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74年生이 保守政黨 싫어하는 理由[奉達號 便宜店 칼럼]|新東亞

1970~74年生이 保守政黨 싫어하는 理由[奉達號 便宜店 칼럼]

X世代는 어쩌다 ‘갑툭튀’ 進步가 됐을까

  • 奉達號 便宜店主

    入力 2021-03-29 10:00:02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與이면서 野인 民主黨의 꽃놀이牌

    • 1970~74年生의 壓倒的 進步性向

    • 全體主義·暴力主義의 끝 世代

    • 注入式으로 배운 主體思想

    • 弱肉强食과 野蠻의 끝자락

    • ‘幻想의 텍’ 자랑하는 무데뽀

    • 僞善의 世代 或은 꼴不見 꼰대

    • 한총련 讚歌와 ‘난 알아요’ 사이

    2020년 4월 9일 이낙연 당시 더불어민주당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 선거운동원들이 민주당 기호를 강조하는 손동작을 하고 있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2020年 4月 9日 李洛淵 當時 더불어民主黨 鍾路區 國會議員 候補 選擧運動員들이 民主黨 記號를 强調하는 손動作을 하고 있다. [김재명 동아일보 記者]

    最近 우리 社會에서 가장 論爭的인 政治 이슈를 꼽으라면 30~40臺가 흔들림 없이 더불어민주당을 支持하는 現象일 것이다. 거기에 對해서는 다양한 解釋이 可能하다. 元來 靑年 世代는 野(野)性이 剛하다. 그리고 保守政黨과 比較해 민주당을 支持하는 性向도 强하다. 一旦 이것이 重疊해 나타나는 現象 아닐까 싶다. 민주당은 이미 執權與黨이 됐는데 ‘지난 時節의 殘滓(이른바 ‘積弊’)와 맞서 싸운다’는 主張을 내세우며 旣得權에 抵抗하는 이미지 戰略을 同時에 驅使하는 中이다. 與黨이면서 野黨이기도 限, 民主黨의 꽃놀이牌다. 

    게다가 只今은 코로나19街 모든 輿論의 關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버렸다. 다른 어떤 말도 國民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이 危機를 脫出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戰爭 中엔 將帥를 거둬들이지 않는 法이다. 그런 安定 審理가 女(與)性을 부추겨, 野性은 野性대로, 女性은 女性대로 끌어 모으는 好時節이 민주당 앞에 펼쳐지고 있다.

    모든 世代 통틀어 가장 非保守化된 集團

    1992년 4월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X세대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동아DB]

    1992年 4月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X世代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東亞DB]

    그렇더라도, 코로나19는 모든 世代가 겪는 일인데, 왜 唯獨 30~40臺가 민주당을 支持하는 傾向이 强할까. 게다가 흥미로운 現象이 하나 있다. 30~40代 가운데서도 1970~74年生의 民主黨 支持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최슬기 韓國開發硏究院(KDI) 國際政策大學院 敎授 等의 論文 ‘世代別로 투표하는 政黨이나 候補는 달라지는가?’(‘한국사회’, 第20卷 第2號)에 따르면 1970~74年生은 우리나라 모든 世代를 통틀어 가장 非(非)保守化된 集團이다. 이들은 이른바 86(80年代 學番·60年代 出生)世代에 屬하는 1965~69年生 뿐 아니라 아랫世代人 1975~79年生보다 進步性向이 짙다. 같은 1970年代生 中에서도 6~7% 높은 壓倒的 進步性向을 보인다. 都大體 왜 그러는 것일까? 그들이 進步라고 믿는 것은 果然 ‘進一步’가 맞을까? 

    이에 對해 다양한 解釋이 存在한다. 或者는 “아직 資産(資産)을 形成하지 못함으로써 保守 旣得權에 合流하지 못했고, 1990年代 後半 外換危機에 就業을 準備한 世代로서 어려움을 겪으며 生活해 現實 批判的 特性을 維持하고 있다”고 分析한다. 資産과 保守化의 相關關係는 一般的으로 理解되지만 1970~74年生이 唯獨 ‘갖지 못한(혹은 苦生한) 世代’라는 解釋에 對해서는 疑問이 든다. 所得 規模 等을 綿密히 分析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學生 運動圈과 1970~74年生의 相關關係를 말하기도 하고, 서태지-X世代와 같은 文化的 背景을 擧論하기도 하며, 金大中-노무현 政府 時節 20代를 보낸 經驗과 꿰맞추는 分析도 있다. 다 맞을 것이다. 특정한 하나의 理由만으로 政治·社會 現象을 說明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까라면 까던 暴力의 時節

    오늘은 그것을 되짚어보려고 한다. 1970~74年生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 過去에 別로 注目받지 못했던 이 世代가 最近 갑자기 툭 튀어나와 보이는 ‘갑툭튀’ 世代처럼 됐는데, 어디 있다가 이제야 튀어나온 것인가. 그 ‘5年 桐甲’들이 살아온 時代에는 大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들은 앞 5年, 뒤 5年 世代와는 어떻게 다르기에 그럴까? 

    多幸히(?) 筆者는 1974年生이다. 學校를 일찍 들어가 1973年生들과 學窓 時節을 함께 보냈다. 大學校 學番으로 따지면 92學番. 좀 特異한 人生 軌跡을 갖고 있어 高等學校 1學年이던 1989年부터 學生運動을 始作했는데, 出生年度로 따지자면 1970年生들과 함께 運動했다. 要컨대 1970~74年生을 모두 아울러 回顧할 수 있는 아주 작은 資格 要件 하나를 갖추었다는 말이다. 筆者가 우리 世代를 代表할 만큼 ‘平均’的인 삶을 살아온 것은 決코 아니라 할지라도, 아예 資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이다. 

    始作부터 話題를 돌려 이야기해 보자. 벌써 1年 넘게 持續되고 있는 코로나19 事態를 大韓民國이 比較的 잘 克服하는 底力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或者는 K-防疫이니 ‘民主主義’의 威力이니 하고 말하는데, 果然 그럴까? 오히려 反對 아닐까? 코로나19의 깊은 골을 쭉 거쳐 오면서 筆者가 자꾸 떠올리는 過去는 엉뚱하게도 ‘化生放訓鍊’이다. 

    1981年生에게 化生放訓鍊을 이야기하니 “軍隊에서 ‘가스 體驗’을 말하는 겁니까?”라고 되묻더라. 筆者가 初等學校 다니던 時節에는 化生放訓鍊이라는 것이 있었다. 每月 15日 民防衛 訓鍊을 하던 때에 北韓의 生化學戰에 對備한다며 化生放 訓鍊도 實施했는데, 커다란 비닐封紙 같은 것을 準備해 뒤집어쓰고 運動場에 누워있거나 冊床 밑에 엎드리곤 했다. 準備物 챙겨 오지 않았다고 先生님에게 혼났던 記憶, 장난치며 떠든다고 맞았던 아픔, 뙤약볕 아래 비닐封紙 쓰고 땀을 뻘뻘 흘리던 惡夢이 겹친다. 

    그런 時節이었다. 全 國民이 一絲不亂하게 움직이던 ‘總力 動員’의 時節. 하라면 하고, 까라면 까고, 하지 말라면 안 하던 時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렇게 했다. ‘團體 氣合’이라는 것도 當然한 듯 橫行했다. 아마도 우리 世代가 그 마지막 世代인 것 같다. 不過 10年 뒤 世代가 化生放 訓鍊을 모르는 걸 보면. 

    暴力의 時節이었다. 내 記憶에 트라우마로 남은 事件이 하나 있다. 高等學校 1學年 때 우리 班 아이 하나가 다른 아이를 죽도록 두들겨 팬 事件이다. 밀걸레 자루를 부러뜨려 개 패듯 패는데도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敎室에서 自律學習 時間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도 숨죽여 고개 숙이며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무서워서, 같이 맞을까 봐. 그것이 내 알량하고 卑怯한 內面의 象徵처럼 다가와 아직도 부끄럽고 끔찍하다. 被害者는 얼굴이 피범벅 됐고, 2~3週假量 學校에 나오지 못한 것으로 記憶한다. 加害者는 强姦 嫌疑로 警察 調査를 받기도 하는 等 못 말리는 不良 學生이었는데 隣近 學校 敎師 아들이라는 理由로 이래저래 退學은 면했다. 그리고 卒業했다. 學校 祝祭 때 밴드部 리더로 노래도 불렀던 것으로 記憶한다. 그때는 그런 일이 ‘많은’ 時節이었다. 別로 異常하지 않은 時節이었다. 

    只今 우리 社會에 번지는 ‘미투’(Metoo·나도 當했다)니 ‘學暴’(學校 暴力)이니 하는 現象을 보면 때론 食怯한다. 그 잣대를 우리 時代에 갖다 대보면 社會的으로 埋葬될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구나 생각하고, 나도 무슨 ‘못된 짓’을 했던가 되돌아 反省하곤 한다. 우리 世代는 世代交替를 넘은 ‘時代 交替’의 한복판에 서 있다.

    北韓 原典과 注入式 敎育

    다른 한便으로는 全體主義의 끝 世代였고, 暴力主義의 끝 世代였다. 1970~74年生들의 ‘갑툭튀’ 政治 性向을 學生運動 履歷과 結付하는 것은 若干 지나친 感도 있지만 아예 無視하고 넘어갈 수 있는 事項도 아니다. 

    1989年부터 學生運動을 始作한 사람으로서 1980年代 學番과 1990年代 學番의 學生運動 經驗은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 보면 一旦은 ‘主體思想’을 떠올리게 된다. 韓國 學生運動圈에 主體思想이 普及되기 始作한 때가 1986~87年頃이다. 主體思想은 宏壯히 빠른 速度로 學院街를 占領하며 1989年쯤이면 이른바 NL(民族 解放) 系列이 거의 모든 大學의 總學生會와 運動圈을 掌握했다. 歷史上 가장 完璧한 ‘理念 마케팅’의 成功 事例 아닐까 싶다. 一絲不亂한 傳道師들의 힘이었다. 

    나 個人的으로는 1980年代 學番 先輩들이 부러웠는데, 理由 가운데 하나는 어쨌든 그들은 苦悶과 論爭 가운데 主體思想을 받아들였다는 事實이다. 1990年代 以後 學番은 그런 것이 없었다. 注入式으로 主體思想을 받아들였다. 北韓 原電(原典)은 넘쳤고, “이것 아니면 보지도 말라”는 式으로 先輩들에게 敎育받았다. 이불 뒤집어쓰고 北韓 라디오放送 들으면서 어렵사리 主體思想을 익혔다는 先輩, 圖書館에 있는 反北(反北) 理念 書籍을 짜깁기해서 自身만의 北韓 原典을 만들어냈다는 先覺者(?), 日本語를 익혀 마르크스주의 原電을 耽讀했다는 開拓者 精神으로 가득한 武勇談을 들을 때마다 率直히 부러웠다. 그들은 그렇게 ‘自己 머리’로 思考할 수 있는 機會가 어느 程度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이 없었다. 

    學力考査의 끝 世代였다. 只今도 入試 敎育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주면 주는 대로,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수걱수걱 믿고 따르던 世代의 끝 世代였다. 反抗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性的 悲觀 自殺이 그렇게 많았던 것 같다. 죽음은 最高의 反抗이었으니.) ‘愛國朝會’라는 게 있어서 月曜日 아침마다 運動場에 차렷 姿勢로 서서 校長先生님의 一場 演說을 한 時間 넘게 들어야 했던 마지막 世代였고, 그러다 失神하는 아이들도 꽤 있었으며, 그렇게 쓰러지는 아이들을 “弱해 빠진 녀석들”이라고 辱해도 그런가 보다 했던 世代다. “일부러 저렇게 쓰러지는 것 아니야?”라면서 우리끼리 비웃고 疑心하고 수군대는 世代이기도 했다. 

    强한 者만 살아남는 것을 當然하게 여기는 時代였다. 學力考査 끝나면 學校 校門에 “祝, 서울大 3名, 연세대 10名, 고려대 12名 合格”이라고 플래카드가 나붙어도 何等 異常하게 생각하지 않는 時代였고, 그 數字가 적으면 우리 學校가 猖披하게 느껴지던 그런 時代였다. ‘歌謠톱10’이 있던 時代, ‘미스코리아 大會’가 높은 視聽率을 記錄하던 時代였다. 競爭의 끝 世代, 弱肉强食의 끝 世代였다. 只今도 競爭과 弱肉强食은 繼續되고 있지만, 그것이 露骨的인 社會 價値로 汎濫하던 野蠻의 끝자락을 우리는 거쳐온 것 같다.

    被害者이자 加害者의 어떤 僞善

    1993년 5월 27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4만여 명의 대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출범식 전야제 행사가 열렸다. [동아DB]

    1993年 5月 27日 서울 城北區 고려대에서 4萬餘 名의 大學生이 參加한 가운데 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한총련) 出帆式 前夜祭 行事가 열렸다. [東亞DB]

    1980年代 運動圈과 1990年代 運動圈의 差異로 ‘大學生’에 對한 自覺의 差異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1980年代 先輩들만 해도 一種의 知事(志士)的 風貌가 있었다. 우리는 大學生, ‘選擇받은’ 大學生, 그러니까 社會의 惠澤을 받은 만큼 歷史와 民衆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選民(選民) 意識 비슷한 感情마저 1980年代 大學生에겐 남아 있었다. 市民들도 “배운 녀석들이니까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하면서 받아줬다. 1990年代는? 大學 定員이 急激히 늘면서 大學生이 넘쳤다. 大學生이 무슨 특별한 階層이라서 祖國과 民族을 위해 報答해야 한다는 그런 歷史的 使命感 같은 것은 稀薄해졌다. 게나 고둥이나 大學生이었다. “나는 大學生”이라고 뻐기면 오히려 놀림감이 되는 時代의 첫 世代, 그러면서 “靑年이 서야 祖國이 산다”고 주먹을 불끈 쥐던 時代의 끝 世代. 우리는 이래저래 ‘끼인’ 世代였다. 

    1989年 學生運動을 回顧하면 亦是 記憶에 남는 場面은 林秀卿 密入北(密入北) 事件이다. 그해 7月 서울地下鐵 뚝섬역에서 한양대役까지 鐵路 위를 뛰었던 事件을 記憶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말 그대로, 地下鐵 2號線 뚝섬역에서 한양대役까지 占據하고 뛰었다. 警察이 集會 場所인 漢陽大 周圍를 源泉 封鎖하면서 한양대役을 無停車 通過시키니까 뚝섬역에 集結해 鐵路로 뛰어 올라가 한양대役까지 數千(或은 數萬) 名이 移動한 事件인데, 地下鐵 配車 時間 等을 綿密하게 計算했다고는 하지만 只今 같았으면 그러한 試圖 自體만으로 엄청난 社會的 非難에 直面했을 事件이다. 사람 生命을 擔保로 해, 자칫 大型 災難 事故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事件이다. 그것을 ‘幻想의 텍(tac; ‘戰術’의 運動圈 隱語)’이라 자랑하는 무데뽀 時節이었다. 

    1990年代 初盤에는 列車를 停車시키는 事件도 많았다. 서울에서 集會가 있으면 地方에서 列車와 高速버스로 上京했는데, 警察이 모든 出發驛과 톨게이트를 檢問했다. 그러니 鐵路 周邊에 集結했다가, 强制로 列車를 세워 타고 上京했다. 말 그대로 ‘列車 奪取’다. 亦是 汽車 時間表 等을 檢討했다고 하지만, 乘車 費用은 支拂했다고 자랑하지만, 萬에 하나 그때 뒤따르는 列車가 豫定에 없이 달려와 全速力으로 부딪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 아찔한 時代였다. 우리의 ‘正當한’ 目的을 위해서는 어떤 手段과 方法이든 正當化될 수 있다는, 그런 思考의 끝자락에 있던 世代였다.

    여러 張의 셀로판지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왼쪽)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오른쪽)는 1990년대에 큰 인기를 누렸다. [동아DB]

    최영미의 詩集 ‘서른 잔치는 끝났다’(왼쪽)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小說 ‘喪失의 時代’(오른쪽)는 1990年代에 큰 人氣를 누렸다. [東亞DB]

    우리는 그렇게 자랐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오늘의 思考와 行動에도 影響을 미치는 것 같다. 요즘 젊은 世代를 보면, 그리고 只今 우리 社會가 돌아가는 模樣을 보면, 마치 天地開闢이라도 하는 듯 世上이 뒤바뀐 것을 느낀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僞善(僞善)의 世代’인지도 모른다. 나쁜 짓을 할 건 다 했으면서, 被害者이자 加害者였으면서, 다음 世代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世代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一見 責任感이지만 後輩들의 視線으로는 ‘꼰대’처럼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다. “86世代 꼰대보다 97世代(90年代 學番·70年代 出生)世代 꼰대가 더 꼴不見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種種 듣곤 하는데, 어떤 意味인지 大體로 理解가 된다. 

    우리는 舊(舊)體制의 끝이자 神(新)體制의 始作이기도 했다. 學歷考査가 廢止되고 修學能力試驗이라는 것이 導入되는 中間에 끼어 있었고, 그래서 再修를 한 녀석들은 學力考査와 修能을 모두 經驗하기도 했다.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첫 世代였다. 全大協(全國大學生代表者協議會)은 大學 總學生會長들의 協議體 水準이었는데, 한총련은 單科大學 學生會長까지 代議員으로 삼았다. 外見上 內部 民主主義가 實現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脫退하려면 全校生 投票를 거쳐야 하는, 들어가긴 쉬워도 나오긴 어려운 組暴과도 같은 文化가 ‘그러려니’ 받아들여지던 時代였다. 

    한쪽에서는 한총련 讚歌를 부르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난 알아요’(‘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曲)를 부르고, 한쪽에서는 달리는 列車를 强制로 멈춰 세운 時間에 다른 한쪽 親舊들은 건담 프라모델을 色漆하고, 소니 CD플레이어로 X재팬의 音樂을 듣고, 퀸과 메탈리카에 熱狂하고, ‘喪失의 時代’(무라카미 하루키의 小說)를 읽고,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의 詩)고 宣言하던 時節이었다. 

    PC通信의 첫 世代여서, 밤새도록 假想의 누구와 同質感을 共有하는 첫 世代이기도 했다. 過去 世代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事緣을 보내면서 ‘首腦’가 있는 同質感을 共有하는 世代였다면 ― DJ가 選擇하지 않으면, 放送局이 送出하지 않으면 共有될 수 없는 同質感이니까 ― 우리 世代는 스스로 사이버 空間에 接續해 同質感의 主人이 되는 世代의 出發點이었다. 그러면서도 “한총련 議長님을 結社 擁衛瑕疵”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먹을 불끈 쥐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인 그런 世代였다. 누군가는 集會에 가려고 列車를 멈춰 세웠고, 누군가는 서태지 콘서트에 가려고 列車票를 豫約했다. 

    우리는 여러 張의 셀로판지를 겹쳐 놓은 것 같은 世代였다. 各各의 色깔이 있지만 겹쳐 놓으면 검정이 되는 世代였다. 그런 意味에서 우리 世代를 특정한 무엇으로 規定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녀석들이란 뜻에서 X世代라고 불렀던 것 같다. ‘알 수 없는’ 世代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世代라고 볼 수도 있겠다. 大體로 모든 世代는 自己 世代를 歷史上 가장 不幸한 世代라고 스스로 측은히 여기는 傾向이 있지만, 어쩌면 우리 世代는 모든 것의 끝이자 모든 것의 始作으로, 兩쪽을 다 겪은 世代라고 자랑(?)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뒤죽박죽인 世代”라고 말한다면 亦是 反駁할 수 없지만, 그래서 어쨌든 舊體制에 가장 敵對的이면서 新體制는 앞장서 擁護하고 싶은, 그런 야누스 世代인지도 모른다.

    過去 ‘議長님’의 꽁무니

    現實로 돌아와, 1970~74年生들의 思考와 性向은 바뀔 수 있을까? 바로 來日 벌어질 일조차 가늠할 수 없는 世上이니 앞으로 어떤 突發 狀況이 펼쳐질지 壯談할 수 없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特히 保守政黨이 1970~74年生들의 支持를 끌어오는 일이란 決코 쉽지 않은 課題다. 

    政黨이 特定 世代와 集團의 支持를 끌어오는 方法에는 두 가지 方向이 있을 수 있겠다. 하나는 自身만의 色깔을 分明히 하면서, 特定 世代가 支持하든 말든, 或如 잃더라도, 오로지 집토끼만 지킨다는 생각으로 正攻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相對의 어젠다를 끌어오는 方式이다. 粥도 밥도 아니게 만들어, 도긴개긴, “아무나 選擇해도 똑같잖아?”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式이다. 國民의힘은 後者를 擇하고 있다. 

    正常的 狀況에서는 後者가 옳을 테다. 그것이 大衆政黨으로서 外延을 擴大하는, 自由民主主義 社會에서 政黨이 發展하고 살아남는 祕訣이기도 하다. 問題는 只今이 ‘正常과는 다르다’는데 있다. 모든 狀況을 코로나19街 接受하고 있고, 百藥이 無效일 程度로 野黨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文在寅 政府 立場에서 보면, 어떻게 저렇게 運이 좋을 수 있을까 싶을 程度로, 檀君 以來 最大의 政治的 幸運을 누리고 있다. 

    巨創한 問題 提起에 比해 結論은 시시해졌지만 차분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민주당을 守舊 保守 集團으로 置簿하면서 더욱 進步的인 色彩를 띠는 政黨이 나오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現實的 主體가 國民의힘이라서 答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어쨌든 코로나19街 完全히 끝나봐야 眞劍勝負가 始作될 텐데, 약을 대로 약은 政治꾼들로 가득한 민주당 政府는 昨今의 狀況을 限없이 政治的으로만 活用하면서 選擧에 꿰어 맞추고 있다. 1970~74年生들은 過去 ‘議長님’ 꽁무니를 熱心히 따라가는 中이다. 이래저래 亂世, 卽 答이 없는 時節을 살아가고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