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癡呆 父 10年 看病 조기현 “亂 孝子 아닌 弱者 돕는 ‘靑年市民’”|新東亞

사바나

癡呆 父 10年 看病 조기현 “亂 孝子 아닌 弱者 돕는 ‘靑年市民’”

  • 김우정 記者

    friend@donga.com

    入力 2020-03-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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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歲 때부터 癡呆 父 看病, ‘노가다’와 돌봄 勞動

    • 지난해 11月 看病記 ‘아빠의 아빠가 됐다’ 出刊

    • 癡呆 檢査 1點 差異로 醫療費 支給 못 받아

    • ‘노가다’ 一黨 6萬 원, 看病人 人件費로 9萬 원

    • 貧困階層 더 가난해져야 社會安全網 作動

    • 民主黨 人材 迎入, ‘靑年’ 스토리만 消費

    • 내가 ‘啓蒙 勞動者’? 進步 知識人의 ‘디즈니 판타지’

    • 社會的 藝術家…映畫 ‘1包 10㎏ 100個의 生涯’ 製作

    ‘사바나’는 ‘ 膾를 꾸는 , 靑年’의 略稱인 東亞日報 出版局의 뉴스랩(News-Lab)으로, 靑年의 삶을 주어(主語)로 삼은 이들 누구에게나 열린 空間입니다.



    [홍중식 기자]

    [홍중식 記者]

    “普通 아픈 家族을 돌보는 이는 中年의 딸이나 며느리, 老年의 아내다. 靑年 男性이 ‘奇特하게도’ 癡呆 아버지(59)를 돌본 것이 눈에 띈 模樣이다. 고맙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조기현(28) 氏는 지난해 11月 ‘아빠의 아빠가 됐다’(이매진)는 題目의 冊을 냈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作家의 꿈을 이룬 셈이다. 그는 어려운 家庭形便 탓에 大學에 進學하지 못했다. 그래도 틈틈이 冊을 읽으며 作家와 監督, 俳優를 꿈꿨다. 그랬던 열아홉 살 조氏는 덜컥 ‘아빠가 됐다’. 아이를 낳은 게 아니라 癡呆에 걸린 아버지의 病시중을 들면서 ‘아빠 노릇’을 하게 된 것. 當時 쉰 살이 채 안 된 아버지는 建設 現場 日傭職 勞動者로 일하던 中 糖尿病으로 쓰러졌다. 알코올 依存症에 傷한 몸과 마음 탓이 컸다. 조氏의 아버지는 몇 年 後 癡呆 症狀까지 보였다. 조氏는 갑작스레 “2人分의 삶”을 堪當해야 했다.

    갓 스무 살, 아버지 癡呆로 들이닥친 ‘2人分’ 삶

    20代가 쓴 癡呆 아버지 看病記는 異色 素材의 冊이다. 冊 出刊 後 周邊 反應이 적잖았다. 올해 1月에는 서울市 ‘靑年 不平等緩和 汎社會的 對話器具’ 共同委員長을 맡았다. 中·壯年과 老人, 女性 等 自身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處地의 市民들과 疏通하는 것이 즐겁단다. 大學街 講演은 勿論 醫療·福祉 分野 硏究者들의 協業 提案도 이어지고 있다. 



    조氏는 “貧困 家庭의 患者 돌봄에 對한 社會的 關心을 喚起할 수 있어 多幸”이라면서도 “자칫 旣成世代가 願하는 ‘孝子’ 이미지로만 消費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조氏는 스스로를 ‘奇特한 孝子’가 아닌 ‘同僚 市民을 돕는 市民’으로 規定했다. 그를 2月 3日 서울 西大門區 동아일보 忠正路社屋에서 만났다. 

    -家族의 가난과 아픔을 드러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家族부터 出刊을 꺼렸다. 癡呆 앓는 아버지는 感情 表現이 적어 冊 內容에도 別 反應이 없다. 어릴 적 아버지와 離婚한 어머니는 韓國 社會에서 自己 삶을 率直히 드러내면 嘲弄과 非難을 받기 十常 아니냐며 걱정한다. 어머니는 (自身의) 삶을 통해 가난은 감춰야 한다고 體得했을 터다. 하지만 가난해서 抑鬱하지 않은 世上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自己 經驗談을 털어놔야 한다. 나부터 始作해서 나쁠 것 없지 않나.” 

    -아버지 鬪病 後 달라진 것은. 

    “父子 關係부터 完全히 달라진다. 나는 中學生 때부터 生活費를 혼자 벌기는 했다. 하지만 各自 1人分 몫을 하며 살던 두 聖人 中 한 名이 누군가에게 完全히 依存하게 된다. 이런 事實을 받아들이는 것 自體가 어렵다. 아버지의 病勢가 나아지면 나도 내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앞으로 아버지 餘生을 내가 돌봐야 한다는 事實을 認定하기까지 2年 가까이 걸렸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現實이다. 

    “普通 靑年의 삶에 對한 期待를 접어야 했다. 癡呆 看病은 내 時間과 自願 모두 患者에 맞춰 써야 하는 일이다. 患者를 한 人格體로 尊重하고 그의 自律性을 維持하도록 도와야 한다. 따라서 患者가 看病人 없이 자유로이 움직일 必要도 있다. 그런데 暫時 放心하면 ‘아차’ 하는 瞬間 다치는 사람이 癡呆 患者다. 내가 暫時 자리를 비웠을 때 아버지가 가스레인지를 만지다 火傷을 입은 적도 있고, 落傷 事故를 當하기도 했다. 이럴 때면 保護者로서 罪責感이 들어 숱하게 시달렸다.”

    “아버지 빨리 죽었으면…” 생각도

    아프기 前 아버지에 對해 묻자 조氏는 苦心 끝에 “家族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自己 일에 欲心과 自負心을 가진 勞動者”라고 答했다. 오랜 看病 期間 조氏는 自身의 時間과 돈을 빼앗는 아버지가 미웠다. 때로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단다. 하지만 이제 조氏는 “아버지를 돌보는 일이 血肉으로서 道理를 다하는 것뿐 아니라 自身의 社會的 責任”이라고도 말한다. 

    -아버지를 理解하게 된 契機는 무엇인가. 

    “어릴 적부터 내가 하는 일에 對해 아버지에게 應援 받아본 記憶이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버지도 이제껏 家庭이나 社會로부터 支持받은 經驗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조氏는 미장일을 참 잘한다’는 일터의 評價는 存在 價値를 確認하는 唯一한 길 아니었을까. 稀微해지는 記憶 속 아버지는 只今도 ‘産業役軍’을 自處한다. 自身이 숱한 建物을 지었노라고, 그래서 나라 發展에 寄與했다고 자랑한다. 아버지 마음속 스스로의 모습은 如前히 地方에서 上京해 自己 힘으로 뭔가 이뤄보려던 靑年이다. 그래서 只今도 自身이 누군가에게 保護받아야 한다는 事實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버지의 病을 ‘社會的 疾病’이라고 表現했다. 

    “中年 勞動者에 對한 社會的 支援이 더 많았다면 아버지 健康이 이토록 惡化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周邊에도 아버지 같은 이들이 눈에 띈다. 便宜店 앞 테이블에 三三五五 모여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初老의 아저씨들이다. 아직 隱退해 老人亭에 갈 나이는 아니지만 아프고 병들어 일감이 끊긴 이들이다. 靑年도 老人도 아닌 曖昧한 歲月을 막걸리 한 甁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아버지도 그들 中 하나였을 것이다.” 

    조氏는 20臺를 오롯이 아버지 看病에 바쳤다. 하지만 그는 病魔보다 貧困을 放置하는 社會가 더 무섭다고 말했다. 조氏는 “元來 우리 집은 가난했다. 하지만 食口 2名 中 1名이 癡呆에 걸려 더 가난해져서야 艱辛히 社會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서 “왜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져 最惡의 狀況을 맞아야 社會安全網이 作動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寶物찾기 같은 病名 찾기 피 말려”

    조기현 씨가 치매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집에 설치한 간이CCTV 베이비 캠. [이매진 제공]

    조기현 氏가 癡呆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집에 設置한 簡易CCTV 베이비 캠. [이매진 提供]

    -癡呆 症狀은 눈에 띄어 判定도 쉬울 듯한데. 

    “全혀 아니다. 그야말로 ‘피 말리는’ 過程을 거쳐야 한다. 아버지와 같은 初期 癡呆의 境遇 하루 동안에도 狀態가 제各各이다. 멀쩡하게 日常生活 하는가 싶다가도 어느 瞬間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 式이다. 가장 基本的인 癡呆 診斷 方法은 患者의 認知 能力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試驗紙를 받아들고 온 힘을 다해 問題를 풀었다. 5分도 안 돼 1點 差異로 癡呆가 아니라는 結果가 나왔다. 病名을 證明 못하면 無期限 延期되는 福祉 支援에 피가 말랐다. 뒤이은 神經組織 檢査 結果도 ‘正常’이었다. 癡呆가 아니면 勤勞 能力이 있기에 國家 支援을 받을 수 없다. 이런 檢査 費用도 만만찮다.” 

    -勤勞 能力 喪失을 認定받으면 支援은 充分한가. 

    “勿論 充分하지는 않다. 다만 ‘숨筒이 트인다’고 表現할 수 있다. 元來 保證金 2000萬 원에 月貰 35萬 원짜리 집에 살았다. 아버지 病院費가 없으니 月貰를 올리는 條件으로 保證金 1000萬 원을 빼 病院費에 썼다. 于先 아버지가 3年 동안 糖尿를 앓은 것이 認定돼 醫療給與를 받을 수 있었다. 癡呆 判定은 알코올中毒 治療 專門 病院에서 받았다. 6個月間 閉鎖病棟에서 알코올 中毒 治療를 받는 過程에서 初期 癡呆와 輕度 認知障礙를 앓고 있다는 醫師의 所見을 얻었다.
     
    慢性疾患으로 醫療給與 2種, 癡呆로 1種을 받기까지 피 말리는 싸움이 그제야 끝났다. 이제 아버지가 基礎生活受給者로도 認定돼 生計給與 20萬2320원과 醫療給與 60萬 원을 받을 수 있다. 寶物찾기처럼 病名을 알아내기 위한 긴 旅程 끝에 받은 돈이다. 萬若 아버지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孤獨死(孤獨死) 했어도 異常하지 않다.” 

    -두 사람이 살기에는 빠듯해 보인다. 

    “난 寄稿나 映像 關聯 일, 或은 俗稱 ‘노가다’로 生計를 維持한다. 扶養義務者인 나의 月 所得이 170萬 원을 넘으면 아버지가 받는 支援額數가 준다. 分期마다 한 番씩 醫療給與 審査, 1年에 한 番 勤勞能力審査 評價를 치른다. 그 때마다 살이 떨린다. 或是 審査에서 떨어지면 또다시 아버지 돌봄은 ‘獨박’ 쓸 수밖에 없다. 글을 쓰거나 只今처럼 인터뷰에 應하는 것은 不可能해진다. 只今의 各種 給與 支援은 그야말로 應急處方에 不過하다.” 

    -이런 過程의 가장 큰 問題點은 무엇인가. 

    “가난한 이가 福祉制度의 門을 두드리면 처음 直面하는 것이 侮蔑感과의 싸움이다. 公務員의 차가운 態度와 수많은 書類가 ‘자, 한番 네 가난을 立證해 봐’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過程이 懲罰처럼 느껴졌다. 아픈 家族을 돌보기 위해 도움을 要請한 이를 이처럼 ‘찌질이’로 만들 必要가 있을까.” 

    그러면서 조氏는 ‘노가다’로 生計를 維持하던 自身의 一黨보다 많은 돈을 看病人의 人件費로 支出해야 했던 답답함을 吐露했다. 

    “한창 醫療費 負擔이 甚할 때 내가 하루 ‘노가다’로 손에 쥐는 돈이 6萬 원 程度였다. 그런데 看病人 일當으로 9萬 원 가까이 줘야 하니 抑鬱한 마음까지 들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니 삶의 意欲마저 줄어들었다.” 

    -日·看病 竝行은 不可能한가. 

    “나 같은 低賃金 長時間 勞動者에게는 不可能에 가깝다. 當場 나가서 일해야 하니 不安한 마음에 肝이 CCTV인 베이비 캠을 집에 設置했다. 아버지가 藥은 잘 먹는지, 危險한 行動은 안 하는지 스마트폰과 連結해 確認하기 爲해서다. 土木工事를 갓 끝낸 地下 5層 程度 깊이 現場에서 일하던 때였는데 와이파이, 甚至於 電話도 쓸 수 없었다. 일하는 내내 아버지 狀態를 確認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피가 말랐다. 하다못해 治療, 處方을 위해 患者와 病院에 간다고 치자. 病院이 職場에서 멀 수도 있고 待機時間이 길어질 수도 있다. 足히 한나절은 걸린다. 職場人이라면 年次라도 내지만 나 같은 日傭職 勞動者는 하루 일을 공친다.”

    “靑年 기호만 消費하는 進步 人士에 失望”

    -病院費보다 看病費 負擔이 더 甚한가. 

    “週末 이틀은 家族들이 돌아가면서 看病한다고 쳐도 한 달에 看病人 人件費만으로 200萬 원 가까이 必要하다. 1年이면 2000萬 원 以上이다. 癡呆 앓는 家族이 ‘차라리 얼른 죽었으면…’ 하는 나쁜 생각이 드는 것도 無理가 아니다.” 

    癡呆 患者들이 入院해 管理받을 수 있는 癡呆 療養病院은 어떨까. 조氏는 療養病院 入院이 “事實上 가장 現實的인 對策”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癡呆를 完治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惡化를 늦출 수 있어서다. 무엇보다 療養病院에서 適切한 治療를 받으면서 비슷한 初期 癡呆 患者들과 어울리며 社會性을 維持할 수 있다. 

    하지만 療養病院들은 알코올 依存症 앓는 아버지의 入院을 꺼렸다. 젊고 힘이 세 統制가 어렵다는 理由도 있었다. 겨우 入院한 곳에서도 아버지가 今週(禁酒) 等 入院 守則을 어기거나 같은 患者들과 다퉈 强制 退院당할 뻔하기 일쑤였다. 本來 月 80萬~90萬 원 程度인 入院費는 醫療給與 1種 對象者가 된 德에 10萬원 안팎으로 줄었지만 入院 自體가 어려웠다. 

    조氏는 이때의 ‘癡呆難民’ 經驗이 市民으로서 自我를 찾고 社會的 發言에 나서게 된 養分이 됐다고 짚었다. 

    “‘癡呆難民’ 生活에 몸과 마음이 지쳤다. 아버지가 제대로 治療받지 못해 症狀이 惡化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가난에 익숙했기에 나만 熱心히 살면 적어도 現狀 維持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瞬間 社會의 責任에 對해 苦悶하기 始作했다. 왜 가난과 돌봄이 오롯이 個人 몫이어야만 하는지 疑問이 漸漸 剛해졌다.” 

    -아버지 看病 渦中에 市民團體 活動도 했다고. 

    “일하는 渦中에도 틈틈이 讀書했다. 疾病과 가난의 問題에 答을 얻기 위해서였다. 當時 ‘人文學 烈風’이 불어 다양한 關聯 冊들이 나왔다. 柳時敏 氏의 ‘國家란 무엇인가’나 박노자 氏의 ‘當身을 위한 國家는 없다’ 等을 재밌게 읽었다. 여기에 한창 人氣를 얻던 ‘나는 꼼수다’ 같은 팟캐스트度 즐겨 들었다. 내게는 이런 媒體가 大學 구실을 했다. ‘노가다’보다 收入은 적지만 市民團體 活動家로 일하며 보람 있게 살고 싶었다.” 

    -市民團體를 그만둔 理由는 무엇인가. 

    “市民團體 活動 中 만난 一部 進步 人士들의 모습에 失望했다. 이들은 ‘靑年’이라는 記號만 가져다 쓰고 實際 靑年을 對할 때는 全혀 尊重하지 않는다. 自己가 더 많이 가졌고 더 알고 있다는 理由로 ‘가스라이팅(gaslighting· 他人의 心理를 巧妙히 造作해 他人에 對한 支配力을 强化하는 行爲)’도 했다. 입으로만 進步的 口號를 외치는 것이다. 勿論 個人을 惡魔化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矛盾된 世態를 꼬집고 싶었다.” 

    조氏는 이어 最近의 靑年 談論에도 問題가 적잖다고 指摘했다. 特히 그는 靑年을 無氣力한 略字로 設定하고 特定 目的에 따라 손쉽게 利用만 하려는 態度를 批判했다. “내가 市民團體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너는 흙수저인데 누가 받아줄까’ 하는 套로 嘲弄한 代表의 僞善과 一脈相通하는 現象”이라는 것.

    “靑年 弱者 規定, ‘假面’‘스토리’만 强要해선 안 돼”

    -靑年 政治·靑年 談論이 社會的 話頭다. 

    “靑年에 對한 關心은 肯定的이다. 하지만 最近 靑年 談論은 靑年에게 ‘가면 役割’만 바란다. 或은 靑年에게 ‘스토리’를 要求한다. 代表的인 것이 더불어民主黨의 人材 迎入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10年 가까이 癡呆 아버지를 돌본 20代 靑年이란 異色的 모습이 눈에 띌 것이다. 나처럼 얼굴 드러내고 아버지까지 카메라 앞에 서게 하지 않으면 世上은 弱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靑年은 여기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그런 點에서 내 스토리는 必要한 대로 얼마든지 주무를 수 있는 感動的 素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旣得權이 靑年에게 바라는 이미지를 延期하고 싶지 않다.” 

    -靑年에게 强要되는 假面과 스토리란 무엇인가. 

    “假令 586世代 進步 知識人에게 나는 理想的 人間型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른바 ‘학출’은 아니지만 啓蒙된 肉體勞動者 程度 아닐까? 하지만 난 이런 視角이 正말 危險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旣得權을 가진 이들의 欲求, 말하자면 ‘디즈니 판타지’를 充足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靑年에게, ‘흙수저’에게 自身이 願하는 이미지를 投影하는 것이야말로 相對方을 同僚 市民으로 認定하지 않는 態度다.” 

    -社會的 略字로서 靑年의 苦痛에 共感도 크다. 

    “靑年을 社會的 弱者로 規定하는 것에 懷疑的이다. 客觀的으로 보자. 假令 障礙人 貧困은 家族과 社會의 支援이 없으면 平生 持續될 可能性이 높다. 老人 貧困도 60代 隱退 後 20~30年 가까이 이어지기 十常이다. 反面 靑年 貧困은 길어야 5年이나 될까. 最近 ‘靑年 危機’란 곧 4年制 大學을 卒業한 20臺 中·後半 靑年의 失業 問題를 뜻한다. 이들의 就業이 미뤄져 이미 隱退했거나 隱退를 앞둔 父母 世代와의 經濟活動 ‘바톤 터치’가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派生되는 靑年 談論도 主로 中産層의 問題意識과 關聯된 것이다. 자칫 이런 範疇에 屬하지 않은 다른 靑年의 現實은 外面받을 公算이 크다.” 

    조氏는 ‘社會的 藝術家’를 꿈꾼다고 한다. 어떤 目標를 이루고 싶을까.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貧困과 疾病, 죽음의 問題는 大槪 베이비부머 世代나 그 父母 世代의 몫이다. 나는 靑年들도 이런 問題를 自己 未來의 一部로 想像해서 미리 苦悶했으면 좋겠다. 社會的으로도 危機가 닥치기 前 脆弱階層을 도왔으면 한다. 이를 위해 靑年 政治人도 必要하겠지만 나는 ‘社會的 藝術家’라는 位置에서 내 몫을 하고 싶다. 얼마 前 아버지의 삶을 다룬 映畫 ‘1包 10㎏ 100個의 生涯’를 만들었다. 映畫를 통해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社會에 傳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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