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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 追從 없었다’는 李仁榮 長官 主張 못 믿는 까닭|新東亞

閔境遇 586칼럼

‘北韓 追從 없었다’는 李仁榮 長官 主張 못 믿는 까닭

  • 閔境遇 閔境遇數學敎育硏究所 所長

    mkw1972@hanmail.net

    入力 2021-04-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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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민전은 北이 라디오로 行動指針 내린 運動圈 背後

    • 한민전, 1987年엔 對中 支持와 共感 받을 口號와 戰術 强調

    • 全大協 運動力量 集中은 한민전의 情報處理 能力 때문

    • 全大協 1期 議長 李仁榮, 國家保安法 違反으로 懲役刑

    • 赦免된 國家保安法 違反者들의 暗默的 合意

    • 民主化 世代 腐敗 徵候 보인 曺國-尹美香 事態

    *586世代 NL(民族解放 系列) 理論家이자 祖國統一汎民族聯合(범민련) 事務處長 出身인 筆者가 文在寅 時代에 表하는 遺憾.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울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 [동아DB]

    1987年 6月 民主抗爭 當時 서울廣場에 모인 學生과 市民들. [東亞DB]

    1986年 救國學生聯盟(구학련)李 만들어진 後 서울대 運動圈은 反美와 親北 性向으로 急激히 바뀌기 始作했다. 1987年 3月 치러진 選擧에서 總學生會長과 單科大學 學生會長 當選者 全員이 이른바 NL(民族解放)契였다. 컨트롤하는 地下組織이 없었음에도 結果가 그렇게 됐다. 그 만큼 NL이 當時 서울대를 壓倒했다. 

    나는 1987年에 서울대 人文大 學生會長으로 活動했다. 그해 1年 내내 距離에서 살았다. 가끔 人文大 學生會室에 있을 때면 빼꼼히 열린 門틈으로 작은 宣傳物 하나가 投入됐다. 한番은 宣傳物을 投入하던 學生과 마주쳤다. 누구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學校에서 보던 學生이었다. 宣傳物은 라디오放送을 整理한 文件이었다. 1985年 7月, 統一革命黨(통혁당) 後身으로 만들어졌다고 主張하는 韓國民族民主前線(한민전)은 北韓 海州에서 라디오 放送을 送出했다. 學生들은 이 한민전 放送의 主要 內容을 編輯한 뒤 작은 宣傳物로 만들어 學生會室 等에 配布했다.

    라디오로 行動 指針 내린 運動圈 背後 ‘한민전’

    한민전의 眞價는 1987年 6月 民主化運動과 그 後續 過程에서 遺憾없이 發揮됐다. 1985~86年 學生運動圈은 레닌주의로 統一됐다. 레닌주의에 따라 學生運動은 時間이 갈수록 過激해졌다. 그러나 한민전은 大衆의 支持와 共感을 받을 口號와 戰術을 强調했다. 大衆運動에 對한 한민전의 指針이 學生들과 結合되면서 學生運動이 6月의 거리에서 決定的 役割을 하게 된 것이다. 

    1987年 9月, 學生들이 ‘軍部獨裁 打倒’를 主張한 反面 한민전은 ‘候補單一化’를 强調했다. 1987年 11月, 大統領選擧 敗色이 짙어지던 무렵 서울대와 연세대는 김영삼, 김대중 두 金氏의 政黨 籠城을 支持했다. 反面 한민전은 “光州虐殺 殺人魔는 大統領이 될 수 없다”며 鬪爭을 呼訴했다. 當時 學生들은 正말 重要한 게 무엇인지 分揀하지 못했고 冷靜해야 할 때 力量을 消盡했다. 그날 以後 나는 한민전 支持者가 됐다. 



    運動은 高度로 組織的이고 意識的인 活動이다. 特히 1980年代 後半~1990年代 初盤의 學生運動은 厖大한 組織을 正確한 時點과 目標 아래 統一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情報의 處理와 合意 過程이 先決돼야 한다. NL系列이 전대협을 結成하고 다른 部門과 政派를 壓倒하게 된 것은 運動 力量을 集中할 수 있는 情報 處理가 可能했기 때문이다. 이를 可能케 한 것이 한민전이다. 

    ‘던바의 數字’라는 게 있다. 生物學的 基準으로 보면 150名 規模의 사람들만 日常的 關係를 維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情報處理에 過負荷가 걸려 關係 設定에 必要한 다양한 情報를 處理할 수 없다. 共同體의 規模는 情報處理 能力에 依해 制限된다. 이를 解決한 것이 宗敎다. 하느님과 같은 絶對者 아래서 모든 사람은 平等하다. 누군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그에 對한 많은 情報를 대충 省略하고 그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인지 確認하면 된다. 卽 하느님에 對한 믿음 與否로 關係設定에 所要되는 情報의 量이 急激히 줄어들어 共同體의 規模가 飛躍的으로 擴大될 수 있는 것이다. 

    1980年代 後半 以來 전대협의 組織 規模와 大衆運動 力量은 相當했다. 1992年 安企部의 分析에 따르면 當時 전대협의 거리 示威 力量은 軍隊를 動員하지 않으면 鎭壓이 不可能한 水準이었다. 아마도 軍隊나 警察과 같은 政府 機構를 빼놓고는 民間 次元에서 그런 程度의 力量을 보인 것은 전대협이 거의 唯一했다.
     
    한민전은 全大協 各級 機構에서 벌어지는 消耗的인 論爭과 다양한 會議를 大幅 줄여 路線의 統一, 行動 方針 樹立에 들어가는 費用을 急激히 낮춰 주었다. 整理하면 1980年代 後半부터 1990年代 中盤까지 學生運動은 전대협이라는 形體를 한민전이라는 소프트웨어가 作動한 時期다.

    赦免된 國家保安法 違反者들의 暗默的 合意

    筆者는 요즘 民主化運動史에 關心을 갖고 있다. 注目할 만한 冊은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 傘下 韓國民主主義硏究所가 펴낸 “韓國民主化運動社3”이다. 2010年에 펴냈고 1980年에서 1990年代 初盤까지의 民主化運動史를 稠密하게 다루고 있다. 冊의 分量만 1000쪽에 達한다. 그러나 이 冊 어디에도 ‘한민전’이라는 單語는 登場하지 않는다. 冊은 學生들이 갖고 있던 思想 側面을 可能한 排除한 채 民主化運動의 展開 過程과 樣相만을 紹介하려는 듯하다. 하지만 度를 넘었다. 이건 신중하고 細心한 配慮라기보다는 歪曲에 가깝다. 

    이런 疑問이 남는다. 왜 한민전이 빠진 걸까? 먼저 國家保安法을 理解할 必要가 있다. 國家保安法은 2個의 레벨로 區分할 수 있다. 첫 番째, 利敵團體 加入이나 고무 讚揚이다. 한총련 代議員이거나 北韓 關聯 冊子를 갖고 있으면 이에 該當한다. 이 境遇라면 連行돼 若干의 調査를 받은 後 裁判에 回附된다. 利敵團體 加入과 鼓舞 讚揚만 있다면 거의 大部分 1審 程度에서 執行猶豫로 풀려난다. 1審 拘束 期限이 6個月 이니 만큼 監獄에 오래 있어야 6個月 程度다. 

    全大協, 한총련 關聯 學生들 大部分이 이런 水準이다. 全大協 1期 議長을 지낸 李仁榮 統一部 長官이 懲役 1年 6個月에 執行猶豫 3年 程度를 받았다. 民主黨에서 學生運動을 했다고 主張하는 政治인 多數도 비슷하다. 전대협 3期 議長 出身 임종석 前 大統領祕書室長이 特異하게 5年 實刑을 宣告받고 3年 6個月 程度 服役했는데, 그건 그가 임수경을 北韓에 派遣했기 때문이다. 

    두 番째는 利敵團體를 組織하거나 北韓과 會合·通信 또는 北韓의 指令을 받고 어떤 活動을 한 境遇다. 민혁당이나 中部地域黨, 구학련이나 자민통 그룹의 責任者級이 여기에 該當한다. 地下黨이나 革命組織의 構成員이라도 末端 聲援이면 亦是 첫 番째에 該當한다. 

    1987年 6·29宣言 以後 順次的으로 大規模 赦免 措置가 斷行됐다. 特히 김대중 政府는 非轉向長期囚들까지 包含해 그 幅을 넓혔다. 1999年 以後 事實上 공안수, 良心囚 問題는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程度다. 이 過程에서 地下黨을 標榜했던 사람들이 刑期를 채우지 않고 社會로 나왔고, 이들도 過去의 活動을 再現할 마음은 없는 듯했다. 

    1980~90年代 國家保安法 違反者 中 2그룹은 1990年代 後半 廣範圍한 赦免 措置로 早期에 社會에 復歸했다. 北韓과 直接 連繫한 活動을 再演하지 않겠다는 暗默的 合意에 기초해 그들의 行跡은 過去의 일로 縫合됐다. 

    問題는 첫 番째 그룹이다. 사람들은 學生運動을 했던 學生들이 젊은시절 한 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은 이들이 政治權에 進出하는 다리 구실을 했고, 金宇中은 學生運動 出身들을 優待해 特別 採用하기도 했다. 時間이 지나 그들 相當數가 社會 指導的인 位置에 서면서 樣相이 달라지기 始作했다. 20代 大學生이라면 別 問題가 아닐 수 있지만 高位 公職者가 되는 狀況이라면 무언가 다른 것이 必要했다.

    民主化 世代 腐敗 徵候 보인 曺國-尹美香 事態

    2020년 7월 23일 이인영 통일부장관 후보자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2020年 7月 23日 李仁榮 統一部長官 候補者가 國會 外交統一委員會 人事聽聞會에서 答辯하고 있다. [뉴시스]

    李仁榮 統一部長官의 國會 人事聽聞會는 이를 잘 보여준다. 脫北 外交官 出身 太永浩 國民의힘 議員의 質問에 李麟榮은 限死코 主思派나 北韓을 追從한 일이 없다고 避해갔다. 李麟榮은 全大協 1期 議長이다. 李仁榮의 말이 맞다면 1980年代 學生運動은 純粹한 民主主義, 統一運動으로 韓國에서 主思派 問題는 아예 存在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첫 番째 그룹은 社會에 進出하는 過程에서 自身들의 過去를 그렇게 處理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런 集團的 隱蔽 過程은 有力 人事뿐만 아니라 그 世代 全體가 默示的으로 合意하고 共同으로 施行했다. 한민전이 歷史의 舞臺에서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世代 全體가 同意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結果 記念事業會의 公式 記錄物, 映畫나 다양한 著作物 等에서, 學生運動圈은 民主化를 熱望하며 苦難에 屈하지 않고 싸우다 가끔 急進的 思想에 傾倒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 지나간 일이라고 主張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그런 試圖에 決定的인 障礙物이 한민전이다. 한민전은 學生運動이 主導한 民主化運動이 北韓과 어떤 聯關을 가지며 進行됐는지 보여주는 象徵的 事例이기 때문이다. 한민전이 끼친 影響은 워낙 廣範圍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虛僞陳述을 하지 않고서는 이를 否認할 方法이 없다. 

    民主化世代는 産業化 世代를 物理的으로 代替하며 우리 社會의 主役으로 떠올랐다. 어느 世代든 功과 科가 있는 法이다. 하지만 나는 2019~20年 曺國-尹美香 事態를 契機로 民主化 世代가 腐敗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民主化 世代와 싸우려면 그들이 自身들 口味에 맞게 再構成한 스토리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한민전은 民主化 世代의 本質을 밝히는 過程에서 가장 먼저 復元해야할 이야기다.


    閔境遇
    ● 1965年 出生
    ● 서울대 國史學科 卒業
    ● 서울대 人文大 學生會長
    ● 祖國統一汎民族聯合 事務處長·進步連帶 政策委員會 副委員長
    ● 著書 : ‘數學 工夫의 再構成’ ‘새로운 保守의 아이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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