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檢認定敎科書 實體는 民衆史學의 비틀린 虛僞意識”|新東亞

“檢認定敎科書 實體는 民衆史學의 비틀린 虛僞意識”

激突인터뷰 Ⅱ ‘國定化 贊成’ 이기동 東國大 碩座敎授

  • 엄상현 記者 | gangpen@donga.com

    入力 2015-11-18 16:25: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國定敎科書 贊成하면 原色的 非難, 人格 剝奪
    • 牽强附會, 誇張, 知的 詐欺 亂舞하는 民衆史學
    • 金日成 보천보戰鬪 紹介, 南 亡身 주려는 意圖
    • 國便, ‘檢認定 强化’에서 ‘國定化’로 突變
    “검인정교과서 실체는 민중사학의 비틀린 허위의식”

    조영철 記者

    “밤 12時나 돼야 집에 들어오신다. 그때 다시 電話해달라.”

    元老 史學者 이기동(72) 東國大 夕座敎授는 七旬을 넘긴 요즘도 늦은 밤까지 硏究室에서 冊 속에 파묻혀 지낸다. 子正을 넘긴 時間에 連結된 이 敎授와의 電話 通話. 그는 歷史敎科書 國定化 論難에 對해 痛歎을 禁치 못했다.

    “只今 이 風土를 보라. (敎科書 執筆 못하게) 脅迫하고, 威脅하고…. 純粹한 學問的 次元이 아니지 않은가. 歷史敎授라는 사람들도 다 黨派心에서 出發한 거다. 老論 小論만 없을 뿐 朝鮮 末 黨派싸움보다 甚하다. 國定敎科書를 贊成한다고 하면 原色的인 非難에 人格까지 剝奪하는 水準이다.”

    李 敎授는 이런 狀況에 幻滅을 느낀 듯 言論에 모습을 나타내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歷史敎科書 國定化의 當爲性을 누군가는 說明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說得에 이틀 後 暫時 時間을 許諾했다. 脂肪 세미나에 參席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이 고쳐본들…”


    이기동 敎授는 古代史 分野의 權威者다. 近現代史에도 造詣가 깊다. 30餘 年 前 펴낸 ‘悲劇의 軍人들’을 2年 半째 增補作業 中이다. 이 冊은 1882年 壬午軍亂부터 1945年까지 舊韓末 日本陸軍士官學校 出身의 高位 將校들에 對한 記錄으로 韓日 近代史의 ‘비록(秘錄)’이다. 또 ‘轉換期의 韓國史學’ ‘民衆史學論’ ‘民衆文化 運動論’을 펴내는 等 國內 史學界 흐름에도 밝다.



    李 敎授는 1997年부터 9年間, 그리고 지난해 補闕로 委囑돼 올해 10月 25日까지 1年間 國史編纂委員會 委員으로도 活動했다. 그는 旣存 檢認定敎科書의 問題는 左偏向된 歷史 技術보다 이를 執筆한 民衆史學者들의 비틀린 心理 狀態라고 指摘한다.

    “가장 重要한 게 歷史를 記述하는 著者의 心理와 精神 狀態다. 民衆史學 信奉者들은 全혀 公平하지 않다. 어려운 말로 ‘無斷(武斷)’을 쓴다고 하는데 牽强附會, 誇張, 知的 詐欺, 거짓 等 詐術(詐術)을 마음대로 쓴다. 그게 歷史敎科書 行間에 그대로 나타난다. 萬若 앞으로도 檢認定制를 維持한다면 筆者는 내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사람들이 고쳐봐야 얼마나 달라지겠나.”

    ▼ 檢認定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을 程度인가.

    “例를 들어 보천보戰鬪 事件에 對한 敍述에서 當時 報道寫眞을 뺐다고 해서 바로잡았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천보戰鬪가 우리 獨立運動史에서 차지하는 客觀的인 位置를 봐야지. 보천보戰鬪는 事件 自體가 초라하다. 當時 김일성 組織은 中國共産黨 滿洲性委員會 下部組織이었다. 中國이 自身들의 共産革命을 위해 朝鮮人인 김일성에게 請負 일감을 준 것이다.”

    金星·東亞出版·未來엔·천재교육 等 相當數 檢認定敎科書는 北韓 김일성이 이끈 部隊가 日帝强占期에 咸鏡南道 보천보를 襲擊해 勝利한 戰鬪를 當時 報道 內容과 함께 紹介했다가 敎育部로부터 一部 內容 修正 및 補完 勸告를 받았다. 보천보戰鬪는 北韓이 김일성 偶像化에 活用하는 代表的인 事件이다.

    ▼ 김일성이 이 戰鬪에서 勝利한 건 事實 아닌가.

    “이 事件을 歪曲하라는 것이 아니다. 크게 알릴 必要가 있느냐다. 臨時政府와 같은 純粹한 韓民族 獨立運動機關의 指令에 따라 움직인 獨立運動과는 差別化해야 하는 것 아닌가. 歷史를 記述할 때는 取捨選擇을 할 수밖에 없다. 이때 公平性이 缺如되면 안 된다.

    내가 가끔 虛僞意識이라는 말을 쓴다. 歷史敎科書는 우리 靑少年의 精神, 그리고 靈魂과 關聯됐다. 그런데 南韓을 赤化統一하려는 金日成이 이런 엄청난 戰鬪에서 勝利를 거뒀다고 紹介하는 理由가 무엇이겠나. 더군다나 寫眞까지 붙여가면서. 이건 南韓을 亡身주려는 虛僞意識에서 나온 것이다. 그걸 執筆한 敎授들은 大韓民國에서 上位 5%에 들어가는 特權層이다.”

    “敎育政策 10年間 跛行”


    ▼ 民衆史學者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1980年代 末부터 90年代 初, 獨逸이 統一되고 蘇聯 聯邦이 解體되는 等 社會主義가 沒落했다. 그런데 國內에는 1987年 6月 抗爭 以後 急速度로 民主化하면서 이런 世界의 思潮와 正反對 흐름이 造成되기 始作했다. 政治的, 思想的으로 큰 過渡期에 들어선 것이다. 이番 國政 歷史敎科書 反對에 앞장선 한국역사연구회가 바로 6月 抗爭 이듬해인 1988年 當時 少壯派 硏究者들이 모여 만든 團體다.

    이들은 ‘韓國의 歷史’라는 冊과 ‘歷史와 現實’이라는 機關誌를 펴내면서 旣存 歷史學系에 正面 挑戰했다. 只今 보더라도 左偏向이 아주 甚했다. 이들의 合同 硏究 成果物은 10年 程度 곧잘 나오다가 以後 뜸해졌다. 그로부터 5~6年 後(2002年) 檢認定 近現代史 敎科書가 나오면서 그 團體에 所屬된 敎授와 中·高校 敎師 等 30餘 名이 大規模로 參與했다. 敎科書 製作에 旣存 歷史學者들은 한 名도 參與하지 않았다.”

    “검인정교과서 실체는 민중사학의 비틀린 허위의식”

    이기동 敎授는 “政府가 當初 檢討한 대로 檢認定을 2種 程度로 强化했다면 只今처럼 輿論이 惡化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조영철 記者



    ▼ 理由가 뭔가.

    “敎科書 檢認定 過程이 不公正했다. 더구나 韓國史에서 ‘近現代史’만 따로 分離한 것도 理解하기 어려웠다. 古代에서 前近代까지는 ‘國史’(國政)로 놔두고, 近現代史를 다섯 倍쯤 늘려서 獨立科目으로 떼내 檢認定制를 導入한 것이다. 近現代史가 없는 國史敎科書가 말이 되나. 結局 할 수 없이 國事에도 近現代史 內容을 簡略하게 붙였다. 그리고 國史는 必須, 近現代史는 選擇으로 나눴다. 敎育政策이 跛行이었다. 그런데 그게 10餘 年 동안이나 이어졌다. 歷史冊 꼴이 우습게 됐다. 史學界에서는 敎科書를 度外視했고, 그러다보니 傍觀 아닌 傍觀을 하게 된 것이다.”

    김대중 政府 時期인 2002年 國史와 近現代史로 나뉜 歷史敎科書는 2010年 다시 ‘韓國史’로 統合되면서 檢認定制로 一元化했다. 그로부터 5年 만에 다시 國定化로 바뀌게 된 것이다.

    ▼ 國史編纂委員會 委員으로 活動했는데, 國定化에 對한 內部 論議는 없었나.

    “9月 15日에 國務總理室에서 懇談會를 한다고 해서 갔더니 歷史學者가 7~8名 와 있었다. 나는 國定化에는 關心 없었다. 하지만 檢認定 歷史敎科書로 學生을 가르치는 게 寒心해서 ‘檢認定 7種을 全部 합격시킨 것부터 問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김정배 國史編纂委員長이 ‘앞으로 2種만 합격시킬 것’이라고 했다. 檢認定을 强化하겠다는 이야기였다. 萬若 그렇게만 했으면 이렇게까지 輿論이 惡化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檢認定 强化를 考慮했지만 國定으로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敎科書 쓸 사람 많다”


    ▼ 歷史敎科書 執筆 要請을 받았을 것 같은데.

    “여러 次例 提案 받았다. 10月 20日頃 國史編纂委員會 마지막 會議가 있었다. 그때 委員長이, 考古學은 최몽룡 敎授가 맡을 테니 나보고 古代史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다음 날 집으로도 電話가 왔다. 하지만 事情이 있어서 어렵다고 拒絶했다. 30年 前에 쓴 冊 增補作業에 2年 半째 목매는데, 敎科書 執筆에 參與하면 이걸 못하기 때문이다.”

    ▼ 事情이 없으면 맡았겠나.

    “다른 일이 없더라도 率直히 내키지 않았을 것 같다. (歷史敎科書 國定化) 反對勢力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내가 70살이 넘었다. 敎科書 執筆은 主로 40~50代 學者들이 하는 일이다. 또 冊 全體를 쓰는 게 아니라 6分 1이나 7分의 1 쓰고, 그걸 또 다른 사람이 潤文한다니 自尊心 傷할 것도 같고. 敎科書는 制約도 많다. 冊을 使用하는 사람이 成長하는 學生들 아닌가. 敎育的으로 훌륭해야 하고, 感動도 줘야 해서 宏壯히 神經 쓸 게 많다. 그게 어렵다. 그에 비하면 論文 몇 篇 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學界의 反對가 甚한데 歷史敎科書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어느 大學에나 政治志向的인 敎授들이 있다. 그 敎授들이 찾아와서 署名을 付託할 境遇 同僚들은 크게 損害 볼 게 없으면 厚하게 찍어준다. 同僚愛라고나 할까. 署名에 參與한 사람 中에는 溫乾한 사람도 꽤 있다. 雰圍氣가 안 좋지만, 敎科書 쓸 사람은 많다.”

    ▼ 國史編纂委員會가 政府의 影響力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 같은데.

    “國家機構의 一部인데 벗어날 수 없는 건 當然하다. 내가 1997年부터 9年間 國便 委員으로 있었기에 그동안 일을 훤히 안다. 政治的인 影響이 많이 作用할 것이다.”

    ▼ 結局 나중에 또 다른 이념적 偏向性 是非가 提起되지 않을까.

    “랑케(‘歷史學의 아버지’라 불리는 獨逸의 歷史學者)가 와서 歷史敎科書를 써도 弱點 잡으려면 限도 끝도 없다. 勿論 랑케라면 國內 歷史學界에서 調査한 資料만 가지고는 ‘敍述 不可’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 學者들은 勇敢해서 實證資料가 없는데도 推理小說처럼 쓰는데, 上古史에 그런 대목이 많다. ‘實證史學’이라면 技術 不能한 水準이다. 그런데 現 政府가 上古史와 古代史를 强化한다는데, 그게 뭔가 尋常치 않다. 요즘 재야 史家들이 復活했거든.”

    ▼ 재야 史家들?

    “1980年代에 ‘局社찾기 運動’이라는 움직임이 있었다. 全斗煥 政權 末期였는데, 尹潽善 前 大統領을 總裁로 내세운 ‘局社찾기국민회의’라는 極右團體가 主導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니 政府에서 國史敎育審議會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때 내가 關與해서 잘 안다. 이들은 上古史에서 ‘檀君神話의 歷史性을 浮刻瑕疵’ ‘漢四郡은 수치스러운 일이니 歷史에서 빼자’고 主張했다. 그건 옳지 않은 일이다. 그때 國政을 檢認定으로 轉換하는 걸 部隊 意見으로 달았다. 그런데 요즘 다시 그 움직임이 인다. 얼마 前 황우여 敎育部 長官이 中國의 東北工程에 對處하기 위해 歷史敎科書에서 上古史와 古代史 比重을 强化하겠다고 밝혔는데, 그게 저들의 論理와 똑같다. 이것도 걱정이다.”

    ▼ 이番 國政 歷史敎科書 體制가 얼마나 維持될 것 같나.

    “敎師 改革이 먼저”


    “政權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率直히 斷命하리라고 본다. 다음 政權에서 또다시 3年마다 한 番씩 檢認定 騷動이 反復될 게 뻔하다. 걱정이다.”

    ▼ 根本的인 解法은 없을까.

    “歷史 敎育에서 ‘多樣性 確保’를 强調하는데, 事實 그게 重要한 게 아니다. 敎師의 再武裝과 再敎育이 무엇보다 重要하다. 敎科書는 가장 典型的이고 標準的인 것만을 뽑아놓은 것이다. 敎科書에는 다양한 설을 다 提示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混亂만 加重되기 때문이다.

    敎科書에 없는 다양한 視角과 說을 提示할 수 있는 사람이 敎師다. 結局 重要한 건 敎師의 役割이라는 이야기다. 敎師를 改革하려면 全國敎職員勞動組合 問題를 直視해야 한다. 전교조 所屬 敎師가 全體 敎師에 비해 少數지만, 積極的인 少數가 多數를 움직이는 게 우리 社會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