맛이 유별났다. 크렘린을 지나 피터 大帝의 銅像과 盧보데備置 修道院도 스쳐 지나갔다. 이고르의 經驗談을 들어보면 겨울의 크루즈가 最高란다. 얼음을 깨며 달리는 碎氷船 크루즈 말이다. 배에서 내려 한겨울 붉은 廣場의 밤을 華麗하게 물들인 五色 照明 아래 서고 보면 그야말로 別世界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