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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도 大韓民國 國父 1948年 8·15는 建國일”|新東亞

“金九도 大韓民國 國父 1948年 8·15는 建國일”

인터뷰 - ‘李承晩과 金九’ 硏究 權威者 손세일

  • 송홍근 記者 | carrot@donga.com

    入力 2015-11-18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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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臨時政府 德에 大韓民國 正統性 가져
    • ‘복국(復國) 後 建國(建國)’李 臨時政府 目標
    • 李承晩의 親日派 起用은 重用 아닌 活用
    “김구도 대한민국 國父 1948년 8·15는 건국일”

    박해윤 記者

    손세일(80) 前 議員이 出刊한 ‘李承晩과 金九’는 巨帙(巨帙)이다. 200字 原稿紙 2萬3000張 分量, 前 7卷, 卷當 800쪽에 達한다. 14年 동안 우리 近·現代史의 두 巨人 李承晩과 金九에 穿鑿했다. “畢生의 作業”(손세일)이다. “韓國 憲政史 硏究의 先驅的 成果”(노재봉 서울대 名譽敎授) “大韓民國 建國史 硏究의 金字塔”(김종심 前 동아일보 論說室長)이라는 讚辭가 나왔다.

    雩南(雩南) 李承晩(1875~1965)과 白凡(白凡) 金九(1876~1949)는 우리 近·現代史의 두 기둥. 歷史敎科書 國定化를 두고 論駁이 일면서 이들 두 巨人도 論爭 對象이 됐다. 李承晩과 金九를 解釋하는 것은 두 사람이 산 時代를 읽는 것이다. 歷史는 集團의 記憶이다. 記憶을 둘러싼 鬪爭이 激하다. 입으로 다투는 이들은 擇一(擇一)을 强要한다.

    大韓民國의 두 國父

    ‘李承晩과 金九’가 쓰인 서울 麻浦區 執筆室은 近·現代史 報告(寶庫)다. 2萬3000張을 써내면서 읽은 資料가 가득하다. 그는 눈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텍스트를 읽고, 腦로 體系를 세우고 씨줄과 날줄을 엮은 뒤, 손으로 歷史를 써냈다.

    ▼ 李承晩을 强調해서 現代史를 읽는 이들은 金九를 깎아내리는 反面 白凡을 强調하는 이들은 우남을 貶下한다. 이런 見解差는 現實 政治에도 影響을 미친다.



    孫 前 議員은 이 質問에 말로 答하지 않고 글로 代身했다.

    ‘李承晩과 金九는 이 나라 歷史上 처음으로 近代的 國民國家를 創建한 政治 指導者다. 그런 뜻으로 한 나라에 國富(國父)는 한 사람뿐이며 우리나라 國富는 李承晩이라면서 自身이 國父로 불리기를 斷乎히 拒否한 金九의 謙讓에도 不拘하고 李承晩과 金九는 大韓民國의 두 國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李承晩과 金九’ 1卷 序說(나라를 사랑하는 方法)의 첫마디가 ‘李承晩과 金九는 大韓民國의 두 國富’라는 것이다. 冊이 出刊된 後 李承晩 支持者들이 國富는 한 사람인데, 왜 金九를 擧論하느냐고 抗議했다. 李承晩, 金九 支持者가 軋轢을 가질 要因이 있기는 하다. 白凡의 不幸한 逝去가 그中 하나다. 두 陣營이 事實이 아닌 것을 動員해 한 사람을 批判하는 態度는 바람직하지 않다. 두 勢力을 화해시키는 게 내 任務다.”

    ▼ 이인호 서울대 名譽敎授(KBS 理事長) 等은 “白凡을 大韓民國 建國의 功勞者로서 擧論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大韓民國 政府 樹立에 參與하지 않고 南北合作政府를 圖謀했다는 게 理由다.

    “白凡이 어떻게 大韓民國 建國과 無關한가. 金九가 없었더라도 大韓民國이 建國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臨時政府는 1948年 大韓民國 建國에 至大한 影響을 끼쳤으며 白凡이 있었기에 臨時政府가 維持됐다. 臨時政府 德分에 大韓民國에 適法性(legitimacy)이 있는 것이다.”

    大韓民國 憲法 前文에는 ‘3·1運動으로 建立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法統과 不義에 抗拒한 4·19 民主理念을 繼承하고…’라고 돼 있다. 北韓은 臨時政府를 認定하지 않는다. 愚男은 大韓民國臨時政府의 初代 大統領, 白凡은 마지막 註釋이다.

    臨政 法統 强調한 李承晩

    “白凡이 臨時政府를 지켜내지 않았다면 正統性과 關聯해 複雜한 問題가 생겼을 것이다. 民族主義, 社會主義 勢力이 聯立 形態로 있다가 1920年代 中盤부터 左翼들은 臨時政府에서 떨어져 나갔다. 臨時政府는 艱難辛苦(艱難辛苦)의 歲月을 견뎌냈다. 白凡의 指導力 德分이다. 獨立戰爭, 게릴라전이 어려운 狀況에서 最後의 手段으로 義烈鬪爭(義烈鬪爭)을 벌였다. 李奉昌, 尹奉吉의 목숨을 건 義擧도 白凡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可能했다.”

    ▼ 歷史學界가 對立한다. 保守學者 多數는 1948年 8月 15日 大韓民國이 ‘建國’됐다고 본다. 臨時政府는 思想的 기틀을 마련했을 뿐 近代國家를 세운 것은 1948年이라는 것이다. 進步學者 多數는 1919年 세워진 臨時政府를 建國으로 봐야 獨立運動을 繼承한 나라가 된다고 여긴다. 李承晩은 分斷政府를 ‘樹立’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臨時政府는 1941年 11月 建國 綱領을 發表한다. 이 綱領에서 建國 段階를 設定해놓았다. 綱領에 따르면 光復軍이 國境을 넘어 本國에 들어가는 것이 복국(復國)이다. 複國旗를 거친 다음 一般選擧를 實施해 議會를 構成한 後 憲法을 만들어 政府를 樹立하는 것을 建國이라고 했다. 當時 ‘建國 作業’ ‘建國 課業’ 等의 表現을 썼다. 要컨대 政府를 樹立하는 것을 建國이라고 規定한 것이다.”

    ▼ 金九가 이끈 臨時政府의 綱領대로라면 1948年 8月 15日이 ‘建國일’이라는 건가.

    “그렇다. 李承晩이 曖昧하게 한 잘못이 있다. 李承晩은 臨時政府의 法統을 强調하면서 年號도 臨時政府의 것으로 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制憲國會가 李承晩의 이 같은 主張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李承晩이 法統이라고 여긴 臨時政府는 (1919年 4月 세운) 漢城臨時政府다.”

    1919年 9月 設立된 상하이臨時政府는 漢城臨時政府, 老齡臨時政府 等을 統合한 것이다. 名目上 漢城臨時政府를 承繼했다. 制憲國會 때 愚男은 漢城臨時政府→상하이臨時政府→大韓民國으로 法統을 主張한 것이다. 政府 樹立 宣布式 때도 懸垂幕에 ‘建國’이 아니라 ‘政府 樹立’이라고 썼다.

    “建國의 法通過 關聯해 大韓民國臨時政府가 들어간 데는 李承晩의 主張이 影響을 미쳤다. 大韓民國臨時政府로 表現됐는데, 李承晩은 漢城臨時政府가 法統이라고 强調한 것이다. 앞서 밝혔듯 金九의 臨時政府는 政府 樹立을 하는 段階를 建國이라고 했다. 政府 樹立이 곧 建國人 것이다. 다만 建國이라는 낱말이 法律 用語가 아닌 것일 뿐이다.”

    論難 끝에 推進이 決定된 國定 歷史敎科書는 進步學界의 反撥을 考慮해 ‘1948年 建國節’이라는 表現을 쓰지 않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1948年 大韓民國 政府 樹立’을 ‘大韓民國 樹立’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李承晩은 徹底한 反日”

    “김구도 대한민국 國父 1948년 8·15는 건국일”

    올해 出刊한 ‘李承晩과 金九’, 1969~70年 ‘신동아’에 連載한 글을 묶은 ‘李承晩과 金九’

    孫 前 議員은 △愛國心 △反日 △反共産主義 △基督敎가 白凡과 愚男의 共通點이라고 말했다.

    “李承晩과 金九는 共産主義와 熾烈하게 對決한 獨立運動家였다. 또한 自由民主主義와 市場經濟 資本主義를 志向했다. 建國 過程에서 李承晩은 國家를 더 重要視했고, 金九는 民族을 더 重要視했다고 評할 수 있다.”

    ▼ 白凡의 南北合作을 통한 統一政府 樹立 主張은….

    “金九의 判斷 錯誤다. 北韓이 같은 民族으로 協商해 얘기가 통하리라고 믿은 것은 失手다. 옛 蘇聯 祕密解除 文書에 1945年 9月 스탈린이 占領地域에 부르주아 聯立政府를 만들라고 指示한 內容이 담겼다. 共産政府를 만들라는 것은 아니었다고 主張하는 左翼學者도 있으나 實狀을 모르는 소리다. 協商으로 이뤄질 게 없었다. 白凡의 誤判이다.”

    ▼ 進步 陣營은 政府 樹立 以後 親日派 淸算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指摘한다.

    “共産黨의 當時 惡宣傳이 그랬다. 李承晩의 思想은 徹底한 反日이다. 그가 쓴 ‘日本 내막기’는 요한계시록의 아마겟돈 槪念을 가져와 美國과 日本의 戰爭을 다룬다. 李承晩에 따르면 日本은 ‘악(惡)’이다. 惡과 싸우는데 反轉이나 平和를 말하는 이는 第5열이라고 主張한다.

    李承晩은 親日派가 大韓民國의 主流나 建國의 主導 勢力이 되게 한 적이 없다. 大韓民國의 初代 國務總理는 光復軍 出身의 이범석이다. 初代 副統領 李始榮은 처음부터 끝까지 臨時政府를 떠나지 않은 人物이다.

    親日派를 建國의 主導 勢力이나 主流로 삼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다. 技術者로서 動員한 사람이 있긴 하다. 노덕술이 代表的이다. 共産黨 잡는 技術者로서 功을 세워 自身의 罪를 갚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暗殺이 例事로 橫行하던 時節이었다. 共産主義를 막는 技術者로서 利用한 것이지 나라의 主流나 根幹이 되도록 한 것이 決코 아니다.

    1951年 農林部 長官에 任命된 임문환度 親日派다. 동경제대를 卒業하고 高等考試에 合格했다. 日本에서 高級官吏가 될 수 있었는데, 朝鮮에 와 高等官 生活을 했다. 李承晩이 그를 長官에 앉힌다. 임문환이 國會에 가서 亡身을 當한다. 國會議員들이 ‘當身 같은 親日派의 절은 안 받겠다’면서 돌려보냈다. 李承晩은 임문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美國에서 歸國하면서 日本을 보니 山꼭대기까지 물을 대 논을 만들었더라. 언젠가 日本이 貿易이다 뭐다 해서 우리나라로 다시 밀려올 것이다. 日本이 다시 오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게 當身 같은 親日派다. 日本을 알아야 日本을 막아낼 수 있다.’ 要컨대 親日한 罪를 日本 막는 일로 갚으라는 거였다.”

    金九의 判斷 錯誤

    ▼ 現代史의 家庭的 質問 中 하나가 ‘愚男과 白凡이 協力해 大韓民國을 建設했다면…’이다. 왜 두 사람이 合作하지 못했다고 보나.

    “神이 아니니까, 李承晩도 金構圖. 두 사람은 政治人이다. 競爭할 수밖에 없었다.”

    ▼ 美軍이 進駐하는 瞬間 白凡이 競爭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봐야 한다. 協商하러 以北에 간 것이 判斷 錯誤였는데, 單獨政府 樹立에 參與하지 않은 것은, 自由中國(타이완) 人士와의 인터뷰를 보면, 白凡이 以北을 過大評價했다. 歸趨를 지켜봐야 한다고 본 것 같다. 大韓民國 政府의 將來에 對해 樂觀하지 않은 것이다. 敏感한 얘기여서 더는 안 하는 게 낫겠다. 冊에는 自由中國 人士와의 인터뷰 全文을 실었다.”

    ▼ 우남이 白凡의 南北合作政府 運動을 제치고 38度線 以南에 單獨政府를 樹立한 것이나, 共産勢力과 싸워 이기고자 一部 親日派를 登用한 것은 歷史의 不可避性에 該當한다는 건가.

    “技術者로 利用한 것이다. 功을 세워 罪를 면하게 하는 趣旨였다.”

    ▼ 愚男은 朝鮮共産黨 出身 曺奉巖을 農林部 長官에 拔擢해 土地改革을 施行했다. 農地改革이 共産化를 막는 데 寄與했다는 評價가 있다.

    “農地改革社를 硏究한 金聖灝 氏가 全國 各 地方을 돌면서 農民의 얘기를 듣고 내린 結論은 ‘李承晩 德分에 쌀밥을 먹었다’는 것이다. 李承晩은 拷問, 通信員 노릇을 하던 로버트 올리브 博士에게 便紙를 써 ‘第一 먼저 農地改革을 할 것이다. 保守政權이니 하는 소리를 一掃할 것이다. 農民에게 땅이 돌아간다. 北韓에서 實施한 것과 어떻게 다른지 보여줄 것이다’라고 밝힌다. 그러고는 共産黨 하던 曺奉巖을 長官으로 세워 밀어붙인다. 대단한 政略家다.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서울만 占領하면 모든 農民이 蹶起한다고 했다. 人民軍이 서울을 占領한 뒤 박헌영이 라디오 演說을 하는데….”

    그가 北韓軍 治下의 서울에서 發行된 朝鮮人民補와 解放日報를 꺼내왔다. 박헌영의 라디오 演說文이 실렸다. 박헌영은 이렇게 呼訴했다. “嚴肅한 時期에 全體 南半部 人民이 어찌 總蹶起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무엇을 躊躇할 것입니까. 모두 다 한 사람같이 일어나 正義의 戰爭에 積極 參加해야 합니다. (…) 人民의 武器는 하나도 蜂起요, 둘도 蜂起입니다.”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北韓의 土地改革은 賣買도 할 수 없고 擔保로도 삼을 수 없는 것이었다. 社會主義 國家의 土地改革은 모두 失敗했다, 共産主義가 亡한 게 土地改革을 잘못해서다”라고 덧붙였다.

    ▼ 3·15 不正選擧와 獨裁는?

    “李承晩 責任이지. 政治權力에 對한 欲心인지, 國家에 對한 召命感이었는지 모르겠으나 結果에 對한 責任을 벗어날 수 없다. 政治人에게는 누구나 功과 科가 共히 있다. 不正選擧를 몰랐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랬더라도 責任져야 한다. 大統領이 모르기 어려운 일이고 泄瀉 몰랐다고 해도 잘못이다.”

    ▼ 白凡의 과(過)는?

    “決定的 瞬間에 判斷을 잘못한 것. 南北合作에 나선 것은 誤判이다.”

    最近 論難의 對象이 된 歷史敎科書 國定化 問題에 對한 質問도 했으나 그는 ‘오프 더 레코드’를 前提로 答했다. 검정 歷史敎科書를 直接 檢討하지 않았다는 게 非報道를 前提로 한 理由였다. 그는 “一部 言論에 報道된 대로라면 現在의 敎科書가 問題를 갖고 있어 措置가 必要하다”는 趣旨로 말하면서도 朴槿惠 大統領에게 쓴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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