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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을 救한 崔鳴吉은 ‘政權 安保’보다 ‘國家 安保’를 앞에 뒀다|신동아

朝鮮을 救한 崔鳴吉은 ‘政權 安保’보다 ‘國家 安保’를 앞에 뒀다

丙子胡亂 專門家 한名機가 말하는 明淸交替기와 美·中 霸權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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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홍근 記者

    carrot@donga.com

    入力 2020-03-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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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安保 지키려 광해군 政權 ‘積弊’마저 起用하려 해

    • 앞선 政權 뒤엎는 ‘破壞’에만 集中한 人組 政權

    • 崔鳴吉의 ‘實用’이 大韓民國이 나아갈 길

    • 選擇의 岐路로 내몰리는 건 ‘끼여 있는 나라’의 淑明

    • 內部부터 統合·안정시켜야 强大國 相對할 수 있어

    [홍중식 기자]

    [홍중식 記者]

    旣存 强國이 衰退하고 新興 强國이 떠오르는 轉換期마다 韓半島는 危機를 맞았다. 中國의 負傷(浮上)과 美國의 相對的 衰退가 東아시아의 地政學的 構圖를 뒤흔든다. 北韓은 勢力 轉移(Power Shift) 狀況을 活用해 核武裝 完成 段階에 進入했다. 韓國의 政治와 外交는 어떠해야 할까.

    왜 只今 崔明吉인가

    영화 ‘남한산성’에서 이병헌 씨가 최명길 역을 맡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映畫 ‘남한산성’에서 이병헌 氏가 崔明吉 役을 맡았다. [CJ엔터테인먼트 提供]

    한명기(58) 명지대 史學科 敎授는 最近 出刊한 ‘崔鳴吉 評傳’ 序文에 이렇게 썼다. 

    “丙子胡亂은 17世紀 初 ‘끼여 있는 나라’ 朝鮮이 霸權國 名(明)과 新興 强國 靑(淸)의 對決 構圖 속으로 휘말리면서 벌어진 悲劇이었다. 崔鳴吉이 종사를 살려놓은 지 380餘 年이 지난 오늘, 韓半島와 大韓民國은 또 다른 危機의 入口에 서 있다. 霸權國 美國과 新興 强國 中國의 競爭 때문이다. 中國이 一帶一路(一帶一路)로 치고 나가자 美國이 印度太平洋 戰略으로 맞불을 놓는다. 激化되는 兩國의 對決 때문에 새로운 冷戰의 兆朕마저 나타나는 形局이다. 그 渦中에 日本의 經濟報復 問題, 사드 問題, 防衛費 分擔 問題 같은 온갖 難題가 뒤엉키면서 如前히 ‘끼여 있는 나라’ 大韓民國의 地政學的 現實은 갈수록 嚴酷해지고 있다. 崔鳴吉이 再臨한다면 果然 어떤 處方을 提示할까? 筆者의 머릿속에서 늘 떠나지 않았던 想像이자 質問이다.” 

    그는 壬辰倭亂, 丙子胡亂에 穿鑿해 온 學者다. ‘歷史評說 丙子胡亂’ ‘壬辰倭亂과 韓中關係’ ‘丁卯·丙子胡亂과 韓中關係’ ‘光海君’ 等의 力作으로 注目받았다. ‘崔鳴吉 評傳’을 出刊한 그를 명지대 硏究室에서 만났다. 

    -歷史를 現實과 連結하는 건 섣부르고 危險하기도 합니다. 

    “過去의 歷史를 解釋할 때마다 끊임없이 現在를 돌아보게 마련입니다. 過去 사람이 산 時代에는 그 時代의 論理와 狀況이 있습니다. 現在를 사는 이들의 認識으로 裁斷하면 올바르게 評價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歷史를 살피면 데자뷔(deja vu)가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歷史와 現在를 連結하는 게 危險하고 섣부를지언정 우리가 歷史에 關心을 갖고 興味를 느끼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歷史는 反復된다. 한番은 悲劇으로, 한番은 喜劇으로”라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비슷해 過去의 일이 고스란히 反復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崔鳴吉이 산 時代와 現在는 霸權 競爭이 새롭게 始作되는 時期입니다. 17世紀 初盤 萬株가 떠오르고 名(明)李 衰退합니다. 現在는 中國이 무섭게 떠올라 美·中 霸權 競爭이라는 말이 膾炙됩니다. 우리가 그 中間에서 宏壯히 머리 아픈 狀況을 맞이하고 있지요.”

    朝鮮의 正士, 김상헌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윤식 씨가 김상헌 역을 맡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映畫 ‘남한산성’에서 金允植 氏가 김상헌 役을 맡았다. [CJ엔터테인먼트 提供]

    -왜 崔鳴吉을 ‘只今, 여기’로 呼出했습니까. 

    “壬辰倭亂(1592~1598)李 끝나고 丙子胡亂(1636)을 겪습니다. 名(明)李 壬辰倭亂에 介入한 後 朝鮮-名의 關係가 以前과 다르게 바뀝니다. 朝鮮은 再造之恩(再造之恩·거의 滅亡하게 된 것을 救援해 도와준 恩惠)을 틀로 삼아 明과의 關係를 設定합니다. 朝鮮은 明이 亡해 가는데도 再造之恩을 强調하다 滿洲에서 屈起한 靑(淸)에 降伏하는 恥辱을 맛봅니다. 明淸(明淸)交替期, 朝鮮에서 손에 꼽히는 人物이 崔鳴吉입니다.” 

    그는 明과의 義理를 지키기 위해 人組까지 玉碎(玉碎)해야 한다고 主張한 김상헌보다 崔鳴吉을 높게 評價한다. 丙子胡亂 以後 崔鳴吉은 萬古의 奸臣이 되고, 金尙憲은 朝鮮의 情事(正士)이자 辭表(師表)가 됐다. 

    -‘崔鳴吉 評傳’에서 金尙憲의 길을 ‘無差別的 原則論’, 崔鳴吉의 길을 ‘選擇的 原則論’이라고 表現했더군요. 

    “朱子性理學을 工夫한 사람들이 支配한 時代는 모든 게 二分法的입니다. 世上은 中華, 그러니까 明나라와 오랑캐인 移籍(夷狄)으로 나뉩니다. 오랑캐는 사람이 아닌 짐승 같은 存在이지요. 17世紀 初盤 짐승 같은 滿洲가 瞬息間에 勢力이 확 커져 結局 中華人 明나라를 威脅합니다. 朝鮮은 이 소용돌이에서 자칫하면 나라가 亡할지도 모르는 狀況에 處하고요.” 

    -朱子性理學의 論理대로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랑캐가 世界를 制霸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요. 無差別的 原則論은 나라가 亡하고 百姓이 다 죽어 없어져도 오랑캐와 끝까지 싸우자는 겁니다. 그게 自身들이 배우고 머릿속에 딱 固精해 온 名分과 義理에 맞는다고 본 것이지요.” 

    -崔鳴吉은 어떻게 다른 생각을 했을까요. 

    “崔鳴吉은 朱子性理學을 工夫했지만 陽明學이라는 새로운 思潮에도 素養을 갖고 있었습니다. 名分과 義理도 重要하지만 現實的으로 朝鮮이라는 나라가 살아남아야 언젠가 名分과 義理를 지킬 機會가 온다고 봤습니다.”

    上京(常經)과 卷도(權道)

    -朱子性理學이 鄭(正)과 社(邪), 선(善)과 惡(惡)으로 世上을 二分(二分)한다면 陽明學은 어떻게 다릅니까. 

    “朱子性理學에서는 性卽理(性卽理), 卽 하늘의 理致를 實現하는 게 政治입니다. 陽明學은 人間의 마음속에 本源的인 리(理)가 있다고 봅니다. 그 理가 陽地(良知)인데 中華든 오랑캐든 陽地를 갖고 있기에 그것을 發現하면 되는 것입니다. 努力이 빛을 發하고 時代의 運勢가 맞으면 오랑캐도 天下의 主人이 될 수 있다는 思考方式이 陽明學에서는 나올 수 있습니다. 崔鳴吉이 陽明學的 素養을 가졌기에 그런 생각을 가진 것 같아요.” 

    -名에 對한 義理를 지키는 것이 上警(常經·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올바른 道理)이라면 崔鳴吉의 選擇은 卷도(權道·특수한 狀況에 正當性을 갖는 行爲規範)라고 할 수 있을까요. 卷도는 實用主義와도 脈이 닿습니다. 

    “卷도는 狀況에 따른 對應 論理를 말합니다. 쉬운 例를 들면 傳統 時代에 男女七歲不同席(男女七歲不同席)이라고 가르쳤습니다. 男女가 일곱 살이 넘으면 內外(內外)하라는 겁니다. 그 論理대로라면 兄嫂님이나 弟嫂씨가 물에 빠져 죽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商經大로 한다면 내버려둬야죠. 

    “人間의 本源的 삶의 原則에 따르면 一旦 살려놓고 봐야죠. 그런 選擇이 卷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金尙憲의 主和派는 朝鮮 末 衛正斥邪(衛正斥邪) 思想으로 이어집니다. 停學(正學), 程度(正道)로서의 朱子學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丙子胡亂은 끔찍한 體驗이었습니다. 疲勞인(被擄人·적에게 捕虜로 잡힌 사람)들이 請으로 끌려갔어요. 살아남은 이들의 心情이 어땠을까요? 理想과 現實의 乖離를 느낄 수밖에 없었죠. 오랑캐에 무릎 꿇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그게 現實이 됐습니다. 어릴 적부터 배운 原則과 理想이 무너져버린 狀況에서 變化된 現實을 認定하기보다는 旣存 朱子性理學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더 외骨髓가 돼버린 겁니다.” 

    1704年 송시열 권상하 等 朝鮮 士大夫(士大夫)들은 壬辰倭亂 때 再造之恩을 理由로 萬曆帝를 崇仰하는 萬東廟(忠北 槐山郡)를 세웠다. 萬東廟 名稱은 ‘忠臣의 節槪는 꺾을 수 없음’을 가리키는 萬折必東(萬折必東)에서 따온 것이다. 士大夫들은 “皇帝 恩寵에 朝鮮이 살아 있으니!”라면서 祭祀를 올렸다.

    審判者, 評價者

    “1704年 昌德宮 後援에 明나라 皇帝의 銀의(恩義)를 기리는 大報壇이 세워집니다. 老論의 領袖이던 宋時烈은 萬東廟를 짓고요. 中國을 淸나라가 支配하고 있으나 이념적, 理想的으로 섬길 對象은 明나라라는 根本主義的 思考가 朱子性理學 이데올로그(idealogue)들에 依해 强調됩니다. 그러면서 丙子胡亂 때 살아남은 이들의 行動에 對해서도 評價합니다. 조금이라도 原則에 어긋난 사람들을 假借 없이 批判합니다. 그 過程에서 崔鳴吉은 賣國奴가 돼버리고요. 丙子胡亂 以後 審判者, 評價者가 된 사람들은 果然 原則에 忠實한 삶을 살았을까요.” 

    -政治權의 善惡 二分法을 보면 衛正斥邪的 事故가 只今도 이어지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으나 韓國 社會가 宏壯히 名分論이 剛해요. 敎條主義的 思考方式이 强調되는 側面이 많습니다.” 

    -金尙憲은 어떻게 評價합니까. 

    “김상헌에 對한 傳統的 評價는 宏壯히 好意的이었지요. 그분이 산 時代 次元에서 놓고 보면 그가 보인 態度를 認定할 수밖에 없습니다. 짐승 같은 存在인 오랑캐에 무릎을 꿇고 사느니 名分과 義理를 지키면서 목숨 바쳐 싸우는 게 옳다는 主張을 批判하기 어렵습니다. 結局은 評價의 問題입니다. 치자(治者), 그러니까 나라를 統治하거나 높은 벼슬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엇을 優先으로 생각해야 하느냐는 觀點에서 볼 때 崔鳴吉이 治者의 原則에 더 忠實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勿論 金尙憲의 態度가 옳았다고 여기는 분도 적지 않을 겁니다만, 匹夫(匹夫)라면 名譽나 義理를 위해 목숨을 끓을 수 있으나 國王이나 統治者의 態度는 달라야 한다고 봐요. 甚至於 崔鳴吉은 싸울 거면 鴨綠江으로 나아가 一戰을 치르자고 主張합니다. 當時 斥和派들이 싸우자고 主張했지만 막상 戰爭이 일어나면 朝廷은 江華島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江華島가 收容할 人員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陸地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崔鳴吉은 지더라도 國境 近處에서 降伏하는 게 낫다고 본 거예요.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얘기를 했겠습니까.”

    ‘끼여 있는 나라’의 淑明

    -壬辰倭亂, 丙子胡亂, 淸日戰爭, 러일戰爭은 腹背受敵(腹背受敵·앞뒤로 敵을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强大國의 霸權 다툼 狀況에서 朝鮮은 從屬變數였습니까, 獨立變數였습니까. 

    “丙子胡亂은 壬辰倭亂이 남긴 社會·經濟的 後遺症에서 벗어나지 못한 狀況에서 勃發했습니다. 經濟力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軍事力을 키우기 어렵습니다. 仁祖反正(1623) 成功 直後 李适의 亂(1624)을 겪으면서 國家의 能力이 더 弱化된 狀態였습니다. 이런 狀況에서 命을 凌蔑할 만큼 軍事的으로 떠오른 滿洲를 軍事的으로 막아내는 것은 宏壯히 어려웠다는 게 衆評입니다. 腹背受敵은 앞뒤로 적이 있다는 뜻인데, 壬辰倭亂을 거치면서 日本 또한 强敵으로 떠올랐기에 腹背受敵이 아니라 三面數的이었습니다. 三面에 强敵이 버티고 서 있었어요.” 

    -丙子胡亂 直前 日本과 關係는 어땠습니까. 

    “滿洲에서 일어난 變化에 應戰하려면 日本과 關係를 좋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滿洲로부터의 威脅이 커지는데 日本으로부터의 威脅까지 불거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朝鮮이 人組 政權 以後 크게 보면 日本에 低姿勢를 보인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宥和的 對日政策이라고 보면 될까요. 

    “明과 萬株가 벌이는 霸權 다툼의 後暴風에 集中해야 하는 狀況에서 日本과 關係까지 惡化되면 朝鮮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 原則은 只今이나 丙子胡亂 以前이나 別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歷史를 되돌아보면 ‘끼여 있는 나라’는 選擇의 岐路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겁니까. 

    “韓國이 世界 10位圈 經濟 强國입니다. 軍事力은 世界 7位라는 評價도 있더군요. 學校에서 10等쯤 하는 模範生인데 周邊 國家가 全校 1, 2, 3, 4等입니다. 時體말로 1, 2, 3, 4等이 四方에서 괴롭히면 머리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高次方程式을 풀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宏壯히 어렵습니다. 歷史 내내 存在해 온 悲劇이자 地政學的 宿命입니다. 

    韓半島는 大陸과 海洋 사이에 끼어 兩쪽의 影響을 받습니다. 大陸과 關係가 나쁘면 海洋과 關係가 좋거나 現象을 維持해야 하고 海洋과 關係가 나쁠 때는 그 反對입니다. 이런 原則이 歷史에 繼續 存在해 왔습니다. 송시열 系列의 사람들조차 日本하고 잘 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壬辰倭亂으로 因해 怨恨이 큰 데도 그런 얘기가 나온 겁니다. 中國이 엄청나게 膨脹하는 現在 狀況도 過去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駐韓名君’ 毛文龍 部隊

    2017년 9월 7일 주한미군이 경북 성주군 초전면 성주골프장 사드기지로 반입된 사드 발사대 4기를 점검하고 있다. [뉴스1]

    2017年 9月 7日 駐韓美軍이 慶北 星州郡 초전면 星州골프場 사드基地로 搬入된 사드 發射臺 4基를 點檢하고 있다. [뉴스1]

    -中國이 世界的 次元은 아닐지라도 東아시아에서는 霸權의 발톱을 드러냈습니다. 

    “周知하듯, 大陸 勢力이 빠른 速度로 浮上하는 狀況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問題가 많고, 참 미운 나라인 日本과 關係를 망가뜨려서는 안 되는 게 現實에서 宏壯히 重要한 支店이라고 봅니다.” 

    -언제까지 完充國家(buffer state)로 살아야 할까요. 

    “高句麗 時代 以後에는 完充國家가 아닌 적이 없었다고 봐야 해요. 유럽의 完充國家가 폴란드인데요. 히틀러와 스탈린이 독소不可侵條約(1939)을 맺어놓고는 兩쪽에서 폴란드를 먹고 들어갔습니다. 범퍼 노릇하는 나라의 宿命이 그렇습니다. 大韓民國이 이렇듯 成長한 건 대단한 일이지만 周邊에 센 者가 너무나 많습니다. 파워 시프트(power shift·勢力 前이)가 일어나면 그 속으로 말려들어 갈 수밖에 없어요. 더구나 南北으로 分斷까지 돼 있어 狀況이 더 어렵습니다.”
     
    丁卯胡亂 5年 뒤인 1632年까지 人造 政權의 對外政策은 一見 絶妙했다. 明과 後金 모두를 刺戟하지 않으려고 細心하게 配慮했으나 不幸하게도 朝鮮은 3國 關係에서 ‘獨立變數’가 아닌 ‘從屬變數’였다. 美國과 中國의 東아시아·西太平洋 霸權 다툼에서 韓國은 從屬變數인가, 獨立變數인가. 

    丙子胡亂 直前 平安北道의 섬 街道에 駐屯하던 毛文龍 麾下 名君을 ‘募兵’이라고 稱한다. 오늘날의 感覺으로 表現하면 ‘駐韓名君’이다. 平安北道의 섬을 據點으로 해 얼마 되지 않는 兵力으로 莫强한 滿洲와 싸워 搖動을 收復하는 것은 事實上 不可能했으나 名은 街道를 重視했다. 後金을 牽制하고 朝鮮을 監視하는 據點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美國이 駐韓美軍 基地에 사드를 配置한 것을 두고 中國은 自國의 核心 利益을 侵害했다고 主張한다. 韓國은 韓美同盟, 美日同盟으로 이뤄진 한·美·日 共助와 浮上하는 中國 사이에서 어떤 外交를 해야 하나. 


    “外國에 가서도 서로 다른 말하는 韓國 政治”

    -朝鮮에 駐屯한 毛文龍 部隊에 駐韓美軍이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現在와 類似한 狀況이 宏壯히 많아요. 當時 朝鮮은 毛文龍에게 코가 꿴 狀態였습니다. 反正으로 執權한 人組 政權이 正統性을 인정받는 過程에서 毛文龍의 도움을 받았거든요. 李适의 亂 때 仁祖가 權力을 잃을 뻔 했습니다. 그때 毛文龍이 딴마음을 먹고 李适이 推戴한 흥안군을 承認했으면 仁祖는 洛東江 오리알 身世가 됐을 겁니다. 國家의 內紛이 毛文龍에 對한 依存을 더욱 키운 겁니다. ‘끼여 있는 나라’에서 內部 거버넌스가 제대로 作動하지 않아 國家가 分裂되면 外部 壓力을 견뎌내기가 宏壯히 어렵습니다. 그건 歷史가 證明하는 겁니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式의 極限 對立을 일삼는 韓國의 現在 거버넌스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執權 勢力이 大韓民國이 當面한 問題를 잘 解決해 國民의 滿足度를 높이면 自身들이 내세운 對外政策에서도 內部的 뒷받침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內部를 잘 다독거려 統合을 이뤄내지 못하면 外部를 向해 한목소리를 내기가 宏壯히 어렵습니다. 與野 代表들이 같은 飛行機를 타고 美國을 다녀왔는데 돌아오자마자 發表한 內容이 서로 다릅니다. 外國에 가서도 서로 다른 얘기를 할 程度면 只今 狀況이 宏壯히 나쁜 겁니다.” 

    -中國에서는 駐韓美軍에 中距離미사일이 配置되면 韓國과 斷交하겠다는 發言까지 나왔습니다. 

    “社會的 合意를 통해 對外政策의 原則을 定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박쥐 소리 안 듣고 美·中 사이에서 獨自的 空間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崔鳴吉은 內部의 合意를 이끌어내려고 努力했습니다.”

    當身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

    -崔鳴吉은 反政 直後 光海君의 銃身(寵臣)이던 平安道觀察使 박엽의 救命運動을 벌입니다. ‘崔鳴吉 評傳’에서 그 대목이 宏壯히 印象的이었습니다. 

    “박엽이 光海君과 동서지간입니다.” 

    -요샛 말로 하면 ‘積弊’죠. 

    “그렇습니다. 實錄이나 史料는 박엽을 宏壯히 批判的으로 描寫합니다만 野史나 野談에 나오는 박엽은 正反對예요. 情事와 野史 兩面을 다 봐야 한다고 보는데 淸나라 사람들이 박엽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다고 野史는 記錄합니다. 明과 萬株의 外交的 攻勢를 박엽 次元에서 모두 遮斷했다는 얘기도 나오고요. 

    崔鳴吉이 反正 最高 功臣인 김류에게 便紙를 보내 박엽을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反正으로 政權을 잡으면 過去 政權 人士들을 싹쓸이 肅淸하는 게 一般的이죠. 崔鳴吉은 政權 安保보다 國家 安保가 더 重要하다고 본 겁니다. 國家 安保 次元에서는 前 政權 사람이라도 有能하면 起用해야 한다고 여긴 거죠. 結局 박엽이 죽임을 當하자 崔鳴吉이 김류에게 또다시 便紙를 보내 박엽만 한 장수가 누가 있느냐, 누가 外敵을 막아내느냐고 말합니다. 崔鳴吉의 態度는 只今도 의미하는 바가 宏壯히 큽니다.” 

    -崔鳴吉은 앞선 政權이 엉망이었다고 해도 人材 起用은 다른 問題로 본 것이군요. 

    “光海君은 異腹同生을 죽이고 鉏어머니(庶母)를 廢位하려고 했습니다. 宮闕 公社에 集中하면서 國家 財政을 거덜 내버렸고요. 이렇듯 內定에서 宏壯히 問題가 많았던 사람이지만 崔鳴吉은 外交에서는 光海君을 繼承하려고 했습니다. 光海君과 崔鳴吉의 外交 路線은 나라가 먼저 살고 임금이 먼저 살고 百姓이 먼저 살아야 한다고 봤다는 點에서 거의 같습니다.” 

    人組 政權은 過去 政權을 뒤엎는 ‘破壞’에는 成功했으되 執權 以後 새로운 次元으로 ‘建設’하는 데는 失敗했다. 어렵사리 되찾은 政權을 保衛하는 데 汲汲하다가 國家를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이다. 새 政權에 期待를 건 이들의 失望은 컸다. ‘當身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라는 冷笑가 번졌다.

    “內治가 잘 굴러가야 外交에서도 숨筒 틔어”

    -明으로부터의 壓迫도 宏壯했습니다. 

    “毛文龍을 죽인 원숭환이라는 將帥가 있습니다. 毛文龍은 街道에 틀어박혀 싸우지도 않으면서 名 朝廷으로부터 받은 物資를 橫領하고 朝鮮으로부터도 物資를 받아갔습니다. 원숭환이 그런 毛文龍을 죽여버립니다. 朝鮮 處地에서도 痛快한 일이었죠. 毛文龍이 朝鮮을 繼續 괴롭혔거든요. 問題는 뭐였냐면, 원숭환은 原則論者였다는 겁니다. 毛文龍은 物資를 대주고 뒷돈 찔러주는 朝鮮에 具體的 要求를 하지 않았습니다. 원숭환은 朝鮮이 名과 힘을 합쳐 萬株와 싸워야 한다는 便紙를 調整에 보냅니다. 朝鮮 臣僚들이 이 便紙에 感激해 滿洲와 싸우자고 나서는 데 崔鳴吉이 制動을 겁니다. 明과 後金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얼음板을 걷는 狀況에서 堪當할 수 없는 約束을 해놓으면 나중에 問題가 深刻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部分까지 細心하게 챙긴 겁니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崔鳴吉이 산 時代와 只今은 다릅니다만 南北關係에서도 韓國 政府가 內治를 잘 處理해 支持度가 높아야 金正恩 委員長이 訪南할 可能性이 생길 겁니다. 韓國 政治가 출렁이면 北韓은 觀望하거나 推移를 보겠죠. 內部 거버넌스가 잘 굴러가야 外交에서도 숨筒이 트입니다. 崔鳴吉이 보기에 朝鮮은 重患者였습니다. 基礎 體力부터 되살렸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黨爭을 줄여야 했어요.” 

    -崔明吉이라면 大韓民國에 어떤 處方을 내릴까요. 

    “丙子胡亂이 끝난 後 戰爭 때 아무것도 안 한 이들이 審判者, 評價者가 돼 내가 잘했느냐, 네가 잘했느냐 다퉜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없고 審判者, 評價者의 목소리만 커졌습니다. 그러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民生 對策, 國家를 살리는 政策은 優先順位에서 밀려나는 거죠. 疲勞人을 朝鮮으로 送還하는 게 社會的 이슈였습니다. 몸값을 치르고 풀려나더라도 선양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700㎞입니다. 滿洲에서 鴨綠江을 건너 서울까지 오는 過程에서 宿食을 어떻게 합니까. 猛獸나 盜賊떼를 누가 막아줍니까.

    “高談峻論 놓고 다툰다고 民生 解決 안 돼”

    이 같은 民生 問題에 唯一하게 關心을 가진 사람이 崔鳴吉입니다. 사람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距離가 40㎞ 程度거든요. 崔鳴吉은 廳과 協商해 40㎞마다 宿食을 提供할 곳을 마련해 주려고 합니다. 國家가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하나로 모입니다. 實用에 國家를 살릴 解法이 있어요. 高談峻論을 놓고 다툰다고 民生이 解決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崔鳴吉이 大韓民國에 어떤 處方을 내릴 거냐? 一旦 內部를 안정시키려 할 겁니다. 經濟 問題를 解決해 팍팍한 삶을 풀어주는 方向으로 國家를 이끌어갈 겁니다. 責任感, 犧牲精神, 悠然함, 包容力, 戰略的 思考가 崔鳴吉의 行跡에서 要諦입니다.” 

    그는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앞서 말했듯 四面受敵 狀況에서 强大國을 움직일 지렛대가 없다면 우리가 唯一하게 기댈 곳은 內部에서 컨센서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合意를 통해 마련된 原則을 土臺로 外交 政策에 對한 社會的 컨센서스를 이뤄내야 합니다. 中距離核戰力條約(INF) 廢棄 以後 트럼프가 平澤機智에 中距離미사일을 配置하려고 하면 政治, 軍事 次元에서 美·中 가운데 하나를 擇日하는 狀態까지 가는 겁니다. 참으로 머리 아픈 時代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송홍근 편집장

    송홍근 編輯長

    Alex's husband. tennis player. 午後햇살을 사랑함. 冊 세 卷을 냄. ‘北韓이 버린 天才 音樂家 精麤’ ‘統一先進國의 戰略을 묻다’ ‘D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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