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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主席도 感歎한 ‘現代版 우공(愚公)’|新東亞

장쩌민 主席도 感歎한 ‘現代版 우공(愚公)’

中國 敎科書에 실린 濟州 ‘생각하는 庭園’ 성범영 院長

  • 황의봉 | 世宗大 招聘敎授, 前 동아일보 베이징特派員

    入力 2015-11-19 1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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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濟州의 ‘생각하는 庭園’은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等 前·現職 國家主席을 비롯해 많은 中國人이 찾는 名所다. 이곳 성범영 院長은 中國의 中學校 敎科書에 ‘韓國 民族精神의 戰犯’으로 紹介될 程度. 平生에 걸쳐 피와 땀, 눈물로 特別한 盆栽庭園을 일군 性 院長의 盆栽(盆栽) 人生.
    장쩌민 주석도 감탄한 ‘현대판 우공(愚公)’

    조영철 記者

    지난 9月 14日子 ‘東亞日報’에 실린 ‘생각하는 庭園’ 성범영(76) 院長의 인터뷰 記事를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 드라마틱하고도 奇跡的인 事緣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한 農夫가 일군 아름다운 庭園이 中國의 最高權力層 人士들을 大擧 몰려오게 만들었으며, 드디어는 中國 敎科書에까지 실리게 됐다는 事實을 말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되는 過程에 나도 한 가닥 因緣의 끈으로 連結돼 있다는 事實도 하마터면 모를 뻔했다.

    1995年 10月의 일이다. 當時 나는 동아일보 베이징特派員 赴任을 앞두고 있었는데, 마침 東亞日報 招請으로 中國 ‘인민일보’의 판징이(范敬宜) 銃編輯이 서울에 왔다. 中國共産黨 機關紙 인민일보는 中國 最高의 權威紙이고, 新聞 製作의 總責任者인 銃編輯은 經營을 맡은 社長과 同格으로 長官級이다.

    판징이 總編輯의 韓國 滯留 期間 그를 案內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서울에서의 日程이 끝난 後 판 銃編輯은 濟州에 가보기를 願했다. 20年 前 일이라 當時 濟州에서의 細細한 日程은 大部分 잊었지만 그를 盆栽藝術원으로 案內한 것은 確實히 記憶한다. 庭園에 展示된 盆栽 作品들을 鑑賞하고, 院長과 對話를 나눴으며, 붓글씨로 訪問 記念 揮毫를 남겼다. 판 銃編輯은 有名한 書藝家이기도 했다. 盆栽藝術원을 訪問한 그날 밤 宿所에서 내게도 붓글씨 作品을 써줬다.

    그 後 20年이 지나는 동안 나는 盆栽藝術원을 잊고 있었다. 성범영 院長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더욱이 盆栽藝術院은 2007年 ‘생각하는 庭園’으로 改名한 터라 關聯 뉴스가 報道돼도 잘 모르고 지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序頭에 言及한 동아일보 記事를 보고 한番 訪問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都大體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中國 敎科書에까지 紹介됐을까. 성범영 院長은 어떤 사람일까.

    盆栽와 自然의 調和



    20年 만에 濟州市 한경면 저지리의 ‘생각하는 庭園’을 찾았다. 마치 옛 城壁처럼 쌓아올린 멋진 돌담부터 印象的이었다. 20年 前의 盆栽藝術원이 盆栽 作品 爲主로 陳列한 平面 庭園이었다면 생각하는 庭園은 立體 庭園이었다. 높고 낮은 돌담과 돌塔, 濟州 特有의 오름 이미지를 具現한 작은 언덕들, 人工瀑布와 蓮못, 자연스러운 曲線으로 이어지는 觀覽로가 잘 調和된 風景으로 다가왔다.

    盆栽는 야트막한 稜線을 따라 지그재그로 設置한 座臺 위에 놓여 있다. 살아 있는 줄기와 죽은 줄기가 함께 어울려 서로를 감고 있는 奇妙한 形態의 注目, 돌과 한 몸이 돼 돌을 껴안은 形態로 자란 느릅나무, 뿌리 部分을 잘라 거꾸로 심고 椄을 붙여 기른 木瓜나무 等 作品 하나하나 絶妙한 姿態를 보여준다.

    땅에 뿌리를 박은 庭園樹도 盆栽와 잘 어우러지도록 配置됐다. 今方이라도 쓰러질 듯 비스듬히 선, 600年쯤 됐다는 香나무 等 定員數 亦是 盆栽 技術로 가꿔 보는 이들의 視線을 머물게 한다. 이뿐이 아니다. 國內外에서 收集했다는 奇妙한 模樣의 돌이며 바위가 곳곳에 놓여 神祕感을 더해준다. 생각하는 庭園의 아름다움은 이 모든 것이 絶妙한 調和를 이루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느낌이 든다.

    생각하는 庭園은 36000㎡(藥 1萬2000坪) 規模로, 正門을 들어서면 觀覽로를 따라 歡迎의 庭園, 靈魂의 庭園, 令監의 庭園, 哲學의 定員, 柑橘의 庭園, 祕密의 庭園, 平和의 庭園으로 이어진다. 各各의 소정원마다 仔細한 解說을 해놓은 것은 勿論, 各 盆栽 作品에 說明文이 함께 展示돼 觀覽客들이 ‘생각하며’ 定員을 鑑賞할 수 있도록 誘導한 것도 이채롭다.

    생각하는 庭園의 아름다운 姿態 못지않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곳을 訪問한 著名人士들의 記念寫眞을 모아놓은 展示室이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前 國家主席, 주룽지 前 總理, 리자오싱 外交部長, 츠下오텐 國防部長 等 中國의 前·現職 長官, 地方政府 指導者, 中國 有數의 博物館長, 美術館長, ‘붉은수수밭’의 作家 모옌(莫言) 等 文化藝術界 名士들이 網羅돼 있었다. 시진핑 現 國家主席은 저장省 書記 時節 訪問했고, 北韓 김용순 西紀의 모습도 보였다. 勿論 中國人 以外에 世界 各國의 有名人士와 盆栽專門家들도 눈에 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곳에 中國 指導部 人士들이 앞다퉈 몰려온 것일까. 성범영 院長의 說明을 듣고 나니 비로소 疑問이 풀렸다. 20年 前 10月 판징이 人民日報 銃編輯이 이곳을 다녀간 뒤 新甁賣官機(新病梅館記)라는 글을 써서 인민일보에 揭載한 것이 發端이 됐다.

    나무를 더 强靭하게

    그는 이 글에서 “…이처럼 千態萬象의 많은 盆栽를 보고 나니 盆栽에 關한 從前의 내 觀點이 크게 달라졌다. 盆栽에 關한 나의 보잘것없는 知識은 어릴 적 공즈전의 ‘甁賣官機’를 읽고 난 後 腦裏에 稀微하게 남아 있는 것이었다”며 性 院長과의 對話를 통해 盆栽는 나무를 오히려 强靭하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가 追求하는 아름다움에까지 到達할 수 있는 藝術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强調했다. “盆栽를 기르는 일이 나무를 괴롭히는 일이라면 그 나무는 일찍 죽었어야 한다. 하지만 나무들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制限된 空間에서 生存해내고 더 훌륭하게 살아가는 法을 攄得해 우리가 追求하는 아름다움의 境地에 到達했다”는 性 院長의 說明에 共感한 것이다.

    판 銃編輯이 읽었다는 ‘甁賣官機’는 淸나라 때의 有名한 作家 龔自珍(공自珍)이 쓴 글로, “곧은 것을 찍어내고 촘촘한 것을 쳐내고, 바로 선 것을 솎아내게 하여, 梅花를 일찍 죽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이라고 盆栽를 非難하는 內容이다. 이 글은 當時 淸나라 權力層이 百姓 個個人의 個性을 抹殺해 입맛에 맞는 人物로 만들어가려는 意圖를 批判한 것이기도 했다. 판징이 總編輯의 ‘新甁賣官機’는 盆栽의 發祥地 中國에서 盆栽 文化의 復權(復權) 信號彈이 됐다. 많은 中國人이 龔自珍의 ‘甁賣官機’ 以後 비딱하게만 보던 盆栽에 對한 認識을 바꾸게 됐다는 것이다.

    ‘新甁賣官機’는 1995年 11月 17日子 인민일보에 실렸고, 그날 장쩌민 國家主席이 韓國을 公式 訪問했다. 張 主席은 訪韓 期間 中 濟州로 와 盆栽藝術원을 찾았다. 張 主席은 展示된 盆栽를 一一이 살펴가며 受刑(樹形)과 수세(樹勢)를 觀察했고 說明書도 꼼꼼히 읽는 等 關心을 보였다.

    성범영 院長으로부터 盆栽에 對한 仔細한 說明을 듣고 定員을 鑑賞한 張 主席은 歸國 後 幹部들에게 “韓國 濟州島에 있는 盆栽藝術院은 一介 農夫가 政府의 支援 없이 혼자서 世界的인 作品으로 만들어낸 곳이다. 그곳에 가서 開拓精神을 배우라”고 말한 것으로 傳해졌다. 性 院長에 따르면 張 主席의 庭園 訪問은 판징이 銃編輯이 다녀간 뒤 主席에게 報告해 決定됐다고 한다.

    “가서 開拓精神을 배우라”

    인민일보에 ‘新甁賣官機’가 실리고, 장쩌민 主席이 盆栽藝術원을 訪問하자 성범영 院長과 그의 盆栽庭園은 瞬息間에 中國에서 有名稅를 타게 됐다. 國家 指導級 人士들부터 一般人에 이르기까지 中國人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各種 言論媒體마다 探訪 記事를 싣기에 이르렀다. 人民日報에만 6次例나 報道된 것만 봐도 中國人의 關心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只今까지 다녀간 中國의 鄭關係 高位職 人事만 6萬餘 名으로 推算된다.

    이렇게 성범영 院長은 中國에서 有名人士가 됐다. 中國의 各 機關이나 大學 等에서 講演 要請이 殺到했고, 이에 따라 性 院長은 바쁘게 中國을 드나들어야 했다. 只今까지 中國 訪問回數만 100次例가 넘고 많은 中國人, 特히 文化藝術界 人士들과 깊은 交分을 맺게 된다. 性 院長이 中國 知人들로부터 記念으로 받은 글과 그림만도 1000餘 點에 達한다.

    性 院長과 그의 생각하는 庭園이 中國에 紹介된 지 20年이 된 올해에는 마침내 敎科書에 登載됐다. 中3 ‘歷史와 社會’ 敎科書 下卷 第5單元에 韓國의 發展相을 紹介하면서 韓國人 ‘民族精神의 戰犯’으로 性 院長을 擧論했다.

    “성범영은 예전에 서울의 한 셔츠 會社 社長이었다. 1963年 그는 처음으로 濟州島에 발을 디뎠다. 日本 植民統治의 掠奪과 搾取가 남긴 荒凉한 민둥山을 바라보며 그는 都市生活을 버리고 濟州島를 開墾하기로 決心했다. 濟州島는 火山섬으로 돌이 많고 흙이 적다. 물도 電氣도 없는 초라한 居住 與件 속에서 성범영은 荒蕪地를 開墾하고 나무를 심었다. 20餘 年 동안 그는 모두 15萬t의 돌과 흙을 運搬했다. 나날이 다달이,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1992年 마침내 全體 面積 3萬餘 ㎡의 定員을 열었다.

    開拓進取 堅忍不拔 自强不息

    장쩌민 주석도 감탄한 ‘현대판 우공(愚公)’

    성범영 院長의 事緣이 실린 中國 敎科書.

    성범영은 一介 農夫의 힘으로 오랜 生命의 時間을 들여 盆栽園-생각하는 定員을 造成했다. 그가 奮鬪努力하던 歷程은 공교롭게도 ‘漢江의 奇跡’과 同時에 이뤄졌으며, 성범영이란 이름은 韓國人의 開拓進取(開拓進取), 堅忍不拔(堅忍不拔), 自强不息(自强不息)의 象徵이 됐다.”

    性 院長이 실린 敎科書는 올해 2學期부터 一齊히 中國 全域의 中學校에 配布됐고, 5000萬 名이 넘는 學生이 배우고 있는 것으로 推算된다. 小說家 이호철 氏는 雜誌 ‘좋은 생각’에 寄稿한 글에서 中國 指導層이 人民에게 模範的인 事例를 提示하려는 意圖에서 性 院長을 注目한 것으로 分析하기도 했다. 過去 마오쩌둥 時代에는 理想的인 勞動英雄으로 뇌봉이라는 勤勞者를 내세웠으나, 장쩌민 政府에서는 그에 匹敵할 만한 人物을 찾아내지 못하다가 濟州島에 와서 성범영을 만나 ‘이 사람이다!’ 하고 落點했다는 것이다.

    성범영의 생각하는 庭園이 이처럼 엄청난 反響을 불러일으킨 까닭은 單純히 盆栽 技術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盆栽 自體만 놓고 보면 이곳이 아니어도 멋진 盆栽 作品은 흔하다고 할 수 있다. 性 院長 自身도 “世界 最高의 아름다운 庭園이라고 稱讚들을 하지만, 盆栽만 놓고 보면 事實 부끄러운 點도 많다. 香나무 盆栽만 하더라도 日本에는 數十億 원을 呼價하는 作品도 많지만 우리 庭園에는 그런 高價의 盆栽가 없다. 소나무 盆栽도 우리 庭園에 數億 원짜리는 없다. 代身 木瓜 盆栽나 韓國香나무는 우리 것이 어디에 내놔도 遜色없다고 본다. 盆栽와 庭園樹와 돌과 오름이 絶妙하게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構圖로 만들어진 盆栽庭園은 우리가 唯一할 것이다”라고 自評한다.

    筆者 亦是 생각하는 定員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은 盆栽 作品의 뛰어난 美的 成就와 함께 庭園을 이루는 各 要素들이 아름다운 調和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에 더해 近 50年에 걸쳐 荒蕪地를 樂土로 바꾼 성범영 院長의 不屈의 開拓精神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생각하는 定員이 주는 感動의 9割은 눈에 보이는 作品보다, 이를 만들어낸 피와 땀과 눈물의 歷史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쯤 해서 庭園 開拓의 스토리를 들어보자.

    濟州에 魅了되다

    장쩌민 주석도 감탄한 ‘현대판 우공(愚公)’

    1998年 濟州島에 와서 생각하는 庭園을 둘러본 장쩌민 中國 國家主席. 寫眞提供·생각하는 庭園

    京畿道 龍仁이 故鄕인 성범영 院長은 어릴 때부터 나무와 시골을 좋아했다. 故鄕을 떠나 서울에서 學校를 다니면서도 틈만 나면 近郊의 花園을 찾아다녔고, 盆栽를 보고 나서는 魅力을 느껴 當時로서는 드문 盆栽園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花盆에 작은 나무가 오목조목 섬세하게 가꿔져 있는 것이 무척이나 新奇하고 아름다워 보여 나중에 나무를 기르며 살고 싶다는 漠然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1962年, 軍 除隊 後 1年이 지난 어느 날 靑年 성범영은 라디오 座談 放送을 듣게 된다. 濟州島를 訪問하고 돌아온 大學敎授들이 出演해 漢拏山의 秀麗한 景觀과 천지연 瀑布의 雄壯함, 四철 푸른 常綠樹 等等 아름다운 濟州島에 對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瞬間 문득 軍隊에서 만난 濟州 出身 親舊를 떠올렸다. 틈만 나면 故鄕 濟州島 이야기를 해준 그 親舊 德에 한 番도 가본 적 없는 濟州島가 親近하게 느껴졌는데, 그 放送을 들으니 親舊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汽車를 타고 木浦로 내려가 하루를 묵고 濟州道行 連絡船을 탔다. 波濤에 시달린 끝에 濟州港에 내리자 初겨울인데도 푸른 잎이 鬱蒼한 常綠樹들이 보였고 올망졸망한 돌담을 끼고 파랗게 자라는 菜蔬, 처음 보는 蜜柑나무에 노랗게 달린 橘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親舊가 사는 저지리는 電氣도 首都도 들어오지 않는 奧地였다. 親舊와 함께 濟州島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濟州의 異國的인 環境에 魅了된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이곳에서 農事짓고 나무도 가꾸면서 살고 싶다는 漠然한 생각이 들었다.

    쇠망치로 돌 깨며 開墾

    다시 서울로 올라온 성범영은 南大門市場에서 장사를 始作했다. 露店을 열어 몇 가지의 옷을 팔았다. 그렇게 1年 半쯤 지나 돈이 若干 모이자 이番에는 專門性을 갖춘 男性服을 取扱해보기로 作定하고 와이셔츠에 매달렸다. 未濟 와이셔츠를 求해다가 國産과 比較하는 等 品質 좋은 國産 와이셔츠 만들기에 心血을 기울였다. 그렇게 奔走하게 와이셔츠에 매달리던 그에게 濟州道 親舊에게서 便紙가 왔다. 1500坪 程度의 밀감나무밭을 사지 않겠느냐는 內容이었다. 未來를 위해 貯蓄한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다 털어 그 땅을 샀다. 그가 저지리에 산 最初의 땅이었다.

    와이셔츠 事業은 繁昌一路를 걸었다. 단골이 된 駐韓 美8軍 司令官 스틸웰 將軍의 紹介로 駐韓 外國人은 勿論, 國務委員들을 비롯해 靑瓦臺 職員들까지 단골이 됐다. 조선호텔 앞을 비롯해 몇 個의 店鋪와 大地를 마련할 수 있었고, 半月工團 附近에 工場 敷地를 買入하기도 했다.

    와이셔츠 工場을 運營하면서도 濟州島를 往來하던 그는 荒蕪地였던 只今의 庭園 땅을 前에 사놓은 밀감나무밭과 바꾸었다. 비록 荒蕪地였지만 넓은 땅에 農場을 만들어 나무 農事를 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돈이 생길 때마다 附近의 땅을 조금씩 買入했다. 濟州道 地圖를 보면 西部地域 넓은 平野의 中心部가 바로 저지리다. 겨울에도 最低氣溫이 零下 2~3℃를 넘지 않을 뿐 아니라, 豫告 없이 부는 沒風(沒風)도 적었다. 大部分의 颱風이 大韓海峽이나 中國으로 빠져나가 被害가 적고 海水가 날아들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장쩌민 주석도 감탄한 ‘현대판 우공(愚公)’

    筆者에게 생각하는 庭園 곳곳을 案內하는 성범영 院長. 조영철 記者

    購入한 땅이 늘어나면서 1965~66年 무렵부터 濟州에 내려와 農場 敷地를 開墾하는 時間이 늘어났다. 저지리의 農場 敷地는 돌이 워낙 많은 땅이라 開墾하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처럼 重裝備가 없었기 때문에 一一이 쇠망치로 때려서 돌을 캐내야 했다. 틈틈이 濟州島 一帶를 다니면서 冬柏나무 같은 庭園樹나 椰子나무 苗木, 蜜柑나무를 사다 심고 蘇鐵 씨앗을 사다가 밭에 播種했다. 그리고 오래前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盆栽에 對한 計劃을 實行에 옮기기로 했다. 소나무, 注目, 윤노리나무, 느릅나무 等을 사다 農場 한쪽에서 盆栽로 기르기 始作한 것이다.

    盆栽를 좋아하기는 했으나 實際로 아는 것이 없던 그는 直接 몸으로 부딪쳐가며 배워나갔다. 밤을 새워가며 盆栽冊을 읽고, 盆栽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모르는 것을 물었다.

    몸으로 盆栽를 배우다

    1974年 성범영은 住民登錄을 아예 濟州島로 옮겼다. 서울에서 벌인 와이셔츠 事業 成功에 그다지 未練을 두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나무와 손이 갈 때마다 푸르게 變해가는 荒蕪地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農莊에는 蜜柑이 열리기 始作했고, 盆栽로 기르기 始作한 나무를 돌보는 재미도 나날이 더해갔다. 좋은 盆栽 素材가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서 求해다 밭에 심고 가지를 다듬어 盆栽木을 만들어갔다. 한여름 밤이면 麻袋를 깔고 앉아 가지를 다듬고 盆栽 形態를 만들기 위해 鐵絲걸이를 했다. 옷 위로 모기떼가 물어대는 통에 온몸이 얼얼해진 적이 한두 番이 아니었다.

    1980年 初에는 서울에서 學校 다니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그의 아내도 濟州로 내려왔다. 이 무렵 그는 重大한 決心을 한다. 그동안 짓고 있던 4000~5000坪 規模의 蜜柑 農事를 抛棄하기로 했다. 當時 濟州島에서는 蜜柑나무를 ‘大學나무’라고 부르며 가장 有望한 農事로 여겼다. 그러나 성범영은 擴張一路를 걷는 蜜柑 農事가 언젠가는 供給過剩으로 인해 ‘蜜柑 波動’을 招來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代身 그가 좋아하는 나무만 기르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막상 蜜柑나무를 뽑아버릴 計劃을 세웠으나 아버지의 反對로 實行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아버지가 서울에 暫時 올라가신 틈을 타서 蜜柑나무 全體를 뽑아버렸다. 濟州島에서 蜜柑나무를 뽑은 最初의 ‘事件’이다. 周圍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精神 나간 놈’이라며 핀잔을 줬다.

    1987年 正初에 한경면腸이 찾아와 “우리 面內에는 이렇다 할 觀光地가 없으니 그동안 키운 盆栽로 觀光農園을 여는 게 어떻겠느냐”고 提案했다. 一旦 拒絶했으나 行政機關의 勸誘는 繼續됐다. 北濟州郡數가 찾아와 다시 勸誘한 데 이어 紅令旗 濟州道知事度 찾아왔다. 도지자가 돌아간 뒤에는 道廳 職員이 찾아와 “제주시 가까운 쪽으로 2萬~3萬 評을 代替해줄 테니 옮겨서 觀光地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提案을 해오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間의 時間이 흐르면서 성범영은 차츰 盆栽를 展示할 庭園을 만드는 일에 마음이 끌리기 始作했다. 그래서 서울의 店鋪와 半月工團 옆에 와이셔츠 輸出 工場을 짓기 위해 사둔 1萬餘 坪의 敷地를 整理했다. 이때부터 本格的으로 庭園 만들기에 들어갔다. 全國을 돌며 盆栽用 나무를 購入하고, 盆栽가 發達한 日本으로 見學을 다녀오기도 했다.

    ‘두루外’ ‘돌챙이’

    盆栽庭園을 만들 생각은 굳혔으나 專門知識도 不足했고 庭園 設計圖도 없었다. 그러나 專門家의 意見을 傾聽하는 中에 가장 韓國的이면서 濟州道 雰圍氣에 어울리는 盆栽庭園의 輪廓이 머릿속에 그림으로 잡히기 始作했다. 濟州島의 特徵인 오름을 살려서 庭園을 꾸미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始作한 蓮못 工事는 땅을 파는 데만 40餘 日이 걸렸다. 큰 掘鑿機를 動員했는데도 워낙 돌이 많고 단단해 時間이 遲滯됐다. 이어서 파낸 돌을 쌓은 다음 위에다 흙을 1~2m 덮어 야트막한 동산(오름)을 만드는 工事도 進行했다. 돌과 흙을 外部에서 끝도 없이 실어와 땅 위로 쏟아부었다. 오름 形態의 동산을 만들어놓고 나면 마음에 들지 않는 境遇도 생겼다. 動産의 位置를 옮기기 위해 다시 掘鑿機로 돌을 파냈다. 그러면 돌 위에 1~2m 덮은 흙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돌을 다시 파냈기 때문에 그 빈자리로 흙이 다 들어간 것이다. 다시 흙을 求해와 덮어야 했다.

    돌담 工事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庭園의 나무를 保護하려면 時도 때도 없이 부는 濟州의 바람을 막아야 한다. 얕은 돌담은 틈새가 보이도록 쌓으면 되지만, 外壁이 될 높은 돌담은 시멘트로 돌을 接着하면서 높이 쌓아올려야 했다. 돌의 模樣을 一一이 다듬고, 作業臺 위에 올라가 아래서 올려주는 돌을 받아 쌓아나갔다.

    나무 사랑과 信仰의 힘

    草創期에 電氣와 首都도 없이 工事한 期間만 8年. 달 밝은 날은 새벽 2, 3時에도 일어나 돌담을 쌓을 程度로 庭園 造成에 沒頭한 그에게 사람들은 ‘두루外’(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濟州 사투리) 或은 ‘돌챙이’(石手의 濟州 사투리)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허리에 無理가 가지 않을 수 없었고, 크고 작은 負傷이 끊이지 않았다. 性 院長은 盆栽庭園을 만들면서 12次例나 크게 다쳤는데, 그中 手術한 境遇만도 7次例나 된다. 허리에만 3個의 핀이 꽂혀 있다. 兩쪽 어깨와 무릎도 手術해야 했다.

    드디어 1992年 7月 30日, 未完成 狀態에서 서둘러 盆栽藝術원으로 開園했다. 開院 後 國內外의 反應은 뜨거웠다. 장쩌민 中國 國家主席의 訪問 以後 海外의 放送과 新聞에 ‘世界 唯一의 盆栽庭園’이라고 紹介됐다. 世界的으로 有名한 一般 庭園이나 樹木園은 많지만 野外에 造成된 盆栽庭園은 없었기 때문에 盆栽藝術원이 注目을 받았던 것이다.

    성범영 院長은 차츰 希望에 부풀기 始作했다. 더 많은 資金을 投資해 擴張工事를 하고, 돌담도 繼續 쌓고, 돌門도 더 만들고, 全國에서 조경수를 購入해 심었다. 未備한 定員을 하루빨리 整備하고 싶어서 資金을 投資하기에 바빴다.

    好事多魔. 外換危機 寒波가 온 나라를 뒤덮자 訪問客 數가 急激히 줄어들었다. 하루에 10~20名이 채 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1998年 10月 主去來銀行으로부터 競賣處分 通告를 받았다. 投資額의 10%에도 못 미치는 負債 때문이었다. 이곳저곳 銀行門을 두드렸다. 그러나 建物이나 土地가 아닌 살아 있는 植物, 盆栽는 擔保로 잡을 수 없다는 理由로 모든 銀行으로부터 融資申請을 거절당했다. 鑑定評價院에서도 盆栽는 鑑定評價를 할 수 없다고 判定했다. 數年 동안 온갖 精誠을 들여 가꾼 庭園이 荒蕪地 等級으로 評價되는 기막힌 現實 앞에 마주해야 했다.

    庭園은 結局 7年間 남의 손에 넘어갔다가 되찾게 된다. 諦念에 빠져 있던 그에게 庭園의 價値를 제대로 알아본 한 銀行 幹部의 決斷으로 奇跡이 일어난 것이다. 이 期間 그는 어느 때보다 돌담 쌓는 일에 매달렸다. 競賣가 있는 날에도 돌담을 쌓았다. ‘내가 萬若 이곳에서 떠나게 되더라도 돌담을 쌓아두면 나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고는 하던 일을 繼續하게 해달라고 祈禱했다. 難關이 닥칠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나무에 對한 愛情과 信仰의 힘이었다.

    固定觀念 가지치기

    2007年 開院 15周年을 맞아 盆栽藝術원을 생각하는 庭園으로 改名한다. 성범영은 돌 하나 或은 나무 한 그루를 庭園에 놓을 때도 數十 番, 數百 番씩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 그 나무를 놓았을 때 或如 바로 옆에 있는 나무의 빛이 退色하지는 않을지, 庭園 全體의 構圖를 해치지는 않을지, 或은 盆栽 座臺의 높이는 어느 程度로 세워야 하는지를 苦悶해야 하고, 더 나아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었을 때 그 나무가 變化하는 모습까지 一一이 그려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생각과 執念 끝에 完成한 庭園이며 同時에 많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意味에서 생각하는 庭園으로 定했다는 性 院長은 盆栽를 人生에 比喩하기도 한다. “무거운 가지는 時期를 맞춰 適切히 가지치기를 해야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듯이 사람도 생각의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케케묵은 舊時代的 思考에 갇히고 만다”면서 固定觀念이란 가지를 果敢히 쳐내야 南과 疏通할 수 있다고 强調한다.

    생각하는 庭園은 年間 30萬~40萬 名의 觀覽客이 찾는, 濟州島 內 國賓 訪問 1位의 觀光名所다. 그中 約 30%가 外國人이다. 1500餘 點의 盆栽와 1萬餘 그루의 庭園樹를 保有한 大韓民國 ‘民間 庭園 1號’인 생각하는 定員은 또 한 次例 飛上을 꿈꾸고 있다. 周邊 땅을 買入해 博物館이나 美術館을 新築, 世界 各國의 訪問客이 남기고 간 膳物 作品 等을 展示하는 空間으로 活用한다는 構想이다. 與件이 許諾하면 韓中文化藝術센터를 設立해 兩國 間 文化交流의 觸媒가 되게 할 腹案도 갖고 있다.

    中國 指導層 人士를 가장 많이 만난 韓國人이자, 中國人에게 ‘現代版 우공(愚公)’으로 불리는 성범영 院長. 이 글에서는 紙面 制限으로 인해 中國人에게 認定받아 成功한 것으로 그려졌지만, 그의 庭園에는 只今도 世界 各國의 名詞와 盆栽專門家가 끊임없이 찾아와 世上에서 가장 아름다운 庭園이라는 讚辭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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