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國 代身 피 흘리겠다” 中國 包圍戰略 先鋒 自任|新東亞

“美國 代身 피 흘리겠다” 中國 包圍戰略 先鋒 自任

1930年代 빼닮은 아베의 日本

  • 丈量(張良) | 中國靑年政治學院 客座敎授 · 政治學 博士

    入力 2015-11-19 16:58: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美, 自衛隊 北韓 出兵 關聯 日 見解 支持
    • 自己愛에 빠져 韓 嫌惡, 中 排擊
    • 頂上會談 때 韓國 아픈 곳 건드리기도
    • 메이지(明治) 時代로 되돌리려는 아베
    1929年 10月 美國에서 始作된 大恐慌(Great Depression)의 後遺症이 新興帝國 日本으로 옮겨갔다. 危機에 處한 日本은 1931年 滿洲 侵略, 1933年 國際聯盟 脫退 等 膨脹을 통해 狀況에 對處하려 했다. 그러던 1936年 2月 26日 새벽, 도쿄에 駐屯한 日本 陸軍 1師團 所屬 尉官級 將校들이 “奸臣輩를 刺殺하고, 天皇(日王) 中心의 政治를 해야 한다”는 ‘존黃土間(尊皇討奸)’을 旗幟로 1400餘 名의 兵力을 動員해 叛亂을 일으켰다. 이들은 總理 官邸, 國會議事堂, 參謀本部 等을 襲擊했다.

    叛亂은 곧 鎭壓됐다. 叛亂 이튿날 戒嚴令이 宣布됐고, 그다음 捺印 2月 28日 쇼와 日王은 叛亂軍의 原隊 復歸를 命令했다. ‘天皇’의 命令으로 擧事 名分을 잃은 叛亂軍 將校 一部는 自決하고 一部는 投降해 事件은 終結됐으나, 極右國粹主義로 方向을 튼 日本은 以後 暴走를 거듭했다. 1937年 7月 中國을 侵攻하고, 1941年 12月 眞珠灣을 奇襲했으며, 1945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原子彈 洗禮를 받고 無條件 降伏했다.

    自己執着, 國粹主義

    調世英 동서대 日本硏究센터腸 等 日本 專門家들은 現在의 日本이 ‘1930年代 日本’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當時 日本 政府의 政策과 現 아베 신조 政權의 政策엔 共通點이 매우 많다. 當時 日本은 中國을 (假想의) 敵으로 設定하고, 攻勢的 通貨政策을 통한 景氣浮揚을 追求하며, 東南亞 進出을 强化하고, 매스컴 掌握을 祈禱했다. 또한 武器 輸出에 積極的이며, 追伸쿠라(忠臣藏) 等 武士道(武士道)를 讚揚하는 雰圍氣가 高調됐다. 自己愛(narcissism)와 自己執着의 時節이었다. 오늘날 日本에서는 그때와 類似하게 日本을 讚美하는 書籍이 잇달아 베스트셀러 目錄에 오르고 있다. 自己愛, 國粹主義(jingoism)에 빠져 이웃 나라 韓國을 嫌惡하고 中國을 排擊한다.

    ‘富者는 남과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日本式 表現이 있다. 富者는 싸울수록 損害를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最近 日本은 韓國과는 日本軍 慰安婦 問題로, 中國과는 東中國海 센카쿠 列島(中國名 댜오위다오) 領有權 問題로 맞서고 있다. 日本은 富者의 心理 狀態를 더 以上 갖고 있지 않다.



    超大國으로 浮上(浮上)韓 中國과도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이 日本 社會 全體로 擴散되고 있다. 靑年 世代가 좀 더 攻擊的이다. 센카쿠 列島 領有權을 놓고 中國과 戰爭이 벌어지면 電子·情報通信(ICT) 技術을 總動員하는 現代戰이 될 것이며, 日本이 이길 것이라고 確信한다. 韓國과의 日本軍 慰安婦 問題와 關聯해서도 一戰을 甘受하겠다는 혼네(本音, 속마음)를 드러낸다.

    敗戰 移轉 領土 70萬㎢

    11月 2日, 3年 6個月 만에 열린 韓日 頂上會談은 日本軍 慰安婦 問題의 早期 解決을 위한 論議를 加速化하기로 合意하는 線에서 끝났다. 日本은 南中國海 問題를 擧論하는 等 美國과 中國 사이에서 苦悶하는 韓國의 아픈 곳도 건드렸다. 日本은 韓國과의 關係 改善을 바라는 同盟國 美國의 體面을 살려주는 程度로 할 일을 다 했다는 態度를 보였다.

    中國은 2008年 12月 日本이 占有한 센카쿠 列島에 海洋調査船을 잇달아 派遣했다. 아소 茶爐 當時 總理의 指示를 받은 日本 海洋警備隊는 警備艇을 派遣해 中國 海洋調査船을 强制 退去시켰다. 이 事件을 전후해 中國이 稀土類 輸出을 禁止하자 日本은 屈服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最强者로 浮上한 中國의 自信感이 그대로 드러난 事件이다.

    筆者는 그해 7月 스위스 제네바의 한 食堂에서 駐제네바 日本代表部 政務參事官과 午餐을 함께 했는데, 그는 日本 朝野 모두 中國의 負傷이 東아시아의 不安定과 戰爭으로 이어지는 것을 憂慮하고 있다고 말했다. 大部分의 日本 政治人, 外交官, 軍人이 1978年 末 改革·開放 以後 年平均 9.8%의 高度 經濟成長을 통해 世界 2位의 經濟大國, 3位의 軍事大國으로 떠오른 中國이 旣存 秩序의 挑戰者로 登場할 것으로 豫想한다고 했다.

    100餘 年間 繼續된 戰國時代를 끝낸 日本은 16世紀 末 壬辰倭亂을 일으켜 朝鮮과 中國大陸 侵攻을 試圖했다. 17世紀 末에는 明나라의 儒將(遺將) 精誠空軍(鄭成功軍)을 支援해 長江(長江) 下流의 난징까지 進出했다. 1854年 페리 黑線에 依한 開港 以後 日本은 中國을 壓倒하는 實績을 쌓아갔다. 1895年 淸日戰爭에서 勝利해 타이완과 펑후(澎湖) 列島를 獲得하고 朝鮮에 對한 影響力을 確固히 했다. 不過 10年 後인 1905年에는 뤼순(旅順)과 선양(瀋陽)을 包含한 南滿洲 一帶와 東海에서 러시아를 擊破해 朝鮮과 남사할린을 掌握했으며 關東州(關東州, 只今의 다롄 一帶)를 植民地로 確保했다.

    日本은 1910年代 初 東아시아의 霸權國이 됐다. 日本의 急速한 膨脹에 놀란 美國은 日本 侵攻 計劃을 樹立하기도 했다. 日本은 第1次 世界大戰(1914~18)을 利用해 北滿洲와 內몽골, 산둥省, 푸젠성 等으로 勢力을 擴張했다. 러시아革命期人 1918年에는 동시베리아에도 出兵했다.

    日本은 1945年까지 東아시아 霸權國으로 君臨했다. 當時 日本은 獨逸, 美國, 蘇聯, 英國과 함께 世界 5大 强國의 一員이었다. 日本 列島와 韓半島, 타이완, 關東州, 남사할린, 南洋群島(南洋群島) 等을 包含한 領土는 70萬㎢ 以上에 達했다. 2次大戰에서 敗한 日本은 1950年 6·25戰爭으로 復興했다. 1970年代 末에는 世界 2位 經濟大國으로 登場했다.

    東아시아 東北部에 位置한 圖書國家 日本은 人口 1億2500萬 名, 國內總生産(GDP) 4兆8000億 달러, 面積 38萬㎢, 東西 約 3000㎞, 南北 約 5000㎞의 領土 範圍를 가진 强國이다. 日本의 領土 範圍는 南아시아의 亞大陸(亞大陸) 國家 印度에 匹敵한다. 日本이 △東아시아 東北部에 位置하고 있다는 것과 △圖書國家라는 地政學的 位置가 向後 日本의 進路를 決定하리라는 事實은 疑心의 餘地가 없다. 超大國 中國에 對抗해 日本이 選擇 可能한 外交安保 政策은 어떤 것일까.

    A級 戰犯이 ‘國家 礎石’

    “미국 대신 피 흘리겠다” 중국 포위전략 선봉 자임

    11月 2日 韓日 頂上會談에서 아베 신조 日本 總理는 韓國이 美中 사이에서 苦悶하는 南中國海 問題를 擧論했다. 靑瓦臺 寫眞記者團

    于先 美國과의 同盟 强化다. 아베 신조 總理, 아소 茶爐 副總理(總理 歷任)와 산케이新聞을 包含한 强勁 民族主義 勢力은 美日同盟을 20世紀 初 영일同盟 以上의 水準으로 强化해야 한다고 主張한다. 아베를 包含한 日本 指導部는 日本을 메이지(明治) 時代로 되돌려놓으려 한다.

    아베는 지난해 4月 第2次 世界大戰 A級 戰犯을 ‘國家의 礎石’으로 부르는 等 戰後 秩序를 否定했다. 아베의 外할아버지는 2次大戰 A級 戰犯 容疑者로, 總理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다. 아베 信條와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이름 中 ‘新(晋)’은 메이지 時代 조슈(야마구치) 下旗시(萩市) 出身 武裝 다카스키 神社쿠(高杉晋作)의 ‘新(晋)’에서 따왔다. 아베는 種種 다카스키 神社쿠의 墓地를 參拜할 程度로 그에게 깊은 愛情을 보인다. 지난해 7月에는 다카스키 神社쿠의 銅像 除幕式에도 參席했다.

    아베는 메이지 維新의 思想的 基礎를 提供한 요시다 쇼인에 對해서도 尊敬心을 품고 있다. 아베는 2013年 8月 요시다 쇼인 神社(神社)를 訪問했는데, 最近 放映된 NHK 大河史劇 ‘하나母乳 : 꽃, 타오르다’의 舞臺가 야마구치縣 下旗시 一對多. 아베의 右翼 國粹主義 性向은 이러한 家族·歷史的 背景을 떼어놓고는 說明할 수 없다.

    日本 指導者들은 中國의 負傷이 本格化한 1990年代 末부터 國家의 進路에 對해 苦悶했다. 그들은 急激히 增强된 中國의 影響力이 韓半島, 타이완을 거쳐 終局에는 日本까지 밀려들 것으로 본다. 過去 統一된 中國이 對外 膨脹的 性向을 보였다는 點에 注目한다. 日本 指導部는 13世紀 2次例에 걸친 旅夢(麗蒙) 聯合軍의 규슈 侵攻과 1950年代 初 共産 勢力에 依한 釜山敵기론(釜山赤旗論) 等 大陸 勢力이 韓半島를 거쳐 日本을 侵攻하려 한 歷史的 事實을 鮮明하게 記憶한다. 따라서 急浮上한 中國을 制御하려면 最强大國 美國과의 同盟 强化가 必要 不可缺하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오자와 이치로 生活黨 代表, 하토야마 유키오 前 總理, 간 나오토 前 總理, 아사히신문 等 穩健 民族主義 勢力은 美國과 좋은 關係를 維持해나가되 韓國, 中國 等 隣近國과도 關係를 改善해야 東아시아의 安定과 平和 維持, 나아가 日本의 發展도 可能하다고 본다. 이는 ‘아시아로의 接近’이라는 말로 要約된다. 穩健 民族主義 勢力은 過多한 美國 依存이 特히 中國의 反撥을 惹起해 日本의 國益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極右派의 ‘戰略的 獨立’論

    민주당이 政權을 掌握한 2009年 以後 約 3年間 日本은 臺(對)中國 接近을 追求해 美國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2009年 12月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幹事長이 引率한 140名의 代表團이 日本 中國 關係의 未來와 關聯한 乾坤一擲의 對話를 위해 베이징을 訪問할 무렵 버락 오바마 美國 大統領의 머리칼이 短期間에 새하얗게 變했다는 말이 워싱턴 外交家에 떠돌았다. 그러나 같은 민주당 政權의 노다 요시히코 總理가 2012年 9月 센카쿠 列島 國有化 措置를 取하면서 中日 關係는 急速히 冷却됐다.

    한便 이시하라 신타로 前 도쿄도 知事, 하시모토 盜壘 오사카 市場, 多모가미 도시오 前 空軍參謀總長을 包含한 極右 民族主義者들은 ‘戰略的 獨立’의 흐름을 代表한다. 이들은 70年間 持續돼온 美國의 軍事衛星國이라는 屈從的 地位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自衛軍(自衛軍)을 保有해야 하며, 韓半島 侵奪은 日本의 安全을 위한 不可避한 選擇이었고, 太平洋戰爭은 美國과 英國이 强要한 戰爭이었다고 여긴다. 戰略的 獨立論은 日本의 國力이 中國에 비해 顯著히 劣勢이며, 그 隔差가 擴大되는 趨勢를 볼 때 非現實的이다.

    ‘아시아 接近論’을 醉한 民主黨 政權은 2011年 3月 도호쿠(東北) 大地震과 이어진 쓰나미, 후쿠시마 原電事故 收拾 失敗 等으로 民心을 잃고 强勁 民族主義 勢力에 權力을 넘겨줬다. 權座에 復歸한 아베 總理 等 强勁 民族主義者들은 豫想대로 美國에 接近했다. 이들은 日本 單獨으로는 超大國 中國에 맞설 수 없으며, 霸權國 美國이 最小 20~30年은 더 現在의 位相을 維持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對美 同盟을 强化해야 日本의 活動 半徑이 넓어지고, 中國도 日本을 無視하지 못할 것이라 여긴다.

    日本의 國家 進路와 關聯된 위의 3가지 흐름은 칼로 베듯 明確하게 나뉜 것은 아니다. 特定 엘리트의 생각 또한 國內 政治 環境과 國際 情勢 變化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다만 日本 政治人, 外交官, 軍人들은 幅과 速度의 差異는 있으나 平和憲法 改正 等 戰後體制를 바꿔 自衛軍을 保有하고, 日本의 位相을 强化하며, 中國에 對한 抑止力을 높여 東아시아에서 指導的 位相을 維持해야 한다는 데는 見解를 같이한다. 最近에는 中國의 高度成長이 持續될 境遇 어쩔 수 없이 中國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되, 中國의 成長이 停滯될 境遇 美國의 後援을 등에 업고 中國과 一戰을 벌여야 한다는 主張도 나온다.

    中國 包圍戰略 先鋒

    約 140年 前에도 日本은 國家의 進路를 놓고 岐路에 섰다. 사쓰마(가고시마) 出身 사이고 다카모리 中心의 大陸 進出 優先派와 이와쿠라 도모미 中心의 內政 改革 優先派는 權力과 國家의 進路를 놓고 戰爭을 벌였다. 세이난 戰爭(1877)李 그것이다. 農民 出身 徵兵君을 動員한 內政 改革派가 사무라이를 動員한 大陸 進出 優先派를 制壓했다. 以後 日本은 ‘內政 改革 後 海外 進出’이라는 漸進冊을 推進했다.

    러일戰爭(1904~05) 以後에도 國家 進路를 둘러싼 葛藤이 벌어졌다. 조슈(야마구치) 中心의 陸軍은 英國, 美國과 손잡고 滿洲 等 大陸으로의 進出을 主張한 反面, 사쓰마 中心의 海軍은 러시아와 손잡고 海洋으로 進出해야 한다고 맞섰다. 아베 等 日本 指導部는 美國, 英國 같은 1級 海洋國家들과 同盟했을 때는 國家 繁榮과 海外 進出이 可能했지만, 이들과 등졌을 때는 國家 存亡의 危機에 處했음을 지난 100餘 年間의 歷史的 經驗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들은 2次大戰 때 獨逸과 同盟을 맺고 美國, 英國의 海洋 霸權에 挑戰했다가 原子彈 洗禮라는 慘事를 맞은 것을 잊지 않고 있다.

    中國의 急激한 經濟力 增强, 軍事力 强化로 인해 中國 中心의 새로운 東아시아 秩序가 樹立될 可能性이 커지는 狀況에서 日本 指導者들이 느끼는 不安感은 想像을 超越한다. 20世紀 初 美國 大統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日本의 손을 빌려 러시아의 南進을 막고, 漁夫之利로 中國에서 利權을 챙기려 했다. 日本은 러시아의 南進 沮止를 自任하고 나섰다. 戰爭할 수 있는 나라가 된 只今의 日本과 매우 類似하다. 外部 勢力에 一擊을 加할 수 있을 程度의 軍事力을 保有한 國家라는 點도 닮았다. 아베의 日本은 中國의 동진을 沮止하는 戰線에서 美國 代身 피를 흘려주겠다고 나섰다. 日本은 中國 包圍 戰略의 先鋒을 自處하며 ‘아시아로의 回歸(pivot to Asia)’라는 美國의 世界 戰略에 便乘해 軍事力 增强에 나섰다.

    나라는 힘으로 지키는 것

    아베는 지난 9月 安保法 處理를 强行함으로써 集團的 自衛權 行使의 封印(封印)을 解除했다. 日本이 直接 攻擊받지 않더라도 第3國을 支援한다는 名分으로 對外 武力行使가 可能해진 것이다. 世界 3位 經濟力과 國防費 基準 世界 4位의 莫强한 軍事力을 가진 日本이 戰爭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아베의 指揮 아래 執權 자민당 政策 브레인, 外交官, 軍事 專門家들이 모두 合心해 中國과 맞설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日本 指導部는 日本의 將來가 △美日同盟의 維持 및 强化 △韓半島의 安定 維持 △印度, 베트남, 濠洲 等과의 關係 强化에 달렸다고 본다. 特히 日本列島의 목구멍을 겨누는 匕首(匕首) 韓半島와 腹部를 겨누는 短刀(短刀) 타이완의 狀況을 銳意注視한다.

    서울 國立墓地 顯忠塔에는 ‘스스로를 지키려 하지 않는 者, 그 누가 도우려 하겠는가?’라는 이탈리아 現實主義 思想家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글句가 있다. 中國이 浮上하고, 日本이 總力 對應에 나섰으며, 北韓이 核武裝한 只今은 제비와 참새의 집이 있는 草家가 불타오르고 기둥으로는 구렁이가 기어오르는 聯作妻黨(燕雀處堂)의 狀況이다.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 하기보다 美國만 바라보거나 ‘一擊度 加할 수 없는’ 軍隊를 갖고는 이러한 危機를 決코 克服할 수 없다. 루스벨트 大統領은 1905年 朝鮮 支援을 要請한 朝鮮 駐在 美國 公使 호러스 앨런에게 “當身은 왜 敗할 나라를 支持하려 하는가. 스스로를 위해 單 一擊度 加할 수 없는 나라를 위해 美國이 헛되이 介入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1905年 7月 美國은 日本과 태프트-가쓰라 密約을 締結해 필리핀과 朝鮮에 對한 權利를 交換했다. 그해 8月에는 英國이 第2次 영일 同盟條約을 締結해 日本 支援에 나섰다. 그로부터 석 달 後(11月 17日) 을사늑약이 締結되자 앨런 公使의 後任 에드윈 모건은 7日 뒤 하야시 곤스케 日本 公使에게 祝賀人事를 남기고 朝鮮을 떠났다. 朝鮮의 運命을 안타까워한 宣敎師 호머 헐버트는 “美國은 作別人事도 없이 가장 侮辱的인 方法으로 가장 먼저 朝鮮을 버렸다”고 했다.

    지난 8月 末 非武裝地帶(DMZ) 地雷 事件 後 北韓 潛水艦의 折半 以上이 母港(母港)에서 사라지고, 後方의 火力이 休戰線 附近으로 前進 配置됐을 때 우리에겐 北韓에 一擊을 加할 카드가 없었다. 스텔스 爆擊機와 核航母 等 美國의 武力 資産을 빌려 北韓의 攻勢를 눌렀다. 最後의 瞬間, 나라는 입(外交)李 아니라 힘(軍事力)으로 지키는 것이다. 國家 危機 狀況에 自己 計劃을 갖고 戰爭도 할 수 있는 能力을 가진 强力한 軍隊가 必要하다. 友邦國의 도움을 바란다면, 反擊을 加할 수 있는 能力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를 위해 單 한 番도 反擊하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自國民의 피를 흘려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統一外交를 推進하려면 먼저 統一할 수 있는 能力부터 갖춰야 한다.

    自衛隊의 北韓 出兵

    北韓이 南侵하거나 北韓에 急變事態가 發生하면 아마도 日本 內 7個 地點(Camps)에 駐屯 中인 美軍 兵力이 韓半島에 投入될 것이다. 또한 自衛隊가 兵站 支援에 나설 것이다. 1950年 9月 仁川上陸作戰에 參加한 47隻의 軍艦 中 37隻에 日本人이 搭乘하고 있었다. 當時 日本人은 掃海(掃海, 機雷 除去) 作戰에도 投入됐다. 그때처럼 北韓을 包含한 韓半島에서 作戰하는 美軍을 支援하기 위해 美軍의 要求로 自衛隊가 投入될 수 있다.

    우리가 이를 制御할 方法은 없다. 戰時作戰權이 없는 우리의 限界다. 따라서 戰時作戰權 還收 問題에 더욱 關心을 기울일 必要가 있다. 韓半島는 海洋勢力, 大陸勢力 모두에게 死活이 걸린 땅이기에 一方이 軍隊를 動員해 現象 變更을 追求할 境遇 他方道 軍隊를 派遣하게 돼 있다. 韓半島에 戰爭이 벌어져 壓倒的 해·空軍力을 갖춘 自衛隊가 自國 安保 不安을 理由로 12海里(約 22㎞)에 不過한 우리 領海 밖에서 陣을 칠 境遇 우리 땅에 進入한 것과 마찬가지 結果를 가져온다.

    日本이 韓半島 有事時 3萬餘 名에 達하는 自國民 救出을 위해 自衛隊를 投入하려 할 可能性도 있다. 우리 領土 進入 前에 當然히 우리 政府의 許可를 받아야 한다. 許可 없이 들어온다면 侵略이다. 그러나 이에 對한 明白한 國際 規定은 없다. 日本이 人道的 狀況을 根據로 우리 政府의 要求를 受容하려 들지 않을 可能性도 있다. 우리 軍과 自衛隊가 衝突할 可能性마저 排除할 수 없다.

    우리 國防部는 4月 워싱턴에서 열린 韓美日 安保討議(DTT)에서 美軍 等의 北韓 進入 問題와 關聯해 國際法을 따르겠다고 合意해줬다. 10月 서울에서 開催된 韓日 國防長官 會談에서 日本은 有事時 韓國 政府의 同意 없이도 北韓 地域에 自衛隊를 派遣할 수 있다는 主張을 폈다. 11月 初 서울에서 열린 韓美年例安保會議(SCM) 美國 首席代表인 애슈턴 카터 美 國防長官은 會議 後 記者會見에서 日本과 같은 見解를 表明했다. 카터 長官에게서 루스벨트 大統領의 느낌이 난다.

    우리 憲法은 韓國의 領土가 ‘韓半島와 그 附屬 島嶼’라고 規定하지만, 國際法은 유엔 會員國인 北韓을 別個의 國家로 認定한다. 韓美日 安保討議, 韓日 國防長官 會談 때 南北關係의 特殊性을 主張하고 이와 關聯한 記錄을 남겼어야 했다. 休戰線이 南北 間 陸上分界線이듯 北方限界線(NLL)은 西海 海上分界線으로 NLL 以北의 바다 亦是 當然히 우리 領海에 屬한다는 事實도 確實히 强調해야 한다.

    黃敎安 國務總理는 10月 14日 國會에서 “不得已한 境遇 우리 政府가 同意하면 日本軍이 入國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1894年 東學 蜂起에 겁먹은 朝鮮 政府가 淸나라에 派兵을 要請한 것을 빌미로 日本軍이 介入해 韓半島를 戰爭터로 만든 것을 記憶해야 한다. 이렇게 빚어진 淸日戰爭이 러일戰爭의 불씨가 됐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日帝 植民 支配, 韓半島 分斷, 6·25戰爭으로 이어진 事實도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美國은 詩퀘스트(聯邦政府 豫算 自動削減)에 따라 2017年까지 太平洋司令部 所屬 3800名을 包含한 陸軍 4萬 名을 減縮하고, 2019年 追加로 3萬 名을 줄일 豫定이다. 著名한 國際政治學者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大 敎授는 “美國은 歷史를 통해 證明했듯 戰爭을 甘受하고라도 霸權競爭國(peer competitor)을 容認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日本은 中國의 東進 沮止 作戰 先鋒에 섰다.

    美日同盟의 目的이 아시아의 旣存 秩序를 威脅하는 中國을 牽制하는 데 있다면 中國의 戰略은 韓半島를 넘어 東아시아와 서태평양에 中國 中心의 國際秩序를 樹立하는 것이다. 超高速 經濟成長의 거품이 가라앉은 中國은 이웃 日本이 아니라 獨逸 等 유럽 國家의 손을 잡고 産業構造 改革에 나섰다. 메르켈 獨逸 總理는 10月 末 主로 産業協力 論議를 위해 2005年 11月 就任 以後 8番째 訪中(訪中)에 나섰다. 排氣가스 造作과 關聯한 폴크스바겐 事態가 獨逸의 이러한 行步에 對한 美國의 牽制로 보는 視角도 있다.

    아키히토 日王의 死亡과 承繼 過程은 2次大戰 敗戰國가 日本의 終焉을 告하는 一大 事件이 될 것이다. 이웃 나라 中國과 日本이 모두 韓半島를 自國의 核心 利益圈에 包含시키고 있다. 이렇듯 모두가 발버둥치는데, 우리는 都大體 무엇을 하고 있는가. 無用한 일에 에너지를 浪費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只今 우리의 核心利益(core interests)李 무엇이고, 이것을 保護하기 위한 最善의 方案이 무엇인지 苦悶하고 있는가.

    러시아의 戰略的 價値

    中國 勢力 浸透 막는 防波堤


    “미국 대신 피 흘리겠다” 중국 포위전략 선봉 자임

    9月 4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大統領(왼쪽)李 東方經濟포럼이 열린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 섬에서 美國 俳優 스티븐 詩傑을 만나 握手하고 있다.

    2015年 11月 現在까지 持續되는 우크라이나 事態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러시아의 戰略 中心은 유럽에 位置한다. 러시아는 中國, 日本, 美國만큼 韓半島의 狀況 展開를 緊迫하게 느끼지 않는다. 韓半島 問題에 對한 敏感性 程度는 ①中國과 日本 ②美國 ③러시아 巡인 것으로 判斷된다. 러시아에 北韓은 살집 많은 鷄肋(鷄肋)이며, 中國과 美國, 日本, 韓國에 對한 하나의 카드다.

    中國과 日本은 韓半島 統一과 같은 ‘決定的 事案’에 對해서는 政策을 바꿀 餘地가 거의 없다. 中國과 日本의 戰略 中心인 베이징(渤海灣)-상하이(長江 델타)-광저우(珠江 델타) 軸과 도쿄-오사카-후쿠오카 軸은 韓半島의 狀況 變化에 매우 敏感한 地域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生存과 繁榮을 위해 韓半島의 狀況 變化에 相對的으로 덜 敏感한 러시아와 協力을 强化해 우리의 最大 弱點이라 할 에너지 및 食糧 問題, 尖端技術 不足 問題를 解決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資本과 技術, 北韓의 勞動力을 活用해 러시아와 함께 沿海州, 사할린을 비롯한 동시베리아 地域을 開發해야 한다. 이는 △韓國은 原料 供給地를 確保하고 △北韓은 外貨를 獲得하고 △러시아는 中國 勢力의 腐蝕(扶植)을 막을 수 있다는 點에서 3者 모두에게 利益이 된다. 極東地域에서 北韓과의 協力 增進은 南北關係 改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러시아와의 關係 强化는 러시아의 最尖端 技術 導入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는 韓半島 鐵道와 시베리아 鐵道를 連結해 北韓→沿海州→東部 시베리아→中央아시아→西部 러시아→유럽으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協力 벨트를 構築, 유라시아를 우리의 背後地域(Hinterland)으로 만들어야 한다. 러시아는 北韓과 直接 國境을 接하고 있으며, 核武器와 宇宙航空技術, 미사일을 비롯한 世界 最尖端 軍事 技術을 保有했고, 1億4500萬 名의 人口와 世界的 規模의 天然資源을 가졌으며, 유엔 安全保障理事會의 常任理事國이기도 하다.

    統一 問題와 關聯해서도 러시아는 매우 重要한 나라 中 하나다. 러시아는 2010年 北韓의 延坪島 砲擊挑發과 關聯해 韓國의 西海 北方限界線(NLL) 地域 軍事訓鍊을 問題 삼았고, 사드(高高度 미사일 防禦體系)의 韓國 配置에 反對했다. 이렇듯 러시아는 韓半島 統一을 支援하기에는 힘이 부치지만 마음만 먹으면 妨害는 할 수 있는 나라다. 北韓은 러시아에 줄 것이 거의 없고, 力量이 달리는 러시아보다는 中國에 依存하고 있다.

    러시아에 對한 레버리지 效果를 높이려면 于先 大(對)러시아 貿易을 短期間에 劃期的으로 늘리고 沿海州, 아무르주, 사할린 等 極東 地域에 對한 投資를 增大해야 한다. 이는 中國의 漸進的 浸透에 對한 防波堤 機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 問題를 解決하는 同時에 北韓을 國際 에너지 體制로 끌어들이는 手段으로 시베리아産 石油와 天然가스를 導入할 必要가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