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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 命運은 關稅에 달렸다!|신동아

國家 命運은 關稅에 달렸다!

不利할 땐 닫고, 유리할 땐 열고

  • 調印職 | 大宇證券 홍콩法人 팀長

    入力 2015-11-19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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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年 前 英, 自由貿易 재미 보다가 保護貿易 回歸
    • 美 南北戰爭은 ‘奴隸解放’ 名分 내건 關稅·貿易·利權 戰爭
    • 自由貿易 體制 GATT→WTO→FTA→EPA→TPP?
    • TPP 12個國 GDP 30兆 달러, 世界 總生産量 40%
    美國과 日本이 環太平洋經濟同伴者協定(TPP)을 最終 妥結하면서 具體的인 協定 內容이 잇따라 公開됐다. 2017年부터 協定이 發效되면 向後 30年間 域內(域內) 12個國은 96~100% 水準의 貿易 自由化 措置 惠澤을 볼 展望이다. 美國, 日本, 캐나다, 濠洲, 베트남, 멕시코 等 參加國 國內總生産(GDP)을 모두 合하면 30兆 달러를 넘는다. 世界 總生産量의 40%에 達하는 水準이다.

    美國에 이어 中國과 自由貿易協定(FTA)을 締結하면서 安堵하던 韓國도 지난해부터 뒤늦게 TPP 加入에 積極 뛰어들었다. ‘多者間 自由貿易經濟卷’이라는, 한 次元 높은 國際貿易 體制에 뒤처지지 않기 爲해 TPP 2次 交涉局으로 參加하려고 美國과 日本을 相對로 熾烈한 外交戰을 벌이고 있다.

    兩者 肝이든 多者間이든, 自由貿易協定이란 쉽게 말해 關稅障壁 撤廢를 約束하는 것으로, 國家 間 自由競爭을 浮揚하자는 데 그 趣旨가 있다. 韓國처럼 輸出 比重이 높은 나라들은 特히나 그間 支拂한 稅金만큼의 費用이 빠지고 收益性이 改善된다는 側面에서, 一部 ‘自國 農産物 保護’라는 名分을 빼면 參加하지 않을 理由가 없다.

    封建領主들의 ‘돈줄’

    關稅는 古代부터 ‘國家’ 槪念이 確立되기 前인 中世까지 유럽 封建領主들에게 一種의 돈줄 노릇을 했다. 日本에서도 幕府時代 때 地方의 번주(藩主)인 다이묘가 管轄 地域에서 商人들이 商行爲를 하면 ‘자릿貰’를 徵收했다. 英國 經濟學者 애덤 스미스는 1767年 出刊한 ‘國富論’에서 過度한 地方別 關稅가 國內 商業의 發達을 沮害한다며 일찌감치 副作用으로 指摘한 바 있다.



    商人들은 東西洋을 莫論하고 安定的 商行爲가 可能하도록 支援해줄 ‘政治的 實勢’를 찾고 依存하는 側面이 있다. 有力한 封建領主가 다른 領地(領地)를 倂合 또는 統合해 最大限 큰 單一 市場을 造成해야 商業도 發展하고 自身의 利潤도 크게 남을 수 있다는 判斷 때문이다.

    巨大 市場의 영주는 곧 地域을 管轄하는 王國의 王이 되고, 이 統合經濟圈은 自然스럽게 近代的 意味의 國家로 發展했다. 王國 內에서 關稅가 廢止되면 物流의 원활한 네트워크 形成, 貨幣 統一 및 輸送 인프라 作業이 隨伴되며 市場이 커지고 富(富)가 蓄積된다. 王國 간 富의 不均衡이 생기면서 外交的으로는 侵略戰爭, 經濟的으로는 關稅의 復活과 廢止가 反復되는 形態로 國家의 統合과 分斷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獨逸은 現在 유럽聯合(EU)에서 經濟優等生으로 壓倒的 存在感을 誇示하고 있지만, 19世紀 初만 해도 유럽 內에서의 位相은 英國이나 프랑스에 훨씬 못 미쳤다. 當時는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 等 6個의 個別 領主들이 따로 管理하는 聯邦의 느슨한 聯合 形態였기에 單一 經濟圈도 確立되지 않았다.

    獨逸 經濟學者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1820年代에 “獨逸이 政治的으로 統一되는 것이 어렵다면 聯邦 間의 關稅障壁만이라도 撤廢해 물類 및 市場 統合化를 早期 實現해야 한다”고 提唱했으나, 當時 聯邦의 領主들은 支配階級의 主 收入源인 關稅를 抛棄할 處地가 아니었다. 다만 ‘이대로 가다가는 英國, 프랑스와의 國際競爭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共感帶가 커져가며 當時 聯邦 中 가장 影響力이 컸던 프로이센이 먼저 銃대를 멨다. ‘全體 파이를 키워 같이 더 잘살자’는 大義名分은 오늘날 最强大國이랄 수 있는 美國, 日本이 TPP 協定을 위해 내세운 캐치프레이즈와도 같다.

    같이 더 잘살자

    프로이센은 베를린을 中心으로 18世紀부터 繁榮을 謳歌했는데, 19世紀 들어 獨逸 聯邦 全體 人口의 折半을 占했으며 GDP도 다른 聯邦을 壓倒하기 始作했다. 다른 聯邦들은 優秀한 프로이센 輸入 物資에 高額의 關稅를 賦課하면서 맞섰는데, 結果的으로는 獨逸 全體 經濟의 成長 停滯를 부추길 뿐이었다.

    結局 프로이센은 다른 聯邦과의 關稅를 相互 廢止하는 條件으로 巨額의 資金을 支援하기도 했고, 輸入 目標를 세워 各 聯邦으로부터 一定量 以上의 物資를 반드시 輸入하는 等의 特惠的 待遇를 約束했다. 이를 通해 1834年에 오늘날의 FTA와 비슷한 關稅同盟이 聯邦 內에 締結됐다. 關稅同盟을 통한 全體 經濟權 成長 및 勞動人口 增加의 惠澤을 맛본 獨逸은 이런 뒷심을 觸媒로 마침내 1871年 最初의 統一帝國을 出帆하게 된다.

    關稅障壁 撤廢를 통해 自由貿易을 實現한다는 以上은 商品과 서비스의 競爭力이 一定 水準의 ‘體級’에 到達했을 때 얘기다. 競爭할 수 있는 인프라가 없는 狀態에서의 開放은 從屬의 다른 말에 不過할 수도 있다. TPP 單語 中間에 ‘파트너십(Partnership)’이 들어간 理由도 그만큼 相對國과의 互惠的 同伴 發展을 의식했다는 點을 强調하려는 心算이다.

    最近 日本이 TPP 協商을 進行할 때도 그렇고, 韓國이 美國과 中國을 相對로 FTA를 妥結할 때도 비슷했지만 貿易 比重이 높은 先進 工業國들의 境遇 相對的으로 自國 農業의 萎縮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資源이 不足한 狀況에서 不可避하게 高費用 構造일 수밖에 없는 自國 農産物 市場에 갑자기 값싸고 맛 좋은 輸入 農産物이 들어오면 該當 産業 自體가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憂慮다.

    그런 點에서 일찍이 關稅 廢止를 實驗하고 自由貿易 體制로 進入했다가 一定 部分 成果를 맛본 뒤 다시 保護貿易體制로 回歸한 英國의 事例는 비록 200年 前 일이지만 只今도 示唆하는 바가 크다.

    英國은 1815年 나폴레옹 戰爭 後 프랑스를 牽制할 心算으로, 輸入 穀物에 高率의 關稅를 賦課하는 內容을 骨子로 하는 穀物法을 制定했다. 豐足하고 값싼 프랑스 農産物 輸入을 關稅障壁으로 막지 않으면 가뜩이나 競爭力이 弱한 自國 農家를 保護할 自信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戰爭이 끝나면서 英國에 對한 經濟制裁 措置이던 프랑스의 大陸封鎖令이 解除돼 프랑스로부터의 農産物 輸入量도 增加勢를 보이던 터였다.

    ‘뜨거운 감자’ 穀物法

    反面 産業革命 德分에 綿織物, 鐵, 機械 生産 等에서 壓倒的 優位를 占하게 된 商工業者들은 海外市場을 좀 더 活潑하게 開拓하기 위해서는 穀物法 廢止가 必要하다고 主張했다. 外國에 關稅障壁을 걷어내라고 要求하려면 自國의 障壁부터 除去해야 協商이 進展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商工業者들에게는 保護貿易을 標榜하고 自給自足에 滿足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것이냐, 아니면 自由貿易 政策으로 ‘世界貿易의 中心國’이 될 것이냐는 게 選擇의 이슈였던 것이다.

    古典 經濟學者 데이비드 리카도는 當時 穀物法 廢止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理論的 土臺를 提供했다. “各各의 나라가 優位에 있는 産業에 資本을 重點 投入하고 成長시킨다면 서로에게 不足한 産業 分野를 補充하게 되고 나아가 互惠的인 國際分業 關係를 構築할 수 있다”는, 이른바 ‘比較優位論’이다. 競爭力이 높은 國家에서 낮은 國家에 많이 輸出하고 적게 輸入하는 方式으로 國富를 蓄積하자는 重商主義, 各國이 生産費가 絶對的으로 적게 드는 財貨 生産을 專門化해 서로 貿易을 하면 相互 間에 利得이 發生한다는 ‘絶對優位論’ 等 旣存 理論보다 進步한 것이었다.

    1846年 穀物法을 廢止하자 英國은 리카도의 豫想처럼 工業化가 더욱 加速化했고, 輸出 物量도 急增했다. 自信感을 얻은 英國은 1860年 프랑스와 오늘날의 FTA와 같은 自由貿易協定을 締結(英佛通商協定)하기에 이른다. 當時 工業 分野의 競爭力이 强化됐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러시아에 비해 한참 水準이 낮던 農業 分野에서도 量과 質 모두 技術力이 높아져 自給 環境이 갖춰지는 새로운 轉機가 마련됐다. 關稅라는 保護膜이 걷혀 危機意識을 느낀 農業 經營者들이 肥料와 農器具 改善, 耕作技術 開發 促進 等을 통해 스스로 革新에 나선 德分이었다.

    時間이 지날수록 初期의 豫想에서 조금씩 틀어진 分野는 오히려 工業이었다. 綿製品이나 機械類를 包含한 耐久財 等에서 一定 水準까지는 繼續 輸出量이 늘다가 어느 瞬間부터 賣出 停滯 現象이 나타났다. 假令 面 셔츠가 아무리 좋아도 한 사람이 100張 넘게 살 必要는 없고 옷이 낡아서 못 입게 될 때까지는 絶對的 時間이 必要한데, 끊임없이 繼續 팔리리라 期待한 것이 誤算이었다.

    쉽지 않은 ‘互惠的 成長’

    이 時期 供給經濟學의 先驅이던 프랑스의 張 바티스트 세이는 “供給이 需要를 낳는다”는 趣旨의 이른바 ‘세이의 法則’을 내놓고 樂觀論을 지폈지만, 어느 時點 以上에서는 아무리 價格을 낮춘 製品이 供給돼도 超過 需要가 發生하기 어려웠다. 한便 農業 分野에서 英國이 競爭力을 갖춘 것과는 別個로, 海外로부터의 輸入 農作物은 英國에서 安定的인 占有率을 繼續 記錄했다. 工業 製品과 달리 農産物은 特別히 過剩 供給될 餘地가 적었고, 이미 確保된 需要는 比較的 維持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結局 英國은 1870年代에 들어서며 自由貿易 路線에서 脫皮, 다시금 旣存의 保護貿易 體制로 回歸하기 始作했다. 이때부터 漸次 上昇 曲線을 그리기 始作한 國家 間 關稅率은 第2次 世界大戰 때까지 이어졌다. 이 時期 先進國 隊列에 時差를 두고 編入한 英國, 프랑스, 러시아, 獨逸, 日本, 美國 等에서 各各 다른 分野의 産業과 市場이 發達한 까닭에 雙方 互惠的 成長도 理論처럼 쉽지 않았다.

    現在 美國은 거의 모든 貿易 分野에서 壓倒的 抑止力을 지녔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自由貿易의 最大 신봉국이기도 하다. 하지만 不過 2世紀 前만 해도 狀況은 사뭇 달랐다.

    ‘建國의 아버지’ 中 한 名이자 1787年 初代 財務長官을 지내면서 美國 金融稅制 制度의 全般的인 기틀을 確立한 알렉산더 해밀턴. 美國 關稅制度의 槪念을 體系的으로 定立한 것 亦是 그의 業績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財務長官 時節 議會에 提出한 ‘製造業에 關한 報告書(Report on Manufacturers)’에서 保護關稅 政策의 必要性을 積極 主張했다. 英國 및 유럽 先進國에 비해 美國의 産業이 뒤져 있었기 때문이다.

    獨立 直後의 美國은 地主階級에 依해 經營되는 農業이 經濟의 中心이었고, 工業力은 낮은 水準이었다. 美國 商務省 統計에 따르면 1830年만 해도 輸出에서는 第1次 産品(加工하지 않은 原材料)의 比重이 62.7%, 食品이 22%였으며 工業 部門은 半製品과 完製品을 合쳐 15.3%에 지나지 않았다. 反面 輸入 比重에선 工業 製品이 65%나 됐다.

    要컨대 담배와 面 等 商品 作物과 原料를 낮은 마진으로 유럽으로 輸出하면 유럽에서 附加價値 높은 完成品을 다시 비싸게 美國에 輸出하는 式이다. 輸出 比重이 높은 農業의 境遇 大部分 美國 南部地域 中心의 大農場에서 아프리카로부터 사온 奴隸를 부려 農作物을 大量生産하는 方式으로 이뤄졌다.

    해밀턴의 保護貿易 關稅

    해밀턴은 이런 狀況에서 保護貿易 關稅야말로 美國의 將來 命運을 左之右之할 키워드라고 認識했다. 英國 輸入品에 關稅를 大幅 賦課해 市場을 위축시키는 동안 自國 産業을 서둘러 育成해야 한다는 論理였다.

    3代 大統領인 토머스 제퍼슨이 就任하면서 狀況은 더욱 惡化됐다. 그의 政治 路線이 現狀 維持를 바라는 南部 地主階級 利益을 代辯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原料 輸出國=美國’ ‘加工 輸出國=英國’ 形勢는 더욱 進展됐고, 美國의 英國 經濟 從屬化에 對한 憂慮의 목소리도 漸次 커져갔다.

    多幸히 19世紀 中盤부터는 美國도 北部 공業者들의 努力으로 技術革新을 이루며 産業革命의 速度를 내기 始作했다. 때마침 人口 增加와 好景氣의 善循環 週期가 찾아오고, 鐵道와 道路 等 인프라가 整備되면서 北部 製造業 地帶의 設備 投資도 急速히 進行됐다. 政治的으로도 南部 민주당 系列의 農業地主 勢力에 對抗하기 위한 北部 中心의 共和黨 勢力이 勢를 불려나갔다.

    南北戰爭은 ‘關稅戰爭’

    1860年에는 공화당 候補 에이브러햄 링컨이 大統領으로 當選되며 北部 産業資本家와 商工業者를 밀어주기 위한 保護貿易 中心의 政策이 한層 强化되기 始作했다. 그러면서 南部 農業地主들과의 對立이 頂點으로 치달았다. 葛藤은 結局 南北戰爭(1861~65)의 導火線이 되고 만다. 國內 友好 勢力 擴大와 國際的 輿論戰을 위해 ‘奴隸解放 宣言’李 名分으로 登場했지만, 實際的으로는 關稅와 貿易政策의 方向 및 그에 따른 利權을 둘러싼 鬪爭이나 다름없었다.

    60萬 名의 死亡者를 낸 慘酷한 內戰을 겪으며 美國의 關稅 政策도 비로소 確固한 方向性을 갖추게 됐다. 南北戰爭에서 勝利한 北部 勢力은 以後부터 해밀턴이 建國 初期에 내세운 保護貿易 政策을 하나씩 執行해나갔다. 美國의 高關稅 賦課로 英國 工業은 漸次 競爭力을 잃었고, 政府 主導의 機敏한 近代 工業化를 통해 그 빈자리를 美國 企業이 채워나갔다. 美國은 이를 通해 ‘經濟的 獨立’을 이루며 그때껏 남아 있던 英國 植民地의 그늘도 깨끗이 씻는 契機를 마련했다.

    帝國主義 및 强大國 便宜的인 閉鎖的 保護貿易 政策 等에 對한 反省이 本格化하면서 2次大戰 後부터는 戰後 秩序의 한 軸으로 自由貿易 體制에 對한 世界的 共感帶가 擴散됐다. 1948年에는 美國이 主軸이 된 ‘關稅와 貿易에 關한 一般 協定(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體制가 發足, 自由貿易에 對한 世界的 秩序를 새로 整備했다.

    1990年代 蘇聯 崩壞로 冷戰體制가 終結되자 GATT는 發展的 解體를 하고, 1995年부터 世界貿易機構(WTO, World Trade Organization) 體制가 誕生한다. 예전보다 한層 더 自由貿易에 焦點을 맞추고, 關稅率 引下 및 規制 撤廢에 努力을 기울였다. 다만 會員國이 160個國이 넘으면서 先進國과 新興國 間의 理解 相衝이 顯著하게 드러났고, 個別 國家 間 狀況을 하나의 基準으로 單一化하기는 漸漸 더 어려워졌다.

    WTO가 全 會員國을 包括的으로 엮는 交涉을 斷念하며 WTO 體制도 徐徐히 影響力을 喪失했다. 21世紀부터는 2個 國家 以上의 國家가 個別的이고 部分的인 交涉을 통해 商品과 서비스의 貿易障壁을 낮추는 FTA 體制가 導入됐다. 地域이 隣接하거나 貿易去來가 많은 國家 사이에서 關稅律 追加 引下 餘地가 있는 貿易 品目을 選定해 實行하는 方式이다.

    TPP는 또 다른 EU?

    FTA 體制의 補助 或은 擴張的 機能 側面에서 經濟提携協定(EPA,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도 登場했다. 一般的인 FTA에 비해 企業 間의 協同, 投資 및 人的 交流, 知的財産權과 特許 決定 및 相互認定 與否 等을 좀 더 細部的으로 定義하는 體制로 보면 된다. 다만 最近 맺어지는 國家 間 FTA에는 EPA와 비슷하게 貿易 外 經濟協定, 知的財産權 保護, 勞動者 輸入, 技術協力, 醫療 서비스 市場 開放, 共同投資 擴大 等의 項目이 追加되면서 FTA와 EPA의 區分이 稀微해지는 趨勢다.

    FTA와 EPA가 12個國의 多國 間 協定으로 昇華된 것이 바로 TPP라고 보면 된다. 워낙 國家 間 規制 障壁이 많이 허물어져, 甚至於 日本 經濟界에서는 域內(域內) 主力 通話인 美 달러에 엔貨 價値가 1對 1로 聯動되는 時期가 가까워진 것 아니냐는 分析도 내놓을 程度다.

    TPP와 비슷한 旣存 體制로는 東南아시아國家聯合(ASEAN)을 들 수 있다. 經濟協力뿐 아니라 軍事同盟이라는 政治的 要素까지 加味돼 TPP보다 强力한 連帶로 볼 수도 있지만, 現在 TPP 亦是 大部分 美國의 友邦國家(또는 中國의 牽制國家)로 構成되었다는 點을 看過해선 안 된다. 유럽聯合(EU)이나 北美自由貿易協定(NAFTA)처럼 堅固한 域內 體制로서의 負傷도 對備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專門家의 意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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