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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의 評價에는 公訴時效가 없다|신동아

歷史의 評價에는 公訴時效가 없다

興亡盛衰를 비추는 거울 ‘舍監(史鑒)’

  • 金映洙 | 史學者, 中國 史記 專門家

    入力 2015-11-20 16: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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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아닌 歷史 戰爭이 한창이다. ‘歷史敎科書 國定化’가 發端이 됐다. 政府가 “歷史敎科書가 便行됐다”며 다시 쓰겠다고 나선 것이다. 中國 最高의 歷史서 ‘詐欺’에 登場한 最高權力者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바로 歷史 評價다. 먼 後날의 歷史는 現 政府에 對해 어떻게 評價할까.
    中國 歷史上 最高의 名君으로 評價받는 唐 太宗 李世民(李世民)은 누구보다 歷史를 重視한 軍주다. 特히 歷史의 評價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늘 옛 歷史를 工夫하며 自身의 統治行爲를 反省했고, 남의 忠告를 잘 받아들였다.

    그는 統治 期間 내내 나라 다스리는 일을 臣下들과 隔意 없이 相議했다. 그런 德分에 朝廷에서는 누구든 果敢하게 直言하는 風潮가 마치 바람처럼 일어났다. 한 사람에게 權力이 集中된 封建的 專制政治 歷史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李世民은 代身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自己 모습을 보려면 반드시 맑은 거울이 있어야 하고, 君主가 自己 잘못을 알려면 반드시 충직한 臣下에 依支해야 한다(人欲自明, 必須明鏡. 主欲知過, 必藉忠臣).

    이 말은 李世民이 積極的으로 諫言을 求하고 받아들일 姿勢가 돼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臣下들에게 할 말이 있으면 逆鱗(逆鱗) 건드리기를 두려워 말고 勇敢하게 發言할 것을 督勵했다. 또한 帝王과 臣下를 물과 물고기의 關係로 보고, 德行을 함께하고 더불어 天下를 다스리고자 했다.



    制度的으로도 言路(言路)를 保障했다. 大小官員들의 直諫 中에 取할 것은 取하고, 서로 硏究하고 討論하며, 專橫과 廢井을 防止하기 위해 몇 가지 主要한 措置를 取했다. 健全한 論爭과 反駁을 制度的으로 保障하고, 盲目的으로 皇帝의 뜻에 따라 施行하는 데 反對했다. 輿論을 收斂하고 이를 率直하게 傳達하는 諫官(諫官)을 重視했으며, 職間과 誹謗을 冷徹하게 區別했다. 그래서 그가 統治하던 時期인 定款(貞觀) 年間에는 輿論을 傳達하고 直言하는 任務를 맡은 諫官의 數가 대단히 많았다. 그中에서도 가장 傑出한 사람이 魏徵(魏徵)이다.

    唐 太宗은 卽位 初에 隨時로 魏徵을 寢室까지 불러 治國의 得失에 對해 물었다. 몇 年 안 되는 짧은 期間 魏徵은 200餘 件에 達하는 事案을 諫言해 太宗으로부터 큰 稱讚과 賞을 받았다. 魏徵은 거리낌 없이 職間하고 理致에 따라 爭論했으며, 때로는 皇帝의 體面도 살피지 않아 黨 太宗을 몹시 難處하게 만들기도 했다.

    역사의 평가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中國 시안市 唐나라 거리의 造形物. 唐 太宗은 中國 歷史上 最高의 名君으로 稱頌받는다. 唐 太宗이 ‘印鑑(人鑒)’이라 부르며 自身의 言行을 바로잡는 거울로 삼은 魏徵.

    銅鑒 史鑒 人鑒

    어느 날 黨 太宗이 아름다운 새매 한 마리를 가지고 놀다가 멀리서 魏徵이 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품속에 숨겼다. 魏徵이 알면 한소리 할까 怯이 났기 때문이다. 魏徵은 이를 알고 일부러 時間을 끌면서 오랫동안 報告를 올렸다. 唐 太宗은 默默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바람에 품 안에 있던 새매가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 그런데도 魏徵은 諫言을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唐 太宗은 火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한番은 朝會를 마친 唐 太宗이 씩씩거리며 後宮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이 늙은이를 죽이고 말겠다”며 火를 냈다. 將順皇后가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太宗은 “魏徵이 每番 朝廷에서 나를 辱보이지 뭡니까”라고 했다. 皇后가 물러나 큰 行事 때나 입는 阻卜(朝服)을 갖춰 입고 뜰에 나와 서 있었다. 太宗이 놀라 理由를 물었더니 皇后는 “臣妾은 君主가 밝으면 臣下가 곧다고 들었습니다. 魏徵이 그렇게 곧은 것은 陛下께서 밝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臣妾이 陛下께 어찌 減縮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魏徵의 剛直함을 肯定하는 同時에 太宗의 英明함을 稱頌하는 이 말에 그는 노여움을 풀고 오히려 기뻐했다.

    唐 太宗은 自身도 잘못할 수 있다는 認識이 분명했다. 그는 自身에게 3個의 거울이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卽, 衣冠을 바르게 할 수 있는 同居蔚 同感(銅鑒), 興亡盛衰의 理致를 깨닫게 하는 歷史의 거울 舍監(史鑒), 直言으로 自身의 言行과 그 得失을 밝혀주는 ‘사람 거울’인 印鑑(人鑒)이 그것이었다. 이를 黨 太宗의 삼감(三鑒)이라 한다.

    後날 魏徵이 世上을 떠나자 太宗은 “同感은 모습을 비춰주고, 印鑑은 得失을 알 수 있게 하는데 魏徵이 世上을 떴으니 짐은 거울 하나를 잃었도다”라며 슬퍼했다. 나머지 하나, 歷史는 興亡盛衰의 理致와 統治의 잘잘못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래서 賢明하고 分別力 있는 統治者들은 例外 없이 歷史의 評價를 두려워했다.

    무測天(武則天)은 中國 歷史上 最初이자 唯一無二한 女皇帝다. 우리에겐 ‘則天武后’로 알려져 있다. 그는 剛한 權力慾과 能手能爛한 處身, 그리고 緻密한 政治的 手腕으로 期於이 黨 王朝를 멸망시키고 州(周) 王朝를 세웠다. 中國 歷史에서는 大體로 무測天의 株 王朝를 그냥 지나친다. 그가 죽은 뒤 바로 黨 王朝가 復舊됐기 때문이다. 一角에선 黨 王朝의 歷史에 무測天을 包含한다.

    무測天의 破格 統治

    무測天은 매우 殘忍하고 邪惡한 女性으로 描寫돼왔다. 어느 程度 事實이다. 그는 天壽(天壽) 元年인 690年 皇帝 자리에 오른 뒤부터 신룡(神龍) 元年인 705年 자리에서 밀려 내려오기까지 15年 동안 補佐에 앉아 執政했다. 꿈에도 그리던 目的을 達成한 그는 다른 統治者들과 마찬가지로 腐敗와 享樂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人心을 잃는 일도 적지 않게 저질렀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統治와 政治行爲는 積極的, 進取的이었다. 破格的인 人材 登用과 言路 開放, 잘못을 고칠 줄 아는 姿勢 等이 돋보였다. 均田制를 널리 實施하고 農業을 발전시킨 業績도 있고, 對外的으로는 邊方의 憂患을 防禦하며 나라를 안정시킴으로써 輔國安民의 思想을 實踐에 옮겼다.

    무測天은 皇帝에 오른 直後 政權의 安定을 다지기 위해 國家를 안정시키는 政策을 잇달아 制定하고 施行했다. 그 첫걸음이 人材를 널리 求해 起用하는 ‘狂草現在(廣招賢才)’다. 이를 위해 그는 從來의 틀을 果敢하게 깨고 새로운 人材 登用制度를 樹立했다.

    먼저 展示(殿試)라는 試驗制度를 導入했다. 再醮 元年인 690年 2月 14日, 그는 首都 長安(長安)에서 처음으로 前例가 없는 大規模 展示를 擧行했다. 全國에서 올라온 人材들이 試驗場을 가득 메웠고, 그가 直接 나서서 試驗을 主管했다. 스스로를 推薦하는 ‘자거(自擧)’ 制度도 처음 만들었다. 이 制度가 施行됨으로써 天下의 人材들이 出身을 不問하고 모두 能力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推薦했고, 合格하면 바로 採用됐다.

    有能한 武官을 選拔하기 위한 ‘武擧(武擧)’ 制度와 管理를 뽑는 ‘試官(試官)’ 制度를 맨 처음 始作한 것도 무測天이다. 이 밖에도 下層民 中에서 有能한 人材를 拔擢하고, 製菓(制科)를 開設해 특별한 能力이 있는 사람들을 뽑았다. 官員들에게는 有能한 人物 推薦을 奬勵했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無測天의 이러한 人材 等溶劑는 執權하는 동안 朝廷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原動力이 됐다. 새로운 얼굴이 쉴 새 없이 朝廷에 供給됨으로써 宰相 적인걸(狄仁杰) 같은 傑出한 文武 大臣이 出現할 수 있었다.

    “宰相의 過失이로다!”

    무測天이 人材 登用만큼 重要하게 여긴 것은 言路 開放이다. 各 分野의 專門家로부터 意見을 듣고 自身의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좋은 意見은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狂槪言로(廣開言路)’ 政策이다. 그의 그릇 크기를 엿볼 수 있는 事例들이 있다.

    이경업(李敬業)李 叛亂을 일으켰을 때다. 무測天은 自身을 攻擊하는 檄文을 보고 속으로는 熱불이 났지만,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냐고 泰然하게 물었다. 임해승(臨海丞)으로 左遷된 元來 長安의 主婦(主簿) 駱賓王(駱賓王)이라고 누군가가 報告하자 그는 아쉽다는 듯 “이는 宰相의 過失이로다! 어찌하여 이렇듯 傑出한 人材가 묻혀 있단 말인가”라며 혀를 찼다.

    諫官 駐京칙(周敬則)은 무測天에게 글을 올려 苛酷한 法보다는 恩惠와 德을 베풀어 天下 人民이 걱정 없이 便히 生業에 從事할 수 있게 하라고 忠告했다. 心氣를 건드리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無測天은 그의 意見을 받아들이는 한便 숱한 罪를 지은 酷吏 酒興(周興)과 내준신(來俊臣) 等은 果敢히 處刑함으로써 朝野의 拍手를 받았다. 또한 駐京칙을 宰相으로 拔擢해 重要한 任務를 맡겼다.

    무測天은 科學과 農業技術 等에도 關心이 많았다. 唐나라 때는 農業이 國民經濟를 떠받치는 唯一한 經濟的 土臺였다. 唐 太宗 李世民은 成人 男子에게 일정한 땅을 나눠주고 一定 期間 耕作하게 하는 均田制를 통해 農業 發展을 推進했다. 그런데 무測天이 執權할 무렵엔 均田制의 弊害가 極에 達했다. 土豪나 士族들의 土地 兼倂과 投機가 氣勝을 부리면서 農民은 땅을 잃고 逃亡者 身世로 轉落했다.

    卽位한 무測天은 卽刻 土地 賣買를 禁止하는 措置를 取해 豪族의 土地 兼倂을 막았다. 아울러 새로 土地를 나눠주고 稅金을 줄이는 等 各種 政策을 통해 도망간 農民을 生産 現場으로 복귀시켰다. 各級 官員에게는 農業을 特別히 重視하라는 點을 强調하면서 農業에 妨害되는 모든 活動을 嚴格하게 禁止하는 한便, 耕作地 增減과 農作物 收穫量 等을 賞罰의 根據로 삼았다. 德分에 農業은 빠른 速度로 發展하고 社會는 安定을 되찾았다.

    무測天은 國土를 穩全히 保全하고 國境을 便하게 하는 데 많은 注意를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는 登極 2年째 되던 해 序奏都督이자 名將으로 이름난 黨休耕(唐休璟)으로 하여금 吐蕃(吐藩)에 20年 넘게 侵犯당한 ‘岸曙(安西)의 4個 陳’을 收復해 西部 變更에 對한 근심을 解消했다. 그 後로도 여러 次例 吐蕃의 侵入을 물리치는 한便 井州(只今의 칭하이)에 都護府를 두고 안서都護府와 함께 천산 南北을 나눠 管轄했다.

    역사의 평가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中國 最初이자 唯一無二한 女皇帝 무測天(왼쪽). 무測天 時代의 傑出한 人物 적인걸은 무測天이 直接 拔擢한 人材다.

    ‘皇后’로 돌아간 ‘皇帝’

    軍事 方面에서 무測天은 自營 農民으로 兵士를 充當하는 이른바 府兵制를 繼承하는 한便 이를 더 發展시켰다. 그는 軍事力 備蓄에 重點을 뒀으며, 長水 等 軍事에 必要한 人材를 기르는 데 特別히 注意를 기울였다. 德分에 外足을 물리치고 疆土를 保全한 傑出한 장수가 여럿 나왔다. 歷史書에 登場하는 有名한 적인걸, 정무정, 黨休耕, 왕효걸, 곽원진, 흑치상지(백제 出身), 陪行檢 等이 代表的인 人物이다.

    705年 무測天은 病으로 世上을 떠났다. 享年 82歲였다. 一帶를 風靡한 통 크고 남다른 策略을 所有한 風雲의 女傑은 죽음을 앞두고 놀라운 決斷을 내렸다. 그는 遺言을 통해 自身의 皇帝 稱號를 떼내고 ‘測天大盛況後(則天大聖皇后)’로 부르게 하라고 宣布했다. 至高無常한 皇帝로서가 아닌 皇后의 身分으로 돌아간 것이다. 皇帝로 남을 境遇 歷史가 自身을 어떻게 評價할지가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무測天이 죽기 前날 大臣들은 뒷일을 準備하느라 분주했는데, 무엇보다 碑文을 놓고 한바탕 攻防이 벌어졌다. 그에 對한 評價가 爭點이었다. 稱頌하자는 臣下들, 功過(功過)를 同時에 記錄해야 한다는 臣下들, 簒奪의 罪를 물어야 한다는 臣下들 사이에서 論爭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무測天의 心境은 錯雜했다. 죽음의 그림자를 붙들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그는 “碑石은 세우되 內容은 記錄하지 말라”고 했다. 後代에 評價를 맡기자는 뜻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碑石은 ‘無慈悲(無字碑)’로 남게 됐다. 죽는 瞬間까지 참으로 冷靜하게 狀況을 判斷한 사람이었다. 歷史上 수많은 帝王과 長上이 죽기 前 自身의 功德을 잊지 못해 碑石에다 自己 一生과 功을 새기도록 했다. 그러나 무測天은 글字가 없는 無慈悲를 세우라고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참으로 非凡한 政治家임을 잘 보여주는 事實이 아닐 수 없다. 自身에 對한 評價를 歷史에 미룬 그 膽大함이란!

    鐵腕의 女皇帝로서 强力한 카리스마와 統治力을 發揮하며 無所不爲의 權力을 휘두른 그이지만 後代의 歷史的 評價만큼은 두려웠던 것이다. 아무리 莫强한 權力도 아무리 어리석은 統治者라도 歷史 위에 君臨할 수 없다는 事實을 그는 잘 알았다.

    역사의 평가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무測天의 무덤 健陵 앞의 ‘無慈悲’(왼쪽). 岳飛의 等에 ‘精忠報國’ 네 글字를 바늘로 새기는 그의 어머니.

    ‘或 있을지도 모를 謀反罪’

    淸나라 乾隆 年間(1736~95年)에 壯元及第한 杭州 出身의 한 젊은이가 宋나라 때 名匠 岳飛(岳飛)의 무덤인 惡王墓(岳王墓)를 찾아 다음과 같은 詩를 남겼다.

    사람들은 宋나라 以後부터 膾(檜)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只今 그 무덤 앞에서 陳(秦)이라는 城에 慘澹해하는구나.

    1141年 名匠 岳飛가 風波情(風波亭)에서 아들 惡雲(岳雲)과 함께 抑鬱하게 처형당한 지 約 600年이 지난 淸나라 때, 壯元及第한 젊은이가 어째서 岳飛의 무덤을 찾아 이런 詩를 읊었을까. 이 젊은이는 岳飛를 謀陷해 죽이는 데 앞장선 奸臣 秦檜(秦檜)의 後孫 陣間千(秦澗泉)이었다. 陣間천은 岳飛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歷史의 臺諫神이자 自身의 祖上인 津灰의 夫婦像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羞恥心과 感情을 참지 못하고 이런 글로 自身의 慘澹한 心境을 傳한 것이다.

    紹興(紹興) 3年(1133) 宋나라 岳飛는 樂歌軍(岳家軍)을 이끌고 빼앗긴 땅과 性을 次例로 收復해 金나라의 肝膽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特히 주선진(朱仙鎭) 戰鬪에서 大勝함으로써 金나라 軍의 士氣를 크게 떨어뜨렸다. 金나라의 將帥 金올술(金兀術)은 싸울 意欲을 잃고 그저 安全하게 北方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岳飛는 “여러분과 함께 痛快하게 마시리라”며 곧장 金나라 首都 黃龍部(黃龍府)로 突進하리라 盟誓했다. 當時 百姓들은 스스로 武器와 食糧 따위를 챙겨 “山을 뒤흔들기는 쉬워도 樂歌君을 뒤흔들기는 어렵다”며 너나없이 樂歌君을 따라 參戰했다.

    津灰는 金나라 軍隊가 무너지면 只今까지 다져온 自身의 權力 基盤에 影響을 미치지 않을까 두려웠다. 또한 金나라에 잡혀간 徽宗(徽宗)과 欽宗(欽宗)李 되돌아오는 날에는 千辛萬苦 끝에 얻어놓은 皇帝 高宗(高宗)의 寵愛가 달아날까 두려웠으며, 岳飛가 自身의 名聲과 地位를 뛰어넘을까 怯이 났다. 津灰는 高宗을 慫慂했다. 非常事態 때나 내리는 12度(道) 錦貝(金牌)까지 發動해 岳飛의 回軍을 재촉했다. 結局 宋나라가 10年 공들여 쌓은 塔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역사의 평가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岳飛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린 채 歷史와 民衆에 永遠히 謝罪하는 奸臣 秦檜 夫婦像.

    樂歌軍이 回軍한다는 消息은 발 없는 말이 千 里를 가듯 瞬息間에 퍼져나갔다. 이 消息을 들은 百姓들은 男女老少 가릴 것 없이 뛰쳐나와 惡가群의 回軍을 막아섰다. 百姓들은 岳飛의 말을 붙들고 失性한 목소리로 痛哭했다.

    “우리가 食糧을 나르며 樂歌君을 맞은 것을 金나라 盜賊들이 낱낱이 알고 있습니다. 한데 只今 相公께서 떠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岳飛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岳飛는 回軍하자마자 兵權을 박탈당했다. 津灰는 이 程度에 滿足하지 않았다. 또다시 이런 危機가 닥칠까봐 岳飛에게 이른바 ‘幕授乳(莫須有)’, 卽 ‘或 있을지도 모르는’ (捏造한) 謀反罪를 씌워 處刑했다. 이때 岳飛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歷史는 곧 ‘뒤끝’

    或者는 岳飛의 ‘衝(忠)’에 異議를 提起하며, 그의 忠誠은 어리석은 忠誠이었다고 한다. 그가 宋나라 軍隊의 電力도 생각하지 않고 强勁 對應만을 固執하는 바람에 宋나라 百姓이 크게 犧牲됐다는 理由에서다. 그러나 民衆은 如前히 끊임없이 岳飛를 稱頌하며 一部 史學者의 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岳飛의 정충보局(精忠報國)韓 ‘衝’李 그저 調整에 對한 忠誠이 아니라 祖國과 民衆에 對한 忠誠이었기 때문이다.

    津灰는 송 高宗의 强化 路線에 忠實했다. 그런데 왜 眞會에 對해서는 죽어 썩어서도 世上의 非難이 그치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그가 수많은 民衆의 生活은 아랑곳하지 않고, 姑從이라는 君主 個人의 利益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歷史와 民衆은 永遠히, 그리고 斷乎하게 그를 千古의 艱辛이자 萬歲의 罪人으로 斷定하는 것이다.

    風波亭에서 岳飛는 高宗과 津灰의 狡猾한 웃음을 뒤로한 채 孤獨하게 죽어갔다. 하지만 歷史는 그의 죽음을 또렷이 記憶했다가 斷乎한 審判을 내렸다. 歷史는 그 自體로 ‘뒤끝’이다. 忠臣 岳飛는 처형당하고 奸臣 津灰는 富貴榮華를 누렸지만, 歷史는 津灰의 罪狀을 잊지 않고 結局 그 夫婦의 像을 만들어 岳飛의 무덤 앞에다 무릎을 꿇려 놓았다. 永遠히 그 자리에서 岳飛에게 謝罪하고 歷史에 謝罪하고 民衆에게 謝罪하라는 嚴罰人 셈이다. 歷史의 評價에 ‘公訴時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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