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殺人을 追憶하다 時代를 嘲弄하다|신동아

殺人을 追憶하다 時代를 嘲弄하다

‘殺人의 追憶’과 火星 어섬飛行場

  • 글 · 오동진 | 映畫評論家 | 寫眞 · 김성룡 | 捕討그래퍼

    入力 2015-11-20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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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年間 10名의 女性이 살해당한 이 기막힌 未濟 殺人事件을 土臺로 奉俊昊는 逆說的으로 빼어난 傑作을 만들어냈다. 그가 그리려 한 건 事實 殺人事件 自體가 아니었다. 그것을 뛰어넘는 時代의 混亂相이 그의 映畫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連鎖殺人을 追憶하기 위해 特定 場所를 일부러 가기란, 아무래도 神經 쓰이는 일이다. 捕討그래퍼 김성룡과 짧은 時間 論爭을 벌인 것은 그 때문이다.

    “아니 뭐, 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맥베스’의 殺人 場面이 아무리 뛰어났다 한들 그걸 聯想시키려고 그의 아내가 찰스 맨슨에게 殺害當한 뉴욕 아파트 周邊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러자 김성룡이 말했다.

    “누가 그 場所 그대로를 가자고 합니까. 그냥 火星엘 가자고요, 火星! 火星에 갈 만한 곳이 있어요! 殺人을 追憶할 만한 곳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無酌定 火星으로 向했다.



    “이 새끼, 無條件 잡아야 해”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京畿道 華城. 連鎖殺人으로 惡名 높은 곳. 2003年 奉俊昊가 만든 ‘殺人의 追憶’ 속 刑事 서태윤(金上警)은 犯人을 쫓다 몸과 마음이 풀처럼 되고 만다. 풀. 들판의 풀이 아니고 종이를 붙이는 끈적끈적하고 흐물흐물한 풀. 그는 警察大學을 나온 엘리트이자 科學搜査를 믿는 人物이다. 反面 火星 土박이 박두만(송강호) 刑事는 犯人은 本能과 直觀으로 때려잡는 便이 맞다고 생각한다.

    둘이 事事件件 부딪칠 수밖에 없는 건 成長의 DNA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던 두 사람은 어느 날, 그날도 犯人의 꼬리조차 잡지 못하고 撤收했는데, 強力班 冊床에 얼굴을 마주 대고 엎드려 對話를 나눈다. 奉俊昊의 카메라는 그런 두 사람을 冊床 위에서 俯瞰(俯瞰) 숏으로 잡는다. 이 場面은 觀客들에게 華城 連鎖殺人事件의 犯人에 對해 切迫한 憎惡感을 불러일으킨다. 同時에 映畫 속 刑事 둘에게 自己 同一化를 剛하게 형성시킨다.

    죽기에 딱 좋은 날씨


    서태윤이 말한다. “科學搜査高 뭐고 이 새끼를 無條件 잡아야 해. 無條件.” 그러자 迫頭만이 感歎하듯, 自嘲하듯 그러면서 오히려 걱정하듯 答한다. “너 참 많이 變했다.” 그리고 둘은 뭔가가 생각난 듯 다시 端緖를 뒤지기 始作한다.

    그래서 火星으로 가는 길, 正確하게는 捕討그래퍼에게 이끌려 어섬飛行場으로 가는 길은 마음이 錯雜했다. 아무리 弄談처럼 우리는 男子고, 게다가 빨간 옷을 안 입었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달리는 車 밖으로 가뜩이나 흐린 날은 한바탕 비를 쏟아낼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둘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殺人이 벌어진 날은 꼭 비가 오고 있었다지…. 映畫를 생각하며 스마트폰 뮤직앱으로 유재하의 노래를 튼 것은 多少 오버였다. ‘憂鬱한 便紙’가 車 안에 흘렀다.

    생뚱맞은 臺詞가 捕討그래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映畫 ‘新世界’에서 패밀리 2人者 이중구(박성웅)가 죽기 前에 한 말이다.

    “거, 죽기에 딱 좋은 날씨네.”

    재미도 없고 意味도 없는 이 말을 끝으로 우리 둘은 車 안에서 입을 다물었다. 날씨처럼, 世上처럼, 그리고 華城 連鎖殺人犯의 마음처럼, 그를 끈질기게 쫓던 刑事들의 마음처럼 우리의 마음도 漸漸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어섬飛行場은 京畿道 華城市 송산면 고포리에 있다. 여기에 到着하면 이곳을 왜 오자고 했는지, 여기가 왜 ‘殺人의 追憶’ 現場 같은 느낌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一旦 平日에는 人跡이 아예 없다. 괴기스러운 숲과 荒凉한 벌판, 누군가 숨어 있을 성싶은 갈대밭이 이어진다. 아마도 逆說的으로 世上 끝에 숨고 싶은 戀人이라면 어두워지기 前 둘만의 空間을 위해 이곳을 찾겠구나 싶은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없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 世上에서 가장 무서운 存在는 바로 사람이다. “元來는 警備行長 滑走路로 쓰던 곳이에요. 요즘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畫報 撮影하는 데 쓰곤 해요. 日沒이 죽이거든요.” 김성룡이 셔터를 누르면서 띄엄띄엄 말을 이어간다.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殺人의 追憶’에서 刑事들은 죽어라 連鎖殺人犯을 쫓지만 結局 雜誌 못한다.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어섬飛行場은 여기가 왜 ‘殺人의 追憶’ 現場 같은 느낌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게 한다.

    “날 보러 와요”


    어섬은 ‘漁島’를 뜻한다. 고기가 많은 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只今은 버려진 곳이다. 人間이 그렇게 만들었다. 1994年 시화地區 干拓事業 過程에서 섬이 陸地로 變해버렸다. 물고기는 이제 存在하지 않는다. 中間中間 마치 弊船처럼, 이곳에서 한때 蒼空을 飛行하기를 꿈꾸며 喜喜樂樂하던 飛行機의 痕跡들만 남아 있다. 그리고 政敵. 고즈넉하고, 한便으로는 不吉한 孤獨 같은 것이 平野 全篇을 휘감는다.

    奇異하게도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서울에서 기껏해야 두 時間이 안 걸리는 곳에서 바람을 마주하며 갑작스러운 冥想(冥想)을 要求받을 수 있으리라곤 斟酌하지 못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생각으로 이어진다. 왜 火星은 저렇게 됐을까. 華城市場은 얼마나 苦悶일까. 사람들이 火星 하면 第一 먼저 떠올리는 것은 未濟(未濟) 連鎖殺人事件이 됐으니까.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事實은 얼마나 애를 쓰고 있을까.

    映畫 ‘殺人의 追憶’ 原典이 된 演劇 ‘날 보러 와요’의 俳優 권해효가 늘 하는 얘기가 있다. 그건 ‘殺人의 追憶’을 만든 奉俊昊도 같은 생각이었다. “演劇을 보는 내내 客席에 殺人者가 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正말 끔찍한 恐怖였다.” 그래서 演劇의 題目이 ‘날 보러 와요’였던 셈이다.

    그건 마치 殺人者가 몰래 演劇을 製作해서 사람들에게 自身의 作品을 弘報하러 다니다가 錯覺해서 내뱉은 말과도 같은 것이다. 演劇 보러 오세요, 라고 하던 그가 잘못해서 날 보러 오세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只今 이 글을 쓰는 瞬間에도 그 생각만 하면 목덜미에 살짝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華城 連鎖殺人의 犯人은 한 名일까, 두 名일까, 여러 名일까. 샌프란시스코의 조디額 킬러도 如前히 잡히지 않았다. 1969年의 일이니까 無慮 46年 前이다. 華城 連鎖殺人은 1986年에 始作됐으니 30年에 가깝다.

    여기서 火星 殺人事件을 復棋할 생각은 없다. 그건 事實 追憶도 뭣도 아니니까. 어쩌면 깔끔하게 犯人을 잡고, 處罰하고, 記憶 속에서 지웠어야 되는 事件이다. 1986年부터 1991年까지 無慮 10名의 女性이 殺害당했다. 그中엔 할머니도 있고 女中生도 있다. 正確한 殺人 場所는 華城郡 태안읍 半徑 2km 以內였다. 넓은 區域이 아니다. 그런데 犯人은 감쪽같이 女性들을 끌고 가서 殺害하고 遺棄했다. 屍身마다 深刻하고도 獵奇的인 毁損이 恣行됐다. 犯人은 끝내 잡히지 않은 채 公訴時效 10年이 지나 事件 自體가 消滅된 狀態다.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奉俊昊는 映畫에서 殺人犯을 쫓는 척하면서 事實은 우리 社會 混亂相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束手無策이었다


    이 기막힌 未濟 殺人事件을 土臺로 奉俊昊는 逆說的으로 빼어난 傑作을 만들어냈다. 奉俊昊가 그리려 한 것은 事實 殺人事件 自體가 아니었다. 그것을 뛰어넘는 時代의 混亂相이 그의 映畫 속에는 고스란히 담겼다. 映畫는 種種, 아마도 그것은 박두만 刑事 役을 맡은 송강호의 캐릭터 때문인데, 코믹한 地境을 보여주기도 한다.

    世上이 極甚하게 混沌에 處하면 失笑(失笑)가 나온다. 우습기까지 하다. 實際로 웃기는 일이 中間中間 끼어든다. ‘殺人의 追憶’은 그것을 餘地없이 그려낸다. 例컨대 이런 것이다. 논두렁을 지나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또 다른 屍身이 發見되는 場面이다. 奉俊昊는 이 場面을 氣막힌 롱 테이크 한 컷으로 찍는다.

    박두만은 東奔西走, 도무지 제대로 하는 일 없이 여기저기 右往左往하기에 바쁘다. 논과 논 사이 新作路에 난 軍靴 발자국 같은 것에 나뭇가지를 꺾어 동그랗게 線을 그어놓은 채, 新參으로 보이는 警察에게 더듬더듬 말한다. 이거, 이거 犯人 발자국일지도 몰라. 건드리지 마. 그대로 保存해. 그러면 박두만의 등 뒤로 논두렁을 내려가던 警察들이 次例로 미끄러지기 始作한다. 班長(변희봉)도 미끄러진다. 그 바쁜 渦中에 박두만은 그들을 向해 소리친다. “怨 XX. 논두렁에 꿀물을 발랐나….” 그리고 카메라는 다시 송강호가 있는 곳으로 턴하는데 기껏 동그라미를 그려둔 犯人 발자국에 車가 한 臺 지나가며 바닥을 뭉갠다. 박두만의 努力은 물거품이 된다.

    그 코믹의 도가니는 이때의 警察 搜査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모든 것이 混沌의 時代였음을 加減 없이 드러낸다. 아무것도 제자리에 있지를 못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만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刑事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束手無策이었다. 그때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랬던 셈이다.

    混亂의 記錄


    ‘殺人의 追憶’에서 刑事들은 그렇게 죽어라 連鎖殺人犯을 쫓지만 結局 雜誌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끝내 잡지 못한 것은 1980年代의 時代악이다. 새로 赴任한 刑事班長(송재호)은 서태윤 刑事의 確信을 믿고 犯人을 잡기 위해 潛伏하기로 한다. 그는 電話筒을 붙잡고 어딘가를 向해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戰警 2個 中隊만 支援해달라고. 그러면 犯人을 逮捕할 수 있다고. 電話機를 내던지듯 끊고 나서 班長은 서태윤과 박두만에게 諦念한 듯 말한다. “아, 모두 示威 現場에 投入됐다카이, 이거 뭐 어쩌겠노.”

    생각해보면 奉俊昊는 自身의 映畫를 통해 늘 時代를 얘기해왔다. 어떤 때는 連鎖殺人犯의 正體를 쫓는 척, 어떤 때는 漢江 속 怪物의 存在를 쫓는 척, 또 어떤 때는 ‘엄마’를 등장시켜 殺人 容疑者로 몰린 아들을 代身해 眞짜 殺人犯을 쫓는 척하며 事實은 지난 20餘 年 동안 韓國 社會의 混亂相을 記錄해왔다.

    그의 映畫는 그래서 늘 政治的이지만, 그걸 꿰뚫어 보는 사람만 알게끔 만드는 英敏한 재주를 선보여왔다. 빙글빙글 웃음을 숨긴 채 奉俊昊는 只今껏 韓國 社會를 이 地境으로 만든 存在들을 嘲弄하고 批判해온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對象인 사람들은 自身이 그렇게 비웃음의 對象이 되고 있다는 것조차 잘 몰랐다.

    映畫 ‘怪物’을 復棋해보면 그 같은 意味를 오프닝 場面부터 알 수 있다. 映畫의 始作은 40代로 보이는 한 男性이 漢江으로 投身하는 場面이다. 온통 우중충한 잿빛 하늘이 仰角(仰角)으로 넓게 펼쳐지고 男子가 뛰어드는 刹那가 後面 풀숏(full shot)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男子가 韓江의 怪物이 됐을까. 怪物은 우리 社會가 만들어낸 異常變種의 生物體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 社會가 怪物 自體일지도 모른다고 奉俊昊는 喝破한다.

    映畫 ‘마더’에서는 엄마(김혜자)와 아들(元嬪)李 ‘살짝’ 近親 關係처럼 비친다. 勿論 그 點에 對해서는 이 映畫를 본 사람들이 다 同意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元嬪은 마마보이처럼 보이는데, 다 큰 어른이 된 그는 如前히 엄마와 한 이불 속에서 잔다. 奉俊昊는 둘의 關係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걸 굳이 얘기할 必要는 없는 거 아니냐는 式으로 이야기를 進行한다.

    “바깥 사람들, 아무도 믿지 마”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봉준호 監督.

    어쨌든 적어도 그걸 나는 알고 있다는 듯, 元嬪의 洞네 先輩 役인 진구는 김혜자 혼자 있는 집에서 웃통을 벗고 돌아다닌다. ‘나도 이래도 되는 거 아냐’ 하는 式이다. 實際로 둘의 關係도 尋常치 않다. 心證은 있지만 物證이 없는 式이다. 그렇게 한 空間에서 두 ‘男女’는 오랫동안 같이 있는다. 그렇게 時間을 보내다가 어둠이 스며든 居室에서 진구는 窓門을 아주 조금만 연 채 김혜자에게 말한다. “이 洞네는 참 異常해. 正말 異常해. 그러니까 말야 엄마. 바깥 사람들, 아무도 믿지 마.”

    別것 아닌 場面 같지만 ‘마더’는 이 部分에서 恐怖映畫처럼 보인다. ‘殺人의 追憶’처럼 소름이 쫙 끼친다. 진구가 窓門으로 보고 있는 洞네, 어둠이 어스름하게 깔리는 洞네는 어쩌면 只今의 世上을 말하는 것이다. 저곳에서는 只今 殺人이 벌어지고 있고 아무도 그 殺人者가 누군지 모른다. 아니, 잘 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모르는 척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子息조차. 이 얼마나 무서운 世上인가. ‘마더’가, ‘怪物’李, ‘殺人의 追憶’의 延長線에 있는 作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奉俊昊의 닉네임은 ‘鳳테일’이다. 그만큼 디테일이 뛰어나다는 애기다. 그의 映畫에는 無意味한 컷이 하나도 없다. 한 컷, 한 컷이 精巧한 計算 아래 準備된다. 그는 늘 具體的인 얘기를 한다. 哲學, 宗敎, 政治, 經濟의 修辭學 따위는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映畫에서 사람들은 結局 抽象의 談論, 그 結晶體를 發見하게 된다. 그게 맞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關係가 있고 나서야 政治가 생기고 宗敎가 만들어졌다. 哲學도 그다음이다. 그 때문에 世上의 問題는 사람들 안에서 찾아야 한다. 理論에서는 百날 해봐야 거기가 거기다. 解法이 없다. 奉俊昊의 映畫가 다가서는 地點은 바로 거기에서 明瞭함을 發한다.

    그런 面에서 보면 ‘雪國列車’는 一貫性의 映畫 哲學을 지닌 奉俊昊 映畫의 決定版과도 같은 作品일 수 있다. ‘雪國列車’는 장 마르크 로셰트와 뱅자맹 르그랑의 漫畫를 原作으로 한 作品이다. 映畫는 印象的이다 못해 衝擊的이고 論爭的이며 極烈하게 이념적이다.

    世上은 滅亡하고 오로지 汽車 하나가 달리는데, 칸마다 階級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문제인 칸은 바로 꼬리칸이다. 이곳에서는 다들 男子든 女子든, 어린아이든 老人이든, 뒤섞여서 살아간다. 섹스도 用便도 자유롭지 않다. 숨도 못 쉴 만큼 콱콱 막혀 있다. 모두들 動物的 利己心만 澎湃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쨌든 問題는 꼬리칸 사람들은 繼續해서 脫走를 꿈꾼다는 것이다. 이들을 이끄는 指導者는 커티스(크리스 에번스)다. 커티스는 사람(=民衆)들을 이끌고 한 칸 한 칸 앞으로 前進해나간다. 그 過程에서 맨 앞칸, 곧 黃金칸의 權力者가 配置해둔 武裝軍人들과 衝突을 避할 수가 없다. 革命은 種種 피를 부른다. 世上의 變化는 어쩔 수 없이 暴力的으로 進行된다. 커티스의 얼굴과 몸으로 온통 피가 튄다. 물탱크가 있는 칸을 사이에 두고 權力의 殺人部隊와 맞닥뜨린 커티스 一行은 말 그대로 血肉戰을 벌인다.

    世界를 실은 列車


    映畫에서 列車는 곧 世上이다. 只今 世界의 縮小版이다. 極端的인 階級으로 나뉘어 있지만 異常한 共存의 論理가 通用된다. 黃金칸의 權力者 윌포드(에드 해리스)에 따르면 커티스가 이루려는 革命도 事實은 모두 操縱되고 調律된 것이다. 個體數를 줄이기 위해서는 人爲的으로 戰爭을 일으켜야 한다.

    實際로 只今의 資本主義 世界엔 好況과 不況이 週期的으로 交叉한다. 처음에는 商品을 生産하고 市場을 開拓하는 實物經濟가 膨脹한다. 그러나 곧 過熱競爭이 利潤을 떨어뜨려 不況이 찾아온다. 그러면 돈을 쥔 손들이 投棄하기 위해 몰려들어 金融膨脹이 이뤄진다. 그러나 그것도 흐름이 다하면 競爭關係에 있는 資本이 國家를 動員해 戰爭을 한다. 勝利한 國家를 中心으로 새 판이 짜이고 다시 實物膨脹이 이뤄진다. 實物膨脹, 金融膨脹, 戰爭의 循環이 繼續된다.

    커티스는 마지막 瞬間 權力者인 윌포드와 自身의 멘토 길리엄이 事實은 二卵性 雙둥이라는 것, 두 사람이 雪國列車의 均衡을 維持하기 위해 挾雜 아닌 挾雜을 했다는 것에 衝擊을 받는다. 이쯤 되면 더 以上 革命은 없다. 사람들은, 커티스든 윌포드든 모두 世上의 煉獄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다.

    디스토피아的 世界觀


    어섬飛行場에서 奉俊昊의 殺人劇, 그 煉獄의 끝을 想像하기는 實로 憂鬱한 일이다. 누가 奉俊昊를 이렇게까지 디스토피아的 世界觀에 물들게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건 아마도 우리 모두가 저지른 일이 아니었던가. 어섬飛行場 가는 길에는 아무것도 없다. 周邊에도 그렇다. 여기는 正말 캠핑 할 料量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 等을 바리바리 싸오지 않는다면 쫄쫄 굶을 수 있다. 그건 野生을 즐기는 旅行族 얘기다. 아베크 커플이라면 自動車 드라이빙 코스 程度로 즐기는 것이 좋다.

    다만 여기가 華城 周邊이라는 것, ‘殺人의 追憶’ ‘따위’는 記憶하지 않아도 된다. 傑出한 映畫作家 奉俊昊 ‘따위’ 亦是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只今의 잿빛 世上에 對해 念慮하는 사람들이라면 華城 連鎖殺人犯의 正體를 두려워할 必要는 있다. 그의 存在 自體가 아니라 그의 存在를 못 드러내게 하는 이 世上 自體를.

    하여, 봉준호 監督에 對해서도 實로 고마운 마음을 가져도 된다. 그는 늘 뛰어난 映畫를 만들어주니까. 이 世上을 걱정하되, 映畫로 같이 있어주니까. 奉俊昊 같은 映畫監督과 同時代를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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