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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메이링의 ‘판다 外交’에 美國 몸 달다!|신동아

動物萬事

쑹메이링의 ‘판다 外交’에 美國 몸 달다!

판다는 어떻게 中國 最高 外交官이 됐나

  • 이강원 動物칼럼니스트

    powerranger7@hanmail.net

    入力 2020-03-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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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共産黨 판다’보다 31年 앞선 ‘國民黨 판다’

    • ‘쿵푸팬더’ ‘판다 익스프레스’로 이어져

    • 中現代史 女傑 ‘쑹姊妹’와 판다

    • ‘權力의 化身’ ‘卓越한 政務 感覺’ 쑹메이링

    [GettyImage]

    [GettyImage]

    1945年 4月 30日 아돌프 히틀러는 戀人 에바 브라운과 베를린의 地下 벙커에서 極端的 選擇을 한다. 絶望的 戰況이 두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로부터 一週日 後(5月 7日) 獨逸은 降伏하고 만다. 유럽을 불태운, 기나긴 戰爭의 火魔는 이렇게 걷힌다. 

    같은 時刻 아시아의 戰況은 달랐다. 大東亞共榮圈(大東亞共榮圈)이라는 荒唐無稽한 口號로 아시아와 太平洋을 쑥대밭으로 만든 日本 帝國主義者들의 抵抗은 거칠었다. 傳貰는 聯合軍 쪽으로 기운 지 오래였으나 日帝는 敗北를 認定하지 않았다. 

    美國은 選擇의 岐路에 섰다. 地上軍을 上陸시켜 大規模 殺戮戰을 펼치거나 原子爆彈을 投下해 降伏을 받아내야 했다. 選擇은 原爆이었다.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投下된 新型 武器의 威力은 대단했다. 戰爭은 日本의 無條件 降伏으로 마무리된다.

    第2次 國共內戰, 壓倒的 優勢 지키지 못한 國民黨

    中國 大陸의 相當 部分을 半(半)植民地로 經營하던 日帝가 물러나자 장제스(蔣介石) 國民黨 總統과 마오쩌둥(毛澤東) 共産黨 主席은 自意 半 他意 半 協商에 나선다. 美國의 仲裁로 始作된 이 協商의 目的은 國共(國共) 共同政府 樹立이었다. 

    協商 테이블에 마주 앉은 兩側은 처음부터 서로에 對한 信賴가 全혀 없었다, 急變한 國際 情勢와 美國의 壓迫으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다. 結局 協商이 깨지고 第2次 國共內戰(國共內戰)이 勃發한다. 



    1946年 6月 國民黨의 唐軍(黨軍)인 國民革命軍(國民革命軍)李 一齊히 共産黨 地區(地區)에 對한 先制攻擊에 나선다. 國民黨 側이 먼저 攻勢를 편 것은 武力으로 相對를 制壓할 수 있다는 自信感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開戰 初期 國共 兩側의 軍事力 隔差는 컸다. 美國 支援을 받은 國民革命軍은 質的·量的으로 共産黨의 紅軍(紅軍)을 壓倒했다. 國民革命軍은 370個 師團, 430萬 大軍을 保有한 反面 紅軍은 兵力이 100萬에 그쳤다. 質的으로도 紅軍이 顯著하게 劣勢였다. 

    國民革命軍의 優位는 오래가지 못했다. 紅軍은 單一 指揮 體系 아래 한 몸처럼 一絲不亂하게 움직였으나 國民革命軍은 軍閥 聯合體와 비슷한 性格이었다. 首腦部가 여럿인 느슨한 指揮 體系는 效率的 戰鬪 遂行에 決定的 障礙가 됐다. 

    1948年 後半期부터 紅軍이 戰爭의 主導權을 쥔다. 國民革命軍은 連戰連敗하며 主要 據點을 次例로 喪失했다. 紅軍은 1949年 1月 淸朝(淸朝)의 首都 베이징(北京), 5月 最大 都市 상하이(上海)를 占領한다. 11月 國民黨 臨時首都 충칭(重慶), 12月 國民黨 最後 據點 청두(成都)까지 陷落한다. 國民黨은 結局 大韓民國 面積 96倍에 達하는 中國 大陸을 모두 잃고 慶尙道 面積보다 若干 큰 타이완(臺灣)으로 後退할 수밖에 없었다.

    美國, 蘇聯 牽制하고자 中國과 손잡다

    共産黨은 中國을 武力으로 統一한 後 經濟 復興에 나선다. 改革·開放이 아닌 自力更生 모델을 採擇했다. 大躍進運動(大躍進運動), 文化大革命(文化大革命)은 閉鎖 志向的 政策의 事例다. 朝鮮의 興宣大院君이 再臨한 것 같은 中國의 閉鎖 政策은 ‘죽의 帳幕(bamboo curtain)’이라는 表現으로 壓縮됐다. 

    個人, 國家 共히 門 닫고 限없이 살 수는 없다. 1956年 蘇聯共産黨 第20次 大會 以後 中國과 蘇聯의 葛藤이 始作됐다. 中蘇紛爭(中蘇紛爭)은 社會主義 內部 理念 葛藤으로 出發했으나 時間이 흐르며 經濟·外交·安保 全 分野로 擴大됐다. 배고픈 同志가 要求하면 언제든 밥을 챙겨주던 連帶가 幕을 내린 것이다. 

    中國 經濟는 스스로 일어나기에는 지나치게 落後돼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Daddy-Long-Legs)의 도움이 必要했다. 中國은 그동안 敬遠視하던 西方에 손을 내민다. 이 같은 中國의 行動 變化에서 알 수 있듯 理念보다는 實利가 重要한 것은 萬古不變의 眞理다. 

    美國은 中國이 門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 促進者(facilitator) 구실을 했다. 美國이 蘇聯과 列傳(hot war·熱戰)보다 더 날카롭고 차가운 冷戰(cold war·冷戰)을 펼칠 때다. 蘇聯의 膨脹을 함께 牽制할 파트너가 必要했는데 中國은 最適의 條件을 갖추고 있었다. 理念이나 政治體制는 問題 되지 않았다. 蘇聯 牽制만 잘해 주면 그만이었다. 

    事業에서 成功하려면 去來(deal)를 잘해야 한다. 去來는 一方만 利益을 보는 構造에서는 成事되지 않는다. 兩쪽 利益이 만나야 한다. 美國과 中國 사이 去來도 그랬다. 兩國 利益이 맞아떨어지자 두 巨人은 주춤거리지 않고 움직였다.

    最高의 中國 外交官 판다

    1971年 美·中은 意見을 調律하는 會談을 베이징에서 開催한다. 이듬해 歷史的 美·中 頂上會談이 베이징에서 열렸다. 通常의 頂上會談은 合意의 全體 或은 大綱이 完了된 채 始作되고 會談을 마친 後 可視的 成果를 言論 앞에 公開한다. 2019年 하노이 北·美 頂上會談처럼 노딜(no deal)로 끝나는 境遇는 極히 드물다. 1972年 리처드 닉슨 大統領과 마오쩌둥 主席은 그동안의 敵對(敵對)를 淸算하고 關係를 正常化하는 데 合意했다. 두 나라는 6·25戰爭에서 敵으로 싸웠으나 그것은 親舊가 되는 데 障礙가 되지 않았다. 

    美·中 데탕트 德分에 스포트라이트가 베이징에 集中됐다. 닉슨과 마오는 勿論 헨리 키신저 白堊館 安保補佐官, 저우언라이(周恩來) 總理도 注目받았다. ‘獨特하기 그지없는 中國 外交官들’도 當時 큰 耳目을 끌었다. 이들은 美·中 修交뿐 아니라 中國이 西方과 關係를 改善할 때마다 重要한 구실을 했다. 

    1972年 ‘中國 外交官’들이 워싱턴 美國國立動物園(National Zoo)을 訪問한다. ‘이들’은 英國과 日本 等 美國의 友邦國을 訪問하며 그 나라들과도 關係 改善에 나섰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極盡한 歡待를 받았다. 敵對視한 나라는 單 한 곳도 없었다. 이 ‘外交官들’의 活動 德分에 中國의 國家 이미지도 크게 改善됐다. 

    이 ‘外交官들’은 中國人이 아니었다. 中國에만 사는 動物 판다(Panda·大熊猫)다. 판다는 턱시도를 입고 뿔테眼鏡을 쓴 것 같은 귀여운 外貌를 가진 곰과 動物이다. 人間을 包含한 大部分의 動物은 成體가 되면 어릴 적 귀여움을 잃는다. 판다는 그렇지 않다. ‘어른’이 돼도 如前히 귀엽다.

    곰과 親戚들과 달리 菜食主義者

    판다는 肉食을 즐기는 곰科에 屬한 다른 親戚들과 달리 菜食主義者다. 칼로리가 낮은 대나무 잎을 하루 終日 먹는다. 體軀를 維持하려면 먹고 또 먹어야 한다. 外貌, 行動, 食性을 보면 中國이 왜 판다를 公共外交 手段으로 活用했는지 理解할 수 있다. 自身이 願하는 이미지를 相對에게 刻印하는 것을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이라고 하는데, 판다가 가진 平和 이미지를 中國이라는 나라에 덧씌우길 希望한 것이다. 

    中國이 海外 動物園에 派遣한 판다는 많은 觀覽客을 모으며 그 動物園을 象徵하는 마스코트가 됐다. ‘판다 外交(panda diplomacy)’라는 新造語가 登場할 만큼 中國의 試圖는 대단한 成功을 거뒀다. 판다가 20世紀 中國 外交史에 큰 劃을 그은 것이다.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는 히트曲 하나를 남기고 사라지는 歌手를 가리키는 말이다. 판다는 떠돌이 반짝 人氣 歌手가 아니었다. 1972年보다 只今의 人氣가 더 높다. 판다라는 動物 自體의 魅力에서 비롯한 人氣가 文化 産業으로 擴散했다. 

    애니메이션 ‘쿵푸팬더(Kung Fu Panda)’는 판다의 人氣를 한 段階 格上하는 데 寄與했다. 판다 愛好家들은 잭 블랙이 목소리를 더빙한 主人公 ‘砲’를 잊지 못한다. 美國 高速道路 周邊이나 大學街에는 ‘판다 익스프레스(Panda Express)’라는 中國料理 체인店이 있다. 이 체인의 特徵은 햄버거나 샌드위치처럼 飮食을 빠르게 내놓으면서도 中國料理 特有의 맛을 내는 것이다. 1972年 판다를 美國에 보낸 中國 指導者들은 판다가 이렇듯 大衆의 사랑을 받으리라고 豫想했을까. 

    판다라는 動物이 世界 곳곳에 널리 알려진 契機는 1972年 美·中 頂上會談이었으나 ‘판다 外交’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以前에도 存在했다. 

    1957年 中國은 社會主義 盟邦인 蘇聯에 판다를 보냈다. 北韓을 包含한 다른 社會主義 國家들도 ‘판다 同盟’에 包含돼 있었으나 판다 外交는 蘇聯에 판다를 보낸 1957年보다도 더 일찍 始作됐다.

    쑹 시스터스

    쑹칭링, 쑹메이링, 쑹아이링(왼쪽부터) 세 자매. [GettyImage]

    쑹칭링, 쑹메이링, 쑹아이링(왼쪽부터) 세 姊妹. [GettyImage]

    20世紀 中國 歷史는 波瀾萬丈(波瀾萬丈)하다. 亂世에 英雄이 登場하는 法. 權力을 차지하고자 굵직한 人物들이 雌雄을 겨뤘다. 能力, 影響力에서 男性을 壓倒하고도 남는 傑出한 女性들도 있었다. 이들을 빼고 中國 現代史를 說明하기 어려울 程度다. 공교롭게도 ‘그女’들은 같은 父母를 가진 親姊妹였다. 

    3人의 女傑(女傑)은 事業家 쑹自首(宋嘉澍)의 딸로 세간은 ‘쑹姊妹(Soong sisters)’라고 稱했다. 쑹者數는 딸들을 英語에 能通하며 國際 감감을 갖춘 人材로 키우고자 美國 웨슬리대로 留學 보냈다. 姊妹는 父親의 希望처럼 力量을 갖춘 人材로 成長했다. 그러곤 自身들 눈높이에 맞는 男便들을 만난다. 

    長女 쑹아이링(宋靄齡)은 세 姊妹 中 가장 現實的 選擇을 한다. 大學 卒業 後 淸나라를 무너뜨린 辛亥革命(辛亥革命)의 主役 쑨원(孫文)의 祕書로 일했다. 結婚을 위해 그 일을 그만두면서 그 자리를 동생인 쑹칭링(宋慶齡)에게 물려준다. 쑹아이링은 1914年 當代의 甲富인 쿵샹시(孔祥熙)와 結婚해 1940年代 美國으로 生活 터전을 옮겼다. 富者집에서 태어나 甲富와 結婚한 그를 두고 中國人들은 돈을 사랑한 女人(一個愛錢)이라고 한다. 

    쿵샹시는 資本家 出身의 官僚였다. 쑨원의 일을 돕다가 後날 中華民國 재무부 長官, 中央銀行 總裁, 總理로 일했다. 國民黨이 臺灣으로 敗走하자 아내 쑹아이링과 함께 美國에 정주해 그곳에서 餘生을 보냈다. 

    쑹姊妹의 둘째 쑹칭링은 언니인 쑹아이링의 뒤를 이어 쑨원의 祕書로 일했다. 쑨원과의 因緣이 人生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언니가 結婚한 이듬해인 1915年 쑹칭링은 쑨원과 結婚했다. 26歲나 年上인 쑨원과의 結婚 生活은 10年 만에 끝났다. 1925年 쑨원이 60歲의 나이에 肝癌으로 急逝(急逝)하기 때문이다. 

    쑹칭링은 國民黨에서 核心 役割을 한 家族들과 全혀 다른 選擇을 한다. 쑹칭링은 中國이 共産化된 以後 中華人民共和國에서 權力의 최上部에 올랐다. 1959年 中國 第2代 副主席으로 就任하며 權力 序列 2位를 차지했다.

    31歲 퍼스트레이디, 쑹메이링

    쑹메이링의 1943년 미국 하원 연설. [GettyImage]

    쑹메이링의 1943年 美國 下院 演說. [GettyImage]

    쑹姊妹 中 가장 有名한 人物은 쑹칭링이 아닌 막내 쑹메이링(宋美齡)이다. 쑹메이링은 1927年 열 살이나 많은 國民黨 實力者 장제스와 結婚했다. 장제스는 結婚 이듬해인 1928年 난징(南京)에서 國家主席으로 就任한다. 쑹메이링이 31歲에 퍼스트레이디(first lady)가 된 것이다.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結婚하기 前 有婦男이었다. 基督敎 信者인 쑹메이링과 달리 佛敎 信者이기도 했다. 쑹메이링을 놓치고 싶지 않던 장제스는 夫人이던 천제루(陳潔如)와 離婚하고, 佛敎에서 基督敎로 改宗했다. 

    젊은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된 쑹메이링은 多樣한 分野에서 頭角을 나타냈다. 華麗한 外貌, 뛰어난 言辯, 能熟한 對人關係가 그를 國際的 스타로 만들었다. 美國 時事週刊誌 ‘타임’李 쑹메이링을 表紙모델로 삼기도 했다. 쑹메이링은 1943年 美國 下院에서 日本과 싸우는 中國에 對한 全幅的 支援을 呼訴하는 演說을 했다. 中國人으로는 最初, 女性으로는 두 番째 美國 議會 演說이다. 

    쑹메이링은 政治的으로도 相當한 內功을 갖추고 있었다. 特히 政務 感覺이 卓越했다. 아래의 두 事件을 보면 내공을 充分히 斟酌해 볼 수 있다. 

    첫 番째는 시안事變(西安事變). 1936年 장제스가 紅軍과의 戰鬪를 督勵하고자 試案을 訪問했는데, 그곳에서 東北軍總司令官 장쉐량(張學良)에게 拉致된다. 國民黨 內部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장쉐량은 父親 장쭤린(張作霖)의 代를 이은 滿洲 軍閥. 父親이 日本軍에 依해 爆殺되고, 根據地 滿洲를 잃은 터라 日帝에 對한 憎惡感이 컸다. 

    장쉐량 處地에서는 같은 同胞인 紅軍과의 戰鬪보다 日本軍을 몰아내는 게 重要했다. 反面 장제스는 抗日鬪爭보다 紅軍 討伐이 優先이었다. 結局 두 사람은 試案에서 衝突했고, 장제스는 장쉐량의 손에 사로잡힌 捕虜 身世가 되고 만다. 

    이 事件을 解決한 사람이 쑹메이링이다. 쑹메이링은 事態를 早期에 收拾하지 못하면 國民黨이 分裂되고, 男便 장제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判斷했다. 그래서 急히 試案으로 가 13萬 東北軍(東北軍)의 首長인 장쉐량을 說得했다. 男便을 살리고자 自身의 목숨을 건 大膽한 行動이었다.

    ‘權力의 化身’ 쑹메이링

    장제스(오른쪽), 쑹메이링(가운데) 부부. [GettyImage]

    장제스(오른쪽), 쑹메이링(가운데) 夫婦. [GettyImage]

    쑹메이링은 장쉐량과 談判을 통해 장제스를 석방시켰다. 더욱 놀라운 일은 장쉐량이 모든 權力을 내려놓고 國民黨 首都인 난징으로 自進 出頭한 것이다. 장쉐량은 平生을 國民黨의 捕虜 身世로 살았다. 歷史에 家庭은 없다지만 쑹메이링이 없었다면 中國史는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두 番째는 쑹메이링이 美國에서 펼친 ‘판다 外交’다. 쑹메이링은 1941年 12月 國民黨의 最大 友軍인 美國을 感動시키고자 美國人들이 좋아할 만한 膳物인 판다 두 마리를 데리고 뉴욕 브롱크스 動物園(Bronx Zoo)을 訪問한다. 이 판다들은 1972年 中國共産黨의 판다들보다 31年 앞서 太平洋을 건넜다. 

    쑹메이링은 판다 贈呈 直前인 1941年 11月 美國人을 相對로 라디오 演說을 한다. 그 演說에서 美國人들에게 판다를 보면서 兩國의 友情을 더욱 鞏固히 해달라고 當付한다. 美國人들은 쑹메이링과 그가 보낸 판다에 魅了됐다. 1941年 쑹메이링의 판다 外交街 1972年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의 그것보다 덜 알려진 것은 美·中修交와 같은 큰 이슈가 없었기 때문이다. 

    쑹메이링은 權力의 化身(一個愛權)이라는 批判을 듣는다. 그 批判을 다시 批判할 생각은 없다. 틀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權力慾이 누구보다도 剛한 人物이었다. 그렇더라도 權力慾에 덧붙여 卓越한 政務 感覺까지 가진 人物로 評價하는 게 더 客觀的일 것 같다. 쑹메이링은 귀여운 판다가 美國人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點을 꿰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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