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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所望한다 義理와 信賴의 東洋을”|신동아

“나는 所望한다 義理와 信賴의 東洋을”

뤼순에서 만난 靑年 安重根과 21世紀 한·中·日

  • 뤼순=송홍근 記者 | carrot@donga.com

    入力 2015-11-19 1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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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月 26日은 安重根 義士가 이토 히로부미를 狙擊한 날이다. 올해로 依據 106周年을 맞았다. 中國은 安重根을 象徵으로 삼아 對日抗爭期의 患難至交를 强調하며 韓國을 美日同盟과 떼어놓으려 한다. 美國은 ‘戰爭할 수 있는 日本’을 歡迎하면서 日本의 軍事力으로 中國을 牽制하려 한다. 日本은 有事時 自衛隊의 北韓 出兵度 言及했다. 安重根은 삶을 마감하며 이렇게 말했다. “自然의 形勢를 돌아보지 않고 이웃 나라를 해치는 者는 毒婦(獨夫)의 判斷을 期必코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安重根은 1910年 3月 26日 뤼순 監獄에서 殉國했다.

    ①9月 18日 中國 랴오둥(遼東)省 뤼순(旅順)의 203高地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쇠처럼 무거웠다. 이곳은 러일戰爭 激戰地다. 뤼순港이 내려다보이는 랴오둥半島의 끝.

    러시아와 日本은 1904~05年 韓半島, 滿洲 支配權을 놓고 銃칼을 겨눴다. 1904年 2月 8日 日本軍이 뤼순港에 駐屯한 러시아 艦隊를 打擊했다. 203高地를 攻擊하면서 損失이 컸으나 1905年 1月 攻掠에 成功했다. 석 달 後(1905年 4月) 러시아 발틱 艦隊가 大韓海峽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聯合艦隊에 擊破되면서 日本이 勝利한다.

    1905年 7月 러일戰爭 終戰을 앞두고 日本은 美國과 가쓰라-태프트 密約을 맺어 韓半島 支配를 保障받는다. 그러고는 大韓帝國을 强壓해 外交權 剝奪 및 統監府 設置가 骨子인 乙巳勒約을 强制한다(1905년 11月). 이듬해 3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初代 痛感으로 赴任해 竝呑(倂呑)에 나선다. 庚戌國恥(庚戌國恥)일은 1910年 8月 29日.

    아베 신조 日本 總理는 8月 14日 終戰 70年 談話에서 111年 前 勃發해 東아시아의 運命을 가른 러시아와의 戰爭을 이렇게 規定했다.

    “일러전쟁은 植民地 支配下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人에게 勇氣를 줬다.”



    “兩國 人民 목숨 바쳐 도왔다”

    ②뤼순은 中國에 恥辱의 땅이다. 中國은 1894~95年 淸日戰爭에서 敗北한 後 랴오둥半島와 타이완을 日本에 割讓했다. 러시아, 프랑스, 獨逸이 介入해(삼국 干涉) 랴오둥半島를 靑(淸)에 返還하라고 日本에 要求했고, 日本이 屈服해 日帝 統治는 7個月 만에 끝난다.

    1898年 3月 獨逸軍이 자오저우灣(膠州灣)에 上陸했으며, 프랑스와 英國도 軍隊를 派遣해 租借地(租借地)를 要求했다. 러시아는 滿洲 鐵道 敷設權을 獲得한 後 랴오둥半島를 租借했다(1898년). 東아시아의 傳統 格인 中國 中心 世界秩序(Sino-centric world order)가 終止符를 찍고, 中國의 領土는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러시아는 1898年부터 러일戰爭에서 敗北할 때까지 랴오둥半島를 支配했으며, 日帝는 러시아와의 戰爭에서 勝利한 後 뤼순 一帶를 關東州(關東州)라고 이름 짓고 關東都督府와 關東軍을 創設했다. 日帝는 1945年까지 關東州를 植民地로 支配했다.

    시진핑 中國 國家主席은 2014年 7月 4日 서울대 特講에서 韓中 間 友好關係를 强調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20世紀 上半期 日本 軍國主義者는 中國과 韓國에 對한 野蠻的 侵略戰爭을 强行해 韓半島를 竝呑하고 中國 國土의 折半을 강점해 兩國이 모두 큰 苦難을 겪었다. 對日(對日) 戰爭이 가장 熾烈할 때 兩國 人民은 목숨을 바쳐 서로를 도와줬다.”



    ③安重根(1879~1910) 醫師는 뤼순 監獄에서 쓴 自轉(自傳)에 이렇게 記錄했다.

    “一介 조그마한 늙은이가 廉恥없이 敢히 하늘과 땅 사이를 橫行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저것이 必是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 萬一 罪 없는 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반드시 잘된 일은 아니라, 잠깐 주춤하며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憲兵에게 붙잡혔다. 이때가 바로 1909年 9月 13日(陽曆 10月 26日) 上午 9時 半쯤이었다.”

    安重根이 쏜 銃彈이 겨냥한 ‘一介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토 히로부미다. 하얼빈役에서 擧事에 成功한 後 逮捕돼 뤼순으로 끌려온 安重根은 ‘日本關東法院’ 法廷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토의 罪狀은 天地神明과 사람이 모두 다 아는 일이다. 더구나 나는 個人으로 사람을 죽인 犯罪人이 아니다. 나는 大韓民國 義兵 參謀中將의 義務로, 任務를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戰爭을 일으켜 襲擊한 뒤 捕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뤼순 地方裁判所와는 全然 關係가 없는 일이니, 萬國公法과 國際公法으로써 判決하는 것이 옳다.”

    安重根은 뤼순 監獄에서 ‘東洋 平和論’을 執筆하다 끝을 보지 못하고 逝去했다. 日帝는 ‘東洋 平和論’ 著述을 完成할 때까지 死刑 執行을 미루겠다는 約束을 지키지 않았다.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뼈는 바스라지고 頭蓋骨만 남은 白骨과 뤼순監獄의 癌房(暗房). 송홍근 記者



    “朝鮮人은 日本人이던 터라…”

    北緯 38度 49分, 東京 121度 15分 一帶에 日帝에 抗拒한 이들의 屍身이 묻혀 있다. 뤼순 監獄에서 죽은 이들을 埋葬한 곳이다. 나뭇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1m 圓筒에 屍身을 넣어 監獄 周邊 野山에 묻었다. 安重根의 屍身도 이 一帶에 묻힌 것으로 推定된다.

    “遺骨과 官은 複製한 게 아니라 實物입니다.”

    뤼순 監獄에서 遺跡에 對해 說明하던 中國人이 表情을 일그러뜨리면서 말했다. 初等學校 低學年 學生이 겨우 들어갈 만한 부피의 圓筒은 歲月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속을 드러냈다. 圓筒 속에서 酸化하지 않고 形態를 保存한 白骨은 누렇게 變했다. 뼈는 바스라지고 頭蓋骨만 남은, 오래前 죽은 이의 形象은 無慘했다.

    뤼순 監獄은 러시아와 日本의 建築 方式이 뒤섞여 있다. 抵抗하는 中國人을 收監할 目的으로 1902年 러시아가 처음 짓고, 1907年 日本이 增築했다. 흰色 甓돌 建物은 러시아, 붉은 甓돌 建物은 日本이 지었다. 現在 名稱은 ‘旅順日俄監獄’. ‘日(일)’은 日本을, ‘俄(아)’는 러시아를 뜻한다.

    뤼순 監獄의 面積은 2萬6000㎡, 監房 數는 275個다. 韓國과 中國의 抗日支社가 체포당해 收監됐고, 갖은 拷問으로 죽어나갔다. 監獄 內部 施設을 說明하던 中國人이 日帝强占期 收監者 現況을 一目瞭然하게 整理해놓은 圖表 앞에서 ‘未安하다’로 解釋되는 表情을 지으면서 말했다.

    “中國人, 러시아人, 日本人 等 나라別로 收監者 數를 區分한 것인데, 朝鮮人은 따로 統計를 내지 않았습니다. 朝鮮人은 日本人이던 터라….”

    뤼순 監獄은 7個國 2000名 넘는 사람을 同時에 受容했다. 死刑執行실, 拷問室, 强制勞動 施設은 慘酷했다. 지름 4㎝의 圓뿔形 구멍만 뚫린 癌房(暗房)에 갇힌 이는 어떻게 버텼을까. 圓뿔形 구멍으로 들여다본 2.4㎡ 넓이의 監房에는 요강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監獄 規則을 重大하게 違反한 者’ ‘反抗, 鬪爭을 하는 者’가 窓(窓)도 빛도 없는 癌房에 갇혔다.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송홍근 記者

    “志士가 絞殺된 곳”

    日帝는 收監者를 軍需物資 生産에 動員하면서도 食事를 하루 한 끼만 提供했다. 收監 態度에 따라 食事量을 7個 等級으로 나눴는데, 中下位 等級 收監者의 하루 食事量은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이었다.

    뤼순 監獄은 中國의 抗日 遺跡地 구실을 하고 있다. 日本에 抗拒하다 收監된 이들의 事緣이 오롯이 남아 있다.

    位쇼우안은 1941年 뤼순 監獄에서 處刑됐다. 結審公判 때 判事와 위의 問答이다. “너는 왜 17次例나 放火를 했나.” “너희가 우리 中國 사람을 죽이는 것을 憎惡했기 때문이다.” “너는 이미 붙잡혔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붙잡혔으니 어떻게 해도 相關없다. 붙잡히지 않았다면 繼續 너희 日本 侵略者들에게 防火했을 것이다.”

    1942年 處刑된 지쇼유試案은 “너희는 왜 放火를 했는가”라는 判事의 물음에 “너희들은 왜 中國을 侵略했는가”라고 되묻고는 “너희는 日本이 文明·法治國家라고 하지만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을 死刑에 處하는 것은 野蠻國家의 行爲”라고 叱責했다.

    뤼순 監獄에서 죽은 이의 數는 把握되지 않는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 죽었다”는 게 公式 說明이다. 1942年부터 日帝가 降伏할 때까지만 700名이 死刑당했다. 日帝가 降伏한 다음 날인 1945年 8月 16日에도 死刑이 執行됐다고 한다. 獨立運動家 류상근, 최흥식 等이 이곳에서 死刑당했고, 신채호(1880~1936), 이회영(1867~1932) 等이 獄死했다. 安重根의 死刑은 1910年 3月 26日 執行됐다.

    “이곳이 安重根 知事(志士)가 絞殺된 곳입니다.”

    中國人 解說者의 說明을 듣던 同行한 韓國人이 말했다.

    “이곳에서 絞首刑을 當하셨군요.”

    그러자 解說者는 손으로 ‘아니다’라고 表示하면서 이렇게 敷衍했다.

    “日本이 絞殺(木 졸라 죽임)했습니다. 安重根 知事는 犯罪人이 아닙니다. (絞首刑이 아니라) 絞殺을 當한 겁니다.”

    患難之交 强調하는 속내

    뤼순 監獄은 ‘安重根 記念館’이나 다름없다. 安 醫師의 발자취가 ‘특별하게’ 모셔져 있다. 中國人 抗日支社보다 安重根이 더 强調돼 있다. 解說者는 “中國人과 韓國人은 同志(同志)면서 같은 便”이라고 말했다. 監獄에 따로 마련한 ‘安重根 知事 展示館’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의 글이 적혀 있다.

    “淸日戰爭 後 中國·韓國 兩國 國民의 日本 帝國主義에 對한 反對 鬪爭은 今世紀 初 安重根 知事가 하얼빈役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狙擊할 때 始作됐다.”

    뤼순 監獄에는 ‘爲國獻身軍人本分’(安重根義士遺墨-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軍人의 本分이다)을 비롯한 安重根의 遺墨(遺墨, 살아 있을 때 남긴 글이나 그림)만 따로 모아놓은 空間도 있다. 1910年 2月 14日 裁判에서 死刑을 宣告받은 後 安重根이 쓴 遺言과 어머니 전상서도 記錄돼 있다.

    뤼순 監獄에서 自動車로 10分 程度 距離에 있는 ‘日本關東地方法院’의 事情도 비슷하다. 安重根이 裁判받은 法廷을 再現해놓았으며 거의 모든 展示物에 漢字와 한글이 倂記돼 있다. 옛 法院의 遺跡 管理는 韓國系 中國人이 맡고 있다.

    1945年 8月 蘇聯 붉은군대가 進駐하면서 뤼순 監獄은 解放됐다. 랴오둥半島는 1945年 蘇聯軍에 依해 占領됐다가 1951年 中國에 返還됐다. 蘇聯軍은 1955年 撤收했다.

    뤼순 監獄이 中國의 國家重點歷史文化財로 指定된 것은 1988年. 胸像이 設置되는 等 安重根이 ‘强調’된 것은 近來의 일이다. 日本關東地方法院은 病院 建物로 쓰이다 2002年 遺跡으로 丹粧됐다. 日本關東地方法院 遺跡이 安重根에게 傍點을 찍은 것도 最近이다.

    구해우 未來戰略硏究院腸은 “中國이 歷史를 利用해 韓國을 美日同盟에서 떼어놓으려고 한다”고 指摘했다. 中國은 상하이 臨時政府 廳舍를 두고도 “兩國 國民의 對日抗爭 歷史의 共同財産”이라면서 患難지교(患難之交)를 强調한다.

    “安重根은 英雄이다”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뤼순은 現在 다롄(大連)市에 屬한 區(區)다. 1950年 뤼순과 다롄이 뤼다(旅大)로 統合됐다가 1981年 다롄으로 改稱했다. 다롄은 1984年 13個 沿海開放都市에 包含됐다. 1992年 以後 每年 10%가 넘는 經濟成長率을 記錄했다. 1人當 國內總生産(GDP)은 1萬8600달러로 베이징, 상하이보다 높다. 다롄의 GRDP(地域內寵生産)는 1300億 달러로 北韓 全體 GDP(300億 달러 推算)의 4倍다.

    다롄의 都市 風光은 多國籍이다. 러시아와 日本의 痕跡이 只今껏 남아 있다. 새로 超高層 아파트를 지을 때도 러시아 樣式을 加味한다. “오랫동안 日本의 影響을 받은 터라 中國의 다른 都市보다 自動車 警笛을 비롯한 騷音이 적다”는 弄談 半, 眞談 半의 얘기도 膾炙된다. 最近에는 보자르 樣式(19世紀 파리에서 流行한 新古典主義 建築)의 高級 住宅 建築 붐이 일었다.

    다롄에서도 富裕하기로 소문난 地域에 位置한 다롄 博物館은 韓國의 獨立記念館을 닮았다. 거의 모든 展示物이 抗日戰爭과 關聯한 것이다. ‘다롄 抗日放火團’을 彫刻한 作品 앞에서 案內員의 說明을 듣는 學生들의 表情이 眞摯하다. 한 市民이 博物館에 展示된 地圖를 가리키면서 딸에게 抗日戰爭을 說明한다. 그에게 安重根에 對해 묻자 이렇게 答했다.

    “抗日戰爭 때의 朝鮮人 英雄이다.”

    다롄은 中國 ‘海洋 崛起(堀起)’의 前哨基地다. 中國은 1998年 사들인 옛 蘇聯 退役 航母를 다롄에서 改造한 랴오닝함을 2012年 9月 實戰配置했다. 첫 讀者 乾燥 航空母艦(길이 270m, 幅 35m 規模)도 다롄에서 製作되고 있다. 마오쩌둥의 生日인 12月 26日 進水하는 게 目標다. 이 航母에 ‘베이징’ 或은 ‘마오쩌둥’이라는 이름을 붙이리라는 觀測이 나온다. 美國과 中國의 國富(國父)에서 따온 ‘조지 워싱턴’과 ‘마오쩌둥’ 航母가 東中國海 霸權을 두고 다툼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西海라고 부르는 바다, 黃海는 東中國海의 一部다. 中國人은 黃海와 渤海도 區分해 말한다.

    海洋 崛起의 短期 目標는 東中國海 및 南中國海에서의 領有權 强化, 中期 目標는 太平洋에서의 影響力 擴大다. 시진핑 主席이 버락 오바마 美國 大統領에게 要求한 新型 大國關係에는 太平洋에서의 霸權을 나눠 갖자는 뜻이 담겼다.



    中華 秩序의 復元

    中國에 主宰하는 外交部 當局者는 이렇게 說明했다.

    “러일戰爭 前後로 ‘다롄을 支配하는 者가 랴오둥半島를 支配하고, 랴오둥半島를 支配하는 者가 東아시아를 支配한다’는 말이 膾炙됐다. 다롄이 北쪽으로는 宣揚과 하얼빈으로 이어지는 滿洲의 關門이자 西쪽으로는 베이징과 톈진, 南쪽으로는 칭다오와 웨이하이, 東南쪽으로는 仁川과 南浦, 東北쪽으로는 단둥과 新義州 等 八方(八方)을 모두 監視할 수 있는 ‘아르고스의 눈’이기 때문이다. 日帝의 韓半島 竝呑度 日本軍이 1904年 12月 러시아軍이 掌握한 뤼순의 203高地를 占領한 것에서 비롯했다.”

    아르고스(Argos)는 그리스 神話 속, 100個의 눈을 가진 巨人이다. 마틴 자크는 著書 ‘中國이 世界를 支配하면’에서 “위안貨가 貿易 決濟의 手段이 되고, 中國語가 英語 代身 公用語의 位置를 占하는, 中國이 經濟 霸權을 차지한 以後의 東아시아를 想像해보라”고 한다. 中國은 韓國을 어떻게 다룰까.

    9月 3日 베이징 톈안먼 廣場에서 열린 抗日戰勝 70周年 記念 閱兵式의 各國 頂上 자리 配置에서 中華(中華)-小中華(小中華)-주변국으로 이뤄진 朝貢 體制를 떠올린 이들도 있다. 日本이 뤼순의 203高地를 占領한 以後의 110年은 韓國이 異例的으로 中國으로부터 자유로웠던 時期다. 專門家들은 시진핑의 ‘中國夢(中國夢)’에 ‘中華 秩序 復元’의 野望이 담겼다고 본다.

    韓國 屈指 造船社에서 最高經營者로 일한 人事는 “中國 最高指導部를 數次例 만났는데, 安東都護府 이야기를 하면서 平壤 一帶의 遺跡을 中國人들이 남긴 遺産으로 여겨 唐慌했다”고 傳했다. 安東都護府는 高句麗 滅亡 後 黨(唐)李 高句麗의 옛 땅에 設置한 最高 郡政機關이다. 제임스 릴리 前 駐韓 美國大使는 2007年 美國 議會에서 “中國 指導部가 北韓의 折半假量을 中國 땅으로 생각한다. 東北工程과 白頭山 周邊의 大君(大軍)이 그와 無關치 않다”고 主張했다.

    ‘박근혜 큰누님’

    朴槿惠 大統領에 對한 中國 人士들의 好感은 대단했다. ‘파오다제(朴大姐, 朴槿惠 큰누님)’라는 愛稱도 登場했다. 2013年 5月 中國에서 發賣된 朴 大統領 自敍傳 ‘絶望은 나를 단련시키고, 希望은 나를 움직인다(絶望鍛鍊了我)’는 베스트셀러 目錄에 이름을 올렸다. 中國 人士들은 朴 大統領의 人生을 “悲劇을 이겨낸 挑戰과 愛國心의 삶”으로 規定하면서 “閱兵式에 參席한 데 感動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中國 人士들의 하나같은 反應이 儀禮的 搜査(修辭)로 느껴지진 않았다. 朴 大統領에 對한 日本의 反應과 對照的이다. 日本 右翼 言論은 朴 大統領을 嘲弄하는 듯한 記事도 서슴없이 싣는다.

    美國은 美日同盟을 核心軸으로 ‘힘의 再均衡(rebalance)’에 나서면서 中國을 牽制하고 있다. 美國의 保守主義者들은 韓國이 中國과 가까워지는 것을 마뜩잖게 여긴다. 美國 保守主義의 판테온으로 불리는 에드윈 퓰러 헤리티지財團 設立者는 記者와의 인터뷰에서 “自由와 非(非)自由 사이에는 中立이 存在할 수 없다”면서 “美國과 中國 사이에서 韓國이 中立을 取하는 것은 中國과 朝貢關係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批判했다. 그는 美國에서 가장 影響力 있는 保守 人士로 꼽힌다. 韓國 保守陣營 一角에서도 “박근혜 政府의 外交政策이 親美자주에서 親中事大로 갈 危險이 있다”고 憂慮한다.

    白堊館은 “러일戰爭은 植民地 支配下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人에게 勇氣를 줬다”는 內容이 담긴 아베 談話를 歡迎했다. ‘戰爭할 수 있는 日本’을 통해 中國을 牽制하겠다는 것이다. 오바마 大統領은 “日本이 더 큰 地域的, 世界的 安保 活動을 맡은 것을 歡迎한다”고 말했다. 韓半島 有事時 日本 自衛隊에 韓國 進出 問題와 關聯해 政府는 “韓國의 同意 없이 韓半島에 上陸 못한다”고 强調했으나 展示作戰 統制權을 가진 美國이 韓國에 自衛隊의 上陸을 容認하라고 要請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丈量(張良) 中國靑年政治學院 客座敎授는 “中國 指導部가 情緖的으로 韓國을 옛 屬國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게, 아베 總理를 비롯한 右翼 엘리트들은 옛 植民地이던 韓半島, 關東州, 타이완을 언젠가는 日本의 影響圈 아래로 되돌려놓아야 할 곳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第2次 世界大戰 終戰 以前 日帝의 植民地는 韓半島와 關東州, 타이완, 火太(樺太, 사할린)다. 滿洲는 傀儡政府(滿洲國)를 세워 支配했다.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安重根이 死刑을 宣告받은 옛 日本 植民地 關東州 뤼순의 日本關東地方法院. 송홍근 記者

    쉽지 않은 줄타기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다롄 博物館에서 中國人 아버지가 딸에게 日帝의 中國 侵略 歷史를 說明한다. 송홍근 記者

    ‘旣存 大國’ 美國과 ‘上昇 大國’ 中國 사이에서 韓國은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見解는 크게 다섯 갈래로 나뉜다. ①美國 便乘 ②中國 便乘 ③自强(自强) 路線 ④現象 維持 ⑤東아시아 共同體가 그것이다.

    ①은 韓美同盟을 强化하고 韓美同盟+美日同盟을 活用해 中國을 牽制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韓半島의 핀란드化(冷戰 時期 蘇聯과 핀란드의 關係를 빗댄 表現. 蘇聯은 핀란드 內政에도 干涉했다)를 막을 수 있다는 것. 小說家 兼 評論家 복거일 氏의 見解(“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支配하려 하게 마련이다. 中國은 北韓을 돕는 敵國이다. 日本의 役割이 없었다면 김일성 王朝의 支配를 받았을 것이다”)가 代表的이다.

    드러내놓고 ②를 主張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②는 明(明), 靑(淸) 交替期의 愚를 犯하는 것을 憂慮한다. 大明天地(大明天地)에 살던 朝鮮은 中國의 勢力 轉移에 對處하지 못해 三田渡의 屈辱을 當했다. 金榮煥 북한민주화네트워크 硏究委員은 “中國에 ‘統一 韓半島는 中立’이라는 確信을 줘야 한다”면서 “中國과 가까워지는 것이 韓國의 國益에 配置되지 않는다”고 主張한다.

    ③은 獨自 路線을 통해 自强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세일 韓半島先進化財團 常任顧問(서울대 名譽敎授)은 ①의 重要性을 强調하면서도 “우린 大元帝國(몽골)과도 싸운 나라다. 東아시아 고슴도치가 돼야 한다”고 ③의 見解를 섞는다. ③을 支持하는 이들 中 강경론자는 韓國의 核武裝을 主張한다. “쥐뿔도 없으면서 自尊心만 세다”는 評價를 듣는 北韓이 ③의 路線을 걷는 側面이 있다.

    이웃 害치는 獨夫

    ④는 안미경中(安美經中), 親美年中(親美聯中)을 維持하는 것이다. “美國, 中國과 잘 지내면 되는 일” “美國, 中國의 求愛는 딜레마가 아니라 祝福”(윤병세 外交部 長官)이라는 見解가 ④와 類似하다. “돈은 中國에서 벌면서 손바닥은 美國과 맞춘다”는 批判이 베이징에서 나온다. 美中 사이에서 줄타기는 “決코 쉽지 않은 일”(丈量 中國靑年政治學院 客座敎授)이다.

    ⑤는 平和와 信賴의 새로운 地域秩序를 構築하자는 것이다. 윤영관 서울대 敎授(전 外交部 長官)의 見解가 代表的이다. “統一 韓半島가 繁榮한 平和 志向 國家면서 通商 物流의 中心이 돼야 한다. 이웃 나라가 統一 韓半島를 통해 經濟的 利得을 보고, 東아시아에 葛藤이 사라지고 安定이 定着되게 해야 한다.”

    ①~⑤에는 北韓 變數가 엇갈려 들어간다. 北韓을 두고도 壓迫을 통한 體制 崩壞만이 核 問題 解決과 統一로 가는 答이라는 見解와 北韓과의 交流 協力을 통해 地政學的 限界를 克服하자는 意見 等이 부딪친다.

    安重根이 絞殺된 뤼순 監獄 死刑執行場의 空氣는 차가웠다. 醫師(義士)는 죽음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安重根은 ‘前鑑(前鑑)’ ‘懸賞(現狀)’ ‘複線(伏線)’ ‘問答(問答)’이라는 小題目을 적어놓고 ‘東洋 平和論’의 序文을 完成한 後 1張인 ‘前鑑’을 쓰다 죽었다. 그가 提出하려 한 ‘東洋 平和에 對한 意見’은 알 수 없으나 ‘前鑑’에서 歷史를 되새기면서 軍國主義의 無謀함을 警戒하고 弱肉强食의 國際關係를 糾彈한 것에 미뤄볼 때 ‘平和와 協力, 義理와 信賴의 東洋’을 꿈꾼 것으로 보인다. 105年 前 安重根이 마지막으로 쓴 文章은 이러하다.

    “自然의 形勢를 돌아보지 않고 이웃나라를 해치는 者는 毒婦(獨夫)의 判斷을 期必코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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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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