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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漠에 핀 하얀 薔薇|新東亞

沙漠에 핀 하얀 薔薇

조지아 오키프 美術館

  • 최정표 | 건국대 經濟學科 敎授 jpchoi@konkuk.ac.kr

    入力 2015-11-20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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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아 오키프는 世界的 名聲의 美國 女性 畫家다.
    • 20世紀 中盤 뉴욕을 據點으로 活潑하게 活動했지만, 정작 그를 記念하는 美術館은 ‘美國 속 스페인’이라 불리는 뉴멕시코 州에 있다. 末年의 오키프는 뉴멕시코의 異國的인 風景에서 安息과 靈感을 얻었다.
    사막에 핀 하얀 장미

    조지아 오키프 美術館.

    美國 西南部에 자리한 뉴멕시코 州는 荒凉한 沙漠이다. 肥沃한 農土는 찾아보기 어렵고, 가도가도 灌木 덤불과 돌밭 天地다. 間或 보이는 작은 시냇물이 ‘이런 땅에서도 사람이 살 수는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元來 멕시코 땅이었다가 1912年 美國의 47番째 主로 編入됐다. 이름 그대로 美國 속에서 새로 誕生한 멕시코(New Mexico)인 셈이다.

    뉴멕시코 北部에는 美國의 여느 都市와는 全혀 다른 都市, 샌타페이(Santa Fe)가 있다. ‘어도비(Adobe)’라고 하는 스페인式 黃土 흙집이 가득한 아름다운 멕시코 마을이다. 조지아 오키프 美術館(Georgia O’Keeffe Museum)은 샌타페이 한복판에 자리한다. 亦是 雅淡하고 素朴한 어도비 建物로, 美國의 女性 現代化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를 記念하는 個人 美術館이다.

    오키프와 뉴멕시코

    오키프 美術館은 1995年 設立되기 始作해 그의 死後 11年이 지난 1997年에 開館했다. 140點의 오키프 作品으로 始作했지만, 現在는 3000餘 點으로 늘었다. 全 世界에서 오키프 作品을 가장 많이 所藏하고 가장 많이 展示하는 美術館이다.

    美術館은 그의 그림뿐만 아니라 遺産과 作品 世界를 總括的으로 管理하는 記念館 性格이 剛하다. 2001年 美術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硏究센터(Georgia O’Keeffe Museum Research Center)를 열어 美國 모더니즘 美術에 對한 硏究를 支援하고 있다. 美國 모더니즘 美術을 硏究하는 唯一한 硏究施設이다.



    샌타페이에서 北쪽으로 1時間 程度 달려가면 오키프가 末年에 살던 시골 마을 아비키우(Abiquiu)가 나오고, 거기서 또 北쪽으로 20分을 더 가면 그가 作業場으로 쓴 農場 고스트랜齒(Ghost Ranch)를 만날 수 있다. 아비키우와 고스트랜齒 모두 아름다운 캐년으로 둘러싸인 沙漠 마을이다. 오키프는 1940年 고스트랜値에, 1945年엔 아비키우에 집을 마련했다.

    오키프의 財産은 조지아 오키프 財團(Georgia O’Keeffe Foundation)이 所有했는데, 財團은 2006年 財産을 모두 오키프 美術館에 넘기고 解散했다. 財團이 所藏한 800餘 點의 오키프 作品도 美術館이 맡았다. 아비키우와 고스트랜齒도 美術館이 引受했다. 이러한 作業을 거쳐 美術館이 名實共히 오키프를 記念하는 心臟이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오키프 美術館은 그가 主로 活動한 뉴욕과 한참 떨어진 샌타페이에 있는 걸까. 그는 마흔두 살이던 1929年부터 20年間 거의 每年 뉴멕시코를 찾았고, 1949年 以後에는 아예 뉴멕시코에 눌러앉았다. 아비키우와 고스트랜値에 居住하며 그린 作品도 많다. 이러한 緣故로 뉴멕시코에서 가장 큰 都市이자 藝術都市를 自處하는 샌타페이에 오키프 美術館을 만들게 된 것이다.

    샌타페이는 美國 속 스페인 都市다. 크기는 뉴멕시코에서 4番째이지만 人口 70萬 名의 어엿한 主導(州都)다. 本來는 인디언들이 살던 곳으로, 1100年頃에는 이 地域에 푸에블로族 인디언 마을이 많았다고 한다. 샌타페이에 白人이 進出한 것은 1598年으로 記錄된다. 勿論 멕시코에서 온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1810年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獨立할 때까지 스페인 땅이었다가 멕시코에 歸屬됐고, 以後 美國에 編入됐다.

    샌타페이는 藝術家가 많이 살고, 觀光客도 많이 놀러 온다. 氣候가 따뜻하고 여느 美國 都市와는 다른 風景이 魅力的이기 때문이다. 집도, 建物도, 距離도 모두 藝術作品처럼 느껴진다. 都市 全體가 美術館이라 할 만큼 갤러리가 到處에 널려 있다. 褐色의 어도비 흙집으로 가득한 風景은 韓國의 옛 시골 情趣와도 恰似해 정겹다. 맑은 하늘을 象徵하는 코발트색 窓틀은 어도비와 산뜻하게 어우러진다.

    스티글리츠를 만나다

    사막에 핀 하얀 장미

    산타페는 스페인式 黃土 흙집들이 異國的인 雰圍氣를 자아내는 美國 속 스페인 都市다.

    조지아 오키프는 全 世界的으로 가장 有名한 美國의 女性 畫家다. 40代에 美國 最高의 畫家에 登極했고, 100歲까지 살며 富와 名譽를 함께 누렸다. 個人的 삶도 드라마틱하고 激情的이었다고 알려진다.

    1930~40年代에 오키프의 名聲과 人氣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作品 依賴가 殺到했고, 뉴욕과 그 近方에서 展示會도 數次例 열렸다. 最高 全盛期는 50代 때 찾아왔다. 1943年 시카고 美術館(Art Institute of Chicago), 1946年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單獨 回顧展을 열었다. MoMA의 첫 女性作家 回顧展 主人公이 바로 오키프였다.

    여러 大學에서 名譽學位度 받았다. 1976年에는 自敍傳을 썼고, 이듬해 그를 主題로 한 映畫가 製作됐다. 1977年에는 제럴드 포드 當時 美國 大統領으로부터 美國 市民에게 주어지는 最高 榮譽인 大統領 自由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1985年에는 國家 文化메달(National Medal of Arts)을 받았다.

    오키프는 위스콘신 州의 시골 마을에서 牧場을 運營하는 아일랜드系 아버지와 헝가리系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美術家가 되기를 願했던 그는 18살 때 시카고 藝術學校(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 進學하며 本格的으로 美術 工夫를 始作했다. 그 時節 藝術家 大部分이 그랬듯 오키프度 뉴욕으로 옮겨와 美術 工夫를 繼續했다.

    그는 뉴욕에서 運命의 男子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1864~1946)를 만난다. 스티글리츠는 當時 世上에 갓 出現한 寫眞을 藝術의 境地로 끌어올린 有名 寫眞作家이자 뉴욕 藝術界의 巨物이었다. 그는 ‘291’이라는 갤러리를 運營하며 유럽의 많은 아방가르드 作家를 美國에 紹介하고 있었다.

    오키프는 스물한 살 때 처음 291 갤러리를 訪問했다. 하지만 當時엔 ‘巨匠’ 스티글리츠에게 말조차 건넬 수 없는 애송이에 不過했다. 8年이 지난 1916年에야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와 가까운 사이가 됐고, 291 갤러리에서 個人展을 열었다. 이는 藝術家로서 自信感을 갖게 된 重要한 契機가 됐다.

    沙漠에서 얻은 靈感

    오키프는 한때 純粹藝術을 抛棄하고 시카고에서 商業藝術家로 일했지만, 1918年 스티글리츠의 要請에 따라 아예 뉴욕으로 移徙 와 作品 活動에만 沒頭했다. 그해 스티글리츠는 뉴욕 州 北部의 아름다운 湖水 地域 레이크조지(Lake George)에 있는 別莊에 오키프를 招待한다. 레이크조지는 나도 한 番 가본 적이 있는데, 鬱蒼한 森林 속에 크고 아름다운 湖水가 펼쳐진 곳이다. 美國人들이 最高로 꼽는 여름 休養地 中 하나라고 한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1929年까지 每年 여름을 레이크 조지에서 함께 보냈다. 1923年부터는 스티글리츠가 每年 오키프의 個人展을 열어줬다. 스티글리츠의 後援에 힘입어 그는 1920年代 中盤 以後부터 畫家로서 名聲을 날리기 始作했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와 關係가 疏遠해진 1929年 汽車旅行을 하던 中 偶然히 들른 뉴멕시코에 完全히 魅了됐다. 當時 交通 事情으로는 뉴욕에서 뉴멕시코까지 여러 날이 걸렸음에도 以後 거의 每年 뉴멕시코를 訪問했다. 그는 뉴멕시코 沙漠 이곳저곳을 旅行하며 休息을 取했고, 沙漠에서 주워 모은 돌과 動物 뼈 彫刻 等으로부터 作品의 靈感을 얻었다(사막 風景과 動物 머리뼈는 오키프 그림의 重要 素材다). 나중에는 유타 州 콜로라도 江까지 旅行의 半徑을 넓혔다.

    오키프는 40代 中盤에 이르자 神經衰弱으로 더는 作業할 수 없는 地境이 됐다. 1934年 고스트랜齒를 訪問하고는 아예 여기 눌러앉기로 맘먹었다. 고스트 랜치는 빨간 絶壁이 屛風처럼 周圍를 빙 둘러싼 沙漠의 要塞 같은 곳이다. 붉은 巖石 사이로 間間이 草綠 植物이 머리를 내민다. 荒凉함 속에서도 生命力을 느낄 수 있는 妙한 魅力을 發散한다. 내가 訪問한 때는 初가을이었는데,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내리쬐는 沙漠의 햇빛이 하나의 照明처럼 고스트랜齒를 감싸고 있었다.

    오키프는 1945年에 아비키우에도 집을 마련했다. 1949年에는 뉴멕시코로 아예 移徙를 왔다. 1950年代 後半에는 그間 꿈꿔오던 世界 旅行에도 나섰다. 旅行 中에도 많은 作品을 그렸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視力이 急速히 나빠져 85歲가 되는 1972年부터는 油化보다는 드로잉에 沒頭했다. 1984年에는 아비키우에서 샌타페이로 옮겨왔고, 1986年에 99歲로 生을 마감했다. 韓國 나이로는 100歲였다.

    오키프의 作品은 매우 큰 特色이 있어서 쉽게 區分해낼 수 있다. 韓國 最高의 女性 畫家인 千鏡子의 作品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오키프와 千鏡子의 作品엔 異常하게도 一脈相通하는 點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막에 핀 하얀 장미

    Pedernal, 1941~42



    사막에 핀 하얀 장미

    Abstraction White Rose, 1927(왼쪽), Banana Flower No.2, 1934

    캔버스 가득한 꽃 한 송이

    美術館에 展示된 그림 中 가장 印象的인 것은 ‘페더널(Pedernal)’이라는 이름이 붙은 風景畫였다. 沙漠의 産科 꽃을 水彩畫처럼 그린 油畫다. 沙漠의 荒凉함이 華麗한 꽃과 뚜렷한 對照를 이룬다. ‘하얀 薔薇 抽象化(Abstraction White Rose)’도 오키프의 典型的인 꽃 그림으로 눈길을 끌었다. 꽃은 오키프 그림의 主要 主題였다. 曲線의 흐름이 매우 부드럽고 耽美的이다. 오키프의 꽃 그림에서 꽃잎과 꽃술 等은 女性의 生殖器를 象徵하는데, 이는 男性的 視線의 美意識에 挑戰狀을 던진 것으로 解釋된다. 그는 꽃 한 송이를 캔버스 가득 擴大해 아주 크게 그리면서 이러한 象徵性을 最大化했다.

    오키프의 꽃 그림은 처음엔 別로 注目받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當時 雨後竹筍처럼 솟아오르는 맨해튼 高層빌딩에 歡呼하자, 自身도 꽃을 크게 擴大해 그리면 大衆의 關心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豫想은 的中해 꽃 한 송이가 畫幅을 가득 채운 그의 獨特한 스타일은 以內 注目받기 始作했다.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는 1924年에 正式 夫婦가 됐다. 이때 오키프는 37歲, 스티글리츠는 60歲로 無慮 23歲 差異였다. 스티글리츠가 死亡한 1946年까지 둘은 22年間 書類上 夫婦 사이를 維持하며 相對方의 藝術 世界에 至大한 影響을 미쳤다.

    스티글리츠는 뉴저지 州의 獨逸系 유대人 家庭에서 태어났다. 比較的 餘裕 있는 집안이라 스티글리츠는 일곱 살에 뉴욕에서 가장 좋은 私立學校에 다녔다. 아들의 才能을 알아챈 아버지는 아들의 大學 敎育을 위해 家族을 모두 데리고 獨逸로 移住했다. 스티글리츠는 獨逸에서 大學에 다니며 유럽 旅行을 많이 했다. 1890年 서른여섯의 나이로 뉴욕으로 돌아와 本格的으로 寫眞作家의 길에 들어섰다.

    스티글리츠는 1893年 9歲 年下의 오버마이어와 結婚했다. 하지만 結婚生活은 圓滿하지 못했다. 그는 後날 ‘돈 때문에’ 첫 結婚을 했다고 告白한 바 있다. 神父는 麥酒會社를 運營하는 事業家의 相續女였고, 當時 스티글리츠의 아버지는 株式 投資家 亡해 쪽박 身世였다.

    사막에 핀 하얀 장미

    오키프가 스티글리츠에게 보낸 便紙(왼쪽), 스티글리츠가 撮影한 30代 時節의 조지아 오키프(1920~22).

    오키프 藝術의 聖地

    스티글리츠는 女性 趣向이 獨特한 男子로 限平生 젊은 女子에 耽溺하며 살았다. 그래도 첫 아내는 男便이 언젠가는 自身에게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며 經濟的 支援을 繼續했고, 德分에 그는 財政的 어려움 없이 作品活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24年 스티글리츠 夫婦는 正式으로 離婚했고, 離婚 圖章을 찍은 지 채 4個月도 지나지 않아 오키프와 結婚했다. 結婚 後에도 둘은 獨自的으로 作品活動을 繼續해나갔다. 相對方의 固有 領域은 侵犯하지 않는다는 合意가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再婚 3年 만에 스티글리츠는 22歲의 젊은 女性과 사랑에 빠졌다. 이 女性은 아이가 하나 있는 有夫女인데도 거의 每日 스티글리츠를 찾았다. 오키프度 곧 이 事實을 알게 됐고, 두 사람 사이에 距離가 생기기 始作했다. 1946年 스티글리츠가 쓰러졌다. 오키프가 病院에 到着하자 젊은 愛人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愛人이 나간 사이 오키프가 男便의 臨終을 지켜봤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遺骸를 火葬해 레이크조지에 뿌렸는데, 正確한 場所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男便이 남긴 作品들을 整理해 美國의 主要 美術館에 寄贈했다.

    스티글리츠는 1917年 自身의 갤러리에 오키프가 訪問했을 때부터 오랜 期間 그를 모델로 寫眞 作業을 했다. 1937年 隱退할 때까지 오키프가 모델이 된 寫眞 作品이 350點이 넘는다. 그中에는 누드 作品도 있다. 스티글리츠 回顧展에서 이 作品들이 公開됐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畫家는 大槪 가난하다. 고흐는 그 代名詞다. 가난이 作家精神을 키운다는 主張도 있다. 하지만 富者 畫家도 있다. 畫家가 富者인 理由는 크게 두 가지다. 父母가 富者이거나 生前에 有名해져서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銀行家 아버지를 둔 세잔이 前者라면 피카소와 오키프는 後者다. 오키프는 일찍이 名聲을 얻어 餘裕롭게 作品活動을 할 수 있었고, 個人 美術館도 만들 수 있었다.

    사막에 핀 하얀 장미
    최정표

    1953年 慶南 河東 出生

    美國 뉴욕주립대 博士(經濟學)

    公正去來委員會 非常任委員, 建國大 상경大學長

    著書 : ‘經濟民主化, 政治人에게 맡길 수 있을까’ ‘財閥들의 特別한 外道’ ‘韓國財閥社硏究’ ‘公正去來政策 虛와 실’ ‘韓國의 그림價格指數’ 等

    現 건국대 經濟學科 敎授, 經實聯 共同代表


    하지만 有名 畫家의 個人 美術館에는 代表作이 거의 없는 境遇가 많다. 生前에 有名해진 作家일수록 作品이 남김없이 팔려나가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代表作은 世界 有名 美術館에 흩어져 있어 정작 파리의 피카소 美術館에서는 그의 代表作을 구경할 수 없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 美術館은 例外다. 生前에 빛을 보지 못해서 팔린 그림이 別로 없기 때문이다.

    오키프는 生前에 有名해진 畫家지만, 산타페의 個人 美術館에는 그의 많은 作品이 所藏돼 있고 代表作度 더러 있다. 그가 經濟的으로 餘裕 있었고, 直接 作品을 管理했기 때문이다. 美國 有名 美術館도 빠짐없이 오키프 作品을 所藏하고 있지만, 샌타페이의 오키프 美術館이야말로 그의 作品을 鑑賞할 수 있는 最高의 場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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