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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 베드로의 十字架刑’ ‘엠마오의 저녁食事’|新東亞

‘性 베드로의 十字架刑’ ‘엠마오의 저녁食事’

카라바조

  • 박상희 | 샤론精神健康硏究所 所長

    入力 2015-11-20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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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엠마오의 저녁식사’

    ‘性 베드로의 十字架刑’

    人間이란 善한 存在일까요, 惡한 存在일까요. 이 質問만큼 우리에게 本質的인 물음은 없는 것 같습니다. 世上을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우리는 人間의 本性이 어떤 것인지를 묻게 됩니다.

    人間의 本性에 對해선 東洋과 西洋에서 오랫동안 討論해왔습니다. 東洋의 境遇 孟子는 性善說(性善說)을 내놓았고, 荀子는 性惡說(性惡說)을 主張했습니다. 西洋의 境遇에는 狀 자크 루소가 性善說에 가까운 理論을 提示했다면, 토머스 홉스는 性惡說에 가까운 理論을 提起했습니다. 한便 존 로크는 人間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白紙說(白紙說)을 主張하기도 했습니다.

    글을 始作하며 人間의 本性에 對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늘 제가 紹介할 畫家가 바로 이 人間의 本性에 對해 質問을 던지게 하는 問題的 人物이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입니다.

    빛의 魔術師

    카라바조가 남긴 作品은 劇的으로 强烈하지만, 더욱 劇的인 것은 그의 삶 自體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나이에 큰 名聲을 얻었지만, 平生 暴行을 일삼았고 殺人을 저지르기도 한 사람입니다.



    카라바조는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을 뒤이은 初期 바로크 繪畫의 代表 畫家입니다. 그는 ‘빛의 魔術師’라고 불렸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밝음과 어두움의 對備를 效果的으로 活用해 作品의 緊張度를 劇的으로 높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빛의 畫家라면 먼저 네덜란드의 下르먼손 판 레인 렘브란트를 떠올리는데, 렘브란트는 카라바조로부터 큰 影響을 받았습니다. 렘브란트뿐 아니라 벨라스케스, 루벤스, 라 투르 亦是 카라바조의 作品으로부터 작지 않은 靈感을 받았습니다.

    카라바조는 많은 傑作을 남겼습니다. 그가 그린 宗敎畫는 決定的 瞬間을 捕捉한 力動的 構成으로 有名합니다. 이탈리아의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聖堂의 體라시 禮拜堂에 있는 ‘性 베드로의 十字架刑(The Crucifixion of St. Peter, 1601)’은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널리 알려졌듯이 初代 敎皇은 그리스도의 첫 番째 弟子인 聖 베드로입니다. 그리스도의 復活 以後 로마로 건너간 베드로의 最後는 感動的이었습니다. 그는 自身이 그리스도와 같은 刑罰을 받을 資格이 없다면서 머리가 아래로 向하는 十字架刑을 要求해 殉敎했다고 傳해집니다.

    카라바조는 베드로의 殉敎 場面을 特有의 力動的 構成과 明暗 對比 效果를 바탕으로 畫幅에 담았습니다. 카라바조가 作品에 담은, 十字架에 거꾸로 매달리는 베드로의 苦惱에 가득 찬 눈빛과 表情을 보며 저는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습니다.

    베드로는 只今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세 番이나 그리스道를 不正한 自身을 마지막으로 懺悔하는 것일까요. 그가 그린 베드로와 兄을 執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리얼해서 이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도 베드로와 함께 十字架兄의 苦痛을 堪當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主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네가 나의 兄弟들을 버리기에 다시 한 番 十字架에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 이 對話는 로마 監獄에서 脫獄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주고받은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十字架에 거꾸로 매달리는 苦痛을 기꺼이 堪當할 수 있었던 베드로는 믿음과 信仰의 勝利者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殉敎한 자리에는 聖 베드로 大聖堂이 세워졌는데, 이 大聖堂 廣場에 가면 한쪽엔 天國의 열쇠를 든 베드로의 모습을, 다른 한쪽엔 칼을 든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自然主義的 畫風

    카라바조가 처음부터 宗敎畫에 沒頭한 것은 아닙니다. 初期에 그는 ‘병든 바쿠스’를 비롯해 뛰어난 人物畫와 風俗畫를 남겼습니다. 能熟한 筆致로 人物들의 생생한 表情을 담은 카라바조의 솜씨는 많은 이의 關心을 불러 모았고, 그의 이런 才能은 當時 權力과 財力을 갖춘 이들로 하여금 自身의 後見人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탈리아와 全 유럽에서 카라바조의 名聲이 높아진 것은 一連의 宗敎畫를 그린 後였습니다. 카라바조 移轉 르네상스 時代에 宗敎畫의 標準을 提示한 이는 라파엘로 山侈傲입니다. 여러 聖母像과 ‘그리스도의 變容’ 같은 作品에서 볼 수 있듯, 라파엘로는 基督敎의 성스러움을 表現하는 데 卓越한 才能을 보였습니다.

    宗敎畫가 갖춰야 할 美德은 一般 市民이 作品을 보고 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信仰心을 더욱 굳게 할 수 있는 宗敎的 共感은 聖火가 갖춰야 할 가장 重要한 要素이겠지요.

    라파엘로나 카라바조가 살았을 當時 聖堂에 걸린 그림들은 오늘날의 텔레비전과 映畫 같은 機能을 代身했습니다. 그림에 담긴 이미지는 觀覽하는 이에게 鮮明하고 强烈한 印象을 남겼고, 그 引上은 宗敎的 敬虔함과 信仰心을 强化했습니다. 人間의 모습을 하고 있되, 人間을 넘어선 神의 모습을 담은 成火를 보면서 當時 많은 이가 自身의 宗敎的 믿음을 더욱 굳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카라바조의 作品은 라파엘로의 作品과 여러 가지로 對備됩니다. 라파엘로의 그림이 基督敎가 갖는 자애로움과 敬虔함,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崇高함을 느끼게 한다면, 카라바조의 그림은 우리 人間이 日常的으로 느끼는 놀라움, 두려움, 고통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카라바조가 그리스도와 聖母 마리아를 지나치게 世俗化했다고 批判하는 反面, 다른 이들은 카라바조가 自然主義的 畫風을 導入함으로써 基督敎에 對한 親密感을 높였다고 肯定的으로 評價하기도 했습니다.

    카라바조의 作品에 登場하는 이들은 하늘에 있는 成人이라기보다 땅에 있는 存在입니다. ‘性 베드로의 十字架刑’을 그린 해에 그린 ‘엠마오의 저녁食事(The Supper at Emmaus, 1601)’는 이러한 特徵이 잘 드러난 作品입니다. 그리스도가 十字架에 매달려 죽임을 當하고 곧바로 復活한 後, 두 弟子는 엠마오의 한 旅人宿에서 저녁食事를 하는 途中, 同行해온 이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알게 됩니다.

    暴力으로 얼룩진 삶

    루가복음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西洋 繪畫에서 比較的 자주 다룬 主題입니다. 英國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 있는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저녁食事’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博物館에 있는 렘브란트의 ‘엠마오의 저녁食事’가 特히 有名합니다. 그런데 이 두 作品의 雰圍氣는 사뭇 다릅니다. 렘브란트의 作品이 宗敎的 勁健함으로 가득 차 있다면, 카라바조의 作品은 弟子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場面을 마치 現代 映畫의 한 場面처럼 劇的으로 描寫합니다.

    한 弟子는 깜작 놀라 손을 벌리고, 다른 弟子는 椅子에서 몸을 막 일으켜 세우려 합니다. 이들의 차림새는 보잘것없고, 表情과 行動은 놀라움으로 가득합니다. 한가운데 앉은 그리스도는 성스럽다기보다는 볼살이 통통히 오른 젊은이의 모습입니다. 弟子들처럼 그리스도 亦是 日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平凡한 차림새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옆에는 궁금한 表情을 짓는 旅人宿 主人이 서 있습니다.

    이렇듯 카라바조가 그린 이들의 모습은 至極히 平凡합니다. 그의 作品은 强烈한 明暗과 劇的인 構成을 통해 우리 視線을 固定시키지만, 이 視線 안에 들어오는 人物들의 얼굴은, 그리스도든 베드로든, 平凡한 이들의 모습과 큰 差異가 없습니다.

    카라바조는 앞서 紹介한 ‘엠마오의 저녁食事’를 그린 5年 後 다시 同一한 主題를 다룬 作品을 남겼습니다. 이 作品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全體 構成이 日常의 風景으로 담으려는 旣存 作品과 큰 差異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엠마오의 저녁식사’

    ‘엠마오의 저녁食事’

    藝術이냐 사람이냐

    카라바조의 作品을 보면 한 사람의 存在로서 그에 對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그는 왜 보는 이들에게 떨림을 주는 宗敎畫를 그리면서도 自身의 삶은 그렇게 거칠고 暴力的으로 살았을까요. 서른아홉의 生涯 동안 카라바조는 싸움과 暴行 等 無數한 暴力을 行使했고, 그로 인해 일곱 次例 監獄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生涯의 마지막 時期에는 殺人으로 인해 逃亡을 다녔고, 그 渦中에 世上을 떠났습니다.

    카라바조에 對한 제 感情은 兩價的입니다. 먼저 畫家로서의 카라바조는 높게 評價합니다. 그의 그림은 참으로 力動的이고 魅惑的입니다. 現實的 人物들의 喜怒哀樂을 있는 그대로 自己 作品에 담음으로써 天上의 宗敎를 地上의 宗敎로 끌어내리는 듯한 메시지를 傳達하는 그의 天才性은 西洋 繪畫에서 可히 最高의 水準에 到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人間으로서의 카라바조는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歷史를 뒤흔들 만한 天才性을 膳物 받았음에도 自身의 欲望을 調節하는 能力은 不在했던 불쌍한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남긴 行跡으로 보면 그는 憤怒調節障礙를 겪은 사람이었고, 到底히 容納해선 안 될 殺人이라는 行爲까지도 서슴지 않은 反倫理的 사람이었습니다.

    카라바조의 삶을 생각할 때 제게 떠오르는 心理學 用語는 ‘그림자(shadow)’입니다. 이 用語는 精神分析學者인 칼 구스타프 융이 主張한 것인데, 그림자는 無意識의 劣等한 人格이며 自我의 어두운 面을 뜻합니다. 이 그림자의 性格은 暴力的이고 非理性的입니다. 人間에게 누구나 있는 그림자는 危險한 것이지만, 그림자의 實體를 直視하고 深淵으로부터 나오는 自身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自我와 統合하면 이 그림자는 肯定的인 에너지, 다시 말해 삶의 새로운 價値로 昇華할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엠마오의 저녁식사’
    박상희

    1973年 서울 出生

    이화여대 基督敎學科 文學博士, 美國 스탠퍼드대 社會學科 房文學者

    現 샤론精神健康硏究所 所長, JTBC ‘事件班長’ 固定 패널

    著書 : ‘自己對象 經驗을 통한 逆機能的 하나님 表象의 變化에 對한 硏究’ 等


    人間으로서 카라바조는 結局 이 그림자에게 屈服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作品들은 決코 작지 않은 感動을 안겨준다는 點에서 카라바조는 참으로 矛盾的인 畫家였습니다. 繪畫의 歷史에서 畫家의 人性이나 삶과 畫家가 남긴 作品이 늘 一致하는 것은 아닙니다. 作品은 그 自體로 鑑賞하고 評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境遇는 人間과 藝術 間의 距離가 너무 멀어 제게는 선뜻 好感을 품기 어려운 수수께끼와도 같은 畫家로 남아 있습니다.

    藝術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먼저일까요. 제 생각은 ‘사람이 먼저’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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