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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健熙 會長이 똑같은 洋服 다섯 벌을 가진 까닭[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⑨]|新東亞

李健熙 會長이 똑같은 洋服 다섯 벌을 가진 까닭[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⑨]

  • 허문명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1-03-1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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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時 出勤? 祕書室까지 難色을 表한 ‘7?4題’

    • “쓸데없이 冊床에 오래 앉아 있지 마라”

    • 固定觀念 破壞한 意識改革 運動

    • 몸을 바꿔야 생각이 바뀐다

    • “房에서 化粧室갈 때 最短 코스로 걸어본 거죠”

    • 같은 洋服만 다섯 벌…“어디서든 通하니까”

    이건희 회장이 2014년 반도체 30주년을 맞아 기념 서명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李健熙 會長이 2014年 半導體 30周年을 맞아 記念 署名을 하고 있다. [三星電子 提供]

    革命은 宣言이나 메시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實踐이 있어야 한다. 李健熙 會長이 新經營 宣言의 實踐으로 쏘아올린 信號彈은 前 職員들의 出退勤 時間 조정인 ‘7·4題’(午前 7時 出勤, 午後 4時 退勤)였다. 

    7·4祭는 프랑크푸르트 宣言 直後인 1993年 7月 7日 日本 도쿄 會議에서 떨어진 ‘命令’이었다고 한다. 三星JAPAN 代表理事를 지낸 조용상은 도쿄에서 指示를 내릴 때 現場에 있었다. 

    “會長은 (獨逸) 프랑크푸르트에서부터 생각한 듯했습니다. 그런데 會長의 導入 檢討 指示에 經營陣은 미적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굳이 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或은 ‘導入에 時間이 좀 걸립니다’라면서 말이죠. 그런데 회장은 “不可能한 것이 아니라면 當場 始作해!”라고 指示했고, 電擊的으로 施行됐습니다.” 

    午前 9時 出勤, 저녁 6時 退勤에 맞춰져 있던 職員들의 ‘生體時計’를 갑자기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인가. 아침 時間 10分, 20分 差異가 얼마나 큰가. 當時만 해도 밤늦게까지 事務室에서 남아 일하는 게 模範 社員의 美德으로 여겨지던 時代였다. 그런데 해가 中天에 떠 있는 午後 4時 退勤이라니. 

    조용상의 말처럼 施行過程은 順調롭지 않았다. 오죽하면 祕書室부터 “職員들에게 1時間씩 時間外 手當을 支給하고 있으니 4時 退勤을 5時로 해 달라”고 泣訴(?)했지만 會長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午後 4時로 하되 時間外手當도 그대로 支給하라는 거였다.




    祕書室까지 難色을 表한 7·4題

    박근희 前 三星生命 副會長(現 大韓通運 副會長) 말이다. 

    “어느 날, 祕書室 李鶴洙 財務팀長이 新經營點檢狀況室에 들어서더니 當時 조영철 人事팀長에게 電話를 걸었습니다. ‘7·4制를 施行했느냐’고 묻더라고요. 조 팀長이 아니라고 했는지 이 팀長은 ‘왜 안했느냐? 會長님 指示事項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벼락같이 火를 냈습니다. 이 팀長이 그렇게 火를 내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황영기 前 三星證券 社長은 當時 조영철 人事팀長과 直接 對話를 나눴던 當事者이기도 하다. 그의 말이다. 

    “어느 날 조 팀長이 아주 難處한 表情으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黃 理事, 생각을 좀 해봐요. 仁川 사는 職員들은 아침 7時까지 水原工場에 가야 하는데 그 時間에는 地下鐵이 다니지 않아요. 出勤時間에 맞추려면 全部 通勤 버스를 해줘야 합니다. 會長은 일찍 退勤해 學院가서 工夫하라고 하지만 일찍 退勤하는 사람들이 다 學院으로 간다는 保障이 있습니까. 工場은 또 어떻게 돌립니까. 會長께 愼重하게 檢討해달라다고 말씀드려주세요’라고.” 

    황영기는 苦悶 끝에 會長을 찾아가 “現場의 隘路事項들이 하나둘이 아니니 準備를 좀 한 다음에 했으면 좋겠다”는 意見을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會長은 “조영철이가 그러더냐?” 되묻고 卽刻 조 팀長을 呼出하더니 “會長인 내가 任職員들 생각 바꿔보겠다고 이렇게 努力하고 있는데 人事팀長이 안 되는 理由만 늘어놓는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황영기는 “當身이 내린 措置가 제대로 施行되고 있지 않다는 것에 對한 답답함보다는 新經營을 하겠다는 熱意를 部下 職員들이 몰라주는 것 같아 無知하게 섭섭했던 거 같았다”고 傳했다.


    “쓸데없이 冊床에 오래 앉아 있지 마라”

    왜 李健熙 會長은 改革의 첫 措置로 出退勤 時間을 바꿨을까. 겉보기에는 러시아워를 被害 出退勤에 걸리는 時間을 줄이고, 일찍 退勤해서 自己 啓發에 힘쓰라는 配慮 側面이 있다. 生前의 李 會長 말이다. 

    “저녁 6時 넘어서까지 뭐 하러 會社에 앉아 있나? 4時, 5時에 日課를 끝내고 運動을 하든지, 親舊를 만나든지, 語學 工夫를 더 하든지 해봐라. 家族과 最少 一週日에 두 番 저녁을 먹으면 自然히 家庭的인 사람이 될 것이다. ‘윗사람이 退勤해야 하는데’ 하며 안 나가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職員들이 안 나가면 部署長은 責任을 져야 한다. 이건 當分間 命令이다.” 

    짧은 말이지만 ①윗사람 눈치 보기를 깨라는 귄위主義 打破에 對한 注文 ②自己 啓發에 힘쓰지 않으면 急變하는 時代에 뒤처진다는 人材中心 經營에 對한 意志 ③家庭이 安定돼야 일도 잘할 수 있다는 家庭 重視 經營 意志가 읽히는 메시지다. 

    實際로 李健熙 會長은 7.4題 實施를 ‘T字形 人材’를 키우려고 한 措置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책 ‘생각 좀 하며 世上을 보자’), 故人은 于先 人材 類型을 ‘I’字形과 ‘T’字形으로 나누면서 I姊兄은 한 가지 分野에만 精通하고 다른 分野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T姊兄은 다른 分野까지 폭넓게 알고 있는 綜合的인 思考 能力을 갖춰 産業이 융 複合되는 時代에 더 競爭力이 있을 거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三星이 처음 7.4제라는 破格的인 出退勤 制度를 實施했을 때 다른 企業 職場人들은 勿論이고 우리 任職員들조차 너무 甚하지 않은가 하는 反應을 보였다고 들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느냐‘ ’제대로 지켜지기나 하겠는가‘ 正말 말도 많았다. 一理 있는 反對意見에 부딪히면서 事實 나도 흔들렸지만 여러 疑懼心을 무릅쓰고 本來의 意志대로 强行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社員들에게 自己開發의 時間을 만들어주어야겠다는, 내 나름대로 意志가 確固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自己開發을 强調하는 理由는 모든 사람이 T字形 人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三星이 앞장서서 그 本보기를 보이고 뒤이어 그것이 社會로 擴散되면 그만큼 우리 社會에 T字形 人材가 많아지게 될 것이고 이는 結局 國家競爭力 向上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게 나의 믿음이다.‘

    그가 T字形 人材를 强調하게 된 것에는 나름 背景이 있다. 半導體事業 初期에 美國에서 博士學位를 받은 사람들을 큰 돈을 들여 大擧 迎入해 任員자리에 앉혔지만 自己 分野에만 沒頭해온 스페셜리스트이다 보니 綜合的인 想像力이 不足하고 自己 일에만 充實한 傾向이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任員級들이라면 立體的이고 綜合的인 眼目을 가진 人材가 鎭靜 企業에 必要하다는 것을 切感한 會長은 줄곧 74制를 ‘T'字形 人材를 키우는 人材育成 戰略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7·4制에는 보다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三星에서 30年 以上 人事專門家로 活躍한 노인식 前 삼성경제연구소 人的資源開發擔當 社長은 “趣旨의 本質은 일하는 方式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出退勤 時間을 바꾸자는 게 아니었다는 걸 逆說的으로 7·4制를 廢止하자고 建議할 때 느꼈다”며 이렇게 回顧한다. 

    “時間이 지나면서 制度 改善에 對한 要求가 높아졌지만 누구도 敢히 建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熟議 끝에 結局 ‘導入 10年 程度 됐으니 좀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했더니 會長은 意外로 너무나 쉽게 ‘누가 바꾸지 말라고 그랬나’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7·4制의 本뜻은 8時間만 제대로 일하자는 거였다, 쓸데없이 오래 앉아 있는 게 일 잘 하는 것처럼 보는 慣行을 없애자는 말이었다. 몇 時 出退勤이 뭐가 대수인가. 肥效率과 浪費를 없앨 수 있다면 廢止하라’고 하셨죠.” 

    盧 前 社長에 따르면 會長의 ‘勤務 效率’ 强調는 그 뒤 週 5日勤務制 導入으로도 繼續됐다고 한다. 

    “政府가 推進한 週 5日勤務制 施行을 1年 앞두고 關聯 報告를 드렸더니 ’내가 平素 늘 하던 얘기 아니었나, 제대로 일하고 제대로 놀아라. 바로 施行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三星은 法으로 施行되기 1年 前부터 週 5日勤務制를 施行했습니다.”


    몸을 바꿔야 생각이 바뀐다

    1994년 11월 2일 삼성전자 기흥공장을 방문한 리펑 당시 중국총리(왼쪽에서 세 번째)와 반도체 설비에 대해 설명을 듣는 이건희 회장. [동아DB]

    1994年 11月 2日 삼성전자 鬐興工場을 訪問한 리펑 當時 中國總理(왼쪽에서 세 番째)와 半導體 設備에 對해 說明을 듣는 李健熙 會長. [東亞DB]

    7·4祭는 조용상의 말처럼 意識改革 運動이었다. 固定觀念 破壞라는 剛한 衝擊波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當時만 해도 全 職員의 出退勤 時間을 바꾸겠다는 發想이나 實踐은 韓國은 勿論 世界 企業 文化에서도 보기 드문 破格이었다. 

    李健熙 會長은 1993年 LA, 프랑크푸르트, 도쿄, 오사카 海外 會議를 통해 三星 任職員 1800名과 350時間 對話했다. 이때 만난 사람들은 大多數가 任員級이었다. 會長은 自身의 改革 宣言이 맨 밑바닥 職員들에게까지 傳播돼야 한다고 생각해 社內 放送을 통해 隨時로 育成을 들려주게 했다. 하지만 사람이 바뀌려면 머리가 아닌 마음이 바뀌어야 하고, 마음을 바꾸려면 몸이 바뀌어야 하는데 가장 劇的인 方法으로 生體리듬을 바꾸는 일인 出退勤 時間 調整을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는 제일기획 社長을 지낸 배종렬의 말에서 確認된다. 그는 祕書室 弘報팀長을 지내며 이 會長이 副會長으로 經營에 參與하던 時節부터 參謀 役割을 했다. 會長의 意中을 第一 잘 아는 三星맨 中 하나로 꼽힌다. 그의 말이다. 

    “會長은 新經營 以後 當身의 意志가 社長團에게만 傳播돼서는 안 되고 18萬 全 職員들에게 傳達돼야 三星이 變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物理的으로 사람의 精神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하신 것 같고, 그런 背景下에서 7·4제라는 것이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사람이 1時間 잠을 덜 자고 아침에 ’팍팍‘ 일어난다는 게 無知無知 괴롭다는 것을 아신 거죠. 몸을 비틀게 만들어 精神 改革을 해야 되겠다 해서 始作한 게 7·4제라고 할 수 있지요.” 

    2005年 出刊된 冊 ‘世界 最强企業 三星이 두렵다’는 ‘이웃 나라 韓國에서 三星 같은 世界的 企業이 誕生했다는 것을 大部分 모르거나 無視하는 日本人들을 向해 警鐘을 울리겠다’는 趣旨로 日本人들(日本디베이트硏究協會)이 처음 펴낸 三星 分析 報告書다. 冊 93쪽에는 ‘7·4制의 衝擊, 日本이 흉내 낼 수 없는 革命的 勤務 態勢’라는 題目으로 이 制度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 成功했다며 이렇게 적고 있다. 

    “平素보다 1時間 30分이나 빨리 出勤하고 午後 4時에는 일을 마쳐야 한다는 指示는 日本에서는 도무지 常識的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內容이다. 普通 日本 企業의 勤務時間은 아침 9時부터 午後 5時 半頃까지다. 밤늦게까지 殘業을 하는 것이 ‘熱心히 일하는 寺院’이나 ‘能力 있는 寺院’의 本보기처럼 돼 있다. 이런 狀態에서 7·4制를 하자고 하면 社員들의 猛烈한 反對에 부딪힐 것이다. 勞組도 反對할 것이다…(중략)…20만 三星의 모든 社員은 두 時間 가까이 빨리 出勤하는 것으로, 世界 第一의 企業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李健熙의 覺悟를 實感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따르겠다는 決意로 가득 찼을 것이다. 李健熙의 뜻이 社員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이 浸透한 것이다. 7·4制로 三星 그룹은 하나가 된 것이다…(중략)…인간의 精神을 根本的으로 바꾸는 데 成功했다.”


    7·4制가 남긴 것

    1993年 李會長의 新經營 宣言 當時 삼성그룹을 出入하던 筆者는 7·4題 가 實施됐을 때의 職員들의 衝擊的이고 荒唐해하던 反應을 記憶하고 있다. 初期에는 出勤 時間만 빨라졌지 退勤時間은 그대로인 狀況이 이어지면서 反撥心도 컸었다. 하지만 앞서 著者들의 말처럼 7·4祭는 職員들을 하나로 묶었다. 受容이든 批判이든 모두들 모였다하면 會長에 對해 이야기를 나눴다. ‘都大體 왜 이런 破格的인 措置를 했을까’라는 質問을 던지곤 했다. 돌이켜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變化의 씨앗들이 浸透하는 過程이었다. 

    나중에 7·4制가 廢止된 것을 두고 世間에서는 ‘失敗로 끝난 實驗’이라는 評價를 하기도 했지만, 維持냐 廢止냐는 別로 重要한 것이 아니었다. 리더의 革新을 向한 剛한 意志와 熱情을 職員들이 몸으로 느꼈느냐, 아니냐의 問題였기 때문이다. 

    다시 조용상의 말이다. 

    “7·4祭는 勤勉 誠實이 最高의 美德이던 時節 效率을 强調했다는 點에서 대단히 革新的인 制度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單純하고 아주 簡單해 보이지만, 會長이 한 여러 일 中에 매우 重要한 ‘스타트’로서 象徵的 意味가 있었습니다. 萬若 그때 導入을 늦추거나 失敗했다면 以後 여러 革新的인 프로세스는 三星에 安着하지 못했을 겁니다. 7·4制를 始作으로 三星의 生活 패턴부터 모든 것이 바뀌어갔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會長이 生前에 가졌던 時間에 對한 槪念을 紹介할까 한다. 그의 冊 ‘생각 좀 하며 世上을 보자’에 나오는 ‘時間 競爭力’이란 題目의 글에서는 時間에 對한 觀念도 未來志向的으로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一部 대목을 옮겨본다. 

    “情報化時代가 다가오면서 詩, 分, 秒 單位는 그대로지만 주어진 時間 안에 必要한 活動을 하지 않으면 機會를 잃고 마는 時代가 됐다. 經營컨설팅, 法律 咨文은 時間 單位로 價格이 매겨지고 證券 및 先物去來는 刹那에 價格이 바뀐다. 時間의 價値가 劇的으로 커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秒 單位 時間 槪念도 意味가 없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이미 컴퓨터의 性能을 比較할 때는 10億分의 1秒인 나노(nano)秒를 다투는 時代가 展開되고 있지 않은가…(중략)…과거 企業 競爭이 價格과 品質 競爭이었다면 앞으로는 時間 競爭力이 勝負를 左右할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 時間 單位가 갖는 價値가 漸漸 높아지기 때문에 顧客이 願하는 바를 競爭業體보다 빨리 만족시켜 주는 쪽이 優位에 서게 되는 것이다.” 

    只今은 故人이 살았던 時節에 비해 時間에 漸漸 더 加速度가 붙는 느낌이다. 果然 우리는 故人의 말대로 時間을 잘 쓰고 있는가. 몸과 意識, 生活에 군살이나 거품, 肥效率은 없는가. 

    李 會長은 生前에 披瀝한 時間 槪念을 ‘20分 精神’이란 單語로 披瀝한 적도 있다.


    ‘20分 精神’, 같은 洋服 다섯 벌

    “日本에선 8時에 일을 始作한다고 하면 全員이 8時 10分 前에 온다. 美國人들은 8時에서 8時 5分에 온다. 韓國人들은 8時 正刻이나 플러스마이너스 1分에 온다. 이게 國民性의 差異다. 日本 사람들은 10分 前에 와서 電話機, 팩스 이런 거 닦고 書類 整頓한다. 하루 일이 끝나면 10分 동안 남아서 機械 닦고 整頓하고 간다. 이 ‘20分’李 精神的으로 엄청난 役割을 한다. 하루 8時間 일을 하는데 不良率을 없애주고 生産性을 높여주는 것이다. 이런 精神은 計算으로는 안 나오지만 ‘時間’은 物理的으로 計算할 수 있다. 三星 全體 職員이 18萬 名인데 이 사람들이 하루 20分間을 準備해와 마무리한다고 할 때 1年間 7000名을 雇用한 效果와 같아진다. 人件費로 따지면 1000億 원이 된다. 18萬 名에 1000億이 나오니 4000萬 名이면 얼마겠나? 精神을 돈으로 따질 수 없지만 이렇게 따질 수 있는 돈만도 얼마인가?” 

    生前에 會長이 한 인터뷰 記事들을 읽다 보면 그가 私生活에서도 時間을 무척 아끼고 작은 일에서도 效率을 追求했던 逸話들이 눈에 띈다. 1989年 12月號 ‘월간조선’과의 인터뷰 中 “大學 때 工夫를 좀 했느냐”는 質問에 한 答辯은 이렇다. 

    “工夫에는 正말 趣味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落第 點數에서 10% 程度 올리는 노하우가 있잖습니까. 그것도 技術이지요. 어떤 科目 敎授가 어떤 問題를 낼 거라는 ‘探知戰’을 벌인 거였죠. 工夫를 熱心히 안 하고도 生存해 온 그 노하우 自體도 事業에 連結 되고 있지 않나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젊은 사람들한테 하면 해가 될지 모르지만, 結局 工夫란 것도 적게 하면서 效率을 많이 내는 方法을 찾아야지요. 전 그건 正말 徹底합니다.” 

    祕訣이 뭐냐는 質問에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科目을 먼저 受講한 學生들한테 ‘過去 2年間 試驗紙 좀 내놔 봐라’ 해서 工夫합니다. 그럼 80% 以上 들어맞죠.” 

    한마디로 旣出問題 中心으로 工夫를 했다는 거다. 率直한 答辯에 슬며시 웃음이 나오면서도 ‘工夫를 熱心히 안 하고도 生存한 노하우가 事業과도 連結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는 대목에서는 每事를 企業 經營과 連結하는 企業家的 DNA도 느껴진다. 

    李 會長은 입는 옷에 對해서도 ‘效率’을 追求했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왜 늘 같은 옷(검은 洋服)만 입느냐”는 質問에 “只今 입고 있는 옷하고 똑같은 게 다섯 罰이 있다. 이런 服裝(검은 바탕에 보일 듯 말 듯한 줄무늬가 있는 洋服)은 어디서든 통하지 않느냐. 商家(喪家)에서도 통하고 結婚式에 가도 통하고”라고 答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페이스북 創業者 마크 저커버그가 옷欌에 후드 帽子가 달린 티셔츠만 죽 늘어놓고 있는 모습이나 애플 創業者 스티브 잡스가 靑바지에 검은 色 스웨터만 입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에너지를 最大限 아껴서 日常生活에서 極端的인 效率을 追求하겠다는 마인드가 읽힌다. 李 會長은 私生活에서도 時間을 極度로 아끼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價値가 없는 데에는 可及的 時間을 虛費하지 않기 위해 最大限 努力하고 있습니다. 例를 들면 房에서 化粧室에 갈 때에 最短 코스로 걸어본다든지 하는 거지요.”(월간조선 2000年 7月號)

    그가 쓴 에세이에는 直接 적은 이런 逸話도 있다.

    “몇 年 前 나는 三星本館 28層에 있는 내 事務室에서 아래層 職員들 事務室까지 걸으면서 移動 時間을 재보고 가장 빠른 코스가 어디인지를 찾아 본 적이 있었다. 또 어떻게 하면 더 便利하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서랍에 달린 손잡이 位置를 옮겨 보기도 하고 家口 配置를 바꿔 보기도 했다.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할 일도 없군, 그런 것에 關心을 갖고 쓸데없이 時間을 浪費하다니’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하면서 不必要한 時間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空間을 最大로 活用하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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